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들에겐 체면이 중요했다. 재대로 채면을 차리려면 적어도 하인 셋이 있어야 한다. 어머니와 아내가, 간혹 딸이 그 일을 대신했다. 체면 차리기의 마지막 단계는 그 여자들을 대범하고 무심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일곱 살 아이의 버릇을 고친다고 목검으로 100대를 때린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뿌리를 뽑는다, 이것도 어디서 들어본 말 같다.

체육대학 같은 데서 선배가 후배에게 가혹한 기합을 준다면, 그것은 그 대학만의 일이 아니다. 폭력으로 길들여진 그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살 사람들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폭력의 미신을 우리에게 전파한다는 것이다.

교수에게 강의를 듣는 학생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겠다. 대학에서 강사는 부교수라는 말처럼 호칭이 될 수 없다. 모두 선생이지. 고객이라는 말은 호칭이 될 수 없다. 손님이지.

‘교수’는 현재의 대학 제도가 생기기 전부터 써온 말이라서 호칭으로 가능하다.

비행기에서, 백화점에서, 횡포를 부리는 고객들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의 부자들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부자다, 나는 발광할 권리가 있다, 고로 나는 행복하다, 이런 확인을 날마다 해야 하다니. 행복이 좀 가만히 내려앉게 두질 못하고.

제 정체성을 돈의 권력으로 구매한다는 것.

모든 여자들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또는 좋아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남녀 간에 성적 호오의 감정이 끼어들지 않은 관계는 드물 것이다. 모자간 부녀간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 감정은 인간관계의 한 요소일 뿐이지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 착각하기 쉬운 것 가운데 하나다.

학생들에게 노력이 필요한 보고서를 쓰게 하면, 그걸 쓰느라고 읽고 싶은 책을 못 읽는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그 보고서를 끝내고 나서 그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보고서 때문에 집중돼 있던 두뇌가 그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을 만든 것. 집중이 재능이다.

전남 해안 지방에서는 겨울에 흑산도 근해에서 잡힌 것만을 홍어라고 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오리로 쳤다.

내일은 신안문화원에 내려간다. 지난번 대설주의보와 풍랑 때문에 연기되었던 강연을 월요일 오전에 하게 되었다. 청중들이 모두 배를 타고 온다니 기차 타고 내려가는 내가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든다. 강연안 3개를 가지고 갈 텐데, 가서 선택해야겠다.

루소는 어느 나이나 다 불행하다고 말했다. 그 나이에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그러나 어느 나이에나 욕망이 있다는 것은 어느 나이에나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는 말. 늙어가며 제 나이의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하면 젊은 세대를 욕하게 되는 듯도.

김진이라는 사람이 유신이 왜 나쁘냐고 물었다 한다. 나도 대답을 잘 못하겠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유신 시대에 대해, 경제 발전을 하려고 좀 고생했던 시댄가보다, 이런 식으로 생각지 마십시오. 정말 끔찍한 시대였죠.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시대의 정신 상태에서 가혹한 통치와 나라의 발전을 혼동하는 인간이 많았고, 박정희는 그걸 이용했지요.

인간에게 어려운 일은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다. 독재 권력 아래에서는 선택과 결정의 고통이 면제된다. 어떤 가혹한 일이라도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자진해서 노예가 된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도 드물다.

번역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외국어 독해력과 한국어 작문력, 성실성과 책임감, 주의력 등을 검증해주는 기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자격증을 발부하자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해주자는 말.

명저를 한국어 번역으로 망쳐놓은 경우가 참 많지만, 두 개만 들라 하면, 바타유의 『에로티즘』과 랑시에르의 『문학의 정치』를 꼽겠다. 이런 경우는 출판사의 데스크에서 걸러내기가 쉽지 않다.

양력설, 음력설이 있던 시절 우리집은 딱 한 번 양력설에 제사를 지낼 뻔했다. 배운 자식들 의견 따라 상을 차리던 어머니가 밖을 보니 달이 떠 있다. ‘상 치워라. 어찌 섣달그믐밤에 달이 뜬단 말이냐.’ 상 치우고, 그후 양력설은 입에도 올리지 못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진짜로 읽은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트윗을 보고 좀 놀랐다. 문학개론 같은 것을 가르칠 때 꼭 읽게 했던 것이 그것인데. 동시대의 명저들이 하나의 생각을 전해준다면, 고전은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높은 생산성.

"중단과 연속과 해학이 일치하듯이" 꽃이 핀다. 김수영의 말이다.

80년대 초의 방송. 현대 정주영 회장과 주부들의 대담. 산업 전선에서 일하는 가장을 위해 가족들이 협조해야 한다는 정회장의 말에, 한 주부가 질문. 가장과 자식들이 얼굴도 못 보는 이런 삶에 돈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정회장은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초등 때, 습자라는 붓글씨 연습 과목이 있었다. 보통 A4용지 크기 습자지를 6등분해서 여섯 글자를 쓴다. 습자 책에 ‘박애자 유평등’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나는 그게 독립 열사들의 이름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박애 자유 평등.

‘박애’는 프랑스어fraternite의 번역어다. 어떤 사학자가fraternite는frere(형제)에서 온 말이니 ‘형제애’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 오해다. 여기서fraternite는 형제간의 사랑이 아니라, 만인을 형제처럼 사랑하기라는 뜻.

