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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분 인생 - 진짜 나답게 살기 위한 우석훈의 액션大로망
우석훈 지음 / 상상너머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제 인생의 의미를 묻고, 변화를 꿈꾸는 일을 얼마나 하고 살아가는지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별로 답하지 않고 싶은 걸 보면. 사실 대단히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고서야 일에 치이며 한치 앞의 미래도 불안하다 보면 요즘 유행하는 말마따나 ‘이게 사는 건가’ 싶어지지 않겠나. 서글프게도 이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처지를 신세 한탄이라 또 자책만 해댈게 뻔하니, 이 또한 일단 인생의 의미를 묻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짜 큰 문제는 바로 ‘변화’의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 변화를 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누구나 좀 더 자유롭고 진짜 내 인생이기를 꿈꾸지만 사회는 호락호락 내버려 두지 않는다. 치열하게 경쟁 속에 살아남기를 종용하고, 조용히 가만히 걸어가는 인생을 택한들 도태되었다는 둥 낙오자라는 둥 제멋대로의 잣대에 휘둘리기 쉽다. 누구나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다는 감언이설의 구호를 미덕으로 포장하는 사회에서 한치 앞의 길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수 없는 답답한 구조의 덫에 빠진 셈이다.

모두가 자기 성찰의 기회를 발판 삼아 내외적인 변화를 택하면 좋겠지만, 혹 그렇지 못하더라도 내적 변화만을 훌륭하게 이끌어낸다면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이긴 할텐데, 각자의 상황에 맞는 괜찮은 ‘변화점’은 과연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 책 <1인분 인생>에서는 한국사회의 몸통과 디테일한 작은 부분까지 총체적 문제들이 등장한다. 살아간다는 것의 탐구와 체념과, 희망과 좌절이 온통 질퍽한 라운드 안의 싸움처럼 느껴진다. 몇 년째 우석훈의 개인 홈페이지를 드나들면서 봐온 글이었는데도, 한 권의 책으로 묶여서 1인분 인생의 탐구서로 놓고 보니 새삼 그의 글이 참 쉽고 재미있다라는 것, 별로 중요할 것 같지 않은 것들도 역시 경제학자의 눈에는 보이는 세심함도 연신 감탄하며 들여다보게 된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궁극의 발화는 곧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결코 나의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 용기 내어 나만이 살아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 내봐' 쯤일 것이다. 다시, 묻는다. '나는 행복한가? 내 인생의 의미는 뭐지? 변화할 수 있을까?

 

새벽부터 일어나 늦은 밤이 다 돼서야 일을 마치는 전국의 수많은 무가지를 줍는 노인들의 삶을 지켜 본적이 있는가? 물론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리어커를 끄는 모습은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고 넘지 못할 벽처럼 거대한 장애물을 매일 넘어가는 일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그 장면을 보면, 그럴 것이다. 

그야말로 전력투구의 삶을 살아가는데도 아주 많은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불안과 빚만 늘어가는 벅찬 인생, 어마어마한 문제들이 행복을 가로 막는다. 물론 저마다의 가치관이 있고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건 개인의 몫이지, 사회가 외면해도 되는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간다 한들 사회의 시스템,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개인의 생활은 점점 수렁으로 빠질 수밖에 없고 사회가 분명 행복의 질을 떨어뜨리는 총체적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데도 가끔 정부가 내놓는 공익광고물 따위를 볼 때 웃지 못할 광경에 실소할 때가 더러 있다. 아직도 사회는 개인의 노력만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정신세계를 시사한다. 사회부터 변화하지 않으면 개인의 노력이고 뭐고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는데 이걸 왜 우리 시대 잘난 분들만 모르는건지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포지션으로 1인분의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권리를 주장해야 하고, 혹 우석훈처럼 많이 배운 사람들이라면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발언하고 바꾸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 시작점을 아주 근본의 선으로, 그러니까 한참이나 뒤로 가서 바로 잡고 오라고 용기를 준다. 구체적으로는 독립하는 일에서 출발하라고 지적하는 것인데 물론 이는 물리적인 독립을 의미한다. 이 말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한국사회의 적지 않은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음을 알 수 있다. 관습적으로나 사회적인 문제들이 간단치 않으니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충분한 공감이 간다. 실질적으로 결혼 전에는 독립을 꿈꾸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보니 혈연중심의 사회, 지연, 학연 등이 공공연하게 중요시되고 있는게 현실이다. 사회를 배우는 황금의 20대를 우리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고리를 제 몸에 안착시키며 관통이라는 것을 어이없는 방향으로 해버린 셈이다. 이렇다 보니 1인분의 인생을 살아가기란 참 어려운 일이고, 혹여 이렇게 살게 된들 남에게는 인정머리 없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저자는 책에서 자신의 온 일상을 사회의 구조와 어떻게 좌충우돌 투쟁하며 버텨 가는지를 보여주는데 숨김이 없다. 개인사를 잘 버무려서 보편적인 삶들의 애환을 잘 묻어나도록 한다. 나라의 핵심적인 사안이나 대기업의 주역이던 삶을 버리고, 고양이 몇 마리의 행복을 눈물겹도록 고맙게 느낄 줄 아는 섬세한 사람이기를 선택했다.

