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등장하는 소녀들은 우리에게 또 다른 친구와도 같았다. 우리 생각을 이해해주고, 부당한 일을 겪으면 같이 화를 내주고, 우리가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반항을 대신 해주는 친구들.

아나스타샤는 여러모로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 그 애도 나처럼 도시에서 외동딸로 자랐고(나중에 남동생이 생기긴 하지만), 엄마의 직업이 화가였으며, 책을 즐겨 읽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생에 불만이 많았다.

호박 파이를 두고는 "먹은 걸 토한 듯한 냄새가 난다"며 구역질까지 하는가 하면, 교외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이유로 창밖으로 뛰어내리겠다고도 하고, 엄마가 화가라서 늘 너저분한 차림새로 물감을 묻히고 있는 게 "창피해서 싫다"며 대놓고 불평도 한다.

아나스타샤가 그렇게 강한 혐오의 표현을 쓰는 것과 달리, 싫어하는 마음은 쉽사리 뒤집히곤 한다. 질색하던 호박 파이를 어느 날 갑자기 몇 조각이나 먹어치우는가 하면, 막상 남동생이 태어나자 ‘샘’이라는 예쁜 이름을 붙여주고 애지중지한다.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이 평범하지 않아서 싫다고 하다가도, 그게 러시아 황녀의 이름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에 쏙 든다고 한다. 또 자기 담임선생님을 싫어한다고 믿으면서도 정작 그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고, 교외에 가본 적조차 없으면서도 그곳의 삶이 끔찍할 거라고 무작정 단정한다.

문학이 하는 일도 딱 이런 것 같다. 문학은 지극히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있던 사물들이 본연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오고, 평생 한 가지 용도로 써온 물건에서 갑자기 전혀 몰랐던 용도를 발견한다.

불교도들이 교리를 깨우치기 위해 읽는 불경이,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고 말하는 시 속에서는 서러움이라는 감정의 대명사가 된다.

이제까지 그녀는 드레스를 입어보며 흥분하느라 깜빡 잊고 있었지만, 어멈은 오하라 가의 딸들이 어느 파티에서든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않도록 파티에 가기 전에 집에서 음식을 잔뜩 먹어둬야 한다는 원칙을 철통같이 지키는 사람이었다.
_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알고 있는가?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스칼렛 오하라는 미인이 아니었다"는 글귀로 시작한다는 사실.

당대의 규범에 의하면 여자란 모름지기 어리석고 수동적이고 예민하고 나약한 동물이어야 하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남자에게 의존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극히 영리하고 강단 있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스칼렛은 그 규범을 고분고분 따르려야 따를 수가 없었다. 그녀도 사회 예법과 도덕관을 존중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체질적으로 현실주의자인 건 어쩔 수 없다.

스칼렛 오하라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

스칼렛이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 바로 그녀의 먹성이다. 스칼렛은 정말 잘 먹는다.

여자의 식욕이 왜 숨겨야 할 부끄러운 일인가?

"두고 봐요. 언젠가 나는 무슨 말이든 행동이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테고, 남들이 좋아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어요."

스칼렛은 좋아하는 음식을 아껴 먹기보다는 가장 먼저 먹어치우는 사람이다.

그때만 해도 스칼렛은 꿈에도 몰랐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미래가 닥쳐오리라는 것을.

얼마나 공교로운 일인가. 자신을 내내 억압했던 사회 규범에서 비로소 벗어났지만, 스칼렛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는 오히려 더 큰 짐을 짊어졌다.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예의를 지키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굴욕적으로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혐오하는 남자하고도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해야 한다.

말이든 행동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려면 돈이 있어야만 하는 냉엄한 현실이다.

