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뇌에는 타인과의 관계를 기억하는 추론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어서, 공정한 관계가 유지되도록 우리의 행동을 조절한다. 내가 당신에게 호의를 베풀면 당신도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인간관계 장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나의 호의를 잊었다간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치를 것이다.

내가 나의 형제와 아이들,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에게 헌신하는 이유는 중요한 유전자를 그들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윈의 표준진화론에 의하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친족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강한 개체는 자연에 의해 선택될 확률이 높고, 그의 후손 중 상당수는 여전히 친족 보호 본능을 갖고 있다.

인간이라는 종種이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여럿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책임을 분담하면서 공동생활의 효율을 높여 왔기 때문이다.

내가 한 집단에서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왔다 해도, 당신이 시도 때도 없이 내 앞길을 가로막는다면 사적인 복수심이 끓어오를 것이다.

‘네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면 나도 너에게 호의를 베풀겠다. 그러나 네가 불공정한 행동을 한다면 곧바로 보복하겠다’는 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학계에서는 종교의 적응 효과가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 곳이 ‘집단이 아닌 개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제시 베링Jesse Bering은 언어의 기원을 연구하다가 가십gossip(험담, 쑥덕공론)이 "집단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결론지었다.

집단의 규율을 위반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바람이나 나무 위, 또는 하늘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다고 상상하면 범법 행위를 자제하게 되고, 가십에 오르는 횟수가 줄어들고, 집단에서 추방될 가능성도 낮아진다.

즉, 종교적 성향은 혈통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세대가 거듭될수록 종교에 더욱 심취하게 되고 인원수도 많아지는 것이다.2

그러나 현실적이건 상징적이건, 죽은 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보장이 있으면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다.

"법치 정신과 공정성에 투철한 사람이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조금만 노출돼도 큰 영향을 받는다면, 우리도 부지불식간에 이와 비슷한 영향을 받고 있을 것"

베커는 이 실험 결과를 두고 인류의 문화가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무력해지는 심리’를 경감시키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는 증거라고 했다.

그의 주장이 옳다면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웃기고 있네…"라며 비웃는 것도 문화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란 안전을 보장하고 평화적 기질을 함양하는 수단이며, 서정적 매력이나 정직함, 또는 영웅적 행위의 형태로 삶에 주어진 선물"이라고 했다.2

종교는 자연선택된 뇌를 포용하고, 집단의 결속을 유도하고, 불안감을 해소하고, 개인의 평판과 번식 기회를 높여 주었다.

"두뇌의 용량이 커지면서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26 모든 종교는 인간이 죽음을 인식하면서 탄생했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없었고 공간도, 하늘도 없었다.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섞였으며, 이를 주관한 자는 누구인가? 끝없이 깊은 바다가 존재했을까? 태초에는 죽음도, 영생도 없었고 낮과 밤의 구별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바람을 일으키지 않고 숨을 쉬었으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안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든 만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죽음은 삶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순환 과정의 하나일 뿐이며, 윤회에서 벗어나면 존재라는 개념조차 없는 영원한 세계로 진입한다. 우리의 단명한 삶은 영원의 세계로 가는 신성한 통과 의례인 셈이다.

누가 뭐라 해도 과학의 기초는 단연 수학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세상은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알려 주는 이야기와 바람직한 행동을 안내하는 지침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종교의 교리와 연결되어 신도들의 마음에 굳건한 ‘믿음’을 만들어 낸다.

몸에 내장된 패턴 감지 장치가 과도하게 반응하여, 아무런 관계도 없는 패턴들 사이에 상호 관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지요.

가끔은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때도 있습니다. 수학적으로 따지면 우리는 네 번에 한 번꼴로 카드의 무늬를 맞출 수 있고, 열세 번에 한 번은 숫자를 맞출 수 있습니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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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모로칸 룸El Moroccan Room에 들어가고 싶어서 끈질기게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젠더, 섹슈얼리티, 미술, 음악, 저항. 이 모든 게 그 사람 덕에 더 큰 의미를 얻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결정하는 데 더 큰 자유를 얻었다.

