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도 모임도 방문도 없이 새해 첫날이 지나간다. 사촌 이내 가족이 중병이면 그해 차례를 접는 법이니 모두가 나 때문이다. 장손이 아프니까 조상님들도 걱정이 되어 굶기를 마다하지 않는 걸까.
응급실은 삶과 죽음이 부딪히는 경계 영역이다.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사람들은 전화를 걸고 받으며 거래를 하고 통장 번호를 주고받는다. 병이 들었다고 생활이 용서해주는 건 아니니까.
그럴 때 가족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다. 가족은 족보와 혈통의 범주를 초월하는 관계 영역이다. 세상에 가족이 있다면 특정한 족속이 아니라 인간 모두를 포함하는 인간 가족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프루스트도 이렇게 말했는지 모른다. "회고해보면 콩브레에 살았던 사람들의 얼굴들이 다 비슷하게 닮아 보인다. 그래서 콩브레의 추억은 인간 가족의 박물관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은 태어날 때와 죽을 때 다 똑같다. 삶의 시간들이 흐르면서 그 얼굴들이 저마다 구별되는 얼굴이 되고 개인의 얼굴이 되지만 알고 보면 그 고유하다는 개체의 얼굴마저도 사실은 본래의 얼굴로 되돌아가는 통과와 과정의 형상일 뿐이다. 마치 정해진 도착지를 향해서 달리는 기차가 도중에 지나가는 수많은 작은 역들이 서로 다른 풍경을 지니는 것처럼……
그곳은 다른 어느 도시에 도착하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통과역 혹은 관문이다. 그러고 보면 마쓰오 바쇼의 여행기에도 관문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그의 하이쿠 여행은 매번 관문을 통과해서 또 다른 마을로 들어서는 일이다. 그는 그렇게 관문을 지나 새로운 땅으로 들어설 때마다 하이쿠 한 편씩을 발자국처럼 남겼다. 하노버 중앙역도 내게는 바쇼의 관문과 같은 것이리라.
소리가 있다.
사이사이로 지나가는 소리, 살아 있는 소리,
일상의 소리.
담장을 넘나드는 나비들, 눈물을 흘리는 물고기들과 떠나는 오쿠로 여행길.
"얼마나 걸어가야 절이 나오나요?" 라고 물으면 촌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자뿌리고 그냥 가소. 그라면 나오니께……"
그런데 나는 왜 나의 유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걸까. 유년에 대한 글쓰기를 유서 쓰기로 여겼던 이들이 있었다. 발터 베냐민, 프루스트……
프루스트의 소설 공간은 둘이다. 하나는 생의 공간. 이 공간은 점점 더 수축하고 그 끝에 침대가 있다. 이 침대보다 더 작은 공간이 관이다. 또 하나의 공간은 추억의 공간. 이 공간은 생의 공간이 수축할수록 점점 더 확장되어서 마침내 하나의 우주를 연다. 그것이 회상의 공간이고 소설의 공간이다.
요즈음은 별로 불편한 게 없네요, 라고 나는 말한다. 그게 문제죠, 라고 의사는 말한다. 암 자체는 불편하게 만들지 않아요. 다만 점점 자라날 뿐이죠. 그러다 종양이 혈관을 막고 장기를 누르게 되면 몸이 불편해지는 거죠. 몸이 편하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죠. 오히려 몸이 편할수록 암의 상태를 의심해야죠.
《애도 일기》는 슬픔의 셀러브레이션이다. 이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건 명확하다. 그건 무력한 상실감과 우울의 고통이 아니다. 그건 사랑을 잃고 ‘비로소 나는 귀중한 주체가 되었다’는 사랑과 존재의 역설이다.
초의 선사는 추사가 죽고 두 해 뒤에 망자의 묘 앞에서 말했다고 한다. "꽃이 고우면 비가 내리는 법이구려."
