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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 2003년 5월 4일(일요일) 오전 7시- 오후 6시(약 11시간)
참가자 : 10명참가 9명 종주 성공

          
통일산악회에서 참가하기로 한 인원은 달랑 3명, 약속장소인 석봉리에 도착해 보니 참산에서는 무려 7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산지점인 황적봉 밑 삐까삐까(까페이름)에 차를 갖다두고 출발한 시간은 정확히 7시 5분, 온통 모텔 공사로 어수선한 출발지점의 분위기를 뒤로 하고, 약간 힘들다 싶을 정도의 경사를 타고 1시간여 남짓 올라가니 어느덧 장군봉이다. 장군봉에서 서서 맞은편 황적봉을 쳐다보니 자연스럽게 한숨이 절로 나온다....언제 저기까지 가나,,,,또 한편 아래를 쳐다보니 마치 암세포 같이 산기슭까지 쳐들어 온 모텔들로 인해 여간 기분이 씁쓸해 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썩을............
어쨋든 며칠전에 다리를 삐끗해서 약간 쳐진 김모회원을 뒤로 하고 다들 씩씩하게  남매탑까지의 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짧게 교차하면서 간간히 왼쪽으로 보이는 탁트인 전망이 산행의 피로를 씻어주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산행길이었다. 다들 입으로는 힘들다고 하면서 조금도 쳐지지 않고 따라붙는 걸 보면 상당한 내공을 지닌 꾼들임을 직감한다.
남매탑에서 쳐진 회원일행을 기다리니 이재화대장과 김승식선배가 금방 따라붙었다. 김모회원은 아무래도 다친 다리가 힘들 것 같아 도중에 하산했다고 한다.... 이런 벌써 탈락자가.......어쨋든 남매탑옆 절에서 물을 가득 채우고 다시 출발!!
이제까지의 호젓한 산행과는 달리 본격적인 계룡산 "국립공원"안에서의 산행인지라 붐비는 등산객들과 계속되는 경사진 돌담길은 산행을 2배정도는 피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삼불봉에서 관음봉까지의 쉬지않고 내친 1시간여의 자연성능 종주에 비하면 이제까지의 산행은 준비운동에 불과하지 않았나 싶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선두에 서신 김선건의장님의 체력은 거의 놀라움 그자체다......
관음봉 정자밑에서 가픈 숨을 돌리고  이제는 점심을 고민해야 되는 시간 12시 20분경, 참산회원들만이 알고 있다는 '알봉'에서의 점심식사는 계룡산종주의 또다른 하이라이트였다.  어떻게 그런 자리를 알았나 싶을 정도로 아늑한 자리와 딩게장(맞나?)외에 전혀예상못한 반찬들........(여기에 적지못한 아쉬움을 이해바란다.다만 단백질 보충정도로 이해 바람, 꼭 알고 싶으면 다음 참산 산행때 참가해 보기바람)
배불리 점심을 먹고 다시 산행시작!! 사실 다른때 같으면 거의 하산완료시간때인데..
후반전 산행은 쌀개봉 암벽에 밧줄이 없어짐으로 인해 초반부터 어려움에 직면했다.
일부는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가운데 난데없는 암벽등반이 이루어 졌다. 타는사람이야 어땠는지 모르지만 밑에서 지켜보는 사람 눈에는 아슬아슬 그 자체....어쨋든 전원 무사히 등반한 가운데 이제 멀리 보이는 희멀건한 암벽과 둥그스럼한 황적봉이 이 산행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얘기해 주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황적봉코스는 삐까삐까쪽에서만 3-4번 해왔는지라 반대방향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암벽등반도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것도 처음....예상만큼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체력이 소진되어 감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초코렛 몇개 준비해온 나의 보충식 준비를 부끄럽게 만들만큼 참산의 보충식은 환상적이었다. 육포,오이,황도깡통,게다가 산행 거의 마지막까지 시원한 얼음물을 마실 수 있었던 건 이번 산행을 성공으로 이끈 일등공신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어쨋든 이번 봉우리만.....이번 봉우리만.....하고 작은 봉우리 3-4개를 넘기고 황적봉에 올라가니 시간은 5시 남짓...장군봉부터 우리가 지나온 봉우리를 눈으로 훍으니 정말 감개가 무량하다.우리가 정말 저 많은 산봉우리를 거쳐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빠른 걸음으로 하산길을 재촉해서 하산지점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6시 3분....장장11시간의 대장정이 끝난 것이다. 종주를 3번이나 하신 김선건의장님께서는 이제까지 종주를 12시간 이내에 끝낸적이 한번도 없으셨고,종주를 끝내고 나면 거의 파김치상태였는데, 체력도 이번 산행이 가장 가뿐하다고, 정말 놀랍다고 하신다.
아마도 그동안 의장님이 강조한 좋은 산행을 위한 3가지 조건- 코스, 날씨, 같이 산행하는 사람-이 환상적으로 잘 맞아 떨어진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뒷풀이에서 가을쯤에 참산과 통산의 동반산행과, 매년 1회씩 종주를 하자는 소박한(?) 약속을 막걸리잔에 맹세하고 길고긴 산행을 맺음 지었다.

