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체계를 부여하는 것 중 음식만 한 것은 없다. 식사는 하루를 떠받치는 대들보다. 식사가 없으면 마치 블랙홀처럼 시간이 자기 위로 무너져 내리고 중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1868년, 조지 풀먼이 처음으로 식당 칸을 만들었다. 그는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 이름을 따서 식당 칸에 델모니코Delmonico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든 철학자는 모든 10대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

정원과 철학은 서로 잘 어울린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총아였던 볼테르는 "우리는 반드시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17세기 영국의 작가이자 정원사였던 존 에벌린 역시 이에 동의하며 "정원의 공기와 분위기"3는 "철학적 열정"에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아야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임기응변할 수 있는 재치가 가장 훌륭한 안내자다.

여성의 삶은 가장 좋은 시절에도 힘겨웠다.

플라톤 아카데미는 더 불길한 글귀로 손님을 맞이한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말라."

에피쿠로스의 모토는라테 비오사스Lathe Biosas, 즉 ‘숨어 사는 삶’이었다. 세상에서 물러난 사람들은 늘 의심받는다.

에피쿠로스는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를 가진 철학자였다. 그는 인간의 신체에 최고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해롭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욕망한다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가 말한다.그리고 즐기라고. 그는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인 쾌락을 옹호했다. 그리고 도발적으로 덧붙였다. "만약 내게서 맛의 쾌락을 빼앗는다면, 성적 쾌락을 빼앗는다면, 듣는 쾌락을 빼앗는다면, 아름다운 형태를 보았을 때 느끼는 달콤한 감정을 빼앗는다면, 선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스 맥주 미토스Mythos를 주문하고 에피쿠로스가 말한 여러 쾌락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빵과 물을 먹고 살 때 몸이 쾌락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낀다. 내가 호화로운 삶이 주는 쾌락에 침을 뱉는 이유는 그러한 생활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에 으레 따라오는 불쾌함 때문이다."

자연이 당신을 돌봐줄 것이다. 자연은 반드시 필요한 욕망은 채우기 쉽게, 불필요한 욕망은 채우기 어렵게 만들어놓았다.

평정심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화로운 상태이거나 평화롭지 못한 상태, 둘 중 하나다.

제퍼슨은 부처의 가르침을 잘 몰랐지만 에피쿠로스와 부처의 가르침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두 사람 다 욕망을 고통의 근원으로 보았다. 두 사람 다 평정을 수행의 궁극적 목표로 보았다. 두 사람 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에피쿠로스에겐 정원이, 부처에겐 수행공동체인 승가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숫자 4를 좋아했던 것 같다. 부처에겐 사성제四聖諦가, 에피쿠로스에겐 네 가지 치료법이 있었다.

어쩌면 에피쿠로스가 부처의 가르침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에피쿠로스와 부처가 다른 길을 따라 결국 같은 목적지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톰은 에피쿠로스의 원칙을 충실히 고수하는 특급 에피쿠로스주의자로, 에피쿠로스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캘리포니아 나파에 산다. 나파에서 에피쿠로스주의자란 곧 사치스러운 요리를 마음껏 먹는다는 뜻이다.

알고 보니 내 모든 질문은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이제는 죽고 없는, 욕을 잘하고 침을 잘 뱉었던, 정원에 살며 극단적으로 단순한 삶을 설파한 그리스인이, 어떻게 오늘날의 복잡한 하이테크 세계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지?

톰은 나파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비록 사람들이 은근하게 우쭐대는 것과 아름다운 사람이 미어터지는 데에는 싫증이 났지만 말이다. 이곳은 기개랄 것이 전혀 없다.

"와인 마시기엔 너무 이른 시간일까요?" 내가 묻는다.
톰과 주문받는 여자가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우리가 돌봐줘야 할 관광객이 한 명 있네요. 나파에는 와인 마시기에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시간은 없다.

톰은 스피노자와 칸트, 그 밖의 여러 철학자를 공부했지만 그가 매력을 느낀 건 쾌락에 집중한 에피쿠로스였다. "내가 보기에 쾌락은 모든 것을 다 아울러요. 행복보다 더요." 톰이 와인을 홀짝이며 말한다.

"고통 없는 순수한 쾌락은 극히 드물어요." 톰이 말한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저한테 딱 맞는 거예요. 전 엄청 우유부단한 사람이거든요."

나 역시 선택 앞에서 당황한다. 이상하게도 나를 쩔쩔매게 하는 건 인생이 걸린 중요한 결정(어떤 커리어를 추구해야 할까?)이 아니라 사소한 것들이다. 과테말라 커피를 주문해야 하나, 수마트라 커피를 주문해야 하나? 내 우유부단함의 뿌리에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안다. 잘못된 선택을 내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최선이 아닌 그저 괜찮은 것을 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이 삶에서 더 중요한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있게 해줘요. 게다가 충분한 걸로는 부족한 사람에게는 뭐든 충분하지 않을 걸요." 톰이 대화의 방향을 다시 에피쿠로스 쪽으로 돌린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쾌락의 쳇바퀴"라고 부른다. 이 별난 인간 본성은 왜 세 번째 크렘브륄레가 첫 번째나 두 번째 크렘브륄레만큼 맛있는 법이 없는지를 설명해준다. 시운전 때는 황홀했던 새 차가 길 위에서 한 달이 지나면 지루해지는 이유도 설명해준다. 우리는 새로운 쾌락에 익숙해진다. 그러면 새로운 쾌락은 더 이상 새롭지도, 그리 즐겁지도 않은 것이 된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예를 들면 돈과 명예, 친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만 더 많으면 된다. 하지만 조금 더 갖게 되면 우리는 눈금을 재조정하고 생각한다. 그저 조금만 더 있으면 돼. 우리는 얼마큼이어야 충분한지를 모른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이 인생의 커다란 쾌락 중 하나라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축복받은 삶에 이바지하는 여러 가지 중에 우정만큼 중요하고 유익한 것은 없다."

