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내게 시는 그림이었다.

Before man came to blow it right
The wind once blew itself untaught,
And did its loudest day and night
In any rough place where it caught.

Man came to tell it what was wrong:
It hadn’t found the place to blow;
It blew too hard ? the aim was song.
And listen ? how it ought to go!

He took a little in his mouth,
And held it long enough for north
To be converted into south,
And then by measure blew it forth.

By measure. It was word and note,
The wind the wind had meant to be ?
A little through the lips and throat.
The aim was song ? the wind could see.

인간이 바람을 제대로 불게 하기 전에
한때 바람은 제멋대로 불었다.
밤낮으로 가장 큰 소리를 내며
바람이 처한 어떤 험한 곳에서든.

인간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하기 위해 왔다.
제대로 불 장소를 찾지 못했구나.
너무 세게 불었어 ? 목표는 노래잖아
들어라, 이렇게 하는 거다!

그는 바람을 조금 입에 넣고
북향이 남향으로 변할 만큼
충분히 길게 머금고 있다가
리듬에 맞춰 계속 불어 내었다.

박자에 맞추니, 그건 단어와 음표였다.
바람이 의도한 그 바람 ?
아주 약간 입술과 목을 통해.
목표는 노래였다 ? 바람은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말 번역은 당시 수업 내용을 참고해 직접 했다.)

「The Aim Was Song(목표는 노래)」을 배운 후로는 달라졌다. 인간이 자연에 강약을 주어 시를 만들어낸 것이라며 시의 기원을 아름답게 빚어낸 이 시를 알게 된 후, 프로스트는 시가 왜 노래인지 알려준 시인으로 마음속에 남게 되었다.

나는 꼬맹이 적 아버지가 그려준 회화적 세계를 딛고 음악적 세계로 한 발짝 움직이게 되었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일군 성장이었다.

때론 인정욕구가 한 사람의 중요한 시기를 좌우하기도 한다. 나의 대학 시절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로 점철돼 있었다.

사랑받는 딸이었지만 스스럼 없는 부녀관계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칭찬에 인색했고 평가에 냉정했다. 영민한 딸이 교만해질까 두려워 일부러 엄격하게 굴었다는데 나는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밀쳐 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운이 좋았어. 내가 대학원을 마칠 때쯤 국내에 대학이 많이 생겼거든. 그런데 네게도 나만큼 운이 따르리라는 보장은 없다. 서른 넘어서까지 밥벌이를 못한다는 게 어떤 건 줄 아니? 네 마음이 먼저 괴로워서 못 견딜 거다."

모범생답게,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일단 공부를 잘하면, 열심히 하면, 좋은 성적을 받으면, 그래서 내가 학자의 길을 가기에 적합한 자질을 가졌다는 걸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면, 그러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마지막 공부일지도 모르니까, 소중한 순간이니까, 한 시간이라도 허투루 쓰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자고…….

강의실과 집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공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에 늘 수강 가능 학점을 꽉꽉 채워 들었고, 계절학기도 들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세상을 멸망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짚었던 ‘욕망(desire)’이 나의 대학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 욕망 때문에 너무나 괴로웠는데, 지금은 덤덤하다. 시간은 많은 것을 치유한다.

‘영시의 이해’ 수업을 들을 때 가장 알고 싶었던 시인은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였다. 「애너벨 리」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였다

황동규 선생님은 그 대신 에밀리 디킨슨(1830~1886)과 실비아 플라스(1932~1963)를 힘주어 가르쳤다. 그는 예민한 여성의 비범한 예술성을 귀히 여겼다.

임신한 자신을 일컬어 그저 ‘수단(means)’이자 ‘새끼 밴 암소(a cow in calf)’라며 자조하는 실비아 플라스의 「메타포(Metaphors)」를 가르치며 그는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예민하고 똑똑한 여자가 임신한 자신의 몸을 긍정하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아시아계 여성 역할을 슬프도록 현실적으로 그려낸 샌드라 오는 드라마 초반에 "나는 어떻게 아시아 여자가 에밀리 디킨슨을 가르칠 수 있냐는 말도 들었다."며 분개하는데, 나는 그에게 "아시아 남자도 에밀리 디킨슨을 잘만 가르치더라."는 말을 들려주며 위로하고 싶었다.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
That perches in the soul ?
And sings the tune without the words ?
And never stops ? at all ?

And sweetest ? in the Gale ? is heard ?
And sore must be the storm ?
That could abash the little Bird
That kept so many warm ?

I’ve heard it in the chillest land ?
And on the strangest Sea ?
Yet ? never ? in Extremity,
It asked a crumb ? of me.

