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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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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살아도 하루키처럼 어마어마한 생각을 해내고, 신선한 글을 써내려갈 수 있다면이란 생각을 해본다. 참으로 다양한 영역의 일을 하는 것으로 가짓수는 많지만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키처럼 단 몇가지 일인데 이걸 못하겠어?’ 라는 듯 완벽히 해내는 사람이 있다. 더한 것은 과시욕에서 뿜어진 열정같은 것도 아니고, 그저 이룸의 바탕 위에 글쓰기와 음악이라는 중심축이 바로 서있을 뿐이라니 더 할 말도 없어진다. 이쯤이면 하루키같은 사람이 부럽지 않고 달리 어떤 사람이 부러울까란 말만 무한 복창하게 된다.

그는 워낙 사생활 노출을 꺼려하는데다 작가라면 부푼 마음을 안고 참여할 것 같은 낭독회나 사인회 마저도 마다한다니 인간 하루키를 상상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다. 그럼에도 그가 전 세계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노벨상에 여러 번 언급될 만큼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상기하면 단언컨대 사람들이 한 작가의 사적인 면모를 전혀 모르거나 다소 아는 정도라 할지라도 별로 상관 없어한다는 것을 반갑게 인지할 수 있다. 작가의 사생활을 조금 더 안다고 해서 작품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것도 아리송한 일이고, 또한 생각해보면 전혀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다. 몇몇 산문이나 에세이, 소개글, 또는 신문기사를 통해서 알게 된 정보일 뿐이지만 이 정도라도 하루키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아주 가까운 사람처럼 인식한다. 그리고 이 착각의 기쁨을 매우 즐겁게 누린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루키의 글은 언제나 그렇다.  

 

 

이번 <잡문집>이 하루키의 사적인 면모와 생각들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에게 아주 반갑고 소소한 재미를 줄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아 반갑다. 하루키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허구의 인물을 통해 그의 생각이나 삶을 조금이나마 반추해보던 독자들에게 이번 책은 온갖 잡설의 형태로 다양한 하루키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된 점이 흥미롭다. 물론 메모지에 적혔을만한 지극히 사적인 발현 정도라기에는 모자람이 있겠지만 나름대로 형식과 격식을 내려놓은 평범한 글로의 선보임이 하루키를 좀 더 가까운 사람이게 해줌에 부족함이 없다.

친구를 대하는 태도라던가, 평소 어떤 일상을 즐기며 하루를 보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마치 사생활을 카메라로 찍어 방영해주는 듯이 자세하다. 소설 이외의 산문이나 에세이 형식의 글을 간간이 읽어보기는 했지만 소개되지 않은 짧은 글들은 읽을 기회가 좀처럼 없어서인지 잡문들이 하루키의 일상을 쫓아 다니는 것처럼 소소하다. 그는 여전히 늙지 않은 채로 40년 전의 그와 지금의 그를 데칼코마니처럼 그려내고 있다. 청춘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한 화석같은 사람, 왜 고유명사 하루키일 수 있는지 처연하게 말한다.

 

 

 

<잡문집>에서 하루키는 논리에 근거하지 않은 자신만의 호불호가 분명한 인간이기를 선언한다. 이 호불호란 것도 주도면밀하게 축조되어 온 바탕위에 지어진 것이니 조금은 엄격해 보이는 면까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장인의 고집처럼 느껴진다. 그의 고독과, 이상하리만치 청춘의 봄날처럼 느껴지는 문장들을 읽으면서 아무런 짐도 꾸리지 않은 채 떠나온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고 싶어지는 기분이 든다.

