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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의 서재
장석주 지음 / 한빛비즈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해가 바뀌고 자정을 넘어가는 그 시각이 되면 평소 잘 울리지 않은 문자음도 잠시 요란해진다. 대부분 우리가 언제 이 나이까지 먹어서는으로 시작되는 친구들의 덕담을 가장한 푸념들이다. 이럴 때마다 나는 좀 유난스러운 짜증이 들곤 해서 이 말은 네가 열아홉 살 때부터 줄곧 해 온 말이다라며 쏴 붙이곤 하는데, 물론 이 말은 사실이다.

또렷한 기억인 것이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던 때에도 우리는 함께 모여 십대가 이렇게 가다니, 나도 이제 늙었구나하며 붙잡고 싶은 나이의 우울을 뼈아프게 토로했다. 그리고 그것은 서른으로 넘어가던 마지막 날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매년 이런 나이에 대한 푸념을 들을 때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공평하게 한 살을 먹는 것을, 과연 이 정도의 데시벨로 억울해 할 일인가 싶은 것이다. 앞으로 더 늙어갈 날만 남았는데, 평생 왜 똑같은 소릴 해대는지 짜증스럽다. 그러고 보니 나도 좀 유난스러운 사람일까. 

 

물론 나도 늙어가는 것이 전혀 아쉽지 않다거나, 노인이 된 내가 손녀를 무릎에 뉘이고 자장가 불러주는 모습을 행복하게 상상하는 노인 예찬론자도 아니다. 그저 해마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민감해하기 보다는 막연히 다른 부류라고 생각했던 기성세대 속에 영락없이 속하게 됐구나 하는 책임감만을 조금 아쉽게 맞이하는 것, 그 뿐이다. 좀 성가신 일이 많아지겠구나 하는 정도로만 다가온달까. 늙는다는 건 정말 그렇게 서러운 일일까. 

 

  

서점에 가면 정말 많은 책들이 세대를 묶어서 칭하곤 한다. ‘청춘이라던가 스무 살’ ‘서른으로 시작되는 수많은 제언들이 방향을 잃고 주춤하는 이들의 마음에 머무는 모양이다. 지금을 잘 살고 싶은 만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고민에 나이’가 큰 걸림돌인 반증이 아닌가 싶어 안타까운 것이다. 대부분 내가 잘 가고 있는가에 대한 걱정, 혹은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 받고 싶어서 책을 사보는걸 텐데, 과연 사람들은 삶의 무엇을 아쉬워하고, 두려워한다는 걸까.

나이가 삶의 중요한 척도라면 때에 맞는 적기의 언행들을 책을 보며 참고해도 나쁘지는 않을 일이지만남의 시선에 옭아 매 산다는 것의 다름 아닌지 그게 우려스럽다열풍 밖으로 흐르는 씁쓸한 기운들이 정작 진짜 용기를 주는 일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서도 <마흔의 서재>와 같은 책을 만나게 되는 건 영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의 반쯤을 돌아보고 또 앞으로의 삶을 다짐해보는데 이 책이 말해주는 템포는 내가 어떻게 살고 있었나, 이런 삶은 어떨까 하는 기대와 안심을 주는 깊은 여유가 흐른다.

장석주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조용한 숲길을 같이 걸어주는 연인과 함께 하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 같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인생이 망하겠구나 하는 조바심을 주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아는 이상적인 말만을 늘어 놓았다거나, 교조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세대를 막론하여 가슴에 새겨 봄직한 태도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용기를 준다 싶다.

 

 

이 책의 구성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과 작가 자신의 삶을 잔잔하게 반추시킨 글이 어우러져 있는데 더불어 몇 권의 책과 함께 소개된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어떤 책을 읽고 나서야 깨달은 일일 수도 있고, 살면서 터득하게 된 삶의 방편들이 책과 우연히 맞닿아 소개되는 일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작가의 솔직한 인생의 서사들이 펼쳐지는 만큼, 많은 책들도 함께 소개되는데, 읽다 보면 문득 시인의 안성 서재에 머물고 싶어지는 생각이 절로 든다.

