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 곁에 있다. 심지어 이야기를 읽는 사람도 이런 동료애를 나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는 다른 어떤 독자보다도 고립되어 있다.(…) 이런 고독 속에서 소설의 독자는 누구보다 악착같이 책을 붙든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준비가, 이를테면 걸신들린 듯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2

데틀레프 폰 릴리엔크론의 운율에는 빈정거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말했다. 시인은 명성을 얻지 못하기가 힘들다. 살아생전 대중의 환심을 사지 못하면, 후대가 굶어 죽어간 그의 영웅적 행적을 칭송할 테니. 한 마디로, 판다는 것은 영혼까지 전부 팔아치운다는 것을 뜻했다.
- 피터 게이, 《쾌락 전쟁》3

나는 봉투를 찢는다, 나 지금 방콕이야
(…) 너는 네모난 봉투에서 이 푸른 사절들을 쏟아낸다.
널 세상에 잃었다는 느낌이 들 때,
계속 따라가기 힘들 때,
너의 엽서가 이렇게 말한다
"날 기다려줘."
- 앤 마이클스, 〈마사에게 온 편지〉6

전달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요. 전달자는 언제나 삼각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 메시지를 나르는 사람(사람이든 아니든), 메시지를 받는 사람. 그러니 삼각형을 그려보세요. 완벽한 삼각형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래전 나는 글쓰기 수업을 듣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지면을 존중하세요. 그게 여러분이 가진 전부니까요."
작가는 지면과 소통합니다. 독자 역시 지면과 소통합니다. 작가와 독자는 오직 지면을 통해서만 소통하지요. 이것이 글쓰기의 삼단논법입니다.

지면이란 존 르 카레의 소설에서 스파이들이 죽기 전 물에 젖은 신발에 작은 꾸러미를 넣어 메시지를 남기는 것처럼,7 보이지 않는 손이 독자더러 해독하라고 흔적을 남겨놓은 곳입니다. 약간은 터무니없지만 묘하게도 딱 맞아떨어지는 비유지요. 뭐니 뭐니 해도 독자도 일종의 스파이니까요.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이거예요. 첫째, 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둘째,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책의 기능, 그러니까 의무는 무엇인가? 작가가 생각하는 책의 역할은 무엇인가?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앞의 두 질문에서 파생한 것으로, 독자가 책을 읽고 있을 때 작가는 어디에 있나?

에밀리 디킨슨은 이 주제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나는 무명인이에요, 당신은 누군가요?
당신도 무명인인가요?
그러면 우리는 잘 어울리는군요!
말하지 마요! 그들이 떠들고 다닐 거예요, 알잖아요!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되는 건!
얼마나 눈에 띌까요, 개구리처럼
6월 내내, 흠모하는 늪지를 향해
자기 이름을 불러대는 것은!17

"무명인"은 작가입니다. 물론 독자도 "무명인"이지요. 그런 점에서 모든 책은 익명이고, 모든 독자도 그렇습니다. 읽고 쓰는 것은, 이를테면 연기하는 것과 극장에 가는 것과는 달리 둘 다 어느 정도의 고독, 나아가 어느 정도의 비밀주의를 전제로 하는 활동입니다.

나는 에밀리 디킨슨이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무명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봐요.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자, 눈에 보이지도 않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독자에게 말을 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작가라는 측면에서 말이지요.

책이 출간되면 모든 게 달라집니다. "그들이 떠들고 다닐 거예요." 에밀리 디킨슨은 이렇게 경고하지요. 정확한 지적이에요. 일단 책이 시중에 공개되면, 추정 독자는 친구나 연인, 또는 정체 모를 한 사람의 "무명인"과 같은 단 한 명일 수 없게 됩니다. 출판과 동시에 텍스트는 자기 복제를 하고, 독자는 더 이상 작가와 친밀한 일대일 관계를 맺을 수 없어요. 그 대신 책의 부수가 늘어나듯 독자가 엄청나게 늘면서 그 모든 무명인들이 한데 뭉쳐 책을 읽는 대중으로 변하지요.

19세기가 끝날 무렵, 글을 깨친 대중이 더 많아지면서 극성스런 부르주아(훨씬 더 극성스런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들이 판매 부수를 좌지우지하게 되고, 출판이 사업으로 변모하고, ‘명성’과 ‘인기’가 동일시되고, 수는 적지만 안목 있는 독자를 확보하는 게 중요해졌지요.