희망은 날개 달린 것 ?
영혼의 횃대에 내려앉아
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며 ?
결코 ? 멈추지 않네 ?

돌풍 속에서도 가장 달콤한 노래 들려왔지 ?
그렇게 많은 이를 따뜻이 감싸준 ?
그 작은 새를 당황시킬 수도 있는
태풍은 매서웠으리라 ?

나는 가장 추운 땅 ?
가장 낯선 바다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들었지만 ?
그러나 ? 결코 ? 극한 속에서도 ? ,
그것은 내게 ? 빵 부스러기 하나 청하지 않았네.
(우리말 번역은 내가 했다.)

지치고 피곤해서 세상 만사가 다 부정적으로 보이던 날이었다. 디킨슨의 희망은 빵 부스러기 하나 달라 하지 않고 공짜로 주어졌나 보지만, 나의 희망은 참으로 욕심이 많아서 부스러기(crumb)가 아니라 덩이(loaf)로 빵을 갖다 바쳐도 만족할 줄을 모르는구나.

부잣집 딸들이나 가는 과. 내가 대학을 다닐 당시 우리 과에 대한 이미지는 그랬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 고고학도 미술사도 태생적으로 귀족들의 학문이긴 했다.

석사학위를 따면 국공립 박물관 및 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지원할 자격이 주어지므로 인문대치곤 드물게 확실한 취직 자리가 있어 의외로 쏠쏠한 학과였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그랬다.

세상에는 여러 미감(美感)이 있겠지만 인도의 미감에는 나의 미감과는 어딘가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다. 시끄럽고 요란스럽게 느껴졌다.

그 시절에는 대학이라는 권위에 눌려 그 느낌을 차마 인정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겠다. 취향에 맞지 않는 이미지를 계속해서 보고 외우면서 시각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다.

나는 고통이라는 존재가 현현한 것만 같은 그 불상이 나의 고통을 대신 짊어져 주고 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 앞에 우유죽 한 그릇 바치며 엎드려 ‘나’라는 자그마한 우주를 온전히 떠맡기고 싶었다.

나는 불교보다는 힌두교, 정확히 말해 힌두교 사상이 더 흥미로웠다. 그 수업을 듣기 전에는 어디에서도 힌두교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새롭게 알게 된 종교의 독특한 논리에 이내 매료되었다.

영생의 약(藥) 암리타를 얻기 위해 천년 동안 우유의 바다를 휘젓는 신(神)들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우유를 휘저으면 버터가 만들어져야만 할 것 같은데, 힌두 신화에 따르면 그 우유 바다에선 암리타가 들어 있는 호리병을 지닌 신들의 의사 단반타리뿐 아니라 세계가 탄생한다.

무엇보다 나를 끌어들인 것은 ‘다르마(dharma, 法)’라는 개념이었다. 다르마, 즉 세계를 지키는 도덕 질서의 다리가 성스러운 황소처럼 네 개인 시대 ‘크리타 유가(Krita Yuga)’에 세상은 평화롭고 규율에 따라 바람직하게 움직이지만, 시간이 흘러 다리가 세 개, 두 개로 줄어들고 마침내 하나가 되어 누란지위(累卵之危)에 이르는 시기인 ‘칼리 유가(Kali Yuga)’가 도래하면 세상은 무법의 암흑천지가 된다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강렬했다.

다르마가 재미있었던 것은 그것이 절대적인 규율이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힌두교에서는 각 카스트에 부여되는 다르마가 모두 다르다고 여긴다.

수업을 듣는 동안 ‘나의 다르마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학생의 다르마는 공부라는 결론으로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논어의 "君君臣臣父父子子"(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답게)와도 비슷한 덕목이지만, 공자의 그 말보다 힌두교의 ‘다르마’가 훨씬 더 친숙하게 느껴져서 요즘도 가끔씩 ‘기자의 다르마는 뭘까?’ 하고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학자에게 주전공이란 젊은 날 가장 애정을 가지고 공부했던 분야일 것이다. 사랑과 열정을 쏟아 부은, 그래서 자신 있는 과목을 큰 부담 없이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일까? 인도미술사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내준 기말 과제는 대학 시절 내가 들은 그 어떤 강의보다도 창의적이었다.

(rasa)’(예술이 주는 즐거움이나 풍미)

창조의 신 브라마, 유지의 신 비쉬누, 파괴의 신 시바가 ‘트리무르티’라는 힌두교의 삼위일체를 이루듯, 그 셋은 결국 하나였다.

어리기 때문에 겁 없이 무장해제할 수 있었던 자아의 민낯과 마주치는 일이,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내면을 철갑으로 둘러싼 40대의 내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어서다.

