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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다정한 사람
은희경 외 지음 / 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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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낯섦과 마주한 미묘해진 매력을 맛보는 일이 아닐까. 혹은 다녀 온 이후에 더 커져버린 추억의 추를 얼마간의 심적 안락으로 보전받는 일은 아닐지. 그것은 마치 밤 하늘에 잔상만 남은 별의 아름다움을 올려다 보는 일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여운의 잔상들이 내 삶의 곳곳 그 경험치들을 배치시켜서 전에 없던 카테고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여행은 분명한 우리 삶의 활력소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묘미라면, 그것은 오래 묵힌 질문들에 비로소 답을 찾게 되는 시간들이라고 말할 것 같다. 대부분이 좀 생각하기 꺼려져서 의도적으로 숨기고 묵혀둔 문제들인데, 논리적 실마리로 풀다 그만 지쳐버린 경우라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고민들도 여행지에만 오면 스스로 봉인해제 되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활한 세상만큼이나 별 것 아닌 문제들로 흩어져 버리는 신기를 맞이하게 해준다. 나는 정말 바보인가하고 적잖이 황당해하면서 답을 찾았다기 보다는 내려놓을줄 아는 위안을 얻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무겁고 낮은 층위의 문제들이 오늘 저녁 메뉴는 뭐가 좋을까’처럼 가장 가볍고 별 것 아닌 층위로까지 올라와 섞여 버리는 것, 그런 것이. 여행지에서 이렇게 조용한 환호를 지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새롭게 보고 먹고 즐기는 낯선 행복만큼이나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여행이 돈과 시간이 허락하는 사람에게나 부릴 수 있는 여유 아니겠냐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여행의 핵심을 짚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거창하게 비행기를 타고 국외로 간다거나, 허리가 휘다 못해 몇 번이고 접힐 만큼의 돈을 들고 간다라면 더 큰 기쁨을 얻거나 더 많은 것을 보고 오는 것일까.

진짜 여행은 하다못해 내 집에서 책이나 영화를 보는 행위로서도, 이게 좀 싱겁다면 버스를 타고 처음 가보는 동네에 내려서 골목 곳곳을 누려보는 일에서도 낯선 풍경이 선사될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 편에서의 여행은 돈과 시간인 물리적 의미보다 여행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낯섦과 휴식의 감정에 엄청난 비중을 둔 차이가 있긴 하다.

뭐 어쨌든 사람이 이 정도로의 나이를 먹고 보면 자신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고 여행을 좋아하느냐 별로 그렇지 않느냐를 판가름 할 수 있다고 보는데, 내 경우는 아마 여행을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닌가 싶은 경우다.

내가 줄곧 가장 좋았다라고 회상하는 공간과 시간들을 회상해보면 서울 어느 동네의 공원을 산책한다든지, 갤러리에 들러 그림을 보고, 향이 좋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러 예쁜 카페를 찾아 보는 일, 그런 소소한 일들이다. 물론 거창한 여행지에서의 추억 따위도 없진 않아서, 눈 앞에 펼쳐진 일몰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던 캄보디아의 어느 날이라든지 일본 어느 골목의 쌀집과 우체국 안을 몰래 들여다보며 길을 잃은 채로도 마냥 좋았던 추억의 한 켠이 소중하게 자리잡고 있긴 하다.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감흥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들에서 조차도 나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화려했던 풍경을 떠올리거나, 유명 음식점에서 비싼 점심을 먹어 봤다거나 하는 일이 떠오르지 않는걸 보면 여행 취향이 일관되긴 한 것 같다. 말하자면 평소 소소하게 느낀 주말의 여행, 어느 나라에서 큰 돈을 썼던 여행들이 비견되지 않을 정도의 격차로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책이든 갤러리에서 본 어떤 그림이었든, 내가 좋아하는 길을 걷고 차를 마시며 단 몇 시간을 누린 여행도 내게는 행복한 시간들이라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전에 느껴보지 못한 낯선 충격, 아니면 그 낯섦 가운데서도 익숙한 것을 본 아늑한 기쁨. 그 어느 쪽이건 여행지에서의 사람들은 평소에 낯간지러워서 하지 못한 원형의 질문들을 마구 쏟아내고 정비해보는 다부진 결연들을 생각해 본다. 그래서 어쩌면 여행이란 내 안의 무게에 균형을 맞추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과해진 것들은 덜어내고, 어느새 빈 소리가 부끄러워질 만큼 채우지 못한 게 있다면 주어 담는 일 말이다. 보는 모든 풍경들이 그 자체로서 빛과 에너지로 환원되어 돌아오는 자극 충만한 세상이 내 안의 균형을 맞추는 일인 것이 참 고마운 작용같다.