지금의 톰과 나처럼 친구는 식사의 필수 요소라고 덧붙였다. 친구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은 "사자와 늑대처럼 게걸스레 먹는 것"과 같다.

결국 진정한 우정은 자신의 쾌락보다 친구의 쾌락을 더 우선시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정은 고통을 완화하고 쾌락을 증진한다. 우정과 관련된 고통은 우정이 주는 쾌락으로 상쇄되고도 남는다.

행복에 대해 너무 열심히 생각하면 행복은 사라진다.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톰에게 근처 카페를 추천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내가 기대하는 곳은 헌신적인 바리스타가 한 잔 한 잔 애정을 담아 커피를 내리는 그런 독특한 곳, 특별한 곳이다.
"저기 길 아래편에 스타벅스가 있어요." 톰이 말한다.
실망스럽지만, 곧 스스로에게 묻는다. "에피쿠로스라면 어떻게 했을까?" 물론 스타벅스에 갔겠지.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한다.
독특하지 않다. 애정을 담아 커피를 내리는 직원도 없다.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충분히 좋다.
다른 말로, 완벽하다.

대기실. 기다림이라는 비활동에의 참여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지어진 공간. 발뒤꿈치를 까딱까딱해본다.

리턴 저니return journey. 미국식 표현인 ‘라운드 트립round-trip’보다 이 단어가 더 좋다. 라운드 트립은 아무 데도 찍지 않고 너무 뺑 도는 것처럼 들린다.

6분 남았다. 한숨을 쉰다. 이런 짧은 시간에는 무엇을 하지?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짧지만, 눈만 깜박거리며 기다리기엔 너무 길다.

속도는 조급함을 낳는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은 삶의 속도와 반비례하여 줄어든다. 인

조급함은 미래를 향한 탐욕이다. 인내는 시간에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애슈포드는 기다림과 시간에 관해 깊이 생각한 철학자, 그리고 특히 철학자들에게 많이 닥치는 듯 보이는 슬픈 아이러니 중 하나로서, 스스로에게는 그 기다림과 시간을 거의 주지 않았던 철학자가 묻힌 곳이다.

철학은 응석을 받아주지 않는다. 철학은 이의를 제기한다. 요구한다. 가장 훌륭한 철학자는 가장 요구가 많은 철학자다. 소크라테스는 추측에, 특히 자신의 추측에 의문을 품을 것을 요구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기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한다.
시몬 베유의 당부는 더 단순하지만 결코 더 쉽진 않다. 베유는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베유는 큼직하고 밋밋한 옷을 입고 있다. 그녀가 평생 드러낸 패션에 관한 무관심을 잘 보여주는 옷차림이다. 베유는 늘 허름한 검은색 옷을 입었고 굽 없는 신발을 신었다. 한 친구는 이를 두고 "진정한 부랑자"라고 했고, 또 다른 친구는 "중세의 은자"라고 했다.

보고 싶어 했으나 보이는 것은 원치 않았다.

베유는 1909년 파리에서 지독하게 세속적이고 매우 지적인 가족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부터 자신의 책에서 위안과 영감을 찾았다. 열네 살에는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 대부분을 암기했다. 산스크리트어와 아시리아-바빌로니아 언어로 쓰인 책도 읽었다.(베유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쉬운 언어라니!")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한 번에 며칠씩 보낼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받았지만 베유가 지식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학교 공부의 유일하게 진지한 목적은 관심을 기울이는 법을 훈련하는 것이다." 베유는 말했다. 관심이라는 짧은 단어가 베유를 사로잡았다. 관심은 제멋대로 퍼져 나간 베유의 철학과 삶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었다.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은 꼿꼿이 걷는 능력이나 피클병을 여는 능력과 더불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능력 중 하나다.

모든 눈부신 과학적 발견과 모든 뛰어난 예술작품, 모든 친절한 태도의 근원에는 순수하고 사심 없는 관심의 순간이 있다.

관심은 중요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더, 관심은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지금 당장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3라고 말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것만이 우리 앞에 존재한다.

관심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느냐, 더 중요하게는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곧 그 사람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은 가장 열중한 순간들의 총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깊이 몰입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에는 몰입할 자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음악가는 없고 오로지 음악만이 존재한다. 무용수는 없고, 오로지 무용만 존재한다. 보트 타기에 열심인 한 사람은 몰입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이 게임에서 중요치 않은 것은 전부 제쳐놓고, 오로지 바다 위 보트의 움직임, 보트 주변 바다의 움직임만이 보입니다."6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 보트로 대서양을 항해하거나 에베레스트산을 오를 필요는 없다. 그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뿐이다.

관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다. "불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베유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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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5-31 0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드니까,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누구 차럼 **하는 법이 다가오지 않더라고요. **처럼 **할 수 있다면, 삶의 매듭이 있을까 생각도 하다가.. 좋은 책인데, 한국어만 알아서. 다 읽긴 했지만, 헷갈리는 부분이 좀 있어요.

라로 2022-05-31 15:03   좋아요 0 | URL
어느 부분이 헷갈리셨는지 궁금해요? 저는 이제 시몬 베유편을 읽고 있어요. 5월 안으로 다 읽을까? 아니면 6월까지 걸쳐서 읽을까? 그런 고민하고 있어요. 삶의 매듭은 어떻게 삶을 바라보는지에 따라서 다 다를 것 같아요. 메타포님 닉네임 멋지게 지셨다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