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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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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글을 읽는 태도에는 제 각각의 관습적인 데가 있는 것이어서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에 균형이 잡혔다면 깨뜨리기 쉽지 않은 문제가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전작 <책 읽는 방법>을 읽었을 때 ‘슬로우 리딩’이란 주장을 전적으로 동감하면서도 속도감이 별로 늦춰지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고 좀 실망을 했었다. 사실 빨리 읽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속도감을 자랑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는 성미를 지닌 것도 아닌 내가 고쳐지지도 못할 그저 그런 책읽기를 해나가겠구나 하는 자조감만 들 뿐이었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나는 어떤 책을 읽어도 훗날 상세히 기억해내는 법이 거의 없다. 당연하게도 대강 눈으로만 읽어낸 탓이 클 것이다. 그러나 천천히 음미해가며 혹은 기억하려 애쓰며 읽는다는 것은 속도감과는 조금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작가가 말하는 속도감 안에는 당장은 조금 어렵더라도 천천히 알아간다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긍정의 가능성이 전제로 깔려 있다. 그러나 내 경우처럼 천천히 읽더라도 머리를 복잡하게 작동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작가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채로 머물게 된다면 당연히 책을 제대로 읽는 길과의 만남은 요원해진다. 그러니 그것은 천천히 읽는다고 해서 달라질 근본적인 대안은 아닌 것이다. 내가 유지하는 속도감의 윤활유라면 언제나 ‘재미’라는 요소가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천천히 산책하는 듯 읽고 싶어진대도 재미가 없는 책은 아주 시시하거나 지루한 상대와 함께하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책일 때만 더 알고 싶어지고 깊게 성찰하고 싶어지는 여유를 누리게 된다면 음미할 수 없을 정도의 책에는 전혀 가동될 리가 없다는 소리다. 물론 이 문제는 작가가 후기에 언급한 ‘슬로우 리딩’을 할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의 구분을 든 예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재미있는 책임을 전제로 했을 때 훗날 기억해내지 못하는 내 경우는 대관절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문제는 다시 원점이다. 나는 재미있더라도 거의 눈으로만 읽은 탓이 큰 것이다.


다시 말하면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우 리딩’이란 말 안에는 천천히 눈으로 읽으라는 뜻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중요한 건 천천히 마음으로 읽으라는 뜻이 담겨있다. 나는 천천히 읽었으되 눈으로 읽었기 때문에 그것을 거의 체득하지 못했고 기억까지 해내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천천히 여러 생각을 조합하면서 산책하듯이 걸어 나갔다면 나는 좀 더 다른 풍경들을 기억해냈을 것이고 좀 더 유익한 책읽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책을 읽는 방법 가운데서도 ‘소설’에 대한 좀 더 특화된 읽기 제안을 하는 책이다. 읽는 것에도 ‘방법’이 있다는 유아적인 가르침은, 뭔가 역행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소설 읽기’에 대한 구체적 제시를 한 책을 거의 접해본 적이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은 읽는 방법에 대한 빌미를 얻어 우리의 관습적 태도에 대한 성찰을 도와주고, 책을 대하는 창조적 해석을 이끌어내는 흥미로운 책이다.

