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죽음을 죽어라,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과거의 나와 새로운 나 사이에 놓인(…)

어릴 적 나는 집히는 대로 책을 읽다가 아버지의 ‘에브리맨스 라이브러리Everyman’s Library’라는 오래된 문고본 총서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에브리맨, 내 너와 동행하며 길잡이가 되어주리라. 그대가 나를 간절히 원할 때가 되면." 이 문장은 내게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자신들이 내 친구라고 선언하며, 여행길에 함께 오르겠다고, 유용한 조언도 해줄 뿐 아니라 필요하면 언제든 곁에 있겠다고 약속하고 있었으니까요. 기댈 언덕이 있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지요.

그의 곁에 유일하게 남은 친구가 있으니 바로 ‘선행’이지요. 그렇지만 ‘선행’은 몸이 너무 약해서 에브리맨을 업보로부터 구해내기에 힘이 부칩니다. 하지만 ‘선행’이 ‘지식’이라는 동생을 소개시켜주고, ‘지식’이 에브리맨에게 무덤까지 가는 길에 유용한 길잡이가 되겠노라고 제안하지요. 그러면서 내가 방금 인용했던 말을 뱉는 겁니다.

한가로운 저승길에 《오만과 편견》과 《요정 몹사》가 무슨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걸까요? 그래도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편도행 티켓을 끊어놓고 같은 열차에 오른 처지이니, 가는 길에 읽을 만한 게 있으면 좋을 것 같긴 합니다.

"죽은 자와 협상하기"로, 모든 서술적 글쓰기, 아니 어쩌면 모든 글쓰기는 사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매혹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가설을 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사후세계로 들어가, 죽은 자로부터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데려오고자 하는 욕망에서 글쓰기가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거죠.

내 서재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는 자료 무덤에서 인용문 몇 개를 거의 무작위로 뽑아봤습니다. 앤마리 맥도널드의 소설 《무릎을 꿇어라》8는 "그들은 이제 모두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존 어빙은 《일 년 동안의 과부》9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맞이한 오빠 토머스와 티모시의 죽음이 루스 콜이 작가가 된 또 다른 이유이다." 다음은 체호프의 말입니다.

기분이 우울할 때 바다나 거대한 풍경과 마주하게 되면 언제나 애수에 잠기면서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이 무명으로 살다가 죽을 거라는 확신을 느낀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연필을 낚아채 제일 먼저 손에 집히는 것에 서둘러 자신의 이름을 쓰게 된다.10

왜 다른 예술이나 매체가 아닌 굳이 글쓰기가 개인의 최종적 소멸에 대한 불안과 그토록 밀접하게 연결되는 걸까요?

글쓰기의 속성도 한몫합니다. 이를테면 공연 무대와는 달리 영원해 보이고 결과물도 오래도록 살아남으니까요.

다른 예술 형태들(그림, 조각, 음악)도 오래 지속될 수는 있지만 ‘목소리’로서 살아남지는 못하지요.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글쓰기는 글을 쓰는 행위이고, 글이 쓰이면 목소리를 위한 악보가 되는데, 목소리가 가장 자주 하는 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심지어 대부분의 짧은 서정시에서조차). 길지 않더라도, 아주 짤막하더라도 말이지요.

목소리는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하나의 인식에서 다른 인식으로 시간을 가로질러 이동합니다. 모든 것은 생각만으로든 실제세계에서든 변하지요. 사건은 다른 사건들과 맞물리며 벌어지고요. 그것이 시간입니다. 빌어먹을 일들이 연이어 터지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연이어"예요.

레온 에델이 말한 것처럼, 소설이라면 작품 속에 시계가 있어야 합니다.

삶과 죽음에 다리를 놓는 수많은 미신, 즉 규칙과 절차에는 음식이 빠질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무한한 허기를 느낀다고 믿어서이지요.

먼저 떠난 가족이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들로 특별한 식사를 차리는 한편, 망자들이 보이지 않는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와 수건도 마련하지요. 어떤 공동체에서는 가족들이 직접 망자를 위해 차린 음식을 먹습니다. 그것도 바로 무덤 위에서 말이에요. 또 다른 공동체에선 죽은 자가 무사히 식사를 하러 왔다가 마친 뒤 저승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무덤에서 집까지(보통은 금잔화 꽃잎으로) 길을 표시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손님일 뿐이므로 존경과 예의를 갖춰서 접대하고 먹을 것을 대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보답으로 망자가 예의바른 손님처럼 행동한 뒤 잔치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거든요.

다른 세계(천국, 지옥, 요정의 나라, 지하세계, 뭐라고 부르든 간에)로부터 온 자는 누구든 우리에게 행운을 주거나, 해로운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그 대가로 최소한 그들에게 기도와 감사만이라도 주어진다면 말이지요.

그 밖에 죽은 자는 무엇을 원할까요? 그건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이를테면 햄릿의 아버지는 복수를 원하는데 딱히 유별난 요구는 아니에요.

온다치의 소설에서 늙은 장님이 손가락으로 두개골을 "읽는다"는 설정은 아주 오랜 풍경을 재현하는 듯합니다.

햄릿이 죽어가면서 친구 호레이쇼에게 "고통 속에 살아야 하겠지만, 이 험한 세상에 남아서 내 이야기를 전해다오"23라고 청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들려지길 원합니다.

밸런타인데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나야 늘 생각하지요. 예전에 한 남자친구가 진짜 소의 심장에 진짜 화살을 꽂아서 보내준 탓에 말이에요(비닐봉지에 담아놓아서 손에서 떨어뜨리진 않았어요). 짐작했겠지만 내가 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친구였지요.

점성학적으로 11월이 죽음, 섹스, 부활을 의미하는 전갈자리의 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봤자 생일 케이크를 꾸미는 데는 아무 도움도 안 됐지만요.

왜 이 세 가지가 함께 있는 걸까요? 죽음이 섹스와 부활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이걸 설명하려면 엄청난 각주가, 아니 책 한 권이 필요합니다. 그 책은 아마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일 겁니다.

수많은 전설에 따르면 영혼은 금속을 지나칠 수 없거든요.