수원 봉녕사에 다녀왔다. 25년 전 아우가 사십구재를 마치고 이승을 떠난 곳. 그때 나는 독경 소리를 뒤로 들으며 대웅전을 나왔었다. 마당에 가득하던 초여름 햇살 저편 수돗가에서 젊은 팔을 걷고 흰 무우를 씻는 비구니들의 웃음소리가 햇살처럼 청명했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우를 보냈던가 붙들었던가. 모르겠다. 다만 세상과 삶의 부조리만이 깊이 가슴에 각인되었을 뿐. 그때 아우는 떠나는 자였고 나는 보내는 자였다. 그사이 세월이 제자리로 돌아온 걸까. 지금은 내가 떠나야 하는 자리에 선 걸까. 오늘 나는 여기에 왜 다시 왔을까. 그를 만나기 위해서일까, 나를 만나기 위해서일까. 오후에 날이 흐리더니 돌아가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선한 사람이 된다는 건 온전히 기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선함이 사랑하는 정신의 상태라면 기쁨은 사랑받는 육체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것들’이다. 그래서 빛난다. 그래서 가엾다. 그래서 귀하고 귀하다.
가는 봄이여 새는 울고 물고기 눈에는 눈물[8]
물고기 눈에는 눈물―봄이 가면 물고기도 운다. 젖은 눈을 눈물로 또 적시며 슬퍼한다. 하지만 먼 하늘을 보면 가는 봄을 너무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오고 가고 또 가고 다가오는 것들―생은 덧없어 가지만 또 도래한다. 소멸은 안타깝지만 덧없음이 없으면 저 빛나는 생의 찬란함 또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니 물속의 물고기야 울지 말자. 그래도 울고 싶으면 도래하는 생의 찬란함을 환대하는 기쁨으로 울자꾸나.
"오 초라한 고결함이여. 너는 다만 이름뿐이겠지만 나는 너를 진정으로 공경했다. 그러나 이제 너는 가엾은 운명의 희생물이 되었구나."
K에게서 카카오톡이 왔다. 객혈 때문에 응급실에 있다는 소식. 그러면서 그는 자세한 병세와 응급실 사진들을 보낸다. 심지어 침대에 누운 셀프포트레이트self-portrait도 있다. 이번에도 나는 그가 경이롭다. 그는 늘 자기를 객관화할 줄 안다. 그래서 늘 자기에게서 머물고 자기를 지킨다. 나는 늘 나를 주관화한다. 그래서 늘 내게 머물지 못하고 나를 지키지 못한다.
늙은 제주 해녀들. 리포터가 묻는다. "뭍에 올라오면 그렇게 허리가 아픈데 어떻게 바다 일을 하시나요?" 늙은 해녀가 말한다. "물질을 사람 힘으로 하는가. 물 힘으로 하는 거지……" 위기란 무엇일까. 그건 힘이 소진된 상태가 아니다. 그건 힘이 농축된 또 하나의 상태이다. 위기가 찬스로 반전되는 건 이 힘들의 발굴과 그것의 소용이다. 나는 아직 그걸 모르고 있는 걸까.
병원 벤치. 휠체어에 앉은 노파 앞에서 반백의 남자가 취한 목소리로 중얼댄다. "어머니 내가 너무 피곤해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그의 들썩이는 뒤통수를 말없이 쓰다듬는 휠체어의 노파.
사랑에 대해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감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 천상병은 노래한다, 세상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깊다고,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러니 바람아 씽씽 불라고…… 이번 〈한겨레〉 칼럼은 천상병에 대해서 썼다. 어느 정도 만족.
나는 나를 오해하고 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사랑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건 내부에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외부로의 표현이다. 사랑의 마음, 그건 사랑의 행동과 동의어다.
자유란 무엇인가. 그건 몸과 함께 조용히 머무는 행복이다.
다시 프루스트: "우리가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그때 우리를 구출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우리가 그토록 찾았던 그 문을 우리는 우연히 두드리게 되고 그러면 마침내 문이 열리는 것이다."[13]
밉긴 왜 미워요, 라고 그는 웃으며 말한다. 그래, 내게도 미움 같은 건 없다. 돌아보면 그 무엇, 그 누군가를 내가 못 견디도록 미워해본 적이 있었던가.
병원 가는 아침, 비가 내린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작은 카페의 테라스를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미소. 그래, 지난날 나는 이런 날 저런 테라스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리라. 테라스에 잠시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젖어가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으리라. 그야말로 무연히, 아무 생각 없이 사방으로 나를 열어놓은 채…… 그때의 행복감, 그때의 자유를 나는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언젠가 어딘가에 적었던 말. 간절할 때 마음속에서 혼자 또는 누군가에게 중얼거리는 말들, 그게 다 기도란다―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나를 위해서, 또 타자들을 위해서……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건 타자를 위한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병중의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이 기록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도 남겨질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나는 이 세상을 마지막까지 사랑할 것이다. 그것만이 나의 존재이고 진실이고 의무이다.
