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연주’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같은 곡의 수많은 상들이 있다. 그 모든 상들은 악보를 충실히 따른다는 점에서 어떤 것도 틀리지 않았으나, 악보의 여백을 각자의 방식으로 채우고 있으므로 어떤 것도 하나의 정답이 될 수 없다.

클래식 피아노 연주는 악보와 해석 사이의 싸움, 관습과 파격 사이의 싸움, 원상(原象)과 상(像) 사이의 싸움이다. 아무리 원전에 가까운 악보를 공유한다고 해도 같은 연주는 나올 수 없으며, 선생이 학생에게 가르친다고 하여 두 사람의 연주가 같을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연주를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클래식 피아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장이고, 그래서 나는 저항도 없이 빠져들고 만다.

클래식이 요구하는, 그리고 클래식이 요구하기에 연주자가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완벽성에 다가가기 위한 놀랍지 않은 노력이다.

그러니까 나는 평생, 규칙과 헌신의 세계에 살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의 본능은 늘 그러했던 것 같다.

나에게는 클래식 공연에 표를 두 매씩 예매해 주변 사람들을 데려가는 다소 홍익인간스러운 습관이 있는데, 조진주 바이올리니스트의 공연에 초대를 받아 요조에게 같이 가자고 청한 것이다.

두 손으로 연주하는 3성부, 4성부의 아름다움은 한꺼번에 여러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는 건반악기에만 허락된 복잡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이다.

정석적인 에튀드 연주로 ‘쇼팽 에튀드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연주를 했던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스케르초 연주를 들어보자. 1991년 레코딩이다. 4분경(4분 24초까지)을 들어보면 소프라노의 메인 멜로디 부분은 애상적으로 이어지는데 알토 라인은 그보다 빠르게 지나가며 전반적으로 리듬이 약간씩 빨라졌다 느려졌다 한다.

모두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해 다른 이상향을 꿈꾸며 그곳에 근접하는 연주를 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한다. 기억하는가? 그 소리를 내기 전에 먼저 머릿속에서 들어야 한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그 소리와 실제 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치시키는 데에는 실패할 확률이 높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새롭게 ‘완벽한’ 연주가 나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클래식의 약속이다.

쇼팽 발라드 1번의 68마디부터 74마디까지35 화성 분석을 해본다. 휘몰아치는 아르페지오가 끝나고 왼손 라인의 뱃고동이 저물면서 아름다운 선율의 시간으로 진입하는 순간이다. B♭으로 시작해서 그런지 아주 부드럽게 빛나는 실크 촉감의 두꺼운 천을 만지는 느낌이 든다. 실크로 이루어진 바다 같다고 하면 내가 받는 느낌이 전달될까.

화성을 분석해보는 것은 바뀌는 호흡의 순서와 시점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느낌의 정체를 알아야 느낌을 전달할 수 있으니까.

모차르트를 연습할 때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크게 크게 프레이즈를 보면서 음들을 부드럽게 이어 연주하는 쇼팽을 칠 때와는 달리 한 음씩 예민하게 굴 필요가 있다. 아르페지오를 후루룩 ‘후리는’ 것도 안 된다. 장인이 바느질하듯이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대신 악보 자체는 쇼팽보다 쉬워서 비교적 빨리 볼 수 있다.

손과 귀의 격차는 언제쯤 줄어들까.

지금의 일정에서 피아노 레슨을 꾸준히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집념의 결과다.

성장 과정에서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변화한다. 몸도 정신도 타고난 것과 주어진 것 사이에서 요동치며 길을 찾는다. 어설펐던 일에 능숙해지고 능숙했던 것이 떠나간다. 바랐던 것은 좌절되고 원했던 일은 어그러진다. 그리고 그것이 숙명임을 우리는 천천히 깨달아간다.

나는 아홉 살 때처럼 피아노를 칠 수 없다. 열아홉 살 때처럼 밤을 새울 수 없다. 스물아홉 살 때처럼 무작정 사람을 믿을 수 없다.

그렇게 연습을 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걸로 돈을 벌거나 멋진 커리어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누군가가 듣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치고 또 친다. 누가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 내가 듣고 있으니까.

다양한 발레 클래스 음악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반은 피아니스트 김은수의 발레 클래스 1집이다.

이 기호들은 움직이지 않고도 멀리 가고, 말하지 않고도 소리를 낸다. 거듭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가 드러난다. 많이 읽을수록 다음 악보가 수월해진다. 앞에서 뒤로 읽어야 하며, 뒤에서 앞으로 읽을 때는 곡의 구조를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약속된 기호를 배우지 않으면 읽을 수 없으므로 사용된 기호의 체계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악보는 일종의 문학책, 혹은 『책의 말들』 에도 썼듯 일종의 암호이고, 편지이며, 일기이고, 몽상이다. 해석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 속에서 읽혀야만 하는 텍스트다. 여긴 빠르게, 저긴 느리게, 고조되면서, 더 크게, 더 크게, 스포르잔도!54 갑자기 작게, 당신의 마음을 담아….
54특히 힘을 주어 강하게. 해당되는 음 위에 sf로 표기한다.

