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는 샬롯의 공주처럼 거울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삶’의 편에선 안을 들여다보고, ‘예술’의 편에선 밖을 내다보는 거지요. 하지만 앨리스는 단단하고 눈부신 ‘삶’의 편(여기서 ‘예술’의 편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을 위해 거울을 깨부수고 ‘예술’의 편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어서 ‘삶’의 편에 있던 앨리스가 거울 세계 이야기를 꿈 밖으로 가지고 돌아와 고양이에게 들려주기 시작하지요. 그렇게 적어도 관객 문제를 해결합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바로 앨리스가 거울을 통과하는 순간에 벌어집니다. 바로 그 순간, 똑 닮은 두 존재를 가로막던 유리 장벽이 녹아내리고 앨리스는 이곳도 저곳도, 예술도 삶도,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 존재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 모든 곳에 존재하게도 되지요. 그 순간 시간이 멈추면서 또한 확장되고, 작가와 독자 모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어디에도 쓰일 수 없어야 진정으로 아름답다. 쓸모 있는 모든 것은 욕망의 표현이라 추하며, 인간의 욕망은 그 비루하고 나약한 본성처럼 비열하고 역겹다.
- 테오필 고티에, 《모팽 양》1

‘내가 문학의 제단에 데려온 돈의 뮤즈를 말하는 걸세. 이보게, 그 굴레에 코를 꿰이면 안 되네! 그 끔찍한 옥빛 굴레가 자네 인생을 끌고 다닐 거야!’
- 헨리 제임스, 《대가의 교훈》5

가톨릭 사제가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실재’를 현재라는 시공간으로 모셔오는 것처럼, 예술가는 ‘그리스도의 실재’를 존재케 하는 사제로 여겨졌습니다. 좀 어려운 내용이지요.

작가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헌신해야 할까요?

돈 문제를 꺼내서 좀 천박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세대(대개 아끼는 법밖에 모르긴 하지만)에게 돈 얘기는 더러운 빨래 얘기나 다를 게 없었지요. 하지만 시대가 변해서 이제 더러운 빨래도 돈 받고 파는 상품이, 아니 최첨단 갤러리의 설치품이 되는 세상이 됐으니까요. 그러니 천박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직설적이고 솔직하다고, 실은 존경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이제 돈이 만물의 척도이지 않나요?

엘모어 레너드의 해체적인 할리우드 스릴러 《겟 쇼티》에 인기 영화배우와 에이전트가 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작가를 연못에 사는 하등 동물 취급합니다. "작가들을 보면 팔릴 거란 확신도 없으면서 책을 쓰는 데 몇 년을 허비하잖아요. 왜 그런 짓을 할까요?"라고 영화배우가 묻습니다. 그러자 에이전트가 "돈 때문이지. 대박이 터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라고 대답합니다.6 돈이라는 대답에는 그나마 민주적(모두가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이고 그럴싸하다는 미덕이 있지요. 그렇지 않고 예술Art 운운하며(조금 있다가 경험할 겁니다) 장황하게 얼버무렸다면 고리타분한 거짓말처럼 보였을 겁니다. 물질주의가 판치는 할리우드 아닌가요.

1972년에 오타와 강 계곡을 따라 1인 시 낭독회를 연 적이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서점이 별로 없는 다소 외진 곳이어서 판매 목적으로 시집을 잔뜩 들고서 버스에 올라탔지요(스포츠용품 박람회에서 일한 경험 덕분에 잔돈 바꾸는 건 자신 있었습니다). 한번은 갑작스레 눈보라가 몰아쳐서 썰매에 책을 싣고서 끌고 가기도 했어요. 네 번째로 방문한 작은 마을에서 나는 그들 생에 첫, 아니 이제껏 그곳을 찾은 첫 시인이었습니다. 낭독회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어요. 시나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미 대다수가 그 주의 개봉 영화를 보고 난 뒤였거든요. 내가 그곳에서 받은 최고의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머리가 원래 그래요, 아니면 시술받은 거예요?" "돈은 얼마나 벌어요?" 어떤 질문도 적대적인 의도에서 나온 게 아니었어요. 모두 적절한 질문이었지요.

모든 사람이 여성 시인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머리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돈에 대한 질문은 나를 인간으로, 작가도 몸이 있고 위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준 것이었어요. 작가들도 먹어야 사니까요. 작가 역시 자기 자신의 돈을 가질 수 있죠. 돈과 결혼할 수도 있고요. 아니면 후원자(왕이든, 공작이든, 예술위원회든)를 모집하거나, 따로 직장에 다니거나, 시장에 책을 팔 수도 있죠. 작가에게 이런 돈 문제는 선택입니다. 오직 선택의 문제일 뿐이에요.

작가가 먹는 음식뿐 아니라 그들이 쓰는 글에도 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아요. 그 전형적인 사례가 가여운 월터 스콧이지요. 그는 동업자를 위해 약속어음에 서명을 했다가 회사가 파산하는 바람에 빚을 떠안았습니다. 이런 불운을 겪게 되면 자는 순간은 고사하고 깨어 있을 때도 악몽에 시달리게 되지요. 그리고 꼼짝없이 책상에 매여서 취향도, 작품의 질도 무시하고 활자를 쏟아내야 합니다. 펜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이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인가요.

첫 소설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던 작가가 두 번째 소설을 발표할 때 겪는 일들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 겁니다. 에이전트가 이렇게 한숨을 짓지요. "이게 첫 소설이었으면 팔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여기서의 교훈은 이겁니다. 출판사도 도박을 하지만 기회는 오직 한 번뿐이라는 것. 갈수록 더욱더 그렇지요. 맥스웰 퍼킨스 같은 편집자7가 언젠가 크게 빛을 볼 거라며 두 번, 아니 서너 번씩 손해를 감수하고 묵묵히 작가를 지원해주던 그런 날은 갔습니다. 그나저나 그런 날이 언제였던가요? 요즘 상황은 이렇습니다.

글을 쓰고 이문을 남기는 사람이
살아남아 다른 날 또 글을 쓸 수 있다.8

밥은 먹고 살아야겠는데 신간은 팔리지도 않고 식당에서 서빙도 못하겠다면 문학 보조금이라는 방법도 있습니다. 단, 수천 명이 기다리는 대기줄을 밀어낼 수만 있다면 말이지요. 창의적 글쓰기를 가르치는 교직일도 있지만 역시나 대기줄이 깁니다. 신인이나 기성 작가들을 위한 국제적인 작가 페스티벌도 있는데, 스무 도시를 돌면서 무시무시한 북투어에 참가하는 건 물론이고 신문 인터뷰도 해야 합니다. 이나마도 예전에는 찾아볼 수도 없었지요.

이 모든 게 실패하면 하청을 받아 글을 쓰는 방법도 있습니다. 인터넷에 직접 글을 게시하는 것도 좋아요.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 가명이 있습니다. 그러면 첫 소설이 아님에도 첫 소설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 수 있지요. 저 바깥의 알파벳 세상은 정글입니다. 아니, 기계예요. 톱니바퀴가 톱니바퀴를 잡아먹는 기계 말입니다.

열여섯에 작가가 되었을 때만 해도 내게 돈은 후순위였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일순위가 되었지요.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이 되고 현실을 알게 될수록 불안이 커졌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지?

캐나다 문학에 대한 수요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출판사도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지요. 식민지 정신이 아직 유효할 때였고, 그 말인즉 예술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는 런던, 파리, 뉴욕과 같은 타지이며, 캐나다 작가는 같은 국민들에게 열등함을 넘어 불쌍하고 한심하고 허세스러운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걸 의미했어요.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싶으면 오직 예술이 좋아서 해야 했어요. 글이 돈이 될 거라는 희망이 너무 옅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순간도 내가 글쓰기로, 아니 내가 쓰는 분야의 글로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엔 시장을 위해 신념을 버린다는 게 내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어요. 우선 내가 쓰던 글의 대부분이 시였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수시로 열리는 문학 잔치에서 빵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면 캐나다 밖에서 책을 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외국 출판사를 홀랑 넘어오게 할 만한 글을 써야 했지요. 그렇지만 이 외국 출판사들이 캐나다에 큰 관심이 없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볼테르가 캐나다를 "눈 덮인 좁은 땅"이라며 일축하던 태도가 여전히 공감대를 형성할 때였어요. 그러니 제임스 조이스의 유명한 세 가지 외침, "침묵, 자기 추방, 간교함"10이 캐나다의 작가 지망생들에게 특별한 울림을 줄 수밖에요(특히 자기 추방에 대한 부분이).