 

 

누구나가 그렇듯이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야 결국 이것들이 지금의 삶으로 오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했구나 깨닫는 시기가 온다. 특히 책 <월든>의 저자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죽을 때야 비로소 잘못 살았구나 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초로에 가 산 일화라던가, 고독보다 더 다정한 벗이 없음을 말하는 대목에서는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책은 정말 인생의 갈피를 도와주는 사물이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 것은 우리가 평소 갖지 못하는 사유의 깊은 울림과 여운, 정적을 맞이할 수 있는 영원과도 같은 순간을 준다. <월든>을 보며 장석주 시인이 그러했듯, 그야말로 삶의 정수리를 빨아들이는 깊이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감복의 전이가 <마흔의 서재>에도 역시 흐르고 있다. 물질만을 쫓는 맹목의 태도도 은근한 추앙을 받는 시대에 내면을 가꾸라 말하는 시인의 외침은 결코 크게 들리는 법이 없지만 일단 이 삶을 목도한 사람들의 뇌리에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깊음이 있는 것이다.

 

 

작가의 서재 귀퉁이를 빌어 앉아 사유의 교감을 하고 나니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한참을 돌고 돌아 비로소 를 돌보게 되는 구나 싶어진다. ‘을 위한 인생을 살거나 보여주기 위한 인생을 사는 것은 오롯이 를 위한 삶을 꾸리는 일에 엄청난 방해을 준다. <마흔의 서재>를 보면서 고요하게 해가 지고 뜨는 일이 왜 자연으로 눈을 돌리고 바람과 직접 가꾼 채소로 한 상을 차려 먹는지에 대한 소박함들을 메워준다. 언제라도 나를 이끌어주는 한 권의 책이 있고 이를 읽으면서 비로소 다른 세상과 만난 작가의 삶이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는 구나 싶다. 결국 사람은 자연으로 혼자 그렇게 가는 것이리라. 작가가 말하듯이 각자의 서재에 앉아 책을 읽으며 조금씩 새로운 사람으로 나아가는 일인 것이다.

 

 

사람은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현재를 저당 잡혀 희생을 감수하는 실수를 한다. 이는 마치 세상이 인간으로 하여금 오류가 나길 바라는 명령을 내리고 굴종하게 하는 일처럼 짓궂은 비극처럼 보인다. 그럴 수록에 우리는 주어진 삶의 오류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부리고, 수많은 교차로에 놓여서야 충돌로 빚어진 통로를 만난다. 다치고 부러진 만큼의 고통이 보이지 않던 다른 길로의 모색을 꾸려내는 과정인 것이다. 이런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는 아닐지.  

 

각자의 꿈으로 삶을 재구성해내는 힘은, 자신의 마음 안에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이 책을 읽을 수록에 그 힘의 비결이 바로 내 방 한 켠 쌓아둔 책 한 권의 힘이란 것도 알겠다. 멋있는 사람을 보고 내 꿈인 냥 콜라주처럼 오려 붙인 그런 가짜 삶 말고, 진짜 나의 삶 말이다. 끊임없이 모방하고 나를 배신한 삶을 살아온 지루함에서 벗어나 이제는 진실로 내가 주체가 되어 그야 말로 나의 종합을 구성해보리라 다짐해 본다.

책숲이라는 무한한 공간에서 세상을 온감으로 느끼며, 변화할 각자의 몫을 기분 좋게 상상하는 것은 정말 괜찮은 인생의 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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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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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펜은 세상의 멍이 먹으로 쓰이는, 하루하루 조금씩 밀고 들어오는 찬바람의 부름을 의식한 자연스런 기록이다. 깊이 상처를 입은 현실, 그것을 목도한 사람의 눈까지도 아리게 만드는 시대의 온 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픔의 감각으로 가는 피의 통로가 그만 폐쇄되어도 좋을 차디 찬 기운이 내내 흐른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비관 보다는 회복의지를 말하며 언제나 세상에 해 입고 살아가는 작은 힘들에 대해 말한다. 결국 이 힘으로써 세상은 바뀌는 거라고 북돋는다.