그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장애물이 나타나면 강인하게 맞서 싸우며 돌파해나간다. 그저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여자가 인간답고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들은 연인이 되기에는 너무 친구처럼 남녀 간의 분별이 없고, 친구라고 하기에는 서로에 대한 소유욕이 지나치게 강하고, 오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격정적이다. 어른들은 그들에게 친구나 연인, 오누이 중 한 가지만 선택해 그에 맞춰 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들은 그 무엇도 되고 싶어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말한다.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그가 나의 기쁨이라서가 아니야. 나 자신도 내게 늘 기쁨이 되어주지 못하는걸. 다만 그는 내 존재 자체로서 내 안에 있는 거야."

아직 애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결혼할 사이와 그렇지 않은 사이가 무엇인지, 여자와 남자가 뭐가 다른지도 잘 모르는 나이에 가능한 유대감이 있다.

사람은 서로를 같다고 여기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다름을, 분별을, 격차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때로 세상은 아이들에게 정말 잔인한 것 같다. 사랑하는 친구를 배신하고 다 같이 비참해질 수밖에 없는 선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셜록 홈스’ 시리즈에는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추리소설이고, 당연하게도 소설 속에 발생한 미스터리한 사건과 그것을 해결하는 탐정 홈스의 추리가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 과정이 재미있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 소설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가장 애정을 두는 부분은 추리가 아니라 그걸 둘러싼 홈스와 왓슨의 소소한 일상이다. 홈스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걸치는 실내복 가운, 아침에 두 사람이 함께 신문을 읽으면서 티격태격 말다툼하는 장면, 하숙집 주인인 허드슨 부인이 차려주는 저녁식사, 그리고 홈스가 수사 중에 런던 지리를 상세히 일러줄 때마다 19세기 말 런던의 골목들과 상점들 하나하나가 내 눈앞에 생생히 되살아나는 듯한 순간들.

홈스와 왓슨 콤비가 해결하는 미스터리가 흥미진진하면 할수록 그 두 사람에게 애착이 생기고, 그들을 좋아할수록 그들의 삶과 세계도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애정이 커질수록 그들이 파헤치는 사건들을 더 많이, 끝없이 보고 싶어진다.

중독적인 ‘훅송’을 들을 때 후렴구가 나오기를 기다리듯이, 나는 "초보적인 추리" "브랜디" "그 바이올린 좀 건네주게"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바로 그 부분이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 이들 이야기가 영원히 계속될 듯하다. 마치 지금도 어디선가 그들의 일상이 반복되고 있을 것만 같고, 또 그러기를 바란다.

깡마른 체격에 냉철하고 검소한 홈스의 이미지만 생각하면 그가 음식을 좋아할 성싶지 않지만, 의외로 홈스는 그 누구보다도 먹성이 좋다. 그는 아침에 늘 빵과 함께 달걀을 두세 개씩 양껏 먹어치우고, 7시에는 반드시 저녁을 먹고 싶어하며, 끼니를 놓치는 걸 싫어한다.

스스로 잘 챙겨 먹을 줄 모르는 듯한 몇몇 알코올의존증 탐정 캐릭터들과 달리, 홈스는 사건 수사에 필요한 두뇌 활동 및 육체 활동을 위해서는 영양분과 에너지를 충분히 섭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아는 듯하다. 게다가 늘 좋은 식사를 차려주는 허드슨 부인을 칭찬하는 것을 잊지 않으며, 손님들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기를 즐기기도 하니 음식을 진정으로 즐기고 식사 예절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음식에 관심 없기로 악명 높은 영국 사람치고는 미식가라 할 만하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 나도 여행을 좋아한다. 내 근거지, 내 일, 쳇바퀴 같은 일상, 번잡스럽고 골치 아픈 생활을 모두 팽개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목적지가 어디든 일단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놓으면 벌써부터 설렌다. 그 설렘만으로도 하루하루를 참아내기가 한결 수월하다. 얼마 뒤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떠난다고, 어딘가 다른 곳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들으며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공항에서, 호텔 프런트에서, 극장 티켓 박스에서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면, 내 이름을 아예 잊고 내가 나였던 것조차 없던 일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을 다니는 일주일 동안, 딱 그동안만이라도 서울에 있는 모두가 나를 잊고 나도 그들 모두를 잊을 수 있다면, 그러면 정말로 홀가분하고 재미있는 여행이 될 텐데.