담배 끊기보다 더 쉬운 것은 없다. 나는 열여덟 번을 끊었다.

이 정부더러 누가 무능하다고 하는가. 담뱃세를 2000원이나 인상하고, 담배를 피우지 않을 수 없게 스트레스까지 줄 줄 아는데.

80년대까지 통금이 있었다. 그게 아무 쓸모없는 제도였다는 것은 통금이 없어진 이후 금방 밝혀졌다.

국립국어원이 ‘엔딩 크레딧’을 ‘끝 자막’ 또는 ‘맺음 자막’으로 다듬었다는데, 무언지 모르게 어설프다. ‘끝 자막’이 아니라 ‘끝내기 자막’, ‘맺음 자막’이 아니라 ‘마무리 자막’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딸가닥 소리가 나게 좀 말을 만들어보지.

오늘 날이 참 춥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겨울은 원래 추운 거야’라고 말하면 엄청 똑똑해 보이지요.

정치적 이념으로 볼 때, 자기 마을 밖의 모든 세상을 없애버리려는 것이 일본의 극우라면, 아예 자기 마을을 없애려는 것은 한국의 극우이다.

애쓸 필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생각을 겁내는 사람들, 게을러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생각 하나를 붙들고 무슨 짓이든 다 하려는 사람들, 그걸 조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지금 억누르기 힘들다.

실제적인 권력을 지닌 집단이 종교적으로건 정치적으로건 극단적 순수주의를 지향하게 되면, 그것은 그 집단 내부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세계를 멸시하고 저주하고 파괴하려는 열정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베 같은 왜곡된 반항아들은 자기 정체성과 관련, 심각한 신경증을 앓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떼거리 속에서만 자기를 자기처럼 느낀다. 서로서로 ‘나 잘했지’라는 시선을 던지며 어떤 패악질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혼자 남으면 불안에 떨고 자괴감에 빠진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자신감이 없고 비열하기 때문에 엄마와 누이와 다른 여자들을, 약자들을 학대하는 데서 가장 손쉬운 패악질을 발견한다. 패거리 의식은 이 약자 괴롭히기를 이데올로기로 만들고, 옆에서 부추겨주는 사람이 있으면 급기야 애국질을 시작한다.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선택과 결정인데, 일베에게는 그 노력이 면제된다. 어떤 이념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엉성한 이념일수록 더 매혹적이다. 섬세한 이념은, 우둔한 이념과 달리, 여전히 선택과 결정의 숙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일베가 폭발물을 사용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괴력난신이 된 것이다.

30세에 김수영은 다크호스였지만, 박인환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30세에 「아메리카 타임지」를 쓴 김수영은 47세에 우리 현대 시사의 일급 시인이 되었지만, 30세에 「세월이 가면」을 쓴 박인환은 세월이 가도 「목마와 숙녀」를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여러 종류의 난해시를 읽고 해설했지만, 이 시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한 글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현대적 감수성, 모더니즘의 감각, 도시적 서정, 이런 말 말고 착실한 설명.

애를 키울 때 기를 살린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직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을 들이면 기는 저절로 살아난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까지 하나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으며, 모든 인간이 그 원리를 숭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그 자체가 폭력이다.

시에는 다신교적 미덕이 있다.

오래된 종교들은 천동설 시대의 지식으로 세계를 모두 설명하려 했다. 문제는 그 설명에 윤리적 성격을 부여해야만 그것이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는 기독교 정교회가 들어선 뒤에도 옛 신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신들은 디오니소스신이 성디오니시오스로 바뀌는 식으로 성자가 되었다. 저승의 뱃사공 카론까지 성카론이 되고. 다신교의 신들은 평화롭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나라가 아니라 집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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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13 2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현산선생님 글은 저도 좋아해요.

라로 2022-08-15 13:10   좋아요 1 | URL
이 트윗글 모음 책은 너무 솔직하시고 막 그래서 더 밑줄을 많이 긋게 되네요. 다른 면모를 보는 것 같아서 흠칫 하기도 하고요. 저도 좋아해요.^^
 

다투지 않기.

건너가기,
넘어가기,
부드럽게 여유 있게.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았다. 그동안 이어지던 모든 일상의 삶들이 셔터를 내린 것처럼 중단되었다.

이 글은 그사이 내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지나간 작은 사건들의 기록이다.

비로소 만나고 발견하게 된 사랑과 감사에 대한 기억과 성찰, 세상과 타자들에 대해서 눈 떠진 사유들, 혹은 그냥 무연히 눈앞으로 마음 곁으로 오고 가고 또 다가와서 떠나는 무의미한 순간들이 그 기록의 내용들이다.

폴 발레리와 롤랑 바르트가 쓰고 싶어 했던 모종의 책처럼 이 기록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써진 사적인 글들이다.

한 개체의 내면 특히 그 개인성이 위기에 처한 상황 속 개인의 내면은 또한 객관성의 영역과 필연적으로 겹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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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아닌 줄 멀리서 아는 것은
그윽한 향기 덕분이리라
─ 왕안석, 〈매화〉 중에서

피어나는 시기를 따져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꽃은 매화다. 아직 추울 때 꽃망울을 맺고 꽃을 피우고 난 다음엔 강렬한 향을 내뿜으며 생명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추울 때도 꽃이 핀다는 면에서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동백꽃도 마찬가지인데, 동백은 낙화의 모습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쪽이다.