그네들의 삶에는 오히려 웃음이 있고, 풍자와 해학으로 승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기막히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을 버티는 의지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상처 입은 영혼들의 기질에는 훌륭한 은유의 투사가 있음을 엿보게 된다.

정말이지 어느 시대고 아픈 현실을 이겨내고 나은 삶을 이룩해 낸 발걸음은 어느 한 영웅때문이 아니라 보잘 것 없어 보인 민중의 모든 한걸음임을 잊지 못하겠는 것이다. 슬픈 전이처럼 보이지만 군림하는 자의 어리석음이 유난할수록 이 아이러니는 더욱 빛을 발해 왔던 역사였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위화가 보는 세상 이야기가 소설만큼이나 직시된 문장으로 다가와 내내 진지한 사회적 단상들을 보게 한다. 사회 안에서 온몸으로 느끼고 산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여러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들에 파생된 문제들이 쉴 새 없이 들추어 진다. 이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이 보는 세상은 함께 생각해봐야 하지 않냐는 말을 건네 준다. 그래선지 이 책을 읽다보면,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 역자의 바람처럼 중국에 대한 특정한 정보와 지식의 측면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왜곡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를 여러 번 맞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네 삶과 결코 무관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열 가지 키워드로 대변되는 중국의 참 얼굴에는 각 단어들이 말하는 거대한 물음표가 아주 오랫동안 크고 무겁게 다가오곤 한다. 아무리 극복의지를 가지고 부조리를 고발해 본들 그것을 실행하는 자의 작은 한걸음이 없다면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여러 번 꺾이고 위태로운 징검다리를 걷는 듯, 작가가 딛고 서있는 현실과 마주한다는 것은 참으로 딱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더라도, 작가가 말하는 소통의 장이 작은 힘들을 모으게 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일에 힘을 보태게 된다면 이 책이 전하는 물음들에 서서히 그 열쇠가 쥐어 지게 될 것이다.

 

 

 

세상의 반어적인 상황들이 현실을 교묘히 비틀어 풍자로 흐를 때 차가운 독설과 비관주의와는 또 다른 정서를 낳는다. 그것은 중국이라는 나라의 이념 세계에서라야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언제나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는 제도와 룰이 보이지 않는 총부리를 턱밑까지 겨누고 죄어오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어느 사회고 부조리를 이끄는 주역의 군상들이 있는 한, 일면 이들의 문제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한 셈이다.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급변하는 중국의 사정이 우리의 사정과 다르면 얼마나 크게 다를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거짓과 조작으로 세를 불리는 힘을 비축하면 할수록, 힘없는 약자들은 그만큼 약해지고 악법도 법이라는 룰을 지켜가면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조용한 군상들로 변해가는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반추해내지 못하는 나날들이 반복되더라도 위화 같은 작가들이 들려주는 조용한 파문은 칼보다 강한 펜의 가치를 말해준다. 역설의 구조 속에서 시대를 발언하고 재현해내는 작가의 사명뿐만 아니라 거대한 부조리를 잠식시킬만한 힘은 바로 우리 자신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가 왜 보이지 않는 빛의 속도보다도 더 빠른 것인지, 이 말의 진의를 깊이 되짚어볼 시간이다. 그리 늦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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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좋은 날 - 씨네21 이다혜 기자의 전망 없는 밤을 위한 명랑독서기
이다혜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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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요컨대 제 몸의 모든 면을 낱낱이 보여주고 어느덧 그것을 관람하던 자의 몸 안으로도 들어가 역으로 탐할 줄 아는 기묘함을 지니고 있다. 문학이 또는 예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냐 없냐 까지 논하는 것만 봐도 이것이 인간에게 주는 바는 무궁무진하리라는 걸 떠올려볼 수 있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존재하는 한, 여기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머리가 정지되지 않는 한 끊임없이 인간은 이야기를 꾸며내고 그것이 주는 삶의 반추를 흥미로워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영원하다고들 말하는 것일지.

