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나의 공간으로 불러들여서, 내가 잘하고 또 좋아하는 것들로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 오로지 그것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쏟는 일.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일단 제대로 손님치레를 하자면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사람들에게 연락해 날짜를 잡고 음식 재료를 장만하고 집 안을 정돈하는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당일에는 요리를 하고 식사를 내면서 동시에 손님들을 챙기고 대화를 이끄는 멀티태스킹을 해야 하고, 손님들이 떠나면 뒷정리도 남아 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도와준다면 고맙겠지만 결국 집주인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일거리를 감수하고서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시간을 선사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뿌듯한 행복감이 있다. 더없이 이타적인 마음에서 비롯되는 행복 말이다.

파티의 호스트 노릇에는 재능도 필요하다. 초대객 명단을 짤 때에는 사람들 사이의 궁합을 고려해야 하고, 집 안을 꾸미고 테이블을 세팅하는 데에는 미적 감각이 필요하며, 음악이나 보드게임 같은 오락거리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면 풍류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 메뉴를 고르고 음식 준비를 할 때는 미식가로서의 자질은 물론이거니와 손님들이 무엇을 못 먹고 무엇을 잘 먹는지, 얼마나 많은 양이 필요할지, 한정된 예산에서 얼마나 좋은 재료를 장만할 수 있을지도 두루두루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이 정도면 종합 예술의 경지라 할 만하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잘할 수 있는 일은 분명 아니다.

오늘날에는 바닷가재, 그러니까 랍스터가 고급 식재료에 속하지만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극빈층이나 교도소에서나 먹는 음식으로 취급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사추세츠 주와 메인 주의 바다에서는 바닷가재가 널리다 못해 해안가에 떠밀려 와 무릎 높이까지 쌓일 정도였다. 사람들은 아무리 맛이 좋아도 흔하고 값싼 음식에는 그다지 열광하지 않는 법이다.

에이미 같은 세련된 아가씨가 커다랗고 시뻘건 바닷가재를 담은 바구니를 팔꿈치에 끼고 시장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은, 우리 시대로 치자면 루부탱 구두를 신고 머리를 곱게 드라이한 아가씨가 김치 통이나 간고등어가 든 검정 봉지를 들고 버스를 타는 모습 같은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사실 식사 초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그런 마음가짐일 것이다. 단 한 명의 손님이라도 반갑게 맞이하고 성의껏 대접하는 것.

사흘째 빨지 못한 식탁보가 덮인 둥근 식탁 앞에 앉아 저녁을 먹으려 할 때 맞은편의 남편이 수프 그릇의 뚜껑을 열고는 반색하며 "아, 맛있는 포토푀! 이만큼 좋은 것도 없지"라고 말할 때면, 그녀는 고급스러운 만찬, 반짝거리는 은식기들, 고대의 인물들과 요정의 숲 한복판을 날아다니는 기기묘묘한 새들이 수놓인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벽을 떠올렸으며, 또 멋들어진 접시에 올려진 풍미 가득한 요리와, 송어의 분홍빛 살점이나 뇌조의 날개 부위를 먹으며 스핑크스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에게 남자들이 속삭이는 신사적인 말들을 상상하기도 했다.
_기 드 모파상, <목걸이>

세상에는 허영심을 품은 여자가 벌을 받아 비참해지는 내용의 소설이 많은 것 같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여자의 허영심을 죄악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 드 모파상의 <목걸이>도 그런 소설이다.

허영이란 무엇일까?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 지식이나 경제적 능력, 분수에 어울리지 않게 겉만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라고 나온다.

공부를 하지도 않았으면서 지적인 사람인 척하거나,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호화로운 생활만 추구한다면 확실히 꼴불견이긴 하겠다.

분수는 자신의 신분에 따르는 한계를 뜻한다. 분수에 맞게 살라는 말은, 자신의 노력과 무관하게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는 지위에 만족할 줄 알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 걸까?

부유하고 지체 높은 남자와 결혼하면 부유하고 지체 높은 여자로 살 수 있고, 가난한 하류층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덩달아 가난한 하층민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떤 남자와 결혼하느냐는 으레 여자가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간혹 가게에서 속옷 파는 여자가 멋진 신사와 결혼한다든지, 하녀가 자기가 모시는 주인 나리와 결혼한다든지 하는 이례적인 일도 벌어졌지만 그런 파격적인 신분 상승은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여자들은 타고난 자질, 취향, 노력으로 얻은 지식이나 능력과 무관하게 그저 남자들에 의해 인생 행로를 결정당했던 것이다.
사람으로서 그런 ‘분수’에 어떻게 만족할 수 있겠는가.