 

 

<안녕, 다정한 사람>을 읽으면서 근본적으로 여행에 대한 의미들을 참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인상적인 글과 여행이다 싶은 게 있었다면 단연 김훈작가 편이었다. 짧은 이야기로 들리지만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위치측량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망망대해를 떠돈 젊은이들의 항해는 김훈작가의 감정에 절로 동조된 기분으로 다가온다. 비글호 같은 배가 없어도 그들과 같은 항해를 바라는 마음에는, 젊은이 못지 않은 생기와 의지가 아름답게 비춰지는듯 했다. 대부분의 작가가 여행지에서 경험한 일일에는 한 치의 요란함도 없이, 본디 그곳의 원형을 그대로 전해주는 진짜 여행이 전해져서 좋다.  

 

 

좋은 의미에서, 이 책에서 소개되는 여러 작가들의 각각의 여행지가 그곳을 가보고 싶어지는 매력으로 전해지지는 않는다. 각자의 세계가 어떤 식으로 확장시켜 나갈 수 있을지 그것은 당신만이 알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곳이 어디든 나는 이곳을 찾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만의 여행을 계획하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마음껏 자신과 다른 이의 안부를 물으라,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게 주말의 한 틈이고, 가능한 좀 더 많은 풍경을 바라보며 작은 움직임들에 전보다 많은 고마움을 느껴야겠구나 다짐하는 그것인 것이다.

다만 이 책을 보면서 나의 여행에는 그동안 사람이 부재했다는 아쉬움을 반성하는 것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일상과 여행이 주는 충돌이 삶의 넘나듦을 좀 더 유연하게 이끌어준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은, 그런 오후를 맞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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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의 서재
장석주 지음 / 한빛비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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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고 자정을 넘어가는 그 시각이 되면 평소 잘 울리지 않은 문자음도 잠시 요란해진다. 대부분 우리가 언제 이 나이까지 먹어서는으로 시작되는 친구들의 덕담을 가장한 푸념들이다. 이럴 때마다 나는 좀 유난스러운 짜증이 들곤 해서 이 말은 네가 열아홉 살 때부터 줄곧 해 온 말이다라며 쏴 붙이곤 하는데, 물론 이 말은 사실이다.

또렷한 기억인 것이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던 때에도 우리는 함께 모여 십대가 이렇게 가다니, 나도 이제 늙었구나하며 붙잡고 싶은 나이의 우울을 뼈아프게 토로했다. 그리고 그것은 서른으로 넘어가던 마지막 날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매년 이런 나이에 대한 푸념을 들을 때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공평하게 한 살을 먹는 것을, 과연 이 정도의 데시벨로 억울해 할 일인가 싶은 것이다. 앞으로 더 늙어갈 날만 남았는데, 평생 왜 똑같은 소릴 해대는지 짜증스럽다. 그러고 보니 나도 좀 유난스러운 사람일까. 

 

물론 나도 늙어가는 것이 전혀 아쉽지 않다거나, 노인이 된 내가 손녀를 무릎에 뉘이고 자장가 불러주는 모습을 행복하게 상상하는 노인 예찬론자도 아니다. 그저 해마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민감해하기 보다는 막연히 다른 부류라고 생각했던 기성세대 속에 영락없이 속하게 됐구나 하는 책임감만을 조금 아쉽게 맞이하는 것, 그 뿐이다. 좀 성가신 일이 많아지겠구나 하는 정도로만 다가온달까. 늙는다는 건 정말 그렇게 서러운 일일까. 

 

  

서점에 가면 정말 많은 책들이 세대를 묶어서 칭하곤 한다. ‘청춘이라던가 스무 살’ ‘서른으로 시작되는 수많은 제언들이 방향을 잃고 주춤하는 이들의 마음에 머무는 모양이다. 지금을 잘 살고 싶은 만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고민에 나이’가 큰 걸림돌인 반증이 아닌가 싶어 안타까운 것이다. 대부분 내가 잘 가고 있는가에 대한 걱정, 혹은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 받고 싶어서 책을 사보는걸 텐데, 과연 사람들은 삶의 무엇을 아쉬워하고, 두려워한다는 걸까.