카리스마 있고 자신감 넘치는 그의 태도 덕에 내향적이던 어머니와 대장은 의외로 빠르게 서로를 존경하게 되었다.

분스 농장에서 사과주를 과음한 자들, 도를 넘는 사춘기 소년소녀들,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녀석들은 엄한 사랑과 훌륭한 유머를 갖춘 캠프 대장이 다스렸다

난 베이비시터 노릇은 영 별로였지만 그의 아이들을 잘 돌봐 주려 노력했다.

골든 보이가 마지막으로 동생을 만났을 때는 둘 다 50대 중반의 나이였다. 이제 도시 계획가이자 자랑스러운 아버지, ‘골든 맨’이 된 친구는 쿠바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플로리다에 들러 형을 만났다. 그날 만난 형은 오래된 난파선 같은 모습이었다. 불분명한 발음으로 허풍 떠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렇지만 자기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며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인 건 변함없었다.

큰 아이가 자기보다 작은 동생을 보호하려는 듯 팔로 감싸 안고 있었다. 동생은 마음이 울렁이면서도, 자신이 그 시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예순다섯 살은 너무 젊은 나이였지만 짧은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구나 싶다.

그녀는 바톤 스프링스의 얼음처럼 차가운 에메랄드빛 물에서 매일같이 수영했다. 이 천연 수영장은 한 번 나아갈 수 있는 거리가 800미터쯤 되며 새와 절벽, 나무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개발될 위기에 처하자 사방에서 격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녀는 관련 위원회의 일원으로 모임에 참석해 자기 의견을 밝혔고, 시 의회에서 이 사태를 강력히 규탄하기 위한 시들을 낭송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악랄한 계획과 성명을 들고 나왔으며 그들의 턱수염 졸업장의 학과목에는 문학도, 윤리학도, 철학도, 예술도 없었다. 하나둘셋, 숨 쉬고. 하나둘셋, 숨 쉬고."

우아했던 할머니는 우리가 함께하는 걸 즐거워하셨다. 다만 사람 많은 곳에 갈 때는 우리와 동행하지 않고 본인의 신용카드를 건네며 저녁을 먹고 들어오라고 하셨다.

이 ‘플로리다의 유대인’의 100번째 생일은 4대에 걸친 아름다운 여성들이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고 모여 축하했으며 청바지를 입고 집에서 만든 할라 빵을 가져온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막상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왜 집으로 가지 못하는지 알고 싶을 따름이지만. 어쩌면 로비에 걸린 안내문, 마치 필체를 숨기려는 범죄자의 메시지처럼 조각조각 오려서 붙인 글자들이 그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오늘은 2009년 8월 10일 월요일. 계절은 여름. 날씨는 고온 다습. 돌아오는 휴일은 노동절."

어쩌면 내가 말년에 알아야 할 것이라곤 그게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재미난 게 최고로 좋았던, 70년대 형편없는 백인 꼬마들. 그게 우리였다.

그녀가 세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도운 게 시동생이 했던 가장 잘한 일이었다. 공놀이도, 바닷가로 향하는 장거리 자동차 여행도, 한밤중에 호수에서 벌이는 불꽃놀이도 어느 하나 빼먹지 않았다. 험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인자한 새아버지를 모두 겪어본 그는 아이들을 대할 때 오로지 다정한 아버지이기만 했다. 훈육은 아이들의 엄마에게 맡겨야 한다는 정도는 잘 알았다.

그는 마치 두 명의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거짓말을 하고 물건을 훔치고 몰래 돌아다녔던 어두운 쪽의 자아는 떠나 보내지 못했다.

그는 논리적으로 말하는 법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고 어디에도 속박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은 항상 슬퍼 보였다.

뉴 밀레니엄이 와 있었고 우리의 운은 여러 번 뒤집어졌다 엎어졌다 했다.

그가 저 멀리 있었다. 키 157센티미터이며 미니애폴리스 출신인 채식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달만큼 거대한 천재(가수 프린스를 일컬음-옮긴이).

마지막으로 그를 본 그때는 볼티모어 폭동 직후의 시기였다. 그는 어머니의 날에 평화를 기원하는 콘서트를 열었다. 나는 이게 마지막 기회임을 알고 있다는 듯, 나와 내 딸이 앉을 공연장 세 번째 줄 자리에 천 달러를 썼다.

