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단편소설집 같은,

1970년 2월의 어느 아침이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화가 테오도로스 스테이모스였는데 마크 로스코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마크 로스코 편의 시작입니다. 꼭 카버나 챈들러 같지 않나요? 이 회고록은 그 다양한 캐릭터들에 힘입어 마치 단편 소설집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천재 예술가들의 에피소드를 엿본다는 가십스러운 관심보다는 '인간들'의 삶을 비추는 에세이집. 세심한 관찰력과 효과적인 문장을 조화시키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큐레이터들의 여왕답게 캐서린 쿠는 자신이 접했던 예술가들의 삶을 담담하게 옮겨 놓았습니다. 현란한 문장 대신에 심도 있는 관찰을 그대로 옮겨내는 걸 장기로 삼는거죠. 네, 말하자면 이건 에세이, 예술-에세이라고 보는 쪽이 좋습니다. 이론과 사조에 대한 논박은 서문 이후로는 만나기 힘드실 거예요.
 

지난 번에 코언 형제의 인터뷰집에서 말씀드린 바 있었죠. 서문만 봐도 괜찮은 책일거라는 느낌이 오는 것 말입니다. 이번에 소개드릴 <전설의 큐레이터, 예술가를 말하다>도 그런 경우입니다. 이 책은 서문의 질량부터 남다른데요. 두 단계로 나뉘어진 서문이 무려 백 페이지에 가깝습니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지휘관, 그야말로 전설적인 큐레이터의 이 회고록 서문은 큐레이터라는 직업 이야기, 그리고 그 직업을 가진 자신의 인생 이야기, 그리고 근대에서 현대로 옮겨가는 시기의 미술계를 요약한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회한이나 감상 같은 건 거의 없습니다. 그녀 자신의 인생조차 '서문'에 기술했을 뿐인, 목적의식이 명확한 책의 시작은 본문을 읽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훌륭합니다. 그야말로 쓸모있는 서문이죠. '개념있는' 책은 자신의 개념을 직접 서술하지 않아도 그 태도에서 느낄 수 있는 법입니다.

이어 등장하는 본문, 16인의 예술 종사자들의 면모는 가지각색입니다. (아, 말씀드리자면 다들 예술가인 건 아녜요. 비평가도 있고, '반 고흐의 조카'도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인물을 다룬 단편들은 서로 다른 분위기를 풍기죠.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아메리카라는 파도를 타넘기를 즐기는 천재의 여유를 보이며, 저 유명한 에드워드 호퍼는 역시 충만한 자신감을 뽐내지만 그 모양새가 종교적 후광처럼 범접할 수 없는 형태를 띕니다. 너무 조용하고 착실해서 엔지니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반 고흐의 조카'는 삼촌에 대한 열정과 민족에 대한 사랑만큼은 더없이 뜨거운 남자입니다. 예술가적 열성과 기묘한 정적이 공존하는 괴공간(?) 프로빈스타운의 터줏대감 한스 호프만도 있고, '그다지 예술가답지 않게' 충실히 또 착실히 작품들을 만들어간 생활 예술인 프란츠 클라인도 있습니다. 그 모두는 다른 인간이며 다른 캐릭터이고 다른 이야기지요. (캐서린 쿠는 이미 서문에서 천재 예술가들의 어떤 전형을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작업 같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유명 예술가들의 삶을 곁에서 바라보고 기술함으로써 불필요한 아우라를 제거한 책은 보기 힘들 뿐더러, 이렇게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한 경우는 더욱 보기 힘듭니다. 담담한 문장이 안겨주는 차분함도 매력적입니다. 책 뒷면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인터뷰어&에세이스트인 스터즈 터클의 추천사가 있습니다. 논픽션/인터뷰집에 대해 스터즈 터클이 눈여겨 본 책은 거진 믿으셔도 됩니다. 

(...여담인데요. 스터즈 터클의 책 좀 더 나와주면 안될까요... T_T) 

  

 

드디어 등장한 진정한 오디오 입문서! 

 

-이 책도 소개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드디어 국내의 오디오 덕후 팬들을 위한 멋진 입문서가 나왔거든요. ^^ 우선 각종 장비의 상품별 소개가 깔끔하게 이루어져 있어 실질적인 오디오 시스템 구성에 도움이 됩니다. 오디오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도 기초적인 부분을 그림까지 곁들여 소개한 뒤에 부담없이 넘겨 주고요. 마치 이야기처럼 써져 있는데다가 일러스트도 공들인 흔적이 보여서 읽기가 상당히 편합니다. 무엇보다 50만원으로 스피커 사러 가기 같은 실전 트레이닝이 많은 점이 도움이 될 걸로 보입니다. 

기본적인 이론과 오디오 시스템에 대한 설명, 실제로 각 분야의 제품을 구입할 때의 '이상과 현실', 기기간의 매치업과 공간의 중요성 등 각 파트의 차례도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부담없이 술술 잘 읽힌다는 점을 감안하면, 책 내용은 가능한 만큼의 정보량을 꽉꽉 눌러 담아 놓은 알짜 느낌이 딱 옵니다. 게다가 부록으로 들어있는 CD도 오디오의 채널 테스트, 밸런스 테스트 등 각종 기초 테스트를 포함하는 알짜배기입니다. 편집자 추천은 이런 책에는 그냥 걸어주죠.

제품 소개가 꽤 있는 책이니 시간이 지나면 개정판도 내 주겠지요? (물론 어느 이상은 팔려야겠지만요;;) 

이 책을 피하셔야 할 분들은 딱 두 부류가 있겠습니다. 

1. 오디오 상급 경력자. (다 아는 얘기일 겁니다) 혹은 상급이라고 자신만만해하는 중급자. 

2. '충동은 만악의 근원'이라는 책 초반의 문구에 반감을 가진 자. 

 그 외에는 즐기셔도 무방합니다. 저처럼 손가락 빨면서 저 기기들을 상상하는 것도 물론 재밌겠지만(T_T) 원하신다면 저 세계로 풍덩... 

 

 

P.S. <굿모닝 오디오>의 뒷날개에는 이 책부터 시작되는 '내 인생 두 번째 취미' 시리즈 소개글이 있습니다. 읽어보시고 자기자신의 삶을 한번쯤 되돌아볼 기회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쫓겨 뒤돌아 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당신에게 '왜 사냐'는 질문에 '웃지요!' 하던 시대는 끝났다. (중략) 첫 번째 취미를 잊은 사람들에게 두 번째 취미는 평생을 함께할 소중한 동반자로 남을 것이다. 

자, 이제 지르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리하여' 행복하시길. ^^ 다음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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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가 바깥에 서 있는 동안 우리는 잘 차려진 식탁에 앉아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읽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손 안에서 폭발해야 한다. -클라크 피녹    

 

 

창대한 결말이 아니라 작은 시작. 김규항의 <예수전

이 책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를 놓고 인문MD님과 출판사 관계자분과 3자 회담(-_-;)이 있었습니다. 김규항의 저작이니 인문사회 쪽의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점에는 모두 공감했죠.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인문사회 쪽 독자들이 아닌 종교 분야의 독자들에게 더 열심히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는, 제가 했습니다만, 도박같아 보였습니다. 확신하지 못했어요. 그건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류 기독교 책을 읽는 독자들을 생각해 볼 때, 김규항의 <예수전>에는 일단 지엽적인 문제들이 있으며('하느님'이라는 용어 선택, 인민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예수님...), 급작스럽게 영향력이 축소된 해방신학 계열의 메시지가 과연 얼마나 먹힐지도 알 수 없으니까요.