빠른 시일내 은퇴해서 시골에 내려가 조용히 살기를 꿈꾸는 그의 ‘변화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상이 담담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공감을 이끌어 내면서 사실 그 변화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누구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가까운 데라는 것을, 조심스러운 용기와 함께 불어넣어 준다.

축하할 일이 있어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작은 철칙 같은 것이 이제보니 저만의 작은 소신이 있어서였으니 바로 이런 태도 같은걸 닮고 싶어 진다. 작은 일들로 사실은 나만의 깃발이 만들어지는 것일테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알아 주지 못한대도 적어도 나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삶이라면 이런 깃발쯤 펄럭이는 게 아주 멋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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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학자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동물학자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 - 야생의 순례자 시턴이 기록한 북극의 자연과 사람들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 지음, 김성훈 옮김 / 씨네21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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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턴의 동물기>라는 표제는 어디서 주워들은 적이 있지만, 이 외 어떤 정보도 아는 바가 없었다<동물학자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을 읽었을 때 간단한 책소개와 앞날개의 저자 소개를 훑어 보고 나서야 어느 시대를 살았고 어떤 명망의 위치에 놓인 사람인지를 대충 알았다. 그런데 목차를 지나 심지어 책의 절반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내려놓지 못하게 되었다. 그 이유인즉은 분명 시턴이란 사람이 백여년 전의 인물로 이 책 역시 그 때 쓰인 글이라는걸 알고 출발했는데, 문체라던가 시대의 분위기 같은 것이 전혀 지금과 동떨어진 채로 읽히지 않아서였다이 책이 필시 재편집된 본이라던가 시턴의 여행기를 다시 재구성한 제3자의 저자가 있는게 틀림없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정말이지 시턴의 생각이나 말투같은 것이 주는 느낌이 너무 생생한 것이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날것의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상세히 덧붙인 그림이라던가, 어딘지 모르게 옛날 사람들의 글에서 느껴지는 점잖음 같은 것들이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가 흔히 좋은 고전을 읽거나, 훌륭한 오랜 영화를 봤을 때 이를 칭찬한다는걸 고작 과연 시대에 어떻게 이런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졌는가, 놀랍다!라는 식의 말을 할 때가 있다. 과거 특정한 시대를 특별히 얕보거나 해서 하는 말은 아니겠으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세의 흐름에도 전혀 뒤쳐질 게 없다는 생각을 확인할 때 이런 찬사 아닌 말을 한다. 과거에는 마치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라는 듯 대단히 한심한 착각을 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들 세대에서는 가장 젊고 신선한 작품을 생산하는 신세대였음은 자명한 일 아닌가. 이런 논리로라면 지금의 우리도 반세기만 흐르면 똑같은 소릴 들을게 뻔하다. 고작 과학 하나 발전시켜 놨을 뿐인데 거의 모든 면에서 이런 소릴 들으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평소 작품에 대해선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동등하게 평가하려는 편이지만 이 책은 뭐랄까 백여년이 넘는 작품치고 매우 생동감이 넘치는 기운 같은 것이 느껴지는 놀라움을 선사한다. 너무나도 재미있는 자연 관찰기이면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현재와 미래를 잇게 해주는 훌륭한 에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시턴이란 작가의 뛰어난 글 솜씨 덕이 가장 크겠지만 이에 앞서 북극이라는 세계가 아직도 우리에게 미지의 땅이고 잘 변화하지 않은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시대 차이를 크게 체감하지 못할 곳, 이곳은 여전히 비슷한 모습으로 천천히 자연에 순응해 살아가는 것만이 진리인 비문명국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난 백여 년간 이토록 변화가 더딘 곳도 없었을 것이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크게 위협받지 않은 채라서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대조적으로 이 땅을 제외한 거의 모든 땅은 지구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인 변화의 시간을 지났고, 지나친 감도 있어서 말로 다하지 못할 불행의 결과도 초래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변화하지 않은 땅이어서 이곳과의 거리가 안심되기도 한다.

