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모범생에 대한 변명이자 ‘그 많던 모범생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며,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온 사람의 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교양이란 겹의 언어이자 층위가 많은 말, 날것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일, 세 치 혀 아래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넣어두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 책은 40대 직장 여성이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보낸 20대 초반을 돌아보는 성장기가 되었다.

이제 도쿄로 간다. 대학에 들어간다. 유명한 학자를 만날 것이다. 취미와 품성을 갖춘 학생들과 교제하게 될 것이다. 도서관에서 연구에 몰두한다. 저술을 한다. 세상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다. 어머니가 기뻐한다.
? 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산시로』(현암사)에서

예술은 사물을 재현하거나 형식을 구축하거나 경험을 표현하는 의식적인 인간행위인데 이 경우 그러한 재현, 구축 또는 표현의 산물은 기쁨이나 흥분, 충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 W. 타타르키비츠, 손효주 옮김, 『미학의 기본 개념사』(미술문화)에서

르네상스 건축가이자 이론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1404~1472)는 『회화론』에서 그림을 프레임을 가진 일종의 ‘창문’으로 보았다. 그림은 창 밖으로 보이는 것의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원근법 등을 설명했다. 그는 특정 주제만 특별히 그려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istoria’라 불렀다.

이론의 복잡성과 상관 없이 당시 나는 창(窓)이란 말이 무척 아름답다 여겼다. 그림은 내게 항상 세상을 보는 창이 되어주었으니까.

트렌치에 들어가 지층의 단면을 살펴보는 걸 좋아했다. 켜켜이 쌓인 지층의 빛깔이 다른 것은 지층마다 누적된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층위마다 다른 시간과 역사, 문화와 삶이 녹아 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웠다.

집단의 이름으로 강제되는 모든 활동을 혐오했다. 마임이니 구호니 행진이니 하는 것들도 딱 질색이었다.

봄에, 발굴장에 벚꽃이 후두둑 떨어졌다. 벚꽃은 트렌치 안에도, 밖에도 쌓여서 인간이 손댄 흔적을 여리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무화시켰다.

박물관에 끝까지 남은 선배들과 친구는 훌륭한 고고학자가 되었다. 흙과, 땅과, 땀과, 무덤을 택한 그들을 존경한다.

한때의 고고학도는 안다. 기억과 마음에도 층위(層位)가 있다는 것을. 나는 종종 ‘내 안의 깊은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층위마다 켜켜이 쌓인 묵은 이야기들을 헤집어 꺼내 헹군다. 깨어진 토기 조각을 이어 붙이듯, 복원한다.

사람을 사귈 때면 항상 마음속 지층을 가늠해 본다. 이 사람은 어느 층위까지 내게 보여줄 것이며, 나는 내 안의 어떤 층위까지 그를 허용하고 인도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층위마다 차곡차곡 고인 슬픔과 눈물과 어두움과 절망과 상처와 고통, 기쁨과 웃음과 약간의 빛의 흔적……. 나는 손을 내밀며 상대에게 묻는다. 더 깊은 곳까지 함께 내려가 주겠냐고, 그 어떤 끔찍한 것을 보게 되더라도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봄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산다. 신들은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 갑옷을 입은 바다에서, 자연의 빛깔 그대로의 푸른 하늘에서, 꽃으로 덮인 폐허에서, 그리고 돌무더기 안에서 커다란 거품으로 부서지는 빛 속에서 말한다.

티파사는 알제리의 해변 도시인데 고대 카르타고 유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알제리에서 나고 자란 카뮈는 티파사를 사랑했지만 "절대 하루를 넘도록 티파사에서 머무르지는 않았다. 어떤 것을 충분히 보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듯이, 어떤 풍경을 너무나 봐버리는 순간이 언제나 오게 마련"이므로.

불어의 리에종(liaison, 연음)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 어렵다. 그렇지만 때때로 저 문장들을 입 안에서 굴려본다. 온몸의 털끝 하나하나까지 곤두세우는 예민한 감각을 느끼고 싶을 때, 자연 그대로의 육체를 햇볕 아래 내어주고 마냥 쾌락에 취하고 싶을 때, 정신을 아득한 끝자락까지 몰고 가는 향기에 전율하고 싶을 때……. 불어는 감각의 언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순전히 카뮈의 『결혼』 때문이다.