내가 그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프린스, 마돈나, 키스 헤링, 마이클 잭슨, 그리고 나, 가끔 불러 보곤 하는 이름들이다. 이제 마돈나와 나 둘만이 남아 이곳을 지키고 있다.

나는 몇 주째 그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찾아대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치 다른 결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는 사람처럼.

2014년 여름,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고 ‘아이스 버킷 챌린지’라는 이름을 단 영상이 엄청나게 늘었다. 일단 찬물을 뒤집어쓰고 흠뻑 젖은 희생자는 이 챌린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여기서 호명된 사람은 루게릭병 연구소에 기부하거나 몸을 흠뻑 적시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대부분 둘 다 했다.

영상 속 남자는 휠체어를 타고 있으며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남자의 어머니와 절친한 친구가 카메라 앞에서 연설하는 동안, 남자의 머리 위로 얼음물 열네 통이 쏟아졌다.

아이스 버킷 챌린지의 다른 영상들은 우리까지 머리가 얼어붙는 기분이라서 지켜보기가 힘들다면, 이 영상은 다르다. 남자의 쇠약한 두 팔, 저절로 비틀어지는 몸, 주름지도록 눌린 목, 너무 이르게 희끗해진 턱수염을 지켜보는 게 힘들다. 마흔두 살인 그는 14년째 이 병을 앓으며 살아왔다. 그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최후의 근육을 써서,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남자는 암벽 등반가, 카약 선수, 야생 지역 가이드였다. 두려움 모르는 탐험가였으며 가망 없이 낭만적인 시인이었다. 그러다 병이 찾아왔을 때의 그는 여전히 20대를 벗어나지 않은 나이였다. 처음에는 자꾸 발을 헛디뎠고 이상하게 몸이 허약해졌으며 음식을 삼키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진단된 병명, 앞으로 모든 걸 잃게 됨을 의미하는 그 끔찍한 음절들의 모음. 그저 운동 능력이나 말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웃음도 섹스도 맥주도, 눈을 가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동작조차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이었다.

이 쇠약한 젊은 헤라클레스는 웨일스에 뿌리를 둔 남자들의 계보를 이어받았으므로,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의 축복 혹은 저주를 받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내가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했던 소프트웨어 회사의 상사였는데, 불이 난 건물에서 사람들을 구했으며 주말 동안 컴퓨터 언어 전체를 익힌 사람이었다.

얼음물 열네 통. 14년의 한 해마다 한 통씩. 그리고 미소. 잔인한 신들도 지켜보고 있었길 빈다.

오스틴의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내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서른둘이었다.(굳이 나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를 혹시라도 우리의 고등학생 시절이라고 여길까 싶어서이다.)

그녀의 머리칼은 완벽하게 쭉 뻗은, 빛나는 연갈색이었다. 햇볕에 잘 그을린 얼굴빛, 시원시원한 미소, 크고 푸른 눈. 매일 몸에 꼭 맞는 청바지와 잘 다림질한 옥스퍼드 셔츠를 입고 다녔다. 글씨체는 아름다웠고 사무실은 나무랄 데 없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비록 컴퓨터 언어를 잘 알진 못했지만 그녀가 만든 프로그램이 얼마나 우아할지는 상상할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각종 양념통들은 알파벳순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전생에 풍수 사상을 만든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온화하고 겸손하며 친절한 사람이었고 기민한 투자가였으며 동물 애호가였다. 하루에 두 번씩 자기 책상에 앉아 명상을 했다. 그 덕에 열네 시간씩 내리 앉아서 집중력 있고 정확하게 업무를 해낼 수 있었다. 그녀는 회사의 창업자이자 최고 경영자이며 대표인 상사와 함께 밤새 사무실에 틀어박혀 프로그램의 버그를 수정하곤 했다.

그때, 우리의 찻주전자 속에 어떤 폭풍이 일었는지 당신이라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녀의 상사가 동거 중이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면서 마침 그 여자 친구는 부사장이 되고, 그녀는 이제 성공한 변호사가 된 어린 시절의 연인, 즉 남편을 떠나면서 결국 그녀와 상사 두 사람이 결합할 수 있었던 바로 그때 말이다.