생각해보면 그가 소설 속에서 창조해낸 세계는 어딘가 있을 법한 세계지만 한 번도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 드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본질에 대한 통찰을 담고, 불온한 풍자와 부조리함이 버무려진 현재의 모습은 아프고, 끔찍하고, 쓸쓸하기만 해서일까. 그래서 하루키의 글을 읽는 것은 대게 밀어내는 세월처럼 느껴졌다. 이쯤이면 여느 소설과도 구별되는 힘을 가지기 어렵다고도 할 수 있지만 하루키는 여기에 관습적인 내러티브 형식을 살짝 비켜나간, 그러니까 좀 더 내밀하고 치밀한 인간의 본성과 치부를 드러내는 것으로 사람들을 당황시킨다. 그는 소설에서나 여기 실린 잡문에서 조차 전능적이고도 현학적인 자세를 한번도 취하지 않을 만큼 권위적인 글쓰기를 거부한다. 그의 어체가 남성적이고 호불호가 분명하다는 느낌같은 것을 고려할 때 이 또한 그리 쉬운 일은 아닐텐데 어느 글에서나 섬세함을 놓치지 않는걸 보면, 참으로 고집스러운 규칙이 작동하는 모양이다언제나 자유롭고 관습적 태도를 따르지 않는 그만의 세계를 유연하게 그려나갈 줄 안다. 그 어떤 통제의 관장 없이 자연스럽게 세계관을 만들어나가는 태도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의 이야기는 굴곡 없이 매끈한 흐름을 보여주지 않고 좀 더 고약해지기를 궁리하고 변형되기를 꿈꾸는 글쓰기다. 금기라던가, 억압된 욕구 같은 것을 두 볼이 빨개지도록 과감히 그려내기도 하고 어떤 경계조차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일탈을 부추기는 당돌함이 있기도 하다. 그의 글이 언제나 청춘이란 단어를 머금게 하는 생기와 신선함이 있는 이유와도 상통할 것이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감흥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정확한 때와 뭘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시시콜콜함을 읊는 것은 마치 어느 대통령이 죽었을 때라던가 큰 재난이 왔을 때 무얼 했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에 대한 말을 줄줄이 내뱉는 일처럼 큰 충격인 모양이다. 이 책에서는 하루키가 왜 그토록 평범한 글쓰기를 거부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순응하듯 살아가는 것 같아도 어딘가 자유분방해 보이고 그 느낌이 영롱하게 발산되어 보이는 이유는 이런 남다른 생각때문이었다.

그의 글을 보며 전 세대가 공감하거나 한편 크고 작은 파문을 일으킬 때마다 누구나가 그 젊은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 생각의 끝에는 항상 이러한 흥미로운 호기심이 미치곤 했다. 그가 언제 태어났고 어떤 환경 속에서 자란 세대인지를 돌아보게 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나이로 따지면 환갑이 넘은, 아무리 요즘 세상에 노인 축에도 못끼는 나이라지만 노인이라면 노인인 나이. 하루키는 일본이 한창 부흥하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는데 이를 감안해보면 그의 젊은 글쓰기가 왜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았는가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어려움 없이 살만한 가정에서 태어나 팝송과 재즈를 들으며 자랐고, 결혼을 해서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는 요즘 세대에서나 봄 직한 두 사람만의 생활을 영위해 나간 삶. 살만 해진 1세대의 사람들이 이제 노인이 되어 어떻게 늙어가는 지를 하루키를 보며 가늠해 본다. 그와 우리네 환갑 넘은 노인을 나란히 놓고 상상하기에는 아무래도 괴리가 크겠지만 우리의 60-70년 세대들이 40-50대가 된 지금 앞으로 십년 후에 하루키처럼 젊은 생각으로 넘쳐나는 그야말로 꼰대스럽지않은 세대의 출현이 더없이 반갑게 기다려 진다. 하루키는 도무지 늙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언제나 변함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내는 신작들만 보아도 '언제까지나 파릇파릇한 감성으로 젊음을 이어갈 수도 있구나' 하는 믿음 같은 것을 더욱 견고하게 심어주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글장이로 살아가는 삶,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가장 날선 눈으로 보고 예민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숙명이 버거웠을 법도 한데 철두철미한 마음가짐으로 상처받지 않는 사람처럼 매우 단단한 심지로 버티며 작가의 삶을 살아왔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작가지만 하루키는 분명 우리 안에 있는 사람이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라는 삶과 지극히 개인적인 또 다른 삶을 잘 분리하며 살아간 것이 이 <잡문집>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겸손하고도 고집스러운 비법, 이것이 어쩌면 엄숙하거나 거장의 반열에서 느껴질 아우라를 벗어나는 그만의 젊은피였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글을 쓰지만 적당량을 쓸 것, 언제나 일어나면 운동을 하고, 맥주를 마시며 야구를 관람하는 평범한 일상들이 젊음을 언제까지라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처럼 다음 작품에도 미칠 것이다.

