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생명을 다루고24시간 돌보며 어쩌면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함께 하는 사람이‘간호사’입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실업문제와 함께 매년 이슈가 되고 있는 간호사 부족 현상에 환자를 위한 마음과 소명 없이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없어도 괜찮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런 마음과 열정이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민자도, 이민자 사회에서 아시아인도 소수(Minority)라고 치부되기 쉬운 집단입니다. 소수로서의 삶에 불만을 갖고 불평만 늘어놓는 삶을 살다가 많은 우여곡절과 그 속의 소중한 순간들을 경험하며‘어떻게 살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고, 삶은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라는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마음가짐의 변화로 소수(Minority)가 진귀한 사람(Rarity)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어려서부터 소심하고 걱정만 많던 한Worrier가 난관들을 경험하지만 뚜렷한 목표, 직업에 대한 애정과 열정 그리고 강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승리하기 위해 노력하는Warrior가 되어가는 모습을 이 책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누구나사람인지라 걱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걱정하는 시간은 줄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계속 시도해보는 노력이 한 발 더 앞으로 나가는 데에 꼭 필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에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지닌 것을 눈여겨 본 누나의 추천으로 간호학과에 입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경험을 통해 얻은 사실은 열정과 애정 없이는 쉽게 해낼 수 없는 것이 간호학과 공부였다.

게다가 시험기간에 간호학과 학생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공부하는지는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집 혹은 기숙사에 돌아가지 않고 학교에서 밤을 새며 공부하는 여학생들도 많았다. 이런 치열한 경쟁 사이에서 목표 없이 적당히 공부하는 나 같은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생명을 다루는 환자 간호에 대해 정직할 수 없다면 너는 간호를 배울 자격이 없다."

"내가 네게 이렇게 모질게 했던 이유는 너를 가르치는 동안 훗날 네가 훌륭한 간호사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환자를 간호하는 일은 사람의 생명과 연관이 되어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환자 간호에 있어‘거짓’과‘자만’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이번 기회로 그것을 제대로 깨닫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젠 깨달았으리라 믿고 앞으로는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는다. 자, 이제 맛있게 고기 먹으러 가자."

간호사는 멀티태스킹 능력이 필요한 직업이다. 정말 많은 일을 동시에 생각하고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가끔 무언가를 잊어버리는 순간도, 그런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은 순간도 있을지 모른다. 나 역시 그랬다.

어디에서나 중요하게 여겨지는 직업윤리지만‘정직’은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간호사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임을 내 생애 첫 간호사 스승님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고 누구도 그 이상은 할 수 없었을 것이라 믿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했던가? 실망스러운 학점으로 여름 방학 동안 굉장한 슬럼프를 겪었다.
‘아 … 나는 죽도록 해도 겨우 이 정도구나.’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또 다시 무기력했던2학년 당시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한 번 슬럼프에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한국에서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난 뒤 병원에 간호사로서 채용이 된 이후 한국 간호사들이 힘들어 버티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 충분하지 못한 실습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보는 학생 간호사 실습은 졸업 후에 바로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어도 웬만한 것들은 큰 무리 없이 해낼 정도로 학생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하면 한국에서의 학생 간호사 실습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학생들에게 병원 환경 혹은 간호사 근무가 어떤지 한 번 구경시켜주는 정도라고 보면 된다.

실습 시작은 병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병동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한국 간호사 근무 환경 속에TV나 다른 매체들을 통해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과한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있음은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기에‘인사성’은 간호사 혹은 예비 간호사로서 꼭 갖춰야 할 품성 중에 하나다.

일반 회사원의 일과는 달리 간호사의 일은 내가 돌보던 환자를 다른 간호사가 잘 돌볼 수 있도록 내 근무 동안 일어났었던 일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정확하고 상세하게 보고(인계)를 해주어야 한다. 돌봄(Care)의 연속성(Continuity)을 위해서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하지만 물려받고 넘겨주는 일이다보니 근무하는 동안 한 일들에 대해서 비판 혹은 비난을 받기 쉬운 직업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기 직전 직장 상사에게 한 일들을 일일이 보고하고 마무리하지 못한 일 또한 보고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직장 상사가 다음 근무를 잘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들어놓아야 하는 그 환경. 뒷장에서 학생 간호사로서 간접 경험한 인수인계가 아니라 신규 간호사가 되어 직접 경험한 인수인계, 그 네 글자의 무서움을 다시 서술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 당시는 간접 경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수인계 동안 목을 졸라 오는듯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곧 죽을 텐데 혈당을 측정해서 뭐해! 혈압을 측정해서 뭐해! 그냥 진통제나 줘!"

간호사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으나 애써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그 환자는 혈당측정기를 든 간호사의 손을 내려치고는 더 심하게 소리를 질렀다.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병실 밖으로 나가는 그 간호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나 역시 처음 접하는 상황에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왜 저렇게 화가 나 있는 것일까?’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라 알고 싶었다. 가뜩이나 숨도 가쁜데 저렇게까지 소리를 지르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흉부 압박(Chestcompression)을 제외하고도 제세동술(Defibrillation)이나 다른 약물치료도 이 심폐소생술에 포함될 수 있다. 이를 시행하여 심장의 기능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통계적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그리고 이 처치의 심각한 부작용 중 하나는 가슴을 압박하면서 늑골이 부러지는 경우가 있고 그 부러진 늑골이 다른 장기를 찔러 장기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간호사로서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알게 된DNR은 안락사와는 또 다른 개념이다. 환자가 가진 질병의 진행 상황과 전반적인 상태와 예후를 고려했을 때 심폐소생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와도 그 심폐소생술을 통해 회복을 할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질 때, 환자가 존엄하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수 있도록DNR이라는 의사결정을 고려하게 된다.