능력 없는 남자가 아름답고 우아한 아내를 얻었는데 운 좋게도 그 아내가 자기 가치를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별 불만 없이 남편이 주는 것들이 전부인 줄 알고 산다면, 그 남자는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아름답고 우아한 아내가 어느 정도의 욕망과 상식과 자의식과 의사 표현 능력을 갖추었다면 남자는 불행해진다.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하루하루 실감하며 살아야 하니까.

학교에서는 흔히 <목걸이>를 청소년 권장 소설로 적극 추천한다. 허영심이 불러온 파국을 보여주고 "인생의 참된 가치"에 대한 교훈을 주기 때문이라나. 헛된 것에 집착하지 말고 인생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추구하라는 경각심을 일깨운다고 하는데, 글쎄, 그래서 <목걸이>에서 말하는 인생의 참된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노동의 소중함? 겸손의 미덕? 포토푀 한 냄비의 행복?
내가 보기에 <목걸이>에서 그런 긍정적인 가치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소설에 어떤 교훈이랄 게 있다면, 그건 "인생은 시궁창"이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부당한 처지에 순종하지 않으면 더욱 부당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는 메시지 말이다.

한 시간이 지나 미약스는 순록 스튜를 완성했다.
"드디어 다 됐네!"
미약스는 맛있는 고기를 한입 베어 물고 육즙을 빨아 먹은 다음, 한참을 씹은 뒤에야 삼켰다.
_진 크레이그헤드 조지, 《줄리와 늑대》

여자아이가 가족을 잃거나 가출해서 미아가 되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많다. 하지만 이 여자아이가 헤매는 곳은 뉴욕이나 런던,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이 아니라 저 신비의 땅 툰드라이다.

모든 동물의 죽음이 얼마나 존귀한지 알기에 그 삶도 경건히 기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약스는 이 진실을 늑대들을 통해 배운다. 늑대들의 보호와 가르침 속에서 성장한 미약스는 마침내 오롯이 혼자 힘으로 음식을 구하고, 옷을 지어 입고, 집을 짓고 살 줄 아는 한 명의 인간이 된다.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강인한 인간.

한식에서 흔히 장맛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듯이, 이누이트들은 "훌륭한 요리사는 질 좋은 바다표범 기름을 쓴다"고 말하기도 한다.

책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은 칭찬을 받을 때도 있지만 수난을 당할 때도 많은 것 같다. 요즘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여자애가 너무 똑똑하면 못쓴다든지, 책 좀 읽었답시고 잘난 척하지 말라든지, 여자애가 공부 따위 해봤자 뭐에 써먹느냐고 하는 어른이 아주 많았다. 설령 그렇게까지 대놓고 타박하지 않더라도 여자아이들의 지적 호기심이나 성취는 마치 존재하지 않거나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런 경험이 있는 여자아이라면 《마틸다》를 보며 "이건 내 이야기야!"라고 느낄 것이다.

마틸다는 어린 독서가들의 심정과 사고방식을 거의 완벽하게 대변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어렸을 때 나는 종종 내 수준에는 너무 어려운 책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곤 했는데, 마틸다도 꼭 그렇다. 그녀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탐독하고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지만 그래도 이 책이 마음에 들어요. 헤밍웨이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꼭 그 사건을 그곳에서 직접 보고 있는 것만 같아요"라고 소감을 밝힌다. 반드시 책 속 모든 문장을 이해하지 않더라도 감동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는 단어와 문장 들이 다가와 낯선 세상을 펼쳐 보이는 신비를 마틸다는 정확히 알고 있다.

또한 책 한 권과 따뜻한 음료를 가지고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낼 때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마틸다는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자기 방에 혼자 틀어박혀 책을 읽는 오후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럴 때면 핫초콜릿이나 코코아 믹스, 보브릴(소고기 추출물을 뜨거운 물에 타 먹는 영국식 인스턴트 음료) 한 잔을 타서 옆에 두고 마시곤 한다. 아쉽게도 마틸다는 아직 어려서 부엌 안의 물건들이 손에 닿지 않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맛있는 걸 만들 수는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날의 책이나 기분에 따라 적합한 음식도 준비했을 것이다.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좋아하는 음료를 마시는 것도 참 좋지만,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건 더더욱 좋으니까. 맛있는 음식은 책의 재미를 돋워주고, 재미있는 책은 음식의 맛을 돋워주는 법이다.

