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내게 시는 그림이었다.

Before man came to blow it right
The wind once blew itself untaught,
And did its loudest day and night
In any rough place where it caught.

Man came to tell it what was wrong:
It hadn’t found the place to blow;
It blew too hard ? the aim was song.
And listen ? how it ought to go!

He took a little in his mouth,
And held it long enough for north
To be converted into south,
And then by measure blew it forth.

By measure. It was word and note,
The wind the wind had meant to be ?
A little through the lips and throat.
The aim was song ? the wind could see.

인간이 바람을 제대로 불게 하기 전에
한때 바람은 제멋대로 불었다.
밤낮으로 가장 큰 소리를 내며
바람이 처한 어떤 험한 곳에서든.

인간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하기 위해 왔다.
제대로 불 장소를 찾지 못했구나.
너무 세게 불었어 ? 목표는 노래잖아
들어라, 이렇게 하는 거다!

그는 바람을 조금 입에 넣고
북향이 남향으로 변할 만큼
충분히 길게 머금고 있다가
리듬에 맞춰 계속 불어 내었다.

박자에 맞추니, 그건 단어와 음표였다.
바람이 의도한 그 바람 ?
아주 약간 입술과 목을 통해.
목표는 노래였다 ? 바람은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말 번역은 당시 수업 내용을 참고해 직접 했다.)

「The Aim Was Song(목표는 노래)」을 배운 후로는 달라졌다. 인간이 자연에 강약을 주어 시를 만들어낸 것이라며 시의 기원을 아름답게 빚어낸 이 시를 알게 된 후, 프로스트는 시가 왜 노래인지 알려준 시인으로 마음속에 남게 되었다.

나는 꼬맹이 적 아버지가 그려준 회화적 세계를 딛고 음악적 세계로 한 발짝 움직이게 되었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일군 성장이었다.

때론 인정욕구가 한 사람의 중요한 시기를 좌우하기도 한다. 나의 대학 시절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로 점철돼 있었다.

사랑받는 딸이었지만 스스럼 없는 부녀관계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칭찬에 인색했고 평가에 냉정했다. 영민한 딸이 교만해질까 두려워 일부러 엄격하게 굴었다는데 나는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밀쳐 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운이 좋았어. 내가 대학원을 마칠 때쯤 국내에 대학이 많이 생겼거든. 그런데 네게도 나만큼 운이 따르리라는 보장은 없다. 서른 넘어서까지 밥벌이를 못한다는 게 어떤 건 줄 아니? 네 마음이 먼저 괴로워서 못 견딜 거다."

모범생답게,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일단 공부를 잘하면, 열심히 하면, 좋은 성적을 받으면, 그래서 내가 학자의 길을 가기에 적합한 자질을 가졌다는 걸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면, 그러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마지막 공부일지도 모르니까, 소중한 순간이니까, 한 시간이라도 허투루 쓰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자고…….

강의실과 집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공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에 늘 수강 가능 학점을 꽉꽉 채워 들었고, 계절학기도 들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세상을 멸망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짚었던 ‘욕망(desire)’이 나의 대학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 욕망 때문에 너무나 괴로웠는데, 지금은 덤덤하다. 시간은 많은 것을 치유한다.

‘영시의 이해’ 수업을 들을 때 가장 알고 싶었던 시인은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였다. 「애너벨 리」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였다

황동규 선생님은 그 대신 에밀리 디킨슨(1830~1886)과 실비아 플라스(1932~1963)를 힘주어 가르쳤다. 그는 예민한 여성의 비범한 예술성을 귀히 여겼다.

임신한 자신을 일컬어 그저 ‘수단(means)’이자 ‘새끼 밴 암소(a cow in calf)’라며 자조하는 실비아 플라스의 「메타포(Metaphors)」를 가르치며 그는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예민하고 똑똑한 여자가 임신한 자신의 몸을 긍정하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아시아계 여성 역할을 슬프도록 현실적으로 그려낸 샌드라 오는 드라마 초반에 "나는 어떻게 아시아 여자가 에밀리 디킨슨을 가르칠 수 있냐는 말도 들었다."며 분개하는데, 나는 그에게 "아시아 남자도 에밀리 디킨슨을 잘만 가르치더라."는 말을 들려주며 위로하고 싶었다.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
That perches in the soul ?
And sings the tune without the words ?
And never stops ? at all ?

And sweetest ? in the Gale ? is heard ?
And sore must be the storm ?
That could abash the little Bird
That kept so many warm ?

I’ve heard it in the chillest land ?
And on the strangest Sea ?
Yet ? never ? in Extremity,
It asked a crumb ? of me.

희망은 날개 달린 것 ?
영혼의 횃대에 내려앉아
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며 ?
결코 ? 멈추지 않네 ?

돌풍 속에서도 가장 달콤한 노래 들려왔지 ?
그렇게 많은 이를 따뜻이 감싸준 ?
그 작은 새를 당황시킬 수도 있는
태풍은 매서웠으리라 ?

나는 가장 추운 땅 ?
가장 낯선 바다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들었지만 ?
그러나 ? 결코 ? 극한 속에서도 ? ,
그것은 내게 ? 빵 부스러기 하나 청하지 않았네.
(우리말 번역은 내가 했다.)

지치고 피곤해서 세상 만사가 다 부정적으로 보이던 날이었다. 디킨슨의 희망은 빵 부스러기 하나 달라 하지 않고 공짜로 주어졌나 보지만, 나의 희망은 참으로 욕심이 많아서 부스러기(crumb)가 아니라 덩이(loaf)로 빵을 갖다 바쳐도 만족할 줄을 모르는구나.

부잣집 딸들이나 가는 과. 내가 대학을 다닐 당시 우리 과에 대한 이미지는 그랬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 고고학도 미술사도 태생적으로 귀족들의 학문이긴 했다.

석사학위를 따면 국공립 박물관 및 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지원할 자격이 주어지므로 인문대치곤 드물게 확실한 취직 자리가 있어 의외로 쏠쏠한 학과였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그랬다.

세상에는 여러 미감(美感)이 있겠지만 인도의 미감에는 나의 미감과는 어딘가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다. 시끄럽고 요란스럽게 느껴졌다.

그 시절에는 대학이라는 권위에 눌려 그 느낌을 차마 인정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겠다. 취향에 맞지 않는 이미지를 계속해서 보고 외우면서 시각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다.

나는 고통이라는 존재가 현현한 것만 같은 그 불상이 나의 고통을 대신 짊어져 주고 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 앞에 우유죽 한 그릇 바치며 엎드려 ‘나’라는 자그마한 우주를 온전히 떠맡기고 싶었다.

나는 불교보다는 힌두교, 정확히 말해 힌두교 사상이 더 흥미로웠다. 그 수업을 듣기 전에는 어디에서도 힌두교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새롭게 알게 된 종교의 독특한 논리에 이내 매료되었다.

영생의 약(藥) 암리타를 얻기 위해 천년 동안 우유의 바다를 휘젓는 신(神)들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우유를 휘저으면 버터가 만들어져야만 할 것 같은데, 힌두 신화에 따르면 그 우유 바다에선 암리타가 들어 있는 호리병을 지닌 신들의 의사 단반타리뿐 아니라 세계가 탄생한다.

무엇보다 나를 끌어들인 것은 ‘다르마(dharma, 法)’라는 개념이었다. 다르마, 즉 세계를 지키는 도덕 질서의 다리가 성스러운 황소처럼 네 개인 시대 ‘크리타 유가(Krita Yuga)’에 세상은 평화롭고 규율에 따라 바람직하게 움직이지만, 시간이 흘러 다리가 세 개, 두 개로 줄어들고 마침내 하나가 되어 누란지위(累卵之危)에 이르는 시기인 ‘칼리 유가(Kali Yuga)’가 도래하면 세상은 무법의 암흑천지가 된다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강렬했다.

다르마가 재미있었던 것은 그것이 절대적인 규율이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힌두교에서는 각 카스트에 부여되는 다르마가 모두 다르다고 여긴다.

수업을 듣는 동안 ‘나의 다르마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학생의 다르마는 공부라는 결론으로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논어의 "君君臣臣父父子子"(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답게)와도 비슷한 덕목이지만, 공자의 그 말보다 힌두교의 ‘다르마’가 훨씬 더 친숙하게 느껴져서 요즘도 가끔씩 ‘기자의 다르마는 뭘까?’ 하고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학자에게 주전공이란 젊은 날 가장 애정을 가지고 공부했던 분야일 것이다. 사랑과 열정을 쏟아 부은, 그래서 자신 있는 과목을 큰 부담 없이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일까? 인도미술사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내준 기말 과제는 대학 시절 내가 들은 그 어떤 강의보다도 창의적이었다.

(rasa)’(예술이 주는 즐거움이나 풍미)

창조의 신 브라마, 유지의 신 비쉬누, 파괴의 신 시바가 ‘트리무르티’라는 힌두교의 삼위일체를 이루듯, 그 셋은 결국 하나였다.

어리기 때문에 겁 없이 무장해제할 수 있었던 자아의 민낯과 마주치는 일이,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내면을 철갑으로 둘러싼 40대의 내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어서다.

나는 이제 안다. 그 수업의 쓸모는 그 수업을 듣겠다 결심하던 시절의 내가, 그 수업이 무용하리라 여겼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무용한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쓸모 없는 것을 배우리라 도전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젊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자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는 걸. 그 시절 무용해 보였던 수많은 수업들이 지금의 나를 어느 정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간다라 미술의 발원지인 페샤와르는 파키스탄에 속해 있지만 아프간과의 접경 지역이라 탈레반의 침범이 잦을 거야."

이후 페르메이르는 내게 손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화가 중 하나가 되었다.(수업을 들었을 당시엔 ‘페르메이르’가 아니라 영어식 발음으로 ‘베르미어’라고 배웠다.) ‘북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대표작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는 물론이고 「편지」 등 다른 그림들도 여러 점 직접 보았지만 아쉽게도 ‘밀크메이드’는 아직까지 실물을 보지 못했다.

일상을 사랑하며 일과에 충실하는 것이 종교적 행위일 수도 있다는 가르침을 준 이 그림을 직접 보기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네덜란드에 가보고 싶다.