또한 이 책은 반대의 측면에서도 위험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이미 많이 듣던 얘기가 아닌가?'라고 되물을 분들이죠. 이 책에서 새롭고 신선한 해방신학의 돌파구를 찾으시려던 분들은 다소 낙담하실 확률이 큽니다. 로쟈 님께서 '소프트'할 것이라고 예상하신 부분은 (아마도 기대하신 부분에서) 사실로 보입니다. <예수전>에서는 치열한 지적 공방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을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혁명가 예수의 흔적을 북돋우는 정도에서 선을 긋습니다. 역사적 예수, 핍박받는 민중의 지도자이며 반권력을 지향하는 혁명가의 초상은 이 쪽의 도서를 탐독하시던 분들께는 이미 익숙한 모습. 심지어 현재의 '적들'에 대한 신랄한 공격도 그 강도가 생각보다 낮습니다. '김규항이 각잡고 썼다'고 기대하신 분들은 정말 소프트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예수전>은 바로 이 '소프트함' 때문에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는 단어를 굳이 쓴 이유는, 근래 출간된 민중/해방신학 계열 책들이 그다지 친절하지 못해서지요. 예수도 대중들에게는 비유로서 쉽게 설명했는데, 진보적인 신학계에서 쉬운 책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역설적이고 또 슬픈 일인지.(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분석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는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예수전>은 아직 이 계열의 목소리를 접하지 못한 분들께 권할 수 있는 쉬운 난이도와 친절한 풀어쓰기를 자랑합니다. 어려운 용어나 인문학적 개념은 등장하지 않고, 난해한 교리적 사고도 없습니다. 뉴스 정도의 시사상식만 가지고도 충분히 접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론은 지금의 편향된 복음주의가 대세를 이루는 종교계에 가장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예수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설파했다는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라'는 그의 말(마태 5:39)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을 강요하는 데 활용되어 온 가장 유명한 경구다. 그러나 오늘 좀더 섬세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의 이 경구가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람은 대개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은 '바른손'이며 고대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 건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뺨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 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제대로 때려라' 하고 조용히 외치라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단호하게 저항하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것이다. 

p.187-188
 


물론 <예수전>에 특징이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게 눈에 띕니다. 지식인이자 체제 개량주의자였던 바리새인들과 예수 사이의 논쟁이 자주 부각되죠. 머리에 든 것 많고, 정의를 이야기하기 좋아하지만 결국 어느 이상 자신을 던지지 않는 입바른 존재들과의 논쟁. 여기서 비로소 B급 좌파의 면모가 드러납니다. 진보세력 내에도 곧잘 불편을 유발하는 김규항 씨의 비타협주의 글쓰기죠. <예수전>은 '보다 인간적인 자본주의' 같은 개념이야말로 체제에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봉사하는 눈속임이라고 단언해 버립니다. "일체의 억압이 없는 혁명의 시공간이 천국이라 불리울 수 있다면 당연히 예수는 거기로 인도해야 할 목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거기에 어떤 '로마 식민지 개량'의 여부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질문은 일단 유효합니다.

결국 <예수전>의 예수 그리스도는 김규항 씨가 말하는 비타협주의 노선의 영웅입니다. 예수는 어떤 권력(그것이 진보적이어 보인다고 하더라도)에도 힘을 더하지 않습니다. 그 권력이 상존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회의 체계와 모종의 합의를 했기 때문이지요. 예수 자신은 죽음을 예견하면서까지도 비타협주의를 고수합니다. 심지어 그의 열두 제자들이 그의 비현실적인 면모에 실망하는 기색을 보일 때도 어떠한 현실적 권력을 구축하는 노선을 거부합니다. 

기꺼이 투신하는 혁명(유혈투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양심에 가책이 없을 정도의 적당한 움직임과 입바른 훈수를 즐기는 다수의 '좌파 세력'들이 '뻔한 나쁜 놈들'보다 더 나쁘다는 주제는 저자가 예수에게서 발견한 가장 반가운 점이었을 겁니다.  네. 이 책은 '김규항의 예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인지 김규항 씨는 이 책이 자신의 <예수전>이며, 책을 읽은 모두가 각자의 <예수전>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썼습니다. 저 역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무자비한 각주도 미주도 참고도서 목록도 없는, 증명을 위한 학술서가 아닌 이 '이야기' 책이 모두의 마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내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디까지가 옳고 누가 정답인가는 일단 시작하고 볼 문제입니다. 리스도교인들이 좀 더 폼나게 시끄러워졌으면, 그래서 건강한 논쟁들이 더 많이 오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가 아직 낯설은 분들께는 놀라움을, 그에 익숙하신 분들께는 토론 혹은 반격의 기회를 기꺼이 열어놓은 이 텍스트를, <예수전>을 기꺼이 '더욱 열심히 팔아보'기로 했습니다. 복음서 속의 예수조차 방법론을 발견하지 못한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자본주의 사회와 그리스도교는 과연 어떻게 양립해야 할 것인지, 사회적 빈곤과 개인의 영성 간에 균형은 어떻게 맞출 것인지, 이 책은 해답을 제시한다기보다 더 많은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께서 읽고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떠들고 행동해 주시기를! 

  

 

-함께 읽으면 좋을 책 

 <예수의 네 가지 얼굴> 

-따끈따끈한 새 책입니다. 저널리스트 특유의 분석적인 태도로 4대 복음서들을 해설해주는 책이죠. 특별히 정치적인 편향은 없으나 복음서를 실증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우파 복음주의 계열(특히 성경 무오류설)에서 보자면 불편할 수도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비록 4대 복음의 내용을 해설하고 있긴 하지만, 저자 자신이 밝혔듯 이 책은 성경에 대한 본격 학술서는 아니고, 저자 역시 성경학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아직 그리스도교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접하기에 좋아 보입니다. 특히 <예수전>과 함께 읽기에는 좋습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예수전>이 필요하니까요. 말하자면 이 책은 게리 윌스 버전의 네 가지 예수전입니다.

쉬운 교양서 수준이라 복음서에 대한 배경지식을 얻기에 좋습니다. '순진하지는 않지만 쉬운' 책들은 어째서인지 심도있는 책들보다 만나기가 훨씬 어려운 것 같아요. 솔직히 C.S.루이스정도만 해도 쉽지는 않잖아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언젠가 이 책을 '기독교 버전 <탐욕의 시대>'라고 소개드린 바 있지요. <예수전>의 시선에서 보자면 이 책이야말로 개량주의의 온상이며 숨겨진 악의 축입니다 ㅎㅎ. 

중도 복음주의 노선인 로날드 사이더의 이 책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나뉘어져 있는데요. 전반부는 '물질에의 끊임없는 욕망'과 그리스도교의 신념이 왜 양립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물질의 소유는 어디까지가 정당한가를 다룹니다(이 글의 맨 위에 있는 클라크 피녹의 문구는 이 책에서 재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종교 서적으로는 다소 놀랍게도 신자유주의 체제하의 세계가 얼마나 불합리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분석합니다.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우호적 시선 등, 분석의 정확도는 전문서에 비하면 다소 떨어질 수 있겠으나 전체적으로 아주 쉽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결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예수전>과 좋은 비교/대조 지점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이 책의 추천사 중 하나를 쓴 짐 월리스의 책들도 더불어 접해보시면 좋겠네요. 

 

 <아담, 이브, 뱀> 

-성경 역사학자들의 저서는 늘 논쟁의 여지를 안고 있습니다. 이 책 역시 예외는 아니구요. 로마의 종교가 되면서 막강한 혜택을 입은 그리스도교가 성, 자유, 원죄라는 개념의 조절을 통해 체제 순응적 종교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렸습니다. 