20세기에도 순조롭게 유지되었어요. 그레이엄 그린의 《사랑의 종말》의 한 인물을 볼까요. 행동이 단정치 못한 소설가 모리스 벤드릭스는 자신이 "세속적 성공"21을 거둠으로써 예술의 순수성을 해치게 될 거라는 걸 스스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그가 한 문학잡지에 자신에 대한 글을 기고하고 싶어 하는 비평가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나는 너무 잘 알았다.(…) 그가 나도 몰랐던 숨은 의미를 발견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나조차 이골이 난 내 결점들이 뭔지를. 결국 그는 생색을 내며 나를 서머싯 몸보다 좀 더 낫다고 평할 것이다. 왜냐면 몸은 인기가 좋고, 나는 아직 그 같은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아직은. 하지만 내가 성공을 못 했다 해도 작은 평론지들이 약은 형사들처럼 냄새를 맡고 찾아낼 것이다.22

평론가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도 독자들은 자신을 사랑할 거라고 자위하기 시작하면 진지한 작가로서의 수명이 끝나므로, 젊은 작가는 무엇보다도 잠재적 독자들을 주의해야 하지요.

"수많은 문학의 적들 가운데, 성공이 가장 교활하다"23라고 코널리는 말합니다.

"성공은 오직 인생의 황혼기에, 그것도 오직 적은 양만 복용해야 하는 독약이다."24 성공한 사람만 그렇게 말한다고 지적하면 좀스러워 보이려나요.

"계속 그렇게 가다가 어느 날 눈 떠보니 사람들에게 잊힌 자신을 발견하는"25 게 그들의 최후지요.

"고통받는 인류의 고귀한 마음을 이용하고 그것이 얼마나 큰 돈벌이가 되는지 알아낸 사람들은 가혹한 논평에도, 동료들의 경멸에도, 다수의 무관심에도 꿈쩍하지 않는다."26

찰리는 차기작으로 무슨 주제를 다룰지 고민하는 자신이 사기꾼처럼만 느껴집니다. 빈곤층이란 소재라면 이제 신물이 나서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은데, 그의 추종자들과 대중들은 그를 고귀한 작가라 단정 짓고 그의 펜 끝에서 빈자들에 대한 더욱 훌륭한 작품이 더 많이 탄생하기를 기대하거든요. 그가 다른 주제로 글을 쓰면 그들은 그가 얄팍하고 가벼워졌다고 생각할 게 뻔합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대중을, 위대한 ‘그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다고 느끼지요. 심지어 질타를 받지 않고 조용히 자살할 수도 없을 거라고요. "어느덧 그는 명성이라는 눈부신 탐조등을 달았다. 수백 개의 눈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실패나 자살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의 실패와 자살이 될 터였다."

전작을 반복하면서 ‘그들’을 만족시킬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그들’을 실망시킬 것인가. 더 최악은, ‘그들’을 만족시키려고 자기 복제를 했는데 오히려 복제라며 비난받는 경우입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작품(보통은 어린 시절 읽은 책이지요)이 있습니다. 내겐 그중 하나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에 실린 단편 〈화성인〉이지요.

남자는 화성인이 타인의 욕망에 따라, 그리고 그런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화성인 자신의 욕구에 따라 형상을 바꾼다는 사실을 깨닫고 톰을 데리러 갑니다. 하지만 화성인은 형상을 바꿀 수가 없어요. 새로운 가족의 소망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지요.

"그의 얼굴에 각자의 요구가 녹아들었다." 화성인은 알아볼 수 없는 다양한 형상의 웅덩이를 이루며 쓰러져 죽습니다.

책을 출간하고 논평을 받으면서, 친분도 없는 몇몇 사람들이 책에 적힌 내 이름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걸 보면서, 이 이야기는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런 거군. 내 얼굴이 녹고 있는 중이군."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진짜 화성인인 거야." 이는 많은 것을 설명해줍니다.

키츠는 주저하는 능력을 작가의 자질로서 높이 평가했는데,30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시각을 대변하는 캐릭터밖에는 쓰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지요.