사망 진단이 내려진80세 환자가 영안실에서 되살아난 이야기를 뉴스를 통해 본 적이 있다. 단언컨대 절대 흔한 일이 아님을 언급하고 싶다.

한국에서 일할 당시 이DNR에 대한 의사결정은 환자에게 응급상황이 발생한 순간 혹은 발생하기 바로 직전에 고려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를 이미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환자 본인보다 환자의 가족과 함께 결정한 순간들이 더 많았다.

미국에 와서 경험한 것은 환자 스스로가 미리 본인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미국인들이 사전의료지시서(Advancehealthcaredirective)라고 부르는(혹은 흔하게livingwill이라고도 부르는) 서류를 가지고 있다. 이는 본인이 질병이나 다른 원인으로 인해 본인 건강에 대해 더 이상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어떤 중재를 원하는지에 대해 적혀있는 법적으로 유효한 서류다. 어떤 치료는 원하고 어떤 치료는 원하지 않는지 상세하게 적혀있다. 마지막 순간에 대해 의사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미리 결정해놓는 것이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이, 가족들과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이 적지 않다. 한국에서는 의사결정 능력을 잃어버린 환자에게 어떤 치료들을 얼마나 더 제공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료진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여전히 큰 과제로 남아있다.

아직도 누군가 내게 어떤 것이 맞는지 물으면casebycase(경우에 따라 다르다.)라고 말한다. 정해진 답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DNR이 환자를 포기하는 것은결코아니다.’는 것이다.

실습 첫 날부터 한 환자의 임종을 통해 이런 윤리적인 문제와 갈등에 부딪히게 되면서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나는, 단순히 암기를 통한 공부가 아닌 실제 병원에서의 환자 간호와 관련지어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 또한 느꼈다. 아직도 진리라고 생각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아는 만큼 환자와 그 상황을 더 잘 공감할 수 있고 더 좋은 간호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좋은 간호사가 되기 위한 공부란‘경험하는 모든 지식을 환자 간호와 접목시켜 지금 배우는 것이 무슨 이유에서, 어떤 식으로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를 계속 생각하며 하는 공부’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에 했던 노력이 정말로 내 한계였는지, 노력의 끝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실망스러웠던 그 결과가 한계가 아니었음을 믿고 싶었다. 이전과 다르게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다면 그 땐 결국내 한계는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며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들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기는 다른 누구와의 경쟁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실망스러웠던 결과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일어나서 도전했고 미래에 좋은 간호사로서 다양한 지식을 바탕으로 훌륭한 간호를 제공하려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최선을 다해 좋은 성과를 냈다는 사실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아… 나는 죽도록 해도 이 정도구나.’가 아니라‘하니까 되더라!’로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확신이 생기면서 삶은 조금씩 달라졌다.

"아동은 성인의 축소판이 아니다."

아동간호학을 배우면서 가장 처음 접한 말이다.

소아청소년기 환자들은 특수한 발달 양상과 시기적 특수성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돌보기 쉽지 않은 환자다. 그리고 가장 힘든 부분 중 하나는 병원 생활을 어려워하는 소아 환자들에 대한 공포감을 줄여주는 것과 아이를 환자로 두고 있는 부모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지켜보는 것이다.

동정과 연민으로 마음이 휘둘리다보니 본질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미래의 간호사였고 연민의 감정이 아닌 공감을 통한 참된 간호를 제공할 필요가 있었다.

남학생 최초 간호학과 수석이라는 타이틀은 내게 꼭 필요했던‘성공’이었고, 이 서울대학교병원 입사 불합격은 그 당시 꼭 필요했던‘실패’가 아니었나 싶다.

긍정적이고 잘 웃는 편이라 환자나 보호자 분께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할 수 있고 책임감이 강하여 주어진 업무를 잘 수행할 자신이 있습니다.

질병을 치료해야 함에 초점이 맞춰져, 환자를‘하나의 인격체’가 아닌‘치료해야 하는 질병체’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같은 진단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환자마다 호소하는 증상이나 나타나는 징후가 다르고, 그렇기에‘질병’을 치료한다고 생각하기보다 개개인의‘환자’를 치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질병은 어디까지나 질병일 뿐 환자는 한‘사람’으로서 존중받아야 하며 질병명이 그 환자를 정의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싶다.

가끔 일이 너무 바쁠 때 의사나 다른 간호사와의 의사소통 중 환자를 이름 대신 쉽게 병실번호나 진단명으로 지칭하고 싶은 유혹이 드는 때가 있다. 하지만 변화를 위해선 나 자신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믿기에 예나 지금이나 항상 환자를 이름으로 부르려고 노력한다.

불행하게도 병원에 입사 이후 어떤 부서로 배치될지에 대해서 간호사는 투입 직전까지도 알 수 없다. 간호사의 희망사항이나 선호도보다 병원 내 부서의 인력 필요도에 따라 배치가 되는 편이다. 쉽게 말하면 빈자리가 생기는 곳에 신입 간호사를 투입시키는 것이다. 물론 병원에서 갓 입사한 간호사들에게 어떤 부서에서 일하고 싶은지1차부터3차 지망까지 적도록 했으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입사 동기들이 본인의 지망과는 크게 관련 없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미국 병원은 채용과정부터 많이 다르다. 미국은 병원 단위로 간호사 채용을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서 단위에서 간호사를 채용한다. 그렇기에 간호사 채용에 있어서 부서장(수간호사, 미국의 경우Nursemanager)의 자율성과 권한이 높다.