그 귀한 것들이란 무엇일까요?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부
? 지식
? 사악한 괴물과 싸울 기회
? 영영 잃어버린 사랑하는 사람

후손이 조상을 위해 붉은 종이돈30을 태우면 그 대가로 진짜 돈을 가져다준다지요. 풍년을 기원하며 죽은 자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짧은 기도 문구도 저세상을 향해 물질적 행복을 달라고 매우 겸손하게 비는 거예요. 모든 종류의 부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보이는 세상으로 흐릅니다.

두 번째는 지식입니다. 사자들은 시간 바깥에 있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알지요. "네가 어째서 나를 불렀는가?" 선지자 사무엘의 유령은 엔돌의 무당의 몸을 빌려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32 사울 왕 자신이 몸소 금해놓고선 정작 자기가 유령을 불러낸 까닭은 곧 시작될 전투에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입니다(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지요).

물론 지식과 부는 별개가 아닙니다. 구하고자 하는 지식이 재물을 손에 넣는 법에 대한 것일 수도 있어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접한 현대 단편소설은 D. H. 로런스의 고전 〈목마와 소년〉입니다. 이후로도 계속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이야기지요. 내용이 복잡하지만 이 주제와 연결시켜 얘기하자면 이렇습니다. 한 아름다운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재물운도 없고 어린 아들에게 별로 애정도 없어요. 아들은 행운이 찾아와서 엄마가 그토록 원하는 부를 얻길 간절히 바라지요. 그래야 엄마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예요.

네 번째는 영영 잃어버린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는 작가들과 그들이 글을 쓰는 동인과 관련해서 중요한 모티브예요. 최초로 사라진 사람은 남성으로 짐작됩니다. 연인을 찾아 나서는 가장 오래된 인물이 이집트 여신 이시스니까요.

그들이 강물을 마시라 권해도
죽음의 물을 마시지 마라.
죽은 자의 들판에서 낟알을 주어도
그 씨앗을 받지 마라.

이난나 여신이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노래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시입니다.35

이난나와 그녀의 남편 두무지, 두무지의 오누이 게쉬티난나 신화와 마찬가지로, 페르세포네 신화도 그녀가 1년 중 얼마간은 지하에서, 얼마간은 지상에서 보내기로 합의하면서 마무리됩니다. 그게 이 세상에 겨울이 찾아오는 이유지요.

죽은 자의 음식도 먹어서는 안 되지만, 집에서 풀어야 할 선물을 너무 일찍 궁금해해서도 안 되는 법입니다.

‘천국’의 결말은 눈을 질끈 감고 실눈으로 볼 때만 해피엔딩인 겁니다.

언제나 낯선 장소를 방문할 때에는 전에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 다시 돌아오는 법을 아는(지옥을 여행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지요) 사람과 가는 게 최선이니까요.

어둠 속에서도
리라를 연주해본 자만이,
그침 없는 찬양을
드릴 수 있으리.

죽은 자들과 함께 앉아
양귀비를 먹어본 자만이,
가장 희미한 가락까지
기억할 수 있으리(…)

두 세상에 함께 도달할 때
목소리는
영원함과 온화함을 지키리라40

지옥은(아마도) 개인적인 이야기 속에 영원히 갇히는 곳이고, 천국은(아마도) 이야기 대신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다소 겁나긴 하지만요.

"그는 지혜로웠다. 그는 불가사의를 보았고, 비밀스런 것들을 깨달았고, 홍수가 나기 전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가져왔다. 그는 온갖 고초에 시달려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긴 여행에서 돌아와 그 모든 이야기를 돌에 새겼다."

이야기가 있는 곳? 이야기는 암흑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감이 떠오르는 것을 섬광에 비유하는 것이지요.

누구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어요.

모든 작가들은 죽은 자들로부터 가르침을 얻습니다. 계속 글을 쓰는 한, 작가는 앞서 글을 썼던 작가들의 작품을 끊임없이 탐구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들에게 평가받고 질책당한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작가는 작가로부터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조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음껏 탐닉하려면 결국 지나간 시간에서 온 사람들과 거래를 해야 합니다. 그 지나간 시간이 겨우 어제라 하더라도 과거는 과거이지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

모든 작가는 ‘지금’에서 ‘옛날 옛적’으로 가야 합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야 합니다.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저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과거에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보기에 따라서 절도든, 회수든, 뭐든 해야 합니다. 죽은 자들이 제아무리 보물을 갖고 있다고 해도, 산 자들의 땅으로 되가져와 시간 속에 또 한 번 들이지 않는 이상, 그러니까 관객의 영역에, 독자의 영역에, 변화의 영역에 들이지 않는 이상, 그 보물은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문자 그대로든 은유적으로든) 과거의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권위를 이용해 지금 이곳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에,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에 발을 들인다는 데서 우리는 이미 인간이란 종의 독특한 특성이 무엇인지 인식했다. 우리가 여기서 분석하고자 했던 건, 하고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의 서술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서술의 모체였다.47

하지만 운명이 내게 목소리를 남겨놓아,
사람들이 그 목소리로 나를 알아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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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영어는 당연히 잘하고 싶었고, 샹송을 부르고 싶어 불어를 배우고 싶었으며,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아 일본어도 익히고 싶었다. 독문학 관련 강의를 들은 이후엔 독일어에 호기심이 생겼고, 스페인어 발음이 노래처럼 아름답다는 걸 알고는 스페인어 수업을 들어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많은 ‘배우고 싶은 언어’ 리스트에 중국어는 없었다.

불어로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상상하면 낭만적이었고, 독어로 말하고 있는 나를 그려보면 지적으로 보였다. 스페인어로 인사하는 내 모습은 명랑하게 여겨졌고, 일어로 대화하는 나는 귀여울 것 같았다. 중국어로 말하는 나는…‥ 코믹하고 시끄러울 것 같았다.

물론 『금잔화』를 비롯한 대만 작가 경요(瓊瑤)의 소설을 탐닉했고, 계림문고 축약판으로나마 『삼국지』도 읽었으며, 루쉰(魯迅)을 의무적으로 읽긴 했지만. 중국적인 것과는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거대하고 화려한 것보다는 자그마하고 섬세한 걸 좋아했다. 수업이 개설되지 않은 일본어는 굳이 학교 언어교육원에까지 등록하며 배웠지만 여러 수업이 개설돼 있는 중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 듣게 된 수업들이 꽤 있는데, 이번에도 친구들의 영향을 받았다. 친구들이 너도 나도 듣는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나의 좁은 세계를 친구들이 넓혀주었다.

