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는 샬롯의 공주처럼 거울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삶’의 편에선 안을 들여다보고, ‘예술’의 편에선 밖을 내다보는 거지요. 하지만 앨리스는 단단하고 눈부신 ‘삶’의 편(여기서 ‘예술’의 편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을 위해 거울을 깨부수고 ‘예술’의 편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어서 ‘삶’의 편에 있던 앨리스가 거울 세계 이야기를 꿈 밖으로 가지고 돌아와 고양이에게 들려주기 시작하지요. 그렇게 적어도 관객 문제를 해결합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바로 앨리스가 거울을 통과하는 순간에 벌어집니다. 바로 그 순간, 똑 닮은 두 존재를 가로막던 유리 장벽이 녹아내리고 앨리스는 이곳도 저곳도, 예술도 삶도,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 존재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 모든 곳에 존재하게도 되지요. 그 순간 시간이 멈추면서 또한 확장되고, 작가와 독자 모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어디에도 쓰일 수 없어야 진정으로 아름답다. 쓸모 있는 모든 것은 욕망의 표현이라 추하며, 인간의 욕망은 그 비루하고 나약한 본성처럼 비열하고 역겹다.
- 테오필 고티에, 《모팽 양》1

‘내가 문학의 제단에 데려온 돈의 뮤즈를 말하는 걸세. 이보게, 그 굴레에 코를 꿰이면 안 되네! 그 끔찍한 옥빛 굴레가 자네 인생을 끌고 다닐 거야!’
- 헨리 제임스, 《대가의 교훈》5

가톨릭 사제가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실재’를 현재라는 시공간으로 모셔오는 것처럼, 예술가는 ‘그리스도의 실재’를 존재케 하는 사제로 여겨졌습니다. 좀 어려운 내용이지요.

작가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헌신해야 할까요?

돈 문제를 꺼내서 좀 천박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세대(대개 아끼는 법밖에 모르긴 하지만)에게 돈 얘기는 더러운 빨래 얘기나 다를 게 없었지요. 하지만 시대가 변해서 이제 더러운 빨래도 돈 받고 파는 상품이, 아니 최첨단 갤러리의 설치품이 되는 세상이 됐으니까요. 그러니 천박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직설적이고 솔직하다고, 실은 존경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이제 돈이 만물의 척도이지 않나요?

엘모어 레너드의 해체적인 할리우드 스릴러 《겟 쇼티》에 인기 영화배우와 에이전트가 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작가를 연못에 사는 하등 동물 취급합니다. "작가들을 보면 팔릴 거란 확신도 없으면서 책을 쓰는 데 몇 년을 허비하잖아요. 왜 그런 짓을 할까요?"라고 영화배우가 묻습니다. 그러자 에이전트가 "돈 때문이지. 대박이 터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라고 대답합니다.6 돈이라는 대답에는 그나마 민주적(모두가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이고 그럴싸하다는 미덕이 있지요. 그렇지 않고 예술Art 운운하며(조금 있다가 경험할 겁니다) 장황하게 얼버무렸다면 고리타분한 거짓말처럼 보였을 겁니다. 물질주의가 판치는 할리우드 아닌가요.

1972년에 오타와 강 계곡을 따라 1인 시 낭독회를 연 적이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서점이 별로 없는 다소 외진 곳이어서 판매 목적으로 시집을 잔뜩 들고서 버스에 올라탔지요(스포츠용품 박람회에서 일한 경험 덕분에 잔돈 바꾸는 건 자신 있었습니다). 한번은 갑작스레 눈보라가 몰아쳐서 썰매에 책을 싣고서 끌고 가기도 했어요. 네 번째로 방문한 작은 마을에서 나는 그들 생에 첫, 아니 이제껏 그곳을 찾은 첫 시인이었습니다. 낭독회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어요. 시나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미 대다수가 그 주의 개봉 영화를 보고 난 뒤였거든요. 내가 그곳에서 받은 최고의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머리가 원래 그래요, 아니면 시술받은 거예요?" "돈은 얼마나 벌어요?" 어떤 질문도 적대적인 의도에서 나온 게 아니었어요. 모두 적절한 질문이었지요.