컴컴한 다락방에서 허기에 시달리면 비전을 볼 수 있다나요? 하지만 목숨을 부지하려면 최소한 약간의 돈은 있어야 합니다. 물론 물려받은 유산이 있어서 돈 냄새를 맡으려고 두리번거리며 체면을 구길 필요 없는 게 최고이기는 하지만요. 그렇지만 돈을 ‘위해’ 글을 쓰면, 아니 그렇다고 생각만 되어도 매춘 행위로 취급받았지요.

나는 파리의 한 지식인이 조롱 섞인 말투로 다음과 같이 질문하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당신이 ‘베스트셀러’를 쓴다는 게 사실인가요?" "일부러 쓰는 건 아니에요." 나는 수줍은 듯 답하면서도 한편으론 다소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나도 못지않게 익숙한 데다 돈을 잘 번다는 이유로, 또는 잘 못 번다는 이유로 책의 가치를 평가하는 우월의식에는 이미 이골이 났었으니까요. 순수한 야망을 품고 진짜 작가, 진짜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 작가에게 이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루이스 하이드가 자신의 저서 《재능》12에서 분명히 지적하듯이 문학적 가치와 돈을 연결 짓는 모든 방정식은 사과와 오렌지를 들고 저글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재능은 무게를 재서 측정할 수도, 돈을 주고 살 수도 없습니다. 기대하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재능은 주어지는 것이며, 그 외에 다른 식으론 얻지 못합니다. 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존재의 충만함에서 나오는 은총이지요. 재능을 달라고 기도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기도에 꼭 응답을 받는 건 아닙니다. 응답이 보장되면 작가가 슬럼프에 빠지는 일도 없지 않을까요? 소설을 창작할 땐 1할의 영감과 9할의 노력이 필요하다지만, 작품이 예술로서 살아남으려면 그 1할의 영감이 무조건 있어야 합니다(비율은 다르지만 시도 두 가지와 모두 관련이 있지요).

문학적 가치와 돈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돈이 되는 좋은 책, 돈이 되는 나쁜 책, 돈이 안 되는 좋은 책, 돈이 안 되는 나쁜 책. 조합은 이렇게 네 가지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조합이 실현 가능하지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15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요. "아름다움은 진리이고, 진리는 아름다움이다."16 존 키츠의 말입니다. 여기에 삼단논법을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진리가 아름다움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수 있다면, 아름다움이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지지한다, 아니 낭만주의 시대를 정점으로 간헐적으로 지지해왔다, 그러니 온 몸을 바쳐서 미를 숭상해야 한다, 예술보다 아름다움(넓게 해석했을 때)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가다 보면 심지어 도덕적 차원을 외면하는 미학에도 그만의 도덕적 차원이 있다는 결론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완벽한 예술 표현의 추구가 예술가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라면 대체 어떤 목표를 추구해야 하느냐는 것이죠.17

‘예술의 궁전’은 빼어난 항아리와 황금 분수대, 그리스 조각상, 그 밖에 영감을 샘솟게 하는 장식품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건물이지만 영혼은 그곳에서 살 수 없습니다.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든, 인류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은 낮은 계곡에 있으니까요. 따라서 이 시에서 ‘예술의 궁전’은 부정되고 파괴될 게 아니라 인간화되어야 합니다.

있었지요.
이 모든 일을 시대적 맥락에서 살펴볼까요. 당시(1950년대 후반)는 계산대 너머로 피임약을 사는 것도 힘든 시절이었어요. 미혼 여성은 피임약 구매 자체가 불가능했고요. 부엌 식탁이 아니면 낙태도 할 수 없었지요. 헤밍웨이의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을 처음 읽고서 나는 주인공 남녀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짐작도 하지 못했답니다(남녀가 기차역에서 낙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낙태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옮긴이). 여성용 위생용품을 광고할 수도, 그게 뭔지 말로 표현해서도 안 되다 보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초현실주의적인 광고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기억나는 광고가 있는데, 그리스 스타일의 하얀 이브닝 가운을 입은 여자가 대리석 계단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아래로 자막이 나갑니다. "전 모디스예요.(…) 왜냐면 말이죠."(모디스는 생리대 제품이다―옮긴이) ‘그러니까 왜 모디스라는 거지?’ 어린 나로선 답답한 노릇이었지요. 아직도 꿈에서 되풀이되는 질문이랍니다.

예술에서는 의도가 선하다고 미학적으로 점수를 얻지 못합니다. 이교도의 예술의 신은 고약한 별종이거나 우상(가짜 신)일지언정 맡은 일만큼은 훌륭히 해냅니다. 그러니 당신이 갈구하는 것이 예술, 아름다운 예술이라면, 좋든 싫든 이것이 당신이 기도를 바쳐야 할 신인 것이지요.

가장 먼저 희생해야 할 것은 가장 인간적인 부위인 심장입니다. 사제처럼 신을 더욱 완벽하게 섬기려면 인간을 사랑하는 능력을 희생해야 하는 겁니다.

비펜은 "인간은 최선을 다할 뿐"이라며 아이반호 식의 변명을 택하지요.

"오직 아름다운 것들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젊은 시절을 회상했다. 아직 사실주의 예술에 대한 사명감이 그를 짓누르지 않던 그때를."35 아, 이게 피할 수 없는 예술가의 운명이지요.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지만, 소수만이 선택받고, 그중 일부는 순교하고 맙니다.

남성 예술가에게도 이렇게 희생이 요구됐다면 여성 예술가에게는 어땠을까요?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화려하게 수놓아진 주홍글씨 A가 간통녀Adulteress일뿐 아니라, 예술가Artist 또는 작가Author를 의미한다는 의심이 드는 건 왜일까요?

이자크 디네센의 소설을 보면, 젊은 여배우 말리는 연극 〈템페스트〉에서 쇠렌슨 경이 맡은 푸로스퍼로의 상대역 에어리얼을 연기합니다. 말리는 고통스럽지만 예술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지요. "그러면 그 대가로 얻는 게 뭐죠?" 그녀가 쇠렌슨 경에게 일리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그가 답하지요. "세상의 불신과 끔찍한 외로움이지. 그게 다야."36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젊은 여배우 시빌 베인을 볼까요? 이름처럼 어떤 결말을 맞이했나요?37 샬롯의 아가씨(오필리아의 여동생 격이자 노래하며 죽어가는 19세기 여성 예술가의 원형으로, 시빌이 극 중에서 충실히 보여주고 있지요)처럼 그녀는 피와 살이 있는 인간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예술이 아니라 삶에 온 마음을 쏟아붓는 바람에 예술의 신에게 벌을 받아 재능을 잃고 맙니다. "예술이 없는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야." 도리언은 이렇게 말하며 그녀를 버립니다. 공허하고, 메마르고, 텅 비고, 부러진 갈대 같은 가여운 시빌이 그런 일을 당하고 할 수 있는 게 자살 말고 뭐가 있을까요?

배우 사라 베르나르(프랑스 여배우―옮긴이)가 관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서 정확히 핵심을 찔렀지요. 시체애호증과 검은 휘장을 절묘하게 이용한 이미지. 그것이 바로 대중이 원하고 이해하던 여성 예술가의 이미지였어요. 반쯤 죽은 수녀의 모습 말입니다.