나 역시 부사장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고 대체로 분노하는 분위기도 이해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모든 비밀스러운 일을 벌인, 그리고 이를 사람들 앞에 공개하고 자기 삶 전부를 무너뜨린 그녀의 기개. 내가 언제까지나 찬탄할 그것. 그게 사랑이란다, 베이비.

두 사람이 몸담았던 소프트웨어 회사가 매각되면서 그녀는 동네 고등학교의 임시 교사로 들어갔다. 아마도 그녀라면 교실은 풍수에 맞추고, 모두에게 채식 컵케이크를 권하고, 아이들에게 초월 명상법을 가르쳤을 것이다.

62번째 생일이 되었을지도 모를 자리였다. 데크 위에서 바라보는 마지막 일몰, 마지막 마르가리타 한 잔, 혹은 다섯 잔. 유난히 단정하고 다정했던 사람, 안녕히.

어슬렁거리던 나는 그녀의 작은 침실로 들어갔다. 화려한 색감을 써서 스크래치 기법으로 그린 그녀의 그림들이 벽마다 걸려 있었고 한쪽에서 그녀가 삶은 달걀을 먹고 있었다. "당신은 늘 삶은 달걀을 먹네요."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지난 두 주 동안 삶은 달걀만 먹었다고. 그때 사람들이 무얼 먹는지 관심이 많은 젊은 엄마였던 나의 눈에는 그게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자연스레 금욕주의로 나아갔다.

청록색 수영장 옆에서 열린 파티에서 베라크루즈식 생선 요리를 먹고 멕시코 맥주를 마시고 있는 그녀의 친구들은 모른다. 이 떠들썩한 보헤미안 무리에 비하면 그는 조용한 편인데,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지금 술병을 입술에 대고 기울이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두렵다.

당신이 만약 늑대인간을 본 적이 없다면, 그 존재를 믿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시카고에서 온 벌꿀색 머리칼의 소년이 위스키 석 잔과 맥주 세 병을 비우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당신은 알지 못한다. 그의 눈이 얼마나 차갑게 번뜩이는지, 목소리가 어떻게 그르렁거리는지, 두 손이 어떻게 오그라드는지 한 번쯤 목격한 다음이라 해도, 아침에 깨어 보니 온몸에 물어뜯긴 자국과 멍이 가득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늑대인간 같은 건 없다고 혼자 중얼거릴 것이다. 아니, 내 남편은 늑대인간이 아니야.

두 사람이 남자의 부모님 집을 방문했을 때 집 주위에서 오래된 털 뭉치를 발견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가 바뀔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그녀는 평소와 다른 메스꺼움을 느꼈다. 그건 피임이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메스꺼움이었다. 늑대 인간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그의 다음 여자는 좀 더 똑똑했다. 그가 총을 구입했을 때, 접근 금지 명령을 어겼을 때, 여자는 경찰에 신고했다. 그 후, 늑대 인간은 얼마간 구금되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술에 취한 채로 넘어져 머리를 부딪혔다. 그렇게 두통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고 그대로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시카고에서 온 벌꿀색 머리칼의 소년은 동의했을지 모르겠다. 그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집을 비운 밤, 그녀의 친구들이 찾아와 그녀와 딸을 픽업트럭에 태웠고,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어설픈 모습으로 오프라 쇼에 출연한 적 있었는데, 마침 방청석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게이였고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당시 쇼의 주제에 딱 들어맞았다. "젠장, 이 남자 동성애자인가 봐."

그녀에겐 멋진 애인이 여럿 있었지만, 소중했던 마지막 연인은 오스틴 싸구려 식당의 웨이터인 스티브였다. 비록 그녀에게 병이 생기기까지 5분쯤 남았을 때 만났지만, 어쨌든 둘은 끝내주게 멋진 연애를 했다.

곧 죽음이 닥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니 참 잔인한 사치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 어떻게 이뤄질지 알 수 있단 데서 기묘한 위안을 느낀다.