"에덴 동산 이야기에서 과연 문제는 자유의지였는가 아니면 성적 요소(특히 '열등한' 여성의 유혹)가 개입되어 있었는가, 그렇다면 방종과 자유의지는 어떤 관계인가?" 같은 논쟁점은 성경 속에서 수도 없이 나타나고, 각자 차이가 뚜렷했던 초기 기독교의 계파들은 무지개처럼 다양한 의견들을 쏟아냅니다. 

특히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주류 그리스도교와 영지주의자들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설전은 눈여겨볼만 합니다. 자유와 평등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구분짓는 중요한 지점이니까요. 이는 곧 사회에서 종교가 어떤 위치를 점할것인가라는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예수전>을 더욱 여러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아, 본격 종교 역사서 중에서는 난이도도 비교적 쉬운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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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급 좌파, 김규항의 ‘불온한 예수’를 소개합니다
    from 고장난 자본주의 대안을 말하다 2009-07-03 17:03 
    김규항 씨는 7월 26일(일) 오전 11:50 ~ 오후 1:10에 “이명박 장로 치하, 예수의 삶을 통해 진보의 희망을 찾다”라는 주제로 강연하십니다.(맑시즘 홈페이지 주요 연사 소개 가기) 맑시즘2009 연사 리스트를 보고 만세를 불렀던 건, 제가 김규항 씨의 강연을 몹시도 듣고 싶었기 때문이죠. 대학 시절, 학생회가 누구 강연을 듣고 싶냐고 설문조사를 할 때면 항상 ‘김규항’ 이름 석 자를 적어넣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치니 2009-07-30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예수전을 읽고 뒤늦게 이 추천글을 읽었는데, 오 ~ 역시 ~ 입니다. :)

외국소설/예술MD 2009-07-30 17:29   좋아요 0 | URL
뭘요. 치니님이야말로 고물상옆보물창고의 보물이십니다. (어머나;)
 

   

조엘 'the 암울한 농담' 코언, 에단 '이 죽일 놈의 자신감' 코언 형제의 다정한 한때.



이 인터뷰집이 신뢰할만 하다는 사실은 서문에서 바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표를 사들고 조엘과 이선만의 독특한 영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또는 적어도 전반부의 영화들, 그러니까 분수령이 되는 <파고(1996)까지는 그렇다. 최근 그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들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이 서문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전까지의 영화들을 대상으로 쓰여졌음을 감안하면, 저만 고개를 끄덕인 건 아니겠죠.; 물론 이 특이한 형제 감독(워쇼스키들은 이제 남매가 된거 맞나요? 아시는 분?)의 작품들은 각자 개성이 강해서 워낙 선호도가 갈리긴 하지만요. 그래도 '깊이를 강요'해 보면, 저는 파고와 바톤 핑크와 밀러스 크로싱과 애리조나 유괴사건과 허드서커 대리인(!)과 블러드 심플(!!)이 1996~2006 사이에 만들어진 그들의 영화보다 더 좋습니다. 

요점은 참 정직한 서문, 자신의 취향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신뢰할만한 편집자가 책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죠 네. 

사실 이런 인터뷰집을 읽는다는 건, 자신의 예술가적 자의식을 봄볕 쬐는 개만큼만 깨워놓은 채 살아가는 대다수의 어중간한 '예술 양민'들에게는 기꺼운 고통 같은 겁니다. 이들은 천재니까요. 다른 종류의 인간이니까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Q. ...아주 흥미로운 방식으로 폭력을 묘사하시는데요. <블러드 심플>에선 남자의 손을 칼날이 관통하고, <파고>에선 악명 높은 목재 분쇄기 장면이 나옵니다. 의도적으로 관객들의 속을 뒤집어놓으시려는 건가요? (답변에 <파고> 스포일러 있음)

A. 좋은 질문이에요. 그럴 리가요. 일부러...그런 건 아니에요. <파고>의 끝 부분에서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이제 관객들은 피터 스토메어가 스티브 부세미를 분쇄기에 밀어넣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건 뭐랄까, 확실히 딱 적절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그게 왜 적절하냐고 물으신다면 전 할 말이 없어요. 모르겠어요. 괜찮고, 적절해 보여요. 그렇지 않나요? 다른 어떤 것도 그 장면만큼 좋진 않을 것 같아요. 그렇게 그로테스크해야만 하죠. 하지만 왜냐고 묻는다면 전 정말 대답을 할 수 없어요.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하는 거예요. 뭔가 그로테스크한 걸 아주 무심하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건 정말 끌어당기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 영화나 소설에서 제대로 작동을 하죠. 

보시다시피 저들은 그냥 알고 있는 겁니다. 행운이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 있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 적절함을, 운명을 아군으로 끌어당겨 버리는 지점을 본능적으로 찾아내는 것이 천재가 아니면 뭐겠어요. 때문에 예술가의 인터뷰집이나 회고록을 읽는 사람들은 해당 인물의 열렬한 팬이거나, 아니면 피학 성향을 갖고 있는 예술가 지망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목을 죄고 흔드는 거죠. 너도 할 수 있잖아, 그걸 알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렸으니 더 강력해져서 기어나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형제는 인터뷰를 통해 뭘 배우기에는 가장 어려운 부류로 보입니다. 같은 시리즈로 나온 짐 자무시, 팀 버튼, 우디 앨런도 이 정도로 '쿨한 천재'들은 아니었어요(게다가 이 형제는 실제로도 매우 냉소적으로 인터뷰를 해서 인터뷰어들을 당황시키기로 유명하죠). 만약 코언 형제의 인터뷰에서 코언 형제의 영화같은 희극성을 다소나마 기대한다면, 그걸 즐기기에는 좋습니다. 사실 굳이 뭘 배워야만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흠, 추천 타입을 하나 더할께요. 아메리칸 스타일의 유머를 즐기는 논픽션 애호가 분들도 보시면 재밌을 겁니다. 국내에 몇 분 계실지는 모르겠지만요.

Q. (에단에게) 프린스턴에서 철학을 전공하셨는데요. 당신의 영화 철학은 무엇인가요? 

에단: 휴...... 그런 거 없어요. 말문이 딱 막히네요. 내가 아는 한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이 질문은 빈칸으로 남겨두죠. 

Q. 이 영화(빅 레보스키)의 제작 의도엔 니힐리즘nihimism이 무엇인지 미국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도 포함되나요? 

조엘: (매우 냉소적으로) 미국에겐 모든 게 수업lesson 이죠.


그렇습니다. 그런거죠. 이 죽일 놈의 자신감 + 블랙 유머. (그런데.. 자꾸 코엔 형제라고 쓰게 되는 건 저만 그런건 아니죠? ;;) 그러고보니 지난번 소개드린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에 이어 어딘가 울적한 이야기네요. 평범한 인생이라는거 말입니다.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수는 없네요. 뭔가에 도전하고픈 분들을 위해 세 종류의 테크트리를 준비했습니다. 이들 중 하나를 밟아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습니다)  

 

도전하는 자를 위한 무림 비급 3종 세트

         



<일상 예술화 전략>- 인문MD님께서 '이거 참 괜찮은 책인데 절판이라 어쩌죠'라고 사실은 자랑, 을 했던 책이 갑자기 재간되었습니다(ㅋㅋㅋ). 착실한 스케쥴과 계획을 신뢰하시는 분들,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북돋아보고픈 분들께 추천해 드립니다. 무려 1년짜리 스케쥴을 소개하는 책이거든요... 잠깐만요. 벌써 넘어가시면 안돼요. 원고지에 엽편 분량의 자서전을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달걀을 껍질째 넣어 오믈렛을 만든 뒤 실패를 '구경'하기 등등의 접근방식이 돋보입니다. 심리적 장애물을 구체적인 상황에 투사시켜 돌파하는 방식이죠. 자기 내부의 벽은 추상적이라 정면으로 마주치기가 어려우므로, 그것을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대입시켜 마주치게끔 하는 방식은 마치 심리 테라피 같습니다. 저자의 심리 치료사 약력에 눈이 갈 수밖에 없네요. 확실히 현실성 있는 접근이고, 구체적인 접근법을 제시하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 창의력을 고취시키는 여러 책들이 너무 시크릿스럽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주목하셔도 좋아요. 