그렇다면 좋은 책읽기란 무엇일까? 히라노 게이치로는 실제로 소설 쓰는 작가의 안목과 독자로서의 입장을 동시에 고려한 신중한 역할을 잘 활용하고 있다. 소설 속에 나돌며 떠도는 오브제들에 말을 걸어오는 영매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상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대상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일 것이다. 그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진 문장이 던지는 직구를 받는 일이 아니라 그 동안의 수많은 단서들을 골라내고 추려내 앞으로 이어질 상상력에 대한 가능성을 퍼즐처럼 재구성해보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이는 소설이 단 한 장면으로 축약될 수 있는 서사의 풍경화가 아닌 거의 모든 장면들이 겹쳐지고 포개져 거의 알아볼 수 없는 불분명한 형체의 그것, 추상화에 가까운 화폭을 증명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주 신중한 시간을 들여서 여러 가능성에 대한 매듭을 연결하고 새로운 통로를 발견하는 일이 인정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바가 바로 관계의 연동을 윤활하게 도와주는 일이다. 다른 장르에서와는 달리 소설의 책 읽기란 단어 하나만을 두고도 상황 그 이상 너머의 수가지 통로를 뻗어 상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책을 쓴 작가와 독자의 감각적인 환경을 잘 조합하고 문장의 행간에 담긴 각자의 상상력을 동참하라고 유도한다. 책에서 작가가 설명하고 있는 기초편만을 잘 봐도 이 막연하고도 무수한 경우를 새삼 보게 되는 일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함축화, 구조화 되어 쉽게 설명되는지도 동시에 보여준다. ‘거대한 화살표’의 표식대로 따라가다가 보이지 않는 ‘작은 화살표’의 방향대로 플롯을 이해하다보면 미시적인 단서들이 독자에게 어떤 기쁨을 주는지 세세한 단서 또한 놓치지 말라고 전한다. 소설이 주는 기쁨 중에 이러한 미세한 방향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책이 주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세상에 없는 픽션의 세계를 동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예를 들며 언급하는 거의 모든 소설들은 그것마다의 특장점 혹은 단점을 어떻게 커버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어떨 때에는 왜 이런 것까지 고려하며 읽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요한 데가 있다. 이렇게 작가가 늘어놓은 장치들을 모두 끼우고 장착되어 연동되는 추진력은 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진 기분을 선사하는 기쁨을 준다. 좀 달리 말하면 소설을 전보다 좀 ‘낯설게’ 읽게 되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한 번도 해보지 못했지만 책에 동그라미나 밑줄 따위를 그어가며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천천히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수만 가지를 구획하며 깔아 놓았을 혹은 그러지 않았지만 독자의 참여로 증폭되는 기운을 모두 떠안은 합작의 완성을 돕는 일이다. 그러니 그것은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좁은 통로를 건너야 하는 이유이고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소설의 진풍경을 진정으로 누릴 자인 것이다.

이 상상의 공간을 넓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의도를 밝혀내는 집요함이 요구된다. 좋은 글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삶 보다는 보이지 않은 그 너머를 응시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언어가 빚어내는 대상의 본질을 알아내고 새로운 가치로서의 언어를 바라보는 일은 그래서 새로운 책읽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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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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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를 읽고 있자니까 입가에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된다. ‘익살스러움’의 천진난만한 기운들이 눈과 마음을 맑게 정화시켜주는 듯 하고, 저잣거리에서 복닥거리며 들려오는 소리가 색색의 풍요로움으로 전해진다. 민화를 보는 일은 그득하고도 다양한 삶의 면면을 목격하는 일처럼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일이다. 마치 시간을 멈추게라도 해서 그 안의 이야기를 모두 머릿속에 기록하라는 것만 같이 자주 정지하게 만든다.
우리가 민화를 두고 왜 위대한 예술인지를 논할 때 이유를 들라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해학의 면모와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가장 인상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그림 안의 사람이 웃고 있기라도 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마저 든다. 단순히 그 옛날 어느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겠거니 하는 인상을 뛰어 넘은, 이들도 나와 같이 웃고 삶의 희로애락을 느꼈을 어느 개인의 역사로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간을 맞을 때마다 어떤 경지의 숭고함마저 느끼게 된다. 마치 해학이라는 미학의 일면을 한참 넘어서서 슬픔마저 밀려오는 순수의 세계, 우주의 영원 따위를 상상하게 되는 희미한 순간이다. 
 

민화는 ‘예술’이라는 거대하고도 고유한 영역의 무게에 감히 접근하지 못하다가 어쩌면 제멋대로일 수 있는 방식으로 태어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예술이다. 대다수의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어 소박한 정취만으로 그 모든 것이게 하는 그림 한 장의 위력은 실로 엄청나다.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그래서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아프고도 다행스럽기도 한 독특한 태생의 예술 민화. 민화는 특정 계급이 향유하던 엄숙주의, 고급성을 상실한(물론 의도된 상실이어서 아름다운) 진중의 틀을 벗어내고, 사람 냄새 물큰 풍기는 ‘익살스러움’의 재치를 한껏 뽐내는 예술이어서 좋다. 자연과 사물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포착하고,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을 그려냈기 때문에 민화는 우리네 뒷모습을 참 많이 닮았고 그래서 더 특별하다.


