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들에겐 체면이 중요했다. 재대로 채면을 차리려면 적어도 하인 셋이 있어야 한다. 어머니와 아내가, 간혹 딸이 그 일을 대신했다. 체면 차리기의 마지막 단계는 그 여자들을 대범하고 무심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일곱 살 아이의 버릇을 고친다고 목검으로 100대를 때린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뿌리를 뽑는다, 이것도 어디서 들어본 말 같다.

체육대학 같은 데서 선배가 후배에게 가혹한 기합을 준다면, 그것은 그 대학만의 일이 아니다. 폭력으로 길들여진 그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살 사람들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폭력의 미신을 우리에게 전파한다는 것이다.

교수에게 강의를 듣는 학생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겠다. 대학에서 강사는 부교수라는 말처럼 호칭이 될 수 없다. 모두 선생이지. 고객이라는 말은 호칭이 될 수 없다. 손님이지.

‘교수’는 현재의 대학 제도가 생기기 전부터 써온 말이라서 호칭으로 가능하다.

비행기에서, 백화점에서, 횡포를 부리는 고객들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의 부자들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부자다, 나는 발광할 권리가 있다, 고로 나는 행복하다, 이런 확인을 날마다 해야 하다니. 행복이 좀 가만히 내려앉게 두질 못하고.

제 정체성을 돈의 권력으로 구매한다는 것.

모든 여자들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또는 좋아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남녀 간에 성적 호오의 감정이 끼어들지 않은 관계는 드물 것이다. 모자간 부녀간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 감정은 인간관계의 한 요소일 뿐이지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 착각하기 쉬운 것 가운데 하나다.

학생들에게 노력이 필요한 보고서를 쓰게 하면, 그걸 쓰느라고 읽고 싶은 책을 못 읽는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그 보고서를 끝내고 나서 그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보고서 때문에 집중돼 있던 두뇌가 그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을 만든 것. 집중이 재능이다.

전남 해안 지방에서는 겨울에 흑산도 근해에서 잡힌 것만을 홍어라고 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오리로 쳤다.

내일은 신안문화원에 내려간다. 지난번 대설주의보와 풍랑 때문에 연기되었던 강연을 월요일 오전에 하게 되었다. 청중들이 모두 배를 타고 온다니 기차 타고 내려가는 내가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든다. 강연안 3개를 가지고 갈 텐데, 가서 선택해야겠다.

루소는 어느 나이나 다 불행하다고 말했다. 그 나이에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그러나 어느 나이에나 욕망이 있다는 것은 어느 나이에나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는 말. 늙어가며 제 나이의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하면 젊은 세대를 욕하게 되는 듯도.

김진이라는 사람이 유신이 왜 나쁘냐고 물었다 한다. 나도 대답을 잘 못하겠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유신 시대에 대해, 경제 발전을 하려고 좀 고생했던 시댄가보다, 이런 식으로 생각지 마십시오. 정말 끔찍한 시대였죠.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시대의 정신 상태에서 가혹한 통치와 나라의 발전을 혼동하는 인간이 많았고, 박정희는 그걸 이용했지요.

인간에게 어려운 일은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다. 독재 권력 아래에서는 선택과 결정의 고통이 면제된다. 어떤 가혹한 일이라도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자진해서 노예가 된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도 드물다.

번역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외국어 독해력과 한국어 작문력, 성실성과 책임감, 주의력 등을 검증해주는 기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자격증을 발부하자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해주자는 말.

명저를 한국어 번역으로 망쳐놓은 경우가 참 많지만, 두 개만 들라 하면, 바타유의 『에로티즘』과 랑시에르의 『문학의 정치』를 꼽겠다. 이런 경우는 출판사의 데스크에서 걸러내기가 쉽지 않다.

양력설, 음력설이 있던 시절 우리집은 딱 한 번 양력설에 제사를 지낼 뻔했다. 배운 자식들 의견 따라 상을 차리던 어머니가 밖을 보니 달이 떠 있다. ‘상 치워라. 어찌 섣달그믐밤에 달이 뜬단 말이냐.’ 상 치우고, 그후 양력설은 입에도 올리지 못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진짜로 읽은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트윗을 보고 좀 놀랐다. 문학개론 같은 것을 가르칠 때 꼭 읽게 했던 것이 그것인데. 동시대의 명저들이 하나의 생각을 전해준다면, 고전은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높은 생산성.

"중단과 연속과 해학이 일치하듯이" 꽃이 핀다. 김수영의 말이다.