읽고 나면(실행은 아직 해보지 못했습니다;) 어디 연단에 나가서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엠디입니다. 저는 글을 쓴 지 삼일째 되었습니다." 라고 시작되는 고해를 한 뒤 응원의 박수를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심리 테라피 관련 책이라서 그럴 거예요. 죄송합니다. 사실은 제가 매튜 스커더 팬이라서요.

<아티스트 웨이>- 좀 더 심플한 행동지침, 그리고 좀 더 직관적인 해결책을 선호하는 분은 이 책을 선택하셔도 좋겠습니다. 물론 이 책 역시 스케쥴이 있고 다양한 과제가 주어지지만, 하나의 중심과제가 딱 정해져 있습니다. 모닝 페이지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3페이지 분량을 되는대로 써 갈기는 것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나머지는 모닝 페이지를 보다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한 옵션들이죠. 논리적인 자아가 잠에서 깨서 정신차리기 전에 어서 마음에 있는 얘기를 쏟아봐요! 책 내내 평범한 사람들이 억압시켜 놓은 창의력의 하수구를 뚫어내야만 한다는 저자의 강렬한 외침이 울려 퍼집니다.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사고 능력을 유연하게 해방시키면 나머지는 뒤따라 올 것이라는 이야기죠. 우주가 당신을 도울 거라는 어딘가 친숙한 얘기도 있지만, 그 도움은 자기자신을 믿고 창의력을 한껏 개방시켜가는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에 한합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거죠 네.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네 그렇죠... 다카하시 겐이치로... 직접 쓴 작가 약력에서 유년기를 '따분했다' 단 한 줄로 요약한 그 남자입니다. 거의 선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글쓰기 책이죠(네 오바입니다). 예술적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 방법적 문제가 아니라 근성과 혼과 피와 땀의 문제라고 생각되는 분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저자가 선별한 각종 명문들이 다른 글쓰기 책에 비해 어딘가 안드로메다의 향취를 느끼게 해서 더욱 좋습니다. 특히 일본 AV계를 다룬 논픽션은 정말 멋졌어요(번역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이 책이 가르쳐주는 방법이란 많이 보고, 되는 대로 느끼고, 겁을 먹든 말든 일단 쓴다. 입니다. 어쩐지 코언 형제 냄새가 나네요. 어, 결론이 이렇게 나면 안되는데. -_-;; 다시, 어쨌든, 재밌는 책입니다. 이 책의 열정은 선택받은 용자들의 것이겠지만, 재미만큼은 모두의 것입니다. 고고씽.




광고말씀. 영원히 짠물 할인이 지속될 것 같았던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가 무려 25% 할인에 들어갔습니다. 단 1회분 물량만 이렇게 받았으니 관심있는 분은 구입하셔도 좋겠네요. 네? 다음 개정판을 기다린다고요? 자고로 학술서와 전자제품은 신제품 기다리면 영원히 못 산다는 게 진리입니다. 


 
 

그리고 다시 평화로운 새 책 이야기 

              

단연 '화제의' 책이랄까요. <트와일라잇 - 화보와 비하인드 스토리> 입니다. 제목이 모든 걸 담고 있네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 메이킹 북입니다. 팬덤에게 주어진 소장 목록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죠. 관건은 정말로 '화보'에 가깝냐인데, 여타 메이킹 북에 비해 사진의 비율이 확실히 높은 편입니다. 배우들의 후일담이나 스탭들이 고생하는 장면들도 담겨 있어서 영화의 서플먼트로 보기에는 재미납니다. 고딕 분위기의 원서 텍스트 느낌을 따라가려다 좀 난삽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별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지금 에드워드가 갈구하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는데 폰트 따지고 있나요? 고백하세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애시당초 이 책에 관심이 없었던 겁니다. ㅎㅎ 

<일러스트 연습장 - 동물 그리기>. 그림에는 절망적일 정도로 소질이 없는 제가 어떻게든 따라그릴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_-;; 전작인 <연필 하나로~ 연습장> 시리즈가 쉬운 난이도로 인기가 좋았는데 이번에도 같은 노선이네요. 책 따라 선 좀 긋고 점 좀 찍으면 어느새 '동물'이 그려져 있어서 좀 놀랍습니다. -_-;;; 선 하나하나를 가이드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응용력 측면에서는 약간 부족할 수 있겠지만, 특히 초심자 분들이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교재로는 안성맞춤이네요. 근데 흰수염고래 너무 예뻐요. +_+ 

자매품으로는 <인물 그리기>도 같이 나왔습니다. 세계인들의 인종적 특성과 각종 전통 복장을 쉽게 따라그릴 수 있어요. 동물편보다는 난이도가 높지만, 그래도 '여전히' 쉽게 그려지는 편입니다. 그리고 있노라면 감성이 다듬어지는 소리가 들려와요...사각사각. 연필은 소중합니다. 

<시나리오 시퀀스로 풀어라>는 약간 난이도가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영화의 시나리오를 시퀀스 형식에서 분석하고 있거든요. 때문에 이 책에 수록된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 그리고 시퀀스라는 개념을 처음 보시는 분들은 금방 감 잡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실 시퀀스는 시나리오 이후의 작업으로 볼 수 있는데요, 역으로 시퀀스로 토대를 잡은 뒤에 시나리오를 만들어간다는 내용은 확실히 좀 특이합니다. 단순히 기승전결의 구도만으로는 영화의 호흡에 맞출 수 없으니 시나리오 작업부터 각 시퀀스별 강약조절을 해 나가면 훨씬 좋다는 거죠.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의 흘러간 걸작들을 통해 잘 쓰여진 시나리오가 (의도했건 아니건간에) 시퀀스별 완급조절을 잘 해냈다는 걸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이주헌의 아트 카페>. '고급 킬링 타임' 책. 아무리 에세이라도 분석이 깊어지면 무게가 생기니 부담이 생기고, 감상이 깊어져도 무게에 따른 부담이 생기죠. 때문에 이 책은 '카페'에서 읽기 좋은 무게로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돈 주고 사는 책이면 든든한 깊이가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일단 미리보기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부드럽게 쓰여진 예술 에세이(혹은 그냥 에세이라도)를 찾는 분이시면 이 책 괜찮습니다. 이주헌 씨의 나긋나긋한 친절함은 여전히 인상깊으니까요. 진중권이 용장이면 이주헌은 덕장입니다. 음..;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네요.; 동서양과 고대 현대를 죄다 아우르는 종합 미술담이니 어떤 응집된 주제는 없습니다. 이 점 참고하시구요. 