꽃잎이 제각각 흩어지는 대신 꽃송이가 목이 부러지듯 통째로 떨어진다. 위엄을 잃지 않고 떨어지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이런 모든 판단은 인간의 그것일 뿐, 자연이 위엄을 따지거나 절개를 셈할 리 없다.

‘나이가 들면 꽃이 예뻐 보인다’는 말을 무시하고 싶지만, 나의 경우에는 정말 그랬다.

매화를 ‘볼’ 생각으로 표지판을 따라 별 의욕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데, 말도 안 되게 진한 매화의 암향이 싸늘한 공기를 타고 나를 뒤덮었다. 그때의 기분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

기타노텐만구는 사시사철이 다 좋지만 특히 매화와 단풍 명소로 추천할 만하다. 이곳의 매화 축제는 매년 2월 중순 매화 정원 개방을 시작으로 3월 하순까지 열린다.

해마다 매화가 피는 시기에는 감사를….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온다는 것은 내게 이런 뜻이다.

죽음은 관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아니까. 죽음은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는 것, 작별 인사를 하며 다시 만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봄이
이리도 꼭 찾아오는 나라라서
다행이야
─ JR 광고 카피 중에서

역사적으로 달가운 이름은 아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관련된 벚꽃 명소가 있다. 벚꽃 철에 라이트업을 하는 절 중, 기온祇園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곳, 바로 고다이지高台寺다.

일본에는 온갖 종류의 벚나무가 있기 때문에 벚꽃의 명소라고 불리는 곳은 대체로 두 경우 중 하나다. 첫째, 벚나무가 많아서. 둘째, 특별히 아름다운 벚나무가 있어서. 고다이지는 단연 후자다.

조선과의 역사가 교차한 지점들을 떠올리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세를 느낄 수 있는 고다이지가 달갑지만은 않다. 그런 이유로 고다이지를 찾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다고 네네노미치까지 놓치기는 아깝다.

어느 절의 정원에나 보물 같은 볼거리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인데, 일본 정원은 그 볼거리를 극적으로 등장시키는 구조로 되어 있어 구경할 때마다 나를 감탄하게 만든다.

은은한 색의 꽃이 피는 계절과 장소라면, 그 멋을 살리기 위해 지나치게 색이 짙은 기모노는 고르지 않는다. (요즘에는 관광객을 위한 기모노 체험이 워낙 흔해서 그렇게까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들이 자주 보이긴 하지만.)

전통 혼례복을 보며 왜 이렇게 신부의 옷은 혼자 정돈하기 어렵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한복을 입는 전통 혼례든 웨딩드레스를 입는 서양식 결혼이든, 언제나 신부는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옷을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 마치 완벽하게 꽃꽂이를 마친 작품처럼.

이제 ‘운동화 인간’이 된 나는, 운동화를 신고 정원의 돌다리를 건너 높은 곳까지 쉬지 않고 오르내리며 생각한다. ‘옛날 여자들의 잔뜩 꾸민 복식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 얼마나 많았을까’라고.

밤에 핀 벚꽃
오늘 또한 옛날이
되어버렸네
─ 고바야시 잇사

돈 내고 들어갈 수 있는 벚꽃 명소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돈을 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절경 또한 있기 마련이다.

수로를 따라 심은 벚나무가 아름다운 철학의 길은 벚꽃이 만개했을 때도 좋지만 벚꽃이 떨어질 때 가면 수로 끝부분 거름망 근처가 온통 벚꽃 잎으로 뒤덮인 분홍색 물결을 볼 수 있다.

인생은 너무나 자주 애매한 곳에서 갈등하도록 생겨먹었다. 돌아가기도, 앞으로 가기도 애매하다. 나의 인생은 왜 매번 이러한지. 이런 갈등이 없는 때가 바로 벚꽃 철의 철학의 길이다. 인파로 북적이고 날은 (대체로) 화창하다. 사진을 좀 찍다가 ‘사람 살려!’ 하는 기분으로 탈출하곤 한다.

다행인 점이라면 교토의 절은 관람 경로를 잘 만들어서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벚나무를 찍을 때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찍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진에는 나무 홀로 요요히 서 있는 것처럼 나와도 실제 상황은 아수라장이라는 말이다.

나는 강철 체력의 소유자가 아니고, 벚꽃은 내년에도 핀다. 내가 내년에 죽기라도 해서 벚꽃을 보지 못하면 그러라고 하지 뭐. 여하튼 내 뼈와 살을 갈아 터득한, 체력이 약한 자들을 위한 교토 성수기 가이드는 이렇다.

욕심부리다 추위에 떨면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린 시간들을 다 모으면 달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다.

‘일본 사람은 조용조용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그 편견을 깰 좋은 기회다. 모두가 소리를 지른다! 서로의 말을 듣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모두 만취했으니까!