"엄마. 일단 문을 열어놓는 게 중요해. 문을 열어놓으면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잖아. 대학교 때 조금씩이라도 이런저런 언어를 접해 놓아야지 나중에 사회인이 되어서 혹시 필요하게 되더라도 겁 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문만 열어놓고 발을 들이밀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하고 싶지도 않은데 필요하다고 생각해 계절학기 수업까지 들어가며 배운 언어이니만큼 열심히 잘하겠다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나의 의욕은 수업 초반에 꺾였다. 성조에 대해 배울 때였는데, 선생님은 경성(輕聲)을 포함한 다섯 가지 성조 중 제4성이 제일 어렵다고 하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경상도 사람들이 특히 이 제4성을 발음하기 힘들어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보면 그중에서도 마산, 진주 사람들은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고요." 나 진주 출신인데…….

나의 중국어 인생은 두 번의 수업을 들은 것으로 막을 내렸고 사회인이 되어서도 힘겹게 열어놓은 그 문을 다시 밀고 들어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J는 중국어 공부를 더 하겠다며 이후 베이징으로 떠났고 지금은 현지인 수준으로 중국어를 구사하면서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대개 나보다 높은 곳을 보았으며, 멀리 뛰었고,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내가 비록 그들의 고아(高雅)한 기준에는 못 미치는 인간일지라도, 곁에 그런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자극이 되었고 눈이 트였다. 대학이라는 공간뿐 아니라 친구들 하나하나가 새롭고 귀한 세계였다.

하나의 언어를 조금이나마 안다는 것은 세계를 보는 또 다른 눈을 가지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지만, ‘사과’가 중국어로 ‘?果(핑궈)’라는 걸 알고 있다.

유독 ‘?果’를 기억하는 이유는 중국어1 시험을 볼 때 "사과를 중국어로 쓰시오."라는 문제의 답에 ‘?’을 ‘平’으로 적어 틀렸기 때문이긴 하지만, ‘애플(apple)’과 ‘폼(pomme)’, ‘링고(リンゴ)’ 말고도 또 다른 언어로 ‘사과’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삶을 좀 더 정교하고 다채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사과’와 ‘핑궈’와 ‘애플’과 ‘폼’과 ‘링고’ 중 가장 사과와 잘 어울리는 단어는 어떤 것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일이 즐겁다고 하면 이상해 보이려나?

첫 책 『그림이 그녀에게』가 중국에서 번역되어 나올 때, 순우리말 이름을 가진 내게 한자 이름을 알려달라기에 거침없이 ‘궈야란(郭雅藍)’이라 지어 보낸 것도, 따지고 보면 중국어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사랑해 당신을」의 OST인 「아임 스틸 러빙 유(I’m Still Loving You)」가 등려군의 노래 「첨밀밀」을 리메이크해 부른 것이라 멜로디가 익숙해서 더 그랬을 것이다.

在?里 在?里???(짜이 날리 짜이 날리 찌엔궈니)
어디에서 어디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었을까요
?的笑容??熟悉(니 더 샤오롱 쩌양 슈시)
너의 웃는 모습 이렇게 익숙한데
我一?想不起(워 이시 샹 부치)
한순간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 在?里(아 짜이 멍리)
아, 꿈속에서였구나
?里?里???(멍리 멍리 찌엔꿔 니)
꿈속에서, 꿈속에서 당신을 보았어요
?蜜笑得多?蜜(티엔미 샤오 더 두오 티엔미)
달콤하게 웃는 모습이 그렇게도 달콤했습니다
是? 是? ??的就是?(쉬 니 쉬 니 멍찌엔 더 지우쉬 니)
당신이군요 당신이군요 꿈에서 본 사람이 바로 당신이군요

때때로 입을 열어, 외우고 있는 몇 안 되는 중국어 문장을 가만히 말해 본다. "?是我的老?(타 쉬 워 더 라오슈)"(그녀는 나의 선생님입니다.), "明天?來??(밍티엔 니 라이 마)"(내일 오시나요?)…… 아무도 듣는 이 없지만 혼자 종알거리고 있자면 좀처럼 사용할 일 없는 성대의 깊숙한 부분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기적 소리처럼 구슬프게 울린다. 거대한 미지의 세계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문이 잠시, 빼꼼히 열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틈새로 살풋, 바람이 분다.

읽고 나서 오랫동안 곱씹게 되는 책이 있다. 읽을 때 의미를 알 수 없었고 시간이 오랜 지난 후에도 좀처럼 파악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는 책이. 내게는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이 그런 책이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거실 바닥에 자그마한 언덕을 이루고 있지만,

여러 번 읽은 영어 원서가 책장에 꽂혀 있었지만 이번엔 한글판으로 읽어보고 싶었다. 모국어로 읽으면 읽을 때마다 안개처럼 흩뿌려지던 모호함이 조금은 걷혀 나갈까? 의문과 기대를 가지고 시작한 독서였지만, 책장을 덮을 때쯤엔 희미한 실망이 찾아왔다. 한국어로 읽는다고 해서 또렷해지는 작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작품은 오히려 원어로 읽을 때 더 명료했다.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는 적확하게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딱 하나의 단어가 있다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을 주창했는데, 조이스는 플로베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친구들과 함께 "너의 ‘르 모 쥐스트’는~야."라며 서로의 특색을 잡아내어 놀리곤 했다. 그 과정에서 한 친구가 "곽아람의 ‘르 모 쥐스트’"라며 붙여준 별명이 ‘짜가 클래식’이었는데, 겉으로는 제법 고상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매일 길을 헤매는 방향치에 엉뚱한 면이 많은 허당이라는 뜻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물 없이 고구마 몇 개를 연달아 먹어치운 것처럼 목이 막히고 답답해지는데,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혈이 막혀 순환을 멈춘 거대한 유기체처럼 여겨져서다.

But I also dreamt, which pleased me most,
그러나 꿈 속에서 가장 기뻤던 것은,
That you loved me still the same.
그대가 나를 아직도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거였네.