교양 강의에 ‘입문’이라 깊이가 있기 어려운 수업이었지만, 그렇게 한 학기 동안 서양미술사 전반을 죽 훑은 것이 이후 공부를 하는 데 주춧돌이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기본은 암기(暗記)였다.

주요 이미지들을 스크린에 띄워놓고 제목, 연대, 특성 등을 기술하는 슬라이드 테스트가 시험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시대를 관통하는 키(key)가 되는 이미지들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 훈련이, 세월이 오래 지난 후 그림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누구나 구글링 몇 번만 거치면 미술에 대해 제법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나는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의 강점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완전히 외워버려 자기 것이 된 이미지, ‘시대의 얼굴’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어떤 시대를 표상하는 이미지들에 대한 데이터가 체계적으로 뇌 속에 축적되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작품을 누리는 경험의 밀도를 향상시키고, 작품을 남에게 설명할 때의 깊이를 다르게 한다.

아직 뇌가 굳어버리기 전이라 외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할 때 암기로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토양 삼아 창의성이라는 꽃이 자라날 수 있을까? ‘창의적’이라는 것은 여러 연구 끝에 합의된 기본적인 지식을 소화해 바닥을 잘 다진 다음 단계에서의 도약을 뜻하는 것이지, 허공으로 무작정 날아오르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창의성’은 영화 속에나 있다.

서양미술사 입문 수업을 듣던 대학 2학년의 나는 작품의 맥락이며 역사적 의미 같은 걸 깊이 이해할 새도 없이 굶주린 새끼 짐승이 어미 젖을 빨듯 무조건 외워버렸다. 그 때의 나는 ‘이런 암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냉소했지만, 나이가 드니 삶의 어느 순간 옛 생각이 나면서 ‘그때 그 작품이 이런 의미였겠구나.’ 하고 이해되는 경험과 깨달음의 기쁨이 종종 찾아온다. 누군가는 ‘암기’를 ‘절반의 앎’이라며 비웃지만, 그 절반의 앎이 시작되지 않으면 완전한 앎이란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창의성과 깊이에 대한 공허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전에 주입식 교육부터 알차게 하며 단단히 터를 잡아놓았으면 좋겠다. 소수의 천재를 제외한 우리 범인(凡人)들에게, 창의성과 깊이는 그 터 위에 세월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차근차근 쌓아올리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인문학을 창의성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은 많다. 그렇지만 암기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상황이 기이하다. 주입식 입시 교육에 모두들 진절머리가 나서일까? 아니면 ‘토론식’ 서구 문화에 대한 열등감과 동경 때문일까?

테이블 클로스에 놓인 자수와 아플리케, 도자기의 섬세한 세공은 여성의 일로 폄훼되었던 수공예를 신성화하는 의미가 있다.

접시의 형태 역시 여성의 자궁을 형상화한 것으로, 저급하다 여겨졌던 여성의 신체를 거대화 및 신성화한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맹신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엔 나도 "지식 따윈 필요 없어. 그냥 느끼는 거야."라는 말을 즐겨 했지만, 이제는 그 생각이 오만이라는 걸 알겠다. 구상회화는 작품에 대한 정보 없이도 이미지의 아름다움만 만끽하며 보고 즐기는 데 무리가 없지만, 작품 자체의 시각적 구체성과 아름다움이 드문 개념미술작품을 볼 때는 ‘굳이 생각하지 마세요.

마흔 넘으면 서서히 알게 된다. 지금 연락하고 있는 사람들이 높은 확률로 노년을 함께할 친구가 되리라는 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 곁에 있다. 심지어 이야기를 읽는 사람도 이런 동료애를 나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는 다른 어떤 독자보다도 고립되어 있다.(…) 이런 고독 속에서 소설의 독자는 누구보다 악착같이 책을 붙든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준비가, 이를테면 걸신들린 듯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2

데틀레프 폰 릴리엔크론의 운율에는 빈정거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말했다. 시인은 명성을 얻지 못하기가 힘들다. 살아생전 대중의 환심을 사지 못하면, 후대가 굶어 죽어간 그의 영웅적 행적을 칭송할 테니. 한 마디로, 판다는 것은 영혼까지 전부 팔아치운다는 것을 뜻했다.
- 피터 게이, 《쾌락 전쟁》3

나는 봉투를 찢는다, 나 지금 방콕이야
(…) 너는 네모난 봉투에서 이 푸른 사절들을 쏟아낸다.
널 세상에 잃었다는 느낌이 들 때,
계속 따라가기 힘들 때,
너의 엽서가 이렇게 말한다
"날 기다려줘."
- 앤 마이클스, 〈마사에게 온 편지〉6

전달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요. 전달자는 언제나 삼각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 메시지를 나르는 사람(사람이든 아니든), 메시지를 받는 사람. 그러니 삼각형을 그려보세요. 완벽한 삼각형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래전 나는 글쓰기 수업을 듣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지면을 존중하세요. 그게 여러분이 가진 전부니까요."
작가는 지면과 소통합니다. 독자 역시 지면과 소통합니다. 작가와 독자는 오직 지면을 통해서만 소통하지요. 이것이 글쓰기의 삼단논법입니다.

지면이란 존 르 카레의 소설에서 스파이들이 죽기 전 물에 젖은 신발에 작은 꾸러미를 넣어 메시지를 남기는 것처럼,7 보이지 않는 손이 독자더러 해독하라고 흔적을 남겨놓은 곳입니다. 약간은 터무니없지만 묘하게도 딱 맞아떨어지는 비유지요. 뭐니 뭐니 해도 독자도 일종의 스파이니까요.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이거예요. 첫째, 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둘째,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책의 기능, 그러니까 의무는 무엇인가? 작가가 생각하는 책의 역할은 무엇인가?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앞의 두 질문에서 파생한 것으로, 독자가 책을 읽고 있을 때 작가는 어디에 있나?

에밀리 디킨슨은 이 주제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나는 무명인이에요, 당신은 누군가요?
당신도 무명인인가요?
그러면 우리는 잘 어울리는군요!
말하지 마요! 그들이 떠들고 다닐 거예요, 알잖아요!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되는 건!
얼마나 눈에 띌까요, 개구리처럼
6월 내내, 흠모하는 늪지를 향해
자기 이름을 불러대는 것은!17

"무명인"은 작가입니다. 물론 독자도 "무명인"이지요. 그런 점에서 모든 책은 익명이고, 모든 독자도 그렇습니다. 읽고 쓰는 것은, 이를테면 연기하는 것과 극장에 가는 것과는 달리 둘 다 어느 정도의 고독, 나아가 어느 정도의 비밀주의를 전제로 하는 활동입니다.

나는 에밀리 디킨슨이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무명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봐요.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자, 눈에 보이지도 않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독자에게 말을 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작가라는 측면에서 말이지요.

책이 출간되면 모든 게 달라집니다. "그들이 떠들고 다닐 거예요." 에밀리 디킨슨은 이렇게 경고하지요. 정확한 지적이에요. 일단 책이 시중에 공개되면, 추정 독자는 친구나 연인, 또는 정체 모를 한 사람의 "무명인"과 같은 단 한 명일 수 없게 됩니다. 출판과 동시에 텍스트는 자기 복제를 하고, 독자는 더 이상 작가와 친밀한 일대일 관계를 맺을 수 없어요. 그 대신 책의 부수가 늘어나듯 독자가 엄청나게 늘면서 그 모든 무명인들이 한데 뭉쳐 책을 읽는 대중으로 변하지요.

19세기가 끝날 무렵, 글을 깨친 대중이 더 많아지면서 극성스런 부르주아(훨씬 더 극성스런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들이 판매 부수를 좌지우지하게 되고, 출판이 사업으로 변모하고, ‘명성’과 ‘인기’가 동일시되고, 수는 적지만 안목 있는 독자를 확보하는 게 중요해졌지요.

20세기에도 순조롭게 유지되었어요. 그레이엄 그린의 《사랑의 종말》의 한 인물을 볼까요. 행동이 단정치 못한 소설가 모리스 벤드릭스는 자신이 "세속적 성공"21을 거둠으로써 예술의 순수성을 해치게 될 거라는 걸 스스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그가 한 문학잡지에 자신에 대한 글을 기고하고 싶어 하는 비평가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나는 너무 잘 알았다.(…) 그가 나도 몰랐던 숨은 의미를 발견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나조차 이골이 난 내 결점들이 뭔지를. 결국 그는 생색을 내며 나를 서머싯 몸보다 좀 더 낫다고 평할 것이다. 왜냐면 몸은 인기가 좋고, 나는 아직 그 같은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아직은. 하지만 내가 성공을 못 했다 해도 작은 평론지들이 약은 형사들처럼 냄새를 맡고 찾아낼 것이다.22

평론가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도 독자들은 자신을 사랑할 거라고 자위하기 시작하면 진지한 작가로서의 수명이 끝나므로, 젊은 작가는 무엇보다도 잠재적 독자들을 주의해야 하지요.

"수많은 문학의 적들 가운데, 성공이 가장 교활하다"23라고 코널리는 말합니다.

"성공은 오직 인생의 황혼기에, 그것도 오직 적은 양만 복용해야 하는 독약이다."24 성공한 사람만 그렇게 말한다고 지적하면 좀스러워 보이려나요.

"계속 그렇게 가다가 어느 날 눈 떠보니 사람들에게 잊힌 자신을 발견하는"25 게 그들의 최후지요.

"고통받는 인류의 고귀한 마음을 이용하고 그것이 얼마나 큰 돈벌이가 되는지 알아낸 사람들은 가혹한 논평에도, 동료들의 경멸에도, 다수의 무관심에도 꿈쩍하지 않는다."26

찰리는 차기작으로 무슨 주제를 다룰지 고민하는 자신이 사기꾼처럼만 느껴집니다. 빈곤층이란 소재라면 이제 신물이 나서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은데, 그의 추종자들과 대중들은 그를 고귀한 작가라 단정 짓고 그의 펜 끝에서 빈자들에 대한 더욱 훌륭한 작품이 더 많이 탄생하기를 기대하거든요. 그가 다른 주제로 글을 쓰면 그들은 그가 얄팍하고 가벼워졌다고 생각할 게 뻔합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대중을, 위대한 ‘그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다고 느끼지요. 심지어 질타를 받지 않고 조용히 자살할 수도 없을 거라고요. "어느덧 그는 명성이라는 눈부신 탐조등을 달았다. 수백 개의 눈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실패나 자살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의 실패와 자살이 될 터였다."