어찌됐든 ‘요괴들이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일본인일 리가 없어’라는 생각이 들 즈음… 정면을 바라보니, 거대한 벚나무가 ‘두둥’ 하고 조명을 받고 서 있었다

변변한 스킨십은 고사하고 이 마음이 ‘너에게 닿기를’ 간절히 빌며 그저 친절하게, 다정하게 곁에 있어주려고 애쓰는 연애. 《너에게 닿기를》을 보면서 혼자 낄낄거리고, 얼굴 붉히고, 꺅꺅거리다 보니 하나둘씩 생각이 난다.

연애라면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어른에게도 볼을 붉히게 하는 추억 한둘은 있지 않은가.

문득, 밤 벚꽃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벚나무 아래 모여 요란하게 떠들며 술을 마시는 이유가, 아마도 두려움을 쫓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일본에서는 ‘벚나무 아래에 시체가 있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기도 하고 만화나 소설에도 종종 사용하는데, 벚나무의 모습 때문이지 싶다.
벚나무는 잎을 틔우지 않은 상태에서 꽃을 먼저 피운다. 가지는 죽은 듯 검은데 갑자기 희거나 분홍빛인 꽃이 요란하게 핀다.

어젯밤엔 조용하다가 오늘 갑자기 만개한 벚꽃을 보면 꽃 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벚꽃은 시각적으로 소리가 느껴진달까.

특히 밤에 보면 흰 꽃무리가 마치 유령처럼 보이기도 해서, 옛사람들은 죽은 듯한 검은 줄기에서 흰 꽃이 아우성치며 피어난 모습을 보고 ‘그 아래 시체라도(!)’라고 상상한 것 아닐까? 아님 말고.

밤 벚꽃 구경을 위한 최적의 숙소는?
나는 거의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온, 산조(三?)역, 교토 시청, 시조가와라마치(四?河原町), 시조가라스마(四?烏丸)를 추천한다.

시조가와라마치에서 가까울수록 좋다는 쪽인데, 산이나 강을 끼고 있는 료칸처럼 고가의 숙소를 잡는 경우가 아니라 10만 원 안팎의 비즈니스호텔을 이용할 계획이라면 특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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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가 세상을 떠났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할 때 예로 들 만한 사람이었는데. 상가에 갔더니 동기들은 왔다가 갔다 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상 끝에 혼자 앉아 자작으로 술 한 병 마시고 왔다. 20명 중 한국에 11명 남았다. 외국에 몇 명 있고.

성매매에 대한 내 생각은 복잡하다. 한 가지 측면만 얘기한다면. 성은 늘 경제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대개의 경우는 이 문제를 사랑 같은 이념이나 결혼 같은 제도를 통해 우아하게 해결한다. 그런데 우아한 해결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오늘의 운세를 보니 언행을 조심하란다. 하루 동안 트윗을 쉬라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가톨릭의 교리에 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원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고해를 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고해를 강요하지 말아야 할 이유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것은 큰 미덕이다. 충고질하지 않고, 괜히 말했네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게 이야기를 들어주려면 끈기도 필요하고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이해도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어렸을 때 들은 "일천칠백 도 남쪽 바다 달무리만 고요한데"로 시작하는 노래. 일천칠백 도가 이해되지 않아 초등 고학년 때는 ‘일엽편주의 남쪽 바다’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게 ‘1700개 섬이 있는’의 뜻이라고 몇 년 전 알려준 것은 문화평론가 이영미 선생.

오늘 내 트윗과 리트윗이 모두 섬으로 시작하는구나. 섬이란 말만 써도 시가 되고 섬이란 말만 들어도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는 나라가 이 나라 아닌가. 탈출할 수 없을 때는 다른 사람을 다 내쫓는 방법, 그 방법을 섬이란 말에서 찾는 것 같다.

돌이켜보니 내가 할아버지 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50대 초다. 아파트 1층에 살 때, 애가 밖에서 길게 울어서 문을 열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어디 갔어요"라고 대답하고 나서 한참 나를 쳐다보더니 "할아버지"라고 덧붙였다. 어쩌겠어.

@septuor1 2014년 11월 30일 오후 6:37
애도 그 짧은 시간에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거리에 "싸게 현수막"이라고 쓰인 현수막 광고가 걸려 있다. 저 ‘싸게’라는 말은 아무래도 부사겠지. 말하는 솜씨들이 날마다 놀랍다.

모국어는 말 그대로 엄마와 같아서, 그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칭얼거리게 되고 무람없이 굴게 된다.

내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일에 여전히 매달려 고뇌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을 우습게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빠뜨린 것이 없는지 되돌아보는 게 이롭다. 독창적인 생각은 대개 그럴 때 얻어진다.

친환경 미술 활동을 하는 친구가 있다. 착한 대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하여 그를 돕는다. 그가 수세식이 아닌 친환경 화장실을 만들었다. 그런데 자원봉사 대학생들은 5백 미터 떨어진 초등학교 화장실을 찾아간단다. 안타깝지만 나도 그럴 것 같다.

전공자가 번역을 더 잘할 것이라는 생각도 미신에 속한다. 전공자는 전공하는 작가나 작품에 대해 지식과 정보는 많다. 그러나 번역도 글쓰기인데 전공자가 글을 더 잘 쓰는 사람은 아니다. 좋은 번역을 위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그의 임무다.