프린트물의 첫 장에 적힌 제목 "Noces"의 위에 f.라고 적어 단어의 성별이 여성임을 표시하고, 아래에 발음기호를 적어놓은 대학교 1학년 때의 나. "자연과 인간 사이의 결혼"이라고 적은 아래엔 "이방인: 자연과 인간 간의 divorce"라는 보충 설명까지 덧붙여 적어놓았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되는 모범생답게 착실하게 선생님의 설명을 받아 적은 셈인데, 그 덕에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기억할 수 있으니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했던 세상의 모든 ‘범생이’들에게 경의를!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공용어로 통했던 불어를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려워했다는 일화도 흥미를 자극했다.

외국어는 결국 단어와 문법 싸움이고 그 입구엔 지겨운 암기의 과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기말시험을 보던 날이었다. 강사는 감독을 하며 교실 안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시험문제를 푸느라 잔뜩 긴장해 앉아 있는 내 곁을 그녀가 스쳐 지나갔다. 초콜릿 향기가 확, 풍겼다. 짙고 달콤하며 매혹적인 향기. 차가운 대기와 맞부딪친 향의 입자가 형체는 없지만 묵직한 막을 형성하며 일순간 나를 둘러쌌다. 뜨겁고 진한 초콜릿 음료가 목구멍을 통해 꿀꺽 넘어가며 따뜻하게 뱃속을 데우는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로알드 달의 『초콜릿 공장의 비밀』을 처음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 달콤하고 유혹적인데, 어딘지 모르게 위로가 되는 냄새였다. 불어를 ‘감각의 언어’라 느끼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 향수의 이름은 지금까지 모른다. 여러 향수를 뿌려보았지만 아직 그만큼 인상적인 향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불란서의 향’이라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맥락을 고민하며 이해한 단어는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내 것이 되었다.

그 수업 덕에, 『결혼』이 결혼생활에 대한 단상이 아니라 인간, 혹은 인간이 만든 것들과 자연의 결합에 대한 은유라는 것을 배웠다. 20대의 카뮈는 생(生)에서 오는 감각을 뜨겁게 사랑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불어든 무엇이든 단번에 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시간을 들여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의 힘을 깨닫게 되었다.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잡아채는 것처럼 삶에 대한 맹렬하고도 동물적인 감각이라는 것을 나는 알아챈다. 한창 두뇌 활동이 왕성한 20대에 더듬거리며, 서툴게나마 『결혼』을 끝까지 원어로 읽었기 때문이다. 번역서의 문장들은 매끄럽고 아름답지만 내 것이 아니므로 관념적이고 피상적이다. 원어로 읽으면 다르다. 날것 그대로의 뜻을 곱씹게 되므로 구체적으로 내 것이 되어 손에 잡힌다. 몽환적이고 나른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격렬하게 살이 부딪치고 실핏줄이 터져 뜨거운 피가 튀는 것 같은 생동감이 깃든 글이라고, 나는 『결혼』을 기억한다.

나는 엉겁결에 초등학교 입학 전에 천자문을 거의 다 떼고는 영재 소녀라도 된 양 외할아버지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한자를 낯설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게 조기교육의 성과긴 했다.

"한자를 제대로 익히려면 중국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번역 과제를 내주는 동시에 중국 문화에 관한 책을 읽고 리포트를 써 오라고 했다. 나는 미술사 전공자라는 핑계로 중국 회화(繪畵)에 대한 책을 읽고 리포트를 작성해 제출했다.