내가 시인 지망생이던 1950년대 후반은 이런 희생의 필요성을 자연스레 인정하는 시대였습니다. 일반 직업을 가진 여성도 그랬지만, 예술을 하는 여성에겐 그런 압박이 훨씬 심했지요. 희생을 해야 더 완벽해진다는 이유에서였어요. 아내이면서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예술가가 되는 건 각각이 완전한 헌신을 필요로 하므로 불가능하다고 봤지요.

한쪽에선 사랑과 결혼이, 반대쪽에선 예술이 그녀를 잡아당긴 거지요. 그러니 예술에 빠지는 건 일종의 악마에 빙의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술과 춤을 추다가 죽음으로 내몰릴 수도 있으니까요. 예술은 몸속으로 들어와 나를, 아니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나를 사로잡고 파괴합니다.

꼭 상상력의 수녀가 될 필요는 없었어요. 사제priest의 여성형은 수녀nun이기도 하지만 여사제priestess이기도 하므로 선택이 가능했지요. 그리고 둘은 달랐어요. 기독교에는 여사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사제라고 하면 뭔가 이교도적이고 요란한 느낌이 있잖아요. 수녀는 남자를 멀리하지만 여사제는 그렇지 않죠. 물론 여사제가 남자와 맺는 관계는 흔히 우리가 가정적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요.

우연히 조지 엘리엇의 1876년 소설 《다니엘 데론다》를 만나면서 궁금증은 훨씬 더 커졌습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훌륭한 오페라 가수로, 자신의 두 살 된 다니엘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깁니다. 엄마라는 역할 때문에 예술 활동에 방해받는 게 싫었던 거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추종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에게 짓눌렸던 과거 때문에 냉혹할 뿐 아니라 남자들을 발아래 무릎 꿇리고 그 위에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 본인은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그녀를 묘사하는 표현을 보면 동의하기 힘들어요. 그녀는 "인간 어머니가 아니라 ‘멜루시나Melusina’"지요. 멜루시나란 반은 여자, 반은 뱀이라는 뜻입니다.40

고통스러워한다는 건 인간적인 면모가 일부 남아 있다는 뜻이지만 그녀의 고통은 아이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예술을 포기했다는 데서 비롯합니다. 노래를 포기하는 것은 그녀의 종교, 예술이란 종교에 대한 배신이며, 고통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벌이지요.

다니엘의 엄마는 마녀라고도 불립니다. 마녀와 팜 파탈femme fatale은 한 끗 차이로, 19세기 말에는 수십 명의 팜 파탈이 무대 위를 어지럽혔어요.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살로메입니다.

1960년에 내가 편집 일을 돕던 대학 문예지에 출품된 여학우들의 시 중에 상당수가 희한하게도 살로메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예술에 발을 들인 바람에 자신들과 정을 통한 운 나쁜 남자들이 파멸을 맞을까봐,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그들의 머리가 접시에 놓인 광경을 보게 될까봐 겁이 났던 것 같아요.

상상력의 수녀와 상상력의 여사제 모두 결국엔 예술의 제단 바닥에서 생을 마감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여사제는 갈 때 혼자 가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나는 공기처럼 남자를 먹는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 〈레이디 나사로〉(원래 나사로는 남자 이름으로, 성경에서 예수가 부활시킨 인물이다―옮긴이)에서 죽음을 거역하면서도 받아들이는 동명의 여인이 마녀처럼 붉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하는 말입니다. 이를 통해 그녀는 이 전통에 자신을 자리매김하죠.

에밀리 디킨슨의 은둔 생활,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고립된 삶,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마약 중독과 거식증, 샬롯 뮤의 자살, 실비아 플라스의 이어진 자살, 앤 섹스턴의 또 이어진 자살. "솟구치는 피는 시다." 실비아 플라스는 목숨을 끊기 10일 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건 없다."45 상상력의 여사제는 결국 바닥의 붉은 웅덩이에서 생을 마감할 운명인 걸까요?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굉장히 직설적으로 다루어졌어요. 여성 시인이 그렇게 묘사되는 일이 너무 많다 보니, 솔직히 처음 얇은 책 두 권을 출판하고 난 뒤 내게 자살을 할 거냐 말거냐가 아니라, 언제 할 거냐고 묻는 이들까지 있었답니다.

목숨을 걸고 할 생각이 없으면, 아니 목숨을 끊을 생각이 없으면 여성 시인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요. 아니 신화가 그렇게 명했어요. 다행히 나는 시와 소설을 같이 썼습니다. 자살을 하는 소설가들도 있지만, 산문에는 균형을 맞춰주는 힘이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어요. 말하자면 접시 위에 고기와 감자는 더 많이 놓이고, 잘린 머리는 더 적게 놓였다고나 할까요.

‘길은 좁고 문은 협소한’ 예술지상주의로 향하는 길에 놓인 ‘절망의 늪’을 피해서, ‘사회적 책임’이라는 다른 길을 택하면 어떻게 될까요?46 공개토론회에라도 회부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토론회가 열리는 곳은 지옥일까요? 하지만 ‘사회적 책임’이라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결국 ‘예술의 궁전’에 놓인 금박 의자에 언어의 덮개를 얹는 정도의 위업은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거야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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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나의 공간으로 불러들여서, 내가 잘하고 또 좋아하는 것들로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 오로지 그것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쏟는 일.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일단 제대로 손님치레를 하자면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사람들에게 연락해 날짜를 잡고 음식 재료를 장만하고 집 안을 정돈하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당일에는 요리를 하고 식사를 내면서 동시에 손님들을 챙기고 대화를 이끄는 멀티태스킹을 해야 하고, 손님들이 떠나면 뒷정리도 남아 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도와준다면 고맙겠지만 결국 집주인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일거리를 감수하고서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시간을 선사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뿌듯한 행복감이 있다. 더없이 이타적인 마음에서 비롯되는 행복 말이다.

파티의 호스트 노릇에는 재능도 필요하다. 초대객 명단을 짤 때에는 사람들 사이의 궁합을 고려해야 하고, 집 안을 꾸미고 테이블을 세팅하는 데에는 미적 감각이 필요하며, 음악이나 보드게임 같은 오락거리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면 풍류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 메뉴를 고르고 음식 준비를 할 때는 미식가로서의 자질은 물론이거니와 손님들이 무엇을 못 먹고 무엇을 잘 먹는지, 얼마나 많은 양이 필요할지, 한정된 예산에서 얼마나 좋은 재료를 장만할 수 있을지도 두루두루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이 정도면 종합 예술의 경지라 할 만하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잘할 수 있는 일은 분명 아니다.

오늘날에는 바닷가재, 그러니까 랍스터가 고급 식재료에 속하지만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극빈층이나 교도소에서나 먹는 음식으로 취급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사추세츠 주와 메인 주의 바다에서는 바닷가재가 널리다 못해 해안가에 떠밀려 와 무릎 높이까지 쌓일 정도였다. 사람들은 아무리 맛이 좋아도 흔하고 값싼 음식에는 그다지 열광하지 않는 법이다.

에이미 같은 세련된 아가씨가 커다랗고 시뻘건 바닷가재를 담은 바구니를 팔꿈치에 끼고 시장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은, 우리 시대로 치자면 루부탱 구두를 신고 머리를 곱게 드라이한 아가씨가 김치 통이나 간고등어가 든 검정 봉지를 들고 버스를 타는 모습 같은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사실 식사 초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그런 마음가짐일 것이다. 단 한 명의 손님이라도 반갑게 맞이하고 성의껏 대접하는 것.