글에 ‘……으로 다가온다’나 ‘자리매김한다’가 보이면 아마추어 냄새가 난다. 바둑에서 뻔하고 평범한 수를 속수라 하는데, 글에도 그런 속수 비슷한 것이 있다.

번역에서 ‘빈’을 ‘텅 빈’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빈’이 단음절이어서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텅’이 ‘빈’의 적막감을 깨뜨린다. 불안해도 그대로 쓰고 독자를 믿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남양공업 직원채용 광고지 보니 ‘외국인× 전라도× 동반×’라고 했는데, ‘동반’은 뭐지요?

나한테 ‘모애상’ 주겠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주면 받겠지만, 그게 무슨 상인지 모르겠다. 검색을 해봐도 안 뜨고……

아, 알았다. 내가 모에하구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단한 것인 듯이 말들을 하지만 나는 왕자병과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은 이 말이 싫다. 인간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의무를 귀족들이 폼 잡고 베풀어야 할 은혜로 생각하다니.

우리는 비유적인 의미에서라도 귀족이라는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모욕하는 것이다.

영어의 promontory 불어의 promontoire는 바다로 비쭉 나온 절벽, 즉 곶이자 벼랑인 곳. ‘곶벼랑’이라 옮기려는데 사전에 없다. 바닷가엔 화연, 곧 꽃벼루라 부르는 곳이 많은데, 실은 곶비리, 즉 곶벼랑이다. 역자들아 단결하여 살려 쓰자.

미당문학상 나희덕, 황순원문학상 은희경. 수상 소감이 어찌나들 멋진지. 상을 안 줬으면 큰일날 뻔했다.

황순원문학상 은희경은 자신이 생활인으로서는 바보고, 글을 쓰는 데에도 여전히 더듬거리고 있는 처지를 말하여, 자신이 탔던 상 타고 있는 상이 어쩌다 얻어진 것이 아님을 은근히 시사. 나희덕은 비장하게, 은희경은 유머러스하게.

정현종 시인이 미당상 축사를 하며, 젊은 시인들의 시에 서정성이 없다고 비난했다. 나로서는 정시인이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았는지 의심스럽다. 왜 누구를 칭찬하려면 다른 누구를 까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젊은 시인들에 대한 비난자들 가운데는 진보적 지식인들도 있다. 성소수자들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왜 여자는 여자고 남자는 남자며, 귀족은 귀족이고 천민은 천민이라는 고전적 미학에서는 벗어나려 하지 않는지.

친노들이 호남 사람 전체를 ‘난닝구’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말에 상처를 받은 것은 호남 사람 전체였다.

축구공에 구멍을 내도 공의 형태는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나 땅에 던져도 튀어오르지 않는다.

문학 공부 : 세월호 참사로 슬퍼하는 한국인에 대한 글을 쓰라는 숙제에서 초등학생이 "오빠와 나는 울었다"고 썼다. 오빠와 네가 한국을 대표하냐고 묻는 바보도 있다. 대표는 무슨 대표, 표본이라면 모를까. 시에서는 이런 표현을 뭉뚱그려 옛날에는 상징이라

@septuor1 2014년 12월 6일 오후 9:04
했고, 오늘날에는 보통 환유라 한다. 부분으로 전체가 아니라, 단순한 사실의 서술로 거대하거나 복잡한 현상의 징후를 드러내는 장치. 가장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은 은유가 아니라 환유다.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남매와 함께 울어야 아는 것이라서……

은유는 보통 자기에게는 확실하나 다른 사람은 아직 감지하기 어려운 것을 표현한다. 환유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뭉크가 불안한 사람을 그릴 때 그 불안이 무엇인지 알았겠는가. 고로 모든 것을 다 알은체하는 사람들이 싫어한다.

좋은 환유는 사실상 아무것도 담지 않는다. 환유에서 의미에 해당하는 것을 찾는다면 그 환유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 전체다. 그래서 환유를 읽기 위해서는 좋은 감각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인격파탄자가 교육자가 되거나 언론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격파탄자도 문학은 할 수 있다. 인격파탄자가 문학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격파탄자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은 어떤 사람에게 첫번째 구원처고 어떤 사람에게는 마지막 구원처다……

나는 청와대에 관해 무슨 말을 쓰고 싶어도, 그 이름에 대통령이라는 말 붙이기 싫어서 안 쓴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열 사람이 달려오곤 했으니 세상에 대한 균형과 감각이 없어지고 사람이 사람으로 느껴질 리가 없다. 애들을 그렇게 키우고 싶어하는 부모들은 좀 생각해볼 일이다.

시를 읽어야 사람이 되는데, 문제는 사람이 돼야 시를 읽는다는 것!

개념어가 삶을 억압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말은 그 자체가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성격이 있다. 감나무에 비교하면 나무도 개념어다. 어디까지를 구체적이라고 생각하고 어디까지를 개념적이라고 생각하느냐를 정하는 것도 때로는 이데올로기에 속한다.

기장은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한다. 대한항공 사건은 전문가의 전문성까지 노예화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대한민국이 지금 그 지경에 있다.

무슨 말을 좀 겸손하게 하면 나중에 꼭 설명해야 할 사태가 벌어진다.

병원에 다녀왔다. 몸이 아프면 생명을 가장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그 고통이 몸을 타자화하기도 한다. 쟤는 왜 아프고 그래.