모든 사람이 여성 시인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머리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돈에 대한 질문은 나를 인간으로, 작가도 몸이 있고 위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준 것이었어요. 작가들도 먹어야 사니까요. 작가 역시 자기 자신의 돈을 가질 수 있죠. 돈과 결혼할 수도 있고요. 아니면 후원자(왕이든, 공작이든, 예술위원회든)를 모집하거나, 따로 직장에 다니거나, 시장에 책을 팔 수도 있죠. 작가에게 이런 돈 문제는 선택입니다. 오직 선택의 문제일 뿐이에요.

작가가 먹는 음식뿐 아니라 그들이 쓰는 글에도 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아요. 그 전형적인 사례가 가여운 월터 스콧이지요. 그는 동업자를 위해 약속어음에 서명을 했다가 회사가 파산하는 바람에 빚을 떠안았습니다. 이런 불운을 겪게 되면 자는 순간은 고사하고 깨어 있을 때도 악몽에 시달리게 되지요. 그리고 꼼짝없이 책상에 매여서 취향도, 작품의 질도 무시하고 활자를 쏟아내야 합니다. 펜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이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인가요.

첫 소설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던 작가가 두 번째 소설을 발표할 때 겪는 일들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 겁니다. 에이전트가 이렇게 한숨을 짓지요. "이게 첫 소설이었으면 팔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여기서의 교훈은 이겁니다. 출판사도 도박을 하지만 기회는 오직 한 번뿐이라는 것. 갈수록 더욱더 그렇지요. 맥스웰 퍼킨스 같은 편집자7가 언젠가 크게 빛을 볼 거라며 두 번, 아니 서너 번씩 손해를 감수하고 묵묵히 작가를 지원해주던 그런 날은 갔습니다. 그나저나 그런 날이 언제였던가요? 요즘 상황은 이렇습니다.

글을 쓰고 이문을 남기는 사람이
살아남아 다른 날 또 글을 쓸 수 있다.8

밥은 먹고 살아야겠는데 신간은 팔리지도 않고 식당에서 서빙도 못하겠다면 문학 보조금이라는 방법도 있습니다. 단, 수천 명이 기다리는 대기줄을 밀어낼 수만 있다면 말이지요. 창의적 글쓰기를 가르치는 교직일도 있지만 역시나 대기줄이 깁니다. 신인이나 기성 작가들을 위한 국제적인 작가 페스티벌도 있는데, 스무 도시를 돌면서 무시무시한 북투어에 참가하는 건 물론이고 신문 인터뷰도 해야 합니다. 이나마도 예전에는 찾아볼 수도 없었지요.

이 모든 게 실패하면 하청을 받아 글을 쓰는 방법도 있습니다. 인터넷에 직접 글을 게시하는 것도 좋아요.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 가명이 있습니다. 그러면 첫 소설이 아님에도 첫 소설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 수 있지요. 저 바깥의 알파벳 세상은 정글입니다. 아니, 기계예요. 톱니바퀴가 톱니바퀴를 잡아먹는 기계 말입니다.

열여섯에 작가가 되었을 때만 해도 내게 돈은 후순위였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일순위가 되었지요.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이 되고 현실을 알게 될수록 불안이 커졌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지?

캐나다 문학에 대한 수요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출판사도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지요. 식민지 정신이 아직 유효할 때였고, 그 말인즉 예술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는 런던, 파리, 뉴욕과 같은 타지이며, 캐나다 작가는 같은 국민들에게 열등함을 넘어 불쌍하고 한심하고 허세스러운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걸 의미했어요.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싶으면 오직 예술이 좋아서 해야 했어요. 글이 돈이 될 거라는 희망이 너무 옅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순간도 내가 글쓰기로, 아니 내가 쓰는 분야의 글로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엔 시장을 위해 신념을 버린다는 게 내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어요. 우선 내가 쓰던 글의 대부분이 시였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수시로 열리는 문학 잔치에서 빵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면 캐나다 밖에서 책을 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외국 출판사를 홀랑 넘어오게 할 만한 글을 써야 했지요. 그렇지만 이 외국 출판사들이 캐나다에 큰 관심이 없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볼테르가 캐나다를 "눈 덮인 좁은 땅"이라며 일축하던 태도가 여전히 공감대를 형성할 때였어요. 그러니 제임스 조이스의 유명한 세 가지 외침, "침묵, 자기 추방, 간교함"10이 캐나다의 작가 지망생들에게 특별한 울림을 줄 수밖에요(특히 자기 추방에 대한 부분이).

