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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7일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흥분 속에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원로 노정객 ‘자오쯔양’이 16년간의 가택연금 상태에서 향년 85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사실 ‘자오쯔양’만 해도 중국 이름을 우리식 한자 발음으로 부르던 때의 인물이라서 그런지 이름만 들어서는 누군지를 알기가 쉽지 않았지만 조자양(趙紫陽)이란 한문이름을 언론에서 보고 나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은 자오쯔양과 후야오방(胡耀邦)이 진두에서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당시 당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은 정치분야를, 자오쯔양은 국무원 총리로서 경제분야를 책임지고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 국내외에 사실상 덩샤오핑의 후계세력으로 자리매김 했었다.

하지만 1986년 학생시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당내 보수파의 공격으로 다음해 1월 후야오방이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나면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개혁개방 쌍두마차 체재에 변화가 오는데, 비록 후야오방은 실각했지만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의 변함없는 지원에 힘입어 후임 총서기로 나서 중국내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승승장구 하던 자오쯔양은 1989년에 발생한 ‘천안문 사태’의 해결방법에 대한 당 원로와의 대립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중국 현대사를 언급 할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인 ‘천안문 사태’는 1989년 4월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사망이 계기가 되어 중국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천안문 광장에 모여 후야오방의 재평가와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한 대규모 시위를 말한다.
천안문 사태의 해결방법에 대해 덩샤오핑을 비롯한 보수파는 무력진압을 결정한 반면 자오쯔양은 끝까지 그에 반대해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주장하며, 보수파와 그의 정치적 후견인인 덩샤오핑에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하지만 당의 공식적인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실권이 없었던 자오쯔양은 결국 덩샤오핑과 당원로들에 의해 지위와 권한을 박탈당하고, 1989년 5월 19일 새벽 4시무렵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중이던 학생들에게 나타나 울먹이는 목소리로 “학생 제군, 우리들이 너무 늦게 왔다.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채 죽을 때까지 일체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지 못하게 된다.

물론 그 이후 덩샤오핑과 당원로들은 시위대가 모여 있는 천안문광장에 탱크를 비롯한 대규모 군대를 투입해 수천 명의 부상자와 300여명의 사망자를 일으키는 대규모 유혈 참극을 일으키고 만다. 이처럼 중국의 민주화와 천안문사태, 자오쯔양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오쯔양의 사망이후 중국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실망스러움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중국 당국은 자오쯔양 사망소식을 관영 신화통신을 통해 짧게 보도하면서 중국 내의 TV와 라디오 방송에서는 이 소식을 싣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는 한편, 심지어 우리나라와 같이 외국에서 들어가는 신문에서 자오쯔양 사망소식을 아예 통째로 오려버리고 CNN과 같은 외신보도에서도 자오쯔양 관련 소식은 철저하게 통제했다고 한다.

물론 천안문 사태가 후야오방의 사망으로 촉발된 것이기에 중국정부가 자오쯔양의 죽음으로 가졌을 부담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런 식의 유치한 언론통제나 하고 있는 중국정부를 보고 있으려니 중학교 때, 도무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중국을 일컬어 ‘죽(竹)의 장막’이라고 배운 것이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더구나 지금의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천안문 사태의 무력진압에 연관되어 있는 ‘장쩌민’에 비해 천안문사태의 책임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데도 불구하고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역설적으로 중국정부가 ‘천안문 사태’에 대해 얼마나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책에서 ‘역사의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도 1980년 광주항쟁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진 바탕위에서 오늘날 미흡하나마 민주주의의 정착과 또 민주주의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같은 맥락으로 친일문제가 해방이후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민족정통성이나 보수의 정체성에 대해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중국도 정치사회 전반의 민주화가 진행되지 않고 지금처럼 경제력만 높아진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기형적인 지독한(?) 자본주의 체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13억 인구를 자랑한다면서 그 많은 국민을 상대로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없이 무식한 방법으로 언론통제나 일삼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쩐지 중국이 무서워지기까지 한다. 한 나라의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 권력과 사회전반에 어떤 부작용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이미 뼈저리게 실감했기 때문이다.

중국인민들도 월드컵 축구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 중국이 나가지 못했다고 창피해 할 것이 아니라 15년이 지난 현재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천안문 사태’에 대해 더 안타까워하고 탄식해야 할 것이다.

이글을 쓰는 오늘 아침 신문에도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에 대해 쓴 베스트 셀러 전기(傳記)에 대해, 민감한 중국현대사와 저우언라이 총리에 대한 책 내용이 중국 정부당국의 견해와 맞지 않는다며 판금을 당했다는 소식이 국제면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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