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 연인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리움 미술관, 무더운 가을 오후, 예술MD이니까

 미술을 사랑하는 남자, 이주헌을 인터뷰하다

 

  

-글 쓰는 사람, 이주헌

알라딘: 현재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미술 칼럼니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이나 원동력이라고 하면 뭐가 있을까요?

이주헌: 좋아서 하는 일이라서 그래요. 재미있어요. 그래서 계속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책을 내고 나서는 늘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금방 또 새 책을 구상한다거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발전시킨다거나 하게 돼요. 그 과정이 제게는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게 삶의 활력소가 돼요.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죠. 처음에 미술 담당 기자로 시작했는데, 기사라는 게 정해진 형식이 있잖아요? 그 틀에 적응하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미술 얘기라서 더욱 좋았어요.

아, 처음에 책을 낼 때를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의무감이랄까 사명감도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쉽게 그림에 친숙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생각만 하고 있으니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직접 써 보자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 사명감을 성취하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죠.

알라딘: 특별히 특화된 분야가 없는 다방면의 미술 칼럼니스트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주헌: 음... 저는 처음에는 화가가 되려고 했었어요. 그게 주인공이고 주연 같잖아요(웃음). 화가의 그 창조성, 빛나는 어떤 것. 그 외의 비평가라든가 같은 사람들은 주변인처럼 보였달까? 그런데 기자 생활을 하면서 예술가와 사람들 사이의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미술을 친근하게 만들어주는 글을 썼는데 다행히 처음부터 반응이 좋았죠. 그때 가장 중요한 게 뭐냐면, 사람들에게 미술의 여러 채널을 알려주고 관심사를 확장시켜 줄 수 있는 다양한 시도예요. 그건 지금도 필요한 거고요. 

그러다보니 제가 전공이 없는 사람인데(웃음) 학술적으로 보면 그건 확실한 약점이에요. 그런데 그게 저를 겸손하게 해 줘요. 그리고 그 겸손함이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해요. 

알라딘: 미술 분야 책을 쓰시는 분들 중에서는 다작하는 편에 속하시는데요, 혹시 슬럼프를 겪은 적은 없으세요?

이주헌: (단호히)없어요. 저는 열심히는 쓰지만 완벽주의자는 아니에요. 책이 완전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지금이 이 책이 가장 필요할 때라는 생각이 들면 바로 냅니다. 일반 독자들이 원하는 지식이나 그 분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책은 그때그때 달라져요. 그 타이밍을 잡아서 바로 보여줘야 돼요.  

저는 쌓아놓은 지식보다는 어떤 순간의 영감을 중요시하는 편이거든요. 하나의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자라나서 계속 가지를 치는 거죠. 책을 내고 나서는 늘 아쉬움이 있지만, 금방 다른 발상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아쉬움은 곧 잊어버려요. 슬럼프가 있을 수가 없죠. (웃음) 

 

 

 

 

 

 

 

 

등등등.....

 

 

 

알라딘: <지식의 미술관>에서 다섯 개로 나눠진 주제는 사회적 시선, 예술가의 자아, 도상학적 이야기 등 각각 미술을 바라보는 다른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권의 책 속에서 미술을 둘러싼 여러 측면을 동시에 다룬 대중 미술서는 신선한 시도로 보이는데요. 구상하실 때 어떤 특별한 고민이 있었는지요?

이주헌: 특별한 고민이라기보다는... 제가 내는 책은 크게 세 종류로 볼 수 있는데, 기행문 형식을 띈 미술 탐방기가 있고요. 사는 이야기와 미술 이야기를 섞은 에세이 류의 책이 있죠. 그리고 마지막 종류가 미술과 관련된 역사-사회-문화 이야기죠. <지식의 미술관>은 세 번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마 앞으로는 세 번째 종류의 책을 내는 비중이 높아지겠죠. 그건 책을 내는 시기가 어떤 시기냐에 따라 늘 달라져요. 처음에 대중적인 미술 책이 없을 때는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느낌이나 감상에 확신을 갖지 못했어요. 뭐가 맞는지 틀린지를 궁금해 하고 자신감이 없었죠. 그럴 때는 사람들에게 미술 에세이 같은 책이 필요해요. 분석하고 비평하기보다 공감하고 공유하는 게 필요한 거죠. 일단 미술에 친숙해질 필요가 있으니까요. 이제 시간이 흐를수록 독자층이 넓어지기도 하고 깊어지기도 하니까... 앞으로 독자들도 앞서 말씀드린 세 번째 부류의 책들에 좀 더 주목하지 않을까 해요.

알라딘: 우리나라에서는 앞서 말씀하신 분류 중에 두 번째, 그러니까 미술과 일상의 삶을 합치거나 일종의 심리 테라피를 시도하는 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최근의 흐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주헌: 위로하는 책들이죠. 사실 위로가 가장 중요하죠. 그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우리가 어떤 구조나 체계 안에 들어갈 때에는 억압을 느끼게 되죠. 그렇지만 그 체계에 익숙해지는 순간 그 체계가 자신만의 위로를 줄 수 있어요. 특히 예술의 위안이란 건 사람들에게 정말 커다란 힘이 되는 거예요. 