한자가 중국 문자라는 인식을 명확하게 갖추게 된 것이 그 수업을 통해 얻게 된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였다. 그 전까지의 세계에서 한자와 나 사이에는 국경이 없었다. 수업 이후에는 명확한 경계가 생겼다. 오랫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던 나라가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지배국의 글자라는 인식이 싹텄는데, 그렇다고 해서 치욕적이라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다. 한글 창제로부터 500년이 훌쩍 지난 시대에 한자가 굴욕의 상징이 되기엔 너무 약했다. 나는 이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내 언어생활의 결을 한층 정교하고 풍요롭게 만들며,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고 생각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식견이 짧다는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말한 ‘肉食者鄙(육식자비)’(고기를 먹는 자는 비천하다.)라든가 ‘齊師伐我(제사벌아)’(제나라 군대가 우리를 공격했다.) 같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편(莊公篇)」의 문장으로 주어와 술어 관계를 습득하며 시작한 수업을 지루하다 여기지 않고 재미있어하며 따라갔다.
‘公將戰(공장전)’(공이 장차 싸우려 했다.)이라는 문장을 놓고 ‘공정한 장수가 싸운다.’라고 해석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즐거웠다. 이 문장에서 ‘장수 장(將)’이 ‘장차’라는 뜻의 부사로 사용된 것처럼, 글자 하나의 쓰임이 제한되어 있지 않고 여러 품사와 여러 뜻으로 다채롭게 쓰인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문장을 뜯어보며 해석을 고민하다 보면 생각의 한계가 확장되고 상상력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만 같았다. 모호했지만 그 모호함 때문에 오히려 한문 수업이 재미있었다.

당시엔 ‘將進酒杯莫停(장진주배막정)’(술잔 권하노니 멈추지 마시게나.)이라는 문장에 힘을 주어 술잔을 부딪치며 호기롭게 "장진주배막정!" 포효하였지만, 이제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난 40대의 내겐 이 구절이 사무친다.

君不見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高堂明鏡悲白髮
고대광실 밝은 거울을 비추며 백발을 슬퍼하는데
朝如靑絲暮成雪
아침녘 검은 머리 해저물녘 눈빛처럼 희어진 것을?
人生得意須盡歡
사람 일생 좋을 때에 맘껏 즐길 일이니
莫使金樽空對月
금술통 헛되이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 일.

"고향 떠나온 달밤"이라는 뜻의 「靜夜思」는 거의 평생을 유랑하며 보낸 이백이 26세 때 양주(揚州)의 객사에서 쓴 것이다. 스무 살에 고향을 떠나온 나는 이백을 흉내 내 고개 들어 달을 바라보다가 고개 숙여 고향의 달을 그려보면서 궁금해하곤 했다. 『그림 없는 그림책』을 쓴 덴마크의 안데르센부터 당의 이백까지 왜 고향을 떠나온 자들은 하나같이 달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걸까? 타향에서나 고향에서나 변함 없는 천체를 보니 옛 생각이 나는 것이라면, 왜 해를 보면서는 그리운 마음이 들지 않는 걸까?

집값보다는 ‘판교(板橋)’라는 지명이 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도 흔한지를 궁금해했다. "‘널빤지를 걸쳐 놓은 다리’라는 뜻이니 곳곳에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누군가 말했다. 경기도 판교도 운중천 널빤지 다리 부근을 ‘너더리(널다리) 마을’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어 끼어들었다. "중국 옛글에서는 관용적으로 ‘판교’를 ‘친구를 만나는 곳’으로 쓰기도 한다잖아요."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며 어디서 들었냐고 물었다. "20년 전 대학교 1학년 때, 교양 한문 시간에 배웠어요!"

그는 한시에 많이 등장하는 ‘남포(南浦)’(남쪽 포구)가 특정 지명이 아니라,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이 「河伯(하백)」에서 "送美人兮南浦(송미인혜남포)"(남포에서 그대를 떠나보내네.)라고 읊은 이후 ‘남포’라는 단어가 정인(情人)을 떠나보내는 곳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고려 시대에 정지상의 시 「送人(송인)」에도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남포에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라는 구절이 등장하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판교’를 예시로 들었다.

기록은 기억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친구를 ‘만나는 곳’이 아니라 ‘보내는 곳’이었구나. 저녁 자리의 이들에게 문자를 보내 실수를 정정하고 나니, ‘판교’가 친구를 보내는 곳이 된 전고(典故)가 궁금해졌다. 인터넷을 뒤져 오래전 그 한문 수업 선생님의 연락처를 찾아내 이메일을 보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에 인사드립니다. 20년 전 수업을 들었을 때 선생님께서 한문의 관용적 표현을 설명하시며 ‘판교(板橋)’의 경우 친구를 보내는 곳이라고 말씀 주셨는데요……." 한문 교재에서 판교에 대한 필기 부분을 사진 찍어 첨부한 그 이메일의 마지막을 나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20년 전 선생님께 한문을 배운 것이 한문 공부를 한 마지막 기회였고 거의 잊어버렸으나, 그래도 밑둥은 약간 남아 살아가는 데 간혹 힘이 되곤 합니다."

