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강렬한 감정에 흥분한다고 몇 번 말한 적이 있다. 격분, 기쁨, 증오, 고통. 그런데 애도는? 흠. 욕정과 수치심. 상중에 있는 사람과 섹스를 한다는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생각. 이보다 더 나쁜 생각도 있겠지.

해리는 일어서서 벽에 건 피코트를 집었다.

힘 있게 악수하고 안정적이고 똑바르게 눈을 마주치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화나 있고 상처받기 쉬워 보였다.

"고맙습니다." 해리는 그의 말을 믿었다. 어쩌면 맞잡은 손이 따뜻해서였는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장례식장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나면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위안을 얻는 듯했다. 삶이 계속되기를원하는 누군가는.

"누구나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지만 언제나 마음이 강력히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거 아닌가요?"

보헤미안이면서 신형 아우디를 소유한 사람들. 번쩍거리는 모델이 아닌 신형 아우디가 서 있는 차고에는 잘 건조된 목재로 제작된, 오래되고 묵직하고 유쾌하게 실용적이지 않은 정원 가구가 가득했다. 뤼데르 사겐스 가는 이 나라에서 가장 비싼 거리 중 하나일지 몰라도, 사실 이 거리의 이상적인 주민은 할머니에게 집을 물려받은 예술가인 듯했다. 어느 쪽이든 주민들은 대체로 선량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이자, 지속 가능한 발전을 믿으며 오래된 건축양식의 주택 여기저기에 튀어나온 지나치게 큰 목재 들보만큼이나 공고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해리는 엎어놓은 책을 보았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젊은 여자가 음울하고 고독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여자는 남자가 아내와 별거 중인 줄 알지만 사실 남자의 아내는 다락방에 갇혀 있는 줄거리가 기억났다.

"내 멘토였던 해리라는 사람이, 다른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고 추론에 기초한 결론이 부당하게 좋은 명성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나는 거 같은데요."

같은 집에 살고 한 침대에서 자고 모든 걸 공유해도 서로 비밀을 다 아는 건 아니에요.

트룰스 베른트센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미국 드라마 <더 실드>의 첫 시즌의 세 번째 에피소드를 보았다. 전 시리즈를 이미 두 번이나 보고 새로 시작했다.

"네?" 그는 이 긍정의 한 마디에 애써 거절의 뜻을 담으려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삶은 그렇게 복잡할 필요가 없다.

2014년에 의회에서 살인과 성폭행의 공소시효를 폐지한 뒤로 과거의 미제사건에 새로운 DNA 분석기술을 적용해달라는 주문이 폭주했고, 대기 시간이 급격히 늘어난 터였다.

"우리의 어떤 행동이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를 아끼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죠."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것보다 더 많이 생물학으로 엮여 있는지도 몰라. 어쩌면 누구나 혈통 우월주의자와 인종 차별주의자와 민족주의자로 타고나서 나만의 가족을 위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졌는지도 모르지. 그러다 그런 욕구를 무시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거고. 대다수는, 결국."

얼어붙을 듯 추웠다. 늘 추웠다. 카불처럼 기온이 영하 5도에서 영상 30도를 한참 넘게 오르내리는 곳에서는 6월이든 12월이든 밤이 되면 추위에 떨면서 아침이 밝기만을, 사막의 태양이 다시 몸을 데워주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오빠한테 그들 남매가 냉혈 인간으로 태어난 것 같은지, 파충류처럼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지 못하고 외부의 열이 있어야 몸이 굳어 얼어 죽는 걸 막을 수 있는 것 같은지 물은 적이 있다.

경찰에게는 남들한테 없는 뭔가가 있었다. 결연함. 그에게는 결단력이 있었다. 성직자와도 조금 비슷해 보인다고 당뉘는 생각했다. 성직자들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 절실하게 믿기에 우리도 그들을 신뢰하는 것처럼.

그녀는 세 번 물었다. 누군들 그 이상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까?

"외로워. 당신을 만나기 전에 나는 늘 혼자였어도 외로운 적이 없었어. 외로움은 새롭고, 외로움은…… 흥미로워. 우리가 함께일 때 당신이 모든 진공 상태를 채워준 건 아니지만 떠나면서는 커다란 아가리를 벌린 구멍을 남겼어. 사랑은 상실의 과정이라고 하더군. 어떻게 생각해?"