책장을 넘기고, 포크를 입에 가져가고, 입에 든 맛있는 것을 삼키는 동작을 반복하노라면, 그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세계 안에서 언제까지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을 두 가지 꼽자면, 부엌에서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꺼내 먹고 요리할 수 있다는 것과 식사하면서 어떤 책이든 내 마음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어른들이 못 먹게 했던 커피나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내 입맛대로 만든 크림소스 파스타를 먹으며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밀가루와 지방이 듬뿍 든 냉동식품도, 뭐, 먹으라거나 먹지 말라거나 강요하는 사람이 없으니 얼마든지 내키는 대로 먹을 수도 있다. ‘TV 저녁식사’도 그 구색으로 보나 간편함으로 보나 책을 읽으면서 먹기엔 참 좋은 메뉴일 것 같다.

《마틸다》의 결말에서 부모를 떠나 새로운 삶을 꾸린 마틸다가 ‘독서 저녁식사’를 먹으면서 행복하게 살았겠거니 상상하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여자애가 책 따위 읽어서 뭐 하냐는 말을 듣고 자란 여자들이 어른이 되어 좋아하는 책을 실컷 사 읽으며 맛있는 걸 먹는다고 생각하면 또 그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다. 지금 나는 좋아하는 일본식 오픈 키친 레스토랑에서 꽁치 알리오 올리오와 맥주를 즐기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이 잔으로 수많은 ‘마틸다’의 작은 승리에 축배를 들겠다. 여러분도 나와 함께 건배하자. 우연찮게 우리가 지금 이 한 권의 책 앞에 모였으니 말이다.

호텔’.
‘로터스lotus’는 ‘연꽃’이라는 뜻이다. 연꽃의 열매인 연밥을 먹으면 모든 걱정 근심을 잊고 행복한 몽상에 빠진다는 전설이 있다. 《오디세이》에서 바다를 표류하던 오디세우스 일행은 연밥이 주식인 어느 해안 나라에 당도하는데, 그곳 주민들이 대접한 연밥을 먹고는 본래 목표를 깡그리 잊고 그곳에 눌러앉아 허송세월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떠나고 싶지 않다고 버티는 일행을 오디세우스가 억지로 끌어내 배에 태우고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이 그 에피소드의 줄거리이다.

그녀는 호화 여객선, 폴린스키 백작, 바덴바덴이나 칸 같은 휴양지에 대해 막연히 책이나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서, 정말로 귀부인이 된 것처럼 패링턴 씨와 우아하게 담소를 나눈다.

<아르카디아의 단기 투숙객들>은 내용을 다 알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기분 좋은 소설이다. 다가오는 여름 휴가에는 이 단편이 포함된 오 헨리 선집을 들고 어딘가 멋진 호텔에서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며 마담 보몽처럼 설레는 우연이 찾아오기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여행지에서 마음에 쏙 드는 데이트 상대를 만나기란, 더구나 그 상대와의 로맨틱한 만남이 여행이 끝난 뒤에도 이어지기란 정말 흔치 않은 기적 같은 일이지만, 설령 그런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다 해도 이 책과 함께라면 많이 아쉽지는 않을 것이다.

claret’는 원래 영국에서 프랑스의 보르도산 와인을 뜻하는 단어였지만,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쌉싸름하고 짙은 빛깔의 레드와인을 통틀어 클라레라고 불렀다.

19세기에 클라레 컵을 만들 때는 흔히 음료 위에 보리지borage 꽃을 장식으로 띄웠다. 예쁜 푸른 빛깔과 산뜻한 맛과 향 때문에 와인을 넣은 펀치와 잘 어울려 19세기의 바텐더들에게 사랑받은 꽃이었다. 우울을 날려주는 효과도 있다고 하니 한여름 밤의 꿈같은 데이트에 근심 걱정을 잊게 할 ‘연밥’으로 손색이 없겠다. 국내에서 보리지 꽃은 다른 식용 꽃에 비해 귀한 편이지만 인터넷을 통해 구할 수 있으니, 꿈결 같은 고풍스러운 클라레 컵을 만들고 싶다면 한 번쯤 시도해볼 수 있겠다.