사흘째 빨지 못한 식탁보가 덮인 둥근 식탁 앞에 앉아 저녁을 먹으려 할 때 맞은편의 남편이 수프 그릇의 뚜껑을 열고는 반색하며 "아, 맛있는 포토푀! 이만큼 좋은 것도 없지"라고 말할 때면, 그녀는 고급스러운 만찬, 반짝거리는 은식기들, 고대의 인물들과 요정의 숲 한복판을 날아다니는 기기묘묘한 새들이 수놓인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벽을 떠올렸으며, 또 멋들어진 접시에 올려진 풍미 가득한 요리와, 송어의 분홍빛 살점이나 뇌조의 날개 부위를 먹으며 스핑크스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에게 남자들이 속삭이는 신사적인 말들을 상상하기도 했다.
_기 드 모파상, <목걸이>

세상에는 허영심을 품은 여자가 벌을 받아 비참해지는 내용의 소설이 많은 것 같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여자의 허영심을 죄악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 드 모파상의 <목걸이>도 그런 소설이다.

허영이란 무엇일까?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 지식이나 경제적 능력, 분수에 어울리지 않게 겉만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라고 나온다.

공부를 하지도 않았으면서 지적인 사람인 척하거나,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호화로운 생활만 추구한다면 확실히 꼴불견이긴 하겠다.

분수는 자신의 신분에 따르는 한계를 뜻한다. 분수에 맞게 살라는 말은, 자신의 노력과 무관하게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는 지위에 만족할 줄 알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 걸까?

부유하고 지체 높은 남자와 결혼하면 부유하고 지체 높은 여자로 살 수 있고, 가난한 하류층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덩달아 가난한 하층민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떤 남자와 결혼하느냐는 으레 여자가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간혹 가게에서 속옷 파는 여자가 멋진 신사와 결혼한다든지, 하녀가 자기가 모시는 주인 나리와 결혼한다든지 하는 이례적인 일도 벌어졌지만 그런 파격적인 신분 상승은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여자들은 타고난 자질, 취향, 노력으로 얻은 지식이나 능력과 무관하게 그저 남자들에 의해 인생 행로를 결정당했던 것이다.
사람으로서 그런 ‘분수’에 어떻게 만족할 수 있겠는가.

능력 없는 남자가 아름답고 우아한 아내를 얻었는데 운 좋게도 그 아내가 자기 가치를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별 불만 없이 남편이 주는 것들이 전부인 줄 알고 산다면, 그 남자는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아름답고 우아한 아내가 어느 정도의 욕망과 상식과 자의식과 의사 표현 능력을 갖추었다면 남자는 불행해진다.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하루하루 실감하며 살아야 하니까.

학교에서는 흔히 <목걸이>를 청소년 권장 소설로 적극 추천한다. 허영심이 불러온 파국을 보여주고 "인생의 참된 가치"에 대한 교훈을 주기 때문이라나. 헛된 것에 집착하지 말고 인생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추구하라는 경각심을 일깨운다고 하는데, 글쎄, 그래서 <목걸이>에서 말하는 인생의 참된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노동의 소중함? 겸손의 미덕? 포토푀 한 냄비의 행복?
내가 보기에 <목걸이>에서 그런 긍정적인 가치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소설에 어떤 교훈이랄 게 있다면, 그건 "인생은 시궁창"이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부당한 처지에 순종하지 않으면 더욱 부당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는 메시지 말이다.

한 시간이 지나 미약스는 순록 스튜를 완성했다.
"드디어 다 됐네!"
미약스는 맛있는 고기를 한입 베어 물고 육즙을 빨아 먹은 다음, 한참을 씹은 뒤에야 삼켰다.
_진 크레이그헤드 조지, 《줄리와 늑대》

여자아이가 가족을 잃거나 가출해서 미아가 되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많다. 하지만 이 여자아이가 헤매는 곳은 뉴욕이나 런던,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이 아니라 저 신비의 땅 툰드라이다.

모든 동물의 죽음이 얼마나 존귀한지 알기에 그 삶도 경건히 기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약스는 이 진실을 늑대들을 통해 배운다. 늑대들의 보호와 가르침 속에서 성장한 미약스는 마침내 오롯이 혼자 힘으로 음식을 구하고, 옷을 지어 입고, 집을 짓고 살 줄 아는 한 명의 인간이 된다.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강인한 인간.

한식에서 흔히 장맛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듯이, 이누이트들은 "훌륭한 요리사는 질 좋은 바다표범 기름을 쓴다"고 말하기도 한다.

책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은 칭찬을 받을 때도 있지만 수난을 당할 때도 많은 것 같다. 요즘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여자애가 너무 똑똑하면 못쓴다든지, 책 좀 읽었답시고 잘난 척하지 말라든지, 여자애가 공부 따위 해봤자 뭐에 써먹느냐고 하는 어른이 아주 많았다. 설령 그렇게까지 대놓고 타박하지 않더라도 여자아이들의 지적 호기심이나 성취는 마치 존재하지 않거나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런 경험이 있는 여자아이라면 《마틸다》를 보며 "이건 내 이야기야!"라고 느낄 것이다.

마틸다는 어린 독서가들의 심정과 사고방식을 거의 완벽하게 대변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어렸을 때 나는 종종 내 수준에는 너무 어려운 책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곤 했는데, 마틸다도 꼭 그렇다. 그녀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탐독하고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지만 그래도 이 책이 마음에 들어요. 헤밍웨이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꼭 그 사건을 그곳에서 직접 보고 있는 것만 같아요"라고 소감을 밝힌다. 반드시 책 속 모든 문장을 이해하지 않더라도 감동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는 단어와 문장 들이 다가와 낯선 세상을 펼쳐 보이는 신비를 마틸다는 정확히 알고 있다.

또한 책 한 권과 따뜻한 음료를 가지고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낼 때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마틸다는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자기 방에 혼자 틀어박혀 책을 읽는 오후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럴 때면 핫초콜릿이나 코코아 믹스, 보브릴(소고기 추출물을 뜨거운 물에 타 먹는 영국식 인스턴트 음료) 한 잔을 타서 옆에 두고 마시곤 한다. 아쉽게도 마틸다는 아직 어려서 부엌 안의 물건들이 손에 닿지 않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맛있는 걸 만들 수는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날의 책이나 기분에 따라 적합한 음식도 준비했을 것이다.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좋아하는 음료를 마시는 것도 참 좋지만,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건 더더욱 좋으니까. 맛있는 음식은 책의 재미를 돋워주고, 재미있는 책은 음식의 맛을 돋워주는 법이다.

책장을 넘기고, 포크를 입에 가져가고, 입에 든 맛있는 것을 삼키는 동작을 반복하노라면, 그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세계 안에서 언제까지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을 두 가지 꼽자면, 부엌에서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꺼내 먹고 요리할 수 있다는 것과 식사하면서 어떤 책이든 내 마음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어른들이 못 먹게 했던 커피나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내 입맛대로 만든 크림소스 파스타를 먹으며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밀가루와 지방이 듬뿍 든 냉동식품도, 뭐, 먹으라거나 먹지 말라거나 강요하는 사람이 없으니 얼마든지 내키는 대로 먹을 수도 있다. ‘TV 저녁식사’도 그 구색으로 보나 간편함으로 보나 책을 읽으면서 먹기엔 참 좋은 메뉴일 것 같다.

《마틸다》의 결말에서 부모를 떠나 새로운 삶을 꾸린 마틸다가 ‘독서 저녁식사’를 먹으면서 행복하게 살았겠거니 상상하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여자애가 책 따위 읽어서 뭐 하냐는 말을 듣고 자란 여자들이 어른이 되어 좋아하는 책을 실컷 사 읽으며 맛있는 걸 먹는다고 생각하면 또 그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다. 지금 나는 좋아하는 일본식 오픈 키친 레스토랑에서 꽁치 알리오 올리오와 맥주를 즐기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이 잔으로 수많은 ‘마틸다’의 작은 승리에 축배를 들겠다. 여러분도 나와 함께 건배하자. 우연찮게 우리가 지금 이 한 권의 책 앞에 모였으니 말이다.

호텔’.
‘로터스lotus’는 ‘연꽃’이라는 뜻이다. 연꽃의 열매인 연밥을 먹으면 모든 걱정 근심을 잊고 행복한 몽상에 빠진다는 전설이 있다. 《오디세이》에서 바다를 표류하던 오디세우스 일행은 연밥이 주식인 어느 해안 나라에 당도하는데, 그곳 주민들이 대접한 연밥을 먹고는 본래 목표를 깡그리 잊고 그곳에 눌러앉아 허송세월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떠나고 싶지 않다고 버티는 일행을 오디세우스가 억지로 끌어내 배에 태우고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이 그 에피소드의 줄거리이다.