남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 거듭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훈련을 하게 되었으니까. 명료한 답이 나오지 않아도 좋다. 이 지(知)의 여정은 나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언젠가는 더블린에서 10월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다.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가 쓴 고대 그리스 희곡을 맨 처음 읽었고, 그 다음에 단테의 『신곡』과 17세기 프랑스 작가 몰리에르의 희곡 『서민 귀족』을 읽었다.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를 읽었고,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조별 발표도 했고 다른 학생이 작성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대한 보고서도 함께 읽었던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한 학기 동안 다 읽을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고 과연 내가 제대로 읽었는지도 의심스러운데, 한 가지만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도서관으로 바삐 뛰어가던 내 모습. 저 책들을 다 살 수는 없으니까, 최대한 도서관에서 빌려야 이번 학기 예산에 지장이 없겠다 계산하던 대학 2학년의 나.

조용하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 선생님 연구실 문에 붙어 있던 함에 살며시, 약간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서툴지만 최대한 매만진 글이 적힌 종이를 넣어놓고 오던 나. 그때부터 마감을 어기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쓰는 사람이었으니, 나의 ‘마감 인생’도 제법 오래되었구나, 어쨌든…….

교양은 어떤 상황에서든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된다.

‘서양문명의 역사’ 시간에 읽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은 『뤼시스트라테』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쟁 중일 때, 남자들의 전쟁을 멈추게 하고픈 아테네 여인들이 섹스파업을 통해 전쟁을 멈추게 하는 희극(喜劇)이다. 뤼시스트라테는 여인들을 결집시켜 파업을 주도하고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해 평화조약 체결을 이끌어 내는 영민한 주인공. 그는 이렇게 외친다. "당신들 정치가들이 조금이라도 똑똑했더라면 우리가 옷감 짜듯이 정치를 했을 거고, 그랬더라면 모든 면에서 아테네에 유익했을 텐데요." 이렇게도 말한다.

"몹쓸 돌대가리들 같으니! 우린 당신들이 전쟁에서 얻는 명예는 못 차지하지만 고통은 이중으로 당하고 있어요. 첫째, 우리는 전쟁에 보내는 아들을 낳거든요."

비극은 우매한 인간이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이지만 그 통렬함을 통해 인간은 성장해 왔다는 것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왔던 이 가엾은 왕은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 외친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내 목소리는 공기를 뚫고 어디에 가서 닿은 것일까? 오 운명이여,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 아이스퀼로스 외, 이근삼 외 옮김, 『희랍극선』(삼성출판사)에서

운명은, 책임이구나……. 스무 살 무렵의 나는 생각했다.

운명에 순응하는 것 또한 운명지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지만 훌륭한 사람만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친다. 유일한 죄는 ‘자만’이다." 얼마 전 로버트 케네디 평전 『라스트 캠페인』을 읽었을 때, 나는 로버트 케네디가 아꼈다는 소포클레스의 이 말에 밑줄을 그었다.

『오이디푸스왕』이 오만에 대한 이야기라면,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생각하고 느낄 줄 아는 피조물 가운데 여자는 가장 천시받고 있습니다." 또 묻는다. "사랑을 빼앗기는 일이 여자에게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절멸’을 뜻하는 ‘쇼아’라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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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연주’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같은 곡의 수많은 상들이 있다. 그 모든 상들은 악보를 충실히 따른다는 점에서 어떤 것도 틀리지 않았으나, 악보의 여백을 각자의 방식으로 채우고 있으므로 어떤 것도 하나의 정답이 될 수 없다.

클래식 피아노 연주는 악보와 해석 사이의 싸움, 관습과 파격 사이의 싸움, 원상(原象)과 상(像) 사이의 싸움이다. 아무리 원전에 가까운 악보를 공유한다고 해도 같은 연주는 나올 수 없으며, 선생이 학생에게 가르친다고 하여 두 사람의 연주가 같을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연주를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클래식 피아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장이고, 그래서 나는 저항도 없이 빠져들고 만다.

클래식이 요구하는, 그리고 클래식이 요구하기에 연주자가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완벽성에 다가가기 위한 놀랍지 않은 노력이다.

그러니까 나는 평생, 규칙과 헌신의 세계에 살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의 본능은 늘 그러했던 것 같다.

나에게는 클래식 공연에 표를 두 매씩 예매해 주변 사람들을 데려가는 다소 홍익인간스러운 습관이 있는데, 조진주 바이올리니스트의 공연에 초대를 받아 요조에게 같이 가자고 청한 것이다.

두 손으로 연주하는 3성부, 4성부의 아름다움은 한꺼번에 여러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는 건반악기에만 허락된 복잡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이다.

정석적인 에튀드 연주로 ‘쇼팽 에튀드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연주를 했던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스케르초 연주를 들어보자. 1991년 레코딩이다. 4분경(4분 24초까지)을 들어보면 소프라노의 메인 멜로디 부분은 애상적으로 이어지는데 알토 라인은 그보다 빠르게 지나가며 전반적으로 리듬이 약간씩 빨라졌다 느려졌다 한다.

모두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해 다른 이상향을 꿈꾸며 그곳에 근접하는 연주를 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한다. 기억하는가? 그 소리를 내기 전에 먼저 머릿속에서 들어야 한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그 소리와 실제 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치시키는 데에는 실패할 확률이 높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새롭게 ‘완벽한’ 연주가 나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클래식의 약속이다.

쇼팽 발라드 1번의 68마디부터 74마디까지35 화성 분석을 해본다. 휘몰아치는 아르페지오가 끝나고 왼손 라인의 뱃고동이 저물면서 아름다운 선율의 시간으로 진입하는 순간이다. B♭으로 시작해서 그런지 아주 부드럽게 빛나는 실크 촉감의 두꺼운 천을 만지는 느낌이 든다. 실크로 이루어진 바다 같다고 하면 내가 받는 느낌이 전달될까.

화성을 분석해보는 것은 바뀌는 호흡의 순서와 시점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느낌의 정체를 알아야 느낌을 전달할 수 있으니까.

모차르트를 연습할 때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크게 크게 프레이즈를 보면서 음들을 부드럽게 이어 연주하는 쇼팽을 칠 때와는 달리 한 음씩 예민하게 굴 필요가 있다. 아르페지오를 후루룩 ‘후리는’ 것도 안 된다. 장인이 바느질하듯이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대신 악보 자체는 쇼팽보다 쉬워서 비교적 빨리 볼 수 있다.