 

누구나 과거를 들추었을 때 지금의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치기어린 실수 또는 언행의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땐 내가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하는 어이없는 실소와 함께, 역으로 지금의 내가 퍽 성장했다는 의식이 들기도 한다. 소통을 배우면서 무수한 매체에 영향을 받고 지식을 쌓고 지혜를 얻어가는 과정에 사람의 나이테는 조금씩 그 무늬를 이룬다.

이는 꼭 물리적인 나이로 명확히 구분되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여든 넘은 할배라도 한 권의 책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분류할 수 있는 중요한 한 권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앎이라는 것은 평생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무언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깨우침의 순간은 언제라도 찾아 올 수 있다. 이는 한 번 느껴본 사람만이 더 자주 그 기회를 느끼게 마련이며 그렇기 때문에 결코 책이라는 사물을 멀리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읽고 생각하는 행위만큼은 내가 그려낼 수 있는 원의 크기를 한없이 증폭하면서 확장시켜 주는 힘의 원천을 제공해준다. 개인의 사유는 이러한 식으로 조금씩 알고 깨달아가면서 보태지는 일이다.

 

 

조금씩 내가 성장해가고 있다는 즐거움을 알게 될 때 전혀 알지 못했던 뜻밖의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은 그래서 책의 중요성을 반증한다. 미세한 온도로서 감지되는 예민한 촉을 가지게 된 자만이 언어의 촉을 이해하며 세상을 바로 볼 줄 아는 힘을 지니게 된다. 결국 우리가 함께 꾸리며 꿈꾸고 살아갈 세상은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과연 책을 읽고 꿈꾼다는 것이 비단 나만의 생산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은 자명해진다.

 

 

<책읽기 좋은날>은 저자 이다혜가 한 뼘의 나이테를 두를 수 있던 책들의 틈틈한 기록의 책이다. 여행 중 기껏 신발 한 켤레 정도밖에 차지하지 않던 공간을 벌기 위해 신발을 버리고 책을 챙겨올 만큼 그녀에게 책에 대한 애정은 각별해 보인다. 말 그대로 책벌레란 별명 밖에는 달리 생각나지 않을 책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다. 저자의 특별한 리스트를 들여다보니 읽었던 책은 본대로 고개가 끄덕여 지고, 안본 책이라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큰 기대감을 안겨준다. 상상력이 절로 확장되는 것 같은 기대감이 절로 드는데, 결코 속단하거나 규정하지 않는 순수한 열의가 느껴져서 더욱 좋다. 

한 방 가득 실을 잣는 거미의 움직임처럼 교묘하고 예민한 상상력의 타래들이 눈으로 펼쳐 보일 듯 눈을 아늑하게 만들어주는 서평들이다. 각각의 책에 관여한 인물들과, 때의 역사와, 사건들이 주는 낱낱의 의미들을 압축적으로 다 들여다보게 해주는 간결함이 돋보인다. 양탄자를 얻어 타고 유랑하듯 지루함 느낄 새 없이 함축적으로 증축된 세상을 구경하다보니 작가가 구획해놓은 단정함의 세계관에 흠뻑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단 두어 페이지로 표현된 책의 감상과 평에는 그 책의 현실과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의 모습들이 교묘히 뒤섞여 표현된다. 어느 세계고 우리의 모습과 닮은 거미줄의 연결고리가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여섯 테마로서 묶이는 의미들을 곱씹어 보면 지금 이 시대를 대변하는 ‘아픈 청춘’ ‘노력하면 누구나 된다’는 차고 넘치는 희망찬 선동적 문구와는 사뭇 다른 차분하고 어깨를 토닥여 주는 카테고리들로 넘실대는 것 같다. 가령 슬픈 날에는 슬픈 음악을 들으라 하고, 긍정이 뒤통수를 칠 때와 같은 말들이 그것이다. 설핏 ‘왜’라는 반문이 드는 말들이지만, 상황을 처절히 몰입해본 사람이라면 이 쓸쓸한 말들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희망이란 단어가 오히려 더 큰 상실과 고통을 주는 말 일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는지.