민화의 또다른 면모 가운데 익살스러움과 버금가는 매력을 들자면 그 중 으뜸은 역시 ‘일탈’과 ‘자유로움’일 것이다. ‘예술’이라 함은 그 본질이 ‘상식’과 ‘관습’적인 것에 틀을 벗는데 있다. 거기에 이왕이면 인간의 가장 솔직한 단면을 마음껏 구현해 낸 것이어야 좋다. 전통과 관습의 틀을 깨고 마음껏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구사한 민화는 숙명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도드라진 매력이 없다. 그렇지만 기존의 예술과 비교하여 위대한 점이라면 민화가 가장 솔직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당당히 말한다는 것이다. 터부시되는 금기를 상징으로 교묘히 배열하고 가장 들추기 어려운 부분만을 적나라하게 다루는 호기가 있다. 이전까지의 예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권위의 상실, 타락의 외침이다. 그래서 민화는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그 본연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예술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사실 기존 예술에서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떤 사고와 방식으로 예술을 향유했는지 예측 가능성을 뛰어넘는 일은 거의 없다. 유교와 관습 따위를 어떻게든 중시하면서 양반문화를 예술에 구사하여왔는지 몇 편의 작품으로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거의 문자로도 기록된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이런 민화로나마 알도리가 없다. 민화의 솔직함과 자유분방함은 단도직입적이고, 때로 진지하여서 십장생도와 같은 예술작품으로는 아주 뛰어난 예술흐름을 선두할만큼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고즈넉하고 진중하기만 한 기존의 예술작품과는 다르게 항아리와 병풍, 일상생활의 물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면도 지금의 생활 밀착형 예술의 흐름을 선두한 면면일 것이다.
서민 화가들의 다채로운 상상의 나래는 닭 한 마리를 그리더라도 있는 그대로가 아닌 분석하고 재구성한 새로운 닭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꼬리를 한껏 감추고 호쾌한 기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호랑이는 또 어떠한가. 권위가 땅으로 쳐 박혀 고양이도 웃고 갈 정도의 순진무구한 표정의 양반이 보이는 듯도 하다.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제멋대로의 자연의 재구성은 사실 당시 계급 문화와 사회의 단면을 비집는 ‘일탈’ 행위였다. 마음껏 놀리고 풍자하고 재미있게 웃고 떠들 수 있는 용기에서 조용히 일어난 민화는 그래서 예술의 사회적 쓰임으로서 그 질적 양상을 좀 더 다양하고 넓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보면 민화를 세계에 알리려는 저자의 오랜 숙원의 목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우리의 그림이 세계에 어떤 식으로 전해지고 그 의미를 찾아가는지 그 위상을 자세히 전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민화의 다양성이 자세한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어서 민화의 특징을 알기에 용이하다. 우리 민화가 사람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실용성 있는 장식이 되기도 하고, 주술이 되기도 하며, 상징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로 남은 것도 높이 평가할 일이다. 많은 예술적 의의가 있겠지만 민화가 인간의 소박한 바람에 의해 투영된 매개체로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는 사실은 민중의 삶이 왜 더욱 위대한 일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서민들의 마음과 염원의 유토피아를 가능케 하는 온 삶, 과거 혹은 미래의 세계관을 매개해주는 민화의 매력은 그래서 차고도 넘친다. 왜 민화 한 점을 보면서 그 때의 자연이, 사람들이, 그곳의 이야기들이 내게 쏟아져 흐르는지 그 이유를 오랫동안 생각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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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속의 색]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 기억 속의 색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권장도서
미셸 파스투로 지음, 최정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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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 중에 최초의 기억을 자극하는 감각이라면 역시 시각일 것이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장면을 '흰색'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로 기억한다. 엄마가 입원한 병원에서 고아가 된 것 처럼 막 울고 있던 나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에서 처럼 카메라가 360도 트래킹을 하며 나를 내려다보는 것으로 이미지화 되어있다. 기억은 어떻게든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틀어지고 변형되는 듯하다. 어렴풋하지만 목이 터져라 울던 내 울음소리, 이윽고 손에 백원을 쥐어 주던 '흰색' 옷을 입은 아저씨의 음성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흰옷을 입은 사람은 의사였던 것 같다. 상냥하게 ‘왜 우니?’라고 물어와 준 의사 덕분에 나는 이내 울음을 그쳤고 내가 생각하는 '흰색'의 이미지는 '황량함과 외로움'인 동시에 날 구원해준 '상냥함'의 색이다. 