전작을 반복하면서 ‘그들’을 만족시킬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그들’을 실망시킬 것인가. 더 최악은, ‘그들’을 만족시키려고 자기 복제를 했는데 오히려 복제라며 비난받는 경우입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작품(보통은 어린 시절 읽은 책이지요)이 있습니다. 내겐 그중 하나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에 실린 단편 〈화성인〉이지요.

남자는 화성인이 타인의 욕망에 따라, 그리고 그런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화성인 자신의 욕구에 따라 형상을 바꾼다는 사실을 깨닫고 톰을 데리러 갑니다. 하지만 화성인은 형상을 바꿀 수가 없어요. 새로운 가족의 소망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지요.

"그의 얼굴에 각자의 요구가 녹아들었다." 화성인은 알아볼 수 없는 다양한 형상의 웅덩이를 이루며 쓰러져 죽습니다.

책을 출간하고 논평을 받으면서, 친분도 없는 몇몇 사람들이 책에 적힌 내 이름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걸 보면서, 이 이야기는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런 거군. 내 얼굴이 녹고 있는 중이군."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진짜 화성인인 거야." 이는 많은 것을 설명해줍니다.

키츠는 주저하는 능력을 작가의 자질로서 높이 평가했는데,30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시각을 대변하는 캐릭터밖에는 쓰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지요.

주저하는 능력이 너무 지나치면 혼자 고심하다가 독자의 욕망과 두려움을 못 이기고 밀랍처럼 녹아내리지는 않을까요?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다른 얼굴을 쓰고 있을까요? 혹은 들러붙은 얼굴들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을까요?

책은 작가와 독자의 중간지점에서 어떤 기능 또는 의무를 맡는가?

어떤 작품에나 공통으로 던질 수 있는 진짜 질문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그 작품이 살아 있는가, 아니면 죽어 있는가’라고요. 어쩌다 보니 그 말에 동의하긴 했는데 시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는 어떻게 결정될까요? 생물학적 정의를 보면 살아 있는 것들은 성장하고 변화하며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반면, 죽은 것들은 아무 활동성도 띠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텍스트가 성장하고 변화하고 자손을 낳을 수 있다는 걸까요? 독자가 작가와 시공간상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든 상관없이, 오직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닙니다."

영화 〈일 포스티노〉32에서 야한 시를 베끼는 한 우체부가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하는 말입니다. "시는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에요." 그게 정답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살아 있는 텍스트의 가장 사악한 버전은 역시나 카프카의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작가는 비인간이고, 종이는 독자의 몸이며, 텍스트는 해독 불가합니다. 시인 밀턴 에이콘이 한 시에서 읊은 "시가 시인을 지우고 다시 쓰듯이"35라는 구절 역시 텍스트를 적극적인 파트너로 여기고 있지만, 카프카식 변주를 의미하는 건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보통 살아 있는 말은 훨씬 긍정적인 관점에서 소개됩니다. 극장, 특히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장에서는 연극이 끝난 뒤 이따금 텍스트가 연극이라는 틀을 넘어 밖으로 나오기도 했어요. 그 잠깐 동안은 연극이 아닌 관객과 동일한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보였지요. 막이 내리고 배우 한 명이 무대 앞으로 나서서 관객에게 직접 말을 겁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셨던 인물이 아니라 사실 배우입니다. 이건 가발이고요. 부족한 점이 많았겠지만 즐겁게 보셨길 바랍니다. 그리고 즐거우셨다면 저희 배우들을 예쁘게 봐주시고 박수 부탁드립니다." 사실상 이게 발언의 요지였어요. 아니면 프롤로그(역시나 본 연극과는 별개였어요)에서 배우들이 극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공연 자랑을 한 뒤, 다시 연극 속으로 들어가 ‘극중 인물’이 되기도 했지요.

"이게 내가 쓴 유일한 책일세.(…) 그러다 보니 아들이 성인이 돼서 혈혈단신 집을 떠나는 애비가 된 심정이야."36 가장 솔직한 이별 편지 중 하나는 평생토록 지독한 빈털터리였던 15세기 프랑스 시인 프랑수아 비용이 쓴 것으로, 여기서 그는 부유한 왕자에게 신속히 전갈을 전하라고 자신의 시에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내 편지야, 서둘러 달려가려무나
발도 혀도 없지만
내가 돈이 떨어져 곤란하다고
열변을 토해 설명해다오37

다른 작가들은 이보단 덜 직설적입니다.

러시아 시인 푸시킨이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는 시의 말미에서 독자에게 멋지게 작별인사를 고하는 부분입니다.

독자여, 당신이 누구든,
친구든 적이든 간에,
정답게 헤어지고 싶다네.
잘 가시게, 이제 끝이 났으니.
이 조잡한 글에서 무엇을 찾아냈든,
격정적인 추억이든,
고생 끝의 휴식이든,
그냥 문법적 오류든,
생생한 묘사든, 떠들썩한 재담이든.
당신이 이 작은 책에서
감동이나, 재미나,
꿈이나, 잡지의 논쟁에 필요한 것이나,
조금이라도 얻어가기를 바라네.
이쯤에서 헤어지세. 그럼 안녕.38

제2부 프롤로그인 "2부 ‘순례자’를 보내며"에서는 책을 사람으로 대합니다.

가라, 내 작은 책이여.
내 첫 순례자[제1부]가 얼굴이라도 비친 곳이면 어디든지.
문을 두드리고 누군가 "누구세요?"라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라. "크리스티아나입니다."39

번연은 아주 개신교적이고, 양심적이고, 검소하고, 경제적인 기도를 합니다.

이 작은 책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작은 책이 축복이 되기를,
그리고 책을 산 사람들이 괜히 돈만 버렸다고
말하는 일이 없기를 비노라.41

책은 인간이 아닙니다.

때로 책은 작가의 개입 없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맥퍼슨이 쓴 〈책〉이라는 간단명료한 제목의 시입니다. 여기서의 책은 말하는 책인 동시에 수수께끼이지요. 물론 답은 제목에 있습니다.

친애하는 독자여, 당신 같은 인간이 아니기에
-나는 그대처럼 사랑할 수 없고, 그대도 나처럼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그대처럼 큰물로 나가서
보잘것없는 배로 사나운 바다를 이기려 하나니.

개울 수면을 젖지 않고 덧없이 떠가는 물방개도
나보다는 가냘프지 않고
흥분된 눈으로 심해를 살피는 고대의 고래도
나보다는 대단하지 않도다.

비록 창조자의 의지로
공기, 불, 물, 땅을 가로지르지만
내 부피가 그대의 손에 짐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꽃피운다. 그대가 보는 데서, 그리고 그대를 위해서.
그를 섬기지만 나는 인간과 씨름하길 주저하지 않으니
붙잡히고 삼켜져도 그를 축복한다. 독자여, 받아주기를.43

이 작은 책은 배이며, 고래이며,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에게 축복을 내린 천사입니다.

첫째, 작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보르헤스와 나〉라는 단편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혼잣말을 합니다. 이렇게 중얼거리지요.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인 게 맞다면)"45. 독자가 그 구절을 읽을 때에는 그 ‘만약’이라는 가정이 훨씬 크게 다가옵니다. 독자가 글을 읽고 있을 때 작가는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으니까요. 따라서 작가는 원조 투명인간입니다. 그곳에 전연 없으면서 동시에 매우 견고히 있기도 하지요.

아홉 살에 나는 비밀단체에 가입했습니다. 특별한 악수법, 구호, 의식, 좌우명까지 갖출 건 다 갖춘 조직이었지요. 단체명은 ‘브라우니들Brownies’로, 하는 짓이 좀 유별났어요.

어린 여자애들은 요정, 꼬마 도깨비, 엘프인 척하며 다녔고, 성인인 모임장은 "갈색 올빼미"라고 불렸거든요.

안타깝게도 모임장이 부엉이 탈을 쓰거나 여자애들이 요정 복장을 하진 않았어요. 나로선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었지요.

진짜 이름은 몰랐지만 나는 ‘갈색 올빼미’가 슬기롭고 공평하다 생각했고, 당시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서 그녀를 흠모했습니다.

배지가 걸린 다양한 프로젝트(자수 바느질하기, 가을 씨앗 모으기 등) 중 하나로, 나는 작은 책을 몇 권 만들었습니다.

나는 이 책들을 갈색 올빼미에게 주었습니다. 그녀가 그 책들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이 배지를 받는 것보다 중요했거든요.

세월이 흐른 뒤, 나는 한 소설에 갈색 올빼미를 등장시켰습니다. 많은 사물들과 사람들이 책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요.

"네가 말하는 갈색 올빼미, 우리 고모야." "고모라고?" 내가 되물었습니다. "설마 살아계시진 않겠지!"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고 나는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아흔을 훌쩍 넘긴 그녀와 나는 기쁘게 재회했지요. 차를 마신 뒤 그녀가 말했습니다. "이건 네가 가져야 할 것 같구나." 그러면서 50년 전에 내가 만든 작은 책들(무슨 이유에서인지 간직하고 있더군요)을 꺼내서 내게 돌려주었어요. 그녀는 삼일 뒤에 눈을 감았습니다.

작가는 ‘갈색 올빼미’를 위해, 그때 자신의 인생에서 ‘갈색 올빼미’에 해당하는 누군가를 위해 글을 씁니다. 진짜 사람, 그러니까 구체적인 단 한 사람을 위해서 말이에요.

‘갈색 올빼미’와 ‘신’의 중간 어디쯤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독자를 위해. 그리고 어쨌거나 이런 이상적인 독자는 누군가, 어떤 ‘한 사람’이지요. 독서라는 행위도 글을 쓰는 행위처럼 언제나 단수로 이루어지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약 우리의 실수가(아이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미칠 영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특정 덕목에 대한 참된 이해는 도덕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자동적으로.

좋은 아빠가 무슨 뜻인지 아는 것, 참으로 아는 것은 곧 좋은 아빠가 되는 것과 같다.

열세 살을 어떻게 뚫고 지나가느냐는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철학자들조차 아직 풀지 못한 미스터리다.

