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죽음을 죽어라,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과거의 나와 새로운 나 사이에 놓인(…)

어릴 적 나는 집히는 대로 책을 읽다가 아버지의 ‘에브리맨스 라이브러리Everyman’s Library’라는 오래된 문고본 총서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에브리맨, 내 너와 동행하며 길잡이가 되어주리라. 그대가 나를 간절히 원할 때가 되면." 이 문장은 내게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자신들이 내 친구라고 선언하며, 여행길에 함께 오르겠다고, 유용한 조언도 해줄 뿐 아니라 필요하면 언제든 곁에 있겠다고 약속하고 있었으니까요. 기댈 언덕이 있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지요.

그의 곁에 유일하게 남은 친구가 있으니 바로 ‘선행’이지요. 그렇지만 ‘선행’은 몸이 너무 약해서 에브리맨을 업보로부터 구해내기에 힘이 부칩니다. 하지만 ‘선행’이 ‘지식’이라는 동생을 소개시켜주고, ‘지식’이 에브리맨에게 무덤까지 가는 길에 유용한 길잡이가 되겠노라고 제안하지요. 그러면서 내가 방금 인용했던 말을 뱉는 겁니다.

한가로운 저승길에 《오만과 편견》과 《요정 몹사》가 무슨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걸까요? 그래도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편도행 티켓을 끊어놓고 같은 열차에 오른 처지이니, 가는 길에 읽을 만한 게 있으면 좋을 것 같긴 합니다.

"죽은 자와 협상하기"로, 모든 서술적 글쓰기, 아니 어쩌면 모든 글쓰기는 사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매혹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가설을 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사후세계로 들어가, 죽은 자로부터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데려오고자 하는 욕망에서 글쓰기가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거죠.

내 서재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는 자료 무덤에서 인용문 몇 개를 거의 무작위로 뽑아봤습니다. 앤마리 맥도널드의 소설 《무릎을 꿇어라》8는 "그들은 이제 모두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존 어빙은 《일 년 동안의 과부》9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맞이한 오빠 토머스와 티모시의 죽음이 루스 콜이 작가가 된 또 다른 이유이다." 다음은 체호프의 말입니다.

기분이 우울할 때 바다나 거대한 풍경과 마주하게 되면 언제나 애수에 잠기면서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이 무명으로 살다가 죽을 거라는 확신을 느낀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연필을 낚아채 제일 먼저 손에 집히는 것에 서둘러 자신의 이름을 쓰게 된다.10

왜 다른 예술이나 매체가 아닌 굳이 글쓰기가 개인의 최종적 소멸에 대한 불안과 그토록 밀접하게 연결되는 걸까요?

글쓰기의 속성도 한몫합니다. 이를테면 공연 무대와는 달리 영원해 보이고 결과물도 오래도록 살아남으니까요.

다른 예술 형태들(그림, 조각, 음악)도 오래 지속될 수는 있지만 ‘목소리’로서 살아남지는 못하지요.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글쓰기는 글을 쓰는 행위이고, 글이 쓰이면 목소리를 위한 악보가 되는데, 목소리가 가장 자주 하는 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심지어 대부분의 짧은 서정시에서조차). 길지 않더라도, 아주 짤막하더라도 말이지요.

목소리는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하나의 인식에서 다른 인식으로 시간을 가로질러 이동합니다. 모든 것은 생각만으로든 실제세계에서든 변하지요. 사건은 다른 사건들과 맞물리며 벌어지고요. 그것이 시간입니다. 빌어먹을 일들이 연이어 터지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연이어"예요.

레온 에델이 말한 것처럼, 소설이라면 작품 속에 시계가 있어야 합니다.

삶과 죽음에 다리를 놓는 수많은 미신, 즉 규칙과 절차에는 음식이 빠질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무한한 허기를 느낀다고 믿어서이지요.

먼저 떠난 가족이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들로 특별한 식사를 차리는 한편, 망자들이 보이지 않는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와 수건도 마련하지요. 어떤 공동체에서는 가족들이 직접 망자를 위해 차린 음식을 먹습니다. 그것도 바로 무덤 위에서 말이에요. 또 다른 공동체에선 죽은 자가 무사히 식사를 하러 왔다가 마친 뒤 저승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무덤에서 집까지(보통은 금잔화 꽃잎으로) 길을 표시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손님일 뿐이므로 존경과 예의를 갖춰서 접대하고 먹을 것을 대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보답으로 망자가 예의바른 손님처럼 행동한 뒤 잔치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거든요.

다른 세계(천국, 지옥, 요정의 나라, 지하세계, 뭐라고 부르든 간에)로부터 온 자는 누구든 우리에게 행운을 주거나, 해로운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그 대가로 최소한 그들에게 기도와 감사만이라도 주어진다면 말이지요.

그 밖에 죽은 자는 무엇을 원할까요? 그건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이를테면 햄릿의 아버지는 복수를 원하는데 딱히 유별난 요구는 아니에요.

온다치의 소설에서 늙은 장님이 손가락으로 두개골을 "읽는다"는 설정은 아주 오랜 풍경을 재현하는 듯합니다.

햄릿이 죽어가면서 친구 호레이쇼에게 "고통 속에 살아야 하겠지만, 이 험한 세상에 남아서 내 이야기를 전해다오"23라고 청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들려지길 원합니다.

밸런타인데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나야 늘 생각하지요. 예전에 한 남자친구가 진짜 소의 심장에 진짜 화살을 꽂아서 보내준 탓에 말이에요(비닐봉지에 담아놓아서 손에서 떨어뜨리진 않았어요). 짐작했겠지만 내가 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친구였지요.