 

 

책에 나오는 개별적 이야기들이 오히려 개인의 삶에 반추하여 들춰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이 책에서 느껴지는 향기로운 면이다. 그래서 작가가 들려주는 책의 조근 조근한 이야기들은 어스름한 저녁의 모습처럼 고요하고 쓸쓸해도 견딜만해 보이는 모양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책이야기의 목록을 옮겨 적으면서 올 겨울에는 곳간 가득히 곡식이 넘쳐나는 농부의 미소가 지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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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 위대한 문학작품에 영감을 준 숨은 뒷이야기
실리어 블루 존슨 지음, 신선해 옮김 / 지식채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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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인생을 작가와 단 둘이 우주여행이라도 한들 똑같이 겪어 낸 일상의 서사가 설마 비슷해 보일 리도 만무하다. 왜냐하면 상대는 무려 ‘작가’이기 때문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행성의 일몰을 보았대도 고작 눈앞에서 소멸해가는 광경을 안타까워하는 흥분만을 몇 줄 담은 글일게 뻔한 내 글과, 일몰의 풍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작가의 상상력이 같을 수가 있을까. 가령 야윈 그녀의 어깨에 슬그머니 머리를 기대어 스텝을 밟는 남자의 뒷모습을 그리는 시작이라든지. 일몰을 보고 다정하게 잡힌 그녀의 콧망울의 주름을 상기하리라고는 어찌 상상이나 해보겠는가.

물론 모험심과 호기심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데 나라고 한껏 부풀려진 가공의 세계일랑 못만들것도 없지 않은가 으름장을 놓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상상력의 집채가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세상으로는 비교될 수는 없는게 자명하다. 플롯이라거나, 여운을 줄만한 결말을 만들어내는 유기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자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상은 할 수 있어도 이를 실재적 의미로 실현하는 일은 그들만이 해낼 수 있는 다른 세계의 일인 것만 같다.

 

 

사람이 뭔가에 자극을 받는다는 것은 앎과 개인사, 이상적인 바람 등 수많은 실타래와도 같은 작용과 반작용이 얽혀서 일어나는 교감일터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하루에 일어나는 생각의 양이 1g정도라면, 또 어떤 사람은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과 연상 작용으로 생각난 과거의 양이 주체할 수 없이 커져서 100g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모든 작가들이 가장 많은 생각을 해내는 사람으로 분류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인공의 세상을 끊임없이 증축해내야 하는 숙명의 과제에는 반드시 이렇게 과도한 무게가 자리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일반인과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생각의 엄격한 경계가 아닐까.

 

 

 

누구든 순간에 겪어낸 그것이 잊혀지지 않을 성질의 차원의 새로움을 준다면 필시 이는 기억의 저장고에 가장 높고 깊은 곳으로 은닉될 것이다. 나중에 누군가에게 말할 기회라도 생기면 발설되는 순간 휘발되는 엄살도 가득 담아서, 설명할 수 있는 온갖 비유가 신화처럼 가공되어 오래 묵혀둔 보람을 잔뜩 누릴 일이다. 사람이 본래 이야기꾼이라는 업을 등지고는 살아갈 수 없는 본성을 지녔듯 조금씩이라도 덧대고 버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이야기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내 삶의 위안을 주는 사건으로 기억이 되든 아니든 어찌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윤색되고 부풀려진 허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 기억의 창고에서 벌어지는 반복적인 일들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이고, 창조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끊임없이 작동되는 생각이란 작용의 윤활유는 아닐까. 받은 자극이 주는 인상들이 단순히 기억의 밀실에 고이 간직된다면 지극히 평범해 보일 뿐이지만, 이것이 창조의 주재료가 된다면 이를 가장 잘 수행하는 자는 바로 예술가들의 일일터다.