주저하는 능력이 너무 지나치면 혼자 고심하다가 독자의 욕망과 두려움을 못 이기고 밀랍처럼 녹아내리지는 않을까요?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다른 얼굴을 쓰고 있을까요? 혹은 들러붙은 얼굴들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을까요?

책은 작가와 독자의 중간지점에서 어떤 기능 또는 의무를 맡는가?

어떤 작품에나 공통으로 던질 수 있는 진짜 질문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그 작품이 살아 있는가, 아니면 죽어 있는가’라고요. 어쩌다 보니 그 말에 동의하긴 했는데 시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는 어떻게 결정될까요? 생물학적 정의를 보면 살아 있는 것들은 성장하고 변화하며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반면, 죽은 것들은 아무 활동성도 띠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텍스트가 성장하고 변화하고 자손을 낳을 수 있다는 걸까요? 독자가 작가와 시공간상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든 상관없이, 오직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닙니다."

영화 〈일 포스티노〉32에서 야한 시를 베끼는 한 우체부가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하는 말입니다. "시는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에요." 그게 정답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살아 있는 텍스트의 가장 사악한 버전은 역시나 카프카의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작가는 비인간이고, 종이는 독자의 몸이며, 텍스트는 해독 불가합니다. 시인 밀턴 에이콘이 한 시에서 읊은 "시가 시인을 지우고 다시 쓰듯이"35라는 구절 역시 텍스트를 적극적인 파트너로 여기고 있지만, 카프카식 변주를 의미하는 건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보통 살아 있는 말은 훨씬 긍정적인 관점에서 소개됩니다. 극장, 특히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장에서는 연극이 끝난 뒤 이따금 텍스트가 연극이라는 틀을 넘어 밖으로 나오기도 했어요. 그 잠깐 동안은 연극이 아닌 관객과 동일한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보였지요. 막이 내리고 배우 한 명이 무대 앞으로 나서서 관객에게 직접 말을 겁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셨던 인물이 아니라 사실 배우입니다. 이건 가발이고요. 부족한 점이 많았겠지만 즐겁게 보셨길 바랍니다. 그리고 즐거우셨다면 저희 배우들을 예쁘게 봐주시고 박수 부탁드립니다." 사실상 이게 발언의 요지였어요. 아니면 프롤로그(역시나 본 연극과는 별개였어요)에서 배우들이 극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공연 자랑을 한 뒤, 다시 연극 속으로 들어가 ‘극중 인물’이 되기도 했지요.

"이게 내가 쓴 유일한 책일세.(…) 그러다 보니 아들이 성인이 돼서 혈혈단신 집을 떠나는 애비가 된 심정이야."36 가장 솔직한 이별 편지 중 하나는 평생토록 지독한 빈털터리였던 15세기 프랑스 시인 프랑수아 비용이 쓴 것으로, 여기서 그는 부유한 왕자에게 신속히 전갈을 전하라고 자신의 시에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내 편지야, 서둘러 달려가려무나
발도 혀도 없지만
내가 돈이 떨어져 곤란하다고
열변을 토해 설명해다오37

다른 작가들은 이보단 덜 직설적입니다.

러시아 시인 푸시킨이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는 시의 말미에서 독자에게 멋지게 작별인사를 고하는 부분입니다.

독자여, 당신이 누구든,
친구든 적이든 간에,
정답게 헤어지고 싶다네.
잘 가시게, 이제 끝이 났으니.
이 조잡한 글에서 무엇을 찾아냈든,
격정적인 추억이든,
고생 끝의 휴식이든,
그냥 문법적 오류든,
생생한 묘사든, 떠들썩한 재담이든.
당신이 이 작은 책에서
감동이나, 재미나,
꿈이나, 잡지의 논쟁에 필요한 것이나,
조금이라도 얻어가기를 바라네.
이쯤에서 헤어지세. 그럼 안녕.38

제2부 프롤로그인 "2부 ‘순례자’를 보내며"에서는 책을 사람으로 대합니다.

가라, 내 작은 책이여.
내 첫 순례자[제1부]가 얼굴이라도 비친 곳이면 어디든지.
문을 두드리고 누군가 "누구세요?"라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라. "크리스티아나입니다."39

번연은 아주 개신교적이고, 양심적이고, 검소하고, 경제적인 기도를 합니다.