우리는 비평에 매우 서투르다. 이윤기는 죽기 전 오역 논쟁에 휘말렸다. 그때 이윤기가 말했다. 번역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하지 왜 나를 죽일 놈으로 만들어. 분노를 앞세우지 않고는 비평을 못하는 것은 비평 연습이 돼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허접한 사건이라도 파고들면 그 밑에는 거대한 창고가 있다.

거의 한 페이지를 다 차지하는 문장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번역하고, 그것을 짜집기해 이어 붙였다. 두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도 부사 두 개를 어디에 넣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다시 들여다보기도 싫다.

아마도 1974년. 친구와 함께 독립문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손님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그 카페를 어느 무명의 코미디언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우리 두 사람 앞에서 장발 단속을 풍자하는 잘 만든 단편극을 시연했다. 나중에 보니 그가 전유성이었다.

초등학교에서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는 이치를 배우며 위안을 받았다. 세계에 질서가 있구나. 인간에게 권리와 의무가 있고, 제도가 있다는 것을 배우며 행복했다. 세상이 살 만하구나. 그후 세월은 이 위안과 행복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나날이었다.

정혜윤 PD의 『그의 슬픔과 기쁨』을 읽는 것도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을 돕는 방법일 것입니다. 제가 추천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박원순은 성소수자들이 소수라는 생각만 했지, 인권의 대원칙이 항상 소수와 만난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았다. 늘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밑바닥에 깔린 생각이다.

근대를 사다 국을 끓였다. 기대했던 맛이 아니다. 뿌리도 함께 넣어야 하는데 마트에는 뿌리 있는 근대가 없다. 그래도 맛은 있다. 마침 광주에 사는 누이에게 전화가 와서 재래종 근대 얘기를 했다가 봉변만 당했다. 오빠는 무슨 고릿적 이야길 하고 있어.

이창근씨가 이 혹한에 70미터 고공에서 보내온 트윗을 읽다보면 나 자신에게 묻게 되는 것이 있다. 내가 오타를 많이 내는 것은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 내게 없기 때문이 아닐까?

‘천천히’의 뜻을 지닌 말을 한데 모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싸묵싸묵’에는 달관한 태도가 있고, ‘사부작사부작’은 기교주의자의 능란한 솜씨를 말해주는 듯. 전라도에서는 ‘추근추근’도 천천히라는 뜻으로 쓰는데, ‘추군거리다’라는 말 때문에 스터커의 냄새가 난다.

외국어로 시를 느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외국어 시를 잘 읽는다는 것은 느낌을 이론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모국어 시를 읽을 때의 느낌을 거기에 잘 투사하는 것. 한국 시를 읽은 적 없는 사람이 어쩌다 외국 시를 전공하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도 이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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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도 모임도 방문도 없이 새해 첫날이 지나간다. 사촌 이내 가족이 중병이면 그해 차례를 접는 법이니 모두가 나 때문이다. 장손이 아프니까 조상님들도 걱정이 되어 굶기를 마다하지 않는 걸까.

응급실은 삶과 죽음이 부딪히는 경계 영역이다.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사람들은 전화를 걸고 받으며 거래를 하고 통장 번호를 주고받는다. 병이 들었다고 생활이 용서해주는 건 아니니까.

그럴 때 가족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다. 가족은 족보와 혈통의 범주를 초월하는 관계 영역이다. 세상에 가족이 있다면 특정한 족속이 아니라 인간 모두를 포함하는 인간 가족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프루스트도 이렇게 말했는지 모른다. "회고해보면 콩브레에 살았던 사람들의 얼굴들이 다 비슷하게 닮아 보인다. 그래서 콩브레의 추억은 인간 가족의 박물관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은 태어날 때와 죽을 때 다 똑같다. 삶의 시간들이 흐르면서 그 얼굴들이 저마다 구별되는 얼굴이 되고 개인의 얼굴이 되지만 알고 보면 그 고유하다는 개체의 얼굴마저도 사실은 본래의 얼굴로 되돌아가는 통과와 과정의 형상일 뿐이다. 마치 정해진 도착지를 향해서 달리는 기차가 도중에 지나가는 수많은 작은 역들이 서로 다른 풍경을 지니는 것처럼……

그곳은 다른 어느 도시에 도착하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통과역 혹은 관문이다. 그러고 보면 마쓰오 바쇼의 여행기에도 관문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그의 하이쿠 여행은 매번 관문을 통과해서 또 다른 마을로 들어서는 일이다. 그는 그렇게 관문을 지나 새로운 땅으로 들어설 때마다 하이쿠 한 편씩을 발자국처럼 남겼다. 하노버 중앙역도 내게는 바쇼의 관문과 같은 것이리라.

소리가 있다.

사이사이로 지나가는 소리,
살아 있는 소리,

일상의 소리.

담장을 넘나드는 나비들, 눈물을 흘리는 물고기들과 떠나는 오쿠로 여행길.