80년대 초의 방송. 현대 정주영 회장과 주부들의 대담. 산업 전선에서 일하는 가장을 위해 가족들이 협조해야 한다는 정회장의 말에, 한 주부가 질문. 가장과 자식들이 얼굴도 못 보는 이런 삶에 돈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정회장은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초등 때, 습자라는 붓글씨 연습 과목이 있었다. 보통 A4용지 크기 습자지를 6등분해서 여섯 글자를 쓴다. 습자 책에 ‘박애자 유평등’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나는 그게 독립 열사들의 이름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박애 자유 평등.

‘박애’는 프랑스어fraternite의 번역어다. 어떤 사학자가fraternite는frere(형제)에서 온 말이니 ‘형제애’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 오해다. 여기서fraternite는 형제간의 사랑이 아니라, 만인을 형제처럼 사랑하기라는 뜻.

담배 끊기보다 더 쉬운 것은 없다. 나는 열여덟 번을 끊었다.

이 정부더러 누가 무능하다고 하는가. 담뱃세를 2000원이나 인상하고, 담배를 피우지 않을 수 없게 스트레스까지 줄 줄 아는데.

80년대까지 통금이 있었다. 그게 아무 쓸모없는 제도였다는 것은 통금이 없어진 이후 금방 밝혀졌다.

국립국어원이 ‘엔딩 크레딧’을 ‘끝 자막’ 또는 ‘맺음 자막’으로 다듬었다는데, 무언지 모르게 어설프다. ‘끝 자막’이 아니라 ‘끝내기 자막’, ‘맺음 자막’이 아니라 ‘마무리 자막’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딸가닥 소리가 나게 좀 말을 만들어보지.

오늘 날이 참 춥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겨울은 원래 추운 거야’라고 말하면 엄청 똑똑해 보이지요.

정치적 이념으로 볼 때, 자기 마을 밖의 모든 세상을 없애버리려는 것이 일본의 극우라면, 아예 자기 마을을 없애려는 것은 한국의 극우이다.

애쓸 필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생각을 겁내는 사람들, 게을러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생각 하나를 붙들고 무슨 짓이든 다 하려는 사람들, 그걸 조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지금 억누르기 힘들다.

실제적인 권력을 지닌 집단이 종교적으로건 정치적으로건 극단적 순수주의를 지향하게 되면, 그것은 그 집단 내부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세계를 멸시하고 저주하고 파괴하려는 열정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베 같은 왜곡된 반항아들은 자기 정체성과 관련, 심각한 신경증을 앓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떼거리 속에서만 자기를 자기처럼 느낀다. 서로서로 ‘나 잘했지’라는 시선을 던지며 어떤 패악질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혼자 남으면 불안에 떨고 자괴감에 빠진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자신감이 없고 비열하기 때문에 엄마와 누이와 다른 여자들을, 약자들을 학대하는 데서 가장 손쉬운 패악질을 발견한다. 패거리 의식은 이 약자 괴롭히기를 이데올로기로 만들고, 옆에서 부추겨주는 사람이 있으면 급기야 애국질을 시작한다.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선택과 결정인데, 일베에게는 그 노력이 면제된다. 어떤 이념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엉성한 이념일수록 더 매혹적이다. 섬세한 이념은, 우둔한 이념과 달리, 여전히 선택과 결정의 숙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일베가 폭발물을 사용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괴력난신이 된 것이다.

30세에 김수영은 다크호스였지만, 박인환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30세에 「아메리카 타임지」를 쓴 김수영은 47세에 우리 현대 시사의 일급 시인이 되었지만, 30세에 「세월이 가면」을 쓴 박인환은 세월이 가도 「목마와 숙녀」를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여러 종류의 난해시를 읽고 해설했지만, 이 시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한 글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현대적 감수성, 모더니즘의 감각, 도시적 서정, 이런 말 말고 착실한 설명.

애를 키울 때 기를 살린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직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을 들이면 기는 저절로 살아난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까지 하나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으며, 모든 인간이 그 원리를 숭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그 자체가 폭력이다.

시에는 다신교적 미덕이 있다.

오래된 종교들은 천동설 시대의 지식으로 세계를 모두 설명하려 했다. 문제는 그 설명에 윤리적 성격을 부여해야만 그것이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는 기독교 정교회가 들어선 뒤에도 옛 신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신들은 디오니소스신이 성디오니시오스로 바뀌는 식으로 성자가 되었다. 저승의 뱃사공 카론까지 성카론이 되고. 다신교의 신들은 평화롭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나라가 아니라 집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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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13 2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현산선생님 글은 저도 좋아해요.

라로 2022-08-15 13:10   좋아요 1 | URL
이 트윗글 모음 책은 너무 솔직하시고 막 그래서 더 밑줄을 많이 긋게 되네요. 다른 면모를 보는 것 같아서 흠칫 하기도 하고요. 저도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