글 속에 이웃해 있는 모든 존재들의 입에서 그가 보는 세상과 우리가 봐야 할 세상에 대한 미지의 그림자가 건강히 드리워 질 것 같은 기운으로, 오늘따라 雜스러움이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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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을 보내주세요
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간절히 필요한 순간, 두뇌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지적 유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예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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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제 삶을 둘러 싼 모든 기호들이나 이미지, 소리와 사상과 말과 온갖 오브제들이 떠도는 세상을 보고 배운다. 그리고 그 나름의 인식체계 속에 평생을 끊임없이 입력해가며 살아간다. 그런 수순이라지만 그렇다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물론 온갖 것들의 개념을 배워나가는 상황이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고 각자의 뇌역할이 다르기 때문에라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모두 제각각의 시점에서 정확하거나 불명한 이유를 달고 어떠한 기호나 이미지로서 기억될 일이다. 그런데 모든 의미들의 어원이나 기원을 파악해내는 일은 살면서 아주 드문 일이어서 가령 아프다의 개념을 생각해볼 때, 이 상태를 '몸의 고통'쯤이란 단어로 이리저리 설명해내다가 종국에는 이마저도 더 깊은 어원이지는 않지 않냐는 황망한 심산만이 들 가능성이 크다. 즉 의미의 진실보다 짧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만이 개념의 온상인냥 말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좋거나 나쁨, 애매하거나, 어렵거나, 가볍거나, 진중한 인상들처럼 가장 기본적인 감각적 능력을 빌어 또 개인에게 익숙한 에피소드와 일상의 코드만이 맞물리는 지점에 따라서 그런 식으로만 명확해질 도리가 있을 것이다. 뇌리에는 무의미의 유혹에서 용케 탈출한, 고작 광범위한 범주의 본질의 도식만을 그려낼 가능성만이 희미하게 '안다'의 경계를 오갈 것이다.

 

 

프랑스 문단의 거장 미셸 투르니에가 제기하는 본질에 대한 다름의 인식은 바로 우리의 감각적 능력과 개인의 경험 밖의 이야기를 던져 놓는 개념의 진짜 이야기를 말하려는 시도이다. 그동안 철학서나 개념서 같은 논리의 인식체계를 다루는 책에서나 봤음직한 개념들을 진짜 기원적인 뿌리를 알려줌은 물론이요, 그만의 상상력이 보태지고 새롭게 발굴해낸 의미가 덧대어 전복적이고도 새로운 인식체계의 전환을 돕는다. 단순하지만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개념들을 전면에 드러내 놓음으로써 오히려 왜 이런 쉬운 단어를 새삼 탐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호기심이 불러 일으켜진다. 가령 남자와 여자, 목욕과 샤워, 아름다움과 숭고함 등 서로 상반되거나 이웃해 보이는 단어들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새롭다. 어느새 그곳의 틈과 균열이 만들어져서는 기어이 조각내지고 제 철학과 상상력이 보태진 지혜가 새로운 퍼즐로 보이게 되는 또다른 탄생을 낳게 한다. 이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한 반기라기보다는 좀 더 깊은 의미로의 확장을 건축하는 일이다. 이 심리적인 차별화의 출발로 계열화된 구조가 무시되고 상상력이 증폭되는 일이 아닌가 싶어진다.