컴컴한 다락방에서 허기에 시달리면 비전을 볼 수 있다나요? 하지만 목숨을 부지하려면 최소한 약간의 돈은 있어야 합니다. 물론 물려받은 유산이 있어서 돈 냄새를 맡으려고 두리번거리며 체면을 구길 필요 없는 게 최고이기는 하지만요. 그렇지만 돈을 ‘위해’ 글을 쓰면, 아니 그렇다고 생각만 되어도 매춘 행위로 취급받았지요.

나는 파리의 한 지식인이 조롱 섞인 말투로 다음과 같이 질문하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당신이 ‘베스트셀러’를 쓴다는 게 사실인가요?" "일부러 쓰는 건 아니에요." 나는 수줍은 듯 답하면서도 한편으론 다소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나도 못지않게 익숙한 데다 돈을 잘 번다는 이유로, 또는 잘 못 번다는 이유로 책의 가치를 평가하는 우월의식에는 이미 이골이 났었으니까요. 순수한 야망을 품고 진짜 작가, 진짜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 작가에게 이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루이스 하이드가 자신의 저서 《재능》12에서 분명히 지적하듯이 문학적 가치와 돈을 연결 짓는 모든 방정식은 사과와 오렌지를 들고 저글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재능은 무게를 재서 측정할 수도, 돈을 주고 살 수도 없습니다. 기대하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재능은 주어지는 것이며, 그 외에 다른 식으론 얻지 못합니다. 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존재의 충만함에서 나오는 은총이지요. 재능을 달라고 기도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기도에 꼭 응답을 받는 건 아닙니다. 응답이 보장되면 작가가 슬럼프에 빠지는 일도 없지 않을까요? 소설을 창작할 땐 1할의 영감과 9할의 노력이 필요하다지만, 작품이 예술로서 살아남으려면 그 1할의 영감이 무조건 있어야 합니다(비율은 다르지만 시도 두 가지와 모두 관련이 있지요).

문학적 가치와 돈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돈이 되는 좋은 책, 돈이 되는 나쁜 책, 돈이 안 되는 좋은 책, 돈이 안 되는 나쁜 책. 조합은 이렇게 네 가지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조합이 실현 가능하지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15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요. "아름다움은 진리이고, 진리는 아름다움이다."16 존 키츠의 말입니다. 여기에 삼단논법을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진리가 아름다움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수 있다면, 아름다움이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지지한다, 아니 낭만주의 시대를 정점으로 간헐적으로 지지해왔다, 그러니 온 몸을 바쳐서 미를 숭상해야 한다, 예술보다 아름다움(넓게 해석했을 때)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가다 보면 심지어 도덕적 차원을 외면하는 미학에도 그만의 도덕적 차원이 있다는 결론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완벽한 예술 표현의 추구가 예술가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라면 대체 어떤 목표를 추구해야 하느냐는 것이죠.17

‘예술의 궁전’은 빼어난 항아리와 황금 분수대, 그리스 조각상, 그 밖에 영감을 샘솟게 하는 장식품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건물이지만 영혼은 그곳에서 살 수 없습니다.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든, 인류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은 낮은 계곡에 있으니까요. 따라서 이 시에서 ‘예술의 궁전’은 부정되고 파괴될 게 아니라 인간화되어야 합니다.

있었지요.
이 모든 일을 시대적 맥락에서 살펴볼까요. 당시(1950년대 후반)는 계산대 너머로 피임약을 사는 것도 힘든 시절이었어요. 미혼 여성은 피임약 구매 자체가 불가능했고요. 부엌 식탁이 아니면 낙태도 할 수 없었지요. 헤밍웨이의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을 처음 읽고서 나는 주인공 남녀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짐작도 하지 못했답니다(남녀가 기차역에서 낙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낙태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옮긴이). 여성용 위생용품을 광고할 수도, 그게 뭔지 말로 표현해서도 안 되다 보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초현실주의적인 광고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기억나는 광고가 있는데, 그리스 스타일의 하얀 이브닝 가운을 입은 여자가 대리석 계단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아래로 자막이 나갑니다. "전 모디스예요.(…) 왜냐면 말이죠."(모디스는 생리대 제품이다―옮긴이) ‘그러니까 왜 모디스라는 거지?’ 어린 나로선 답답한 노릇이었지요. 아직도 꿈에서 되풀이되는 질문이랍니다.