 

 

문득 세계지도를 펼쳐보면 세계는 그저 한 무리의 이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어떤 차이나 구별이 없이, 다른 언어 다른 이념 다른 얼굴색 따위는 땅 위에 쓰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나 선명한 차이라면 강이며 바다며 산과, 황무지, 두텁게 쌓인 눈의 대비만이 서로를 구분 지을 뿐이다. 시턴의 눈에도 북극이란 땅은 다름을 인식하기 위해 밟은 나라가 아니다. 자신이 좀 더 많이 배웠으며 우월한 나라에서 온 여행자로서의 신분 차이를 알려고 떠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고 그럴 수 있다면 보호해줄 수 있는 방도를 알기 위해서 떠나온 여정이었다. 이 따뜻한 마음을 다 알아서였을까? 그 척박한 땅에서 무려 반년이나 살도록 허락한 자연의 자비가 시턴에게 있었다. 그리고 시턴은 그 고마움을 평생 동물을 연구하고 사랑하라는 뜻으로 알고 살아간다.  

 

 

 

생물체가 존재하기에는 너무나 추운 땅, 사람은 거의 살지 못하고, 그나마 생존해 있는 동물마저도 멸종 위기에 처한 북극이란 땅, 이런 땅을 시턴은 왜 탐험하고 싶었던 걸까?

혹시 그는 세상의 끝을 보고 싶었던걸까. 카누를 타고 순백의 그림에서 까만 눈의 순록 한 마리가 달려오는 걸 보고 싶었던 그 단순한 꿈이 그의 마음에는 항상 살아 있었다. 그렇게 이 책은 탄생했고,호기심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탐험가와 여행가들의 가슴에 별처럼 존재하게 되었다.

 

 

 

시턴은 오래 꿈꾸던 곳에 와있게 되었고 반년이란 시간을 그곳에 머물며 사람들의 표정과 자연과 상상을 초월한 교감을 하게 된다. 이곳 사람들과의 많은 일들을 함께 경험하고, 천산의 위용을 그저 경이롭게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는 동안 어느새 내 눈에도 설맹의 위험이 도사리는 것만 같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시턴의 여행을 쫓으면서 문득 여행은 새로운 풍경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람들의 인식의 차이, 그곳의 역사, 문화 등을 알게 해주는 것 외에 또다른 진짜 만남이 기다린다는 걸 알았다

이는 바로 자신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사는 곳으로부터 떠나 다름을 체험하려고 여행을 시작하지만, 궁극으로는 자신을 좀 더 극명히 알게 해주기에 떠나는지도 모른다. 시턴의 여정에는 자연이 그렇게 존재하게 된 연유의 역사와 생존의 법칙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살아 숨쉰다. 그들이 사는 습성들을 지켜 보면서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에 대한 생각을 한다. 자연의 일부인 '나'를 말이다.