손과 귀의 격차는 언제쯤 줄어들까.

지금의 일정에서 피아노 레슨을 꾸준히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집념의 결과다.

성장 과정에서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변화한다. 몸도 정신도 타고난 것과 주어진 것 사이에서 요동치며 길을 찾는다. 어설펐던 일에 능숙해지고 능숙했던 것이 떠나간다. 바랐던 것은 좌절되고 원했던 일은 어그러진다. 그리고 그것이 숙명임을 우리는 천천히 깨달아간다.

나는 아홉 살 때처럼 피아노를 칠 수 없다. 열아홉 살 때처럼 밤을 새울 수 없다. 스물아홉 살 때처럼 무작정 사람을 믿을 수 없다.

그렇게 연습을 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걸로 돈을 벌거나 멋진 커리어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누군가가 듣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치고 또 친다. 누가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 내가 듣고 있으니까.

다양한 발레 클래스 음악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반은 피아니스트 김은수의 발레 클래스 1집이다.

이 기호들은 움직이지 않고도 멀리 가고, 말하지 않고도 소리를 낸다. 거듭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가 드러난다. 많이 읽을수록 다음 악보가 수월해진다. 앞에서 뒤로 읽어야 하며, 뒤에서 앞으로 읽을 때는 곡의 구조를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약속된 기호를 배우지 않으면 읽을 수 없으므로 사용된 기호의 체계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악보는 일종의 문학책, 혹은 『책의 말들』 에도 썼듯 일종의 암호이고, 편지이며, 일기이고, 몽상이다. 해석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 속에서 읽혀야만 하는 텍스트다. 여긴 빠르게, 저긴 느리게, 고조되면서, 더 크게, 더 크게, 스포르잔도!54 갑자기 작게, 당신의 마음을 담아….
54특히 힘을 주어 강하게. 해당되는 음 위에 sf로 표기한다.

피아노를 치지 않을 때도 가끔 악보를 본다. 혹은 아직 칠 수 없는 어려운 악보들을 읽는다. 펼쳐놓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머릿속으로 음악을 재생하면서 멀리 가는 음표들을 좇아가본다. 내가 그렇게 가장 자주 ‘읽는’ 악보는 쇼팽의 발라드 4번이다. 반복되지만 미세하게 변하는 음형, 점점 추가되는 멜로디와 화음은 읽어도 읽어도 새롭다.

이 어지러운 음표들 속에서 중요한 멜로디를 뽑아내 설득하려면 어떤 수풀을 헤쳐 나가야 할까? 연주자들은 이 많은 화음과 지시사항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속도와 멜로디를 찾아냈을까? 악보는 움직이지 않는데도 완성은 멀기만 하다.

유자 왕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5번55을 듣는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접어드는 중반부의 시간에 아주 선명한 소리로 중간 멜로디가 들린다. 오른손도 바쁘고 왼손도 바쁜데, 도대체 이 당당한 소리는 누가 내고 있지?

알파벳보다 음악 용어를 먼저 배웠다. 생소한 이탈리아어 단어들을 한글로 배우면서 이탈리아에 가서 택시를 타면 여기 쓰여있는 말만 가지고도 의사소통이 된다더라는 소문도 알게 되었다.

여태 이탈리아에 가본 적 없고 앞으로도 갈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탈리아의 택시에 타서 "알레그로!"56라고 외칠까 말까 고민하는 나를 상상해본다. 그런 파격적인 일을 하기에 나는 조금 소심한 것 같지만.

그것은 언어를 배우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본질적으로 음악이란 하나의 언어라고 느낀다. 각 음의 진동수가 규칙적이고 수학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음악과 수학의 연관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음악으로 말하고 음악을 읽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다. 우리가 말을 하고 글을 읽을 때처럼.

음악은 언어 없는 언어, 잘게 쪼개진 의미를 실어 나르는 대신 감정을 열어놓는 언어다.

반대로 언어란 하나의 음악이다. 이런, 글은, 읽기가, 힘들다.

글은 리듬이고, 호흡이며, 보이지 않는 선율이다. 책을 읽을 때 음악을 듣지 않는 이유는 단지 계이름이 들려서가 아니다. 글의 프레이징과 음악의 프레이징이, 글의 구조와 음악의 구조가 서로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글에 바라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나의 리듬을 온전히 당신에게 실어 나르는 것이다. 리듬은 꼭 종이에 인쇄된 단어에만 들어 있지는 않다. 리듬은 소리가 멈출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게.

‘연주’라는 영역 안에서, 그는 피아노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한다. 그는 노래한다. 그는 소리친다. 그는 선언한다. 그는 바라본다. 그는 바라본 것을 말하고, 다시 노래한다. 손가락은 조음(調音)에 사용되는 발음기관 혹은 펜을 잡은 손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뵈젠도르퍼 피아노 특유의 까로록, 하는 울림이 음마다 들린다.

내가 항상 들려주는 버전은 많은 버전 중에서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직접 지휘하며 연주한 1999년 앨범57이다(앞서 설명한 1악장 부분은 14분 경부터 약 2분간 지속되는 부분이다). 시디의 앞면에 ‘polish festival orchetra’라고 쓰여 있는데, ‘p’는 ‘(피아노, 즉 여리게를 나타내는 기호)’로, ‘f ’는 ‘(포르테 기호)’로, ‘o’는 ‘(온음표)’로 쓴 것이 인상적이다.

오케스트라의 다이내믹이 살아 있고, 피아니스트가 직접 지휘하며 연주했기 때문에 합이 착착 맞는 신명 나는 앨범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앨범에 반한 포인트는 현악이 멜로디를 연주할 때 마디를 끊지 않고 이어서 연주한 부분이다. 정확히 1악장의 12분경, 바이올린 파트는 몇 초 전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멜로디의 마지막 음(E)을 끊지 않고 그대로 다음 마디의 첫 음(G)으로 연결한다. 이 디테일 때문에 이 버전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57‘Chopin: Piano Concertos Nos. 1 & 2’(1999).

피아노를 연주하려면 들어야 한다. 내가 만드는 소리를 내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소리가 정확히 어떤 소리인지 알아야 한다. 흘러나오는 소리가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듣는 동시에, 완전히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 들어야 한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공기 속에서 연주되고 있는 음악이 피아노를 통과하는 중이라고 믿게 된다. 음악은 예측하거나 의도한 대로가 아닌, 그저 음악인 채 스스로 흘러간다.