산행후기를 제가 쓴다고 확답은 하지 않았는데 산행날의 분위기는 다들 막내인 제가 당연히 쓰는 걸루 알았다니.....어쨋든 늦어서 죄송합니다.
지금은 모처럼의 장기연휴(8,9,10,11)를 맞아 처가가 있는 합덕의 구석진 pc방에서 부랴부랴 산행기를 올립니다. 산행이 길어서 그런지 주절주절 무지 길어졌고  다시한번 읽어보니 봄날의 계룡산 정취는 한군데도 없는 넘 삭막한 산행기가 되어버렸네요^^ 원체 인간자체가 건조한 인간이라, 이해 하시고 한참 있다 쓰는 거라 혹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을 지 모르니 댓글 달아서 정정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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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7-02-0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는 한달에 1-2번 5년 넘게 등산을 했었는데 이제는 먼 추억이 되어 버렸다...3월부터 다시 시작할려고 하는데...5-6월쯤에는 다시 종주도 해봤으면 좋겠다...
 

내 신통치 않은 기억으로도 생각이 나는데 아마 1980년대 중반 중학교 때 정도였던 것 같다.
그즈음 한참 TV뉴스시간만 되면 일본 정부가 실시했던 ‘외국인 지문 날인제도’를 거부하는 피켓시위나 기자회견 따위의 장면들이 자주 나왔던 적이 있었다.
뭐 특별한 사회적 문제의식이라곤 당연히 없었던 시절이었고, 수학시간만 되면 그날의 주번이 누구인지, 요일, 날짜 등을 치밀하게 계산해서 자리 잡는 것 따위에 온 정열을 쏟았던 복지부동, 무사안일의 청소년기였기에, ‘외국인 지문 날인제도’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담임선생님이 외국인을 범죄인 취급하며 지문을 등록하는 아주 악랄한 제도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차별받는 재일동포의 현실에 설움이 아주 잠깐 복받쳐 왔고, 그때 당시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C8 역시 쪽00다운 짓이야!”라는 말을 뱉으며 아주 잠깐 극렬한 반일 감정을 지닌 민족주의자로 변하곤 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했듯이 만17세가 되어 나도 동사무소에 가서 주사 아저씨의 친절한 설명에 따라 열손가락을 전부 다 '지문날인’을 하고 그 당시까지는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했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예비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말았다.
솔직히 그때 당시야 성인인증을 받았다는 희열에 우쭐함까지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피켓시위를 하던 아저씨 아줌마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지문 날인제도’의 부당함을 설명하셨던 선생님도 열손가락, 특히 엄지손가락은 180도 돌려가며 확실하게 지문 날인을 하며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텐데,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그 엄청난 자신감과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
계속적인 반대 운동 때문에 1999년에 일본정부는 ‘외국인 지문날인제도’를 완전 폐지했지만 그 이전 그래도 현해탄 넘어 간간히 들리는 폐지요구에 대해 혹 이렇게 대응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우리는 엄지손가락만 한다...”