나이가 삶의 중요한 척도라면 때에 맞는 적기의 언행들을 책을 보며 참고해도 나쁘지는 않을 일이지만남의 시선에 옭아 매 산다는 것의 다름 아닌지 그게 우려스럽다열풍 밖으로 흐르는 씁쓸한 기운들이 정작 진짜 용기를 주는 일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서도 <마흔의 서재>와 같은 책을 만나게 되는 건 영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의 반쯤을 돌아보고 또 앞으로의 삶을 다짐해보는데 이 책이 말해주는 템포는 내가 어떻게 살고 있었나, 이런 삶은 어떨까 하는 기대와 안심을 주는 깊은 여유가 흐른다.

장석주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조용한 숲길을 같이 걸어주는 연인과 함께 하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 같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인생이 망하겠구나 하는 조바심을 주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아는 이상적인 말만을 늘어 놓았다거나, 교조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세대를 막론하여 가슴에 새겨 봄직한 태도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용기를 준다 싶다.

 

 

이 책의 구성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과 작가 자신의 삶을 잔잔하게 반추시킨 글이 어우러져 있는데 더불어 몇 권의 책과 함께 소개된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어떤 책을 읽고 나서야 깨달은 일일 수도 있고, 살면서 터득하게 된 삶의 방편들이 책과 우연히 맞닿아 소개되는 일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작가의 솔직한 인생의 서사들이 펼쳐지는 만큼, 많은 책들도 함께 소개되는데, 읽다 보면 문득 시인의 안성 서재에 머물고 싶어지는 생각이 절로 든다.

 

 

누구나가 그렇듯이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야 결국 이것들이 지금의 삶으로 오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했구나 깨닫는 시기가 온다. 특히 책 <월든>의 저자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죽을 때야 비로소 잘못 살았구나 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초로에 가 산 일화라던가, 고독보다 더 다정한 벗이 없음을 말하는 대목에서는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책은 정말 인생의 갈피를 도와주는 사물이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 것은 우리가 평소 갖지 못하는 사유의 깊은 울림과 여운, 정적을 맞이할 수 있는 영원과도 같은 순간을 준다. <월든>을 보며 장석주 시인이 그러했듯, 그야말로 삶의 정수리를 빨아들이는 깊이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감복의 전이가 <마흔의 서재>에도 역시 흐르고 있다. 물질만을 쫓는 맹목의 태도도 은근한 추앙을 받는 시대에 내면을 가꾸라 말하는 시인의 외침은 결코 크게 들리는 법이 없지만 일단 이 삶을 목도한 사람들의 뇌리에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깊음이 있는 것이다.

 

 

작가의 서재 귀퉁이를 빌어 앉아 사유의 교감을 하고 나니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한참을 돌고 돌아 비로소 를 돌보게 되는 구나 싶어진다. ‘을 위한 인생을 살거나 보여주기 위한 인생을 사는 것은 오롯이 를 위한 삶을 꾸리는 일에 엄청난 방해을 준다. <마흔의 서재>를 보면서 고요하게 해가 지고 뜨는 일이 왜 자연으로 눈을 돌리고 바람과 직접 가꾼 채소로 한 상을 차려 먹는지에 대한 소박함들을 메워준다. 언제라도 나를 이끌어주는 한 권의 책이 있고 이를 읽으면서 비로소 다른 세상과 만난 작가의 삶이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는 구나 싶다. 결국 사람은 자연으로 혼자 그렇게 가는 것이리라. 작가가 말하듯이 각자의 서재에 앉아 책을 읽으며 조금씩 새로운 사람으로 나아가는 일인 것이다.

 

 

사람은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현재를 저당 잡혀 희생을 감수하는 실수를 한다. 이는 마치 세상이 인간으로 하여금 오류가 나길 바라는 명령을 내리고 굴종하게 하는 일처럼 짓궂은 비극처럼 보인다. 그럴 수록에 우리는 주어진 삶의 오류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부리고, 수많은 교차로에 놓여서야 충돌로 빚어진 통로를 만난다. 다치고 부러진 만큼의 고통이 보이지 않던 다른 길로의 모색을 꾸려내는 과정인 것이다. 이런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는 아닐지.  