 

 

 

시턴은 거스르기 보다는 전적으로 자연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며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의 미개함을 보더라도 잠시 불편해할 뿐이지 어떠한 잣대를 휘두르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순록을 볼때도 무리하게 다가가는 법이 없고, 적잖은 혼혈인을 볼 때마다 어떤 기질 같은 것을 미워하긴 해도 다름을 분명히 인지하곤 한다. 특히 나는 천차만별의 얼굴들을 상상하면서 문득 이 혼혈인들은 오랜 세월 떠돈 자연스러운 만남들과, 자연의 순리를 얼굴로 새겨 온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함의 유전자, 자연의 온 얼굴이 미묘하게 얼굴에 버무려진 미지의 얼굴임이 분명하다.

 

 

 

시턴이 본 적막의 세계는 어쩌면 죽음과 가장 맞닿아 있는 곳이리라. 어떤 전조의 조짐이 있는 땅의 움트림처럼 동물의 죽음이 도처에 있고, 사람들은 동물들을 죽이고 먹어야만 사는 숙명이 있다. 자연의 고리 같은 것, 순환의 샘 같은 것이 호수처럼 고여 있음을 본다. 사실은 우리의 삶 역시 죽음이 아주 가깝게 맞닿아 있기에 오히려 살아있음 또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대면하는 북극의 얼굴은 아주 느슨한 경계로 삶의 연장선상 위를 달리는 카누의 속도만큼 달려간다. 문명과 물질의 세속적 욕망과는 차단된, 오로지 자연과 깊은 약속된 순결만이 아주 오래 퇴적된 눈의 두께만큼이나 두텁게 허락되는 그런 곳, 북극. 그곳의 참된 아름다움을 영원히 지키라 말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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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여행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
빌 브라이슨 지음, 이미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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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 한국이란 나라를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란 질문의 답변을 듣고 황당해한 적이 있다. 달랑 분단국가, 한국전쟁, 김정일 정도를 떠올리는가 하면 기껏해야 동양에 있는 국가’ 정도, 그나마 ~한민국을 외칠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한국은 여전히 대표될만한 이미지나 상징 같은 것들이 없어도 너무 없어 보였다. 많이 알려진 거라고 하지만 한국은 잘 모르는 나라이고, 동양의 그저 작은 나라일 뿐인 그저 그런 나라라는 소리다. 얼마 전 국제결혼을 한 지인의 시댁 어른들이 한국에 들어 올때 위험한 나라 아니냐는 둥, 말라리아 주사 따위의 예방접종을 해야 하지 않냐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무척 상했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막상 좋은 호텔에 묵게 해주고 입 떡 벌어지는 진수성찬을 맛보게 해준다음, 종로 거리를 구경하고 나서야 그 파란 눈에도 한국이 적어도 미개한 나라는 아니구나 하는걸 알았다고 들었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 통에 대관절 너희 나라는 세계사 공부도 안하냐고 다그치고 싶지만 사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오랜 역사성을 생각해볼 때 그들이 모르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닌 듯싶다. 너무 멀긴 하니까. 이렇다보니 대한민국을 알리는 데는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도 많고, 아주 길게 바라보고 가야할 먼 길임을 새삼 인지하게 된다.

 

 

코스모폴리탄이나 뭐다에 비행기 타고 몇시간이면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다고는 하지만 막상 우리는 서로에 대해 거의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웃해 있거나, 서로 오고 가는 게 있는 사이, 하다못해 피의 역사라도 있어야 다른 나라쯤을 알게 되는 것일까. 만약 가보지 않고 아주 먼 나라까지 알게 되는 것은 지구본을 하염없이 돌려대며 세계여행을 꿈꾸는 어린 몽상가의 상상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는 일이다. 이렇다보니 사람들의 간접경험 수단은 각종 매체나 특히 여행서로 그곳을 대신 여행해 보는 앎이 전부일 수 있다. 아주 많은 여행서들이 있다지만 각국의 이국적인 정취나, 거리, 박물관 등을 보며 느낀 이방인으로서의 소회들, 재미있는 주의사항 같은 것들은 차고 넘치며 이제 그 눈들이란 것도 비슷비슷하게만 보인다