 

 

미셸 투르니에는 본질적으로 깊이에의 개념인식이 그 표면을 벗겨내고 될 수 있는 한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하는 탐험으로의 고찰이라 말한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으로 가서 그곳의 다른 면을 보고 오게 되기를 꿈꾸는 여행의 산파와도 같다. 이 책이 돋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가장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맛을 체험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각 개념들의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연원의 뿌리를 소개하거나 어원의 연쇄고리를 타고 도착하는 텅 빈 부재의 공간에 데려다 준다는 점도 놀랍다. 이러한 투르니에의 낯설고도 익숙한 개념 설명은 이 자체로서의 과정이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주지만 그 보다 개념의 진원지이면서 본질일 수 있는 공간에 대한 부재를 어떻게 채워나갈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해준다는 점이 좋은 것이다. 결국 내가 한번 채워보지 않은 앎의 진지한 자세를 되잡아 주는 셈이다.

 

 

대게 우리가 알던 코드를 새삼 들여다보는 것은 대중이 갖는 넓은 의미로의 본질일 수는 있지만 생각해보면 넓을수록 그 의미가 단층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표피는 두터워질 대로 겹겹이 싸여 견고해지고 결국 남의 생각으로 하여금 그 개념이 정의되는 착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당연시되는 넓은 체계를 과감히 무너뜨리고 모호함이나 엉성한 질문을 던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화두를 던진다. 분명 작은 파문이긴 하지만 확장을 포기하는 대신 깊이로의 펌프질을 돕는 편이 진짜 개념의 본질을 알게 되는 시작점이며, 결국 알게 되는 것이 아주 단순한 진리였다 해도 그것은 내가 생각한 진리이며, 내 삶의 막강한 주체적 개념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고리타분하고 실용적이지 못한 사유 뿐이라고 터부시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투르니에가 전하는 철학은 우리의 삶과 아주 가깝고 풍요롭게 해주리란 기대를 품게 만드는 철학이다. 무엇보다 뜨겁고 진지하게 살아간 지성들의 아포리즘을 읽어내려가는 것이 오랜 시간 돌아보게 하는 기쁨이었고, 내 삶을 아우르는 거의 모든 생각들의 뿌리를 다시금 점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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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푸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소울푸드 - 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 소울 시리즈 Soul Series 1
성석제 외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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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모를 우울의 기운들이 모르핀을 맞은 듯 정지된 고통의 무아로 내몰거나, 모든 감각들이 오래 날뛰고 비틀어지다 못해 더 이상 통증이 아닌 듯 침잠의 시간으로 천천히 물들일 때, 그럴 때에 우리는 생의 이면을 맛보는 뜻밖의 풍경과 맞닥뜨린다벗어나려 할수록 몸부림은 우스꽝스러워지고 남들에게 동정이나 살 수 있으면 그나마도 다행인 일일우울은 그냥 그 무엇도 아닐 비루한 일들을 하게 하는시간을 버리는 듯 그저 버텨낼 뿐인 고됨만을 겪게 해주지 않는가. 단언컨대 이런 무참한 때의 위로란 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차라리 없다라고 믿는편이 다른 면에서의 가능한 위로가 아닐까? 
만약 누군가로 부터 건네 받은 한 잔의 커피가 마음을 치유해준 약이 됐다면 그것은 그나마도 위로가 가능한 층위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의 층위 중 비교적 높은 층위에 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만약 가장 낮은 층에서였다면, 치유란 겨우 시간이 약이 될 수 있다말 뿐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고통을 더는 일인지 뚜렷한 근거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 무뎌지게 하는 각성제 역할쯤은 하는 것 같다. 어쨌든 사람이 살면서 이런 최악의 시간을 맞이하고 조금씩 무뎌져갈 때 이럴 때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여러 위로의 길들을 모색해보는 것이 좋다. 보통 이런 때의 위로라면 향이 좋은 한 잔의 커피이거나, 누군가의 작은 어깨를 의지하는 일일 수 있고, 눈물을 쏟게 해준 감동의 영화 한 편이 될 수 있다. 겨우 이 정도의 일로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 의외이긴 하다. 어딘가 좀 싱겁고 낭만적인 데가 있으며, 들인 일보다 훨씬 더 큰 힘이 되주는 이 작은 공력이란 것. 위로가 되는 순간 만큼은 인간이 조금 더 성장해 가는 지점이 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커피 한잔 따위의 위로를 처방전으로 알고 의지를 다지는 일도 살아가는 데 깊이를 더하는 소소함일 것이다.