학생 간호사로서 중환자실에서 실습할 당시에‘이런 곳에서 일하게 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바로 그만둬야겠다.’라고 생각했었다. 실습한 그 중환자실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환자실을 처음 접하는 학생 간호사들은 자주‘중환자실’이라는 공간이 가져다주는 그 차가움과 공포감을 경험하게 되고 이는 학생 간호사로서 감당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많은 기계들과 환자에게 부착된 수많은 선들을 보면서도 압도당하게 된다.

실망하기만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다른 좋은 기회가 올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중환자실이라는 공간이 잘 맞는지 아닌지는 조금 더 경험해보고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때의 생각이 맞았음을9년이 지난 지금 알게 되었다.9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중환자실에서 일하고 있고9년 동안 다양한 부서에서 일을 하러 오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때마다 결국은 중환자실에 남기로 결정을 했다. 지금은 중환자실을 떠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환자실이란 공간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남다르다.

이 일이 본인에게 잘 맞는지 아닌지, 그 부서가 본인에게 맞는지 아닌지 너무 섣불리 결정하지는 말라고. 그 자리에서 머물며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결론적으로 이 당시 중환자실로의 배치는‘Ablessingindisguise’(전화위복)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신입 간호사 생활? 조금의 과장도 보태지 않고 군대 이등병 생활과 비슷했다. 입사 전까지는 간호사의 위계질서가 이렇게 엄격한지 전혀 몰랐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왜 그렇게 엄격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군대에서 이등병 생활이 힘들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이미 유대가 탄탄하게 형성되어있는 그룹에‘뉴페이스’로 들어가기 때문에 겪게 되는 고립감 때문이었다. 나만 모르는 추억을 떠올리며 웃고 나만 모르는 사람을 언급하며 웃고 떠들 때마다 사람인지라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은 소속되어 있지만 정신은 소속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 이런 느낌은 이등병으로서만이 아닌 신입 간호사 시절에도 느낄 수 있었다.

느릿느릿하게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일을 하고 있는 내내 뒤에서 말없이 항상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계시긴 했지만 느린 것에 대해서는 크게 혼낸 적은 없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신규 간호사를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서 느낀 것이지만 이‘기다림’과‘인내심’을 갖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배우는 사람에 대한‘기다림과 인내심’은 경시되기 쉬운 부분이지만, 배우는 사람으로서 그‘기다림과 인내심’은 정말 꼭 필요한, 배움의 질(Quality)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빨리 대충하는 것보다 느리더라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손이 느린 것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집니다. 하지만 일을 대충하는 습관은 경력 간호사가 되면 고치기 쉽지 않습니다. 처음 배울 때 정확하게 배우고 정확하게 수행하도록 하세요. 느리게 배우는 것에는 지적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원칙을 지키지 않고 일하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환자의 생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꼼꼼하게 더 세밀하게 일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날 선생님의 가르침이었다. 올바르지 못한 검사 수행으로 잘못된 검사 결과가 보고되면 그로 인해 환자에게 적절하지 않은 처방이 날 수 있고 그것은 오히려 환자를 해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는 의료인으로서 무해성의 원칙(Nonmaleficence)에 위반되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의료인은 환자에게‘해’가 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환자에게 가해지는 위험과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원칙(Principle)과 근거(Evidence)를 바탕으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그날 선생님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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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억울한 유형. 남들이 자기를 업신여기고 자기는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고 자기가 성공하지 못한 건 다 남들 탓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이들은 앙심을 품고, 특히 자기를 비판하거나 질책한 사람들에게 적의를 느끼지. 이들은 자신을 피해자라고 여기고 심리적으로 무력하다고 생각해. 이들이 폭력에 의지하는 이유는 폭력성을 통제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서고 폭력은 주로 이들이 원한을 품은 사람들을 향하지. 넷, 외상을 입은 유형."

다섯, 강박적이고 미성숙한 자아도취 유형. 여섯, 정신 이상의 경계선에 있는 피해망상과 질투가 심한 유형. 일곱, 정신 이상의 경계선을 한참 넘은 유형."

그 집은 달라진 건 전혀 없고 버려진 정도만 달라졌다. 내부는 똑같았다. 빛바랜 느낌. 마치 정적이 벽과 커튼에서 색을 빨아들이고 사진에서 얼굴들을 빼내고 책에서 기억을 뽑아낸 것처럼 보였다. 지난번에 못 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지난번에 생각하지 못한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은 채로, 그들은 어젯밤에 도달한 지점으로 돌아왔다. 까맣게 타버린 건물과 호텔의 잔해와 함께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그럼 여덟 번째는요?" 카야가 코트를 여미고 자갈밭에 발을 굴렀다.
"마티우치 교수는 그걸 ‘그냥 평범하게 나쁘고 화가 난’ 유형이라고 불렀어. 앞의 일곱 가지 유형이 조합된 형태."

미친 인간한테도 맥락은 필요할 거야. 분노가 폭발한 상태에서도 자신이 정당하게 행동하는 거라는 확신을 주는 순간이 있지. 광기는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스스로 해주는 외로운 대화야. 그리고 누구나 혼자서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뾰족하고 삐뚤빼뚤한 치아를 최대한 드러내 완벽한 얼굴을 망치면서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여자.

크고 텅 빈 집에서 함께 보낸 아침과 둘이 함께 나눠 피운 담배가 기억났다. 라켈은 첫 모금을 원했고, 카야는 늘 마지막 모금을 원했다.