중에서도 빌 브라이슨과 같은 보석과 같은 여행작가를 알게 되는 것은 대단히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여느 책과는 다른 행보로 여행서의 역사에 한 획을 긋고도 남을 유명작가 행렬에 오르게 된 빌 브라이슨이라면 어떤 책이어도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기를 쓰는 사람이면서 언제나 여행할 곳의 역사를 숙지하고 온 몸으로 그곳을 사랑하러 떠나는 사람이니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미 호주란 나라를 체험해 본 사람도 많겠지만, 나처럼 여행에 문외한인 사람도 호주로 어학연수라도 다녀온 지인쯤은 있다. 익히 들어온 대자연의 나라이며, 동물이 자유롭게 노닐고, 도시 아니고는 쉽사리 탐험하기도 어려운 미지의 땅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들은 적이 있다. 호주는 그리 낯설지는 않은 나라여서 빌 브라이슨이 왜 이곳을 선택했고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잔뜩 기대만 하면 그만이었다. 

애초 작가가 호주로 떠나온 이유는 그가 생태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어떤 여행기에서 깊이 다루지 않은 자연, 동물의 참모습을 담고 싶었다는 점이 유익하다. 역시 작가는 결국 생태의 중요성을 가장 핵심 메시지로 담고 싶었던 것이다.

 

한번 물리기만 해도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맹독을 담고 사는 뱀, 작지만 아주 미세한 애무만으로 그 자리에서 즉사시킬 수 있는 표범 문어 등 처음 들어보는 동물들의 천국, 아직 알지도 못할 생물이 더 있을 수 있는 가능성과 멸종 됐다고 알려졌지만 혹시 생존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희망해볼 때마다 호주라는 나라의 광활한 잠재력을 실감한다.

해저 몇 만리에 사는 우리가 알지 못한 생물이 살고, 그나마 알려진 몇 몇 괴물어라 불리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같은 땅 위의 생물조차도 다 알지 못하는 데 지구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생물들이 살아갈까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곳은 호주라는 단 하나의 나라의 이야기라니 놀랍지 않은가. 곰곰히 작가가 선보이는 대자연의 장엄함을 관찰하다 보면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수많은 삶의 부분 부분이 그저 지구를 이루고 우주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빌 브라이슨의 책이 세계적으로 많은 호응을 얻게 된 데에는 사실 그가 시종일관 뿜어내는 유쾌한 에너지를 잘 전달해서일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답답한 현실을 탈출하고픈 욕망들이 있고 그것을 아주 발랄한 방식으로 실현하고픈 계획을 품게 되는데 작가는 이를 정말 잘 행하는 추진력이 있다타지에서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괴짜들과의 지긋지긋한 대면식하며, 언제 어느 곳에라도 도사리고 있는 위험천만한 순간들이 지혜와 모험심으로 극복되고 이런 하루하루가 어깨에 얹어진 짐을 바깥으로 발산해 버릴 수 있는 힘을 주기에 여행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어느 관계에서든 아주 섬세한 지점을 잘 캐내어 사람들에게 유쾌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즉 그 안과 밖을 자연스럽게 통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 어떤 여행서에서도 볼 수 없는 밀착된 관계라던가, 이국적인 풍광을 아름답게 상상하도록 유도하고, 특히 자연을 다루는데 있어 특정한 나라의 소유라거나 책임이라고 전가하기보다는 우리 모두 힘을 실어서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좋다. 그는 유명한 학자이지만 그것을 내세우기 보다는 언제나 이웃집 뚱뚱한 아저씨의 모습으로 쉽게 다가오는 진짜 지식인이다.  

 

 

 

이 책이 좋은 또다른 점은 무엇보다 희귀 동물에 대한 깊은 애정이 샘솟는다는 점이다. 능선을 지나 노을이 비친 어느 평원에서 동물과의 해후 같은 것을 꿈꾸게 되는 낭만이 있다. 적막 속 가장 은밀하고도 생기 돋는 교감을 어느 누가 마다할 수 있을까.