그녀는 호화 여객선, 폴린스키 백작, 바덴바덴이나 칸 같은 휴양지에 대해 막연히 책이나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서, 정말로 귀부인이 된 것처럼 패링턴 씨와 우아하게 담소를 나눈다.

<아르카디아의 단기 투숙객들>은 내용을 다 알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기분 좋은 소설이다. 다가오는 여름 휴가에는 이 단편이 포함된 오 헨리 선집을 들고 어딘가 멋진 호텔에서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며 마담 보몽처럼 설레는 우연이 찾아오기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여행지에서 마음에 쏙 드는 데이트 상대를 만나기란, 더구나 그 상대와의 로맨틱한 만남이 여행이 끝난 뒤에도 이어지기란 정말 흔치 않은 기적 같은 일이지만, 설령 그런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다 해도 이 책과 함께라면 많이 아쉽지는 않을 것이다.

claret’는 원래 영국에서 프랑스의 보르도산 와인을 뜻하는 단어였지만,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쌉싸름하고 짙은 빛깔의 레드와인을 통틀어 클라레라고 불렀다.

19세기에 클라레 컵을 만들 때는 흔히 음료 위에 보리지borage 꽃을 장식으로 띄웠다. 예쁜 푸른 빛깔과 산뜻한 맛과 향 때문에 와인을 넣은 펀치와 잘 어울려 19세기의 바텐더들에게 사랑받은 꽃이었다. 우울을 날려주는 효과도 있다고 하니 한여름 밤의 꿈같은 데이트에 근심 걱정을 잊게 할 ‘연밥’으로 손색이 없겠다. 국내에서 보리지 꽃은 다른 식용 꽃에 비해 귀한 편이지만 인터넷을 통해 구할 수 있으니, 꿈결 같은 고풍스러운 클라레 컵을 만들고 싶다면 한 번쯤 시도해볼 수 있겠다.

나무딸기 주스
{ Raspberry Cordial }





다이애나는 자기 잔에 주스를 따르고는 그 새빨간 빛깔을 바라보며 감탄하더니,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셨다.
"대단히 맛있는 나무딸기 주스네요, 앤. 나무딸기 주스가 이렇게 맛있는 줄은 몰랐어요."
"좋아해주시니 저도 무척 기쁘네요. 마음껏 드세요. 저는 잠깐 부엌에 불 좀 살피고 올게요. 집을 돌보려면 신경 써야 할 일이 참 많아요, 그렇죠?"
앤이 부엌에 다녀오니 다이애나는 주스를 두 잔째 마시고 있었다. 한 잔 더 마시라고 권하자 다이애나는 사양하지 않고 또다시 잔에 넘칠 듯 그득히 주스를 따랐다.
_루시 모드 몽고메리, 《빨간 머리 앤》

내가 어렸을 때 접하던 아동용 소설책에는 아이들이 술이나 성을 탐하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서로 속이거나 쌈박질하거나 무언가 훔치는 장면은 나와도, 어른들만의 쾌락을 아이들이 탐하는 장면은 암묵적인 금기였던 것이다.

집에 놀러 온 다이애나에게 나무딸기 주스, 즉 라즈베리 코디얼raspberrycordial을 대접하려다 그만 혼동해서 커런트 와인currantwine을 먹이고 만 것이다.

라즈베리 코디얼과 커런트 와인은 우리나라로 치면 오디즙과 복분자주 정도가 될 것이다. 둘 다 빨갛고 진한 액체이고 향도 새콤달콤하니, 알코올 특유의 맛을 경험한 적이 없는 아이들로서는 구분하기 어려울 수밖에.

우리는 누군가 능력 있는 사람이 짠 하고 나타나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해결해주기를 바라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항상 그만큼의 불편함이 따른다. 그 사람에게 너무 큰 빚을 졌다는 심리적 부담감 때문에 껄끄러워지기도 하고, 심지어 그 사람이 미워지기도 한다. 게다가 주디처럼 삶 전체를 누군가의 도움에 의탁하면 그 사람 말을 거역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도 문제이다.

신데렐라를 가난과 학대에서 구해준 백마 탄 왕자님은 상상 속에서는 완벽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구해준 대가로 잠자리를 청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밥을 차려달라거나 애를 낳아달라거나 시집살이를 요구할 테니까. 우리를 도와준 사람을 사랑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더구나 도움을 줬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라는 보장도 없기에 더욱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키다리 아저씨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 그가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과연 레몬 젤리 위에 사람이 뜰 수 있을까? 젤리 밀도가 사람 밀도보다 높으면 가능하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인체의 밀도는 물과 비슷한 세제곱센티미터당 1그램 정도이다. 보통 사람 몸은 물보다 밀도가 약간 낮고, 숨을 들이쉬면 몸 부피가 늘어나 밀도가 더욱 줄어들기 때문에 수면 위에 뜰 수 있다. 그러면 젤리는? 미국 슈퍼마켓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컵 젤리인 ‘프루젤’ 밀도는 세제곱센티미터당 0.16그램이라고 한다. 그러니 주디의 예측대로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선수라도 가라앉을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젤리를 더 뻑뻑하게 만든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흔해도 우리나라에는 흔치 않은 과일의 경우 부를 말이 마땅치 않을 때가 있다. 예컨대 각종 베리류, 즉 크랜베리, 블루베리, 링곤베리, 블랙베리, 라즈베리, 구스베리처럼.
물론 한국어로 번역할 것 없이 그냥 링곤베리나 구스베리라고 번역하면 간편하기야 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쉽게 가다 보면 책에 한국어는 토씨만 남고 온통 영어 표현이 가득한 ‘보그체’가 펼쳐질 것이다("우리는 링곤베리를 따 모은 바스켓을 들고 코티지에 들어가서 런치를 즐겼어요" 같은 문장으로 가득한 책을 상상해보길). 그런 사태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도 번역가의 일이고, 이 일에는 정답이 없기에 더욱 어렵다.

외국 문물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속도보다 번역어가 생기는 속도가 더뎌서 생기는 우스꽝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아, 이렇게 헷갈리게 하지 말고 그냥 크랜베리, 블루베리, 링곤베리, 블랙베리, 라즈베리, 구스베리라고 쓰란 말이야!" 하고 소리치고 싶다. 그런데 정말 그래도 될까? 적절한 번역어를 고민하지 않는 것은 번역가로서 직무 태만이 아닐까? 애초에 이런 혼란이 빚어진 원인도 나 같은 번역가들이 번역어를 정립하는 데 소홀한 탓이라고 생각하면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아동 학대가 끔찍한 이유 중 하나는 아이에게 방어할 능력이 전혀 없으며 가해자는 그 사실을 알고 학대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물리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무방비하다. 그래서 너는 못된 아이라고, 네 몸속에 악마가 들어 있다고, 너는 맞아도 싼 쓰레기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정말로 그런 줄 안다. 자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고, 어른들을 괴롭히는 나쁜 아이이고, 어른들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런 아이들은 으레 어른들의 고달픈 생활과 슬픔을 헤아리려고 노력하고 어른들이나 할 법한 걱정을 하곤 한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를 두고 조숙하다고 말한다. 칭찬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제제와 마찬가지로 뽀르뚜가를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하고 돈 많은 어른. 나를 따뜻하게 달래주고, 맛있는 것을 사주고, 커피에 빵을 적셔 먹는 법을 알려주고, 영화관에 데려가주고, 내가 얼마나 착하고 똑똑한 아이인지 알아주고, 친구처럼 대해주고, 아낌없이 사랑해주는 어른. 이런 어른이 곁에 있으면 세상을 비관하지 않을 수 있다.