‘또 다른 나’가 되기란 참 번거로운 일인 것 같다. 사람들은 늘 누군가의 이름, 고향, 가족, 인생 내력을 궁금해하니, 그런 정보들을 매번 새로 지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려면 상상력도 필요할뿐더러 나름 지식도 있어야 하고 부지런도 떨어야 한다. 늘 가명을 쓰고 다른 사람인 척하는 스파이나 범죄자 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플까. 하지만 허크의 단짝 친구이자 문학 소년인 톰 소여라면, 소설책에 나오는 멋진 스파이나 범죄자처럼 살아볼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가끔 우리에게 신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여행 중에 우리 내면에서 너무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어도, 여행에서 돌아오면 우리 그런 변화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본의 아니게 혼자만의 소중한 비밀이 되어버리는 경험 말이다.

"얘들아, 정어리 샌드위치를 한 입 먹고, 돼지고기 파이를 한 입 먹은 다음, 코코아 우유를 한 모금 마셔봐."
패트가 말했다.
"맛이 기가 막혀."
_에니드 블라이튼, 《세인트클레어의 말괄량이 쌍둥이》

밤에는 뭘 먹어도 맛이 두 배가 된다. 친구와 같이 먹으면 네 배가 된다. 하물며 학교 기숙사에서, 불 꺼진 방 안에서, 친구들과 같이, 선생님 몰래, 맛있는 음식들을, 엄청나게 많이 먹는다면? 그건 세상 그 어떤 황제의 수라상에 비할 수 없는 특급 진미라 할 만하다.

정어리 샌드위치를 한 입 먹고, 돼지고기 파이를 한 입 먹은 다음, 코코아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면 맛이 기가 막힌다는 패트 오설리반의 주장은 더더욱 얼토당토않게 들렸다.

6월 17일. 거북 요리를 했다. 몸속에 알이 거의 육십 개나 들어 있었다. 거북 고기는 그때껏 내가 먹어본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는 별미로 느껴졌다. 그 끔찍한 곳에 조난당한 이후로 염소와 새 외의 고기라고는 먹어보질 못했기 때문이다.
_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

‘세계 명작’ 시리즈에 들어가는 소설들은 수백 년을 살아남을 만큼 훌륭한 작품들이지만, 또 그만큼 낡은 부분도 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옛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습관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흔히 먹고 마시고 입고 쓰는 것 중에는 현대에는 찾아보기 힘들어 더더욱 고풍스럽고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것들도 있지만, 사실 그런 물건이나 음식 들이 종적을 감춘 데에는 다 그럴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거북으로 만든 물건이며 음식만 해도 그렇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짐이 아내의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장식하려고 샀던, 거북 등딱지로 만든 보석 박힌 빗은 정말 탐나는 아이템이다. 또한 《톰 소여의 모험》에서 톰이 친구들과 강기슭에서 찾아낸, "서양 호두알보다 약간 작으면서 하얗고 완벽하게 둥근" 거북 알들로 만든 거북 알 프라이가 어떤 맛일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이 당시 미국인들이 이렇게 거북을 가지고 예쁘고 맛있는 것들을 만들기를 지나치게 즐긴 나머지 오늘날 미국의 거북 종 상당수가 멸종 위기에 직면했다. 지금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야생 거북 포획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인간에게 너무 사랑받는 동물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기 십상이다.