사실 사람들한테 그들이 선택받았다는 느낌만 심어주면 그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기꺼이 해요.

작은 키에 화장기 없고 주름살 있는 얼굴로 봐서는 마흔보다는 쉰에 가까워 보였다.

테슬라의 첫 모델들이 직장에서의 짧은 일과를 마치고 윙윙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남편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가끔은 좋은 사람도 무너져요."

"……별다른 도움 없이 독학으로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혔어요. 노르웨이어도 공부하던 중이었고요. 언어 능력이 뛰어난 거죠.

"플루니트라제팜." 카야가 말했다. "로힙놀이라고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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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을 찾고 있다. 뉴욕시 지하철이 친절 찾기에 어울리지 않는 장소라는 것을 인정한다.

만약 뉴욕시 지하철에서 친절을 찾을 수 있다면 어디에서든 친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한 토막 엿듣는다.그 여잔 그만둬야 해. …… 아냐, 그 여잔 잘려야 해. 친절은 없다.

예의는 사회의 윤활유이고, 친절은 사회의 초강력 접착제다. 예의 있는 문화가 꼭 친절한 문화인 것은 아니다.

주위를 둘러볼 때마다 공자는 공익보다는 사익에 더 관심이 많은 지도자의 지배를 받으며 파벌 싸움으로 분열된 사람들을 보았다. 공자는 이것이 도덕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용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나는 여색을 좋아하는 만큼 덕을 좋아하는 자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라는 말을 남기고 13년간 이어질 방랑을 떠났다.

한편으로 공자는 온화했고, 심지어 명랑하기도 했다. 공자는 노래를 부르고 전통 현악기를 연주했다. 친구들과 함께 웃고 농담을 나눴으며, 일상의 즐거움을 찾았다. 거친 밥을 먹고 팔베개로 눕는 것도 그 즐거움 중 하나였다.

"말이 바르지 않으면 판단이 분명할 수 없다."

인은 《논어》에 105번 등장하는데, 그 어떤 단어보다 많은 횟수다. 이 단어의 정확한 번역어는 존재하지 않으며(공자 자신도 이 단어를 정확히 정의 내리지 않는다), 그동안 연민, 이타주의, 사랑, 어짐, 진정한 선, 온전한 행동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번역은 ‘인간다운 마음’이다.

인을 실천하는 사람은 공경과 아량, 신의, 민첩함, 친절이라는 다섯 가지 기본 덕목을 항상 실천한다

공자는 친절을 개인이 원할 때 베푸는 것에서 철학의 핵심 개념이자 훌륭한 통치의 근간으로 한 단계 승격시켰다.

공자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보다 약 500년 일찍 황금률을 제시했다.

친절은 실용적인 덕목이다. 공자의 한 추종자는 모두에게 친절을 베풀면 "손바닥 위에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4라고 말한다.

밥을 둥글게 말지 말 것. 여러 반찬을 한 입에 삼키지 말 것. 국을 꿀꺽꿀꺽 마시지 말 것. 먹을 때 소리를 내지 말 것. 이빨로 뼈를 씹지 말 것. 먹던 생선을 내려놓지 말 것. 개에게 뼈를 던져주지 말 것. 먹고 싶은 것을 잡아채지 말 것. 밥을 뒤적여서 식히지 말 것. 수수를 먹을 때는 젓가락을 쓰지 말 것5

나는 이 부분을 읽고 한숨을 쉰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유교의 이미지다. 부모를 공경하고,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문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규칙을 근간으로 한 철학. 훈훈하고 모호한 ‘무위’ 개념으로 뉴에이지 그룹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노자가 공자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당연하다.

《논어》의 매 페이지에는 부모님의 손가락질이 희미하게 찍혀 있다. 아들은 마땅히 아버지를 공경해야 하며, 아버지의 죄조차도 덮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무는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끝나지 않는다. 순종적인 딸과 아들은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도 부모의 뜻대로 행동해야 한다.

가족은 우리가인을 계발하는 헬스장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운다. 서로 간의 거리는 중요한 요소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에서 시작하라. 우리가 자기 자신에서 가족으로, 이웃으로, 국가로, 모든 지각 있는 존재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할 때 친절은 연못에 던진 돌멩이처럼 점점 커다란 원을 만들며 퍼져 나간다. 한 생명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으면 모든 생명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다.

두 현대 작가가 말하듯, 보통 자녀 양육은 "잔인함이라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친절이라는 섬"6으로 머무른다. 우리는 그 섬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니, 섬의 크기를 키워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더욱 좋다.

"몇 명이에요?" 식당 주인이 화가 난 것처럼 소리친다. 내가 중요한 회의를 방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인간 본성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본성이 없는 것이 인간 본성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맹자는 "모든 사람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7라고 말하며, 그 근거로 한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당신이 자기 문제를 고민하며 한 마을을 지나고 있는데 어떤 아이가 우물 가장자리에 서서 비틀거리며 안으로 떨어지려 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자.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친절할 수 있는 능력은 언어 능력과 같다. 우리 모두는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다. 하지만 그 능력은 부모님이나 로제타스톤을 통해 활성화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타고난 친절함은 반드시 밖으로 끌어내져야 한다. 공자는 그 방법이 바로 공부라고 본다. 《논어》는 공부를 칭송하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이런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친절의 힘을 기록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거의 성스럽기까지 한 책무라고, 굴드는 말한다.