환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현실에 머물러 있기 위한 절박한 방법이다. 그 방법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더 이상 현실을 긍정할 수 없다. 현실에서 긍정할 요소가 아무것도 없음을, 처음부터 그런 건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팬케이크나 미국 남부식 비스킷을 만들 때 신 버터밀크를 반죽에 넣으면 포슬포슬하니 먹기 좋은 식감과 특유의 감칠맛을 낸다. 또한 고기의 연육 작용을 돕기도 하고, 치킨이나 돼지고기와 궁합이 잘 맞는다. 하지만 어린이 세계 명작 소설 속 아이들처럼 벌컥벌컥 마셨다가는 아마 실망할 것이다.

예쁜 것을 가리키는 말은 그 말 자체도 예쁜 것 같다. 장미꽃이 예쁘듯이 장미꽃이라는 말도 발음부터가 예쁘게 들린다. 마찬가지로, 맛있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는 입 안에서 굴려보면 볼수록 좋은 맛이 나는 것 같고, 향긋한 것을 가리키는 단어는 활자에서도 향내가 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단어들이 놓인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별 내용이 없어도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천일야화》, 즉 《아라비안 나이트》가 유럽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은 향신료를 비롯한 동방 문물이 서양으로 흘러 들어간 과정과 유사하다. 본래 인도와 페르시아의 설화 이백여 편을 모은 페르시아 설화집이었던 것이 아라비아로 전해지면서 아랍 설화들이 덧붙여졌고,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를 거치면서 또 다른 설화들이 속속 추가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천한 편의 이야기가 담긴 기나긴 설화집이 만들어진 것이다. 비단길을 따라 동에서 서로 흘러가면서 점점 더 인기를 얻은 것은 향신료와 마찬가지이지만, 《천일야화》는 이야기이기에 향신료처럼 닳지 않았다. 희귀해지지도, 비싸지지도, 독점당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한 생명력을 얻고 더욱 널리 퍼져나갔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른스러운 어른이란, 그렇게 권태로운 태도로 고급 레스토랑 테이블에 앉아(아이들은 마음대로 시킬 수 없는) 값비싼 요리를 주문하고, 종업원에게서(아이들은 받을 수 없는) 깍듯한 대접을 받고, 반짝거리는 만년필로 무언가 복잡한 문서에(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서명도 하고, 카드가 꽉 찬 지갑을 꺼내서 계산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자라면 그런 모습이 되리라고 상상했다(가난한 어른?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성인이 되면 돈과 힘이 생기고 존경을 받으니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동경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거쳐야 하는 온갖 인생 곡절, 그 경험에서 비롯된 슬프고 피곤한 표정마저도 멋있어 보였다.

어린아이의 철없는 결정이었을까? 글쎄, 나는 어른 중에도 이런 거래에 응할 사람은 수두룩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가난은 무서운 것이니까. 가난은 영혼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사람을 내몬다.
그래서 팀은 마악 남작이 내민 계약서에 서명을 한다. 초능력은 마악 남작의 약속대로 효력을 발휘했고, 그날부터 곧장 팀은 경마에서 승승장구해 떼돈을 벌어들였다. 그 돈으로 원하던 것은 모두 이루었다.

독일에서 흔히 먹는 케이크이다. 크림이 든 달콤한 발효빵에 꿀로 조린 아몬드 토핑이 얹혀 있다. 비넨슈티히는 ‘벌에 쏘임’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벌침 케이크bee sting cake’라고도 한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도 꿀 아몬드 토핑 때문이겠지만, 관련된 전설도 남아 있다. 15세기에 어느 독일 마을이 이웃 마을의 침공을 당하자 마을 제빵사들이 벌집을 마구 던져서 적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그 승전을 자축하려고 제빵사들이 만든 케이크가 바로 비넨슈티히였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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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등장하는 소녀들은 우리에게 또 다른 친구와도 같았다. 우리 생각을 이해해주고, 부당한 일을 겪으면 같이 화를 내주고, 우리가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반항을 대신 해주는 친구들.

아나스타샤는 여러모로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 그 애도 나처럼 도시에서 외동딸로 자랐고(나중에 남동생이 생기긴 하지만), 엄마의 직업이 화가였으며, 책을 즐겨 읽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생에 불만이 많았다.

호박 파이를 두고는 "먹은 걸 토한 듯한 냄새가 난다"며 구역질까지 하는가 하면, 교외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이유로 창밖으로 뛰어내리겠다고도 하고, 엄마가 화가라서 늘 너저분한 차림새로 물감을 묻히고 있는 게 "창피해서 싫다"며 대놓고 불평도 한다.

아나스타샤가 그렇게 강한 혐오의 표현을 쓰는 것과 달리, 싫어하는 마음은 쉽사리 뒤집히곤 한다. 질색하던 호박 파이를 어느 날 갑자기 몇 조각이나 먹어치우는가 하면, 막상 남동생이 태어나자 ‘샘’이라는 예쁜 이름을 붙여주고 애지중지한다.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이 평범하지 않아서 싫다고 하다가도, 그게 러시아 황녀의 이름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에 쏙 든다고 한다. 또 자기 담임선생님을 싫어한다고 믿으면서도 정작 그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고, 교외에 가본 적조차 없으면서도 그곳의 삶이 끔찍할 거라고 무작정 단정한다.

문학이 하는 일도 딱 이런 것 같다. 문학은 지극히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있던 사물들이 본연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오고, 평생 한 가지 용도로 써온 물건에서 갑자기 전혀 몰랐던 용도를 발견한다.

불교도들이 교리를 깨우치기 위해 읽는 불경이,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고 말하는 시 속에서는 서러움이라는 감정의 대명사가 된다.

이제까지 그녀는 드레스를 입어보며 흥분하느라 깜빡 잊고 있었지만, 어멈은 오하라 가의 딸들이 어느 파티에서든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않도록 파티에 가기 전에 집에서 음식을 잔뜩 먹어둬야 한다는 원칙을 철통같이 지키는 사람이었다.
_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알고 있는가?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스칼렛 오하라는 미인이 아니었다"는 글귀로 시작한다는 사실.

당대의 규범에 의하면 여자란 모름지기 어리석고 수동적이고 예민하고 나약한 동물이어야 하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남자에게 의존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극히 영리하고 강단 있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스칼렛은 그 규범을 고분고분 따르려야 따를 수가 없었다. 그녀도 사회 예법과 도덕관을 존중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체질적으로 현실주의자인 건 어쩔 수 없다.

스칼렛 오하라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

스칼렛이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 바로 그녀의 먹성이다. 스칼렛은 정말 잘 먹는다.

여자의 식욕이 왜 숨겨야 할 부끄러운 일인가?

"두고 봐요. 언젠가 나는 무슨 말이든 행동이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테고, 남들이 좋아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어요."

스칼렛은 좋아하는 음식을 아껴 먹기보다는 가장 먼저 먹어치우는 사람이다.

그때만 해도 스칼렛은 꿈에도 몰랐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미래가 닥쳐오리라는 것을.

얼마나 공교로운 일인가. 자신을 내내 억압했던 사회 규범에서 비로소 벗어났지만, 스칼렛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는 오히려 더 큰 짐을 짊어졌다.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예의를 지키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굴욕적으로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혐오하는 남자하고도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해야 한다.

말이든 행동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려면 돈이 있어야만 하는 냉엄한 현실이다.

그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장애물이 나타나면 강인하게 맞서 싸우며 돌파해나간다. 그저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여자가 인간답고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들은 연인이 되기에는 너무 친구처럼 남녀 간의 분별이 없고, 친구라고 하기에는 서로에 대한 소유욕이 지나치게 강하고, 오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격정적이다. 어른들은 그들에게 친구나 연인, 오누이 중 한 가지만 선택해 그에 맞춰 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들은 그 무엇도 되고 싶어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말한다.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그가 나의 기쁨이라서가 아니야. 나 자신도 내게 늘 기쁨이 되어주지 못하는걸. 다만 그는 내 존재 자체로서 내 안에 있는 거야."