나무딸기 주스
{ Raspberry Cordial }





다이애나는 자기 잔에 주스를 따르고는 그 새빨간 빛깔을 바라보며 감탄하더니,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셨다.
"대단히 맛있는 나무딸기 주스네요, 앤. 나무딸기 주스가 이렇게 맛있는 줄은 몰랐어요."
"좋아해주시니 저도 무척 기쁘네요. 마음껏 드세요. 저는 잠깐 부엌에 불 좀 살피고 올게요. 집을 돌보려면 신경 써야 할 일이 참 많아요, 그렇죠?"
앤이 부엌에 다녀오니 다이애나는 주스를 두 잔째 마시고 있었다. 한 잔 더 마시라고 권하자 다이애나는 사양하지 않고 또다시 잔에 넘칠 듯 그득히 주스를 따랐다.
_루시 모드 몽고메리, 《빨간 머리 앤》

내가 어렸을 때 접하던 아동용 소설책에는 아이들이 술이나 성을 탐하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서로 속이거나 쌈박질하거나 무언가 훔치는 장면은 나와도, 어른들만의 쾌락을 아이들이 탐하는 장면은 암묵적인 금기였던 것이다.

집에 놀러 온 다이애나에게 나무딸기 주스, 즉 라즈베리 코디얼raspberrycordial을 대접하려다 그만 혼동해서 커런트 와인currantwine을 먹이고 만 것이다.

라즈베리 코디얼과 커런트 와인은 우리나라로 치면 오디즙과 복분자주 정도가 될 것이다. 둘 다 빨갛고 진한 액체이고 향도 새콤달콤하니, 알코올 특유의 맛을 경험한 적이 없는 아이들로서는 구분하기 어려울 수밖에.

우리는 누군가 능력 있는 사람이 짠 하고 나타나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해결해주기를 바라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항상 그만큼의 불편함이 따른다. 그 사람에게 너무 큰 빚을 졌다는 심리적 부담감 때문에 껄끄러워지기도 하고, 심지어 그 사람이 미워지기도 한다. 게다가 주디처럼 삶 전체를 누군가의 도움에 의탁하면 그 사람 말을 거역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도 문제이다.

신데렐라를 가난과 학대에서 구해준 백마 탄 왕자님은 상상 속에서는 완벽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구해준 대가로 잠자리를 청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밥을 차려달라거나 애를 낳아달라거나 시집살이를 요구할 테니까. 우리를 도와준 사람을 사랑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더구나 도움을 줬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라는 보장도 없기에 더욱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키다리 아저씨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 그가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과연 레몬 젤리 위에 사람이 뜰 수 있을까? 젤리 밀도가 사람 밀도보다 높으면 가능하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인체의 밀도는 물과 비슷한 세제곱센티미터당 1그램 정도이다. 보통 사람 몸은 물보다 밀도가 약간 낮고, 숨을 들이쉬면 몸 부피가 늘어나 밀도가 더욱 줄어들기 때문에 수면 위에 뜰 수 있다. 그러면 젤리는? 미국 슈퍼마켓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컵 젤리인 ‘프루젤’ 밀도는 세제곱센티미터당 0.16그램이라고 한다. 그러니 주디의 예측대로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선수라도 가라앉을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젤리를 더 뻑뻑하게 만든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흔해도 우리나라에는 흔치 않은 과일의 경우 부를 말이 마땅치 않을 때가 있다. 예컨대 각종 베리류, 즉 크랜베리, 블루베리, 링곤베리, 블랙베리, 라즈베리, 구스베리처럼.
물론 한국어로 번역할 것 없이 그냥 링곤베리나 구스베리라고 번역하면 간편하기야 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쉽게 가다 보면 책에 한국어는 토씨만 남고 온통 영어 표현이 가득한 ‘보그체’가 펼쳐질 것이다("우리는 링곤베리를 따 모은 바스켓을 들고 코티지에 들어가서 런치를 즐겼어요" 같은 문장으로 가득한 책을 상상해보길). 그런 사태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도 번역가의 일이고, 이 일에는 정답이 없기에 더욱 어렵다.

외국 문물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속도보다 번역어가 생기는 속도가 더뎌서 생기는 우스꽝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아, 이렇게 헷갈리게 하지 말고 그냥 크랜베리, 블루베리, 링곤베리, 블랙베리, 라즈베리, 구스베리라고 쓰란 말이야!" 하고 소리치고 싶다. 그런데 정말 그래도 될까? 적절한 번역어를 고민하지 않는 것은 번역가로서 직무 태만이 아닐까? 애초에 이런 혼란이 빚어진 원인도 나 같은 번역가들이 번역어를 정립하는 데 소홀한 탓이라고 생각하면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아동 학대가 끔찍한 이유 중 하나는 아이에게 방어할 능력이 전혀 없으며 가해자는 그 사실을 알고 학대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물리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무방비하다. 그래서 너는 못된 아이라고, 네 몸속에 악마가 들어 있다고, 너는 맞아도 싼 쓰레기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정말로 그런 줄 안다. 자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고, 어른들을 괴롭히는 나쁜 아이이고, 어른들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런 아이들은 으레 어른들의 고달픈 생활과 슬픔을 헤아리려고 노력하고 어른들이나 할 법한 걱정을 하곤 한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를 두고 조숙하다고 말한다. 칭찬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제제와 마찬가지로 뽀르뚜가를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하고 돈 많은 어른. 나를 따뜻하게 달래주고, 맛있는 것을 사주고, 커피에 빵을 적셔 먹는 법을 알려주고, 영화관에 데려가주고, 내가 얼마나 착하고 똑똑한 아이인지 알아주고, 친구처럼 대해주고, 아낌없이 사랑해주는 어른. 이런 어른이 곁에 있으면 세상을 비관하지 않을 수 있다.