평소 애쓰고 노력하면서 삶과 대면할 때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불현 듯 스치고 지나간 사소함들이 감각을 자극할 때가 있다. 세상의 수많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재료들이 새로운 창작품이 되어 이 또한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예술은 '창작'된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흐를수 있는 이유이다.  

 

 

책을 읽으면 작가 후기나 말머리에 대부분 자신에게 몰아친 교감의 순간을 고백하는 것으로 문을 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묘하게 행복감을 느꼈던 일, 심장이 고요히 뛰던 소리를 잊지 못해서 펜을 들었노라 고백하는 것이다. 매혹의 순간, 반드시 남기고 싶은 역사적 순간의 기록에 우리는 입을 모아 감탄하면서 동조해보곤 한다. 왜냐하면 내게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으니까.

모든 글에는 그 글을 이끌어낸 동기라는 게 존재한다.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의 탄생이 어떤 식으로 작가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그 창작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단 몇 명의 비화를 듣는 것으로도 어느 이름 모를 어느 작가에게서 듣는 창작 비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걸 상기할 수 있다. 대문호라 불리는 그들일지라도 세상의 모든 말들을 자유롭게 주어 담아서 그 영감의 촉각으로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점이 비슷하다. 자주 행간 속에 눈길이 멈출 때마다 작가란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 이야기가 출발한 것일까 하고 감탄했던 순간의 답을, 이렇게 찾을 수가 있다.

 

 

어차피 세상의 속도는 제 각각 누리는 것인데 작가들이 각자 창작의 윤활유가 된 지점에는 어김없이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고 있다. 일순 시간이 정지되더니 이것이 곧 그들만의 세계를 창조하여서 한권의 책으로 남게 되었다는 신화가 생겨 버리는 환타지다. ‘읽으면 읽을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매혹적인 소설로 남는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남다른 비화가 있었기 때문이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역시 고뇌했던 한 인간이었으며, 스치고 버리면 그만이었을 이야기를 여러 색으로 담아 빚어내는데 공을 들였다는 사실 여기도 새삼 상기해준다. 어쨌든 이들의 책이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새로운 해석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행운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진다. 일련의 과정들은 마치 작가가 우주에서 꼬리잡기 놀이를 하다 우연히 얻어 낸 화석처럼, 그저 평범한 돌이었던 것에 생명을 불어 넣어보는 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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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정호승.안도현.장석남.하응백 지음 / 공감의기쁨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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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언어는 세상의 모든 말이기도, 가장 소외되거나 버려진 궁지의 말이기도 하다. 시를 읽다 보면 분명 익숙한 세상의 언어로구나 싶다가도, 매료되는 순간 마치 처음 본 눈동자에 끌리는 순간처럼 아늑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은 아마 낯설다라고 표현할 것이다. 시는 소설과 에세이에서 처럼 우리의 삶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일과 목소리, 문득 물음표가 던져지는 사사로움을 말하려 한다. 다만 응축된 언어들의 배열이 낯설어서 우리는 시를 어렵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시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잉태된 것이며 동시에 시인마다의 고유한 눈이 그 보편성을 단 하나의 언어로 변환시켜주는 혜안이 부려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는 가장 내 시야의 가장 대척점에 서서 낯선 얼굴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는 것이다. 시인은 마치 세상을 사막 위를 걷는 방랑자처럼 떠도는 자, 우주의 별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는 모래의 무덤 위 그 세상의 가장자리를 응시한다. 그래서 시인은 어쩌면 소외된 언어를 줍는 수집가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시인이 부린 언어를 보고 있으면 천애 고아의 울음처럼 바람길 따라 퍼지는 울림에 그 끝을 모르고 막막함이 펼쳐지는 것 같다. 우리는 어째서 시를 사랑하는 것일까? 이리 슬픔만이 남아 떠도는데도. 물론 그렇지 않은 시도 많긴 하지만 대게 ’란 홀로 피어나고 바람결에 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이름 모를 홑씨 같은 습성이 있다. 슬픔의 대지 위에서 그 눈물의 샘을 먹고 자란 꽃, 그 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자의 입김에서 붉어지고 터지는 가련한 숙명이 있다. 어느새 날아가 버린 수많은 홑씨들의 언어들이 아득한 세상의 언어처럼 알알이 박히는 일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는 평생 시와 연애하는 네 명의 글쟁이들이 모여서 각자의 추억으로 또한 사랑만으로 이야기를 짓는다. 공통된 생각을 짚자면 이들이 생각하는 시는 변방의 풍경을 말하고 있다라는 점이다. 전형이거나 세계의 질서, 순응의 낱말과는 거리를 둔 전복적이고 일탈하며, 마구 움직이는 상상력의 세계관이 담겨 있어야 진짜 시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흡사 우주의 근성과도 같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구라는 중심에서 바라보는 규칙과 질서들은 알면 알수록 얼마나 우리가 틀린 존재들인가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되고 주변으로 시선을 옮기게 되면서, 변화와 상상력을 모색할 때 유연한 진실이 다가오게 돼 있다. 시 역시 세상의 가장 낯설고 뜻밖의 정경을 발견할 때 비로소 교감하고 정서적인 나눔이 생겨나는 것이다.