바다거북 수프는 여전히 귀하고 비싼, 서민들이 접하기는 쉽지 않은 요리였다. 바다거북 수프를 실제로 맛본 사람들보다 그 맛이며 모양이며 식감에 대한 입소문만 전설처럼 전해 듣고 호기심을 품은 사람이 더 많았다.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닌데도, 한국의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어떤 금기들이 내 머릿속에 제2의 본능처럼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느낄 때면 참 신기하다. 이런 금기를 체득한 데에는 옛날 이야기책들 영향력이 큰 것 같다. 이를테면, 어떤 미국인이 ‘닌자 거북이’ 시리즈에 나오는 도나텔로를 떠올리며 그런 사랑스러운 동물은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나 같은 한국인은 《별주부전》에서 용왕의 심부름을 하던 자라를 떠올리며 그런 영물은 방생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타타르인 웨이터는 커다란 엉덩이 아래로 프록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뛰어가더니 오분 뒤에 후닥닥 돌아왔다. 껍데기 안쪽 진주층이 드러나도록 까놓은 굴 접시를 쟁반에 받쳐 들고 손가락 사이에는 술병을 낀 채였다.
오블론스키는 빳빳하게 풀 먹인 냅킨을 아무렇게나 펴서 한쪽 귀퉁이를 조끼에 꽂은 뒤, 식탁 위에 두 팔을 편한 자세로 올리고는 굴을 기세 좋게 먹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군."
그는 진줏빛 껍데기에 붙은 미끈덩거리는 굴을 은제 포크로 떼어내 하나씩 집어삼키며 되뇌었다.
_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인생에 대한 심오한 진리가 담겼다는 고전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솔직히 인생의 심오한 진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허영심이 충족되는 기쁨이 더 컸다. 나는 톨스토이가 세세하게 펼쳐 보이는 19세기 말 러시아의 화려한 귀족 사회의 면면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숙녀와 신사 들의 무도회, 꽃꽂이처럼 겹겹이 만든 멋들어진 드레스,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세련된 대화와 미세한 긴장의 흐름, 낯설고 진기한 이름의 소품과 가구…… 나는 21세기 한국의 중산층 청년으로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을 호화스러운 삶을 가상 체험하는 데 흠뻑 빠져들었다.

그는 사람들과 맛있는 걸 먹기를 무척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맛있는 것을 베풀기도 좋아한다. 파티를 여는 재주가 뛰어난 오블론스키는 손님에게 어떤 음식을 대접해야 할지, 어떤 화제를 꺼내야 할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감각이 있다.

오블론스키는 시골에서 올라온 오랜 친구 레빈을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서 하얀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 앞 벨벳 의자에 앉아, 굴, 야채 수프, 진한 소스를 끼얹은 가자미, 로스트비프, 사철쑥을 곁들인 닭 요리, 과일 샐러드, 와인과 치즈를 주문한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굴이다. 싱싱한 플렌스부르크산 굴이 준비되어 있다는 웨이터의 말에 오블론스키는 반색하면서 굴이 언제 들어왔냐, 얼마나 싱싱하냐 묻고는, 생굴 스물네 개를 시키려다가 "아니야, 그걸로는 모자랄 것 같아"라면서 서른여섯 개를 시키더니, 나머지 메뉴를 하나하나 세심히 고른다. "테이블 와인은 뉴이로 주게. 아니야, 클래식한 샤블리가 낫겠군. 레빈, 자네는 뭐가 좋겠나?" 술과 음식 종류, 양, 상대방의 기호를 고려하며 고심하는 오블론스키를 보면 그가 다른 일들, 이를테면 정치나 종교나 업무, 부부간의 신의나 재무 관리 등에는 비록 진지하지 않더라도 먹는 문제만큼은 더없이 진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고로 맛있는 음식이란 먹는 것도 즐겁지만 메뉴판을 들여다보면서 하나하나 고르는 과정도 즐거운 법이다. 오블론스키는 그 즐거움을 누리는 데 소홀하지 않다. "뭐니 뭐니 해도 맛있는 것은 인생의 낙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오블론스키는 인생 사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듯 보인다.