 

마지막으로,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 레저 때문에 난생 처음 촬영 중에 대사를 까먹고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고백했던 '간지할아버지' 마이클 케인의 연기 지도서입니다. 스타니슬랍스키 풍의 교재 느낌 가득한 책이 아니라 '고교 중퇴자'가 보여줄 수 있는 리얼 실전 가이드북이죠. 소위 먹물 느낌이 없이 교훈이 명확하고 사고가 깔끔합니다.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마음가짐은 이렇게. 추상적인 지시가 거의 없고 그 자리에 상황별 예시가 들어가 있습니다. 노동자가 쓰는 책이란 이런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감동의 물결에 빠졌더랬어요. 멋진 분입니다 정말. 

그런데 가장 인상깊었던 문구는 다름아닌 (아마 편집자가 썼을) 존 포드의 인물 소개.  '<플레이보이>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영화감독을 묻는 질문에 오손 웰스가 "옛날의 거장들(...) 존 포드, 존 포드, 그리고 존 포드."라고 말한 바 있다.' 아아... 존 포드는 진리입니다.

 표지 사진 참 멋지죠 근데.

 

 

p.s: 노동자 하니까 생각났는데, 사실은 노동자들만의 문제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68혁명을 다룬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인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신좌파의 상상력>이 재간되었습니다. 표지는 보다 깔끔해졌네요. 대학 시절 선배가 던져 준 이 책을 읽으면서(공짜 책이라 더 좋았던, 책이라면 와구와구 집어삼키던 시절) 많은 생각을 했더랬죠. 제게는 대학시절의 비밀을 간직한 '로즈버드'인데요. 내용으로도 어디 꿀릴 게 없으니 여기 이렇게 재간을 반기는 바입니다. 환영합니다. (이렇게 인문MD님께 진 빚을 갚고..)

 

봄입니다. 저는 춘곤증으로 고전중입니다. 노곤한 몸보다 더 큰 문제는 공중을 거니는 마음이겠죠. 때로 미몽에 빠지더라도 자신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자기자신을 끝간데 없이 밀어붙이는 자기자신을 잠시 잠재워도 괜찮지 않을까요. 봄이니까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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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방글 2009-04-14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 명이 성전환해서 워쇼스키 남매가 되었다는게 김트루입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4-15 14:09   좋아요 0 | URL
아 그게 아직은 안했다는 얘기도 있고, 그냥 남자로 살기로 했다는 얘기도 들려오고 해서 말이죠..

Jaybing 2009-04-16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고와 바톤 핑크와 밀러스 크로싱과 애리조나 유괴사건과 허드서커 대리인과 블러드 심플이 제게도 코언 형제의 베스트입니다. 이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넣어줘야겠지만요. 이들의 인터뷰는 읽어본적이 없어서 평소엔 어떤지 몰랐는데 쿨한 애들이었군요. 아카데미 시상식때 '땡큐'라던 에단을 보고 짐작은 했습니다만ㅎㅎ

외국소설/예술MD 2009-04-16 16:35   좋아요 0 | URL
하하 동지가 있어서 반갑습니다. ^^; 코언 형제의 까칠한 인터뷰는 일전에 모 영화평론가께서 말씀하신 걸 들은 적이 있어요. 인터뷰를 한 번 했었는데 지금까지 한 인터뷰 중에서 가장 힘들고 괴로웠다는;;

경제경영MD 2009-04-1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계속 파고 또 파세요 엠디님아~

외국소설/예술MD 2009-04-16 16:35   좋아요 0 | URL
네 어서 신간브리핑을 쓰세요..

비로그인 2009-04-19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어제서야 손에 받아들고 ^^
그 음악을 들으며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감독들인가' 생각하던 찰나 MD님의 글을 읽고 4권의 책을 질렀습니다. 센스쟁이 MD님, 앞으로 소개될 책도 기대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4-20 16:24   좋아요 0 | URL
사실 형제의 초중기 작품만 좋다고 쓰고 제일 마음에 걸린 영화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였죠 ㅎㅎ. 하여튼 그 허허실실 센스는 정말 뛰어나서 '대단히 까칠하다'고 하더라도 미워할 수가 없나봐요.

그나저나 저도 센스쟁이라는 말 잘 쓰는데요.. 이거 대단히 반갑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파란 2009-04-24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장바구니는 한달에 두번만 만나자라고 다짐다짐 하고 어느새 장바구니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거야 하는 설레임으로 다가옵니다 감사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4-24 12:03   좋아요 0 | URL
리플 하나하나에 그저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이런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아마 리플 달아주시는 분들도 모르실 거예요. T_T 부디 마음에 드는 책 만나시길 바랍니다 ^^

일년열두달 2009-05-1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스르 웨이 참 좋은 책이죠!!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그나저나 MD님 리뷰들을 방금 끝까지 다 봤는데 예술에 대한 소양도 깊으시고 글도 재밌게 쓰셔서 안그래도 쌓인 보관함에 책이 또 한가득 들어가 버렸네요 ㅋㅋㅋㅠㅠ ㅋ 앗 글을 쓰고나니 윗 댓글 님과 비슷한 발언이군요..ㅋㅋ;

외국소설/예술MD 2009-05-15 14:07   좋아요 0 | URL
아티스트 웨이가 참, 책소개만 보면 되게 뜬구름 잡는 듯한 느낌이 있는데 막상 읽어보면 설득력 있죠. 일상 예술화 전략도 비슷한 측면에서 좋았습니다. 구체적이고 짜임새있어서요.

써놓은 것들을 좋아해주신다는 것만으로 그저 더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 아, 많이 질러주세요. ㅎㅎ
 

 내 너희에게 장미를 주겠으나, 빵은 알아서들 구하거라 

템포러리는 고전적인 취향을 비웃거나 한 수 아래로 취급하지만, 고전적인 취향은 컨템포러리를 존경하거나 적어도 두려워한다는 얘기를 수긍하시나요. 다짜고짜 예술에 계급이 존재한다고 고발하면서 시작하는 이 당돌한 책은 자꾸 마음을 쓰리게 합니다. 예술의 감성적 측면 같은 건 애시당초 없습니다. 이 책은 예술의 '경제론'입니다. 

네덜란드 정부가 칸딘스키의 그림 한 점을 샀을 돈이면 자국의 모든 화가 지망생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할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술가에게 자유를! 자본에서의 탈출을!? 그러나 예술가 지망생 여러분, 이 책은 여러분을 찬양고무하기 위해 태어난 책이 아닙니다. 거의, 그 반대입니다.

미국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예술가보다 소득수준이 낮은 직업군은 성직자 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우리는 예술이 종교와 손을 맞잡고 걸어감을 알 수 있다. -p.137 (이 서재의 머릿말로 쓸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중입니다)

예술의 경제학은 '일반 사회의 경제학' 못지 않게 치열하며, 어쩌면 훨씬 잔인합니다. 프로 스포츠보다 냉혹한 승자 독식 시장이고, 정부의 지원 시스템을 파악하기 위해 자기 스타일을 체크할 줄도 알아야 하며, 각국의 기성 예술가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어지간한 회사 면접은 찜쪄먹을 정도로 자기PR을 해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스타일보다는 전략적인 유연함을 보여야 하고, 심지어 '미안하지만 밟고 올라설'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이 세계의 예술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것은 예술이라는 장미의 이름,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이름 뿐...

승자 독식 체계의 로또급 확률에 현혹된 신입 예술가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이뤄진 공급 과잉의 세계. 이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빈곤 증가.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소수 권력집단의 카르텔화와 친 자본-권력화. 다소 과격한 주장이긴 하지만 일리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겪어보신 분들은 더 잘 알겠지요. 당신이 평범한 예술가 지망생이라면 이 책을 읽고 미래를 재구상하시기 바랍니다(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이 열성적인 예술가 지망생이라면 읽지 않기를 권합니다. 당신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독한 예술가 지망생이라면 이 책은 좋은 가이드가 될 겁니다. 