예술에서는 의도가 선하다고 미학적으로 점수를 얻지 못합니다. 이교도의 예술의 신은 고약한 별종이거나 우상(가짜 신)일지언정 맡은 일만큼은 훌륭히 해냅니다. 그러니 당신이 갈구하는 것이 예술, 아름다운 예술이라면, 좋든 싫든 이것이 당신이 기도를 바쳐야 할 신인 것이지요.

가장 먼저 희생해야 할 것은 가장 인간적인 부위인 심장입니다. 사제처럼 신을 더욱 완벽하게 섬기려면 인간을 사랑하는 능력을 희생해야 하는 겁니다.

비펜은 "인간은 최선을 다할 뿐"이라며 아이반호 식의 변명을 택하지요.

"오직 아름다운 것들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젊은 시절을 회상했다. 아직 사실주의 예술에 대한 사명감이 그를 짓누르지 않던 그때를."35 아, 이게 피할 수 없는 예술가의 운명이지요.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지만, 소수만이 선택받고, 그중 일부는 순교하고 맙니다.

남성 예술가에게도 이렇게 희생이 요구됐다면 여성 예술가에게는 어땠을까요?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화려하게 수놓아진 주홍글씨 A가 간통녀Adulteress일뿐 아니라, 예술가Artist 또는 작가Author를 의미한다는 의심이 드는 건 왜일까요?

이자크 디네센의 소설을 보면, 젊은 여배우 말리는 연극 〈템페스트〉에서 쇠렌슨 경이 맡은 푸로스퍼로의 상대역 에어리얼을 연기합니다. 말리는 고통스럽지만 예술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지요. "그러면 그 대가로 얻는 게 뭐죠?" 그녀가 쇠렌슨 경에게 일리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그가 답하지요. "세상의 불신과 끔찍한 외로움이지. 그게 다야."36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젊은 여배우 시빌 베인을 볼까요? 이름처럼 어떤 결말을 맞이했나요?37 샬롯의 아가씨(오필리아의 여동생 격이자 노래하며 죽어가는 19세기 여성 예술가의 원형으로, 시빌이 극 중에서 충실히 보여주고 있지요)처럼 그녀는 피와 살이 있는 인간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예술이 아니라 삶에 온 마음을 쏟아붓는 바람에 예술의 신에게 벌을 받아 재능을 잃고 맙니다. "예술이 없는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야." 도리언은 이렇게 말하며 그녀를 버립니다. 공허하고, 메마르고, 텅 비고, 부러진 갈대 같은 가여운 시빌이 그런 일을 당하고 할 수 있는 게 자살 말고 뭐가 있을까요?

배우 사라 베르나르(프랑스 여배우―옮긴이)가 관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서 정확히 핵심을 찔렀지요. 시체애호증과 검은 휘장을 절묘하게 이용한 이미지. 그것이 바로 대중이 원하고 이해하던 여성 예술가의 이미지였어요. 반쯤 죽은 수녀의 모습 말입니다.

내가 시인 지망생이던 1950년대 후반은 이런 희생의 필요성을 자연스레 인정하는 시대였습니다. 일반 직업을 가진 여성도 그랬지만, 예술을 하는 여성에겐 그런 압박이 훨씬 심했지요. 희생을 해야 더 완벽해진다는 이유에서였어요. 아내이면서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예술가가 되는 건 각각이 완전한 헌신을 필요로 하므로 불가능하다고 봤지요.

한쪽에선 사랑과 결혼이, 반대쪽에선 예술이 그녀를 잡아당긴 거지요. 그러니 예술에 빠지는 건 일종의 악마에 빙의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술과 춤을 추다가 죽음으로 내몰릴 수도 있으니까요. 예술은 몸속으로 들어와 나를, 아니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나를 사로잡고 파괴합니다.