아직 애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결혼할 사이와 그렇지 않은 사이가 무엇인지, 여자와 남자가 뭐가 다른지도 잘 모르는 나이에 가능한 유대감이 있다.

사람은 서로를 같다고 여기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다름을, 분별을, 격차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때로 세상은 아이들에게 정말 잔인한 것 같다. 사랑하는 친구를 배신하고 다 같이 비참해질 수밖에 없는 선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셜록 홈스’ 시리즈에는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추리소설이고, 당연하게도 소설 속에 발생한 미스터리한 사건과 그것을 해결하는 탐정 홈스의 추리가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 과정이 재미있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 소설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가장 애정을 두는 부분은 추리가 아니라 그걸 둘러싼 홈스와 왓슨의 소소한 일상이다. 홈스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걸치는 실내복 가운, 아침에 두 사람이 함께 신문을 읽으면서 티격태격 말다툼하는 장면, 하숙집 주인인 허드슨 부인이 차려주는 저녁식사, 그리고 홈스가 수사 중에 런던 지리를 상세히 일러줄 때마다 19세기 말 런던의 골목들과 상점들 하나하나가 내 눈앞에 생생히 되살아나는 듯한 순간들.

홈스와 왓슨 콤비가 해결하는 미스터리가 흥미진진하면 할수록 그 두 사람에게 애착이 생기고, 그들을 좋아할수록 그들의 삶과 세계도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애정이 커질수록 그들이 파헤치는 사건들을 더 많이, 끝없이 보고 싶어진다.

중독적인 ‘훅송’을 들을 때 후렴구가 나오기를 기다리듯이, 나는 "초보적인 추리" "브랜디" "그 바이올린 좀 건네주게"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바로 그 부분이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 이들 이야기가 영원히 계속될 듯하다. 마치 지금도 어디선가 그들의 일상이 반복되고 있을 것만 같고, 또 그러기를 바란다.

깡마른 체격에 냉철하고 검소한 홈스의 이미지만 생각하면 그가 음식을 좋아할 성싶지 않지만, 의외로 홈스는 그 누구보다도 먹성이 좋다. 그는 아침에 늘 빵과 함께 달걀을 두세 개씩 양껏 먹어치우고, 7시에는 반드시 저녁을 먹고 싶어하며, 끼니를 놓치는 걸 싫어한다.

스스로 잘 챙겨 먹을 줄 모르는 듯한 몇몇 알코올의존증 탐정 캐릭터들과 달리, 홈스는 사건 수사에 필요한 두뇌 활동 및 육체 활동을 위해서는 영양분과 에너지를 충분히 섭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아는 듯하다. 게다가 늘 좋은 식사를 차려주는 허드슨 부인을 칭찬하는 것을 잊지 않으며, 손님들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기를 즐기기도 하니 음식을 진정으로 즐기고 식사 예절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음식에 관심 없기로 악명 높은 영국 사람치고는 미식가라 할 만하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 나도 여행을 좋아한다. 내 근거지, 내 일, 쳇바퀴 같은 일상, 번잡스럽고 골치 아픈 생활을 모두 팽개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목적지가 어디든 일단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놓으면 벌써부터 설렌다. 그 설렘만으로도 하루하루를 참아내기가 한결 수월하다. 얼마 뒤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떠난다고, 어딘가 다른 곳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들으며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공항에서, 호텔 프런트에서, 극장 티켓 박스에서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면, 내 이름을 아예 잊고 내가 나였던 것조차 없던 일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을 다니는 일주일 동안, 딱 그동안만이라도 서울에 있는 모두가 나를 잊고 나도 그들 모두를 잊을 수 있다면, 그러면 정말로 홀가분하고 재미있는 여행이 될 텐데.

‘또 다른 나’가 되기란 참 번거로운 일인 것 같다. 사람들은 늘 누군가의 이름, 고향, 가족, 인생 내력을 궁금해하니, 그런 정보들을 매번 새로 지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려면 상상력도 필요할뿐더러 나름 지식도 있어야 하고 부지런도 떨어야 한다. 늘 가명을 쓰고 다른 사람인 척하는 스파이나 범죄자 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플까. 하지만 허크의 단짝 친구이자 문학 소년인 톰 소여라면, 소설책에 나오는 멋진 스파이나 범죄자처럼 살아볼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가끔 우리에게 신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여행 중에 우리 내면에서 너무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어도, 여행에서 돌아오면 우리 그런 변화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본의 아니게 혼자만의 소중한 비밀이 되어버리는 경험 말이다.

"얘들아, 정어리 샌드위치를 한 입 먹고, 돼지고기 파이를 한 입 먹은 다음, 코코아 우유를 한 모금 마셔봐."
패트가 말했다.
"맛이 기가 막혀."
_에니드 블라이튼, 《세인트클레어의 말괄량이 쌍둥이》

밤에는 뭘 먹어도 맛이 두 배가 된다. 친구와 같이 먹으면 네 배가 된다. 하물며 학교 기숙사에서, 불 꺼진 방 안에서, 친구들과 같이, 선생님 몰래, 맛있는 음식들을, 엄청나게 많이 먹는다면? 그건 세상 그 어떤 황제의 수라상에 비할 수 없는 특급 진미라 할 만하다.

정어리 샌드위치를 한 입 먹고, 돼지고기 파이를 한 입 먹은 다음, 코코아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면 맛이 기가 막힌다는 패트 오설리반의 주장은 더더욱 얼토당토않게 들렸다.

6월 17일. 거북 요리를 했다. 몸속에 알이 거의 육십 개나 들어 있었다. 거북 고기는 그때껏 내가 먹어본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는 별미로 느껴졌다. 그 끔찍한 곳에 조난당한 이후로 염소와 새 외의 고기라고는 먹어보질 못했기 때문이다.
_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

‘세계 명작’ 시리즈에 들어가는 소설들은 수백 년을 살아남을 만큼 훌륭한 작품들이지만, 또 그만큼 낡은 부분도 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옛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습관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흔히 먹고 마시고 입고 쓰는 것 중에는 현대에는 찾아보기 힘들어 더더욱 고풍스럽고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것들도 있지만, 사실 그런 물건이나 음식 들이 종적을 감춘 데에는 다 그럴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거북으로 만든 물건이며 음식만 해도 그렇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짐이 아내의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장식하려고 샀던, 거북 등딱지로 만든 보석 박힌 빗은 정말 탐나는 아이템이다. 또한 《톰 소여의 모험》에서 톰이 친구들과 강기슭에서 찾아낸, "서양 호두알보다 약간 작으면서 하얗고 완벽하게 둥근" 거북 알들로 만든 거북 알 프라이가 어떤 맛일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이 당시 미국인들이 이렇게 거북을 가지고 예쁘고 맛있는 것들을 만들기를 지나치게 즐긴 나머지 오늘날 미국의 거북 종 상당수가 멸종 위기에 직면했다. 지금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야생 거북 포획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인간에게 너무 사랑받는 동물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기 십상이다.