주말인데도 답장은 한 시간 만에 왔다. 그는 불쑥 연락해 온 옛날 수강생을 무척 반가워하며 "‘판교’라는 단어는 당나라 시인 온정균(溫庭筠)의 시 「送人東遊(송인동유)」의 한 구절인 ‘鷄聲茅店月(계성모점월)/ 人迹板橋霜(인적판교상)’(새벽닭은 초가 주막 달빛 아래 울고/ 먼저 간 이는 서리 내린 판교에 발자국 남겨놓았네.)이 절창으로 여겨져 많이 유명해졌을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머릿속에 어슴푸레 남아 있던 ‘교양으로서의 판교’가 그렇게 20년 만에 비로소 명징해졌다. ‘교양(culture)’이란 원래 경작(耕作)을 뜻하는 것이니, 수년 전 뿌린 씨앗의 결실을 이제야 거두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교양서로 유명한 일본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의 로고는 밀레의 그림 「씨 뿌리는 사람」인데, 창립자 이와나미 시게오가 스스로를 ‘씨 뿌리는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인문교양의 힘이란 남과 같은 것을 보면서도 뻔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를 품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는 것 아닐까?

수업 시간에 습득한 것들은 젊은 날 잠깐 머릿속에 자리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렇지만 싹은 물 준 것을 결코 잊지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고 했다. 식견(識見)이란 지식을 투입하는 그 순간이 아니라 추수 끝난 논에 남은 벼 그루터기 같은 흔적에서 돋아난다.

삶의 어떤 순간에만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게 있다. 설익어 어설플지라도 여백이 있어 매력적인 글. 이미 정교함을 획득해 버린 노회한 저술가는 구사 불가능한 미학이 그런 글에는 있다. 무턱대고 내지를 수 있는 치기 덕에 빛나는 통찰, 날것이라 푸른 물 뚝뚝 듣는 문장, 눈치 보지 않는 솔직함이 빚어내는 감동……. 이 모든 건 ‘처음’의 특권이자 판을 잘 모르는 신인(新人)의 특권, 젊음의 특권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내게 처음 해준 사람은 제임스 캐힐(James Francis Cahill, 1926~2014)이었다. 그는 중국 회화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나를 만난 2008년 10월 당시 82세였고 버클리대학교 명예교수였다. 학회 참석차 방한한 그를 광화문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했다. 당시 서른 살이었던 나는 인물·동정팀 기자였다. 캐힐이 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인터뷰 요청을 한 건 그의 대표작 『중국 회화사(Chinese Painting)』가 내 책장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회화사의 곰브리치’로 불리는 제임스 캐힐은 그림에 대한 단선적인 양식(style) 분석을 넘어서 양식이 지니는 역사·문화적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중국 회화사 연구에 큰 획을 그었다. 특히 서른네 살 때인 1960년 스위스의 한 출판사에서 낸 『중국 회화사』는 세계 각국에 소개되면서 중국 회화사 개설서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젊은 학자였던 그에게 독보적인 명성을 안겨준 이 책의 특징은 연대기 중심으로 서술된 기존 역사서와는 달리 문학적이고 서사적인 문체로 쓰였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일본어 통역병으로 복무했던 1948년 서울의 골동품 상점에서 송(宋)대 유명 화가들의 낙관이 있는 가짜 그림을 산 것을 계기로 중국 회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서, 캐힐은 말을 시작했다. "책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소설 같다.’고 비판했지만 나는 이를 칭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60년 전 서울에서의 그 일만 없었다면, 나는 역사가가 아니라 작가가 되었을 거예요."

30대에 쓴 첫 책에 아직도 만족하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그 후에도 책을 여럿 냈지만 다시는 그런 책을 쓰지 못했어요. 앞으로도 못 쓰겠죠. 지금은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는데도요. 그때 나는 굉장히 젊었지요.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 치기 어린 자부심 덕분에 그 책이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좋아하는 화가로 서정적 화풍을 특색으로 하는 남송(南宋) 마하파(馬夏派)의 쌍두마차 중 한 명인 하규(夏珪)를 꼽았을 때, 나는 이 노학자가 어떤 부류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질적으로 문학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인간과 문학의 인간. 나는 종종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실증의 세계인 역사와 허구의 세계인 문학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재미있는 것은 기질적으로 ‘역사의 인간’인 사람과 ‘문학의 인간’인 사람도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문학의 인간’인 나는 종종 ‘역사의 인간’들과 부딪친다. 나는 그들의 상상력 부족을 답답해하지만, 그들은 아마 나를 허황하다 여길 것이다.