 

각자의 꿈으로 삶을 재구성해내는 힘은, 자신의 마음 안에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이 책을 읽을 수록에 그 힘의 비결이 바로 내 방 한 켠 쌓아둔 책 한 권의 힘이란 것도 알겠다. 멋있는 사람을 보고 내 꿈인 냥 콜라주처럼 오려 붙인 그런 가짜 삶 말고, 진짜 나의 삶 말이다. 끊임없이 모방하고 나를 배신한 삶을 살아온 지루함에서 벗어나 이제는 진실로 내가 주체가 되어 그야 말로 나의 종합을 구성해보리라 다짐해 본다.

책숲이라는 무한한 공간에서 세상을 온감으로 느끼며, 변화할 각자의 몫을 기분 좋게 상상하는 것은 정말 괜찮은 인생의 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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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생각을 나누는 일이 편리해진 세상이 언제 있었던가. 굳이 책으로든 편지로든 종이 위에 적어내는 수고를 거치지 않고도 e북이니 sns니 간단한 터치 하나로, 이동의 과정도 생략된 혁신적인 세상이 도래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매우 익숙한 풍경이 되어 버렸지만 이도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일이라는게 도통 믿겨지지 않을 만큼 기술의 혁신은 인지를 무색케 한다.

이러한 시간들 틈에 어리둥절한 마음을 달래는 일은 역으로 참 소중한 일이 되어 버렸다. 새삼 세상의 속도가 참 무정한 것이라는 생각이들때, 그럴때 오히려 아날로그적인 것을 그리워 하게 되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니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새겨내고 거기다가 나뭇잎 엽서라는 아름다운 무늬를 남길 생각을 했다면, 무조건 갸륵한 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쉽고 빠른 길 보다는 부러 돌아가 전하는 일은 어찌 아름답달지 않을 수 있을까.

판화가 이철수씨의 신작, <사는 동안 꽃처럼>은 저자와 공유해온 엽서의 역사를 선별해 선보이는 작품이다. 어떤 삶을 희망하며 살아가는지 소소한 사람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가 정을 듬뿍 담아 전해진다. 누구나 꽃처럼 살아가고 싶은 작은 열망들이 다 들어 있는 작품이다.

 

 

 

타샤튜더 할머니처럼 늙어갈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나의 정원>은 작가 타샤튜더의 행복 가득한 삶의 온 정경이 담긴 책이다. 자연과 동물 더불어 살아가는 타샤튜더의 사랑 가득한 마음이, 넓디 넓은 정원 만큼이나 무럭무럭 풍성하게 펼쳐진다.

언제나 타샤튜더가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걸 보면 역으로 우리네 모습은 자연과 영영 단절된 삶을 꾸리는게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들곤 했다. 현대인들이 작가가 왜 자연속에서 삶을 누리며 살아갔는지, 여유와 사랑 몸소 실천했던 정신을 본받게 된다면 더할 수 없이 기쁜 일일 것이다. 숱한 동화로 남긴 그녀만의 철학과 직접 그녀가 꾸민 삶의 정원에 놀러가보고 싶어지는 그런 푸른 세상이 놓여 있다.

정말이지 타샤튜더처럼 살아 볼테다!

 

 

 

 

 

 

 

일본문학을 읽어 본 독자라면 눈에 익을 이름 번역가 '권남희'씨의 도쿄 여행기 <길치모녀 도쿄헤매記> 

예쁘고 낭만 가득한 여행 소개서가 아니라 작가와 그녀의 딸이 엮어내는 좌충우돌 여행기라니 더욱 흥미를 끈다. 길치인데다 서로 못보겠달 정도로 아웅다웅 싸우고 헤맨 시간들이, 함께 하는 여행의 색다른 묘미를 전해주는 듯 하다. 일본 문화에 익숙한 작가가, 왜 하필 딸과 함께 하면서도 배꼽 쥐어질 '만담'의 나날을 보낸 것인지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낯선 곳에서 낯선 얼굴을 만나며 낯선 음식을 먹는다는 것, 생각만해도 헤매는 어리둥절함 보다는 왠지 아드레날린이 용솟음 치는 즐거움이 전해진다. 길을 잃어도 좋을, 여행의 진정한 매력이 다시금 맛보고 싶어 지는 책이다.

 

 

 

 

 

 

 

 

 

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동물의 정체가 궁금해서, 그리고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라는 말이 궁금해서 두번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이야기의 시간을 왜 이미지의 시간으로 바꾼다는 걸까? 그래서 이야기 만드는 기계가 필요하다고 말하는걸까?  