볕이 적당하게 내리 쬐는 창이 넓은 방에 앉아서 평소 읽고 싶던 책을 읽게 되는 날에도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날이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제 나름의 처방을 내리는 것이다. 내가 하는 처방전이라면 주로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하는 것으로 기분을 어르는 편이기는 한데 잠을 자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됐다. 초콜릿처럼 달콤한 것을 먹으면 기분이 나아진다는 연구결과를 우습게 여긴 적은 없지만, 한 번도 먹는 행위로 하여금 극복해보려 한 일은 없었다. 예전의 나를 돌아보면 적당의 음식을 먹어서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으면 그만이었고, 특히 먹는데 돈 쓰는 것을 지독히 아까워하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던가 먹는 게 남는 것따위의 말을 듣는 것을 질색했고, 비웃을만큼 조롱해대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회 생활을 하면서 편식을 하는 습관이 크게 지적 받을 만한 일이라는 걸 깨닫고, 뭐든지 같이 먹거나 같이 소비하고, 같이 노는 문화에 적응 하면서부터는 급속도로 내 방식들의 여러 단점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나 역시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맛집을 쫓아다니거나 양송이와 치즈가 듬뿍 들은 한 접시의 스프에 열광 할 줄 알게 되었다. 물론 영혼의 맛같은 깊은 경험을 하지 못한 것이 애석한 일이지만, 매일 먹어야 하는 섭생의 주제를 인지했다는 일로도 다행인 일이다. 먹는 행위를 우습게 아는 인간처럼 우스운 인간도 없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된 셈이다.

신세계를 알게 된 내 값싼 입이, 헛된 앎이 아닌 걸 보상해주듯 이 책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 전하는 그들만의 소울푸드가 가득하다. 각각의 방에 초대되는 근사한 기분은 내내 설레이게 한다.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만큼의 좋은 음식 냄새가 군침을 돌게 하고 원기를 북돋아 주는 용기를 조금씩 얹어 준다. 저마다의 삶의 허기를 채우는 맛이 내가 먹어 본 그 평범한 밥상과 다르지 않음에 위로가 되는 것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호젓하게 단절된 나만의 요리보다는 모두가 어울어져서 같은 음식을 먹는 유대의 식탁이 훨씬 맛있어 보이는 것도 근사한 일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익은 직접 담근 엄마표 된장국, 정직한 맛이 일품인 친구의 콘과자, 청춘의 모든 것이었을 빨계떡, 달콤쌉싸름한 와인 한모금, 저마다의 특별한 사연이 보태져 그 맛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그윽한 향과 훌륭한 맛의 기대를 한껏 북돋는다. 음식이 왜 철학이 되고 신비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리는지 숭고한 순간들을 맛보는 것이 참 특별하다.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안에는 천재가 살고 있다. 그는 내게 먹는 즐거움을 소중히 여기라고 한다.’ 달리가 자신의 천재적 감각이 음식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었다니 조금은 의외이지 않는가. 미감각을 자극 당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감각이 입에서 시작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맛의 신경을 거쳐 예술 세계에 영향을 끼칠거라는 믿음은 그의 음식에 대한 사랑이 왜 신성시되고 집착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그에게 요리는 감각을 일깨우는 영감의 원천이었고 예술로 향하는 통로이자 도구였던 것이다
<소울 푸드>에서
모든 작가들의 영혼을 울린 그 지점에 어김없이 음식이 등장한 이유도 어쩌면 우리가 필연적으로 만나는 관문 마다 허기를 채우는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런거라는 생각이 든다. 헛헛한 공허의 기분을 미감에 퍼지는 기운으로 감각을 되찾는 일인 것이다. 울거나, 화를 내거나, 자학하거나, 운동 하거나, 잠을 자거나 하는 일은 모두 채우려는 노력이다. 그 중 가장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일은 역시 먹는 것일 것이다. 무언가를 버리는 행위 보다는 역시 물리적인 것으로 채우는 일이 확실한 채움의 방점을 세우는 일이기는 하다. 이 책은 각자의 특별한 맛만을 전해주는 것 뿐인데도 어딘가 있을 내 영혼의 허기를 채우는 일을 근사한 호기심으로 채근하게 한다. 