이 글을 쓰는 저는 전자에 속했으며, 이 책을 소개하는 기분은 마치 참회록을 낭독하는 기분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장미만을 손에 쥐어준 신을 원망하지 말고 그 장미를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바랍니다. 

 

We sing, We dance, We steal sunlight 

 지난 번에도 소개드린 바 있는 책이지요. 다시 한 번 왔습니다. 모든 뛰어난 (예술) 에세이가 그렇듯 이 책 역시 서두르지 않으며, 어떤 발견의 순간들을 공들여 모으고

생각이 펼쳐질 때, 말의 형상이 싹트고 꽃필 때, 우리 모두가 둘러앉아 이야기하고 이야기하며 시간이 우리를 이기도록 두었던 어두운 테이블 위로 말의 표현이 지친 꽃잎들처럼 쌓일 때와 같은 텅 빈 묵상의 시간들. 흔히 말하듯, 그냥 시간을 보내기. 다시 말해, 시간이 우리를 포획하도록 두기. 

"말씀해 주시겠어요." 언젠가 나는 수녀원 독방에서 열아홉 살부터 (활기차게, 그래 보였다) 살아온 예순 살의 은둔 수녀님께 여쭈었다. "묵상적 삶의 정수는 무엇일까요?" 

"한가한 시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도자기 같은 푸른 눈으로 명랑하게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세계-마티스가 그 일부를 드러내며 

마티스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늙은 직조공이 말한 장식 예술의 정의에 찬동했다. "부귀보다 더 귀중하며, 모두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것." 가난하지만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지상에서는 아닐지언정, 최소한 "주머니 속 밀림"이 정교하게 프린트된 선명한 공장제 옷감이라는 천상의 영역에서는 유산 상속을 바랄 수 있었다. 마티스는 트위드 양복과 조끼로 부르주아처럼 차려입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부자들의 헤픈 허기가 이국적 아름다움을 물리도록 탐닉하는 것을 보았던 노동계급 소년이었고, 불필요한 쾌락의 힘을 인식했다. 가혹한 북부 지역의 사제가 압도하는 가톨릭교, 사다리를 조심스럽게 움켜잡고 올라가 아버지의 몫이었던 결핍에서 벗어나는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적 자기만족을 낳지 않았다. 이는 그를 포브Fauve로, 야수로 만들었다. 

보앵의 옷감을 수요한 부자들의 사치스러운 미의식과 그 물건들을 공급한 진흙투성이 마을 노동자들의 자랑스러운 제작품 사이에서, 마티스는 혼자 피뢰침처럼 서서 두 세계를 연결했다. 아름다움은 사업이었다. 이는 먹을 것이었고 잘 곳이었다. 이렇게나 계급적인 세상에서, 아름다움이 일용 노동을 지배하고 식탁에 빵을 제공하는 세상에서, 가난은 자기에게 창조하도록 맡겨진 영광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다. 마티스는 절대 잊지 않았던 것 같다. 가난한 자의 허기는, 오래된 노동가요가 말하듯, 빵을 향한 것이라는 것을-그리고 장미도.

그리고, '마티스'가, 

"구름 모양이 극도로 상쾌하다." 그가, 비행기 탑승을 마법 같이 느꼈던 19세기인이 말한다. "구름 기둥이 솟아오른 광대한 벌판이 길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더 가까이 가 이를 뚫고 침묵의 안개와 흩어진 빛 속으로 나아간다... 갑자기 우리는 찬란하고 애무하는 듯한 빛(찬란할 뿐 아니라 즐겁기도 한 빛) 속에 다시 한 번 있다." 

경험 전체가 계시적이었다. "비행기 여행은," 그가 존재의 다른 상태에 대해 말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마음의 평화를 우리가 잊을 수도, 찾을 수도 있게 해준다. 놀라운 것은 부동감, 그리고 커다란 안도감이다. 우리가 추락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는 빛 속으로, 그의 영속적 주제로 올라갔던 것이다. 

그리고 수피교의 춤, 피츠제럴드 시대의 예술과 권태, '발견'에 대한 여러가지 열망, 세심한 여행기적 성찰, 어떻게 예술이 열락의 문을 두드리는가, 들라크루아와 마티스, 앵그르와 마티스, 19-20세기의 위대한 여성 소설가들, 끝없는 오달리스크, 그리고 아라베스크가 등장합니다. 각 단락은 연결고리 없이 등장한 듯하지만 멋진 솜씨로 엮이게 됩니다. 마티스에 대한 스탕달 신드롬처럼 신열에 들떠 시작한 책. 그러나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면 <블루 아라베스크>는 오히려 인생과 세계에 대한 관찰기에 가깝습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이 책은 객관성을 담보하는 전기도 아니고 학술적인 분석서도 아닙니다. 심지어 마티스에 관한 일부는 그녀의 상상으로 채워져 있습니다(두 번째 인용을 보시면 느낌이 오시겠죠). 얼핏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그렇습니다. 마티스는 하나의 끈이고 거기 끼워진 보석들은 '세계'입니다. 리듬과 패턴과 햇빛 때문에 자신의 비밀을 노출시킨 세계요. 우리는 한 권의 책을 읽었으며, 이어 노래하고 춤추고 잠시나마 햇빛을 훔칠 것입니다. 너무 반짝반짝 눈이 부셔...

  

세계와 소통하기

            
 

<현대 타이포그래피-비판적 역사 에세이>. 이 멋진 표지는 누구의 것인고 하니, '슬기와 민'이군요. 출판사 스펙터프레스는 이 분들껍니다. 안그래도 비주류 역사책은 잘 안 나가는데 세상에 타이포그래피의 역사...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내용은 흥미롭습니다. 각종 폰트의 발명, 인쇄와 편집의 소소한 혁명들, 그리고 그 배후에서 벌어지는 미학 담론들과 정치론들의 국지전. 어떤 원형의 텍스트에 가장 알맞는 옷을 입히는 이 타이포그래피라는 작업, 예술적 감수성과 철저한 실용적 요소를 두루 갖춰야 하는 줄타기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 재밌습니다. 텍스트를 비주얼화한다는 건 소쉬르식으로 우기면 '사고의 시각화의 역사'나 다름없으니까요. 예술-인문쪽 좋아하시는 분들께 의외로 중요한 출발점을 시사할지도 모릅니다. (여담. 저는 산세리프체를 좋아하는데요. 이 폰트를 둘러싼 공방들을 읽자니 세상에 참 평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시사들도 무슨 죄다 투쟁의 역사...)

<약한 건축>은 건축을 주제로 한 비평서인데요. 앞의 책과 마찬가지로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합니다. (솔직히 건축에 관심없는 분들은 재미없을 확률이...높습니다. -_-) 주류 건축사들을 훑으면서 이것도 까이고 저것도 까입니다. 대부분의 새로운 시도가 자기 논리 안에서 매몰되는 비극적인 역사를 추적한 다음, 조심스레 제시되는 것은 '자의식이 희박하고 덜 구획지어진' 반쯤 열린 공간으로써의 건축물입니다. 동양 사상을 첨가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해도 될런지, 그렇다면 기존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 밟아온 '탈정치->몰정치'의 역사를 어떻게 피해갈지에 대해서는 아직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해봐야 안다는 거겠죠. 모든 정치적인 것들은 시지프스의 냄새를 풍깁니다.

