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의 실수가(아이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미칠 영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특정 덕목에 대한 참된 이해는 도덕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자동적으로.

좋은 아빠가 무슨 뜻인지 아는 것, 참으로 아는 것은 곧 좋은 아빠가 되는 것과 같다.

열세 살을 어떻게 뚫고 지나가느냐는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철학자들조차 아직 풀지 못한 미스터리다.

멍청한 질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격언은 사실일까? 이 질문을 딸아이에게 물어보았더니, 아이는 겨우 보일 정도로 왼쪽 눈썹을 살짝 치켜뜬다. 즉 이런 뜻이다.아빠 질문 입력됐는데, 대답할 가치가 없어 보이니깐 나는 그냥 팬케이크랑 스냅챗으로 돌아갈게.
나는 소크라테스처럼 집요했다. 더 큰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멍청한 질문이라는 게 존재할까?"
아이가 휴대전화 화면에서 고개를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쨌거나 나는 아이가 생각하는 중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다 놀랍게도 아이가 입을 열었다.
"존재하지." 아이가 말했다. "멍청한 질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야." 말을 마친 아이는 다시 팬케이크와 휴대전화, 청소년 특유의 언짢은 태도로 돌아갔다.

검사가 아니라면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묻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다양한 방식으로 이 짓을 한다. 자기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아니면 성찰한 적이 없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더욱 강화하는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 질문을 한다.

진지한 질문에는 위험이 따른다. 마치 어두운 방 안에서 성냥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불빛이 방을 비췄을 때 괴물이 보일지, 경이로운 광경이 보일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성냥에 불을 붙인다. 그렇기에 진지한 질문은 자신감이 아닌, 10대와 같은 머쓱함과 어색함으로 머뭇머뭇 서투르게 발화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그보다 더 중요하고 용감한 행동은 없었다.

"왜 철학이었죠?" 내가 묻는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이유가 뭡니까? 소명을 느끼는 겁니다. 궁극적인 질문을 향한 소명이지요.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뭐지? 나는 왜 이곳에 있지? 인간은 의미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요, 그건 소명이었어요."

제이컵은 어머니가 계신 곳에서 처음으로 ‘닥터 니들먼’이라고 소개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어머니는 그 사람의 말을 끊고 지적했다. "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종류의 닥터는 아니에요."

"우리 문화에는 궁극적인 질문이 질문으로 존중받는 공간이 없어요. 우리가 가진 모든 제도와 사회 양식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만 최선을 다합니다."

문제를 경험하기 전에 해결하는 것은 식재료를 구매하기 전에 요리를 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크라테스 근처에 있거나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은 누구든 논쟁에 말려들기 쉽고,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든 간에 소크라테스가 졸졸 따라다닐 것이며, 결국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소크라테스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이의 질문이 성가신 것은 멍청한 질문이라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제대로 대답할 능력이 없어서다. 아이들은 소크라테스처럼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고, 그것은 길게 보면 도움이 될지언정 당장은 무척 짜증스러운 일이다.

피터 크리프트는 말한다. "다른 사람을 짜증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다. 열외자의 지위. 두둑한 뱃살. 늘 궁금해하며 여기저기로 떠도는 마음. 대화를 향한 사랑.

우리가 달라지는 지점은 바로 끈기다. 나는 실제든 상상 속에서든 싸움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엄청난 용기를 보여주었다. 기원전 432년에 있었던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놀라운 힘과 체력을 드러내며 친구 알키비아데스의 목숨을 구했다.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모욕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밝혀 일종의 지적 광합성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정원사였다. "마음속에 당혹스러움을 심고 그것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14 그가 좋아하는 것은 없었다.

"소크라테스, 나는 당신 말을 이해할 수 없소. 그러니 당신 말을 이해하는 다른 사람을 찾으시오. 당신은 폭군이오, 소크라테스. 이 논쟁을 끝내거나, 아니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이시오."

사람들은 왜곡된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착각한다. 심지어 자신이 안 맞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하루 종일 휘청거리며 가구에 부딪치고 사람들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내내 가구와 사람들을 탓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어리석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니들먼은 철학자가 견해라는 나이트클럽 문을 지키는 건장한 문지기와 같다고 말한다.

내 견해가 어떻게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다른 모든 교활한 지배자처럼 나의 의견 역시 내가 자기들을 불러들였다고 믿게 한다. 정말 내가 그랬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 말도 없이 나타나서 멋대로 내 옷을 걸쳐 입은 걸까?

시리처럼 평범한 질문은 표면 위에서 맴돈다. 깊이 있는 질문은 느리고 더 깊이 침잠한다.

"네, 질문을 사는 겁니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질문을 품는 거예요. 질문을 살아내는 거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해결책을 찾아버려요."