 

 

 

동물은 각 생김마다 특징들이 있는데 이곳은 생존에 대한 극렬함이 커서인지 매력적인 동물이 정말 많다. 뿔처럼 보이는 걸 달고 살아야 한 이유 같은 것이를테면 이것은 숙명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랜 세월 목소리의 울림을 좀 더 크고 잘 전달하려고 진화해온 흔적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생김으로 남겨진 이유를 달고 살게 되는 숙명 말이다. 이런 식으로 척박한 땅 위에서 동물들은 나름의 방식의 얼굴을 하고 자신의 색을 지키면서 수많은 자연의 비밀을 안고 살아오게 된 것 같다. 자연의 색은 언제나 그곳의 음역을 타고 공생 또는 경계 태세를 놓치지 않는 날선 촉을 세우면서 서로의 거리를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연의 섭리를, 넘칠만한 어리석은 정복 따위로 꿈꿔보지 않은 인간과는 다른 숭고함을 품고 진화해 왔다.

 

 

 

빌 브라이슨 여행기의 묘미는 사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작은 충돌과 에피소드 같은 것들이 흥미롭다. 핑퐁 하듯 톡톡 튀어 오르는 식으로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참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해준다. 이 책 역시 낮과 밤의 주기처럼 기운이 내내 자연의 온도처럼 느껴졌다. 작가가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들, 그곳의 역사를 새롭게 알게 되고 하루하루가 신선한 에너지로 가득 차 여정은 마치 낮에 먹는 즐거운 점심식사처럼 느껴진다. 맥주라도 곁들이면 한껏 더 크게 웃을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고 반짝거리는 오스트레일리아라는 땅의 광활한 낮의 온도가 전해지는 듯하다. 그런데 멸종됐다거나 하는 식의 소식을 접하게 되는 날에는 어딘가 서늘해지고 우리가 잘 살아가고 있는 게 맞는가 싶어지는 우울의 순간이 있기도 하다. 유구한 세월을 버텨온 자연에게 대체 우리는 무슨 짓을 행하고 있는 걸까, 암흑이 금방이라도 밀려오는 건 아닐까 하는 밤의 정서가 훅 끼얹는 안타까움이 언제라도 있다. 알 수 없는 아쉬움, 그리고 수 없이도 많이 묻히고 지워졌을 사체의 기록들이 이 드넓은 미지의 땅에서 귀를 기울이라 재촉하는 듯 싶어진다.

 

 

 

작가는 그 어떤 사람보다 자연과 역사 관계에 능한 사람이어서 그가 하는 모든 메시지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에 큰 울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호주라는 나라가 아직 미지의 땅이어서 새롭고, 언젠가 꼭 머물게 된다면 땅에 대고 고맙다란 말을 전하고 싶어지는 그런 땅의 목소리를 나누고 그리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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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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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은 세계 유수 작가와의 사적 만남에 초대된 것처럼 호사스러운 기분이 들게 하는 낭만적인 책이다. 물론 작가들 입에서 나오는 말의 중심에는 체제의 벽에 부딪히거나 위험천만한 위기의 순간들을 어떻게 극복했는가에 관한 매우 고달픈 삶의 원형이 담겨 있다. 그야말로 가슴 쓸어내리며 읽어야 하는 파란만장한 생을 엿보는 편편마다 우리는 그들이 지혜로 맞선 삶의 자세를 가늠할 수도 없이 아련한 마음만을 공유한다. 그래서 하루를 송두리째 감동으로만 보낸다하더라도 모자랄듯한 시간의 뼈를 새기게 된다. 이쯤으로도 역시 우리가 왜 이들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가에 대한 새삼스럽고도 당연한 이유가 존재하는 일이다

이들은 이제 그 숱한 가시밭을 지나 글만 쓰고 살아가는 소박한 기쁨을 꿈처럼 여긴다. 작가들의 은근한 미소를 보는 것에서 절로 낭만이란 단어가 품어지는 행복의 전이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들의 언어가 마치 화석처럼 눌러 박힌 전설이 되어, 읽는 내내 고맙다는 말을 되뇌이고 싶어졌다.

 

 

주지하듯이 이 책은 공식적 공인으로서의 자세를 요하는 정법의 소개글이나 인터뷰집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대화 속에서 이끌어낸 예술가들의 또 다른 면을 들추는 책이다. 인터뷰 형식을 빌어왔기 때문에 쌍방향의 피드백을 요구하고 좀 더 날것의 언어들이 자연스럽게 오간다. 노벨상까지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연상되는 최상의 도덕적 태도와, 원론적인 지식의 재확인이 아닌 좀 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이웃의 말과 행동임을 보게 해준다는 면이 새롭다.