일본 도쿄 중심가의 황궁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쿄돔 야구장의 2배크기로 1869년 메이지 천황시절 황군의 혼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국가 신사로 지어졌으며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진 무진전쟁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11개 전쟁 전몰자 중 총 246만여명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 곳의 정문을 들어서면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이 서 있으며 그 오른쪽으로는 가미가제 돌격대원의 동상, 야마토(大和) 전함의 포탄, 군마(軍馬), 군견(軍犬)의 위령탑 등이 즐비해 있으며 그 뒤쪽으로는 “군인칙유(천황이 내린 제국 군인의 덕목) 비석과 유슈칸(遊就館)이라는 일종의 전쟁박물관도 볼 수 있다고 하니 특히 한국 사람으로서는 간담이 서늘해 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겠다.

이쯤 되면 대강 짐작을 했겠지만 이곳은 그 유명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설명이다.
이 곳이 동북아 주변국의 집중적인 관심을 끈 시점은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1970년 후반 이후라고 하는데, 그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가 일본의 침략전쟁 정당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주변국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신사참배는 한동안 중단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1년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꾸준히 신사참배를 강행하고 있어 주변국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서춘은 매일신보와 각종 잡지에 친일 논조를 주장하고 친일잡지 ‘태양’을 만든 대표적인 친일언론인이었고 김창룡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잡았던 일제관동군출신으로 백범 김구선생 암살의 명백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시대는 좀 다르지만 유학성은 12.12쿠데타의 핵심인물로 1997년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모의 참여등의 죄목으로 6년 실형을 선고 받았지만 대법원 확정판결 2주전에, 끝까지 운 좋게도 죽고 만다.(그 외에도 공통점이 있는 인물들이 제법 있지만 지면상 이 세 사람만 거론하겠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국립묘지에 묻혀있다는 것인데, 연관된 또 하나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어떻게든 국립묘지에서 파 낼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서춘의 묘는 독립유공자 서훈취소 8년만인 2004년에야 파냈다.)
일본의 정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한반도 일제 강점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후안무치(厚顔無恥-얼굴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한 행위임에 틀림없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광복 60주년을 코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일본 고위관료들에 의해 여전히 무슨 월별행사처럼 침략전쟁 정당화 발언과 위안부 등에 대한 망언이 터져 나오는 참담한 현실 앞에 우리는 놓여있다
국립묘지(國立墓地)란, 나라(國)에서 세운(立) 묘지를 말한다.
이미 누더기법이 돼 버린 ‘친일진상규명법’은 둘째 치고라도 친일파와 내란죄로 유죄를 받은 자를 국립묘지에 눕혀놓고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는 우리의 자화상은 왠지 서글프기까지 하다.
오히려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대한 ‘확신범적인’ 당당한 태도는 우리가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확신에 찬 의구심을 가져본다.
마지막 임시정부요인이셨던 조경한 선생은 1993년 임종에 앞서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로 바뀌어 함께 묻혀있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라에서 세운 국립묘지에 나라 팔아먹은 자와 반란 가담자가 버젓이 누워있는 신비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의 현대사가 질곡의 순간마다 파내야 될 것을 파내지 못한 ‘삽질’의 역사였기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광복 60주년을 맞는 이 즈음 위정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국립묘지에다가 제대로 된 삽질 한번만이라도 해주길...
(대전충남 민언련 기고글 2005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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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려던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에 대해서 학생들이 반대시위를 벌였던 문제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대학 내에서는 혼란이 가시질 않는 모양이다.