내가 쓴 리포트의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남의 글이 이렇게 생생히 기억나는 이유는, 아마도 평생 우등생으로만 살아온 사람 특유의 ‘졌다.’라는 열패감, 동양미술 작품은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어서 싫다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 핑계일 뿐이었다는 깨달음,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봐.’라는 진로 고민 등 복잡미묘한 감정이 휘몰아쳤기 때문일 것이다.

화원 화가들의 그림을 일러 "문기(文氣)가 없다." 하시던 은사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게는 문기라는 게 없는 걸까? 나는 학자의 자질이 없나?’ 마음속 한 구석이 은근히 찔려오기도 했다. 아마도 결국은 취향의 문제였을 것이다. 나는 기교가 뛰어난 그림이 좋았다. 지금도 그림을 볼 때, 화가의 정교한 손맛을 중시한다. 범인(凡人)과 확연히 구별되는 예술적 재능이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마하파 그림을 알게 되면서 나는 동양 회화에는 ‘이야기’가 없어 재미없다 생각했던 편견을 버렸다. 은은한 먹빛 장막을 뚫고 들어가면 은근하게 도사린 이야기들이 있었다. 말을 아낌으로써 더 풍부해지는, 여백 덕에 더 또렷해지는 시정(詩情)과 서정(抒情)이 존재했다.

하규는 표면의 질감을 거의 나타내지 않고 나아가 화면의 보다 큰 면적조차 안개 속에 모호하게 함으로써, 더욱더 전체 구성을 단순화시키고 딱딱한 형태를 배제했다. 선은 최소한으로 감소되고 그 대부분은 단지 선염(渲染)의 언저리에 불과하지만, 이 최소한도가 너무나 웅변적이어서 전체 구도가 여기에 집중된다.
? 제임스 캐힐, 조선미 옮김, 『중국 회화사』(열화당)에서

문학적이며 아름다운 문장. 누군가는 역사가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묘사가 많고 치렁치렁하다고 하겠지만, 그림을 보지 않고도 그림을 그려볼 수 있도록 하는 그의 문장이 나는 좋았다.

少年不識愁滋味
소년 시절 슬픈 맛이 어떤 건지 몰라
愛上層樓
높다란 누대에 오르길 좋아했지요
愛上層樓
높다란 누대에 오르고 올라
爲賦新詞强說愁
새 노래 지으려고 억지로 슬픔을 짜냈지요.

而今識盡愁滋味
지금은 이제 슬픈 맛 다 알기에
欲說還休
말하려다 그만둔다
欲說還休
말하려다 그만두고
却道天凉好個秋
아! 서늘해서 좋은 가을이어라 했지요.
? 우리말 번역은 유병례, 『송사, 노래하는 시』(천지인)에서

살다 보면 노력하지 않아도 인생의 슬픈 맛이 저절로 내 안에서 우러나게 되어 있는 건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싶다가도 이내 억지로 짜낸 젊은 슬픔의 힘으로만 부를 수 있는 노래라는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캐힐이 내게 알려준 것처럼.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남송 황실의 화가였던 마린은 봄날 밤, 꽃이 만개한 정원에서 잠든 사이 꽃이 떨어질까 염려해 촛불을 밝히고 앉아 활짝 핀 꽃을 감상하고 있는 인물을 둥근 부채에 그려 넣었다. 이 그림은 소식의 시 「해당(海棠)」의 마지막 구절 "只恐夜深花睡去 故燒高燭照紅粧"(밤이 깊어 꽃이 잠들어 져버릴까 두려워 촛불 높이 밝혀 붉은 모습 비추네.)에서 화제(畵題)를 가져왔다 알려졌는데, 이백(李白)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국내판 『중국 회화사』의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헷갈린) 젊은 캐힐은 이렇게 썼다.

삶이란 퍽 짧으므로 우리는 촛불을 밝히고 어둠의 시간을 충분히 이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제임스 캐힐, 조선미 옮김, 『중국 회화사』(열화당)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