멍청한 질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격언은 사실일까? 이 질문을 딸아이에게 물어보았더니, 아이는 겨우 보일 정도로 왼쪽 눈썹을 살짝 치켜뜬다. 즉 이런 뜻이다.아빠 질문 입력됐는데, 대답할 가치가 없어 보이니깐 나는 그냥 팬케이크랑 스냅챗으로 돌아갈게.
나는 소크라테스처럼 집요했다. 더 큰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멍청한 질문이라는 게 존재할까?"
아이가 휴대전화 화면에서 고개를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쨌거나 나는 아이가 생각하는 중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다 놀랍게도 아이가 입을 열었다.
"존재하지." 아이가 말했다. "멍청한 질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야." 말을 마친 아이는 다시 팬케이크와 휴대전화, 청소년 특유의 언짢은 태도로 돌아갔다.

검사가 아니라면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묻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다양한 방식으로 이 짓을 한다. 자기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아니면 성찰한 적이 없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더욱 강화하는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 질문을 한다.

진지한 질문에는 위험이 따른다. 마치 어두운 방 안에서 성냥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불빛이 방을 비췄을 때 괴물이 보일지, 경이로운 광경이 보일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성냥에 불을 붙인다. 그렇기에 진지한 질문은 자신감이 아닌, 10대와 같은 머쓱함과 어색함으로 머뭇머뭇 서투르게 발화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그보다 더 중요하고 용감한 행동은 없었다.

"왜 철학이었죠?" 내가 묻는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이유가 뭡니까? 소명을 느끼는 겁니다. 궁극적인 질문을 향한 소명이지요.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뭐지? 나는 왜 이곳에 있지? 인간은 의미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요, 그건 소명이었어요."

제이컵은 어머니가 계신 곳에서 처음으로 ‘닥터 니들먼’이라고 소개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어머니는 그 사람의 말을 끊고 지적했다. "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종류의 닥터는 아니에요."

"우리 문화에는 궁극적인 질문이 질문으로 존중받는 공간이 없어요. 우리가 가진 모든 제도와 사회 양식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만 최선을 다합니다."

문제를 경험하기 전에 해결하는 것은 식재료를 구매하기 전에 요리를 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크라테스 근처에 있거나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은 누구든 논쟁에 말려들기 쉽고,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든 간에 소크라테스가 졸졸 따라다닐 것이며, 결국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소크라테스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이의 질문이 성가신 것은 멍청한 질문이라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제대로 대답할 능력이 없어서다. 아이들은 소크라테스처럼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고, 그것은 길게 보면 도움이 될지언정 당장은 무척 짜증스러운 일이다.

피터 크리프트는 말한다. "다른 사람을 짜증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다. 열외자의 지위. 두둑한 뱃살. 늘 궁금해하며 여기저기로 떠도는 마음. 대화를 향한 사랑.

우리가 달라지는 지점은 바로 끈기다. 나는 실제든 상상 속에서든 싸움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엄청난 용기를 보여주었다. 기원전 432년에 있었던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놀라운 힘과 체력을 드러내며 친구 알키비아데스의 목숨을 구했다.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모욕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밝혀 일종의 지적 광합성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정원사였다. "마음속에 당혹스러움을 심고 그것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14 그가 좋아하는 것은 없었다.

"소크라테스, 나는 당신 말을 이해할 수 없소. 그러니 당신 말을 이해하는 다른 사람을 찾으시오. 당신은 폭군이오, 소크라테스. 이 논쟁을 끝내거나, 아니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이시오."

사람들은 왜곡된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착각한다. 심지어 자신이 안 맞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하루 종일 휘청거리며 가구에 부딪치고 사람들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내내 가구와 사람들을 탓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어리석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니들먼은 철학자가 견해라는 나이트클럽 문을 지키는 건장한 문지기와 같다고 말한다.

내 견해가 어떻게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다른 모든 교활한 지배자처럼 나의 의견 역시 내가 자기들을 불러들였다고 믿게 한다. 정말 내가 그랬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 말도 없이 나타나서 멋대로 내 옷을 걸쳐 입은 걸까?

시리처럼 평범한 질문은 표면 위에서 맴돈다. 깊이 있는 질문은 느리고 더 깊이 침잠한다.

"네, 질문을 사는 겁니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질문을 품는 거예요. 질문을 살아내는 거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해결책을 찾아버려요."

좋은 말 같다. 질문을 살아내면서 남은 평생을 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질문의 답은? 대답은 어디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철학이 받는 부당한 평가다. 철학은 말뿐이야. 질문만 끝없이 늘어놓고 대답은 없어. 언제나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는 않는 기차야.

철학도 분명 도착지에 관심이 있지만, 여행을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그저 똑똑한 대답이 아닌 ‘마음의 대답’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종류의 대답, 예를 들면 머리의 대답은 그만큼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그만큼 진실하지도 못하다.

마음의 대답에 도착하려면 인내심도 필요하지만 기꺼이 자신의 무지와 한자리에 앉으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끝없는 해야 할 일 목록에서 또 하나를 지우려고 성급히 문제 해결을 향해 달리는 대신, 의혹과 수수께끼의 곁에 머무는 것. 여기에는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조롱할 것이다. 내버려두라고, 제이컵 니들먼과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한텐 분배의 문제가 있다고, 제니퍼에게 말한다. 모든 특성이 충분히 주어졌지만 불공평하게 분배된 것이다. 예를 들면 털이 그렇다. 가슴과 콧구멍 속에는 털이 엄청 많지만 머리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충분히 성공하질 못했어."
제니퍼는 뭔가 심오한 말을 하거나 도망갈 궁리를 하는 사람이 그러하듯 잠시 말이 없었다. 다행히 제니퍼의 경우는 전자에 해당했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제니퍼가 말했다.
"성공이 어떤 모습이냐고?" 내가 말했다.
"그래,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나는 늘 성공을 미적 측면이 아닌 양적 측면으로만 여겼다.

왜 성공하고 싶으냐고? 그냥. 다들 그렇지 않나?얼마나 성공해야 충분하냐고? 지금 나보다 더.

제니퍼는 내게 그렇게 묻지 않았다. 성공이 어떤 모습이냐고 물었다. 제니퍼의 질문에는 개인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성공은나한테 어떤 모습이지? 그 모습을 본다면 내가 알아차릴 수 있을까?

좋은 질문은 그렇다. 사람을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프레임을 다시 짜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좋은 질문은 똑똑한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침묵을 끌어내기도 한다. 고

인도의 현자들은브라모디야brahmodya라는 시합을 펼쳤다. 참가자들의 목표는 절대적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시합은 언제나 침묵으로 끝이 났다.

제니퍼가 던진 하나의 질문이 내 머릿속에 수십 개의 질문을 일으켰다. 이제는 더 이상 제니퍼와의 대화가 아니라 나 자신과의 대화였다.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관점의 근본적 변화가 나타나리라는 희망에서, 내가 아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인정사정없는 자기 심문.

"사람들이 가끔 기차 안에서 경험하듯이,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뒤쪽으로 달리고 있고, 그러다 갑자기 진짜 방향을 깨닫게 된"17 것이다.

이제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지? 솔직히 말하면 아직 이 질문의 답을 찾지 못했고, 어쩌면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다.

오늘날 그리스 사람들은메타포라를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직판했다. 사람들이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았다. 사람들을 직접 찾아갔다.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결과 1번: 실질적인 결과를 내지 못하는 성찰하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자기 배꼽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데에는 나름의 즐거움이 있지만 그보다는 결과를 내는 것이, 더 나은 배꼽을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배꼽에 대해 생각하다’에는 ‘묵상하다’라는 뜻이 있다-옮긴이).

그것을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불렀다. 보통 ‘행복’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에는 사실 의미 있는 융성한 삶이라는 더 큰 뜻이 있다.

결과 2번: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건 지나치게 성찰하는 삶도 마찬가지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20라는 말로 쾌락의 역설(헤도니즘의 역설Paradox of Hedonism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을 설명했다.

행복은 붙잡으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행복은 부산물이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은 삶을 잘 살아낼 때 주어지는 뜻밖의 횡재 같은 것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낙천적이었고,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 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가 더 좋은 곳으로 갈지는 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반드시 잊지 말고 갚아주게나."
크리톤이 대답한다. "알겠네. 다른 할 말은 없는가?"
소크라테스는 대답이 없었다. 죽은 것이다.
이런 재미없는 결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학자들은 수백 년간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했다. 일부는 소크라테스의 이 마지막 말을 비관적으로 해석한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치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을 바쳤으므로, 소크라테스는 아마 삶이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질병과 같다는 뜻에서 그 말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삶의 커다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지라도 작은 것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 걸지도 모르겠다.

시민으로서, 또 친구로서의 의무를 간과하지 말 것. 명예로운 사람이 될 것. 다른 사람에게 수탉을 빚졌다면, 수탉을 갚을 것.

질문의 왕이 질문의 구름을 남기고 사라짐으로써 남은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궁금해하게 만든 것이 본인과 유쾌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는 것. 소크라테스는 도저히 못 배기고 우리 머릿속에 심어놓은 것이다.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우리가 경험할 또 하나의 질문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은 모범생에 대한 변명이자 ‘그 많던 모범생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며,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온 사람의 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교양이란 겹의 언어이자 층위가 많은 말, 날것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일, 세 치 혀 아래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넣어두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 책은 40대 직장 여성이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보낸 20대 초반을 돌아보는 성장기가 되었다.

이제 도쿄로 간다. 대학에 들어간다. 유명한 학자를 만날 것이다. 취미와 품성을 갖춘 학생들과 교제하게 될 것이다. 도서관에서 연구에 몰두한다. 저술을 한다. 세상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다. 어머니가 기뻐한다.
? 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산시로』(현암사)에서

예술은 사물을 재현하거나 형식을 구축하거나 경험을 표현하는 의식적인 인간행위인데 이 경우 그러한 재현, 구축 또는 표현의 산물은 기쁨이나 흥분, 충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 W. 타타르키비츠, 손효주 옮김, 『미학의 기본 개념사』(미술문화)에서

르네상스 건축가이자 이론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1404~1472)는 『회화론』에서 그림을 프레임을 가진 일종의 ‘창문’으로 보았다. 그림은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의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원근법 등을 설명했다. 그는 특정 주제만 특별히 그려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istoria’라 불렀다.

이론의 복잡성과 상관 없이 당시 나는 창(窓)이란 말이 무척 아름답다 여겼다. 그림은 내게 항상 세상을 보는 창이 되어주었으니까.