머지않아 나만의 맛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입안에 군침이 가득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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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황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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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신문에서 본 박성우의 <삼학년>이란 시를 읽고 한참 동안이나 정지하게 되는 무언가가 흘러갔다. 전문은 이렇다.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 동네 우물에 부었다 /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놓았다 /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이 시의 소박함과 순박함의 정서는 원대한 고향의 품처럼 아름답다. ‘영혼의 맛이란게 있다면 바로 이 미숫가루와 같은 순박한 맛이지 않을까. 실컷 먹고 싶은 소년의 순수함이 우물 한 가득을 채우고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한 작은 손을 응시하게 한다. 잠깐의 행복감에 젖은 아이의 눈과 마음을 헤아린다면 어찌 따귀를 올려 부칠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이 지나침 역시 다 헤아리지 못할 것은 아니어서 이 시는 우리네 고향이고 누구나의 정서가 맞닿을수 있는 공동의 품이다. 아마도 소년에게 미숫가루가 가득 들은 우물은 온 우주와도 같았을 행복의 근원지였으리라. 온 몸을 흔들리게 한 이 강렬한 맛을 헤아리는 기쁨이, 우리네 인생이 맛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정말이지 영혼의 맛을 아는 사람은 인생의 절반을 살아 낸 사람들일 것이다.

 

인간이 누려야 할 원초적인 욕망 중 가장 으뜸은 이고 그 다음이 바로 먹는 것이란 말을 들었다. 잠을 자는 것은 혼자 행하는 일이지만, 먹는다는 것은 결코 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태어나면 누구나 타인에 의해 먹임을 당해야 한다. 엄마의 품에 안겨 젖을 먹거나, 끓인 이유식이라도 누가 떠먹여 줘야만 살 수 있으니까자립으로 만들 수 있는 시기가 되기 전까지는 일단 누군가가 조리해주는 음식을 먹는다. 따라서 먹는 행위는 집에서든 밖에 서든 먹는 것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꼭 함께할 때 가능한 일이다. <칼과 황홀>은 바로 이러한 누군가로 비롯되거나 그런 결과를 낳았거나 하는 관계에 관해 이야기 한다. 특히나 이 책은 그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뛰어 넘어 황홀의 맛까지 담은 상차림이니 더욱 흥미롭게 느껴진다. 작가가 찾은 음식들은 그 특유의 맛을 궁금하게 하지만 그보다 그와 얽힌 깊은 맥락들을 짚어내는데 자연스러운 이끌림이 인다. 단순히 그 음식의 맛을 설명하려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그 곳의 정취나 냄새, 문화와 역사 등 오래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전해준다. 마치 간장과도 같은 인생의 깊은 맛을 설명하려고 애쓰는 일처럼 말이다. 같은 재료와 같은 시간, 공을 들여도 맛은 제각각인 어머니들의 손맛처럼, 책은 이야기마다 새로운 집으로 초대해 날마다 다른 음식을 선사해준다. 특정한 상황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음식의 맛을 좀 더 깊고 풍부하게 해주는 연관을 맺는다. 이는 마치 된장이 익어가는 발효의 과정처럼 몸에 좋은 균들이 아주 미세한 실이 되어 진득진득 붙어가는 관계를 비유하는 것 같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것을 추억하는 일만은 결코 아니며, 결국 너와 나관계의 연장선상 위에 놓인 매일 해야만 하는 관계의 미학을 비유하는 일이다.