꼭 상상력의 수녀가 될 필요는 없었어요. 사제priest의 여성형은 수녀nun이기도 하지만 여사제priestess이기도 하므로 선택이 가능했지요. 그리고 둘은 달랐어요. 기독교에는 여사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사제라고 하면 뭔가 이교도적이고 요란한 느낌이 있잖아요. 수녀는 남자를 멀리하지만 여사제는 그렇지 않죠. 물론 여사제가 남자와 맺는 관계는 흔히 우리가 가정적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요.

우연히 조지 엘리엇의 1876년 소설 《다니엘 데론다》를 만나면서 궁금증은 훨씬 더 커졌습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훌륭한 오페라 가수로, 자신의 두 살 된 다니엘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깁니다. 엄마라는 역할 때문에 예술 활동에 방해받는 게 싫었던 거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추종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에게 짓눌렸던 과거 때문에 냉혹할 뿐 아니라 남자들을 발아래 무릎 꿇리고 그 위에 군림하기를 좋아합니다. 본인은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그녀를 묘사하는 표현을 보면 동의하기 힘들어요. 그녀는 "인간 어머니가 아니라 ‘멜루시나Melusina’"지요. 멜루시나란 반은 여자, 반은 뱀이라는 뜻입니다.40

고통스러워한다는 건 인간적인 면모가 일부 남아 있다는 뜻이지만 그녀의 고통은 아이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예술을 포기했다는 데서 비롯합니다. 노래를 포기하는 것은 그녀의 종교, 예술이란 종교에 대한 배신이며, 고통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벌이지요.

다니엘의 엄마는 마녀라고도 불립니다. 마녀와 팜 파탈femme fatale은 한 끗 차이로, 19세기 말에는 수십 명의 팜 파탈이 무대 위를 어지럽혔어요.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살로메입니다.

1960년에 내가 편집 일을 돕던 대학 문예지에 출품된 여학우들의 시 중에 상당수가 희한하게도 살로메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예술에 발을 들인 바람에 자신들과 정을 통한 운 나쁜 남자들이 파멸을 맞을까봐,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그들의 머리가 접시에 놓인 광경을 보게 될까봐 겁이 났던 것 같아요.

상상력의 수녀와 상상력의 여사제 모두 결국엔 예술의 제단 바닥에서 생을 마감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여사제는 갈 때 혼자 가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나는 공기처럼 남자를 먹는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 〈레이디 나사로〉(원래 나사로는 남자 이름으로, 성경에서 예수가 부활시킨 인물이다―옮긴이)에서 죽음을 거역하면서도 받아들이는 동명의 여인이 마녀처럼 붉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하는 말입니다. 이를 통해 그녀는 이 전통에 자신을 자리매김하죠.

에밀리 디킨슨의 은둔 생활,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고립된 삶,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마약 중독과 거식증, 샬롯 뮤의 자살, 실비아 플라스의 이어진 자살, 앤 섹스턴의 또 이어진 자살. "솟구치는 피는 시다." 실비아 플라스는 목숨을 끊기 10일 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건 없다."45 상상력의 여사제는 결국 바닥의 붉은 웅덩이에서 생을 마감할 운명인 걸까요?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굉장히 직설적으로 다루어졌어요. 여성 시인이 그렇게 묘사되는 일이 너무 많다 보니, 솔직히 처음 얇은 책 두 권을 출판하고 난 뒤 내게 자살을 할 거냐 말거냐가 아니라, 언제 할 거냐고 묻는 이들까지 있었답니다.

목숨을 걸고 할 생각이 없으면, 아니 목숨을 끊을 생각이 없으면 여성 시인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요. 아니 신화가 그렇게 명했어요. 다행히 나는 시와 소설을 같이 썼습니다. 자살을 하는 소설가들도 있지만, 산문에는 균형을 맞춰주는 힘이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어요. 말하자면 접시 위에 고기와 감자는 더 많이 놓이고, 잘린 머리는 더 적게 놓였다고나 할까요.

‘길은 좁고 문은 협소한’ 예술지상주의로 향하는 길에 놓인 ‘절망의 늪’을 피해서, ‘사회적 책임’이라는 다른 길을 택하면 어떻게 될까요?46 공개토론회에라도 회부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토론회가 열리는 곳은 지옥일까요? 하지만 ‘사회적 책임’이라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결국 ‘예술의 궁전’에 놓인 금박 의자에 언어의 덮개를 얹는 정도의 위업은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거야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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