냉철한 과학자인 굴드는 선함을 기록하는 데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친절은 귀하게 여기면 더욱 늘어난다. 친절에는 전염성이 있다. 도덕적인 행동을 목격하면 신체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이 촉발되어 흘러넘친다. 친절한 행동을 목격한 사람은 더욱 친절하게 행동하게 된다.10 최근 있었던 여러 연구에서 증명된 현상이다.

나도 친절의 전염성을 몸소 체험한다. 친절한 행동에 주의를 온통 집중하며 F 노선을 탔던 1주일 이후 나는 더 친절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문을 잡아준다. 쓰레기를 줍는다. 바리스타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그가 보지 않을 때 팁을 놓아둔다. 이런 작은 행동으로 노벨상을 타거나 성인군자가 되지는 못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이다. 삼나무 씨앗에 떨어지는 몇 방울의 물이다.

"뉴욕 사람들은 예의가 없는 게 아냐." 내가 F 노선에서 친절을 찾겠다는 내 계획을 말하자 뉴욕 토박이인 친구 애비가 말했다. "그냥 빠른 거야."

친절한 행동을 빨리 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면 친절하려면 반드시 느려져야 하는 걸까? 천천히 만든 요리는 패스트푸드보다 더 맛있고, 지금껏 살펴보았듯이 좋은 철학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열차가 이스트리버 아래를 덜커덩덜커덩 지나는 동안 나는 속도와 친절의 관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속도를 높이면 친절함은 줄어들까? 공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어진 사람은 "행동거지가 수수하고 말을 느리게 한다"라고 말한다.

여자는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다. 여자가 휘청인다. 돌풍에 휘날리는 것처럼 여자의 커다란 몸이 흔들거린다.
여자의 발밑에서 여자가 불안정한 이유를(이유 중 하나를) 발견한다. 처음 봤을 때 나는 여자가 낡은 신발을 신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여자는 맨발이다. 부어오른 기형의 두 발이 기괴하다. 인간의 발 같지 않다.
여자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휘청거린다. 돈도, 그 어떤 종류의 친절함도 구하지 않는다. 그 부분이 가장 최악이다. 이 애매모호함. 나는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을 느끼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친절은 힘든 것이다.

우리는 돕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낫다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친절은 힘든 것이다. 친절에는 감정 이입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속도는 주의력의 적임을 배웠다. 빠른 속도는 우리의 의식을 산산이 조각내고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수백만 개의 파편으로 쪼개버린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속도가 빨라지면 아름다움도 줄어드나? 아니면 속도에는 고유의 흐릿한 아름다움이 있나?

신칸센은 열차계의 로빈 윌리엄스다. 뻔뻔하게 물리 법칙을 무시하지만, 그 무시를 넋이 나갈 듯한 속도로 해버려서 모든 게 다 용서되는 부조리함.

로빈 윌리엄스가 다른 코미디언과 경쟁하지 않았듯이 신칸센도 다른 열차와 경쟁하지 않는다. 신칸센은 항공사와 경쟁한다. 재팬 레일은 최선을 다해 기내의 분위기를 모방했다. 바다에 착륙하는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녹음 방송과 좌석 벨트는 없지만, 꼭 에어버스에 타고 있는 것 같다.

만약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된다면(일본에서는 모든 것이 거의 언제나 계획대로 된다) 우리는 시속 300킬로미터의 속도로 두 시간 8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도쿄에서 교토로 이동하게 된다.

일본에서 모든 것은 딱 좋거나 완전 나쁘거나, 둘 중 하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계의 독보적인 목록 제작자였다. 골치 아픈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고 싶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와 하위범주를 층층이 만들었다.1

수전 손택은 끝없이 목록을 만드는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다음과 같이 유려하고 개성 있게 이지적인 말을 남겼다. "나는 가치를 인식하고, 가치를 부여하고, 가치를 창출하고, 심지어 존재를 창출한다(또는 보장한다)

좋은 목록 작성의 비결은 범주를 제대로 세우는 것이다. 범주는 다양한 항목을 아우를 수 있을 만큼 커야 하지만 생각을 잘 감쌀 수 있을 만큼 작아야 한다. ‘역대급 음악’은 범위가 너무 넓은 반면 ‘1930년대 시카고의 폴란드계 미국인이 작곡한 역대급 폴카 음악’은 범위가 너무 좁다.

나는 좁은 공간에 이끌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을 즐긴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일본을 그토록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인만큼 좁은 공간에 사는 사람은 없다. 구석 인간들이다. 이들은 지하철 칸과 술집과 호텔방이라 주장하는 공간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놀랍게도, 그 와중에 누구도 서로를 죽이지 않는다.

저자인 세이 쇼나곤은 "개인적 즐거움을 위해 내가 생각하고 느낀 것을 적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글을 읽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않았는데, 바로 그 점이 사람들이 쇼나곤의 글을 그토록 재미나게 읽는 이유다.

점점 쇼나곤의 세상에 빨려 들어간다. 그녀의 대담함에, 소소한 것들을 향한 사랑에, 뜻밖의 장소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능력에 매료된다.

마쿠라노소시, 즉 《베갯머리 서책》을 영어로 옮긴 메러디스 매키니는 "짤막한 글과 생각과 일화를 누빈 불규칙한 퀼트"4라고 말한다.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고, 자기계발서들은 조언한다. 이런 접근법은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목적지를 파악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니 움직일 것. 지금 있는 곳에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할 것. 일단 붓을 들고 붓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볼 것.