사태 직후 보직교수들의 총사퇴와 시위 주동학생들의 징계논의, 그리고 보직교수들의 사퇴반려 결정 등이 연이어 나오는 가운데 ‘총학 없는 평화고대’라는 학생단체에서는 “총학생회가 폭력시위로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총학생회 탄핵안을 학생대표자 회의에 부쳤다고 한다. 탄핵안은 19일 밤 장시간의 대표자회의 끝에 부결되었지만 학교당국 측에서는 여전히 주동학생들의 징계수위를 고심하고 있다고 하니 사건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여느 사건의 경우처럼 이번 사건도 보수언론과 극성 네티즌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의 수순을 밟은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사태 후 상대적으로 ‘차분했던’ 언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애초 학생들의 계획은 학위 수여식장의 레드 카펫 옆에서 평화적인 피켓시위를 하려고 했지만, 이건희 회장이 기습적으로 뒷문으로 나가고 셔터를 강제로 내리는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으며, 더구나 학교 당국에서 같은 학생 신분인 체육학과 학생들을 시위대 앞에 배치함으로써 인해 시위학생들을 자극시켰다는 것이다. 같은 학교 체육학과 학생들을 시위대 앞에 배치한 고려대의 발상은 정말 지극히 ‘삼성스러운’ 발상이 아닌가?

그럼에도 앞뒤 살피지 않고 침소봉대하는 언론과 보직교수들의 사표를 받으면서까지 폭력학생 운운하는 고려대 당국의 처사를 보면서 나와 같은 세대들이 ‘91년의 외국어대학교 정원식 총리 밀가루 투척사건’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일까?
91년 정원식총리의 밀가루 투척사건의 제대로 된 정황은 둘째 치고 사건직후 그 당시 언론이 보여줬던 행태는 그야말로 가관 그 자체였다.

우선 TV 방송은 그날 밤(혹은 그 다음날) 즉시 정규방송 대신에 “우리교육 이대로 좋은가”류의 토론 프로그램을 긴급 편성했다. 콧수염 단 김모 교수 등의 보수 우익인사를 출연시켜 학생들을 패륜아 취급하는 코미디를 연출했으며, 주요 일간지에는 ‘一人之下 萬人之上에게 어찌 그런.......’ 류의 제목이 일제히 1면을 장식했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이미 총리를 “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비유했으니 행정수도 헌법소원 결정문에서 ‘경국대전’을 언급한 것이 뭐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언론의 이러한 대단한 활약으로 극도로 위축된 학생운동권의 시위는 거짓말 같이 사라지고 당시 분신정국으로 위기에 몰려있던 집권 민자당은 얼마 후 벌어진 지자체 선거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번 ‘고대사태’는 91년의 경우와는 여러 방면에서 크게 다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무책임한 언론과 ‘고대학생 삼성 취업 다했네...’와 같은 저급한 논리를 재생산 해내는 네티즌의 시각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10여전의 언론과 다르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매년 엄청난 매출을 올리는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주도적 기업 총수에게 명예 철학박사 학위 하나 주는 것이 아까워서 학생들이 반대 시위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삼성은 광고의 이미지에 나오는 것처럼 3세계의 지뢰를 제거하고 멀리 중국의 황사 방지숲까지 무상으로 조성하는 오지랖 넓은 초다국적 기업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 많은 계열사 중 어느 한곳도 노조를 허용하지 않고 무노조 신화를 고수 하고 있는 무지막지한 기업이기도 하다.

노조를 만들다 퇴직당한 노동자의 회사 앞 시위를 막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회사 앞에 빽빽하게 나무를 심어 시위자체를 못하게 한다든가 노조 설립 노동자에게 휴대폰 위치추적을 했다는 명백한 의혹(?)까지 받고 있는 것 또한 바로 삼성인 것이다.