트렌치에 들어가 지층의 단면을 살펴보는 걸 좋아했다. 켜켜이 쌓인 지층의 빛깔이 다른 것은 지층마다 누적된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층위마다 다른 시간과 역사, 문화와 삶이 녹아 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웠다.

집단의 이름으로 강제되는 모든 활동을 혐오했다. 마임이니 구호니 행진이니 하는 것들도 딱 질색이었다.

봄에, 발굴장에 벚꽃이 후두둑 떨어졌다. 벚꽃은 트렌치 안에도, 밖에도 쌓여서 인간이 손댄 흔적을 여리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무화시켰다.

박물관에 끝까지 남은 선배들과 친구는 훌륭한 고고학자가 되었다. 흙과, 땅과, 땀과, 무덤을 택한 그들을 존경한다.

한때의 고고학도는 안다. 기억과 마음에도 층위(層位)가 있다는 것을. 나는 종종 ‘내 안의 깊은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층위마다 켜켜이 쌓인 묵은 이야기들을 헤집어 꺼내 헹군다. 깨어진 토기 조각을 이어 붙이듯, 복원한다.

사람을 사귈 때면 항상 마음속 지층을 가늠해 본다. 이 사람은 어느 층위까지 내게 보여줄 것이며, 나는 내 안의 어떤 층위까지 그를 허용하고 인도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층위마다 차곡차곡 고인 슬픔과 눈물과 어두움과 절망과 상처와 고통, 기쁨과 웃음과 약간의 빛의 흔적……. 나는 손을 내밀며 상대에게 묻는다. 더 깊은 곳까지 함께 내려가 주겠냐고, 그 어떤 끔찍한 것을 보게 되더라도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봄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산다. 신들은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 갑옷을 입은 바다에서, 자연의 빛깔 그대로의 푸른 하늘에서, 꽃으로 덮인 폐허에서, 그리고 돌무더기 안에서 커다란 거품으로 부서지는 빛 속에서 말한다.

티파사는 알제리의 해변 도시인데 고대 카르타고 유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알제리에서 나고 자란 카뮈는 티파사를 사랑했지만 "절대 하루를 넘도록 티파사에서 머무르지는 않았다. 어떤 것을 충분히 보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듯이, 어떤 풍경을 너무나 봐버리는 순간이 언제나 오게 마련"이므로.

불어의 리에종(liaison, 연음)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 어렵다. 그렇지만 때때로 저 문장들을 입 안에서 굴려본다. 온몸의 털끝 하나하나까지 곤두세우는 예민한 감각을 느끼고 싶을 때, 자연 그대로의 육체를 햇볕 아래 내어주고 마냥 쾌락에 취하고 싶을 때, 정신을 아득한 끝자락까지 몰고 가는 향기에 전율하고 싶을 때……. 불어는 감각의 언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순전히 카뮈의 『결혼』 때문이다.

프린트물의 첫 장에 적힌 제목 "Noces"의 위에 f.라고 적어 단어의 성별이 여성임을 표시하고, 아래에 발음기호를 적어놓은 대학교 1학년 때의 나. "자연과 인간 사이의 결혼"이라고 적은 아래엔 "이방인: 자연과 인간 간의 divorce"라는 보충 설명까지 덧붙여 적어놓았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되는 모범생답게 착실하게 선생님의 설명을 받아 적은 셈인데, 그 덕에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기억할 수 있으니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했던 세상의 모든 ‘범생이’들에게 경의를!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공용어로 통했던 불어를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려워했다는 일화도 흥미를 자극했다.

외국어는 결국 단어와 문법 싸움이고 그 입구엔 지겨운 암기의 과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기말시험을 보던 날이었다. 강사는 감독을 하며 교실 안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시험문제를 푸느라 잔뜩 긴장해 앉아 있는 내 곁을 그녀가 스쳐 지나갔다. 초콜릿 향기가 확, 풍겼다. 짙고 달콤하며 매혹적인 향기. 차가운 대기와 맞부딪친 향의 입자가 형체는 없지만 묵직한 막을 형성하며 일순간 나를 둘러쌌다. 뜨겁고 진한 초콜릿 음료가 목구멍을 통해 꿀꺽 넘어가며 따뜻하게 뱃속을 데우는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로알드 달의 『초콜릿 공장의 비밀』을 처음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 달콤하고 유혹적인데, 어딘지 모르게 위로가 되는 냄새였다. 불어를 ‘감각의 언어’라 느끼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 향수의 이름은 지금까지 모른다. 여러 향수를 뿌려보았지만 아직 그만큼 인상적인 향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불란서의 향’이라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맥락을 고민하며 이해한 단어는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내 것이 되었다.

그 수업 덕에, 『결혼』이 결혼생활에 대한 단상이 아니라 인간, 혹은 인간이 만든 것들과 자연의 결합에 대한 은유라는 것을 배웠다. 20대의 카뮈는 생(生)에서 오는 감각을 뜨겁게 사랑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불어든 무엇이든 단번에 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시간을 들여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의 힘을 깨닫게 되었다.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잡아채는 것처럼 삶에 대한 맹렬하고도 동물적인 감각이라는 것을 나는 알아챈다. 한창 두뇌 활동이 왕성한 20대에 더듬거리며, 서툴게나마 『결혼』을 끝까지 원어로 읽었기 때문이다. 번역서의 문장들은 매끄럽고 아름답지만 내 것이 아니므로 관념적이고 피상적이다. 원어로 읽으면 다르다. 날것 그대로의 뜻을 곱씹게 되므로 구체적으로 내 것이 되어 손에 잡힌다. 몽환적이고 나른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격렬하게 살이 부딪치고 실핏줄이 터져 뜨거운 피가 튀는 것 같은 생동감이 깃든 글이라고, 나는 『결혼』을 기억한다.

나는 엉겁결에 초등학교 입학 전에 천자문을 거의 다 떼고는 영재 소녀라도 된 양 외할아버지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한자를 낯설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게 조기교육의 성과긴 했다.

"한자를 제대로 익히려면 중국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번역 과제를 내주는 동시에 중국 문화에 관한 책을 읽고 리포트를 써 오라고 했다. 나는 미술사 전공자라는 핑계로 중국 회화(繪畵)에 대한 책을 읽고 리포트를 작성해 제출했다.

한자가 중국 문자라는 인식을 명확하게 갖추게 된 것이 그 수업을 통해 얻게 된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였다. 그 전까지의 세계에서 한자와 나 사이에는 국경이 없었다. 수업 이후에는 명확한 경계가 생겼다. 오랫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던 나라가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지배국의 글자라는 인식이 싹텄는데, 그렇다고 해서 치욕적이라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다. 한글 창제로부터 500년이 훌쩍 지난 시대에 한자가 굴욕의 상징이 되기엔 너무 약했다. 나는 이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내 언어생활의 결을 한층 정교하고 풍요롭게 만들며,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고 생각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식견이 짧다는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말한 ‘肉食者鄙(육식자비)’(고기를 먹는 자는 비천하다.)라든가 ‘齊師伐我(제사벌아)’(제나라 군대가 우리를 공격했다.) 같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편(莊公篇)」의 문장으로 주어와 술어 관계를 습득하며 시작한 수업을 지루하다 여기지 않고 재미있어하며 따라갔다.
‘公將戰(공장전)’(공이 장차 싸우려 했다.)이라는 문장을 놓고 ‘공정한 장수가 싸운다.’라고 해석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즐거웠다. 이 문장에서 ‘장수 장(將)’이 ‘장차’라는 뜻의 부사로 사용된 것처럼, 글자 하나의 쓰임이 제한되어 있지 않고 여러 품사와 여러 뜻으로 다채롭게 쓰인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문장을 뜯어보며 해석을 고민하다 보면 생각의 한계가 확장되고 상상력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만 같았다. 모호했지만 그 모호함 때문에 오히려 한문 수업이 재미있었다.

당시엔 ‘將進酒杯莫停(장진주배막정)’(술잔 권하노니 멈추지 마시게나.)이라는 문장에 힘을 주어 술잔을 부딪치며 호기롭게 "장진주배막정!" 포효하였지만, 이제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난 40대의 내겐 이 구절이 사무친다.

君不見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高堂明鏡悲白髮
고대광실 밝은 거울을 비추며 백발을 슬퍼하는데
朝如靑絲暮成雪
아침녘 검은 머리 해저물녘 눈빛처럼 희어진 것을?
人生得意須盡歡
사람 일생 좋을 때에 맘껏 즐길 일이니
莫使金樽空對月
금술통 헛되이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 일.

"고향 떠나온 달밤"이라는 뜻의 「靜夜思」는 거의 평생을 유랑하며 보낸 이백이 26세 때 양주(揚州)의 객사에서 쓴 것이다. 스무 살에 고향을 떠나온 나는 이백을 흉내 내 고개 들어 달을 바라보다가 고개 숙여 고향의 달을 그려보면서 궁금해하곤 했다. 『그림 없는 그림책』을 쓴 덴마크의 안데르센부터 당의 이백까지 왜 고향을 떠나온 자들은 하나같이 달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걸까? 타향에서나 고향에서나 변함 없는 천체를 보니 옛 생각이 나는 것이라면, 왜 해를 보면서는 그리운 마음이 들지 않는 걸까?

집값보다는 ‘판교(板橋)’라는 지명이 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도 흔한지를 궁금해했다. "‘널빤지를 걸쳐 놓은 다리’라는 뜻이니 곳곳에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누군가 말했다. 경기도 판교도 운중천 널빤지 다리 부근을 ‘너더리(널다리) 마을’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어 끼어들었다. "중국 옛글에서는 관용적으로 ‘판교’를 ‘친구를 만나는 곳’으로 쓰기도 한다잖아요."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며 어디서 들었냐고 물었다. "20년 전 대학교 1학년 때, 교양 한문 시간에 배웠어요!"

그는 한시에 많이 등장하는 ‘남포(南浦)’(남쪽 포구)가 특정 지명이 아니라,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이 「河伯(하백)」에서 "送美人兮南浦(송미인혜남포)"(남포에서 그대를 떠나보내네.)라고 읊은 이후 ‘남포’라는 단어가 정인(情人)을 떠나보내는 곳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고려 시대에 정지상의 시 「送人(송인)」에도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남포에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라는 구절이 등장하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판교’를 예시로 들었다.