"빨리 해야 할 것이 있을 때 찾아오는 손님. 입을 다물지 않고 계속 지껄이면서 미친 사람처럼 활짝 웃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 몰래 기어 들어오는 은밀한 애인을 발견하고 짖어대는 개. 벼룩. 말하고 있는데 불쑥 끼어들어서 잘난 체하며 자기가 이야기를 끝내는 사람(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말을 끊고 끼어드는 사람은 정말 짜증나기 그지없다). 파리들. 졸려서 막 잠자리에 누웠는데 그 가늘고 작은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모기 한 마리. 12월 31일에 하루 종일 내리는 비."

일본인은 배꽃이 못생겼다고 생각해서 "그 남자는 배꽃처럼 얼굴이 못생겼다"처럼 사람을 모욕하는 데 썼다. 하지만 중국인은 배꽃을 사랑했다. 쇼나곤은 그러므로 "배꽃에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라고 말한다. 과연, 깊게 생각해본 쇼나곤은 배꽃에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호의를 가지고 주의 깊게 쳐다보면, 꽃잎 끝에 꽤나 사랑스러운 광채가 아주 희미하게나마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나는 살짝 누렇게 변한 흰색 셔츠를 입은 사람을 참을 수 없다."

쇼나곤은 그냥 즐거운 것과 진정한오카시이, 즉 진정으로 기쁜 것5을 구분한다.

쇼나곤이 보기에는 작디작은 요소가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쇼나곤은 세 겹 부채는 좋아하지만 다섯 겹 부채는 용납하지 않는다(다섯 겹 부채는 "너무 두껍고 밑 부분이 못생겼다"). 공기 중에 눈이 올 듯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기쁘지만 "비가 올 기미로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은 그날의 분위기를 망친다." 딱좋아주의 철학이다. 모든 것은딱 좋거나 완전 글렀거나 둘 중 하나다. 1센티미터 삐끗하는 것은 1킬로미터 삐끗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소는 이마에 흰색 털이 약간 섞여 있어야 하지만 고양이는 반드시 새까만 색이어야 한다. "하지만 고양이의 배는 예외인데, 배만은 새하얘야 한다." 음악 연주는 마음을 기쁘게 하지만 오로지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밤에만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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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강렬한 감정에 흥분한다고 몇 번 말한 적이 있다. 격분, 기쁨, 증오, 고통. 그런데 애도는? 흠. 욕정과 수치심. 상중에 있는 사람과 섹스를 한다는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생각. 이보다 더 나쁜 생각도 있겠지.

해리는 일어서서 벽에 건 피코트를 집었다.

힘 있게 악수하고 안정적이고 똑바르게 눈을 마주치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화나 있고 상처받기 쉬워 보였다.

"고맙습니다." 해리는 그의 말을 믿었다. 어쩌면 맞잡은 손이 따뜻해서였는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장례식장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나면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위안을 얻는 듯했다. 삶이 계속되기를원하는 누군가는.

"누구나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지만 언제나 마음이 강력히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거 아닌가요?"

보헤미안이면서 신형 아우디를 소유한 사람들. 번쩍거리는 모델이 아닌 신형 아우디가 서 있는 차고에는 잘 건조된 목재로 제작된, 오래되고 묵직하고 유쾌하게 실용적이지 않은 정원 가구가 가득했다. 뤼데르 사겐스 가는 이 나라에서 가장 비싼 거리 중 하나일지 몰라도, 사실 이 거리의 이상적인 주민은 할머니에게 집을 물려받은 예술가인 듯했다. 어느 쪽이든 주민들은 대체로 선량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이자, 지속 가능한 발전을 믿으며 오래된 건축양식의 주택 여기저기에 튀어나온 지나치게 큰 목재 들보만큼이나 공고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해리는 엎어놓은 책을 보았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젊은 여자가 음울하고 고독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여자는 남자가 아내와 별거 중인 줄 알지만 사실 남자의 아내는 다락방에 갇혀 있는 줄거리가 기억났다.

"내 멘토였던 해리라는 사람이, 다른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고 추론에 기초한 결론이 부당하게 좋은 명성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나는 거 같은데요."

같은 집에 살고 한 침대에서 자고 모든 걸 공유해도 서로 비밀을 다 아는 건 아니에요.

트룰스 베른트센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미국 드라마 <더 실드>의 첫 시즌의 세 번째 에피소드를 보았다. 전 시리즈를 이미 두 번이나 보고 새로 시작했다.

"네?" 그는 이 긍정의 한 마디에 애써 거절의 뜻을 담으려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삶은 그렇게 복잡할 필요가 없다.

2014년에 의회에서 살인과 성폭행의 공소시효를 폐지한 뒤로 과거의 미제사건에 새로운 DNA 분석기술을 적용해달라는 주문이 폭주했고, 대기 시간이 급격히 늘어난 터였다.

"우리의 어떤 행동이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를 아끼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죠."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것보다 더 많이 생물학으로 엮여 있는지도 몰라. 어쩌면 누구나 혈통 우월주의자와 인종 차별주의자와 민족주의자로 타고나서 나만의 가족을 위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졌는지도 모르지. 그러다 그런 욕구를 무시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거고. 대다수는, 결국."

얼어붙을 듯 추웠다. 늘 추웠다. 카불처럼 기온이 영하 5도에서 영상 30도를 한참 넘게 오르내리는 곳에서는 6월이든 12월이든 밤이 되면 추위에 떨면서 아침이 밝기만을, 사막의 태양이 다시 몸을 데워주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오빠한테 그들 남매가 냉혈 인간으로 태어난 것 같은지, 파충류처럼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지 못하고 외부의 열이 있어야 몸이 굳어 얼어 죽는 걸 막을 수 있는 것 같은지 물은 적이 있다.