그러나 아마추어들은 대개 자신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틀린 음을 짚지 않기 위해, 박자가 어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떨며 연주한다. 엉망진창으로 틀리는, 한없이 느린 자신의 연주를 견뎌야 한다. 이때의 연주자는 한 사람이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능숙해져도 음악을 듣는 나를 분리시키지 않는 한 연주자는 영원히 한 사람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신에게 몰두하는 사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겨운 사람, 혹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초조함을 읽어낼 수도 있고, 귀여움이나 대견함을 느낄 수도 있다.

청중보다 먼저 우는 가수, 독자보다 깊게 흐느끼는 작가, 관객을 두고 혼자 훌쩍이는 배우. 피아노를 치는 나는 이 단계에 있다.

내가 생각한 것을 표현하려면 멋대로 음악에 심취할 게 아니라 필요한 음을 정확한 터치로 내야 한다는 것을 근육으로 학습하고 있다. 이를테면 몸을 잔뜩 긴장한 상태로 건반을 누른다고 꼭 예쁜 소리가 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나 근육에 힘을 세게 주면 오히려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 같은 것.

연주는 듣기의 연속이다. 오로지 들음으로써만 창조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연주자를 끝없는 경청과 인내의 세계로 데려간다. 연주자는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이 소리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흐르는 음악을 붙잡아 세상에 존재하게끔 만드는 것, 공기에 매 순간 새로운 파장을 만드는 것, 각각의 음이 내야 할 소리를 내게 하는 것. 마음속의 소리와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소리와 공기, 소리와 손끝, 소리와 귀, 소리와 몸. 결국 그는 소리를 듣고 만들면서 소리 그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음악은 ? 다른 많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 그 무슨 짓을 해도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향유가 불가능해서 사람을 조바심 나게 만든다.

음악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 곡의 의미를 결정할 수 없다. 삶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 삶의 의미를 단정할 수 없다.

말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필사적으로 읽고 들었다.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 환기를 하고, 꿀물을 끓이고, 꿀 캔들에 불을 붙이고, 밀대로 바닥을 청소하고,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바깥의 바람 소리와 차들이 달리는 소리와 종이가 팔랑대는 소리만이 집을 나고 들었다. 말하는 대신 최선을 다해 경청했다. 글 속의 누군가의 누군가들이 얼마나 그를 아프게 했는지, 무릎 꿇게 했는지, 노래하게 했는지, 흙을 쓸게 만들었는지 들었다. 버스를 탈 때면 덜컹이는 소리를 차단하는 이어폰으로 피아노곡을 들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둔중한 소리, 울리는 소리와 빛나는 소리, 깃털 같다가도 한순간 건반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파고드는 소리가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공명하는지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왠지 작가의 이마에 새겨진 내 천(川) 자와 피아니스트의 손끝 감각이 옮아오는 것 같았다.

듣는 동안은 침묵이 언제 끝날지 묻지 않아도 됐다. 듣는 데에는 침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름다운 글과 소리를 들어서 그것을 만든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까스로 사랑할 수 있었다. 내 안의 소리를 들어서 나의 부족함을 가까스로 인정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서 가까스로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말을 멈추기란 도통 쉽지 않다는 것을, 억지로 누군가가 말을 멈추게 해야 겨우 뭔가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혼자서도 그렇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말하는 일이란 다른 사람에게 나의 일부를 떼어내 전달하는 일이고, 그 이전에 침묵의 시간만이 나를 정의할 수 있으며, 듣는 시간만이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듣기를 멈추지 않아야 하고, 듣기 위해 침묵해야 하며, 침묵의 힘으로 말해야 한다. 더 자세히, 더 세심히, 더 온전히 들어야 한다. 나 자신의 소리도, 다른 누군가의 소리도. 고립이 끝난 후에야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피아노 건반이 요구하는 확신은 곡이 완성된 후에야 비로소 이야기될 수 있다. 첫 음을 확신 없이 시작했더라도 마침에 이르러 그 음은 의미 있는 음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모든 것은 건반으로부터 시작되며, 듣는 이에게서 끝난다. 계속 칠 수만 있다면. 멈추지 않기만 한다면.

피아노를 중심으로 삶의 서사 하나를 꿰어낼 수 있었다.

귀환의 여정에서 나는 녹초가 되어 슈베르트의 즉흥곡 3번을 듣는다.

나는 여기에 있고, 무엇으로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으며, 그 사실을 바꿀 수 없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나는 조금 평온해진 마음으로 라벨 피아노 협주곡의 2악장을 튼다. 피아노의 고요한 왈츠. 단조롭지 않은, 리듬을 주었다 뺏는, 나에게 아주 느리게 춤출 힘을 주는 소리들. 이제 집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나면 모든 것은 씻겨 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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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무튼, 피아노 - 모든 것은 건반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무튼 시리즈 48
김겨울 지음 / 제철소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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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은 ‘아무튼‘시리즈가 겨우 4권이라 평가를 내리는 것이 좀 주저되지만, 아무튼 시리즈 중 최고가 아닐까 싶다. 피아노에 대해서 김겨울만큼 잘 쓸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피아노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그녀 삶의 상징이다. 눈으로 읽는데 귀로 들리고 몸으로 느껴지는 신기한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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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5-25 15: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뼈를 갈아서 쓴 글 같은 느낌도 들었다. 슬프기도 했고, 짧은 글에 너무 많은 감정이 왔다갔다 했던 독서였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만 서른두 곡을 썼다. 피아노의 신약성서로 비유되는 이 서른두 곡에는 원래 제목이 없다. 그러니까 소나타 1번부터 소나타 32번까지 있는 것이다.

베토벤의 경우 작품번호 36번은 교향곡, 작품번호 37번은 피아노 협주곡, 작품번호 38번은 클라리넷, 첼로,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곡이다.

시간이 흐르면 새 작품이 발견되기도 하고 연대가 다시 정리되기도 하다 보니 작품번호가 없는 곡(WoO)이라는 표기나 정리한 사람의 이름(베토벤의 경우 Hess, 드뷔시의 경우 L.)이 Op. 대신 붙기도 하고, 작품번호 뒤에 a, b 같은 알파벳이 붙기도 한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곡 뒤에 모르는 알파벳과 숫자가 적혀 있으면 대충 작품번호겠거니, 하면 된다.