"얼마나 걸어가야 절이 나오나요?"
라고 물으면 촌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자뿌리고 그냥 가소. 그라면 나오니께……"

그런데 나는 왜 나의 유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걸까. 유년에 대한 글쓰기를 유서 쓰기로 여겼던 이들이 있었다. 발터 베냐민, 프루스트……

프루스트의 소설 공간은 둘이다. 하나는 생의 공간. 이 공간은 점점 더 수축하고 그 끝에 침대가 있다. 이 침대보다 더 작은 공간이 관이다. 또 하나의 공간은 추억의 공간. 이 공간은 생의 공간이 수축할수록 점점 더 확장되어서 마침내 하나의 우주를 연다. 그것이 회상의 공간이고 소설의 공간이다.

요즈음은 별로 불편한 게 없네요, 라고 나는 말한다. 그게 문제죠, 라고 의사는 말한다. 암 자체는 불편하게 만들지 않아요. 다만 점점 자라날 뿐이죠. 그러다 종양이 혈관을 막고 장기를 누르게 되면 몸이 불편해지는 거죠. 몸이 편하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죠. 오히려 몸이 편할수록 암의 상태를 의심해야죠.

《애도 일기》는 슬픔의 셀러브레이션이다. 이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건 명확하다. 그건 무력한 상실감과 우울의 고통이 아니다. 그건 사랑을 잃고 ‘비로소 나는 귀중한 주체가 되었다’는 사랑과 존재의 역설이다.

초의 선사는 추사가 죽고 두 해 뒤에 망자의 묘 앞에서 말했다고 한다. "꽃이 고우면 비가 내리는 법이구려."

수원 봉녕사에 다녀왔다. 25년 전 아우가 사십구재를 마치고 이승을 떠난 곳. 그때 나는 독경 소리를 뒤로 들으며 대웅전을 나왔었다. 마당에 가득하던 초여름 햇살 저편 수돗가에서 젊은 팔을 걷고 흰 무우를 씻는 비구니들의 웃음소리가 햇살처럼 청명했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우를 보냈던가 붙들었던가. 모르겠다. 다만 세상과 삶의 부조리만이 깊이 가슴에 각인되었을 뿐. 그때 아우는 떠나는 자였고 나는 보내는 자였다. 그사이 세월이 제자리로 돌아온 걸까. 지금은 내가 떠나야 하는 자리에 선 걸까. 오늘 나는 여기에 왜 다시 왔을까. 그를 만나기 위해서일까, 나를 만나기 위해서일까. 오후에 날이 흐리더니 돌아가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선한 사람이 된다는 건 온전히 기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선함이 사랑하는 정신의 상태라면 기쁨은 사랑받는 육체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것들’이다.
그래서 빛난다.
그래서 가엾다.
그래서 귀하고 귀하다.

가는 봄이여
새는 울고 물고기
눈에는 눈물[8]

물고기 눈에는 눈물―봄이 가면 물고기도 운다. 젖은 눈을 눈물로 또 적시며 슬퍼한다. 하지만 먼 하늘을 보면 가는 봄을 너무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오고 가고 또 가고 다가오는 것들―생은 덧없어 가지만 또 도래한다. 소멸은 안타깝지만 덧없음이 없으면 저 빛나는 생의 찬란함 또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니 물속의 물고기야 울지 말자. 그래도 울고 싶으면 도래하는 생의 찬란함을 환대하는 기쁨으로 울자꾸나.

"오 초라한 고결함이여. 너는 다만 이름뿐이겠지만 나는 너를 진정으로 공경했다. 그러나 이제 너는 가엾은 운명의 희생물이 되었구나."

K에게서 카카오톡이 왔다. 객혈 때문에 응급실에 있다는 소식. 그러면서 그는 자세한 병세와 응급실 사진들을 보낸다. 심지어 침대에 누운 셀프포트레이트self-portrait도 있다. 이번에도 나는 그가 경이롭다. 그는 늘 자기를 객관화할 줄 안다. 그래서 늘 자기에게서 머물고 자기를 지킨다. 나는 늘 나를 주관화한다. 그래서 늘 내게 머물지 못하고 나를 지키지 못한다.

늙은 제주 해녀들. 리포터가 묻는다. "뭍에 올라오면 그렇게 허리가 아픈데 어떻게 바다 일을 하시나요?" 늙은 해녀가 말한다. "물질을 사람 힘으로 하는가. 물 힘으로 하는 거지……" 위기란 무엇일까. 그건 힘이 소진된 상태가 아니다. 그건 힘이 농축된 또 하나의 상태이다. 위기가 찬스로 반전되는 건 이 힘들의 발굴과 그것의 소용이다. 나는 아직 그걸 모르고 있는 걸까.

병원 벤치. 휠체어에 앉은 노파 앞에서 반백의 남자가 취한 목소리로 중얼댄다. "어머니 내가 너무 피곤해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그의 들썩이는 뒤통수를 말없이 쓰다듬는 휠체어의 노파.

사랑에 대해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감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 천상병은 노래한다, 세상은 아름답다고, 인생은 깊다고,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러니 바람아 씽씽 불라고…… 이번 〈한겨레〉 칼럼은 천상병에 대해서 썼다. 어느 정도 만족.

나는 나를 오해하고 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사랑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건 내부에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외부로의 표현이다. 사랑의 마음, 그건 사랑의 행동과 동의어다.

자유란 무엇인가.
그건 몸과 함께 조용히 머무는 행복이다.