피아노를 치지 않을 때도 가끔 악보를 본다. 혹은 아직 칠 수 없는 어려운 악보들을 읽는다. 펼쳐놓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머릿속으로 음악을 재생하면서 멀리 가는 음표들을 좇아가본다. 내가 그렇게 가장 자주 ‘읽는’ 악보는 쇼팽의 발라드 4번이다. 반복되지만 미세하게 변하는 음형, 점점 추가되는 멜로디와 화음은 읽어도 읽어도 새롭다.

이 어지러운 음표들 속에서 중요한 멜로디를 뽑아내 설득하려면 어떤 수풀을 헤쳐 나가야 할까? 연주자들은 이 많은 화음과 지시사항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속도와 멜로디를 찾아냈을까? 악보는 움직이지 않는데도 완성은 멀기만 하다.

유자 왕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5번55을 듣는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접어드는 중반부의 시간에 아주 선명한 소리로 중간 멜로디가 들린다. 오른손도 바쁘고 왼손도 바쁜데, 도대체 이 당당한 소리는 누가 내고 있지?

알파벳보다 음악 용어를 먼저 배웠다. 생소한 이탈리아어 단어들을 한글로 배우면서 이탈리아에 가서 택시를 타면 여기 쓰여있는 말만 가지고도 의사소통이 된다더라는 소문도 알게 되었다.

여태 이탈리아에 가본 적 없고 앞으로도 갈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탈리아의 택시에 타서 "알레그로!"56라고 외칠까 말까 고민하는 나를 상상해본다. 그런 파격적인 일을 하기에 나는 조금 소심한 것 같지만.

그것은 언어를 배우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본질적으로 음악이란 하나의 언어라고 느낀다. 각 음의 진동수가 규칙적이고 수학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음악과 수학의 연관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음악으로 말하고 음악을 읽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다. 우리가 말을 하고 글을 읽을 때처럼.

음악은 언어 없는 언어, 잘게 쪼개진 의미를 실어 나르는 대신 감정을 열어놓는 언어다.

반대로 언어란 하나의 음악이다. 이런, 글은, 읽기가, 힘들다.

글은 리듬이고, 호흡이며, 보이지 않는 선율이다. 책을 읽을 때 음악을 듣지 않는 이유는 단지 계이름이 들려서가 아니다. 글의 프레이징과 음악의 프레이징이, 글의 구조와 음악의 구조가 서로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글에 바라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나의 리듬을 온전히 당신에게 실어 나르는 것이다. 리듬은 꼭 종이에 인쇄된 단어에만 들어 있지는 않다. 리듬은 소리가 멈출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게.

‘연주’라는 영역 안에서, 그는 피아노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한다. 그는 노래한다. 그는 소리친다. 그는 선언한다. 그는 바라본다. 그는 바라본 것을 말하고, 다시 노래한다. 손가락은 조음(調音)에 사용되는 발음기관 혹은 펜을 잡은 손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뵈젠도르퍼 피아노 특유의 까로록, 하는 울림이 음마다 들린다.

내가 항상 들려주는 버전은 많은 버전 중에서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직접 지휘하며 연주한 1999년 앨범57이다(앞서 설명한 1악장 부분은 14분 경부터 약 2분간 지속되는 부분이다). 시디의 앞면에 ‘polish festival orchetra’라고 쓰여 있는데, ‘p’는 ‘(피아노, 즉 여리게를 나타내는 기호)’로, ‘f ’는 ‘(포르테 기호)’로, ‘o’는 ‘(온음표)’로 쓴 것이 인상적이다.

오케스트라의 다이내믹이 살아 있고, 피아니스트가 직접 지휘하며 연주했기 때문에 합이 착착 맞는 신명 나는 앨범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앨범에 반한 포인트는 현악이 멜로디를 연주할 때 마디를 끊지 않고 이어서 연주한 부분이다. 정확히 1악장의 12분경, 바이올린 파트는 몇 초 전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멜로디의 마지막 음(E)을 끊지 않고 그대로 다음 마디의 첫 음(G)으로 연결한다. 이 디테일 때문에 이 버전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57‘Chopin: Piano Concertos Nos. 1 & 2’(1999).

피아노를 연주하려면 들어야 한다. 내가 만드는 소리를 내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소리가 정확히 어떤 소리인지 알아야 한다. 흘러나오는 소리가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듣는 동시에, 완전히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 들어야 한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공기 속에서 연주되고 있는 음악이 피아노를 통과하는 중이라고 믿게 된다. 음악은 예측하거나 의도한 대로가 아닌, 그저 음악인 채 스스로 흘러간다.