메뉴에서 굴을 고른 것도 오블론스키의 인생철학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1870년대 러시아에서 굴은 매우 귀한 음식이었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굴은 바다의 진미로 각광받았고 또 그만큼 비쌌다. 유럽에서는 프랑스를 비롯한 몇몇 서유럽 나라에서 굴을 생산했지만 애호가들의 소비량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했고, 하물며 그게 러시아 같은 먼 나라까지 유통될 때는 값이 더더욱 비싸졌다. 독일의 플렌스부르크 지역의 양식업체에서 생산하는 굴을 모스크바에서, 그것도 신선한 상태로 맛볼 기회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블론스키는 식당에 굴이 입수되었다는 말을 듣고 원래 그가 구상하던 저녁 메뉴 계획을 전면적으로 변경하면서까지 굴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도 서른여섯 개나. 맛있고 귀한 것을 먹을 수 있다면 돈이 아무리 들어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 오블론스키이다.

우리나라야 굴이 워낙 많이 나는 나라여서(오늘날 한국은 전세계 굴 생산량 2위를 달리고 있다) 굴을 국이나 죽, 심지어는 라면에 풍덩풍덩 빠뜨려 먹는가 하면 계란 물을 입혀 전을 부쳐 먹을 정도로 친숙한 식재료로 취급한다. 생굴을 먹을 때조차도 초장의 맵고 시고 단맛으로 굴 본연의 맛을 덮는 걸 아쉬워하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굴이 값비싼 식재료이고, 굴을 보물처럼 조심조심 다루면서 그 맛을 최대한 음미하는 식문화가 발달했다. 얼음 깔린 우아한 쟁반 위에 껍데기를 반만 까놓은 생굴을 늘어놓고 레몬 조각들을 곁들여서, 굴 껍데기 안쪽 무지갯빛 진주층과 탐스러운 우윳빛 속살이 보이게끔 플레이팅해 일단 눈을 즐겁게 한다. 은제 포크로 속살을 껍데기에서 분리한 다음 껍데기째로 입가에 가져가, 그 안에 고인 즙과 함께 속살을 호로록 입 속으로 빨아들이고, 굴을 천천히 씹으면서 그 특유의 식감, 청량한 바다 향, 풍부한 즙의 진한 맛을 음미한다. 때로는 레몬즙이나 토마토 소스, 오일이나 캐비어 등의 양념을 쳐서 하나씩 다른 느낌으로 즐긴다. 그리고 으레 샴페인이나 화이트와인을 마셔 입 안에 남은 향긋한 풍미를 마지막까지 즐기고 비린 맛은 씻어낸다. 그야말로 "어떻게 하면 굴을 맛있게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를 연구한 사람들의 방법 같다. 이런 문화는 오늘날 고층 빌딩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굴을 먹는 호화로운 굴 전문 식당인 오이스터 바oysterbar를 탄생시켰다.

이런 식으로 굴을 먹는 것은 ‘실용’과는 거리가 멀다. 굴 맛이 주는 쾌락에 온 시간과 정성을 집중함으로써 생활인으로서의 기능은 멈추고 있으니까. 그래서 레빈은 오블론스키에게 이렇게 지적한다. "시골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해서 끼니를 빨리 때우려고 해.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오래 먹을 수 있나 궁리하고 있군. 그러려고 굴을 먹는 거고……." 맞는 말이다.

오블론스키가 굴을 먹는 장면이 유난히 방탕해 보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굴이 값비싼 음식이기 때문도, 굴의 물컹한 식감과 껍데기를 입에 가져가는 자세가 에로틱한 연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도, 카사노바가 아침마다 굴을 강장제 삼아 오십 개씩 먹어서 정력을 보충했다는 유명한 일화 때문만도 아니라, 레빈에게 "그게 바로 인간 문명의 목적 아니겠어? 모든 것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것 말이야"라고 받아치는 오블론스키의 쾌락주의적 가치관이 그의 식습관에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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