일단 곡을 선택한 뒤에 연주자를 선택하는 기능과, 모르는 곡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이 함께 제공되는. 책을 쓰고 있는 2021년을 기준으로 이걸 구현하고 있는 유일한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는 IDAGIO다.

로직 프로(Logic Pro)23Ⅹ에는 세 가지의 기본 피아노 사운드가 있다. 스타인웨이, 야마하, 뵈젠도르퍼다. 나는 스타인웨이로 작업하는 걸 좋아한다. 뵈젠도르퍼의 독특한 음색은 영감을 줄 때도 있고 오히려 방해가 될 때도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음악을 하게 됐냐고 물어보면 그냥 스무 살 때 기타를 샀고, 그걸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했고, 그러다 곡도 쓰게 됐고, 정신을 차려보니 일을 하고 있었다고 답하곤 했다. 전부 사실이었다. 휴학을 하고 연습실을 계약해서 머리 빠지게 미디 작업을 하고 공연장을 뚫으러 다니며 무진 애를 쓰던 시간들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보니’라는 수사를 쓸 수 있었다.

커즈와일 pc3x

기타를 산 이유가 단순했다는 건 거짓말이다. 독자에게 한 거짓말이자 내가 나에게 한 거짓말이다. 나는 클래식 피아노를 치고 싶었지만 그것으로 내 커리어를 삼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자명하고 슬픈 사실 때문에 우회로를 선택했다. 그래 놓고 그게 아닌 척을 했다. 클래식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다는 것은 늘 비밀이었다. 남들에게 비밀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비밀이었다.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피아노를 피해 다니면서, 또 피아노로 부족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면서, 나는 내가 나를 속일 때 얼마나 많은 시간을 후회의 몫으로 남겨두게 되는지를 배웠다.

어떤 순간에는 내가 나를 속이지 않고서는 삶을 견딜 수 없다는 사실도 배웠다.

고등학생 때의 나는 심적으로 몰려 있었다. 시야가 너무 좁아진 나머지 고등학생은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늦은 나이라는 생각마저 해버렸을 정도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많은 시간이 남아 있음을 모르고 초조해했다. 모두가 나에게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명문대에 들어가야만 이 망할 레이스가 끝난다는 생각과 하루빨리 지금의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에 매일 혼이 나갔다. 그건 단순히 사춘기 시절의 맹목이나 이유 없는 정념은 아니었다.

친구는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늘 ‘피아노 소리가 예쁘다’는 말을 붙여줬다. 본인의 엄마에게도 친구에게도 그렇게 나를 소개했다고 했다. 공부를 잘하고, 춤을 잘 추고, 피아노 소리가 예쁜 친구.

빌 에번스의 〈Waltz for Debby〉, 젤리 롤 모턴의 〈The Crave〉, 스티브 바라캇의 〈Day by Day〉, 이사오 사사키의 〈When You Wish Upon a Star〉, 김광민의 〈Homeland Eternal〉, 빌리 조엘의 〈New York State of Mind〉 등을 처음 만났다.

"빌리 조엘 이 아저씨 완전 멋있는 사람이야. 우리 쌤이 말하길 이 아저씨 곡을 다 쳐보랬어."

free tempo라는 거 알아둬!" 그건 피아노 소리가 예쁜 친구에게 피아노 입시를 하고 있는 친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나는 이 파일이 누구의 친절이었는지 기억한다. 파일을 건네주던 친구의 신난 얼굴도 기억한다. 나는 최선을 다해 기억하고 있다. 친구의 진짜로 예뻤던 피아노 소리와, 고등학교 체육관 단상에 놓여 있던 그랜드피아노, 그걸 치러 가던 점심시간 같은 것들을.

그렇게 격렬하게 졸 거였으면 뒷자리에나 앉을 일이지, 구태여 앞자리에 앉아서 졸았으니 나름대로 내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했던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스티비 원더의 〈Superstition〉으로 시작한 수업은 레이 찰스, 제임스 브라운, 어리사 프랭클린, 안토니오 카를루스 조빔, 마일스 데이비스, 빌 에번스 등등을 거쳐 갔다.

이이다 토시히코의 『재즈 하모니 I+II』

피아노의 기초는 지긋지긋한 하농이다. 피아노 학원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기초 테크닉 연습을 위한 하농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 하농을 치되 스윙 리듬으로 치면서 뒷박에 강세를 넣어서 연습하는 것이 첫날 숙제였다.

재즈 피아노에는 하농 못지않게 지겹기 그지없는 존재가 하나 더 있는데 II-V-I이라는 존재다. II-V-I 연습하는 거 정말 너무 재미없다. 지금 나는 ‘정말’과 ‘너무’를 둘 다 썼다. 지금 생각해도 소스라칠 정도로 재미없다. II-V-I은 음악에서 많이 쓰이는 코드 진행 중 하나로, 하도 많이 쓰이는 탓에 현대실용음악에서 반드시 배워야 하는 필수적인 패턴이다. 패턴은 같지만 조마다 구성음은 다르기 때문에 모든 조성의 II-V-I에 해당하는 코드를 달달 외워야 한다.

‘II-V-I 보이싱 연습’30이 있다. ‘관성으로도 외우고 각각의 코드별로도 외우기.’ ‘버전 두 가지로 손에 붙여서 외울 것.’ ‘저번에 외운 오른손 II-V-I 스케일과 합쳐서 스윙 리듬으로 연습(강약 조심).’ ‘오른손 스케일+왼손 보이싱 연습하기.’ 이렇게 열심히 외웠는데 지금은 못 친다.

이십몇 년 전에 배운 클래식 곡은 지금도 칠 수 있건만. 이건 조기교육과 성인 교육의 차이인가.

선생님은 네가 초등학생이었으면 무조건 전공을 시키는 건데 하고 웃었는데, 스물네 살에게 초등학생은 삶의 절반을 접어버려야 하는 너무 먼 가정이었기 때문에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말로 하진 않았다.