 

우리가 본다는 것에 대한 인상은 인지체계에 거의 모든 것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듣고 알게 되는 감각은 어떤 이미지를 형성하기 힘들기 때문에 당연히 시각의 전형을 빌릴 수밖에 없고, 이는 다른 감각들도 마찬가지다. 시각은 여느 감각에 비해 가장 사실적이고 있는 그대로의 ‘바라봄’을 우리 뇌리에 옮겨 심는다. 물론 오류도 있을 수 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대로의 변형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부작용에 따른 변형이 어떻게 보면 사람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인간적인 매력 가운데 하나이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시각으로 우리는 거의 모든 이미지로의 '앎'을 그려내어 살아간다.


<우리 기억 속의 색>은 프랑스 색의 학자 미셸 파스투로가 전 생애를 걸쳐 바라본 색의 향연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부터 해서 거의 모든 삶의 전반을 돌아보게 만든다. 구체적으로 색을 통해 관통하는 인생의 이색적인 회귀를 보여주는 한편 색에 깊이 관여하는 역사, 문화적인 색의 고찰을 깊이 성찰한다. 크게 일곱 챕터로 나누어 기억을 위한 색이라는 주제로 의복, 일상생활, 예술과 문학, 스포츠, 신화와 상징, 취향, 단어들에 이르는 총망라된 색의 모든 것을 다뤄낸다. 아닌 게 아니라 이토록 색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일이 있었던가 싶게 기억에 입힌 색을 만져보고 그것은 내게 어떤 의미였던가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준다. 특히 알지 못했던 색에 얽힌 역사적 일이라던가, 상징하는 색의 서로 다른 의미, 명명함의 애매함 등을 알게 된 것은 색의 또 다른 이면을 알게 해주는 소중한 정보다.

   

색에 대한 이론을 전달하는 방식 대신 그의 어법은 내내 그 개인의 삶에서 배어나온 색의 향기를 맡게 해주는 식이다. 그래서 그의 산문을 읽는 것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쉽고 경쾌한 보폭으로 같이 걸어가는 느낌을 준다. 어떤 특정 색을 통해서 삶을 알고 역사와 시대와 문화를 알게 해주는 것, 분명 이색적인 삶의 성찰이다. 사실 이 책은 색을 구분 짓거나 각각의 인상을 말하려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색이 어떤 식으로 진화하여 왔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색이 서로 엉키고 다른 둔탁하다거나 부드럽거나 한 다른 감각들과 어울러져 기억하게 한다. 색은 어느 나라에서고 통용될 수 없는 ‘다름’을 본질로 한 저마다의 정의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셸 파스투로가 보는 색은 언제나 ‘차이’를 강조하는 색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없음’에 근거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어떠한 색을 강조하기 보다는 다만 색조가 있을 뿐이고 그것은 ‘아마도’와 ‘완전히 아닌’ 사이의 숭고함으로 삶의 색을 말하고자 함이다.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날의 색감들이 내 인생의 색을 어떻게 물들이게 될 지, 내 옆의 수많은 인생들의 색이 나를 좀 더 풍요롭게 발현시켰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드는, 그런, 짙은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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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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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예술이 태동되던 시절 당시민들에게 얼마만큼의 큰 충격을 주었을지, 그들의 경멸스런 폭언과 호들갑스러운 얼굴을 상상하는 일은 현대예술을 보여주는 가장 흥미로운 일면이다. 예술은 전에 없이 극치의 정점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파격과 충격의 소용돌이에 봉착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보수주의자들의 눈에 이 가속은 그저 추락의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21세기인 지금, 우리는 현대예술을 가장 아름다운 예술적 도약의 시기로 돌아본다. 아직도 대중이 보기에 아름답지 않거나 미디어아트같은 낯선 예술을 만나면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다는 호소를 하긴 하지만 어쨌든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는 분명히 그 전의 의미와는 크게 변했다. 이런 식으로 오기까지 20세기의 사람들에게 예술의 반역은 어떻게 기성의 사유를 위협했을지 상상할수록 재미있어진다. 이 시기의 위대한 추락이 예술의 한계를 또다시 확장시킨 셈이니 말이다.