더불어 작가들의 자연스러운 표정을 담은 사진들이 내내 그 자리의 생기를 도와준다. 특히 손의 극대화된 클로즈업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아주 깊은 주름과, 펜을 놓지 않은 절박했던 삶, 두툼해진 굳은살의 역사가 찬란히 펼쳐지는 것 같다. 사사로이 먹을 것을 사러 장을 보는 모습, 이웃들과 함께 하는 맑은 얼굴, 집무실의 풍경, 어딘가를 응시하는 단단한 입을 볼 때마다 마치 오랜 추억의 영사기가 펼쳐지는 은근한 향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윽고 이들이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생생한 상기를 하고 나서야 이들의 예술이 왜 그토록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가를 배가되어 생각하게 된다.

 

 

16인의 삶을 다 아는 것도 모두의 책을 다 읽어 본 것도 아니지만,책을 보면서 일관되게 느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문학이라는 예술을 통해 결국 이 한가지만을 전하기를 바람했다는 것이 보였다. 즉 투쟁하고 항거해야만 했던 과거가 있었다는 점이 같았고 폭력과 잘못된 정치에 저항하느라 망명을 가거나 은둔하다시피한 나날이 있었다는게 비슷했다. 언제 어디서고 지금이 있기 까지 참으로 많은 이들의 희생과, 아직도 어디선가 외쳐지는 진실의 소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면면이 제각각이면도 동시에 고유한 문제일 수 있음을 다시한번 인지하게 되는 대목이다. 나라마다 체제마다 역사적, 사회적 맥락마다의 문화의 차이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여기 모인 작가들의 일관된 삶의 태도는 모두 반란자로서의 삶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라는게 의미심장한 일이다.    

 

 

여러 나라를 돌며 세계의 참으로 다양한 문학과 사람들, 그들의 역사를 만나게 되는 것이 더 없이 좋은 여행인 <16인의 반란자들>. 펜이 칼보다 강하리라는 진리를 다시금 되새기게 되고 오늘날 이만큼의 사회로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저항과 희생이 있었는가를 일깨워 주는 소중한 만남을 꼭 기억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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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 잡혀간다 실천과 사람들 3
송경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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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의 요구와 일치하지 않는 신념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을 가두는 국가가 어디 또 있을까? 미개한 나라도 아니고 먹고 살만한, 그것도 자유민주주의가 수립된 지 반세기도 훌쩍 넘긴 멀쩡한 나라에서 신념 때문에 사람을 구금하기까지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이렇게 자주 억지 상황을 접하게 될 때마다 과연 우리가 근대 국가에 살고 있는게 맞는가 싶은 개탄이 흘러나온다. 송경동은 결코 위험 위물이라거나 반체제적인 성향을 내세운적도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는 그저 말도 안 되는 횡포를 부린 거대 자본과 맞설 뿐이었고, 항거하는 이들과 나란히 서서 조금 더 나은 처지와 형편을 대변할 뿐이었다. 이런 그에게 국가가 나서서 돌을 던지게 된 꼴이니 나라 돌아가는 사정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사람을 가두면서까지 끝까지 사수하려는 것, 그것은 바로 화합이라는 명목 하에 철저히 뿌려지는 제초제와 같은 일이었다. 거창하게도 화합이라는 말을 갖다 붙여서는 마음대로 오독하고,정부 스스로 혹은 거대 자본과 합작해서 시인과, 수도자와, 88년생 젊디젊은 청춘을 가두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민주사회라 함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말한다. 되도록 많은 의견을 수용하고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일수록 건강한 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이 있으면 잡음이라 여기고 불리해진 진실을 왜곡하거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식의 수법으로 낡은 여론 몰이를 해나간다. 여전히 국가 보안법이 건재하며 예술에 마저도 온갖 검열이 횡행한 사회에서 현실의 정치적 언급을 하는 것은 조심스러워진지 오래다. 공권력을 이용해 호들갑스럽게도 과잉 진압해 버리는 나라에 더 이상의 희망을 가져도 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그만큼 암울하고 얼마나 더 1%들의 배나 불려 주며 신뢰를 저당 잡혀 살아가야 하는 건지 시대의 역행을 따라 잡을 수가 없다.

