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영어는 당연히 잘하고 싶었고, 샹송을 부르고 싶어 불어를 배우고 싶었으며,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아 일본어도 익히고 싶었다. 독문학 관련 강의를 들은 이후엔 독일어에 호기심이 생겼고, 스페인어 발음이 노래처럼 아름답다는 걸 알고는 스페인어 수업을 들어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많은 ‘배우고 싶은 언어’ 리스트에 중국어는 없었다.

불어로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상상하면 낭만적이었고, 독어로 말하고 있는 나를 그려보면 지적으로 보였다. 스페인어로 인사하는 내 모습은 명랑하게 여겨졌고, 일어로 대화하는 나는 귀여울 것 같았다. 중국어로 말하는 나는…‥ 코믹하고 시끄러울 것 같았다.

물론 『금잔화』를 비롯한 대만 작가 경요(瓊瑤)의 소설을 탐닉했고, 계림문고 축약판으로나마 『삼국지』도 읽었으며, 루쉰(魯迅)을 의무적으로 읽긴 했지만. 중국적인 것과는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거대하고 화려한 것보다는 자그마하고 섬세한 걸 좋아했다. 수업이 개설되지 않은 일본어는 굳이 학교 언어교육원에까지 등록하며 배웠지만 여러 수업이 개설돼 있는 중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 듣게 된 수업들이 꽤 있는데, 이번에도 친구들의 영향을 받았다. 친구들이 너도 나도 듣는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나의 좁은 세계를 친구들이 넓혀주었다.

"엄마. 일단 문을 열어놓는 게 중요해. 문을 열어놓으면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잖아. 대학교 때 조금씩이라도 이런저런 언어를 접해 놓아야지 나중에 사회인이 되어서 혹시 필요하게 되더라도 겁 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문만 열어놓고 발을 들이밀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하고 싶지도 않은데 필요하다고 생각해 계절학기 수업까지 들어가며 배운 언어이니만큼 열심히 잘하겠다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나의 의욕은 수업 초반에 꺾였다. 성조에 대해 배울 때였는데, 선생님은 경성(輕聲)을 포함한 다섯 가지 성조 중 제4성이 제일 어렵다고 하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경상도 사람들이 특히 이 제4성을 발음하기 힘들어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보면 그중에서도 마산, 진주 사람들은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고요." 나 진주 출신인데…….

나의 중국어 인생은 두 번의 수업을 들은 것으로 막을 내렸고 사회인이 되어서도 힘겹게 열어놓은 그 문을 다시 밀고 들어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J는 중국어 공부를 더 하겠다며 이후 베이징으로 떠났고 지금은 현지인 수준으로 중국어를 구사하면서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대개 나보다 높은 곳을 보았으며, 멀리 뛰었고,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내가 비록 그들의 고아(高雅)한 기준에는 못 미치는 인간일지라도, 곁에 그런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자극이 되었고 눈이 트였다. 대학이라는 공간뿐 아니라 친구들 하나하나가 새롭고 귀한 세계였다.

하나의 언어를 조금이나마 안다는 것은 세계를 보는 또 다른 눈을 가지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지만, ‘사과’가 중국어로 ‘?果(핑궈)’라는 걸 알고 있다.

유독 ‘?果’를 기억하는 이유는 중국어1 시험을 볼 때 "사과를 중국어로 쓰시오."라는 문제의 답에 ‘?’을 ‘平’으로 적어 틀렸기 때문이긴 하지만, ‘애플(apple)’과 ‘폼(pomme)’, ‘링고(リンゴ)’ 말고도 또 다른 언어로 ‘사과’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삶을 좀 더 정교하고 다채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사과’와 ‘핑궈’와 ‘애플’과 ‘폼’과 ‘링고’ 중 가장 사과와 잘 어울리는 단어는 어떤 것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일이 즐겁다고 하면 이상해 보이려나?

첫 책 『그림이 그녀에게』가 중국에서 번역되어 나올 때, 순우리말 이름을 가진 내게 한자 이름을 알려달라기에 거침없이 ‘궈야란(郭雅藍)’이라 지어 보낸 것도, 따지고 보면 중국어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사랑해 당신을」의 OST인 「아임 스틸 러빙 유(I’m Still Loving You)」가 등려군의 노래 「첨밀밀」을 리메이크해 부른 것이라 멜로디가 익숙해서 더 그랬을 것이다.

在?里 在?里???(짜이 날리 짜이 날리 찌엔궈니)
어디에서 어디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었을까요
?的笑容??熟悉(니 더 샤오롱 쩌양 슈시)
너의 웃는 모습 이렇게 익숙한데
我一?想不起(워 이시 샹 부치)
한순간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 在?里(아 짜이 멍리)
아, 꿈속에서였구나
?里?里???(멍리 멍리 찌엔꿔 니)
꿈속에서, 꿈속에서 당신을 보았어요
?蜜笑得多?蜜(티엔미 샤오 더 두오 티엔미)
달콤하게 웃는 모습이 그렇게도 달콤했습니다
是? 是? ??的就是?(쉬 니 쉬 니 멍찌엔 더 지우쉬 니)
당신이군요 당신이군요 꿈에서 본 사람이 바로 당신이군요

때때로 입을 열어, 외우고 있는 몇 안 되는 중국어 문장을 가만히 말해 본다. "?是我的老?(타 쉬 워 더 라오슈)"(그녀는 나의 선생님입니다.), "明天?來??(밍티엔 니 라이 마)"(내일 오시나요?)…… 아무도 듣는 이 없지만 혼자 종알거리고 있자면 좀처럼 사용할 일 없는 성대의 깊숙한 부분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기적 소리처럼 구슬프게 울린다. 거대한 미지의 세계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문이 잠시, 빼꼼히 열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틈새로 살풋, 바람이 분다.