초등학생 때는 누가 뭘 전공해도 웬만하면 다 잘하(게 되)지 않나. 선생님도 그래서 웃었는지 아니면 정말 안타까워 웃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재즈 피아노와의 짧은 인연은 여기까지다(아니, 쉰 기간까지 합하면 5년 정도 되니까 사실 짧지는 않다). 애써봤지만 여기까지였다. 한국인은 삼 세 번이라는 공식도 지켰으니 이만하면 충분하다. 기타의 몸도 재즈의 몸도 입는 데에 실패한 나에게 남은 것은 숨겨왔던 미련을 꺼내서 제대로 응시하는 일이었다.

나는 클래식 음악이 내가 가진 마지막 벽이라고 느낀다. 내가 가진 유일한 마음의 집이 활활 타올라 서까래마저 불타 없어져도 홀로 불타지 않는 벽. 노래에도, 말소리에도, 대화에도, 그 어떤 것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지친 몸을 끌고 가서 털썩 주저앉으면 기댈 수 있는, 푹신한 소파는 못 되지만 결코 무너지지는 않는 든든한 벽. 거칠고 두꺼운 벽에 머리를 기대면 나보다 먼저 기쁘고 슬펐던 이들이 온갖 소리로 나를 지탱해준다. 이 벽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

존 루이스의 바흐 평균율 앨범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클래식 앨범이다.

루이 암스트롱은 클래식 피아노로 음악을 시작했다. 빌 에번스는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해 대학교 졸업 작품으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다. 오스카 피터슨은 리스트의 제자의 제자인 폴 드 마키를 사사했다. 한편 드뷔시나 라벨, 조지 거슈윈 등 여러 클래식 작곡가의 음악에서는 재즈의 흔적이 발견된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가, 작곡가인 스튜어트 아이자코프는 『피아노의 역사』에서 피아니스트들을 네 가지 스타일로 나누는데, 열정으로 타오르는 불의 속성을 지닌 흥분가들, 유려하게 흐르는 물의 속성을 지닌 선율주의자들, 공기의 울림을 바꾸는 연금술사들, 그리고 견고한 땅의 이미지를 지닌 리듬주의자들이다.

선율주의자들로는 슈베르트와 바흐, 조지 시어링32이 방을 나눠 쓰고 있고, 연금술사의 방에는 빌 에번스와 드뷔시가 공존한다. 목록에는 재즈뿐만 아니라 록 연주자들도 포함된다.

애초에 모든 분류에는 자의성과 위험성이 있다. 보르헤스의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에 인용된 ‘어떤 중국 백과사전’의 동물 분류가 현대인의 눈에 놀랍게 보이는 것처럼. 분류에는 그 분류가 이루어지는 시대와 분류하는 사람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클래식 피아노와 재즈 피아노의 악보를 보면 금방 차이가 드러난다. 바흐나 모차르트의 피아노 악보를 구경해보자. 왼손과 오른손의 멜로디부터 셈여림과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까지 촘촘히 기록된 클래식 악보는 작곡가가 구상한 음악을 가능한 한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반면 재즈 피아노 악보를 살펴보자. 교과서처럼 여겨지는 『리얼북』 같은 교재를 볼 일이 없다면 악보 사이트에서 판매하는 멜로디 악보를 떠올려보면 된다. 왼손 반주 악보는 어디로 가고 멜로디와 코드가 덩그러니 쓰여 있다. 이걸로 어떻게 연주를 하라는 거야? 하지만 재즈를 기반으로 하는 연주자들은 어렵지 않게 연주를 해낸다. 코드가 주어지고 리듬과 속도가 정해지면, 암묵적으로 합의된 규칙을 기반으로 합주가 된다. 재즈가 ‘즉흥적’인 음악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인간 인지 및 뇌과학 연구소에서는 클래식 피아니스트와 재즈 피아니스트의 뇌를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했는데, 이에 따르면 두 장르의 피아니스트들은 같은 곡을 피아노로 연주할 때에도 서로 다른 정보 처리 방식을 사용한다.

실험에서 재즈 피아니스트들은 운지법이 틀리더라도 화성을 더 빨리 파악했고,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은 화성보다는 특이한 음을 연주하기 위한 운지법을 더 빠르게 찾아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재즈 피아니스트들은 구조를 생성하는 관점으로,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은 구조를 해석하는 관점으로 곡에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II-V-I을 외우는 것보다 수십 분짜리 클래식 곡을 외우는 게 더 재미있고 쉬웠다고 한 건 단순한 변명이 아니다.

국립발레단 출신의 선생님에게 발레 레슨을 받은 적이 있는데, 발레 댄서들 중에 의외로(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미의) ‘춤을 못 추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갑자기 아무 음악이나 틀고 춤을 춰보라고 하면 당황한다고(물론 그 기준이 춤을 추지 않는 사람과 상당히 다르겠지만).

규칙이 요구하는 동작들은 신체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거부하고 아름다움을 향하기에 수행하기 어렵다.

재즈 피아노가 즉흥적인 춤과 비슷하다면 클래식 피아노는 클래식 발레의 속성을 공유한다.

나는 피아노를 배울 때도 춤을 출 때도 클래식 피아노와 클래식 발레에 어떤 고향과도 같은 느낌, 본능적인 노스탤지어를 느끼는데, 단지 규칙 안에서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둘 모두 불가능한 완벽을 향해 불완전한 시도를 계속해나간다는 점이 나를 매료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로 그런 것에 늘 져버리고 만다.

대학에서 철학과를 다니면서 제일 매료되었던 건 누구도 이걸 멈출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누가 뜯어말려도,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며 말려도 이 쓸모없어 보이는 ? 실제로는 어떤지 차치하더라도 ? 짓을 멈출 수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계속 읽을 것이고, 논쟁할 것이고, 좌절할 것이다. 그게 인간이라는 게 좋았다.

인간은 동물일 수도 신일 수도 없어서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선택을 향해 복작거린다. 세상을 사물로만 볼 수도 없고 추상적으로만 볼 수도 없어서 그 사이에서 덜컹거린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서는 특수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 이성은 이성의 자연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물리칠 수도 없고 그의 전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34
34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1』,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물리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완벽한 상(像)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 하면서도 지지부진한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혹은 답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답하고자 노력하고, 완벽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매달리는 인간의 노력에는, 정말이지 속수무책으로 굴복하고 만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모든 것에 나는 늘 약하다. 도달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모든 것에 나는 늘 약하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시시포스의 기꺼운 패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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