경찰에게는 남들한테 없는 뭔가가 있었다. 결연함. 그에게는 결단력이 있었다. 성직자와도 조금 비슷해 보인다고 당뉘는 생각했다. 성직자들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 절실하게 믿기에 우리도 그들을 신뢰하는 것처럼.

그녀는 세 번 물었다. 누군들 그 이상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까?

"외로워. 당신을 만나기 전에 나는 늘 혼자였어도 외로운 적이 없었어. 외로움은 새롭고, 외로움은…… 흥미로워. 우리가 함께일 때 당신이 모든 진공 상태를 채워준 건 아니지만 떠나면서는 커다란 아가리를 벌린 구멍을 남겼어. 사랑은 상실의 과정이라고 하더군. 어떻게 생각해?"

미군 병사 중 적어도 20 혹은 30퍼센트 이상이 PTSD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베트남의 미군 병사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연합군 병사는 이 수치가 절반으로 떨어져요. 심리학자들은 그 이유를 베트남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병사들이 그들이 치르는 전쟁을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반면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누구나 히틀러와 싸워야 하는 이유를 납득했죠. 베트남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병사들은 고국으로 돌아올 때 시가행진도 없었고, 그들을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는 사회와 대면해야 했어요. 더욱이 그들의 행위를 어떤 정당한 서사에 끼워넣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이스라엘을 위해 살인하는 게 더 수월한 거죠. 실제로 거기서는 PTSD 발병률이 8퍼센트로 떨어져요. 그곳의 폭력이 조금이라도 덜 끔찍해서가 아니라, 병사들이 적들에게 둘러싸인 작은 나라를 지킨다고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국민들에게도 폭넓은 지지를 받기 때문이죠. 그래서 살인에 대한 단순하고 윤리적으로 정당한 이유가 생기는 거예요. 그들의 행위가 꼭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거죠."

얇고 불그스름한 눈꺼풀에 실핏줄이 보이고 눈썹은 흐릿하고 살결이 희었다. 얼굴이 마치 불 켜진 전구를 삼킨 것처럼 보였다. 부풀어 오르고 속에서 불을 밝히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강요된 자매애의 연대와 감정에 호소하는 수사법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가끔은 그녀들에게 닥치고 그냥 평등한 기회와 동일노동 동일임금 같은 구호나 외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약간 투실투실하지만 착하고 귀여운 이 과학수사관은 그에게 주어진 복이 믿기지 않는 듯 그녀를 여왕처럼 떠받들고 자기를 한없이 낮추었다. 그녀는 비에른의 그런 태도를 함부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많은 사람이(여자든 남자든) 단지 배우자가 허용한다는 이유로 괴물로 변해가는 예를 숱하게 봐왔다. 그녀는 노력했다. 진실로 노력했다.

카불 하늘의 연은 이 도시가 탈레반 정권에서 해방되었다는 상징이었다.

자네한테 주는 선물이야. 뭘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운명이 결정하게 놔둬. 해방감이 엄청날 거야, 장담해."

"보니까 사람들을 자백하게 하는 건 고통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공포더군. 그래도 공포는 근거가 탄탄해야겠지. 그러니 고문자는 그의 상상력이 닿는 데까지 고통을 가할 거라는 믿음을 상대에게 줘야 해. 내가 지금 가진 게 하나 있다면, 핀네, 바로 그 상상력이야."

칼에 대한 공포가 인간의 유전자에 깊이 박혀 있어. 뭔가가 살갗을 뚫고 몸속으로 들어와 우리 안에 든 것을, 우리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는 생각 말이야. 사람들한테 칼을 보여줘봐. 그럼 뭐든 해달라는 대로 해줄 거야.

정색하고 속고 싶은 사람은 없어도 즐거운 방식으로 호도되는 데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

게다가 객관성이 자네 강점인 적이 없잖아. 자제력도 마찬가지고.

카트리네는 누구에게든 털어놓으면 얼마나 해방감이 들지 생각해보았다.누군가가 안다는 것. 카트리네는 부담, 비밀이 시간이 흐르면 견디기 수월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첫애를 보고 그 애가 한없이 무력하다는 걸 안 순간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어른의 도움이 엄청 필요하겠구나 하고 깨달을 때요. 이 양반처럼."

"악마와 거래하려면 악마가 왜 좋은 거래라고 여기는지 잘 따져봐야 해."

사람이 사랑받을 수 없다면 공포의 대상이라도 되고 싶어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새삼 해리 홀레의 가장 좋은 점은 좋은 냄새가 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향수 냄새도 아니고, 초원이나 숲의 상쾌한 냄새도 아니었다. 퀴퀴한 술 냄새가 나기도 하고 땀 냄새가 훅 끼치기도 했다. 그런데도 설명하기 힘든좋은 냄새가 났다.그의 냄새. 이런 생각을 한다고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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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강렬한 감정에 흥분한다고 몇 번 말한 적이 있다. 격분, 기쁨, 증오, 고통. 그런데 애도는? 흠. 욕정과 수치심. 상중에 있는 사람과 섹스를 한다는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생각. 이보다 더 나쁜 생각도 있겠지.

해리는 일어서서 벽에 건 피코트를 집었다.

힘 있게 악수하고 안정적이고 똑바르게 눈을 마주치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화나 있고 상처받기 쉬워 보였다.

"고맙습니다." 해리는 그의 말을 믿었다. 어쩌면 맞잡은 손이 따뜻해서였는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장례식장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나면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위안을 얻는 듯했다. 삶이 계속되기를원하는 누군가는.

"누구나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지만 언제나 마음이 강력히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거 아닌가요?"

