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하게 등장하는 인용구들은 내 머릿속 상태를 반영한 거라 깔끔하게 만들려고 애는 써보았지만 크게 손보기는 힘들었다. 그 기이한 취향과 판단은 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수많은 글쓰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험난한 지대에서 이루어지는데, 방금 얘기한 갈등들이 이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굴 속에, 깊숙한 굴 속에, 거의 완벽한 고독 속에 자리하기. 그리고 오직 글쓰기만이 구원해주리라는 것을 깨닫기. 책에 대해 손톱만큼의 주제도 생각도 없이 있는 것, 이는 다시 한 번 책 앞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이다. 광활한 백지. 잠재적 상태의 책. 무無 앞에 자리 잡기. 살아 있는 알몸의 글쓰기 같은 무언가, 너무나 끔찍해 이겨내기 힘든 무언가 앞에 있기.
-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3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처음 요청을 받았을 때는 뛸 듯이 기뻤으나(그런 과제는 언제나 시간이 2년쯤 남았을 땐 너무나 쉽고 즐거워 보인다) 실제 강의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하루가 다르게 기쁨이 줄어들었다.

글쓰기 자체도 언제나 고된 일이지만, 글쓰기에 대해 글을 쓰는 건 별 쓸모가 없다는 면에서 분명 더욱 고된 일이다.

이후 미친 듯이 원고를 휘갈긴 시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저 평소처럼 마감일을 넘겼으며, 설상가상으로 마드리드에서 서점에 갔다가 영어 서적 코너에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책들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그중에 내 책도 있어서 기운이 빠졌다)만 덧붙여 밝혀놓겠다. 이런 장해물에도 불구하고 강의는 호치키스로 그럭저럭 철해져서 청중에게 전달되었다. 심오한 사상과 학자들이 수십 년간 힘들게 연구해 얻은 결과물을 스카치테이프와 끈으로 대체한 흔적은 감쪽같이 숨겨졌다.

말하자면 작가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글이다. 그 위치라는 게 언제나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이 책은 한 40년 동안(우연찮게도 내가 이 일을 해온 시간과 비슷하다) 글의 광산에서 노동해온 사람이 한밤중에 깨어나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다음 날 써볼까 생각해볼 법한 책이다.

인간 활동으로서든, 소명으로서든, 직업으로서든, 품팔이로서든, 심지어 예술로서든, 아무튼 이 ‘글쓰기’라는 건 무엇이며,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빠져드는 걸까? 어떤 점에서 그림, 작곡, 노래, 춤, 연기 같은 것들과 다른 걸까? 그리고 이런 일을 해온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활동을, 그런 활동을 하는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런 관점이 어떤 위로라도 되는 걸까? 또한(당연히) 작가들이 설명하는, 작가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개념은 지난 몇 년 동안 조금이라도 변했을까? ‘작가’라고 부를 때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머릿속으로 어떤 사람을 그리는 걸까? 영국의 시인 셸리가 거창하게 선언한 것처럼 작가는 세상의 비공식적인 법률 제정자일까,4 혹은 영국의 비평가 겸 역사가인 칼라일이 말하는 것처럼 완고하고 오만한 위인일까? 아니면 당대 전기 작가들의 총애를 받는, 신경과민에 걸려 징징대는 폐인이자 무능하고 나약한 인간일까?

"뒤를 조심해요. 누군가 있어요. 습격당하지 않게 정신 똑바로 차려요. 뱀을 조심해요. ‘시대정신’을 조심하라고요. 항상 당신 편인 건 아니니까. 키츠도 악평을 받았다고 죽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신을 낙마시킨 그 말 위로 다시 올라타요."

나는 작가이자 독자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학자도 아니고 문학 이론가도 아니다. 이 책에 그런 개념들이 조금이라도 돌아다닌다면 그것은 보통 작가들이 취하는 방식으로 인해 그곳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 방식이란, 갈까마귀가 하는 짓을 떠올리면 된다. 반짝거리는 물건들을 훔쳐서 둥지를 마구잡이로 쌓아올리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분주해 보이고 싶은 소망에 지나지 않았던 건가?" 그는 골똘히 생각한다. "그저 반복해서 덜거덕거리는 타자기 소리만으로도 진정시킬 수 있는, 침묵과 권태에 대한 두려움에 불과했던 건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서. 전부 잊히기 전에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

이미 잊혔기 ‘때문에’ 발굴하기 위해서.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계속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고, 위험을 감수해야만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혼돈 속에서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기쁨과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20세기 초 이후에는 자주 발견되지 않는다. 적어도 둘을 결합한 형태는 보기 힘들다).

완벽한 예술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서.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죄 지은 자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또는 그 반대의 이유로(풍자 작가들이 사드 후작을 옹호하는 것처럼).

자연을 거울처럼 반영하기 위해서.

독자를 거울처럼 반영하기 위해서

사회적 병폐를 초상화처럼 담아내기 위해서.

민중의 가려진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

지금껏 이름이 없던 사람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서.

인간의 정신, 진실성,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서.

죽음을 조롱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 아이들에게 신발을 사주기 위해서.

돈을 벌어서 이전에 나를 비웃던 사람들을 비웃기 위해서.

개자식들에게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서.

창조는 인간의 일이기 때문에.

직업을 갖기 싫어서.

민족의식, 또는 민족적 양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학교생활에 실패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나 자신과 내 삶에 대한 나의 관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글을 실제로 쓰지 않았다면 ‘작가’가 될 수 없었을 테니).

실제보다 더 흥미로운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아무 여자에게든 사랑을 얻고 싶어서.

비참한 어린 시절의 결함을 바로잡기 위해서.

부모님을 좌절시키려고.

매혹적인 이야기를 뽑아내기 위해서.

독자를 즐겁고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나 자신을 즐겁고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어차피 흘러가겠지만,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필기광이어서.

강박적인 다변증(병적으로 말을 몹시 많이 하는 증상―옮긴이)이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이 글을 쓰도록 몰아붙여서.

뮤즈의 아이를 수태해 책을 출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여기서의 책이란, 17세기 남성 작가들이 탐닉한 흥미로운 복장도착물을 말한다). 아이 대신 책을 낳았기 때문에(20세기의 몇몇 여성 작가들의 주장이다).

실제 삶에서라면 처벌을 받았을지도 모를 반사회적 행동을 저질러보기 위해서.

생존자로서 끔찍한 사건을 증언하기 위해서

희망과 구원의 가능성을 가늠해보기 위해서.

내가 받은 것을 돌려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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