읽고 나서 오랫동안 곱씹게 되는 책이 있다. 읽을 때 의미를 알 수 없었고 시간이 오랜 지난 후에도 좀처럼 파악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는 책이. 내게는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이 그런 책이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거실 바닥에 자그마한 언덕을 이루고 있지만,

여러 번 읽은 영어 원서가 책장에 꽂혀 있었지만 이번엔 한글판으로 읽어보고 싶었다. 모국어로 읽으면 읽을 때마다 안개처럼 흩뿌려지던 모호함이 조금은 걷혀 나갈까? 의문과 기대를 가지고 시작한 독서였지만, 책장을 덮을 때쯤엔 희미한 실망이 찾아왔다. 한국어로 읽는다고 해서 또렷해지는 작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작품은 오히려 원어로 읽을 때 더 명료했다.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는 적확하게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딱 하나의 단어가 있다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을 주창했는데, 조이스는 플로베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친구들과 함께 "너의 ‘르 모 쥐스트’는~야."라며 서로의 특색을 잡아내어 놀리곤 했다. 그 과정에서 한 친구가 "곽아람의 ‘르 모 쥐스트’"라며 붙여준 별명이 ‘짜가 클래식’이었는데, 겉으로는 제법 고상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매일 길을 헤매는 방향치에 엉뚱한 면이 많은 허당이라는 뜻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물 없이 고구마 몇 개를 연달아 먹어치운 것처럼 목이 막히고 답답해지는데,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혈이 막혀 순환을 멈춘 거대한 유기체처럼 여겨져서다.

But I also dreamt, which pleased me most,
그러나 꿈 속에서 가장 기뻤던 것은,
That you loved me still the same.
그대가 나를 아직도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거였네.

남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 거듭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훈련을 하게 되었으니까. 명료한 답이 나오지 않아도 좋다. 이 지(知)의 여정은 나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언젠가는 더블린에서 10월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다.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가 쓴 고대 그리스 희곡을 맨 처음 읽었고, 그 다음에 단테의 『신곡』과 17세기 프랑스 작가 몰리에르의 희곡 『서민 귀족』을 읽었다.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를 읽었고,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조별 발표도 했고 다른 학생이 작성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대한 보고서도 함께 읽었던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한 학기 동안 다 읽을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고 과연 내가 제대로 읽었는지도 의심스러운데, 한 가지만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도서관으로 바삐 뛰어가던 내 모습. 저 책들을 다 살 수는 없으니까, 최대한 도서관에서 빌려야 이번 학기 예산에 지장이 없겠다 계산하던 대학 2학년의 나.

조용하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 선생님 연구실 문에 붙어 있던 함에 살며시, 약간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서툴지만 최대한 매만진 글이 적힌 종이를 넣어놓고 오던 나. 그때부터 마감을 어기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쓰는 사람이었으니, 나의 ‘마감 인생’도 제법 오래되었구나, 어쨌든…….

교양은 어떤 상황에서든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된다.

‘서양문명의 역사’ 시간에 읽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은 『뤼시스트라테』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쟁 중일 때, 남자들의 전쟁을 멈추게 하고픈 아테네 여인들이 섹스파업을 통해 전쟁을 멈추게 하는 희극(喜劇)이다. 뤼시스트라테는 여인들을 결집시켜 파업을 주도하고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해 평화조약 체결을 이끌어 내는 영민한 주인공. 그는 이렇게 외친다. "당신들 정치가들이 조금이라도 똑똑했더라면 우리가 옷감 짜듯이 정치를 했을 거고, 그랬더라면 모든 면에서 아테네에 유익했을 텐데요." 이렇게도 말한다.

"몹쓸 돌대가리들 같으니! 우린 당신들이 전쟁에서 얻는 명예는 못 차지하지만 고통은 이중으로 당하고 있어요. 첫째, 우리는 전쟁에 보내는 아들을 낳거든요."

비극은 우매한 인간이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이지만 그 통렬함을 통해 인간은 성장해 왔다는 것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왔던 이 가엾은 왕은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 외친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내 목소리는 공기를 뚫고 어디에 가서 닿은 것일까? 오 운명이여,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 아이스퀼로스 외, 이근삼 외 옮김, 『희랍극선』(삼성출판사)에서

운명은, 책임이구나……. 스무 살 무렵의 나는 생각했다.

운명에 순응하는 것 또한 운명지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지만 훌륭한 사람만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친다. 유일한 죄는 ‘자만’이다." 얼마 전 로버트 케네디 평전 『라스트 캠페인』을 읽었을 때, 나는 로버트 케네디가 아꼈다는 소포클레스의 이 말에 밑줄을 그었다.

『오이디푸스왕』이 오만에 대한 이야기라면,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생각하고 느낄 줄 아는 피조물 가운데 여자는 가장 천시받고 있습니다." 또 묻는다. "사랑을 빼앗기는 일이 여자에게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절멸’을 뜻하는 ‘쇼아’라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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