그러나 아마추어들은 대개 자신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틀린 음을 짚지 않기 위해, 박자가 어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떨며 연주한다. 엉망진창으로 틀리는, 한없이 느린 자신의 연주를 견뎌야 한다. 이때의 연주자는 한 사람이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능숙해져도 음악을 듣는 나를 분리시키지 않는 한 연주자는 영원히 한 사람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신에게 몰두하는 사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겨운 사람, 혹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초조함을 읽어낼 수도 있고, 귀여움이나 대견함을 느낄 수도 있다.

청중보다 먼저 우는 가수, 독자보다 깊게 흐느끼는 작가, 관객을 두고 혼자 훌쩍이는 배우. 피아노를 치는 나는 이 단계에 있다.

내가 생각한 것을 표현하려면 멋대로 음악에 심취할 게 아니라 필요한 음을 정확한 터치로 내야 한다는 것을 근육으로 학습하고 있다. 이를테면 몸을 잔뜩 긴장한 상태로 건반을 누른다고 꼭 예쁜 소리가 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나 근육에 힘을 세게 주면 오히려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 같은 것.

연주는 듣기의 연속이다. 오로지 들음으로써만 창조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연주자를 끝없는 경청과 인내의 세계로 데려간다. 연주자는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이 소리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흐르는 음악을 붙잡아 세상에 존재하게끔 만드는 것, 공기에 매 순간 새로운 파장을 만드는 것, 각각의 음이 내야 할 소리를 내게 하는 것. 마음속의 소리와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소리와 공기, 소리와 손끝, 소리와 귀, 소리와 몸. 결국 그는 소리를 듣고 만들면서 소리 그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음악은 ? 다른 많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 그 무슨 짓을 해도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향유가 불가능해서 사람을 조바심 나게 만든다.

음악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 곡의 의미를 결정할 수 없다. 삶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 삶의 의미를 단정할 수 없다.

말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필사적으로 읽고 들었다.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 환기를 하고, 꿀물을 끓이고, 꿀 캔들에 불을 붙이고, 밀대로 바닥을 청소하고,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바깥의 바람 소리와 차들이 달리는 소리와 종이가 팔랑대는 소리만이 집을 나고 들었다. 말하는 대신 최선을 다해 경청했다. 글 속의 누군가의 누군가들이 얼마나 그를 아프게 했는지, 무릎 꿇게 했는지, 노래하게 했는지, 흙을 쓸게 만들었는지 들었다. 버스를 탈 때면 덜컹이는 소리를 차단하는 이어폰으로 피아노곡을 들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둔중한 소리, 울리는 소리와 빛나는 소리, 깃털 같다가도 한순간 건반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파고드는 소리가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공명하는지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왠지 작가의 이마에 새겨진 내 천(川) 자와 피아니스트의 손끝 감각이 옮아오는 것 같았다.

듣는 동안은 침묵이 언제 끝날지 묻지 않아도 됐다. 듣는 데에는 침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름다운 글과 소리를 들어서 그것을 만든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까스로 사랑할 수 있었다. 내 안의 소리를 들어서 나의 부족함을 가까스로 인정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서 가까스로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말을 멈추기란 도통 쉽지 않다는 것을, 억지로 누군가가 말을 멈추게 해야 겨우 뭔가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혼자서도 그렇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말하는 일이란 다른 사람에게 나의 일부를 떼어내 전달하는 일이고, 그 이전에 침묵의 시간만이 나를 정의할 수 있으며, 듣는 시간만이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듣기를 멈추지 않아야 하고, 듣기 위해 침묵해야 하며, 침묵의 힘으로 말해야 한다. 더 자세히, 더 세심히, 더 온전히 들어야 한다. 나 자신의 소리도, 다른 누군가의 소리도. 고립이 끝난 후에야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피아노 건반이 요구하는 확신은 곡이 완성된 후에야 비로소 이야기될 수 있다. 첫 음을 확신 없이 시작했더라도 마침에 이르러 그 음은 의미 있는 음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모든 것은 건반으로부터 시작되며, 듣는 이에게서 끝난다. 계속 칠 수만 있다면. 멈추지 않기만 한다면.

피아노를 중심으로 삶의 서사 하나를 꿰어낼 수 있었다.

귀환의 여정에서 나는 녹초가 되어 슈베르트의 즉흥곡 3번을 듣는다.

나는 여기에 있고, 무엇으로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으며, 그 사실을 바꿀 수 없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나는 조금 평온해진 마음으로 라벨 피아노 협주곡의 2악장을 튼다. 피아노의 고요한 왈츠. 단조롭지 않은, 리듬을 주었다 뺏는, 나에게 아주 느리게 춤출 힘을 주는 소리들. 이제 집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나면 모든 것은 씻겨 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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