너무 무거운 책들만 나왔나요... <세상을 껴안는 영화 읽기>는 쉽게,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는 '영화로 보는 인권 이야기'입니다. 아니나다를까 본문의 말투는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삼은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재밌게 배우는 인권 이야기'죠. 매 영화 소개가 끝날 때마다 질문꺼리가 있어서 논술 공부용으로도 괜찮을 듯합니다. 본문은 영화 스토리의 축약이 대부분이라 특별한 분석을 바라는 중급 이상 내공 소유자들은 실망하실 수 있습니다. 조숙한 초등학생부터 너무 공부에 몰두했던 대학 초년생들까지 권해 드립니다.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 도둑> 제목 예쁘죠. 터키에서 온 사진가 아리프 아쉬츠의 서울 탐색기입니다. 실제로 온 서울의 장미를 꺾어 '훔쳐서' 서울 내 각 지역별 장미들의 차이까지 꿰고 있는 이 남자. 좀 더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꽤 낯설은 모습이긴 합니다. 다만 좀 더 깊이 써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네요. 정치나 역사에 관한 이야기에서 어느 시점 이상으로 치고 들어가지 않는데요. 일부러 멈춘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책이 무거워지지 않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네요. 사진은 꽤 좋습니다. 간만에 만나는 스트리트 스냅이네요.

 

그리고                    사진 + 공간

             

<낮은 데로 임한 사진>은 노장 최민식 선생님의 에세이-사진 모음입니다. 이 대책없는/망설임 없는 휴머니즘-다큐멘터리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들이 많습니다만, 어쨌거나 때로 그런 온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순간들이 있지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는 측면에서는 일가를 이룬 장인이며, 그 신념의 단단함과 함께 서민들의 삶을 바라본다는 것은 꽤 든든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슈타이켄의 가족사진전 같은 스타일을 싫어하시더라도 이 분의 사진은 일단 한 번 만나고 봅시다. 

<랭포드의 사진 강의>는 바바라 런던의 <사진학 강의>의 대항마로 영국에서 내세우는 사진학 총론입니다. 사진의 간략한 미학적 특성에서 시작해 빛에 대한 고찰로 이어지고, 그 고찰이 기초적인 광학으로 이어지며, 기초 광학이 카메라 메커니즘으로, 그것이 다시 감재(필름)로 이어지고 또 암실 작업으로 이어집니다. 이어 디지털 작업이 등장하고 포트폴리오 제작에 대한 조언이 이어집니다. 네, 부드럽죠. 이런 유기적인 구성이 인상적입니다. 사진이 빛으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시스템이란 걸 배우는 것보다 개론에서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더불어 암실 작업의 중요성(콘트라스트는 직접 조율해보지 않으면 절대 감을 잡을 수 없다)을 비롯해서 저자의 직접적인 조언들도 눈에 띕니다. '강의'는 역시 이런 식이어야겠죠. 수록된 사진 퀄리티도 괜찮고, 초보에서 중급(?)까지 두루두루 참고로 삼을만한 책입니다. 

<a monologue>는 솔직히 의외...였습니다. 배우 박상원 씨의 사진집인데요. 사진 퀄리티가 괜찮습니다. 아마추어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구요. 소위 '연예인 사진집'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주로 90년대 중후반 일본 감성파 사진 혹은 싸이월드 스타일의 사진이 대량 생산되는 유명 아마추어들과는 다른 담담한 분위기가 빛을 발합니다. 재밌는건 사진의 스타일이 고정되지 않고 이것저것 시도하고 있는 게 엿보인다는 건데요. 이렇게 조금씩 변화를 주는 시도도 좋아 보입니다. 비록 해외에서 이국적인 풍경을 담은 컷들이 많긴 하지만, 나도 할 수 있다! 라고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가슴에 불을 당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대가들의 책보다 유용하죠.

<공간에게 말을 걸다> 재밌었어요! 모든 시각 예술에 적용 가능한 '배경의 미학'이 가득합니다. 기둥과 천장, 복도와 회랑, 층간 구조의 노출 등등 각종 구조물들의 배치가 보는 사람에게 어떤 심리적 효과를 불러 일으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풍부한 예시가 장점인데요, 특히 매 꼭지마다 그 주제를 모형 세트로 촬영한 사진이 들어 있어서 이해하기 편해요. 주로 실제 건축물과 영화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예시를 보는 것도 재미납니다. 특히 몇몇 건물의 내부 스케치는 시적이기까지 해서 더욱 좋았어요. 읽는 것도 재미있고, 그야말로 모든 분야의 시각 예술에 적용해볼 수도 있는 즐거운 경험을 제공하는 책입니다. 미리보기를 통해서 살펴보시면 돼요.

  

-끝. 봄이네요. 꽃샘추위도 있고 그렇습니다. 부디 봄에 파묻히지 말고 그 위에 올라타세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참. 이 책을 놓칠 뻔했네요. 방대한 데이터북으로도, 정치와 대중예술의 관계학으로도, 그저 독립된 하나의 역사책으로도 손색이 없는 역작입니다. 이런 게 나오면 참 감사하다는 마음 들어요. 게다가 저는 심수봉을 정말 너무 좋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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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방글 2009-04-14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도둑은 표지 디자인이 좀 아쉽네요.

외국소설/예술MD 2009-04-15 14:10   좋아요 0 | URL
표지가 약간 난삽해보이긴 해도 그래도 꽤 예쁩니다. 실물이 더 나은거 같네요.

한종석 2009-08-05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왜 예술가들은 가난할까 이거 읽어봐야겠네요.

외국소설/예술MD 2009-08-05 18:11   좋아요 0 | URL
네,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필요한 책이 아닐까 합니다.
 

 

"아디오스, 영광의 날들이여." 

-책 표지의 하단을 장식하고 있는 클래식 황금기의 명 지휘자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황금기는 이들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죠. 이 책은 고전음악의 황금기를 뒷받침한 조연들까지 불러들여 풍성한 이야기들을 제공합니다. 전쟁 중에 사용된 음파 기술로 레코딩의 한계를 끌어올린 '민주적 게이 공학자 천국' DECCA. 소니에 합병되고 카라얀과의 계약도 실패(갑자기 사망)하면서 무너져버린 CBS의 슬픈 최후. 그리고 조용히 세상을 떠나려고 한밤중에 묻힌 카라얀의 무덤에 찾아가 눈물을 흘린 단 한 명의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아, 낙소스 탄생에 얽힌 한국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어두운 먹구름이 동쪽에서 몰려왔다. 홍콩에서 음반 배급을 하고 있던 독일 출신의 한 무역업자가 한국에서 가정방문으로 판매할 대중적인 클래식 패키지를 주문받았다. CD 제작 단가가 떨어진 것을 확인한 클라우스 하이만은 파리에 살고 있던 한 슬로바키아인한테서 오케스트라 테이프를 서른 개 구입해 패키지를 주문한 사람에게 팔려고 음반으로 찍었는데, 이미 그는 망한 뒤였다. "그래서 나는 서른 명의 오케스트라 거장들이 지휘한 음반을 갖고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동유럽 오케스트라였기에 정가를 받고 팔 수도 없었죠. 연주는 그럭저럭 들을 만했지만요. 결국 염가 레이블로 발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낙소스(Naxos) 레이블이 시작된 겁니다." 