보헤미안이면서 신형 아우디를 소유한 사람들. 번쩍거리는 모델이 아닌 신형 아우디가 서 있는 차고에는 잘 건조된 목재로 제작된, 오래되고 묵직하고 유쾌하게 실용적이지 않은 정원 가구가 가득했다. 뤼데르 사겐스 가는 이 나라에서 가장 비싼 거리 중 하나일지 몰라도, 사실 이 거리의 이상적인 주민은 할머니에게 집을 물려받은 예술가인 듯했다. 어느 쪽이든 주민들은 대체로 선량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이자, 지속 가능한 발전을 믿으며 오래된 건축양식의 주택 여기저기에 튀어나온 지나치게 큰 목재 들보만큼이나 공고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해리는 엎어놓은 책을 보았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젊은 여자가 음울하고 고독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여자는 남자가 아내와 별거 중인 줄 알지만 사실 남자의 아내는 다락방에 갇혀 있는 줄거리가 기억났다.

"내 멘토였던 해리라는 사람이, 다른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고 추론에 기초한 결론이 부당하게 좋은 명성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나는 거 같은데요."

같은 집에 살고 한 침대에서 자고 모든 걸 공유해도 서로 비밀을 다 아는 건 아니에요.

트룰스 베른트센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미국 드라마 <더 실드>의 첫 시즌의 세 번째 에피소드를 보았다. 전 시리즈를 이미 두 번이나 보고 새로 시작했다.

"네?" 그는 이 긍정의 한 마디에 애써 거절의 뜻을 담으려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삶은 그렇게 복잡할 필요가 없다.

2014년에 의회에서 살인과 성폭행의 공소시효를 폐지한 뒤로 과거의 미제사건에 새로운 DNA 분석기술을 적용해달라는 주문이 폭주했고, 대기 시간이 급격히 늘어난 터였다.

"우리의 어떤 행동이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를 아끼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죠."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것보다 더 많이 생물학으로 엮여 있는지도 몰라. 어쩌면 누구나 혈통 우월주의자와 인종 차별주의자와 민족주의자로 타고나서 나만의 가족을 위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졌는지도 모르지. 그러다 그런 욕구를 무시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거고. 대다수는, 결국."

얼어붙을 듯 추웠다. 늘 추웠다. 카불처럼 기온이 영하 5도에서 영상 30도를 한참 넘게 오르내리는 곳에서는 6월이든 12월이든 밤이 되면 추위에 떨면서 아침이 밝기만을, 사막의 태양이 다시 몸을 데워주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오빠한테 그들 남매가 냉혈 인간으로 태어난 것 같은지, 파충류처럼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지 못하고 외부의 열이 있어야 몸이 굳어 얼어 죽는 걸 막을 수 있는 것 같은지 물은 적이 있다.

경찰에게는 남들한테 없는 뭔가가 있었다. 결연함. 그에게는 결단력이 있었다. 성직자와도 조금 비슷해 보인다고 당뉘는 생각했다. 성직자들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 절실하게 믿기에 우리도 그들을 신뢰하는 것처럼.

그녀는 세 번 물었다. 누군들 그 이상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까?

"외로워. 당신을 만나기 전에 나는 늘 혼자였어도 외로운 적이 없었어. 외로움은 새롭고, 외로움은…… 흥미로워. 우리가 함께일 때 당신이 모든 진공 상태를 채워준 건 아니지만 떠나면서는 커다란 아가리를 벌린 구멍을 남겼어. 사랑은 상실의 과정이라고 하더군. 어떻게 생각해?"

미군 병사 중 적어도 20 혹은 30퍼센트 이상이 PTSD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베트남의 미군 병사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연합군 병사는 이 수치가 절반으로 떨어져요. 심리학자들은 그 이유를 베트남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병사들이 그들이 치르는 전쟁을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반면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누구나 히틀러와 싸워야 하는 이유를 납득했죠. 베트남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병사들은 고국으로 돌아올 때 시가행진도 없었고, 그들을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는 사회와 대면해야 했어요. 더욱이 그들의 행위를 어떤 정당한 서사에 끼워넣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이스라엘을 위해 살인하는 게 더 수월한 거죠. 실제로 거기서는 PTSD 발병률이 8퍼센트로 떨어져요. 그곳의 폭력이 조금이라도 덜 끔찍해서가 아니라, 병사들이 적들에게 둘러싸인 작은 나라를 지킨다고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국민들에게도 폭넓은 지지를 받기 때문이죠. 그래서 살인에 대한 단순하고 윤리적으로 정당한 이유가 생기는 거예요. 그들의 행위가 꼭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거죠."

얇고 불그스름한 눈꺼풀에 실핏줄이 보이고 눈썹은 흐릿하고 살결이 희었다. 얼굴이 마치 불 켜진 전구를 삼킨 것처럼 보였다. 부풀어 오르고 속에서 불을 밝히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강요된 자매애의 연대와 감정에 호소하는 수사법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가끔은 그녀들에게 닥치고 그냥 평등한 기회와 동일노동 동일임금 같은 구호나 외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약간 투실투실하지만 착하고 귀여운 이 과학수사관은 그에게 주어진 복이 믿기지 않는 듯 그녀를 여왕처럼 떠받들고 자기를 한없이 낮추었다. 그녀는 비에른의 그런 태도를 함부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많은 사람이(여자든 남자든) 단지 배우자가 허용한다는 이유로 괴물로 변해가는 예를 숱하게 봐왔다. 그녀는 노력했다. 진실로 노력했다.

카불 하늘의 연은 이 도시가 탈레반 정권에서 해방되었다는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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