당연하게도 19세기까지의 예술은 그 목적이 하나의 극명한 지점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 이라는 명제이다. 미의 추구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니 진리와도 같은 불변의 가치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은 더 이상 ‘아름다움’만을 예술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 아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혁명적이고 위대한 시대였던 20세기 초반의 미술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그 이전까지의 예술은 새로움을 추구한다거나 하는 것이 전혀 중요한 시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움을 터부시하고 기존에 있는 것과 흡사할수록 존중받던 시대였다. 신을 모방하는 일로부터 출발한 예술의 역사를 상기해보자. 신의 가장 가까운 존재인 인간, 신을 재현해내는 기술이나 높이 평가하던 시대였으니 기술로서의 예술장이나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시대였다. 작가 고유의 새로움은 신이 준 영역을 거부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현대예술은 더 이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 심지어는 추하고 역겨운 것, 기성품을 예술이라 우기는(?) 상황에 까지 오게 된다. 이러한 예술의 시대의 도래가 가져온 충격효과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사유체제 전반의 혁명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격렬한 시대를 그래서 우리는 예술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라 부르는 이유이다.




이 책은 주로 제들마이어라는 문화보수주의자의 논리를 분석하는 것을 참고하며 구성한다. 현대예술에 적대적이던 제들마이어의 태도가 결국 현대예술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이나 호의적인 평단의 시각보다도 더 객관적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가장 대척점에서 비판할 것을 찾다보니 엄격하고 정교함의 아이러니가 발휘된 것일까. 예리하고 객관적인 분석적이어서 어쩌면 이 흐름을 인정하기 어려웠다기 보다 이미 매력에 빠진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섬세하다.

현대예술은 흔히 아방가르드의 시대라고도 불린다. 이의 근본적인 맥락은 삶이 변해야한다는 급진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예술이 더 이상 머물거나 한걸음 정도 내딛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20세기의 아방가르드 시대 예술은 당시 체제와 급변하는 환경에의 급진적 사유의 전환이 반영된 결과다. 영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고상한 차원의 것이 아닌 사회에 적극적으로 반영이 될만한 도구가 되고, 밀접한 관계 속에서 쓸만한 피드백을 주고받는 꼴이 되었다. 대놓고 자본의 수단이 되거나 정치적 구호로 쓰이기도 하고, 예술이 더 이상 예술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모순의 방점까지 찍는 등 수없이 많은 사조의 탄생과 소멸을 오간다. 
 

또한 현대예술 이전의 예술은 스토리텔링이 있던 신화적이고 문화적인 요소가 지배하였지만 이후의 시대에는 이를 의도적으로 완전히 배제하려다보니 점점 추상성을 띄게 된다. 그러나 극한의 기호를 배제해 버렸을때 그 의미가 상실되어버린 상태가 과연 예술일수 있을까란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정신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다. 근원적인 것을 진지하게 바라본다는 시각은 문명 이전의 그림에 관심을 갖는 표현주의같은 사조의 발전도 가져오게도 된다. 
뿐만 아니라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기계화된 문명과 학살의 큰 충격은 '광기'로 표출됨으로서 기술의 합리에서 도망치는 행위로 표현되기에 이른다. 예술가의 역할을 슬며시 숨겨 놓음으로서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초현실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사회 변화에 따른 사유의 전환이 궁극적으로 예술을 변화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 셈이다.
순수한 예술의 상태에서 추상화가 되기까지, 또는 바우하우스나 구축주의자들에 의해 예술이 기술과 따로 분리되지 않는 기술적 구축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일 등은 미술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도 전혀 새로운 맥을 짚어내야 하는 예술의 본질을 흔드는 사건이었다. 