-p.178 

음반사들이 저자를 고소했던 점에 비추어, 이 이야기들이 전부 사실일거라는 보장은 아마 아무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사건과 실화급의 비화/야사만으로 생각하기에는 아깝습니다. 일단은 재미있기 때문이고, 틱틱거리는 말투로 시비를 거는 듯 보이다가도 클래식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못하는 저자의 귀여움(..)때문이기도 하겠죠. 그리고 그 무엇보다 클래식 음반 시장 몰락의 맥락을 잘 해설해주고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임에 분명하니까요. 그 몰락은 작곡자, 연주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에 편입된 음반사와 무능한 경영진, 그리고 '불운'들이 겹쳐 만들어낸 환상 교향곡이었던 거죠. 

클래식 음악 산업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 죽음의 결론이 부활일지, 변용일지, 영원한 침묵일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번성기에 이어 황혼에 접어든 이 세계를 사랑하는 애호가들께는 그 저무는 빛마저 어떤 감회를 선사해 드릴 겁니다. 배경음악은 이졸데의 죽음 어떻습니까? 저는 토스카니니로 할래요. (이 책에서 꼽은 명반은 푸르트벵글러입니다) 

아참, 불멸의 명반 100선과 최악의 음반 20선도 쏠쏠합니다. 비록 최악의 20선이 논쟁에 휘말릴 정도의 문제적 선정은 별로 없긴 하지만요. ㅎ 

 

        

단상, 다큐멘터리 사진가를 사랑한 '우리'는 누구인가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이 더욱 커지고 있는 이 시점에도 왜 '우리의'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여전히 변방을 맴돌고 있을까요. 소통의 방법이 문제인지, 일반 대중의 사진론과 그 틈이 너무 벌어진 것인지 (사실 인디영화도 비슷한 원인이겠죠. 워낭소리는 하나의 '현상'이구요) 성찰이 더 필요한 상황이긴 합니다만... 다양한/흥미로운 방법론으로 현대사의 각종 요소마다 흔적을 기록한 이 역사-미학적 결과물들이 왜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지 참 궁금해요. 역사적 유용성과 함께 다양한 미학적 논의가 가능한 풍부한 텍스트-이미지들인데 말이죠.

<우리가 사랑한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은 유명 다큐 사진가 14인의 소개, 인터뷰, 사진들 몇 점을 모아 놨습니다. 좀 짠한 장면은 '우리가 사랑한'이라는 제목 앞부분입니다. 우리는 누구일까요. 이 땅과 역사에 애착을 갖고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그 현장을 남긴 사진가 당사자들은 아니겠으며, 소리높여 외치고 분개하고 '읽지만' 그조차 내 취향에서 벗어나는 모험을 시도하기를 꺼리는 분들도 아니겠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적은 사람들입니다. 지금은요. 

예술을 한다는 건 힘든 일입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그 중에서도 더하죠.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의무와 미학적 성취를 위한 예술가의 고뇌를 동시에 짊어진 분들을 한 번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열 네 명의 선정 작가들은 거의 현재 한국 다큐사진의 드림팀이며(물론 국수용 씨나 에어리어 박 등등 에이스가 더 남아 있습니다), 단언하건대 이 책을 읽고 나면 역사,예술,인생,회한(!) 그 무엇이든 하나 이상은 건질 수 있을 겁니다. 내용이 치열해도 잘 정리해서 남 얘기 듣듯 하기에는 인터뷰만한 게 없거든요.  

p.s: 다큐멘터리와 포토저널리즘은 구분되어야겠죠. 포토저널리즘의 최전선은 <World Press Photo'08>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왼쪽 표지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네 종류의 썰

                

<벤야민 & 아도르노,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은 제목의 포스에 비하면(?) 어려운 책은 아닙니다. 대중문화를 분석하는 데 있어 두 가지의 상반된 입장을 놓고 서로 반대쪽에서 파들어가는 재미있는 교양 문화서예요. 기계복제시대에 접어들어 모더니즘적인 아우라 대신에 자기복제성-대중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미학을 만들 거리는 벤야민류(포스트모던한 선언?)의 희망적 분석, 그리고 '개성 몰살의 초강력 인민 마약'이 될 거라는 아도르노류 비관론이 정면 충돌합니다. 써놓고 보니 어려워 보이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디어 쪽에 관심있는 분은 부담없이 접하셔도 돼요. 인용 작품들에 대한 소개는 물론, 책의 내용을 잘 이해했는지 친절하게 질문까지 챕터별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미디어-사회분석. 이론 해설 및 비교. 난이도 중하. 

<스캔들 미술사>는 일종의 미시사 책입니다. 그림에 얽힌 사연을 따라가 보는거죠. 그림의 미학적 성취는 이 책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역사의 증거로 제시되지요. 렘브란트의 야경꾼은 그 자체로 끈질긴 보존과 복구의 살아있는 증거이고, 마네의 올랭피아는 천재를 알아보지 못한 시대의 폭력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기존의 미술사 책에서 다루지 않은 면모를 구경할 수 있어서 재밌습니다. 그림을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읽기, 그림을 분석하기, 그림으로 잡담하기에 이어 이런 미시사 책들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고급 킬링타임. 미시사. 에피소드 북. 난이도 하. 

<블루 아라베스크>는 섬세한 단상입니다. 만약 원서를 읽는다면 단어의 어감에도 무척 신경을 썼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잘 짜여진 수필이죠. 미술하고는 담 쌓고 살던 저자가 어느 순간 마주친 마티스의 작품 때문에 충격에 빠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보통 마티스에 대한 절절한 찬양같은 걸로 이어지게 마련인데, 이 책 역시 그런 길을 따라가는 듯 싶다가도 (인상깊을 정도로) 차분하게 한 겹 한 겹씩을 더 깔아 놓습니다. 그러다 어느새 우주와 질서에 대한 성찰에까지 다다르게 되죠(안심하세요. <시크릿>보다는 장 그르니에에 가깝습니다). 책 제목처럼, 아라베스크 무늬처럼 잘 짜여진 이 조용한 이야기는 좀 더 주목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따스하고 풍부한 몽상들은 늘 좀 더 주목받을 필요가 있긴 하지만요. 과감한(?) 파랑/검정의 2도 본문 인쇄 역시 싸이키델릭합니다. 예술 소재의 수필. 사색록. 난이도 중. 

<재즈 문화사>는 의외의 책입니다. 역사와 사회의 변화가 재즈를 어떻게 태동시키고 변화시켜 왔는지를 추적하고 있거든요. 아티스트와 명반 소개를 위주로 구성된 국내 재즈 책들을 생각해보면 독보적인 접근입니다. 종종 예술은 신화적인 후광에 파묻히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렇게 천재와 뮤즈들의 각축장처럼 소개하는 다른 책들과 함께 <재즈 문화사>를 읽으면 균형있는 접근이 되겠습니다. 불황과 전쟁과 대선과 정치적 성향이 재즈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얼핏 당연한 것 같지만, 그 '사실'들을 직접 읽고 저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지요. 책 자체의 퀄리티로만 보자면 특별한 성찰까지는 나아가지 않는 '보통의 역사서'로 볼 수 있겠죠. 그러나 지금의 우리에게는 존재 자체가 소중한 책입니다. 음악 사회학. 역사서. 난이도 중하. 

  

-봄은 오나보네요. 이것저것 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다음 이 시간까지 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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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3-03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적인 죽음>은 클래식 호사가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인듯합니다. 그런데 200페이지 책의 가격이 만만치 않군요. ..<블루 아라베스크> 도 관심이 가네요. ㄳ

외국소설/예술MD 2009-03-0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페이지는 오류네요. 목차를 합하면 500페이지가 넘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나저나 블루 아라베스크를 알아보시다니 역시 센스쟁이세요.

드팀전 2009-03-03 09:27   좋아요 0 | URL
아..얼결에 제가 하나 기여를 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