기록은 기억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친구를 ‘만나는 곳’이 아니라 ‘보내는 곳’이었구나. 저녁 자리의 이들에게 문자를 보내 실수를 정정하고 나니, ‘판교’가 친구를 보내는 곳이 된 전고(典故)가 궁금해졌다. 인터넷을 뒤져 오래전 그 한문 수업 선생님의 연락처를 찾아내 이메일을 보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에 인사드립니다. 20년 전 수업을 들었을 때 선생님께서 한문의 관용적 표현을 설명하시며 ‘판교(板橋)’의 경우 친구를 보내는 곳이라고 말씀 주셨는데요……." 한문 교재에서 판교에 대한 필기 부분을 사진 찍어 첨부한 그 이메일의 마지막을 나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20년 전 선생님께 한문을 배운 것이 한문 공부를 한 마지막 기회였고 거의 잊어버렸으나, 그래도 밑둥은 약간 남아 살아가는 데 간혹 힘이 되곤 합니다."

주말인데도 답장은 한 시간 만에 왔다. 그는 불쑥 연락해 온 옛날 수강생을 무척 반가워하며 "‘판교’라는 단어는 당나라 시인 온정균(溫庭筠)의 시 「送人東遊(송인동유)」의 한 구절인 ‘鷄聲茅店月(계성모점월)/ 人迹板橋霜(인적판교상)’(새벽닭은 초가 주막 달빛 아래 울고/ 먼저 간 이는 서리 내린 판교에 발자국 남겨놓았네.)이 절창으로 여겨져 많이 유명해졌을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머릿속에 어슴푸레 남아 있던 ‘교양으로서의 판교’가 그렇게 20년 만에 비로소 명징해졌다. ‘교양(culture)’이란 원래 경작(耕作)을 뜻하는 것이니, 수년 전 뿌린 씨앗의 결실을 이제야 거두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교양서로 유명한 일본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의 로고는 밀레의 그림 「씨 뿌리는 사람」인데, 창립자 이와나미 시게오가 스스로를 ‘씨 뿌리는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인문교양의 힘이란 남과 같은 것을 보면서도 뻔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를 품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는 것 아닐까?

수업 시간에 습득한 것들은 젊은 날 잠깐 머릿속에 자리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렇지만 싹은 물 준 것을 결코 잊지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고 했다. 식견(識見)이란 지식을 투입하는 그 순간이 아니라 추수 끝난 논에 남은 벼 그루터기 같은 흔적에서 돋아난다.

삶의 어떤 순간에만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게 있다. 설익어 어설플지라도 여백이 있어 매력적인 글. 이미 정교함을 획득해 버린 노회한 저술가는 구사 불가능한 미학이 그런 글에는 있다. 무턱대고 내지를 수 있는 치기 덕에 빛나는 통찰, 날것이라 푸른 물 뚝뚝 듣는 문장, 눈치 보지 않는 솔직함이 빚어내는 감동……. 이 모든 건 ‘처음’의 특권이자 판을 잘 모르는 신인(新人)의 특권, 젊음의 특권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내게 처음 해준 사람은 제임스 캐힐(James Francis Cahill, 1926~2014)이었다. 그는 중국 회화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나를 만난 2008년 10월 당시 82세였고 버클리대학교 명예교수였다. 학회 참석차 방한한 그를 광화문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했다. 당시 서른 살이었던 나는 인물·동정팀 기자였다. 캐힐이 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인터뷰 요청을 한 건 그의 대표작 『중국 회화사(Chinese Painting)』가 내 책장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회화사의 곰브리치’로 불리는 제임스 캐힐은 그림에 대한 단선적인 양식(style) 분석을 넘어서 양식이 지니는 역사·문화적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중국 회화사 연구에 큰 획을 그었다. 특히 서른네 살 때인 1960년 스위스의 한 출판사에서 낸 『중국 회화사』는 세계 각국에 소개되면서 중국 회화사 개설서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젊은 학자였던 그에게 독보적인 명성을 안겨준 이 책의 특징은 연대기 중심으로 서술된 기존 역사서와는 달리 문학적이고 서사적인 문체로 쓰였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일본어 통역병으로 복무했던 1948년 서울의 골동품 상점에서 송(宋)대 유명 화가들의 낙관이 있는 가짜 그림을 산 것을 계기로 중국 회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서, 캐힐은 말을 시작했다. "책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소설 같다.’고 비판했지만 나는 이를 칭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60년 전 서울에서의 그 일만 없었다면, 나는 역사가가 아니라 작가가 되었을 거예요."

30대에 쓴 첫 책에 아직도 만족하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그 후에도 책을 여럿 냈지만 다시는 그런 책을 쓰지 못했어요. 앞으로도 못 쓰겠죠. 지금은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는데도요. 그때 나는 굉장히 젊었지요.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 치기 어린 자부심 덕분에 그 책이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좋아하는 화가로 서정적 화풍을 특색으로 하는 남송(南宋) 마하파(馬夏派)의 쌍두마차 중 한 명인 하규(夏珪)를 꼽았을 때, 나는 이 노학자가 어떤 부류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질적으로 문학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인간과 문학의 인간. 나는 종종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실증의 세계인 역사와 허구의 세계인 문학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재미있는 것은 기질적으로 ‘역사의 인간’인 사람과 ‘문학의 인간’인 사람도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문학의 인간’인 나는 종종 ‘역사의 인간’들과 부딪친다. 나는 그들의 상상력 부족을 답답해하지만, 그들은 아마 나를 허황하다 여길 것이다.

내가 쓴 리포트의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남의 글이 이렇게 생생히 기억나는 이유는, 아마도 평생 우등생으로만 살아온 사람 특유의 ‘졌다.’라는 열패감, 동양미술 작품은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어서 싫다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 핑계일 뿐이었다는 깨달음,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봐.’라는 진로 고민 등 복잡미묘한 감정이 휘몰아쳤기 때문일 것이다.

화원 화가들의 그림을 일러 "문기(文氣)가 없다." 하시던 은사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게는 문기라는 게 없는 걸까? 나는 학자의 자질이 없나?’ 마음속 한 구석이 은근히 찔려오기도 했다. 아마도 결국은 취향의 문제였을 것이다. 나는 기교가 뛰어난 그림이 좋았다. 지금도 그림을 볼 때, 화가의 정교한 손맛을 중시한다. 범인(凡人)과 확연히 구별되는 예술적 재능이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마하파 그림을 알게 되면서 나는 동양 회화에는 ‘이야기’가 없어 재미없다 생각했던 편견을 버렸다. 은은한 먹빛 장막을 뚫고 들어가면 은근하게 도사린 이야기들이 있었다. 말을 아낌으로써 더 풍부해지는, 여백 덕에 더 또렷해지는 시정(詩情)과 서정(抒情)이 존재했다.

하규는 표면의 질감을 거의 나타내지 않고 나아가 화면의 보다 큰 면적조차 안개 속에 모호하게 함으로써, 더욱더 전체 구성을 단순화시키고 딱딱한 형태를 배제했다. 선은 최소한으로 감소되고 그 대부분은 단지 선염(渲染)의 언저리에 불과하지만, 이 최소한도가 너무나 웅변적이어서 전체 구도가 여기에 집중된다.
? 제임스 캐힐, 조선미 옮김, 『중국 회화사』(열화당)에서

문학적이며 아름다운 문장. 누군가는 역사가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묘사가 많고 치렁치렁하다고 하겠지만, 그림을 보지 않고도 그림을 그려볼 수 있도록 하는 그의 문장이 나는 좋았다.

少年不識愁滋味
소년 시절 슬픈 맛이 어떤 건지 몰라
愛上層樓
높다란 누대에 오르길 좋아했지요
愛上層樓
높다란 누대에 오르고 올라
爲賦新詞强說愁
새 노래 지으려고 억지로 슬픔을 짜냈지요.

而今識盡愁滋味
지금은 이제 슬픈 맛 다 알기에
欲說還休
말하려다 그만둔다
欲說還休
말하려다 그만두고
却道天凉好個秋
아! 서늘해서 좋은 가을이어라 했지요.
? 우리말 번역은 유병례, 『송사, 노래하는 시』(천지인)에서

살다 보면 노력하지 않아도 인생의 슬픈 맛이 저절로 내 안에서 우러나게 되어 있는 건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싶다가도 이내 억지로 짜낸 젊은 슬픔의 힘으로만 부를 수 있는 노래라는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캐힐이 내게 알려준 것처럼.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남송 황실의 화가였던 마린은 봄날 밤, 꽃이 만개한 정원에서 잠든 사이 꽃이 떨어질까 염려해 촛불을 밝히고 앉아 활짝 핀 꽃을 감상하고 있는 인물을 둥근 부채에 그려 넣었다. 이 그림은 소식의 시 「해당(海棠)」의 마지막 구절 "只恐夜深花睡去 故燒高燭照紅粧"(밤이 깊어 꽃이 잠들어 져버릴까 두려워 촛불 높이 밝혀 붉은 모습 비추네.)에서 화제(畵題)를 가져왔다 알려졌는데, 이백(李白)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국내판 『중국 회화사』의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헷갈린) 젊은 캐힐은 이렇게 썼다.

삶이란 퍽 짧으므로 우리는 촛불을 밝히고 어둠의 시간을 충분히 이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제임스 캐힐, 조선미 옮김, 『중국 회화사』(열화당)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은 모범생에 대한 변명이자 ‘그 많던 모범생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며,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온 사람의 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교양이란 겹의 언어이자 층위가 많은 말, 날것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일, 세 치 혀 아래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넣어두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제 도쿄로 간다. 대학에 들어간다. 유명한 학자를 만날 것이다. 취미와 품성을 갖춘 학생들과 교제하게 될 것이다. 도서관에서 연구에 몰두한다. 저술을 한다. 세상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다. 어머니가 기뻐한다.
? 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산시로』(현암사)에서

예술은 사물을 재현하거나 형식을 구축하거나 경험을 표현하는 의식적인 인간행위인데 이 경우 그러한 재현, 구축 또는 표현의 산물은 기쁨이나 흥분, 충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 W. 타타르키비츠, 손효주 옮김, 『미학의 기본 개념사』(미술문화)에서

르네상스 건축가이자 이론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1404~1472)는 『회화론』에서 그림을 프레임을 가진 일종의 ‘창문’으로 보았다. 그림은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의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원근법 등을 설명했다. 그는 특정 주제만 특별히 그려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istoria’라 불렀다.