"음악에 대한 글을 쓰는 인생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아무 계획도 없었다. 오랫동안 농담처럼 말했지만, 난 뒷문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정문으로 들어오자마자 내가 누굴 들여보낼 수 있을지 보려고 뒷문으로 달려간다."

암이 일흔셋이 된 그녀를 빼앗아갔을 때, 모두가 상실감에 빠졌다.

작가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직 자기 길을 찾는 중이에요."
"네?"
이때, ‘자발적 운동가’는 작가에게 팔을 두르더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깨 너머로 이렇게 외쳤다. "요는, 엄마가 아들이 아직 자기 길을 찾는 중이라고 말할 때는 그 대화가 끝났다는 뜻이에요."

그녀는 단 한 문장으로 진정한 대화를 시작할 수도, 가짜 대화를 끝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시간을 관리하는 기술이다.

성년이 된 이후의 삶 가운데 결혼한 시절보다 혼자인 시절이 더 길어진 지금, 나는 다른 집 남편들이 보여 준 친절한 순간들을 보물 상자에 모아 두고 있다.

그와 그의 아내는 흔치 않게도 서로 비난하지 않고 헤어졌다. 그때 우리 집 아이들은 유치원에 다니는 나이였다.

일터에서 만난 매력적인 금발 여성이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그가 약혼반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터놓고 의논해 온 적이 있었는데, 상대 여성이 반지는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 대신에 낚싯대를 선물하는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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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하게 등장하는 인용구들은 내 머릿속 상태를 반영한 거라 깔끔하게 만들려고 애는 써보았지만 크게 손보기는 힘들었다. 그 기이한 취향과 판단은 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수많은 글쓰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험난한 지대에서 이루어지는데, 방금 얘기한 갈등들이 이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굴 속에, 깊숙한 굴 속에, 거의 완벽한 고독 속에 자리하기. 그리고 오직 글쓰기만이 구원해주리라는 것을 깨닫기. 책에 대해 손톱만큼의 주제도 생각도 없이 있는 것, 이는 다시 한 번 책 앞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이다. 광활한 백지. 잠재적 상태의 책. 무無 앞에 자리 잡기. 살아 있는 알몸의 글쓰기 같은 무언가, 너무나 끔찍해 이겨내기 힘든 무언가 앞에 있기.
-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3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처음 요청을 받았을 때는 뛸 듯이 기뻤으나(그런 과제는 언제나 시간이 2년쯤 남았을 땐 너무나 쉽고 즐거워 보인다) 실제 강의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하루가 다르게 기쁨이 줄어들었다.

글쓰기 자체도 언제나 고된 일이지만, 글쓰기에 대해 글을 쓰는 건 별 쓸모가 없다는 면에서 분명 더욱 고된 일이다.

이후 미친 듯이 원고를 휘갈긴 시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저 평소처럼 마감일을 넘겼으며, 설상가상으로 마드리드에서 서점에 갔다가 영어 서적 코너에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책들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그중에 내 책도 있어서 기운이 빠졌다)만 덧붙여 밝혀놓겠다. 이런 장해물에도 불구하고 강의는 호치키스로 그럭저럭 철해져서 청중에게 전달되었다. 심오한 사상과 학자들이 수십 년간 힘들게 연구해 얻은 결과물을 스카치테이프와 끈으로 대체한 흔적은 감쪽같이 숨겨졌다.

말하자면 작가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글이다. 그 위치라는 게 언제나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이 책은 한 40년 동안(우연찮게도 내가 이 일을 해온 시간과 비슷하다) 글의 광산에서 노동해온 사람이 한밤중에 깨어나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다음 날 써볼까 생각해볼 법한 책이다.