점성학적으로 11월이 죽음, 섹스, 부활을 의미하는 전갈자리의 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봤자 생일 케이크를 꾸미는 데는 아무 도움도 안 됐지만요.

왜 이 세 가지가 함께 있는 걸까요? 죽음이 섹스와 부활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이걸 설명하려면 엄청난 각주가, 아니 책 한 권이 필요합니다. 그 책은 아마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일 겁니다.

수많은 전설에 따르면 영혼은 금속을 지나칠 수 없거든요.

그 귀한 것들이란 무엇일까요?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부
? 지식
? 사악한 괴물과 싸울 기회
? 영영 잃어버린 사랑하는 사람

후손이 조상을 위해 붉은 종이돈30을 태우면 그 대가로 진짜 돈을 가져다준다지요. 풍년을 기원하며 죽은 자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짧은 기도 문구도 저세상을 향해 물질적 행복을 달라고 매우 겸손하게 비는 거예요. 모든 종류의 부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보이는 세상으로 흐릅니다.

두 번째는 지식입니다. 사자들은 시간 바깥에 있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알지요. "네가 어째서 나를 불렀는가?" 선지자 사무엘의 유령은 엔돌의 무당의 몸을 빌려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32 사울 왕 자신이 몸소 금해놓고선 정작 자기가 유령을 불러낸 까닭은 곧 시작될 전투에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입니다(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지요).

물론 지식과 부는 별개가 아닙니다. 구하고자 하는 지식이 재물을 손에 넣는 법에 대한 것일 수도 있어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접한 현대 단편소설은 D. H. 로런스의 고전 〈목마와 소년〉입니다. 이후로도 계속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이야기지요. 내용이 복잡하지만 이 주제와 연결시켜 얘기하자면 이렇습니다. 한 아름다운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재물운도 없고 어린 아들에게 별로 애정도 없어요. 아들은 행운이 찾아와서 엄마가 그토록 원하는 부를 얻길 간절히 바라지요. 그래야 엄마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예요.

네 번째는 영영 잃어버린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는 작가들과 그들이 글을 쓰는 동인과 관련해서 중요한 모티브예요. 최초로 사라진 사람은 남성으로 짐작됩니다. 연인을 찾아 나서는 가장 오래된 인물이 이집트 여신 이시스니까요.

그들이 강물을 마시라 권해도
죽음의 물을 마시지 마라.
죽은 자의 들판에서 낟알을 주어도
그 씨앗을 받지 마라.

이난나 여신이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노래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시입니다.35

이난나와 그녀의 남편 두무지, 두무지의 오누이 게쉬티난나 신화와 마찬가지로, 페르세포네 신화도 그녀가 1년 중 얼마간은 지하에서, 얼마간은 지상에서 보내기로 합의하면서 마무리됩니다. 그게 이 세상에 겨울이 찾아오는 이유지요.

죽은 자의 음식도 먹어서는 안 되지만, 집에서 풀어야 할 선물을 너무 일찍 궁금해해서도 안 되는 법입니다.

‘천국’의 결말은 눈을 질끈 감고 실눈으로 볼 때만 해피엔딩인 겁니다.

언제나 낯선 장소를 방문할 때에는 전에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 다시 돌아오는 법을 아는(지옥을 여행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지요) 사람과 가는 게 최선이니까요.

어둠 속에서도
리라를 연주해본 자만이,
그침 없는 찬양을
드릴 수 있으리.

죽은 자들과 함께 앉아
양귀비를 먹어본 자만이,
가장 희미한 가락까지
기억할 수 있으리(…)

두 세상에 함께 도달할 때
목소리는
영원함과 온화함을 지키리라40

지옥은(아마도) 개인적인 이야기 속에 영원히 갇히는 곳이고, 천국은(아마도) 이야기 대신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다소 겁나긴 하지만요.

"그는 지혜로웠다. 그는 불가사의를 보았고, 비밀스런 것들을 깨달았고, 홍수가 나기 전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가져왔다. 그는 온갖 고초에 시달려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긴 여행에서 돌아와 그 모든 이야기를 돌에 새겼다."

이야기가 있는 곳? 이야기는 암흑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감이 떠오르는 것을 섬광에 비유하는 것이지요.

누구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어요.

모든 작가들은 죽은 자들로부터 가르침을 얻습니다. 계속 글을 쓰는 한, 작가는 앞서 글을 썼던 작가들의 작품을 끊임없이 탐구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들에게 평가받고 질책당한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작가는 작가로부터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조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음껏 탐닉하려면 결국 지나간 시간에서 온 사람들과 거래를 해야 합니다. 그 지나간 시간이 겨우 어제라 하더라도 과거는 과거이지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

모든 작가는 ‘지금’에서 ‘옛날 옛적’으로 가야 합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야 합니다.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저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과거에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보기에 따라서 절도든, 회수든, 뭐든 해야 합니다. 죽은 자들이 제아무리 보물을 갖고 있다고 해도, 산 자들의 땅으로 되가져와 시간 속에 또 한 번 들이지 않는 이상, 그러니까 관객의 영역에, 독자의 영역에, 변화의 영역에 들이지 않는 이상, 그 보물은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문자 그대로든 은유적으로든) 과거의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권위를 이용해 지금 이곳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에,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에 발을 들인다는 데서 우리는 이미 인간이란 종의 독특한 특성이 무엇인지 인식했다. 우리가 여기서 분석하고자 했던 건, 하고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의 서술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서술의 모체였다.47

하지만 운명이 내게 목소리를 남겨놓아,
사람들이 그 목소리로 나를 알아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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