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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의 하루 ㅣ 난 책읽기가 좋아
이토우 히로시 글 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2003년 9월
평점 :
책을 읽으면 잠이 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일까. 어쩌면 문자를 볼 때 뇌에서는 어떤 특수한 호르몬이 나와서 졸음이 솔솔 오게끔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상상일 뿐일까? 아니다, 지루한 상황에서 잠이 오는 것은 진정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농담따먹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요즘 아이를 재우기 전 책을 읽어주는 버릇을 들였다. 하루에 읽어주는 양은 2권. 잠시 딴길로 새자면, 인터넷에 무슨무슨 닷컴이라는 곳이 있는데, 아이를 천재로 키우려는 엄마아빠들이 우글우글거리는 곳이라고 한다. 거기 드나드는 엄마들은 하루에 아이에게 책을 서른권씩 읽어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는 언니들이랑 아이에게 책 읽어주는 얘기를 하다가, 어느 지각있는 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이에게 책을 매일 한권씩 읽어주면 좋은 엄마이고, 다섯 권씩 읽어주면 대단한 엄마다. 하지만 서른권씩 읽어준다면...무서운 엄마 아닌가" 그리고 이어지는 진짜로 무서운 이야기 한 토막. 그 무슨무슨 닷컴의 어느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책을 너무 많이 읽어주다가 그만... 성대에 이상이 생겨 목 수술을 했다나. 이거야말로 엽기스토리 아니겠슴둥?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것은 과연 좋은 일일까? 좋은 일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무엇에 좋다는 것일까? 나로 말하자면-- 그다지, 대단한 엄마는 아닐 수 밖에. 좋은 엄마냐고 묻는다면 '당근 빠따'다. 우리 아이에게 엄마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는 나를 좋아한다. 고로 나는 좋은 엄마다 -_-;;
대단치 못한 이 엄마는 그리하여 아이에게 하루에 2권씩, 침대에 누워 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매우매우 단순하다. 나는 아이에게 어떤 책을 보여주느냐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책은 공기 같은 것이다. 공기 중에는 질소가 78%, 산소가 20%, 아르곤 등등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아이에게 산소만 골라 숨쉬도록 할 수 없듯이, '좋은 것'만 뭐든지 골라서 해줄 수는 없고 해줄 필요도 없으며 해줘서도 안 된다고 본다. 대단치 못한 엄마의 궤변은 이하 생략.
책을 고르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크기'. 아이들 그림책이 100이면 99권은 하드커버이고, 페이지 수는 몇 안 되지만 꽤 무겁다. 누워서 내가 들고 읽어줘야 하니 크기가 작은 것일수록 좋다. 선배 언니에게서 두 박스나 선물받은 그림책들 중에 부피가 큰 것들은 골방 책꽂이에 넣어두고, 작은 것들 순서로 골랐다. 그렇게 엄선;;의 과정을 거쳐 머리맡 전등 옆에 한 자리 차지하게 된 것이 이 원숭이 시리즈였다. 그리고 읽으면서 기분 좋아 죽을 뻔했다.
그림책이지만 그림은 우습다. 거의 텅 빈 하얀 종이, 가늘고 검은 선으로 지지직 그린 듯한 펜터치. 남쪽 나라 작은 섬에 원숭이가 살았습니다. 원숭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오줌싸고 먹고 놀다가 잠들고, 다음날 일어나면 오줌싸고 먹고 놀다가 잠들고, 그 다음날에도 일어나서 오줌싸고 먹고 놀다가 잠들고, 또 그 다음날에도 일어나서 오줌싸고 먹고 놀다가 잠들었는데, 그 다음날에는... 여느 날과 달랐다! 거북이 할아버지가 수평선 저멀리에서 모자같은 등짝을 동동 띄우며 바닷가로 왔던 날, 원숭이들은 모두 몰려가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보따리가 풀리기만을 기다린다.
이렇게 단순미묘오묘한 줄거리가 흘러가는 과정이 의외로 재밌다. 심지어는 긴장되기까지... 요녀석들이 뭣때문에 일-오-먹-자는 생활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바닷가로 뛰어갈까? 동동동, 저건 뭐야, 거북이가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두둥~
책의 마지막 부분은 진짜 별미다. 어린 원숭이와 늙은 거북이의 우정은 다만 손짓 하나로 이어지지만 그것은 곧 우정의 모든 것이다. 이들은 인류가 아니니 인류애라 할 수는 없겠고, 사실 뭐 그렇게 거창한 해석을 붙일 이유도 없다. 그냥 마음이 따끈따끈해지는 기분.
참 좋았다. 같은 작가의 '원숭이는 원숭이', '원숭이 동생' 모두 좋았다. 철학이 있는 동화라는 설명이 책 어느 부분인가에 들어있는데, 그냥 보면서 마음 따뜻한 기분만 느끼면 될 것 같다. 아이야, 원숭이 책 읽고 꿈나라가서 쌔근쌔근 철학을 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