아방가르드의 급진성은 주어진 상황이나 체계를 비판하게 하고 결국 내가 사는 세상을 마음껏 조립함으로서 의미의 폭을 넓히는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진보를 가능하게 한 예술은 이런 식으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아마 더 이상 이보다 더 급변하는 시대는 없을거란 생각을 하니 이들의 열성적 태도를 자꾸 들여다 보게 된다. 다 알기도 힘들만큼 수많은 사조가 탄생하게 된데에는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다양함들은 사회의 변혁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질서들을 만들어 나갔다. 언제나 현실보다 더 나은 삶으로의 몸부림이 예술 안에는 이런 식의 새로움으로 발현된 것이다. 격렬함 뿐인 예술의 한 시기가 왜 이토록 애처롭고 야단스럽게 아름다웠는지 이제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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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글.사진 / 문예중앙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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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를 누르고 한쪽 눈의 시야에서 조리개가 닫혀 지는 찰나의 단순함, 이내 찰칵하며 최소한의 기계음만으로 전해지는 건조함의 마른 기운, 그저 이 순간이 전해오는 기쁨만으로 언제 어디로든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이윽고 인화되어 나온 작은 네모 안의 세상을 만나면 마치 봉인된 시간이 열리는 일처럼 세상과 사람, 사물과 마음이 온통 흔들려대는 타임슬립을 경험한다. 그 때 그 시간으로 흠뻑 빠지게 되는 일이 좋아서, 내 손이 포착해낸 찰나의 기록이라는 점이 좋아서 언제나 우쭐함의 경계어딘가를 간지럽히는 '사진'의 물성을 사랑했을 것이다. 분명 사진을 찍지 않을 때 내 눈이 한 일보다 사진을 좋아하게 된 이후의 내 눈이 더 나았다. 몇 배는 더 유심히 세상 안의 작은 것들을 들여다 볼 것이 종용되는 기쁨은 아주 큰 것이었다. 사진은 눈이 본 ‘기억’이라는 이름을 영원히 묶어두어 사람들에게 ‘남는 건 사진뿐이다’라는 추억의 증표로 존재의 가장 편리한 증거인 예술이 되었다.

사진이 가지는 여러 속성들 가운데서도 아마 '표현의 도구'로서의 의미가 사람들에게 가장 쉬운 접근 방식일 것이다. 언젠가 숲길을 걷다 죽은 뱀을 찍게 되었을 때, 놀이터에서 노는 꼬마들의 웃는 모습을 보고, 뻥튀기 장수와 무가지를 줍는 노인의 손을 포착해낸 순간들은 아직도 내 방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소중한 일상의 기록이다.
지금의 내 사유를 표현하고 싶다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말’이 가장 편한 도구가 되겠지만 그것을 '기록'하고 싶어지면 사유는 ‘글’로 표현될 것이다. 여기에 나만의 창의적인 해석이 가미되면 ‘예술’이라는 이름의 ‘문학’과 ‘음악’과 ‘그림’이 된다. 사진은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기록의 산물이었는데도 지금은 가장 대중적인 예술의 한 장르가 되었다. 이제 현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예술은 사진임에 틀림없을 것이고 미술의 중심에 사진이 있게 된 것도 예술의 놀라운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일상의 기록들을 사진이라는 일기로 저장할 수 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과거가 되어 버리지만 사진으로 남겨진 풍경은 존재가 거기 있었음을 말해주니 각인의 도구로 가장 적나라한 도구이다. 이러한 면에서 사진은 다른 장르보다 구사하기 덜 어렵다는 이유로 예술 안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경계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논란의 중심에 백여년 넘는 세월 동안 서서히 '나도 철학이 있다'라는 방점을 찍고 나니, 현대예술에서의 사진은 이제 엄연한 '사진예술'이라는 명패를 달게 되었다.  