이론의 복잡성과 상관 없이 당시 나는 창(窓)이란 말이 무척 아름답다 여겼다. 그림은 내게 항상 세상을 보는 창이 되어주었으니까.

트렌치에 들어가 지층의 단면을 살펴보는 걸 좋아했다. 켜켜이 쌓인 지층의 빛깔이 다른 것은 지층마다 누적된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층위마다 다른 시간과 역사, 문화와 삶이 녹아 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웠다.

집단의 이름으로 강제되는 모든 활동을 혐오했다. 마임이니 구호니 행진이니 하는 것들도 딱 질색이었다.

봄에, 발굴장에 벚꽃이 후두둑 떨어졌다. 벚꽃은 트렌치 안에도, 밖에도 쌓여서 인간이 손댄 흔적을 여리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무화시켰다.

박물관에 끝까지 남은 선배들과 친구는 훌륭한 고고학자가 되었다. 흙과, 땅과, 땀과, 무덤을 택한 그들을 존경한다.

한때의 고고학도는 안다. 기억과 마음에도 층위(層位)가 있다는 것을. 나는 종종 ‘내 안의 깊은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층위마다 켜켜이 쌓인 묵은 이야기들을 헤집어 꺼내 헹군다. 깨어진 토기 조각을 이어 붙이듯, 복원한다.

사람을 사귈 때면 항상 마음속 지층을 가늠해 본다. 이 사람은 어느 층위까지 내게 보여줄 것이며, 나는 내 안의 어떤 층위까지 그를 허용하고 인도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층위마다 차곡차곡 고인 슬픔과 눈물과 어두움과 절망과 상처와 고통, 기쁨과 웃음과 약간의 빛의 흔적……. 나는 손을 내밀며 상대에게 묻는다. 더 깊은 곳까지 함께 내려가 주겠냐고, 그 어떤 끔찍한 것을 보게 되더라도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봄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산다. 신들은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 갑옷을 입은 바다에서, 자연의 빛깔 그대로의 푸른 하늘에서, 꽃으로 덮인 폐허에서, 그리고 돌무더기 안에서 커다란 거품으로 부서지는 빛 속에서 말한다.

티파사는 알제리의 해변 도시인데 고대 카르타고 유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알제리에서 나고 자란 카뮈는 티파사를 사랑했지만 "절대 하루를 넘도록 티파사에서 머무르지는 않았다. 어떤 것을 충분히 보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듯이, 어떤 풍경을 너무나 봐버리는 순간이 언제나 오게 마련"이므로.

불어의 리에종(liaison, 연음)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 어렵다. 그렇지만 때때로 저 문장들을 입 안에서 굴려본다. 온몸의 털끝 하나하나까지 곤두세우는 예민한 감각을 느끼고 싶을 때, 자연 그대로의 육체를 햇볕 아래 내어주고 마냥 쾌락에 취하고 싶을 때, 정신을 아득한 끝자락까지 몰고 가는 향기에 전율하고 싶을 때……. 불어는 감각의 언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순전히 카뮈의 『결혼』 때문이다.

프린트물의 첫 장에 적힌 제목 "Noces"의 위에 f.라고 적어 단어의 성별이 여성임을 표시하고, 아래에 발음기호를 적어놓은 대학교 1학년 때의 나. "자연과 인간 사이의 결혼"이라고 적은 아래엔 "이방인: 자연과 인간 간의 divorce"라는 보충 설명까지 덧붙여 적어놓았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되는 모범생답게 착실하게 선생님의 설명을 받아 적은 셈인데, 그 덕에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기억할 수 있으니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했던 세상의 모든 ‘범생이’들에게 경의를!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공용어로 통했던 불어를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려워했다는 일화도 흥미를 자극했다.

외국어는 결국 단어와 문법 싸움이고 그 입구엔 지겨운 암기의 과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곱은 손을 비비며 불기 없는 싸늘한 교실에 앉아 불어 교과서를 들여다보던 학기 막바지의 겨울이 생각난다. 수업을 맡은 이는 막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불문과의 여자 강사였다. 불어로 말할 때면 멋들어진 비음(鼻音)을 썼고, 세련된 스카프를 즐겨 둘렀다. 수업은 재미없었지만, 동경하던 파리지엔을 마침내 만나게 되었다는 자그마한 기쁨은 있었다.

기말시험을 보던 날이었다. 강사는 감독을 하며 교실 안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시험문제를 푸느라 잔뜩 긴장해 앉아 있는 내 곁을 그녀가 스쳐 지나갔다. 초콜릿 향기가 확, 풍겼다. 짙고 달콤하며 매혹적인 향기. 차가운 대기와 맞부딪친 향의 입자가 형체는 없지만 묵직한 막을 형성하며 일순간 나를 둘러쌌다. 뜨겁고 진한 초콜릿 음료가 목구멍을 통해 꿀꺽 넘어가며 따뜻하게 뱃속을 데우는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로알드 달의 『초콜릿 공장의 비밀』을 처음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 달콤하고 유혹적인데, 어딘지 모르게 위로가 되는 냄새였다. 불어를 ‘감각의 언어’라 느끼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 향수의 이름은 지금까지 모른다. 여러 향수를 뿌려보았지만 아직 그만큼 인상적인 향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불란서의 향’이라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맥락을 고민하며 이해한 단어는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내 것이 되었다.

그 수업 덕에, 『결혼』이 결혼생활에 대한 단상이 아니라 인간, 혹은 인간이 만든 것들과 자연의 결합에 대한 은유라는 것을 배웠다. 20대의 카뮈는 생(生)에서 오는 감각을 뜨겁게 사랑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불어든 무엇이든 단번에 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시간을 들여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의 힘을 깨닫게 되었다.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잡아채는 것처럼 삶에 대한 맹렬하고도 동물적인 감각이라는 것을 나는 알아챈다. 한창 두뇌 활동이 왕성한 20대에 더듬거리며, 서툴게나마 『결혼』을 끝까지 원어로 읽었기 때문이다. 번역서의 문장들은 매끄럽고 아름답지만 내 것이 아니므로 관념적이고 피상적이다. 원어로 읽으면 다르다. 날것 그대로의 뜻을 곱씹게 되므로 구체적으로 내 것이 되어 손에 잡힌다. 몽환적이고 나른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격렬하게 살이 부딪치고 실핏줄이 터져 뜨거운 피가 튀는 것 같은 생동감이 깃든 글이라고, 나는 『결혼』을 기억한다.

나는 엉겁결에 초등학교 입학 전에 천자문을 거의 다 떼고는 영재 소녀라도 된 양 외할아버지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한자를 낯설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게 조기교육의 성과긴 했다.

"한자를 제대로 익히려면 중국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번역 과제를 내주는 동시에 중국 문화에 관한 책을 읽고 리포트를 써 오라고 했다. 나는 미술사 전공자라는 핑계로 중국 회화(繪畵)에 대한 책을 읽고 리포트를 작성해 제출했다.

한자가 중국 문자라는 인식을 명확하게 갖추게 된 것이 그 수업을 통해 얻게 된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였다. 그 전까지의 세계에서 한자와 나 사이에는 국경이 없었다. 수업 이후에는 명확한 경계가 생겼다. 오랫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던 나라가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지배국의 글자라는 인식이 싹텄는데, 그렇다고 해서 치욕적이라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다. 한글 창제로부터 500년이 훌쩍 지난 시대에 한자가 굴욕의 상징이 되기엔 너무 약했다. 나는 이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내 언어생활의 결을 한층 정교하고 풍요롭게 만들며,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고 생각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식견이 짧다는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말한 ‘肉食者鄙(육식자비)’(고기를 먹는 자는 비천하다.)라든가 ‘齊師伐我(제사벌아)’(제나라 군대가 우리를 공격했다.) 같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편(莊公篇)」의 문장으로 주어와 술어 관계를 습득하며 시작한 수업을 지루하다 여기지 않고 재미있어하며 따라갔다.
‘公將戰(공장전)’(공이 장차 싸우려 했다.)이라는 문장을 놓고 ‘공정한 장수가 싸운다.’라고 해석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즐거웠다. 이 문장에서 ‘장수 장(將)’이 ‘장차’라는 뜻의 부사로 사용된 것처럼, 글자 하나의 쓰임이 제한되어 있지 않고 여러 품사와 여러 뜻으로 다채롭게 쓰인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문장을 뜯어보며 해석을 고민하다 보면 생각의 한계가 확장되고 상상력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만 같았다. 모호했지만 그 모호함 때문에 오히려 한문 수업이 재미있었다.

당시엔 ‘將進酒杯莫停(장진주배막정)’(술잔 권하노니 멈추지 마시게나.)이라는 문장에 힘을 주어 술잔을 부딪치며 호기롭게 "장진주배막정!" 포효하였지만, 이제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난 40대의 내겐 이 구절이 사무친다.

君不見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高堂明鏡悲白髮
고대광실 밝은 거울을 비추며 백발을 슬퍼하는데
朝如靑絲暮成雪
아침녘 검은 머리 해저물녘 눈빛처럼 희어진 것을?
人生得意須盡歡
사람 일생 좋을 때에 맘껏 즐길 일이니
莫使金樽空對月
금술통 헛되이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 일.

"고향 떠나온 달밤"이라는 뜻의 「靜夜思」는 거의 평생을 유랑하며 보낸 이백이 26세 때 양주(揚州)의 객사에서 쓴 것이다. 스무 살에 고향을 떠나온 나는 이백을 흉내 내 고개 들어 달을 바라보다가 고개 숙여 고향의 달을 그려보면서 궁금해하곤 했다. 『그림 없는 그림책』을 쓴 덴마크의 안데르센부터 당의 이백까지 왜 고향을 떠나온 자들은 하나같이 달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걸까? 타향에서나 고향에서나 변함 없는 천체를 보니 옛 생각이 나는 것이라면, 왜 해를 보면서는 그리운 마음이 들지 않는 걸까?