미술도 하나의 체계다보니 처음에는 벽 같은 게 있어요. 그렇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돼요. 미술 테라피나 일상과 미술을 섞은 책들은 그래서 늘 가치가 있어요. 벽을 낮추고 예술의 위로하는 특성을 알려 주니까요. 사람들이 거기에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으면 좋은 거죠. 매우 중요한 일이고, 언제나 중요한 일이죠. 

그렇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 지식의 확충도 중요한 일이예요. 왜냐면 지적 호기심을 가장 재미있는 방식으로 충족시키는 게 미술이거든요. 언어와는 다른 감수성을 통해서 세계의 다른 면을 바라볼 수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책들도 중요해요. 우리나라 독자들도 점점 더 그런 종류의 책들을 좋아하고 있으니 좋은 책들이 더 많이 나올 겁니다.
 


한국 미술계를 긍정하는 웃음이다(웃음).


알라딘: 좀 더 풍부하고 다양한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까지 다루신 적 없는 분야, 예를 들면 현대미술이나 사진 같은 분야의 책을 내 보실 생각은 없으신지?

이주헌: 아, 생각은 늘 하고 있어요. 막 보여드리고 싶죠(웃음). 그런데 그건 현실적인 제약이 아직은 커요. 일단은 책에 수록될 도판 가격이 비싸거든요. 현대미술이나 사진은 저작권이 거의 다 살아있어서 도판의 저작권 비용에만 돈이 많이 들어가요. 그러면 책은 그 단가 때문에 점점 커지고 비싸지거든요. 물론 그래도 사서 보는 분들은 사서 봐요. 그런데 보통 독자들이 그 책에 관심을 보이기는 너무 어렵겠죠? 그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 시장이 더 커져서 그런 걱정 없이 책을 낼 수 있는 날이 오겠죠(웃음).   

 

-책, 지식의 미술관 

알라딘: 깊이 있는 교양 미술서 얘기가 나왔는데요. <지식의 미술관>의 서문에서는 미술 감상에 있어서 직관적인 접근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본문은 그 직관적 판단을 돕기 위한 일종의 자료집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개인적으로는 혹시 선생님의 다음 책이 ‘직관적으로 그림 보기’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매우 궁금한데요. 어쩌면 그건 교양 미술서의 궁극이 아닐까(웃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기존에 철학자들이나 학자들이 쓴 비슷한 테마의 책들이 있습니다만, 혹시 일반 독자들을 위해 그런 글을 써 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이주헌: 네, 매우 관심 있어요. 정말 관심이 많은 분야죠(웃음). 어떤 파편화된 지식이 아니라 본질을 어떻게 순간적으로 낚아챌 것인가, 기존의 논리를 넘어서 사물의 본질을 잡아낼 수 있을까. 저도 늘 궁금해요(웃음). 심리학이기도 하겠고, 미학이라든가 역사에도 관련이 있고... 정말 많은 공부가 필요하겠죠. 

특정한 분야의 학문 대신 그저 이미지를 계속 봐 오고 그걸 전달해 온 사람으로서, 직관, 이미지를 사유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시작하는 상상력, 그런 것들의 시스템이 늘 궁금해요.  

이건 매우 중요한 거거든요. 창의력, 틀을 뛰어넘는 것들의 발상은 어디에서 올까요? 직관에서 오죠. 직관은 말, 언어, 문장이 아니라 이미지적으로 사고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존의 논리적 사고 체계와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는 거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에서 유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 속에 있는 어떤 상(像)에서 갑자기 출발하는 거예요. 갑작스러워서 기존의 세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죠.

알라딘: 비언어적인 사고의 필요성에 주목하고 계신 거군요?

이주헌: 그렇죠. 성경에서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건 종교의 순수함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상의 위력 때문이에요. 상을 만드는 순간, 인간의 지적 능력과 창의력은 급속히 성장하게 되거든요. 그건 결국 전복적인 사고와 이어지게 되죠. 모든 지배층은 그걸 두려워할 수밖에 없어요. 어떤 시대든, 어떤 예술이든 마찬가지에요.  

연상은 상에서 상을 잇는 거죠. 그건 언어와는 달리 논리나 체계를 선호하지 않아요. 그걸 뛰어넘는다고 할까... 다른 세계에 있어요. 충격적이고 강렬한 세계죠.

알라딘: 예술의 전복적 성향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지식의 미술관>의 4,5장에서는 정치권력과 결탁하거나 자본 등의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예술 자체의 성향과는 별개로 예술가의 사회적 의무 같은 것도 있을까요?

이주헌: 사실 미술은 권력과 결탁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어떻게 보면 뗄 수 없는 관계죠. 미술 역시 소통과 사유를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언어와 마찬가지의 매개체에요. 그래서 모두들 그 소통 매체를 선점하려고 하죠. 민중이든 권력이든, 그 수단을 장악하려는 방식은 서로 다르겠지만 그 목적은 같아요. 서로 자신의 계층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하려는 거죠. 