이러저러한 요소로 사진의 매력이 차고 넘치는걸 알지만 개인적으로는 각별했던 애정이 예전만큼의 크기로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사진이 누구나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예술놀이라는 건 존중하지만 역설로 누구나가 전문가용 카메라를 들고 허세를 떠는 대상이 된데는 경계를 할 필요가 있게 됐다. 이른바 ‘셀카질’을 보는 것의 지겨움도 생겨나게 되었고, 혹은 사진이 더 이상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 동요된 이유일 수도 있겠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사진’의 잘못(?)은 아니며 본질과는 동떨어진 문제임을 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해서 예술품으로 취급하지는 않듯이 말이다. 그것을 잘 알지만 사진만이 갖는 예술적 가치를 여전히 의문 없이 매력으로 느끼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머뭇거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사진의 기술적 왜곡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문제에 대한 불안함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책의 저자는 기술적 문제가 사진철학의 핵심 영역이 아니어서 의도적으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고서야 나만의 사소한 의문과 회의적 시선들이 사진예술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터부시의 태도와도 상충됨을 알 수 있었다. 사진에 대한 회의적이고 왜곡된 시선은 사실 이 책이 말하려는 ‘철학’에 대한 부재와도 결부된다. 사진은 오랜 세월 회화의 조소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다른 예술 장르가 고심해 내놓은 ‘철학’적 사유를 논하는 장이 된다라면, 사진예술은 철학 없이도 쉽게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의 경계점 위에 서 있던 셈이다. 또한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는 대중성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예술가처럼 기술적 차별화도 둘 수 없는 노릇이다. 가장 크게는 이 두 가지의 사실로써도 사진이 예술의 문턱에서 오르내리던 이유가 됐다. 물론 지금은 사진이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로 자리매김한 것이 사실이고 이 책이 설명하는 여러 철학적 사유를 충분히 읽어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또 한 세기가 오고 디지털시대의 도래가 사진의 사실적 가치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치명타로 그 이면을 장식하게 됐다. 이러한 문제에 저자의 시선은, 사진이 어떤 활용일 뿐 그것이 실재와 다를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말한다. 언제나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왜곡과 변형이 가능함을 주장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의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양면성을 가진다는 본연의 속성을 자꾸만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감각과 사실의 부분에서 작가가 전하는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나서야 사진의 진면모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런 대로라면 작가의 주장대로 사진은 ‘세상에 대한 거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언제나 양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지구라는 구체가 자전을 하는 만큼의 엎치락 뒷치락 정도는 수용해야 할 테니 말이다. 이를 읽으면서 비로소 조금 오해를 푼 계기가 된 것 같다. 역시 '사진'의 태생은 언제고 '진실'을 외친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진은 어떤 '시선'이며 그 안에 철학이 없다면 그것은 추억일 뿐 예술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사진철학의 풍경들>에서 전하는 사진의 관점은 말 그대로 ‘철학’적 사유에 대한 출발로부터 관찰된 것들이다. 인간의 감각기관에서 불러일으켜지는 감각적 풍경의 일환으로 ‘보다’의 인식의 풍경에서, 사유를 하고 표현해내며 감상과 마음의 풍경에 이르는 다섯 테마로의 풍경을 담아낸다. 각 주제에 걸맞은 충분한 문제제시와 시대적 배경, 지식의 전달을 돕는 세심함이 돋보인다. 또한 작가가 전하는 또 다른 세계인 ‘생각하는 사진’의 이미지들은 주제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깊이를 증폭시켜준다. 사진이 단순히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물이라는데서 한발 더 나아가 어떤 식으로든 예술적 가치를 찾는 자발적 사유의 세계로 초대해준다고 말한다. 이 책은 특히 사진예술의 처음을 시대가 갖는 철학적 배경과 잘 버무려 설명해주고 혹시라도 잘못 인식되어 온 시선의 오류를 바로 잡고 매무새를 가다듬는 품위를 지닌다. 어떤 식으로 발전되어왔는가에 대한 과정을 알게 되는 것은 사진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결국 <사진철학의 풍경들>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근본적인 사진철학의 관점은 두 가지 인식의 틀에서 나온다고 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의 내적인 본질을 가다듬는 일, 결국 바라본다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자아를 인식하는 최초의 출발이 ‘나를 바라 봄’이라는데에 있다. 다른 하나는 나와 마주한 세상과의 외면 세계를 인식하는 눈이다. 시선이 철학적인 성찰과 만나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어떤 물음을 던지고 나서야 방향을 찾게 된다라면 우리는 무조건 그 사진이 말하는 여러 풍경 이면의 세상을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인식의 답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에서 한낱 사소함으로도 가슴에 풍크툼을 남기게 되는 일, 이 경험을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다. 영원히 알지 못하는 세계로 날아가 버리게 되더라도 그 많은 의문들은 가슴에 남아서 내 인식의 여과를 끊임없이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들의 부지런함과 세상의 양면성을 이해하는 일이야 말로 사진예술의 ‘철학적’면모를 이해하는 좀 더 풍성한 인식의 틀이 된다. 사진 한 장이 불러오는 영혼의 무게를 버겁게 인지하면서, 세상의 온기와 향기를 상상하는 일이 사진의 철학이다. 이러한 눈으로 본다면 네 꼭짓점이 펼쳐 보이는 세상의 길이가 얼마나 더 넓게 확장될지 그 크기를 가늠하기도 어려울 만큼 멋진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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