집값보다는 ‘판교(板橋)’라는 지명이 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도 흔한지를 궁금해했다. "‘널빤지를 걸쳐 놓은 다리’라는 뜻이니 곳곳에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누군가 말했다. 경기도 판교도 운중천 널빤지 다리 부근을 ‘너더리(널다리) 마을’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어 끼어들었다. "중국 옛글에서는 관용적으로 ‘판교’를 ‘친구를 만나는 곳’으로 쓰기도 한다잖아요."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며 어디서 들었냐고 물었다. "20년 전 대학교 1학년 때, 교양 한문 시간에 배웠어요!"

그는 한시에 많이 등장하는 ‘남포(南浦)’(남쪽 포구)가 특정 지명이 아니라,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이 「河伯(하백)」에서 "送美人兮南浦(송미인혜남포)"(남포에서 그대를 떠나보내네.)라고 읊은 이후 ‘남포’라는 단어가 정인(情人)을 떠나보내는 곳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고려 시대에 정지상의 시 「送人(송인)」에도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남포에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라는 구절이 등장하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판교’를 예시로 들었다.

기록은 기억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친구를 ‘만나는 곳’이 아니라 ‘보내는 곳’이었구나. 저녁 자리의 이들에게 문자를 보내 실수를 정정하고 나니, ‘판교’가 친구를 보내는 곳이 된 전고(典故)가 궁금해졌다. 인터넷을 뒤져 오래전 그 한문 수업 선생님의 연락처를 찾아내 이메일을 보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에 인사드립니다. 20년 전 수업을 들었을 때 선생님께서 한문의 관용적 표현을 설명하시며 ‘판교(板橋)’의 경우 친구를 보내는 곳이라고 말씀 주셨는데요……." 한문 교재에서 판교에 대한 필기 부분을 사진 찍어 첨부한 그 이메일의 마지막을 나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20년 전 선생님께 한문을 배운 것이 한문 공부를 한 마지막 기회였고 거의 잊어버렸으나, 그래도 밑둥은 약간 남아 살아가는 데 간혹 힘이 되곤 합니다."

주말인데도 답장은 한 시간 만에 왔다. 그는 불쑥 연락해 온 옛날 수강생을 무척 반가워하며 "‘판교’라는 단어는 당나라 시인 온정균(溫庭筠)의 시 「送人東遊(송인동유)」의 한 구절인 ‘鷄聲茅店月(계성모점월)/ 人迹板橋霜(인적판교상)’(새벽닭은 초가 주막 달빛 아래 울고/ 먼저 간 이는 서리 내린 판교에 발자국 남겨놓았네.)이 절창으로 여겨져 많이 유명해졌을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머릿속에 어슴푸레 남아 있던 ‘교양으로서의 판교’가 그렇게 20년 만에 비로소 명징해졌다. ‘교양(culture)’이란 원래 경작(耕作)을 뜻하는 것이니, 수년 전 뿌린 씨앗의 결실을 이제야 거두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교양서로 유명한 일본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의 로고는 밀레의 그림 「씨 뿌리는 사람」인데, 창립자 이와나미 시게오가 스스로를 ‘씨 뿌리는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인문교양의 힘이란 남과 같은 것을 보면서도 뻔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를 품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는 것 아닐까?

수업 시간에 습득한 것들은 젊은 날 잠깐 머릿속에 자리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렇지만 싹은 물 준 것을 결코 잊지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고 했다. 식견(識見)이란 지식을 투입하는 그 순간이 아니라 추수 끝난 논에 남은 벼 그루터기 같은 흔적에서 돋아난다.

삶의 어떤 순간에만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게 있다. 설익어 어설플지라도 여백이 있어 매력적인 글. 이미 정교함을 획득해 버린 노회한 저술가는 구사 불가능한 미학이 그런 글에는 있다. 무턱대고 내지를 수 있는 치기 덕에 빛나는 통찰, 날것이라 푸른 물 뚝뚝 듣는 문장, 눈치 보지 않는 솔직함이 빚어내는 감동……. 이 모든 건 ‘처음’의 특권이자 판을 잘 모르는 신인(新人)의 특권, 젊음의 특권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내게 처음 해준 사람은 제임스 캐힐(James Francis Cahill, 1926~2014)이었다. 그는 중국 회화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나를 만난 2008년 10월 당시 82세였고 버클리대학교 명예교수였다. 학회 참석차 방한한 그를 광화문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했다. 당시 서른 살이었던 나는 인물·동정팀 기자였다. 캐힐이 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인터뷰 요청을 한 건 그의 대표작 『중국 회화사(Chinese Painting)』가 내 책장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회화사의 곰브리치’로 불리는 제임스 캐힐은 그림에 대한 단선적인 양식(style) 분석을 넘어서 양식이 지니는 역사·문화적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중국 회화사 연구에 큰 획을 그었다. 특히 서른네 살 때인 1960년 스위스의 한 출판사에서 낸 『중국 회화사』는 세계 각국에 소개되면서 중국 회화사 개설서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젊은 학자였던 그에게 독보적인 명성을 안겨준 이 책의 특징은 연대기 중심으로 서술된 기존 역사서와는 달리 문학적이고 서사적인 문체로 쓰였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일본어 통역병으로 복무했던 1948년 서울의 골동품 상점에서 송(宋)대 유명 화가들의 낙관이 있는 가짜 그림을 산 것을 계기로 중국 회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서, 캐힐은 말을 시작했다. "책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소설 같다.’고 비판했지만 나는 이를 칭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60년 전 서울에서의 그 일만 없었다면, 나는 역사가가 아니라 작가가 되었을 거예요."

30대에 쓴 첫 책에 아직도 만족하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그 후에도 책을 여럿 냈지만 다시는 그런 책을 쓰지 못했어요. 앞으로도 못 쓰겠죠. 지금은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는데도요. 그때 나는 굉장히 젊었지요.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 치기 어린 자부심 덕분에 그 책이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좋아하는 화가로 서정적 화풍을 특색으로 하는 남송(南宋) 마하파(馬夏派)의 쌍두마차 중 한 명인 하규(夏珪)를 꼽았을 때, 나는 이 노학자가 어떤 부류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질적으로 문학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인간과 문학의 인간. 나는 종종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실증의 세계인 역사와 허구의 세계인 문학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재미있는 것은 기질적으로 ‘역사의 인간’인 사람과 ‘문학의 인간’인 사람도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문학의 인간’인 나는 종종 ‘역사의 인간’들과 부딪친다. 나는 그들의 상상력 부족을 답답해하지만, 그들은 아마 나를 허황하다 여길 것이다.

내가 쓴 리포트의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남의 글이 이렇게 생생히 기억나는 이유는, 아마도 평생 우등생으로만 살아온 사람 특유의 ‘졌다.’라는 열패감, 동양미술 작품은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어서 싫다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 핑계일 뿐이었다는 깨달음,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봐.’라는 진로 고민 등 복잡미묘한 감정이 휘몰아쳤기 때문일 것이다.

화원 화가들의 그림을 일러 "문기(文氣)가 없다." 하시던 은사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게는 문기라는 게 없는 걸까? 나는 학자의 자질이 없나?’ 마음속 한 구석이 은근히 찔려오기도 했다. 아마도 결국은 취향의 문제였을 것이다. 나는 기교가 뛰어난 그림이 좋았다. 지금도 그림을 볼 때, 화가의 정교한 손맛을 중시한다. 범인(凡人)과 확연히 구별되는 예술적 재능이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마하파 그림을 알게 되면서 나는 동양 회화에는 ‘이야기’가 없어 재미없다 생각했던 편견을 버렸다. 은은한 먹빛 장막을 뚫고 들어가면 은근하게 도사린 이야기들이 있었다. 말을 아낌으로써 더 풍부해지는, 여백 덕에 더 또렷해지는 시정(詩情)과 서정(抒情)이 존재했다.

하규는 표면의 질감을 거의 나타내지 않고 나아가 화면의 보다 큰 면적조차 안개 속에 모호하게 함으로써, 더욱더 전체 구성을 단순화시키고 딱딱한 형태를 배제했다. 선은 최소한으로 감소되고 그 대부분은 단지 선염(渲染)의 언저리에 불과하지만, 이 최소한도가 너무나 웅변적이어서 전체 구도가 여기에 집중된다.
? 제임스 캐힐, 조선미 옮김, 『중국 회화사』(열화당)에서

문학적이며 아름다운 문장. 누군가는 역사가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묘사가 많고 치렁치렁하다고 하겠지만, 그림을 보지 않고도 그림을 그려볼 수 있도록 하는 그의 문장이 나는 좋았다.

少年不識愁滋味
소년 시절 슬픈 맛이 어떤 건지 몰라
愛上層樓
높다란 누대에 오르길 좋아했지요
愛上層樓
높다란 누대에 오르고 올라
爲賦新詞强說愁
새 노래 지으려고 억지로 슬픔을 짜냈지요.

而今識盡愁滋味
지금은 이제 슬픈 맛 다 알기에
欲說還休
말하려다 그만둔다
欲說還休
말하려다 그만두고
却道天凉好個秋
아! 서늘해서 좋은 가을이어라 했지요.
? 우리말 번역은 유병례, 『송사, 노래하는 시』(천지인)에서

살다 보면 노력하지 않아도 인생의 슬픈 맛이 저절로 내 안에서 우러나게 되어 있는 건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싶다가도 이내 억지로 짜낸 젊은 슬픔의 힘으로만 부를 수 있는 노래라는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캐힐이 내게 알려준 것처럼.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남송 황실의 화가였던 마린은 봄날 밤, 꽃이 만개한 정원에서 잠든 사이 꽃이 떨어질까 염려해 촛불을 밝히고 앉아 활짝 핀 꽃을 감상하고 있는 인물을 둥근 부채에 그려 넣었다. 이 그림은 소식의 시 「해당(海棠)」의 마지막 구절 "只恐夜深花睡去 故燒高燭照紅粧"(밤이 깊어 꽃이 잠들어 져버릴까 두려워 촛불 높이 밝혀 붉은 모습 비추네.)에서 화제(畵題)를 가져왔다 알려졌는데, 이백(李白)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국내판 『중국 회화사』의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헷갈린) 젊은 캐힐은 이렇게 썼다.

삶이란 퍽 짧으므로 우리는 촛불을 밝히고 어둠의 시간을 충분히 이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제임스 캐힐, 조선미 옮김, 『중국 회화사』(열화당)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