환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현실에 머물러 있기 위한 절박한 방법이다. 그 방법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더 이상 현실을 긍정할 수 없다. 현실에서 긍정할 요소가 아무것도 없음을, 처음부터 그런 건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팬케이크나 미국 남부식 비스킷을 만들 때 신 버터밀크를 반죽에 넣으면 포슬포슬하니 먹기 좋은 식감과 특유의 감칠맛을 낸다. 또한 고기의 연육 작용을 돕기도 하고, 치킨이나 돼지고기와 궁합이 잘 맞는다. 하지만 어린이 세계 명작 소설 속 아이들처럼 벌컥벌컥 마셨다가는 아마 실망할 것이다.

예쁜 것을 가리키는 말은 그 말 자체도 예쁜 것 같다. 장미꽃이 예쁘듯이 장미꽃이라는 말도 발음부터가 예쁘게 들린다. 마찬가지로, 맛있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는 입 안에서 굴려보면 볼수록 좋은 맛이 나는 것 같고, 향긋한 것을 가리키는 단어는 활자에서도 향내가 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단어들이 놓인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별 내용이 없어도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천일야화》, 즉 《아라비안 나이트》가 유럽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은 향신료를 비롯한 동방 문물이 서양으로 흘러 들어간 과정과 유사하다. 본래 인도와 페르시아의 설화 이백여 편을 모은 페르시아 설화집이었던 것이 아라비아로 전해지면서 아랍 설화들이 덧붙여졌고,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를 거치면서 또 다른 설화들이 속속 추가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천한 편의 이야기가 담긴 기나긴 설화집이 만들어진 것이다. 비단길을 따라 동에서 서로 흘러가면서 점점 더 인기를 얻은 것은 향신료와 마찬가지이지만, 《천일야화》는 이야기이기에 향신료처럼 닳지 않았다. 희귀해지지도, 비싸지지도, 독점당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한 생명력을 얻고 더욱 널리 퍼져나갔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른스러운 어른이란, 그렇게 권태로운 태도로 고급 레스토랑 테이블에 앉아(아이들은 마음대로 시킬 수 없는) 값비싼 요리를 주문하고, 종업원에게서(아이들은 받을 수 없는) 깍듯한 대접을 받고, 반짝거리는 만년필로 무언가 복잡한 문서에(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서명도 하고, 카드가 꽉 찬 지갑을 꺼내서 계산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자라면 그런 모습이 되리라고 상상했다(가난한 어른?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성인이 되면 돈과 힘이 생기고 존경을 받으니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동경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거쳐야 하는 온갖 인생 곡절, 그 경험에서 비롯된 슬프고 피곤한 표정마저도 멋있어 보였다.

어린아이의 철없는 결정이었을까? 글쎄, 나는 어른 중에도 이런 거래에 응할 사람은 수두룩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가난은 무서운 것이니까. 가난은 영혼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사람을 내몬다.
그래서 팀은 마악 남작이 내민 계약서에 서명을 한다. 초능력은 마악 남작의 약속대로 효력을 발휘했고, 그날부터 곧장 팀은 경마에서 승승장구해 떼돈을 벌어들였다. 그 돈으로 원하던 것은 모두 이루었다.

독일에서 흔히 먹는 케이크이다. 크림이 든 달콤한 발효빵에 꿀로 조린 아몬드 토핑이 얹혀 있다. 비넨슈티히는 ‘벌에 쏘임’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벌침 케이크bee sting cake’라고도 한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도 꿀 아몬드 토핑 때문이겠지만, 관련된 전설도 남아 있다. 15세기에 어느 독일 마을이 이웃 마을의 침공을 당하자 마을 제빵사들이 벌집을 마구 던져서 적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그 승전을 자축하려고 제빵사들이 만든 케이크가 바로 비넨슈티히였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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