이런 저런 묘한 호기심이 발동하는 독특한 이야기는 무엇을 또 가공해 낼까. 저자 김진송의 이채로운 경력 만큼이나 이야기를 끌고 가는 개성이 느껴지는 이야기 변환술의 묘책으로 가득한 독특한 내용일 것 같아 기대되는 책이다.  

 

 

 

 

 

 

 

 

 

김창균시인의 신간 <넉넉한 곁>은 여백의 긴 여운이 느껴지는 흰 눈의 길처럼 다가 온다. 삶과 궁극의 사유에 대한 작가의 단상들이, 작가가 써온 시의 형태가 아닌 그야말로 날 것의 말 아포리즘 성격의 언어로 담겨 있다.

마치 엽서 한장을 매일매일 선사 받는 일상으로 여유를 주는 책. 그렇다면 아마도 제목처럼 넉넉한 곁의 온도를 감지하게 될 수 이지 않을까? 어느 곁이고 넉넉하기만 하다면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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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 시옷이라 불리는 말. 

낱말보다도 작은 이 자모에 거창하게도 '세계'랄 만한 세계가 존재할까? 
김소연 시인의 눈에 비친 시옷의 세상은 목록으로만 보아도 '역시'라는 감탄사가 절로 흘러 나온다. 어째서 시옷인지. 시옷으로 떠올리는 세상을 왜 편애할 수밖에 없는지, 세계를 다 훑어낸 기운으로 말해주는 듯 하다. 조금은 슬프고, 고요하며, 아린 느낌의 언어 시옷. 

세상을 새롭게 응시하는 웅슝한 언어가 시옷은 아닐까. 

<마음사전>에 이은 김소연 시인의 각별한 언어놀이에 또한번 동화되길 꿈꾸는 독자라면 이번 시옷의 세계에도 틀림없이 빠져 들 수 있을 것 같다.   

 

 

메가쑈킹만화가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단어는 '쫄깃'이란 말이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왕이면 이 하루를 쫄깃하게 즐겨보자 라는 뜻이 담겨 있다. 
작가가 제주로 가서 같이 집을 지을 사람을 구하고, 완성되어 게스트하우스로서 큰 명성을 얻기까지의 과정들을 개인 매체에서 죽 봐온터라 남다르게 느껴지는 책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쫄깃>에 담겨 있을 내용이 익숙한 질감으로 보상받는 것 같아서 왠지 뭉클함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쫄깃센타에 묵고 싶어지는 겨울이 왔고, 이 책을 품에 안고 당장의 내일에 빛나는 쫄깃한 삶을 잠시 꿈꿀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쫄깃 쫄깃!' 

 

 

 
작가 후지와라 신야를 떠올리면 '죽음'이란 단어와 깊이 연관되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도>역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의 죽음으로 맞닥드린 삶의 최후의 기운들을 맞서는 여행이다. 
깨달음의 길 시코쿠를 찾아 떠난 순례자,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또 다른 순례자들, 그들의 표정과 풍경을 통해 저자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물음들이 깊이 와닿는다. 

죽음을 생각하는 삶으로서 매일 올리는 기도, 이들의 진지한 기도문을 같이 걸어보며 생각하게 될 책이다.  

 

 


김훈, 이병률, 은희경, 신경숙... 이름만 들어도 가슴 떨리는 작가들이 건네는 '안녕?'의 말은 얼마나 다정한가. 

<안녕 다정한 사람>은 마음이 머문 여행지에서의 다양한 모습을 각각의 인사로 건네주는 상냥한 책이다. 인사마다의 각기 다른 얼굴로 전하는 여러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리라. 
그들로 하여금 하필 그곳을 찾게 된 연유하며, 여행지에서의 낯선 인상 그러면서도 어딘가 닮은 표정의 일일이 매우 궁금해지는 책이다.  

