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보고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영화 <스모크>를 볼 때마다 뉴욕의 브룩클린 뒷골목을 기웃거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현란한 스케일의 미국영화도 좋지만, 미국의 7-80년대 풍경을 볼 수 있는 소박하고 작은 영화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고유한 정서가 느껴진다. 여기에 인간적인 예민함, 이국적인 가정의 풍경,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면 거의 환상성마저 느껴질 정도로 좋다. 이 영화의 배경은 평범한 동네의 특별한 주인공만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으면서도 각 인물들이 단지 그들의 일상을 사는 것, 일상의 반복, 필연 같은 우연들이 찾아드는 오묘한 분위기로 유유히 흘러간다.
원작자이면서 직접 시나리오까지 맡았던 폴 오스터는 소설가로 좋아하는 작가였는데 어쩐지 영화를 두어 번 더 보고 나서야 둘의 연관관계를 알았고, 그의 여타 관심사에 대한 것도 알았다. 단편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읽지 못했던 탓이겠지만 나중에 책을 읽어보고 영화랑은 다른 느낌이 들어 또다른 흥미로움이 들었다. 고유한 특성들로 들러붙어 각각의 영역으로 딱히 어느 쪽이 손해랄 것이 없는, 대게 갖는 한쪽의 실망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게 다행이랄까. 아마도 같은 작가에게서 태어난 이유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폴 오스터를 생각하면 그가 지금까지 거주한다고 알려진 ‘브룩클린’이라는 특정한 장소, 그리고 ‘영화’라는 이 두 가지의 인연을 떼어놓고 생각하지 못한다. 뉴욕에서도 브룩클린은 아직 지역 특색이 그런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하고, 토박이들이 비교적 많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알려졌다. 그는 뉴저지, 뉴욕 언저리 등지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성장했고, 영화보기를 좋아하는 예민한 소년으로 자랐다고 하는데 이러한 배경은 그의 작품 안에서 참으로 긴요하게 쓰이곤 한다. 그의 인생과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 요람과 같은 것들이 내내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작 <내면보고서>는 제목에서와 같이 작가의 내면으로부터 웅얼거리며 올라오는 나만의 희미한 기억들을 흥미로운 시점으로 발화하는 자서전이다. 자신을 이루게 된 최초의 기억인 유아기부터 20대 초반 호기로운 시절의 방황과 열정을 소환해 내는 책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정확히 지금과 다를 바 없다고 보는, 오로지 ‘나’일 수밖에 없는 나이인 스물세 살 이전까지인 ‘나’를 추억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마치 타인을 보는 관점으로 나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노년에 이르른 지금의 관점이라는 데서 또다시 중첩되고 어떤 의미로는 변형된 사실과 허구의 애매한 지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정확히 그것은 최초의 기억인 지점부터 열두 살까지의 시기로 한 번 더 분절 된다. 열두 살 이후로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시절, 사실상 지금의 나에 한층 가까워진 나이로 보는 이유이다. 이러한 각 시절마다 어떤 내면의 사건이 있었는가는 그의 인생에 거의 모든 것일 수 있는 것들과의 만남이 있다.
아무것도 아니었을 시절의 생각, 즉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갔다는 인식은 ‘당신’이라고 지칭하는 ‘나’의 추진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고 어떻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는가를 궁금하게 하는 동아줄이 된다. 길어 올린 파편의 기억을 빛에 비춰보고 여전히 남아있는 기질의 연원을 찾는 게, 그래서 과거의 ‘나’로의 탐구이면 안 되는 것이다. 이 회고들은 거대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뤄지거나 자신을 예외적인 연구 대상처럼 여기는 편견을 거스르고 누구나와 같은 보편적인 ‘나’였던 원형의 모습을 보기 위한 회상이라고 밝힌다.
이 말은 정확히 책의 독특한 화법이나 복합적인 구성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대로 전해지는 사실이 된다. 말하자면 포장되지 않은 그의 어린 시절이나 청년기 때의 시절을 보면 정말이지 평범한 아이일 따름으로 읽힌다.
공상이나 상상하기를 좋아하고, 월등하게 책을 즐겨 읽던 아이, 유아기와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던 시기에서 커다란 사건일 만큼 중요한 ‘영화’보기를 좋아 했던 아이, 한 여인을 향해 열렬히 흠모하던 마음을 숨기지 않은 순수했던 청년기 모두 그가 말하는 대로 평범하다.
물론 오스터는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지금의 그라는 증명으로서 평범 보다는 비범한 인물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시절로 추측할 수 있는 평범함이라고 것, 일상이 한 개인에게 이르면 어떤 포착과 시선으로 특정한 일이 되는가에 대한 기묘한 환상성으로 변모하기에 이른다. 그도 역시 우리와 비슷한 삶을 누렸지만 평범함 속의 비범이나 특별함을 보는 눈을 가진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신이기에 이르는, 그가 아니었던 시기의 나를 길어 올린 동아줄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희미하게 느꼈던 여섯 살 무렵의 어떤 희열, 곧 자의식이라고 느껴지는 감정의 시작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원형의 결정체와 조우한 시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세계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던 시절, 작고 섬세한 일들과의 조우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자연, 알 수 없어 명명할 수 없던 감정들의 복합체들부터 온 것들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나 영화와의 만남, 그리고 한 여인에게 던진 사랑의 찬사들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의심과 거스름 없이도 내게 주어질 수 있었던 추진의 결정체가 되어준 알맹이들이다.
그의 소설이 어떤 거대한 사건보다는 작은 파편들로 이루어진 우연, 시간의 중첩으로 일구어낸 환상과 유머로 돋보이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어린 시절의 평범하나 결코 섬세한 시선 없이는 기억나지 않을 비범한 ‘사랑의 눈’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에게 글쓰기는 자신에게서 비롯된 숱한 물음들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편처럼 그의 인생 전반을 걸쳐 내내 함께한 동반자와 같다. 소설이란, 혹은 인생이란 수많은 일상의 무작위적인 반복과 우연적 사건들의 연대기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책을 보면서 해보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