 

<꿈꾸는 자, 잡혀간다>는 그동안 송경동 시인이 투쟁가로서 아주 오랜 시간 묵묵히 또한 참담하게 보낸 무거운 투쟁의 기록이다. 이 책을 보는 내내 안온하게 앉아 책장을 넘기는 일이 무척 호사스러운 일이라 마음의 큰 가시를 느끼며 보게 되었다. 궁핍해진 가슴의 아득한 공명같은 것이 온전히 고통으로서 다 안아지는 기분이랄까. 바람한다면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 것으로 송시인의 무게를 함께 공유하거나 조금은 덜게 해주리라는 기대만이 작은 위안이 될 뿐이다.

 

는 시인에게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시인이 말하는 언어, 항거의 몸짓이자, 영혼의 그림자처럼 보이지 않는 무게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어쩌면 그 인생의 모든 것일 '시'를 짓밟고, 빼앗아 버리는 일은 마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처형을 행하는 일처럼 폭력의 극한을 보게 한다. 과연 이렇게까지 할 일이던가 하는 처참한 기분이 내내 들추어지는 참담함이 있다. 추도시 몇 편 낭독하고, 놀라울 정도로 건강하고 평화로운 시위문화를 기획한 것이 어째서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게 한건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송시인이 걸어가는 삶이 훨씬 성숙하고 건강해질수록 그들의 정신은 한층더 억지스럽고 악날해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진정 훼손되는편이 어느 쪽일까.

 

 

송경동 시인에게는 어이없게도 폭행죄라는 해괴한 죄가 씌워졌다. 선동한 죄를 물어 여러 날을 수배 신세에 숨어 살아야 하는 나날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생애 전반에 끊이지 않는 불명예를 내내 안겨 주다가 끝내는 시인이 철장 신세를 지게 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몇 달이 흘러 시인이 2월 초부로 석방이 되었다지만, 재판은 계속될 것이고 이 끝나지 않은 싸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 진 것은 아니다. 겨우내 잔뜩 움츠러들었을 그의 몸과 마음이 전보다 더욱 단단해졌을 것을 알지만, 이 또한 딱한 일이고 그만큼 고독해진 그의 시를 읽는 것이 두려워진다.

 

이 책은 시인 자신의 가족사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과, 어떻게 노동자로서 투쟁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지 고백하는 형식으로 나열된다일터에서 최소한의 보장권을 위해 어떤 마음으로 버텨 왔는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인권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좀 더 나은 생존권을 위해 가정의 도리마저 포기하고 싸우는 이웃과 가족을 우리는 잘 모르고 지내온걸 통탄하면서 보게 된다.

 

 

글로 세상에 발언하는 지식인의 책무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소리에 귀 기울이고 처지를 보듬고 알리는 일일 것이다. 국가가 이런 예술가의 삶을 독려해주지는 못할망정 미치지 못한 곳의 불을 밝히는 시인의 등에 칼을 꼽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꿈꾸는 자, 잡혀간다>는 시인의 삶 전체가 어느 이상향에 깃대를 꼽고 나아가는 삶이었는가 말해주는 소중한 일기장이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야만 하는 사명의 기록이고, 차갑게 식어버린 영혼들에게 바치는 처절한 노래이다. 그에게 시는 식음도 전폐하고 꼬박 날을 새며 써내야 겨우 한 편이 완성되는 고통의 출산이다. 그래서 내놓는 족족 많은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모양이다. 여전히 한편에서는 스무 명이 넘는 해고자의 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는 요즘 송시인은 또 어떤 시를 고통스럽게 낳는 중일까 그의 밤과, 시간들을 헤아려 본다.

 

송시인 더 꼿꼿이 일어나시라, 그리고 당신이 바라는 세상 반드시 쟁취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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