 

 

 


팔방미인이란 말이 가장 어울리는 사람, 바로 괴테같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문학 뿐만 아니라 과학과 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보인 괴테라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도 흘겨 듣지 못할 것 같다. 
<괴테의 하루 한마디>는 1월 부터 12월의 테마로 괴테가 남긴 명언 잠언의 말을 모아 그가 평생 가진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삶에 오해하고 오독하며 지치고 버거운 일상을 벗어나 조금이나마 이해를 얻을 수 있는 말이면 더할 나위 없이 힘이 나는 한마디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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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2-12-05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푸리울님~~
파트장 라일락입니다.
도서명과 저자, 출판사, 도서검색이 안되어 있네요. 내용을 보고 체크는 완료했는데, 보시는대로 수정 부탁드립니다.

puriul 2012-12-06 12:36   좋아요 0 | URL
네 안녕하세요 ^^
제가 먼댓글만 연결한다고 모바일에서 했더니, 책링크 해논게 없어지는걸 몰랐네요.
신경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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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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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펜은 세상의 멍이 먹으로 쓰이는, 하루하루 조금씩 밀고 들어오는 찬바람의 부름을 의식한 자연스런 기록이다. 깊이 상처를 입은 현실, 그것을 목도한 사람의 눈까지도 아리게 만드는 시대의 온 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픔의 감각으로 가는 피의 통로가 그만 폐쇄되어도 좋을 차디 찬 기운이 내내 흐른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비관 보다는 회복의지를 말하며 언제나 세상에 해 입고 살아가는 작은 힘들에 대해 말한다. 결국 이 힘으로써 세상은 바뀌는 거라고 북돋는다.

그네들의 삶에는 오히려 웃음이 있고, 풍자와 해학으로 승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기막히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을 버티는 의지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상처 입은 영혼들의 기질에는 훌륭한 은유의 투사가 있음을 엿보게 된다.

정말이지 어느 시대고 아픈 현실을 이겨내고 나은 삶을 이룩해 낸 발걸음은 어느 한 영웅때문이 아니라 보잘 것 없어 보인 민중의 모든 한걸음임을 잊지 못하겠는 것이다. 슬픈 전이처럼 보이지만 군림하는 자의 어리석음이 유난할수록 이 아이러니는 더욱 빛을 발해 왔던 역사였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위화가 보는 세상 이야기가 소설만큼이나 직시된 문장으로 다가와 내내 진지한 사회적 단상들을 보게 한다. 사회 안에서 온몸으로 느끼고 산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여러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들에 파생된 문제들이 쉴 새 없이 들추어 진다. 이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이 보는 세상은 함께 생각해봐야 하지 않냐는 말을 건네 준다. 그래선지 이 책을 읽다보면,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 역자의 바람처럼 중국에 대한 특정한 정보와 지식의 측면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왜곡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를 여러 번 맞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네 삶과 결코 무관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열 가지 키워드로 대변되는 중국의 참 얼굴에는 각 단어들이 말하는 거대한 물음표가 아주 오랫동안 크고 무겁게 다가오곤 한다. 아무리 극복의지를 가지고 부조리를 고발해 본들 그것을 실행하는 자의 작은 한걸음이 없다면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여러 번 꺾이고 위태로운 징검다리를 걷는 듯, 작가가 딛고 서있는 현실과 마주한다는 것은 참으로 딱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더라도, 작가가 말하는 소통의 장이 작은 힘들을 모으게 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일에 힘을 보태게 된다면 이 책이 전하는 물음들에 서서히 그 열쇠가 쥐어 지게 될 것이다.

 

 

 

세상의 반어적인 상황들이 현실을 교묘히 비틀어 풍자로 흐를 때 차가운 독설과 비관주의와는 또 다른 정서를 낳는다. 그것은 중국이라는 나라의 이념 세계에서라야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언제나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는 제도와 룰이 보이지 않는 총부리를 턱밑까지 겨누고 죄어오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어느 사회고 부조리를 이끄는 주역의 군상들이 있는 한, 일면 이들의 문제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한 셈이다.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급변하는 중국의 사정이 우리의 사정과 다르면 얼마나 크게 다를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거짓과 조작으로 세를 불리는 힘을 비축하면 할수록, 힘없는 약자들은 그만큼 약해지고 악법도 법이라는 룰을 지켜가면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조용한 군상들로 변해가는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반추해내지 못하는 나날들이 반복되더라도 위화 같은 작가들이 들려주는 조용한 파문은 칼보다 강한 펜의 가치를 말해준다. 역설의 구조 속에서 시대를 발언하고 재현해내는 작가의 사명뿐만 아니라 거대한 부조리를 잠식시킬만한 힘은 바로 우리 자신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가 왜 보이지 않는 빛의 속도보다도 더 빠른 것인지, 이 말의 진의를 깊이 되짚어볼 시간이다. 그리 늦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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