인간 활동으로서든, 소명으로서든, 직업으로서든, 품팔이로서든, 심지어 예술로서든, 아무튼 이 ‘글쓰기’라는 건 무엇이며,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빠져드는 걸까? 어떤 점에서 그림, 작곡, 노래, 춤, 연기 같은 것들과 다른 걸까? 그리고 이런 일을 해온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활동을, 그런 활동을 하는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런 관점이 어떤 위로라도 되는 걸까? 또한(당연히) 작가들이 설명하는, 작가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개념은 지난 몇 년 동안 조금이라도 변했을까? ‘작가’라고 부를 때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머릿속으로 어떤 사람을 그리는 걸까? 영국의 시인 셸리가 거창하게 선언한 것처럼 작가는 세상의 비공식적인 법률 제정자일까,4 혹은 영국의 비평가 겸 역사가인 칼라일이 말하는 것처럼 완고하고 오만한 위인일까? 아니면 당대 전기 작가들의 총애를 받는, 신경과민에 걸려 징징대는 폐인이자 무능하고 나약한 인간일까?

"뒤를 조심해요. 누군가 있어요. 습격당하지 않게 정신 똑바로 차려요. 뱀을 조심해요. ‘시대정신’을 조심하라고요. 항상 당신 편인 건 아니니까. 키츠도 악평을 받았다고 죽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신을 낙마시킨 그 말 위로 다시 올라타요."

나는 작가이자 독자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학자도 아니고 문학 이론가도 아니다. 이 책에 그런 개념들이 조금이라도 돌아다닌다면 그것은 보통 작가들이 취하는 방식으로 인해 그곳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 방식이란, 갈까마귀가 하는 짓을 떠올리면 된다. 반짝거리는 물건들을 훔쳐서 둥지를 마구잡이로 쌓아올리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분주해 보이고 싶은 소망에 지나지 않았던 건가?" 그는 골똘히 생각한다. "그저 반복해서 덜거덕거리는 타자기 소리만으로도 진정시킬 수 있는, 침묵과 권태에 대한 두려움에 불과했던 건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서. 전부 잊히기 전에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

이미 잊혔기 ‘때문에’ 발굴하기 위해서.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계속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고, 위험을 감수해야만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기쁨과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20세기 초 이후에는 자주 발견되지 않는다. 적어도 둘을 결합한 형태는 보기 힘들다).

완벽한 예술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서.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죄 지은 자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또는 그 반대의 이유로(풍자 작가들이 사드 후작을 옹호하는 것처럼).

자연을 거울처럼 반영하기 위해서.

독자를 거울처럼 반영하기 위해서

사회적 병폐를 초상화처럼 담아내기 위해서.

민중의 가려진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

지금껏 이름이 없던 사람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서.

인간의 정신, 진실성,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서.

죽음을 조롱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 아이들에게 신발을 사주기 위해서.

돈을 벌어서 이전에 나를 비웃던 사람들을 비웃기 위해서.

개자식들에게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서.

창조는 인간의 일이기 때문에.

직업을 갖기 싫어서.

민족의식, 또는 민족적 양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학교생활에 실패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나 자신과 내 삶에 대한 나의 관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글을 실제로 쓰지 않았다면 ‘작가’가 될 수 없었을 테니).

실제보다 더 흥미로운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아무 여자에게든 사랑을 얻고 싶어서.

비참한 어린 시절의 결함을 바로잡기 위해서.

부모님을 좌절시키려고.

매혹적인 이야기를 뽑아내기 위해서.

독자를 즐겁고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나 자신을 즐겁고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어차피 흘러가겠지만,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필기광이어서.

강박적인 다변증(병적으로 말을 몹시 많이 하는 증상―옮긴이)이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이 글을 쓰도록 몰아붙여서.

뮤즈의 아이를 수태해 책을 출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여기서의 책이란, 17세기 남성 작가들이 탐닉한 흥미로운 복장도착물을 말한다). 아이 대신 책을 낳았기 때문에(20세기의 몇몇 여성 작가들의 주장이다).

실제 삶에서라면 처벌을 받았을지도 모를 반사회적 행동을 저질러보기 위해서.

생존자로서 끔찍한 사건을 증언하기 위해서

희망과 구원의 가능성을 가늠해보기 위해서.

내가 받은 것을 돌려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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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측이 실행된 후에는 당신이 추적하던 전자의 모호한 상태가 실험 장비와 당신의 두뇌, 그리고 의식에 영향을 미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결과들이 섞인 상태’가 당신의 생각에 그대로 투영되어야 한다.