 

 

네 명의 눈에 들어온 몇몇 시를 보고 있자니 역시 그동안 읽지 않았던 시집들에 눈이 가게 되었다. 책장에 꽂힌 많지 않은 시집들의 목록을 죽 보면서 문득 최근 들어 시집을 전혀 사지 않았다는 실감에 부끄러웠다. 아닌게 아니라 나뿐만 아니라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시를 사 읽는지 모르겠다. ‘전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거의 읽지 않는다라고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 프롤로그에 나오는 말이지만, 사람들이 시를 어렵다고 생각하고 읽지를 않는다는 사정을 토로하는 부분이 나온다. 여러 가지 사정이야 있겠지만 시를 읽는 마음의 여유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럴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손에는 항시 자판과 휴대폰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여백을 지워나간다뭐라도 읽고 재미를 선사해주면 그만 아닌가 하면 또 모르지만 대개 이 매체들이 얼마만큼 유익한지는 미지수가 아닐까.

 

 

확실히 종이의 질감을 느끼면서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는 행위에는 최소한 간극이라는 시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새겨질만한 순간이 포착되면 읽는 행위도 멈추게 되고 자신만의 영원한 시간이 펼쳐지게 된다. 이것이 소설을 읽든 시를 읽든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따뜻한 방법일 텐데 사람들은 이를 점점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시는 완벽한 풀이를 위한 것이 아니며, 무궁무진한 길이 펼쳐진 변화의 언어가 살아 움직일 뿐이다. 좋은 시를 읽었을 때 사람은 변화하고, 추억을 더듬기도 하는 시간을 선사 받는다. 비록 시의 언어가 우리가 말할 때와 같은 문법의 규칙대로 움직이지 않고, 전혀 가 박혀야 할 단어가 아닌데 있다는 다소 낯선 풍경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이럴 때야 비로소 시가 시다워 진다는 아이러니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물론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말의 퍼즐을 맞추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렇고, 이 논리의 함정에서 당당히 벗어나는 읽기가 가능해질 때 진정 시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시는 항상 착란하고 세상 밖을 몽상하는 일로 풍부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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