이 작은 책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작은 책이 축복이 되기를,
그리고 책을 산 사람들이 괜히 돈만 버렸다고
말하는 일이 없기를 비노라.41

책은 인간이 아닙니다.

때로 책은 작가의 개입 없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맥퍼슨이 쓴 〈책〉이라는 간단명료한 제목의 시입니다. 여기서의 책은 말하는 책인 동시에 수수께끼이지요. 물론 답은 제목에 있습니다.

친애하는 독자여, 당신 같은 인간이 아니기에
-나는 그대처럼 사랑할 수 없고, 그대도 나처럼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그대처럼 큰물로 나가서
보잘것없는 배로 사나운 바다를 이기려 하나니.

개울 수면을 젖지 않고 덧없이 떠가는 물방개도
나보다는 가냘프지 않고
흥분된 눈으로 심해를 살피는 고대의 고래도
나보다는 대단하지 않도다.

비록 창조자의 의지로
공기, 불, 물, 땅을 가로지르지만
내 부피가 그대의 손에 짐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꽃피운다. 그대가 보는 데서, 그리고 그대를 위해서.
그를 섬기지만 나는 인간과 씨름하길 주저하지 않으니
붙잡히고 삼켜져도 그를 축복한다. 독자여, 받아주기를.43

이 작은 책은 배이며, 고래이며,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에게 축복을 내린 천사입니다.

첫째, 작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보르헤스와 나〉라는 단편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혼잣말을 합니다. 이렇게 중얼거리지요.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인 게 맞다면)"45. 독자가 그 구절을 읽을 때에는 그 ‘만약’이라는 가정이 훨씬 크게 다가옵니다. 독자가 글을 읽고 있을 때 작가는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으니까요. 따라서 작가는 원조 투명인간입니다. 그곳에 전연 없으면서 동시에 매우 견고히 있기도 하지요.

아홉 살에 나는 비밀단체에 가입했습니다. 특별한 악수법, 구호, 의식, 좌우명까지 갖출 건 다 갖춘 조직이었지요. 단체명은 ‘브라우니들Brownies’로, 하는 짓이 좀 유별났어요.

어린 여자애들은 요정, 꼬마 도깨비, 엘프인 척하며 다녔고, 성인인 모임장은 "갈색 올빼미"라고 불렸거든요.

안타깝게도 모임장이 부엉이 탈을 쓰거나 여자애들이 요정 복장을 하진 않았어요. 나로선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었지요.

진짜 이름은 몰랐지만 나는 ‘갈색 올빼미’가 슬기롭고 공평하다 생각했고, 당시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서 그녀를 흠모했습니다.

배지가 걸린 다양한 프로젝트(자수 바느질하기, 가을 씨앗 모으기 등) 중 하나로, 나는 작은 책을 몇 권 만들었습니다.

나는 이 책들을 갈색 올빼미에게 주었습니다. 그녀가 그 책들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이 배지를 받는 것보다 중요했거든요.

세월이 흐른 뒤, 나는 한 소설에 갈색 올빼미를 등장시켰습니다. 많은 사물들과 사람들이 책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요.

"네가 말하는 갈색 올빼미, 우리 고모야." "고모라고?" 내가 되물었습니다. "설마 살아계시진 않겠지!"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고 나는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아흔을 훌쩍 넘긴 그녀와 나는 기쁘게 재회했지요. 차를 마신 뒤 그녀가 말했습니다. "이건 네가 가져야 할 것 같구나." 그러면서 50년 전에 내가 만든 작은 책들(무슨 이유에서인지 간직하고 있더군요)을 꺼내서 내게 돌려주었어요. 그녀는 삼일 뒤에 눈을 감았습니다.

작가는 ‘갈색 올빼미’를 위해, 그때 자신의 인생에서 ‘갈색 올빼미’에 해당하는 누군가를 위해 글을 씁니다. 진짜 사람, 그러니까 구체적인 단 한 사람을 위해서 말이에요.

‘갈색 올빼미’와 ‘신’의 중간 어디쯤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독자를 위해. 그리고 어쨌거나 이런 이상적인 독자는 누군가, 어떤 ‘한 사람’이지요. 독서라는 행위도 글을 쓰는 행위처럼 언제나 단수로 이루어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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