 

 

성석제는 그 어느 이야기여도 재미있게 꾸며내는 익살의 재주로 유명한 작가다. 이 책 역시 예외일 수 없어서, 먹고 사는 흔한 이야기를 어쩌면 이렇게 재치있게 그려낼 수 있을까하는 감탄이 매 장마다 절로 튀어 나온다. 먹음을 생의 축복이라 여기는 작가이기에 그의 유머와 재치는 또 한 번 맛의 도구가 되어 다채로운 향연의 조미료로 쓰인다. 그만의 음식 기행은 만나는 사람마다의 특별한 교류와 개성을 통해 작가가 듣고 본 자연스러운 재료와 어울어져 가미되고 풍부해진다. 그래서 그가 먹는 음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내가 알던 단 하나의 맛으로만 기억되는 음식일 수가 없게 된다. 그의 흥겨운 칼놀림이 좀 더 날렵하고 섬세해져 그가 아니면 절대 맛볼 수 없는 맛의 경지까지 안내하는 것이다.

먹는 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몸을 유지하게 해주는 숭고한 행위다. 여기에 마음의 윤택까지 돌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먹는다는 것의 숭고함을 몸의 보약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싶다. 결국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그것이 내 몸을 이루는 영양소로서만 생각하는 일에 그친다면 그 영혼은 먹는다는 행위로서 결코 인생의 깊이를 가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소박한 음식이라 하더라도 내 몸에 들어가 삶의 기운을 얻고 말거라는 의도된 긍정은 조금씩 쌓이다보면 모든 삶의 원기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 복합의 에너지가 발산될 날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 음식은 개인의 몸과 마음을 잇게 해주고 나아가서 내게로 온 재료의 역사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작가가 전하는 음식 이야기들은 주로 그 음식에서 비롯된 소소한 일상들을 전하는 일이다. 아무리 비루한 인생이거나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어도 작가의 눈을 통하면 결코 쉽게 잊혀질 일이 아니게 된다. 설탕을 끼얹은 빵을 베어 무는 일처럼 금세 미소가 번지게 되면서 그 소소함 안의 달콤한 면면을 목도하게 해준다. 먹는다는 것을 특별한 행위이게 해주는 작가의 유별난 지시가 소박한 인생에서도 유머를 보게 하고 삶의 에너지를 부리게 해주는 추진력을 줄 것 같다.

이쯤이면 황홀한 맛이라는 게 꼭 맛있다라는 감탄사를 내뱉을 미감의 황홀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내 입맛을 사로잡는 맛은 접시 위에 놓인 맛좋은 음식일수만은 없고, 그것을 향유할 줄 아는 개개인의 포크와 칼의 의지에 달려 있다. 어느 지점에서 베어 물줄 알고, 어떤 때에 술을 마셔 풍미를 더 가감할 수 있는지를 아는 섬세한 지점을 말이다. 여러 사람들의 노력과 시간, 그리고 그것을 알맞은 때에 먹고 입안에 머무는 동안의 씹는 행위를 적절하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맛을 정확하게 누릴 줄 아는 자이다.

그가 펼쳐내 보이는 인생의 소박한 맛은 오랜 동안 우울한 순간마다 떠올리게 되는 소중한 맛집들의 지도처럼 아로새겨진다. 그리고 나와 함께 해준 당신의 미소 그것만으로도 밥상의 무게는 전보다 훨씬 근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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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새 책 - 절판된 책에 바치는 헌사
박균호 지음 / 바이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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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시장이 되신 그 분의 자택이나 집무실처럼의 서가를 가질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무슨 짓이든 하고 싶다. 그쯤이면 도서관을 방불케 한다는 비유도 어리둥절한 것이 아닌가. 그게 도서관이 아니면 대관절 무엇이 도서관일 것이며, 그보다 개인이 도서관 만큼의 서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 수많은 책의 기운 속에서 하루 종일 바라만 봐도 좋을 광경을 자신이 한권 한권 땅 밭 일구듯이 만들어간 것이라면, 그 자부심 또한 남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설사 바라보기만 해야한다는 말도 안되는 조약이 있대도 무슨 상관이랴, 무언가를 소유하는 기쁨으로 얻어지는 아드레날린의 용솟음은 최고치를 내달릴 것 같다. 서가까지 이루어낸 한권 한권의 역사와 그것을 일일이 읽고 난 후 개인의 역사는 또 어떤 것일지 상상만으로도 근사해지는 일이다.