바다거북 수프는 여전히 귀하고 비싼, 서민들이 접하기는 쉽지 않은 요리였다. 바다거북 수프를 실제로 맛본 사람들보다 그 맛이며 모양이며 식감에 대한 입소문만 전설처럼 전해 듣고 호기심을 품은 사람이 더 많았다.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닌데도, 한국의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어떤 금기들이 내 머릿속에 제2의 본능처럼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느낄 때면 참 신기하다. 이런 금기를 체득한 데에는 옛날 이야기책들 영향력이 큰 것 같다. 이를테면, 어떤 미국인이 ‘닌자 거북이’ 시리즈에 나오는 도나텔로를 떠올리며 그런 사랑스러운 동물은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나 같은 한국인은 《별주부전》에서 용왕의 심부름을 하던 자라를 떠올리며 그런 영물은 방생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타타르인 웨이터는 커다란 엉덩이 아래로 프록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뛰어가더니 오분 뒤에 후닥닥 돌아왔다. 껍데기 안쪽 진주층이 드러나도록 까놓은 굴 접시를 쟁반에 받쳐 들고 손가락 사이에는 술병을 낀 채였다.
오블론스키는 빳빳하게 풀 먹인 냅킨을 아무렇게나 펴서 한쪽 귀퉁이를 조끼에 꽂은 뒤, 식탁 위에 두 팔을 편한 자세로 올리고는 굴을 기세 좋게 먹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군."
그는 진줏빛 껍데기에 붙은 미끈덩거리는 굴을 은제 포크로 떼어내 하나씩 집어삼키며 되뇌었다.
_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인생에 대한 심오한 진리가 담겼다는 고전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솔직히 인생의 심오한 진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허영심이 충족되는 기쁨이 더 컸다. 나는 톨스토이가 세세하게 펼쳐 보이는 19세기 말 러시아의 화려한 귀족 사회의 면면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숙녀와 신사 들의 무도회, 꽃꽂이처럼 겹겹이 만든 멋들어진 드레스,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세련된 대화와 미세한 긴장의 흐름, 낯설고 진기한 이름의 소품과 가구…… 나는 21세기 한국의 중산층 청년으로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을 호화스러운 삶을 가상 체험하는 데 흠뻑 빠져들었다.

그는 사람들과 맛있는 걸 먹기를 무척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맛있는 것을 베풀기도 좋아한다. 파티를 여는 재주가 뛰어난 오블론스키는 손님에게 어떤 음식을 대접해야 할지, 어떤 화제를 꺼내야 할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감각이 있다.

오블론스키는 시골에서 올라온 오랜 친구 레빈을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서 하얀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 앞 벨벳 의자에 앉아, 굴, 야채 수프, 진한 소스를 끼얹은 가자미, 로스트비프, 사철쑥을 곁들인 닭 요리, 과일 샐러드, 와인과 치즈를 주문한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굴이다. 싱싱한 플렌스부르크산 굴이 준비되어 있다는 웨이터의 말에 오블론스키는 반색하면서 굴이 언제 들어왔냐, 얼마나 싱싱하냐 묻고는, 생굴 스물네 개를 시키려다가 "아니야, 그걸로는 모자랄 것 같아"라면서 서른여섯 개를 시키더니, 나머지 메뉴를 하나하나 세심히 고른다. "테이블 와인은 뉴이로 주게. 아니야, 클래식한 샤블리가 낫겠군. 레빈, 자네는 뭐가 좋겠나?" 술과 음식 종류, 양, 상대방의 기호를 고려하며 고심하는 오블론스키를 보면 그가 다른 일들, 이를테면 정치나 종교나 업무, 부부간의 신의나 재무 관리 등에는 비록 진지하지 않더라도 먹는 문제만큼은 더없이 진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고로 맛있는 음식이란 먹는 것도 즐겁지만 메뉴판을 들여다보면서 하나하나 고르는 과정도 즐거운 법이다. 오블론스키는 그 즐거움을 누리는 데 소홀하지 않다. "뭐니 뭐니 해도 맛있는 것은 인생의 낙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오블론스키는 인생 사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듯 보인다.

메뉴에서 굴을 고른 것도 오블론스키의 인생철학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1870년대 러시아에서 굴은 매우 귀한 음식이었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굴은 바다의 진미로 각광받았고 또 그만큼 비쌌다. 유럽에서는 프랑스를 비롯한 몇몇 서유럽 나라에서 굴을 생산했지만 애호가들의 소비량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했고, 하물며 그게 러시아 같은 먼 나라까지 유통될 때는 값이 더더욱 비싸졌다. 독일의 플렌스부르크 지역의 양식업체에서 생산하는 굴을 모스크바에서, 그것도 신선한 상태로 맛볼 기회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블론스키는 식당에 굴이 입수되었다는 말을 듣고 원래 그가 구상하던 저녁 메뉴 계획을 전면적으로 변경하면서까지 굴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도 서른여섯 개나. 맛있고 귀한 것을 먹을 수 있다면 돈이 아무리 들어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 오블론스키이다.

우리나라야 굴이 워낙 많이 나는 나라여서(오늘날 한국은 전세계 굴 생산량 2위를 달리고 있다) 굴을 국이나 죽, 심지어는 라면에 풍덩풍덩 빠뜨려 먹는가 하면 계란 물을 입혀 전을 부쳐 먹을 정도로 친숙한 식재료로 취급한다. 생굴을 먹을 때조차도 초장의 맵고 시고 단맛으로 굴 본연의 맛을 덮는 걸 아쉬워하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굴이 값비싼 식재료이고, 굴을 보물처럼 조심조심 다루면서 그 맛을 최대한 음미하는 식문화가 발달했다. 얼음 깔린 우아한 쟁반 위에 껍데기를 반만 까놓은 생굴을 늘어놓고 레몬 조각들을 곁들여서, 굴 껍데기 안쪽 무지갯빛 진주층과 탐스러운 우윳빛 속살이 보이게끔 플레이팅해 일단 눈을 즐겁게 한다. 은제 포크로 속살을 껍데기에서 분리한 다음 껍데기째로 입가에 가져가, 그 안에 고인 즙과 함께 속살을 호로록 입 속으로 빨아들이고, 굴을 천천히 씹으면서 그 특유의 식감, 청량한 바다 향, 풍부한 즙의 진한 맛을 음미한다. 때로는 레몬즙이나 토마토 소스, 오일이나 캐비어 등의 양념을 쳐서 하나씩 다른 느낌으로 즐긴다. 그리고 으레 샴페인이나 화이트와인을 마셔 입 안에 남은 향긋한 풍미를 마지막까지 즐기고 비린 맛은 씻어낸다. 그야말로 "어떻게 하면 굴을 맛있게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를 연구한 사람들의 방법 같다. 이런 문화는 오늘날 고층 빌딩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굴을 먹는 호화로운 굴 전문 식당인 오이스터 바oysterbar를 탄생시켰다.

이런 식으로 굴을 먹는 것은 ‘실용’과는 거리가 멀다. 굴 맛이 주는 쾌락에 온 시간과 정성을 집중함으로써 생활인으로서의 기능은 멈추고 있으니까. 그래서 레빈은 오블론스키에게 이렇게 지적한다. "시골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해서 끼니를 빨리 때우려고 해.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오래 먹을 수 있나 궁리하고 있군. 그러려고 굴을 먹는 거고……." 맞는 말이다.

오블론스키가 굴을 먹는 장면이 유난히 방탕해 보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굴이 값비싼 음식이기 때문도, 굴의 물컹한 식감과 껍데기를 입에 가져가는 자세가 에로틱한 연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도, 카사노바가 아침마다 굴을 강장제 삼아 오십 개씩 먹어서 정력을 보충했다는 유명한 일화 때문만도 아니라, 레빈에게 "그게 바로 인간 문명의 목적 아니겠어? 모든 것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것 말이야"라고 받아치는 오블론스키의 쾌락주의적 가치관이 그의 식습관에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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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안녕은 단정하게 - 볼티모어 부고 에세이
매리언 위닉 지음, 박성혜 옮김 / 구픽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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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울컥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울컥했다. 저자가 평생 어떤 형태로든 알아왔던 존재에 대한 부고는 짧고 유머스러운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영문판 하드커버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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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5-21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느낌일지 알것같아요.
끌리네요

라로 2022-05-21 20:14   좋아요 0 | URL
이 책 참 짧은 것 같아요.(전자책이라;;;) 근데 너무 좋았어요. 그 느낌 아실거라고 저도 생각해요!!
 
[eBook] 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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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색한 문장에도 불구하고 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일까? 과학 관련 책을 읽으면서 울다니!! 물리알못인 내가 읽어도 이해가 되게끔 그린은 끝까지 친절하다. 함께 존재하는 모두에게 들려주는 스토리텔링은 진정 영역을 초월한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고 빛나는 지성에 무한한 애정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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