휴대폰 위치 추적으로 노조설립에 관계한 노동자를 감시했다며 삼성관계자들을 고소한 김성환 삼성 일반노조 위원장은 오히려 지금 감옥에 있다고 한다. 검찰의 증거 불충분 사유로 인한 무혐의 결정 후 곧바로 법원이 김씨에게 삼성측이 고발한 명예훼손죄에 관하여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건희 회장의 박사학위 수여를 저지한 사건보다 더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이 적반하장의 뉴스거리를 주요 언론에서는 철저하게 외면해 왔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현 정권에 대해서는 융단폭격식 공격을 가하는 주요 언론들이지만, 살벌한 자본주의 논리아래서 국내 최대 광고주에게 쓴소리를 뱉어내기에는 여전히 언론의 힘은 미약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대전충남 민언련 회보 기고글 2005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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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쯤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지역의 통일운동 단체에서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시작할 때는 특별히 통일운동에 대해 거창한 사명의식 같은 건 없었고, 학교를 그만둔다는 정보(?)를 입수한 선배의 집요한 설득에 넘어가 시작한 이른바 첫 직장생활이었다.

학생운동 할 때의 얄팍한 능력을 가지고 뛰어든 운동판이었으니 힘들고 어려웠던 건 사실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사회에 나와 통일운동을 한다는 내 나름대로의 뿌듯함은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고향출신의 음악가란 사실만 알고 있었던 ‘윤이상’선생님이 현대음악계의 거장으로서 ‘동백림’사건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흥분시켰다.

비교대상은 될 수 없었지만 같은 고향이란 점과 통일운동의 끈으로 윤이상 선생님과 내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지역의 보잘 것 없는 활동가였던 나에게는 큰 위안이었고 자랑거리였다.


얼마전 국정원에서는 민청학련, 인혁당사건, 등과 함께 윤이상, 이응노화백 등이 연루된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도 과거 의혹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진실위원회의 우선 조사대상으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

매년 이맘때 윤이상 선생의 음악세계를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는 윤이상 선생님의 타계 10주년을 맞아 ‘Memory'란 주제를 가지고 3월 17일부터 그의 정신적인 고향 통영에서 열린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정,재계와 학계, 문화계의 유력인사들이 발기한 ‘윤이상 평화재단’도 공식 출범해 그를 기리는 다양한 사업을 벌인다고 하며, 윤이상 선생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도 곧 만들어진다고 하니 10년이란 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련의 행사를 지켜보면서도 왠지 허전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 것은 왜일까?


윤이상 선생님은 살아생전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올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1994년, 그가 동백림 사건으로 강제추방된지 25년만에 서울, 광주, 부산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리고 윤이상 선생님도 김영삼 문민정부에 기대를 걸고 입국을 허가해 달라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정부는 선생님께 과거에 대한 반성과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했고 오히려 명예회복 차원에서 고국입국을 준비했던 윤이상 선생은 당연히 각서를 거부하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그리고 일년후인 95년 11월 4일 고향 통영의 푸른 바다를 베를린 자택에 걸린 사진으로 밖에 보지 못하고 “내 고향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독일”이란 비통한 말씀을 남기고, 고향 통영에서 가져온 한줌의 흙과 함께 독일 베를린에 영원히 잠들고 만다.


국정원의 과거사 진상규명에서 동백림사건이 우선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늦게나마 잘된 것이지만 40여년이 흐른 세월속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대해서는 사뭇 걱정이 앞서는 것은 기우일까?

윤이상 평화재단측의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남한에서 윤이상선생님에 대한 민간차원의 다양한 행사와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윤이상선생님은 거의 명예회복을 이룬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명예회복이었다면 윤이상선생님은 1994년에 이미 남한에 들어왔을 것이다. 윤이상 선생님은 생전 한반도의 휴전선 남쪽을 제외하고는 세계음악계에서 현존하는 6대 현대음악가로 인정받은 위대한 음악가였다.