나는 이제 안다. 그 수업의 쓸모는 그 수업을 듣겠다 결심하던 시절의 내가, 그 수업이 무용하리라 여겼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무용한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쓸모 없는 것을 배우리라 도전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젊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자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는 걸. 그 시절 무용해 보였던 수많은 수업들이 지금의 나를 어느 정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간다라 미술의 발원지인 페샤와르는 파키스탄에 속해 있지만 아프간과의 접경 지역이라 탈레반의 침범이 잦을 거야."

이후 페르메이르는 내게 손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화가 중 하나가 되었다.(수업을 들었을 당시엔 ‘페르메이르’가 아니라 영어식 발음으로 ‘베르미어’라고 배웠다.) ‘북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대표작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는 물론이고 「편지」 등 다른 그림들도 여러 점 직접 보았지만 아쉽게도 ‘밀크메이드’는 아직까지 실물을 보지 못했다.

일상을 사랑하며 일과에 충실하는 것이 종교적 행위일 수도 있다는 가르침을 준 이 그림을 직접 보기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네덜란드에 가보고 싶다.

교양 강의에 ‘입문’이라 깊이가 있기 어려운 수업이었지만, 그렇게 한 학기 동안 서양미술사 전반을 죽 훑은 것이 이후 공부를 하는 데 주춧돌이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기본은 암기(暗記)였다.

주요 이미지들을 스크린에 띄워놓고 제목, 연대, 특성 등을 기술하는 슬라이드 테스트가 시험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시대를 관통하는 키(key)가 되는 이미지들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 훈련이, 세월이 오래 지난 후 그림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누구나 구글링 몇 번만 거치면 미술에 대해 제법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나는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의 강점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완전히 외워버려 자기 것이 된 이미지, ‘시대의 얼굴’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어떤 시대를 표상하는 이미지들에 대한 데이터가 체계적으로 뇌 속에 축적되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작품을 누리는 경험의 밀도를 향상시키고, 작품을 남에게 설명할 때의 깊이를 다르게 한다.

아직 뇌가 굳어버리기 전이라 외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할 때 암기로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토양 삼아 창의성이라는 꽃이 자라날 수 있을까? ‘창의적’이라는 것은 여러 연구 끝에 합의된 기본적인 지식을 소화해 바닥을 잘 다진 다음 단계에서의 도약을 뜻하는 것이지, 허공으로 무작정 날아오르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창의성’은 영화 속에나 있다.

서양미술사 입문 수업을 듣던 대학 2학년의 나는 작품의 맥락이며 역사적 의미 같은 걸 깊이 이해할 새도 없이 굶주린 새끼 짐승이 어미 젖을 빨듯 무조건 외워버렸다. 그 때의 나는 ‘이런 암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냉소했지만, 나이가 드니 삶의 어느 순간 옛 생각이 나면서 ‘그때 그 작품이 이런 의미였겠구나.’ 하고 이해되는 경험과 깨달음의 기쁨이 종종 찾아온다. 누군가는 ‘암기’를 ‘절반의 앎’이라며 비웃지만, 그 절반의 앎이 시작되지 않으면 완전한 앎이란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창의성과 깊이에 대한 공허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전에 주입식 교육부터 알차게 하며 단단히 터를 잡아놓았으면 좋겠다. 소수의 천재를 제외한 우리 범인(凡人)들에게, 창의성과 깊이는 그 터 위에 세월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차근차근 쌓아올리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인문학을 창의성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은 많다. 그렇지만 암기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상황이 기이하다. 주입식 입시 교육에 모두들 진절머리가 나서일까? 아니면 ‘토론식’ 서구 문화에 대한 열등감과 동경 때문일까?

테이블 클로스에 놓인 자수와 아플리케, 도자기의 섬세한 세공은 여성의 일로 폄훼되었던 수공예를 신성화하는 의미가 있다.

접시의 형태 역시 여성의 자궁을 형상화한 것으로, 저급하다 여겨졌던 여성의 신체를 거대화 및 신성화한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맹신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엔 나도 "지식 따윈 필요 없어. 그냥 느끼는 거야."라는 말을 즐겨 했지만, 이제는 그 생각이 오만이라는 걸 알겠다. 구상회화는 작품에 대한 정보 없이도 이미지의 아름다움만 만끽하며 보고 즐기는 데 무리가 없지만, 작품 자체의 시각적 구체성과 아름다움이 드문 개념미술작품을 볼 때는 ‘굳이 생각하지 마세요.

마흔 넘으면 서서히 알게 된다. 지금 연락하고 있는 사람들이 높은 확률로 노년을 함께할 친구가 되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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