관측 문제가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인지한 현실과 양자역학의 수학 체계에서 예측된 결과가 일치하지 않을 때뿐이므로, 해결의 열쇠가 ‘의식’에 있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의식이 양자역학적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여러 개의 가능성 중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현실에서(또는 적어도 관찰자의 의식에서) 지워지는 것이다.

양자역학은 신비롭고, 의식도 그에 못지않게 신비롭다.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육체와 두뇌를 포함한 모든 기능의 저변에 깔린 미시물리학적 과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의식도 언젠가는 양자역학의 범주 안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의식을 도입해도 딱히 놀라운 점이 없다면 의식을 고려한 방정식은 미래의 양자역학 교과서에 실리지 않을 것이다. 의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하지만, 미래에는 양자적 우주에서 또 다른 물리량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은 췌장에서 키모트립신을 만들고 재채기를 할 수 있지만, 나는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심오하고 고유한, 나만의 무언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직관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자율적인 존재로서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며, 스스로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이 세상에 오고가는 것이 신의 뜻이나 물리 법칙에 의해 좌우된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어디서 온 것일까?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걸까?40 그로부터 한 세기 후, 세상사에 신의 개입을 거부했던 에피쿠로스Epicurus는 과학의 결정론determinism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막고 있다며 장탄식을 내뱉었다. 신이 모든 권세와 권위를 독점하고 있다면 경건한 마음으로 신을 섬기는 인간에게 최소한의 자유가 보상으로 주어질 텐데, 아첨이나 아부에 둔감한 자연의 법칙은 인정사정이 없다. 에피쿠로스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원자가 가끔 법칙을 무시하고 무작위로 움직이면서 이미 결정된 미래를 피해간다고 생각했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난처하게 만드는 현대식 버전의 논리가 하나 있다. 당신과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현실 세계가 전개되는 방식은 우리의 생각과 욕망, 그리고 결정이 반영된 행동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수시로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물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당신과 나는 어디까지나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 입자의 집합일 뿐이다.

우리가 내리는 모든 선택은 두뇌를 가로지르는 입자들이 낳은 결과이며, 우리의 행동은 몸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나타난 결과다.

우리의 개성과 가치, 그리고 자존감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이 타협을 모르는 물리 법칙이 낳은 결과라면 자유의지는 발 디딜 곳이 없어진다. 우리는 우주의 냉정한 법칙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장난감에 불과한 것 같다.

나의 관심사는 당신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행동을 좌우하는 법칙을 알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수학 계산으로 생명체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지만, 이 법칙이 모든 것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수학적, 또는 실험적 증거는 하나도 없다.

우리의 몸과 두뇌를 구성하는 입자들이 무생물에 적용되는 법칙을 초월하여 의외의 기능을 발휘하면 좋겠지만, 이런 희망사항은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온 과학적 지식에 위배된다.

지금 당신은 이 책을 읽는 것이 자유의지를 발휘한 결과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의 몸에 속한 입자의 움직임은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반면에 양자물리학의 방정식은 앞서 말한 대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명확하게 예측하지 않고 ‘발생할 확률’만을 예측한다.

무작위라는 것은 자유의지가 개입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자유의지가 개입된 선택이라면 통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도 수학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하는데, 실제로 관측을 해 보면 수학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양자적 확률에서 하나의 명확한 현실로 변하는 과정을 모른다 해도, 이 과정은 자유의지와 무관하다.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진 입력이 부족해도 기본 법칙이 계속 작동하고, 인간의 몸과 두뇌의 입자에도 똑같은 법칙이 적용되는 한, 자유의지는 설 자리가 없다.

우리는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 입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입자의 운동에 기인한 현상이다. 당신과 내가 만나 서로 손을 잡으면 당신의 손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내 손의 입자들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악수’라는 행위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당신의 성대를 구성하는 입자들이 주변의 공기 입자를 흔들면 이 효과가 도미노처럼 주변 입자로 전달되어 공기에 파문波紋이 형성되고, 이 입자가 나의 고막을 구성하는 입자를 때리면 머릿속에 있는 다른 입자들이 연쇄적으로 움직이면서 두뇌에 신호를 전달하여 "안녕하세요?"라는 소리를 인식하게 된다. 나의 두뇌에 있는 입자들이 자극을 감지하여 "어쭈, 이 친구 손을 꽤 세게 잡는데?"라는 느낌이 들면, 곧바로 나의 손을 구성하는 입자들에게 ‘저 친구와 똑같은 악력으로 손을 잡을 것’이라는 명령이 하달되고, 두 사람은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며 과도한 인사를 나눈다.