미군 병사 중 적어도 20 혹은 30퍼센트 이상이 PTSD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베트남의 미군 병사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연합군 병사는 이 수치가 절반으로 떨어져요. 심리학자들은 그 이유를 베트남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병사들이 그들이 치르는 전쟁을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반면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누구나 히틀러와 싸워야 하는 이유를 납득했죠. 베트남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병사들은 고국으로 돌아올 때 시가행진도 없었고, 그들을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는 사회와 대면해야 했어요. 더욱이 그들의 행위를 어떤 정당한 서사에 끼워넣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이스라엘을 위해 살인하는 게 더 수월한 거죠. 실제로 거기서는 PTSD 발병률이 8퍼센트로 떨어져요. 그곳의 폭력이 조금이라도 덜 끔찍해서가 아니라, 병사들이 적들에게 둘러싸인 작은 나라를 지킨다고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국민들에게도 폭넓은 지지를 받기 때문이죠. 그래서 살인에 대한 단순하고 윤리적으로 정당한 이유가 생기는 거예요. 그들의 행위가 꼭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거죠."

얇고 불그스름한 눈꺼풀에 실핏줄이 보이고 눈썹은 흐릿하고 살결이 희었다. 얼굴이 마치 불 켜진 전구를 삼킨 것처럼 보였다. 부풀어 오르고 속에서 불을 밝히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강요된 자매애의 연대와 감정에 호소하는 수사법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가끔은 그녀들에게 닥치고 그냥 평등한 기회와 동일노동 동일임금 같은 구호나 외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약간 투실투실하지만 착하고 귀여운 이 과학수사관은 그에게 주어진 복이 믿기지 않는 듯 그녀를 여왕처럼 떠받들고 자기를 한없이 낮추었다. 그녀는 비에른의 그런 태도를 함부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많은 사람이(여자든 남자든) 단지 배우자가 허용한다는 이유로 괴물로 변해가는 예를 숱하게 봐왔다. 그녀는 노력했다. 진실로 노력했다.

카불 하늘의 연은 이 도시가 탈레반 정권에서 해방되었다는 상징이었다.

자네한테 주는 선물이야. 뭘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운명이 결정하게 놔둬. 해방감이 엄청날 거야, 장담해."

"보니까 사람들을 자백하게 하는 건 고통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공포더군. 그래도 공포는 근거가 탄탄해야겠지. 그러니 고문자는 그의 상상력이 닿는 데까지 고통을 가할 거라는 믿음을 상대에게 줘야 해. 내가 지금 가진 게 하나 있다면, 핀네, 바로 그 상상력이야."

칼에 대한 공포가 인간의 유전자에 깊이 박혀 있어. 뭔가가 살갗을 뚫고 몸속으로 들어와 우리 안에 든 것을, 우리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는 생각 말이야. 사람들한테 칼을 보여줘봐. 그럼 뭐든 해달라는 대로 해줄 거야.

정색하고 속고 싶은 사람은 없어도 즐거운 방식으로 호도되는 데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

게다가 객관성이 자네 강점인 적이 없잖아. 자제력도 마찬가지고.

카트리네는 누구에게든 털어놓으면 얼마나 해방감이 들지 생각해보았다.누군가가 안다는 것. 카트리네는 부담, 비밀이 시간이 흐르면 견디기 수월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첫애를 보고 그 애가 한없이 무력하다는 걸 안 순간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어른의 도움이 엄청 필요하겠구나 하고 깨달을 때요. 이 양반처럼."

"악마와 거래하려면 악마가 왜 좋은 거래라고 여기는지 잘 따져봐야 해."

사람이 사랑받을 수 없다면 공포의 대상이라도 되고 싶어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새삼 해리 홀레의 가장 좋은 점은 좋은 냄새가 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향수 냄새도 아니고, 초원이나 숲의 상쾌한 냄새도 아니었다. 퀴퀴한 술 냄새가 나기도 하고 땀 냄새가 훅 끼치기도 했다. 그런데도 설명하기 힘든좋은 냄새가 났다.그의 냄새. 이런 생각을 한다고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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