돌아보면 내가 누군가들 앞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비굴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런 적은 없었다. 그게 나다.
나는 그냥 거리 풍경을 바라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오후의 햇빛, 부드러운 바람, 달리는 자동차, 자전거 타는 사람,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무의미의 시간. 그냥 흘러가는 시간. 순간도 영원도 아닌 어쩌면 그 모두인 저무는 휴일 오후의 시간. 생이 농익어가는 셀러브레이션의 시간. 뫼르소의 시간. 니체의 시간―아 여기서 더 무엇이 필요한가.
모든 것은 걷는다. 몸도 정신도 마음도 걷는다. 보행이 생이다. 나는 이 보행의 권위와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
나는 자주 읽게 되는 암 환자의 5년 생존율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야 더 모자라면 어떻고 더 길어지면 또 무슨 대수이냐고만 여겼었다. 그때 유한성의 경계는 멀고 시간은 다만 추상적 길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게 시간은 더는 추상적 길이가 아니다.
그건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질량이고 무게이고 깊이다. 그러니까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다. 시간은 이제 내게 존재 그 자체이다.
몸무게를 달아본다. 자꾸 마른다. 자꾸 가벼워진다. 나중에 나는 날아오르게 될까.
지금이 가장 좋은 때다. 지금이 가장 안전한 때다. 지금은 ‘아직 그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은 힘이 없다. 지금 여기가 아닌 것은 힘이 없다. 지금과 그때 사이에는 무한한 지금들이 있다. 그것들이 무엇을 가져오고 만들지 지금은 모른다.
나는 나만을 근심하고 걱정한다. 그 어리석은 이기성이 나를 둘러싼 사랑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사랑과 꿈이 없는 정치라는 게 과연 가능한가, 그런데 오늘날 정치는 이 자신의 동의어를 배반하고 망각해버렸다.
가벼운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온다. 페달을 멈추고 언덕길을 내려오다가 집 앞 단지 마당길 모퉁이로 들어서는 긴 타원의 부드러움은 더없이 아름답다.
왕상을 죽이려는 계모의 악덕도 그 계모를 정성 들여 섬기는 왕상의 효심도 아니다. 그건 열매가 탐스러운 오얏나무다. 왕상은 왜 그 오얏나무를 껴안고 슬피 울었을까. 함께 슬퍼한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함께 메마르는 것만은 아니다. 그건 그 슬픔의 크기만큼이나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일이기도 하다. 오얏나무의 풍성한 열매는 왕상을 가엾이 여기는 오얏나무의 슬픔이었다. 왕상은 그걸 알았고 오얏나무를 사랑했고 그래서 오얏나무를 껴안고 목 놓아 울었던 것이다. 내가 때로 이 빛나는 세상을 껴안고 울고 싶은 것도 같은 까닭에서일까.
병중의 말기 김현은 새벽에 일어나 어두운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외쳤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라고.
나는 아침 산책길 서늘한 곳에서 작열하는 세상을 향해서 외친다: "나는 사랑한다!"라고.
정치의 본질이 하이네에게 시였듯 노회찬 의원에게는 음악이다. 그런데 음악이란 무엇이고 어떤 세상인가. 그것은 사랑과 꿈을 간직한 가슴이고 그 가슴을 지닌 정치와 정치가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세상이다.
노회찬 의원이 스스로를 버리면서까지 지켜야 했던 진실 그건 다름 아닌 사랑과 꿈 그리고 정치의 변주곡을 연주하는 그의 첼로였으리라.
K의 문자: ……선생님, 힘내세요, 다시 한 번 힘내세요……
늘 받아보던 평범한 격려의 인사. 그런데 정말 다시 한 번 힘을 내야하고 낼 수 있을 것 같다. 왜일까. 그녀도 깊은 병중이기 때문일까.
힘이 없다. 많이 힘들다. 그러나 나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동안 잊었던 나의 주제를 기억한다. 그래, 나는 사랑의 주체다.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 것. 그걸 늘 가슴에 꼭 간직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