다시 프루스트:
"우리가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그때 우리를 구출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우리가 그토록 찾았던 그 문을 우리는 우연히 두드리게 되고 그러면 마침내 문이 열리는 것이다."[13]

밉긴 왜 미워요, 라고 그는 웃으며 말한다. 그래, 내게도 미움 같은 건 없다. 돌아보면 그 무엇, 그 누군가를 내가 못 견디도록 미워해본 적이 있었던가.

병원 가는 아침, 비가 내린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작은 카페의 테라스를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미소. 그래, 지난날 나는 이런 날 저런 테라스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리라. 테라스에 잠시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젖어가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으리라. 그야말로 무연히, 아무 생각 없이 사방으로 나를 열어놓은 채…… 그때의 행복감, 그때의 자유를 나는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언젠가 어딘가에 적었던 말. 간절할 때 마음속에서 혼자 또는 누군가에게 중얼거리는 말들, 그게 다 기도란다―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나를 위해서, 또 타자들을 위해서……

성경은 새날의 기쁨을 찬양하는 책이다.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건 타자를 위한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병중의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이 기록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도 남겨질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나는 이 세상을 마지막까지 사랑할 것이다. 그것만이 나의 존재이고 진실이고 의무이다.

돌아보면 내가 누군가들 앞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비굴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런 적은 없었다. 그게 나다.

나는 그냥 거리 풍경을 바라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오후의 햇빛, 부드러운 바람, 달리는 자동차, 자전거 타는 사람,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무의미의 시간. 그냥 흘러가는 시간. 순간도 영원도 아닌 어쩌면 그 모두인 저무는 휴일 오후의 시간. 생이 농익어가는 셀러브레이션의 시간. 뫼르소의 시간. 니체의 시간―아 여기서 더 무엇이 필요한가.

모든 것은 걷는다. 몸도 정신도 마음도 걷는다. 보행이 생이다. 나는 이 보행의 권위와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

나는 자주 읽게 되는 암 환자의 5년 생존율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야 더 모자라면 어떻고 더 길어지면 또 무슨 대수이냐고만 여겼었다. 그때 유한성의 경계는 멀고 시간은 다만 추상적 길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게 시간은 더는 추상적 길이가 아니다.

그건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질량이고 무게이고 깊이다. 그러니까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다. 시간은 이제 내게 존재 그 자체이다.

몸무게를 달아본다.
자꾸 마른다.
자꾸 가벼워진다.
나중에 나는 날아오르게 될까.

지금이 가장 좋은 때다. 지금이 가장 안전한 때다. 지금은 ‘아직 그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은 힘이 없다. 지금 여기가 아닌 것은 힘이 없다. 지금과 그때 사이에는 무한한 지금들이 있다. 그것들이 무엇을 가져오고 만들지 지금은 모른다.

나는 나만을 근심하고 걱정한다. 그 어리석은 이기성이 나를 둘러싼 사랑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사랑과 꿈이 없는 정치라는 게 과연 가능한가, 그런데 오늘날 정치는 이 자신의 동의어를 배반하고 망각해버렸다.

가벼운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온다. 페달을 멈추고 언덕길을 내려오다가 집 앞 단지 마당길 모퉁이로 들어서는 긴 타원의 부드러움은 더없이 아름답다.

걱정하지 않으면 무엇이 대신 남을까,
명랑성.

왕상을 죽이려는 계모의 악덕도 그 계모를 정성 들여 섬기는 왕상의 효심도 아니다. 그건 열매가 탐스러운 오얏나무다. 왕상은 왜 그 오얏나무를 껴안고 슬피 울었을까. 함께 슬퍼한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함께 메마르는 것만은 아니다. 그건 그 슬픔의 크기만큼이나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일이기도 하다. 오얏나무의 풍성한 열매는 왕상을 가엾이 여기는 오얏나무의 슬픔이었다. 왕상은 그걸 알았고 오얏나무를 사랑했고 그래서 오얏나무를 껴안고 목 놓아 울었던 것이다.
내가 때로 이 빛나는 세상을 껴안고 울고 싶은 것도 같은 까닭에서일까.

병중의 말기 김현은 새벽에 일어나 어두운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외쳤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라고.

나는 아침 산책길 서늘한 곳에서 작열하는 세상을 향해서 외친다: "나는 사랑한다!"라고.

정치의 본질이 하이네에게 시였듯 노회찬 의원에게는 음악이다. 그런데 음악이란 무엇이고 어떤 세상인가. 그것은 사랑과 꿈을 간직한 가슴이고 그 가슴을 지닌 정치와 정치가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세상이다.

노회찬 의원이 스스로를 버리면서까지 지켜야 했던 진실 그건 다름 아닌 사랑과 꿈 그리고 정치의 변주곡을 연주하는 그의 첼로였으리라.

K의 문자:
……선생님, 힘내세요, 다시 한 번 힘내세요……

늘 받아보던 평범한 격려의 인사. 그런데 정말 다시 한 번 힘을 내야하고 낼 수 있을 것 같다. 왜일까. 그녀도 깊은 병중이기 때문일까.

힘이 없다. 많이 힘들다. 그러나 나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동안 잊었던 나의 주제를 기억한다.
그래, 나는 사랑의 주체다.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 것. 그걸 늘 가슴에 꼭 간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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