모든 입자들이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는 것은 이론과 실험을 통해 확실하게 입증된 사실이다.

만일 우리에게 초능력이 주어져서 모든 현상을 입자 규모에서 분석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의 산물처럼 보이는 생각과 행동이 물리 법칙의 결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끈이론의 방정식이 드디어 풀렸다는 희소식을 전해 줄 수도 있으며

당신이 특별한 이유는 내부의 복잡한 배열이 다양한 행동을 낳기 때문이다.

나의 목숨을 구한 당신의 영웅적 행동은 칭찬 받아 마땅하지만, 사실은 자유의지의 발현이 아니라 물리 법칙을 따른 것뿐이다

그러나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갑자기 벤치를 박차고 튀어 올라 사람을 구하고, 훗날 그 행동을 회고하면서 뿌듯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이다. 인간(자유)의 본질은 바로 이런 사고와 느낌, 그리고 행동에 깃들어 있다.

처음에는 하나같이 "전통적인 자유의지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신과 바위는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라면서 기를 죽여 놓고, 한숨을 쉬며 돌아서려고 하면 뒷덜미를 잡으며 "그래도 힘내세요! 당신이 누릴 수 있는 다른 자유도 많이 있답니다."라면서 달래 준다.43 내가 추구하는 접근법에서 이런 자유를 발견하려면 행동에 부과된 제한조건을 걷어 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내 몸의 입자들이 의자나 머그잔의 입자와 달리 엄청나게 다양한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자유로운 것은 물리 법칙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거대한 내부 조직이 나로 하여금 자유롭게 반응을 보일 수 있도록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내가 아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데, 아내가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천억×십억×십억 개의 입자들의 움직임을 일일이 설명한다면 나는 별로 귀담아듣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아내가 현재 개발 중인 아이디어를 설명하거나 방문한 장소와 만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나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을 것이다.

이런 거시 규모의 서술에서는 우리의 행동이 중요하고, 우리의 선택이 미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결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하나의 자극에 대하여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하다.

개중에는 자신의 인지력이 물리 법칙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나다고 결론짓는 입자 집단도 있고, 생각이 유별나게 깊은 집단은 자유의지와 물리 법칙이 서로 상충된다는 사실에 몹시 당혹스러워한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물리 법칙을 초월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난 적도 없다.

입자 집단은 개개의 입자를 지배하는 법칙 대신,(개인의) 복잡하고 다양한 거시적 행동에 초점을 맞춰서 자신의 능력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방향을 전환하면 입자 집단은 ‘내 의지로 이룬 것 같으면서도 결코 물리 법칙을 벗어난 적이 없는’ 놀라운 행동과 경험을 후대에 전할 수 있다.

과거에 추상적으로 알고 있던 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나’라고 느끼는 감각과 내가 가진 능력, 그리고 내가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의지… 이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입자로부터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입자를 조금만 조작하면 나에게 친숙한 특성들이 사라진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물리학적인 이해와 마음의 직관적 감각을 일치시킬 수 있었다.

우리의 의식이 언제 탄생했는지, 자기 성찰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또는 우리가 자유의지를 언제부터 느꼈는지는 분명치 않다.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우리의 조상들은 약 10만 년 전(또는 그 이상)부터 이런 경험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인류는 이보다 훨씬 전부터 두 발로 일어서서 세상을 둘러보며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나에게 주어진 이 능력으로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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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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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은 교훈적이지 않으면서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우리가 살면서 알아야 했던 것들을 다시 느끼게 해준다. 작가의 그림은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이야기는 나는 누구이고, 누구와 어디로 어떻게 왜 가고 있는지 그 기본적인 물음에 대한 가장 인간적인 은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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