좋은 말 같다. 질문을 살아내면서 남은 평생을 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질문의 답은? 대답은 어디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철학이 받는 부당한 평가다. 철학은 말뿐이야. 질문만 끝없이 늘어놓고 대답은 없어. 언제나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는 않는 기차야.

철학도 분명 도착지에 관심이 있지만, 여행을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그저 똑똑한 대답이 아닌 ‘마음의 대답’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종류의 대답, 예를 들면 머리의 대답은 그만큼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그만큼 진실하지도 못하다.

마음의 대답에 도착하려면 인내심도 필요하지만 기꺼이 자신의 무지와 한자리에 앉으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끝없는 해야 할 일 목록에서 또 하나를 지우려고 성급히 문제 해결을 향해 달리는 대신, 의혹과 수수께끼의 곁에 머무는 것. 여기에는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조롱할 것이다. 내버려두라고, 제이컵 니들먼과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한텐 분배의 문제가 있다고, 제니퍼에게 말한다. 모든 특성이 충분히 주어졌지만 불공평하게 분배된 것이다. 예를 들면 털이 그렇다. 가슴과 콧구멍 속에는 털이 엄청 많지만 머리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충분히 성공하질 못했어."
제니퍼는 뭔가 심오한 말을 하거나 도망갈 궁리를 하는 사람이 그러하듯 잠시 말이 없었다. 다행히 제니퍼의 경우는 전자에 해당했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제니퍼가 말했다.
"성공이 어떤 모습이냐고?" 내가 말했다.
"그래,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나는 늘 성공을 미적 측면이 아닌 양적 측면으로만 여겼다.

왜 성공하고 싶으냐고? 그냥. 다들 그렇지 않나?얼마나 성공해야 충분하냐고? 지금 나보다 더.

제니퍼는 내게 그렇게 묻지 않았다. 성공이 어떤 모습이냐고 물었다. 제니퍼의 질문에는 개인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성공은나한테 어떤 모습이지? 그 모습을 본다면 내가 알아차릴 수 있을까?

좋은 질문은 그렇다. 사람을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프레임을 다시 짜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좋은 질문은 똑똑한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침묵을 끌어내기도 한다. 고

인도의 현자들은브라모디야brahmodya라는 시합을 펼쳤다. 참가자들의 목표는 절대적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시합은 언제나 침묵으로 끝이 났다.

제니퍼가 던진 하나의 질문이 내 머릿속에 수십 개의 질문을 일으켰다. 이제는 더 이상 제니퍼와의 대화가 아니라 나 자신과의 대화였다.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관점의 근본적 변화가 나타나리라는 희망에서, 내가 아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인정사정없는 자기 심문.

"사람들이 가끔 기차 안에서 경험하듯이,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뒤쪽으로 달리고 있고, 그러다 갑자기 진짜 방향을 깨닫게 된"17 것이다.

이제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지? 솔직히 말하면 아직 이 질문의 답을 찾지 못했고, 어쩌면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다.

오늘날 그리스 사람들은메타포라를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직판했다. 사람들이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았다. 사람들을 직접 찾아갔다.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결과 1번: 실질적인 결과를 내지 못하는 성찰하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자기 배꼽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데에는 나름의 즐거움이 있지만 그보다는 결과를 내는 것이, 더 나은 배꼽을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배꼽에 대해 생각하다’에는 ‘묵상하다’라는 뜻이 있다-옮긴이).

그것을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불렀다. 보통 ‘행복’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에는 사실 의미 있는 융성한 삶이라는 더 큰 뜻이 있다.

결과 2번: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건 지나치게 성찰하는 삶도 마찬가지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20라는 말로 쾌락의 역설(헤도니즘의 역설Paradox of Hedonism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을 설명했다.

행복은 붙잡으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행복은 부산물이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은 삶을 잘 살아낼 때 주어지는 뜻밖의 횡재 같은 것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낙천적이었고,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 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가 더 좋은 곳으로 갈지는 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반드시 잊지 말고 갚아주게나."
크리톤이 대답한다. "알겠네. 다른 할 말은 없는가?"
소크라테스는 대답이 없었다. 죽은 것이다.
이런 재미없는 결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학자들은 수백 년간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했다. 일부는 소크라테스의 이 마지막 말을 비관적으로 해석한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치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을 바쳤으므로, 소크라테스는 아마 삶이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질병과 같다는 뜻에서 그 말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삶의 커다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지라도 작은 것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 걸지도 모르겠다.

시민으로서, 또 친구로서의 의무를 간과하지 말 것. 명예로운 사람이 될 것. 다른 사람에게 수탉을 빚졌다면, 수탉을 갚을 것.

질문의 왕이 질문의 구름을 남기고 사라짐으로써 남은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궁금해하게 만든 것이 본인과 유쾌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는 것. 소크라테스는 도저히 못 배기고 우리 머릿속에 심어놓은 것이다.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우리가 경험할 또 하나의 질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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