비록 노무현정부는 동백림 사건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 할지 모르지만 1970년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바르샤바의 옛 게토(집단수용지)지역을 찾아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찌의 유태인 학살을 사죄한 것은 나찌도 독일이었고 빌리 브란트도 독일이라는 상식적인 역사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해 윤이상선생님 타계 10주기에는 평양의 윤이상관현악단도 초청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 기회에 정부의 정중한 초청으로 윤이상 선생님의 미망인이신 이수자여사가 고국땅을 밟게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윤이상 선생님이 한반도에서 당신의 노력으로 음악을 통한 평화적 남북 교류사업이 이루어진다면 고국의 흙에 입 맞추며 조용히 하고자 한 말씀을 우리는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충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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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모 프로축구단이 경기 전 행사에 애국가 연주를 없앴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매일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져 나오는 마당에 프로축구 식전행사에 애국가를 없앤 것이 뭐 대단한 사건이 될 수 있겠냐 만은, 이번 시도가 국내 프로스포츠 경기 사상 최초로 이뤄졌다고 하니 그 의의가 작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국내 모든 프로스포츠 경기는 일률적으로 모든 경기 전에 애국가 연주를 했다고 한다. 프로야구 관람을 좋아하는 내 개인적 경험을 생각해 봐도 이미 경기 전에 얼큰하게 취해서 고래고래 고함치시는 아저씨들과 이제 막 입장해서 자리 잡으려는 사람들 등 각종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나라 만세’는 한번도 빠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애국가 연주하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학창시절의 기억이 있는데, 중학교 3학년때 쯤으로 기억한다. 고교입시를 우수운(?) 성적으로 힘겹게 합격하고 겨울방학을 맞은 절친한 3-4명의 청춘들에게, 지방 소도시는 너무나 한가롭고 심심했다.
그때 불쌍한 청춘들에게 무리 중 한 녀석이 외친 구원의 한마디는 “영화 보러 가자!” 였다.
물론 그냥 단순한 영화는 아니고 ‘성숙한’ 우리들의 수준에 맞는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자는 얘기였다. 선생님의 단속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졸업만 남겨둔 상태에서 설마 걸려도 무슨 일이 생기겠냐는 배짱을 부리며, 두 달 남짓 되는 겨울방학동안 우리는 참 열심히 보러 다녔다. 물론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엄격했다. 영화 출연자들의 의상비가 적게 들어갔을 것 같은 영화, 실외보다는 침대가 있는 방 등의 실내촬영에 집중한 영화, 과일제목의 영화(딸기, 앵두 등), 우리 전통 사극도 빠지지 않고 봤었던 것 같다. 거의 다 2편 동시상영이었는데 한번은 우리나라 최초의 실사와 애니메이션 합작영화인 심형래씨 주연의 아동영화 ‘우뢰매’와 성인영화 ‘어우동’을 같이 동시상영 했던 적도 있었다.
나중에 너무 자주 가니까 극장 앞에 앉아서 관리하던 기도 아저씨가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할인까지 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영화상영을 기다리는 동안 익숙한 목소리의 성우 목소리와 함께 ‘행복의 전당’ ‘미의 향연'등의 ‘세련된’ 카피와 함께 예식장, 미용실 등의 지루한 지역 광고가 지나가고 드디어 장엄한 ‘애국가’가 흘러 나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내 고향 어른들은 어찌나 애국심이 투철하셨던지 영화내용에 상관없이 애국가 전주 시작과 함께 거의 자동으로 일어나 엄숙한 표정으로 애국가가 끝날 때 까지 서 계셨다. 물론 우리들도 분위기에 압도되어 고개를 푹 숙이고 엉거주춤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민망함이란...
도대체 ‘뽕’ ‘변강쇠’ ‘애마부인’등의 영화가 애국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기야 그때만 해도 가수들이 내는 모든 음반의 끝 곡은 ‘건전가요’(대표곡 ‘어허야 둥기둥기’)란 것을 꼭 삽입하도록 의무화 하는 시절이었긴 했지만,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웅장한 애국가가 나올 때 마다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이미 세뇌수준으로 다짐한 나로서도 애국가와 성인영화의 양립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국제경기라면 모르겠지만 국내 프로축구는 팀당 매주 두 경기씩 8개월간 계속 경기를 하고, 프로야구도 연간 500여 경기를 하는데 그때마다 매번 애국가를 연주하는데 대해 이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각종 프로스포츠에는 외국인 용병들도 2-3명씩 뛰고 있는데 그 선수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애국가를 듣고 있는 것일까?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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