이 책의 작가가 언급하는 책 목록을 보다 보니 역시 한 사람의 소소한 취향이나 지향점 같은 것을 엿보게 되는 것 같아 기쁘다. 짐작되는 유려한 장서의 소장 목록 중에서도 가장 인상을 남긴 몇몇 작품만을 소개하는 것이어서 그 섬세한 선별의 고심이 무조건 내 목록 리스트에도 올라도 좋을 것 같다. 굳이 내 기준의 필터를 거르지 않아도 최상급인 것을 덥석 물어온 것 같은 고마움과 결례를 범하는 마음이 한데 공존하는 마음도 든다. 이것만으로도 두 손에 담아진 소중한 역사들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일이다.

나의 경우 서가랄 것 까지도 없이 매우 조악해서 단지 한 벽만을 겨우 채우는 정도의 책만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산다고 산 정도 정도니까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이들의 수와 비용을 부러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율로 따지자면 삼분의 이 정도가 새 책이고 나머지는 헌책들을 사 모은 것들이다. 새 책이든 헌책이든 상관없어 하는 편이며, 거의 모든 책이 문학이고, 서점에서든 지인에게서든 도서관에서든 먼저 읽고 나서 소장하고 싶다고 생각이 드는 경우에만 사 모았다. 굳이 읽은 후에 책을 사게 되는 이유는 물론 형편 때문이다.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샀다거나 평이 좋아서 산 경우 실망할 가능성이 많고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렇다보니 차라리 어떻게 해서든 사지 않고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편이 좀 더 현명하다라는 판단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아닌 경우야 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사 모으는 일이라거나 전적으로 신임하는 작가가 언급한 책은 읽기도 전에 소장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나의 경우는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나 책에 언급된 책을 알아가는 방식으로 읽어왔고 사 모았던 편이다.

저자가 좋아하는 여러 책 목록 중에서도 사진집 <윤미네 집>의 경우에는 알고만 있었지 직접 발로 뛰어 기필코 보고 싶다 생각이 들지 못했다가 유별난 뒷이야기를 듣고서야 최근에 찾아보게 된 책이다. <청구회 추억>이나 <풀종다리의 노래>처럼 취향이 겹쳐지는 책이라도 만나면 전국의 어느 헌책방이라도 샅샅이 뒤져서 소장 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까지 드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많은 책이 언급되었는데 워낙 아는 바가 없어 거의 모든 책을 앞으로 읽어야 할 목록에 취할 정도로 궁금한 책이 많았다. 
나의 경우 가장 오랫동안 발품을 팔아 어렵게 구한 책이 바로 아베 고보의 <불타버린 지도>이다. 몇 년은 걸린 것 같은데 어느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기쁨은 읽은 후의 감동보다 클 것이라는 예고까지 됐을 정도로 너무 벅찼었다.

저자가 목도한 일들 가운데 독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책들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져 빛을 발하게 되거나 소장가들의 꾸준한 사랑에 힘입어 재출간 되는 빛나는 순간은 매우 인상 깊다. 좋은 책이라면 언제라도 어떻게 해서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다라는 동화같은 일이 가끔은 펼쳐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권의 새 책이 쏟아지는 이런 시대에 어쩌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오래된 책 한 권을 찾아내는 일은 조금은 무모해 보인다. 소외된 변두리와도 같은 곳에서 아무리 좋은 내용을 가졌다한들 낡은 책장을 한 장 넘겨보기에는 세상에 너무 예쁘고 많은 책이 존재한다. 낡고 오래된 것이라면 고전처럼의 위상을 갖지 않은 이상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 가는게 슬프지만 사실이다. 이런 소외의 틈에서 진면모만을 가려낼 줄 알고 소장하는 일까지 인생의 큰 기쁨으로 안는 사람의 성정은 분명 따뜻한 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일 것 같다. 책은 첫 장이 펼쳐지기 전까지 사물 그 이상일 수가 없지만, 오랜 세월 품어온 소외의 심층에서 내뿜는 단어 하나하나의 향기는 참으로 오래된 서가의 향기처럼 그윽할 것이다. <오래된 새책>을 읽는 내내 그런 향기가 맡아졌고 내 책들이 늙어가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봐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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