예술가는 모두가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업할 수 있다고 봐요. 그게 돈이 될 수도 있겠고 권력이 될 수도 있겠죠.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니까요.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 살아남은 작품이나 작가들은 하나같이 보편적인 매력을 갖고 있어요. 시대를 불문하고 전 인류와 소통 가능한 보편성이죠.


알라딘: 사회적 의무와 예술가적 자의식은 별개의 문제라는 거군요. 피카소와 공산당처럼 말입니다. (우측은 피카소가 1953년에 그린 스탈린의 스케치)

이주헌: 그렇다고 봐야죠. 피카소가 투철한 정치의식으로 공산당에 가입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고 봐요. 자의식의 연장 같은 거였죠. 제스추어라고 할까.

알라딘: 책이나 그림, 영화 등을 통틀어서 요즘 인상 깊게 접한 작품이 있는지요?

이주헌: 아주 신작이라고는 할 수 없고, <괴짜 경제학>이란 책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제가 경제학에 대해 특별히 아는 건 없지만요(웃음). 독창적인 사고로 경제 문제에 접근하는 점이 좋았어요. 기존에 경제학 입문에 대한 선입견을 부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낸 거죠. 어떤 문제에 마주쳤을 때 그 문제 자체만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인데, 그러면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을 발휘할 수 있거든요.

 

 

-For Fan 

알라딘: 책을 읽을 때의 습관이라거나 규칙이 있으신가요? 선호하는 작가라던가...

이주헌: (웃음) 중구난방이에요.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읽어요. 여러 분야의 책들을 읽으면서 새로운 느낌, 영감 같은 걸 얻으려고 해요. 

방금 영화 하나가 생각이 났어요. 얼마 전에 개봉한 <서로게이트>라는 영화인데,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높으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영화의 아이디어는 좋았어요. 보통 영화에서 로봇이라고 하면 독립적인 지능을 갖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영화에서는 로봇은 각 인간의 완전한 복제품이 되어서 그 주인에게 직접 조종되는 일종의 대리 인간이에요. 이런 것처럼 제가 기존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보게 되면 즐거워져요. 나중에 글을 쓸 때도 그런 아이디어들이 좋은 소재가 되고요. 

박찬욱 감독의 <박쥐>도 논란이 좀 있지만 저는 참 좋게 봤어요. 이미 대중적인 부담을 상당히 떠안고 있는 감독이잖아요. 그런데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가지고 그걸 밀어붙였어요. 그런 장면장면들, 특히 몇몇 디테일들은 잊을 수 없는 것들이죠. 첫 장면에 나무의 그림자가 비칠 때부터 좋았어요(웃음).

알라딘: 네, 인터뷰를 관통하는 어떤 지론이 느껴지네요(웃음). 혹시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꼭 봤으면 하고 추천하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이주헌: 하나를 정하기는 참 어렵네요. <지식의 미술관>에도 나오는 마티스의 성 프란체스코. 로제르 예배당의 벽화죠. 근처를 지나갈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무조건 봐야 할 그림이에요. 선 몇 개로 이루어진 단순한 그림이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꼭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모네의 수련 연작.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죠. 수련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예술이 왜 좋은지 저절로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마크 로스코의 그림들도 상당히 좋죠.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로제르 예배당 내부 전경
 



알라딘: 저도 꼭 보고 싶었던 것들이네요. (웃음) 마지막으로 알라딘 독자분들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이주헌: 미술은, 사귀어서 손해 볼 게 없어요. (웃음) 애인은 배신해도 미술은 배신하지 않거든요. (웃음) 그렇게 곁에서 항상 위로와 깨달음을 줘요.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한 번 사랑해 보셨으면 합니다. 

알라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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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랑 2010-03-10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지막 문장 참 좋네요. 망설이지 말고 한 번 사랑해 보라는......미술과 사랑에 빠져볼까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4-09 15:19   좋아요 0 | URL
네 뭐든 망설이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살다보니깐요.
 

요즘은 지나치게 일찍 자고 지나치게 일찍 일어납니다. 일어나서 긴 밤을 맞으면 시간은 유독 천천히 흘러갑니다. 한동안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긴 밤을 보내게 되면서 다시 음악을 듣습니다. 가장 최근에 구한 음반은 릴리안 푹스(Lilian Fuchs)가 연주한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의 비올라 버전입니다.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황금기에 있었던 최초의 비올라 녹음이라죠. 활질의 밀도가 대단히 높고 루바토가 자율적이라 요즘 스타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지만 그런게 오히려 더 좋을 때가 있지요. 곡 자체에 더 가까이 접근하기보다는 연주자와 함께 호흡하면서 연주자가 경탄하는 순간에, 어떤 흐름의 절정에, 느려진 템포에 같이 숨을 쉬는 그 기분. 릴리안 푹스의 연주는 열정적이고 밀도가 높지만, 동시에 여유가 있고 '흐름'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여타 연주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즐거움-감동이 있네요.

클래식 음악을 듣는 가장 큰 묘미는 연주의 다양성이 아닐까 합니다. 백 명의 연주자가 같은 곡을 연주하면 백 가지의 다른 결과물이 나오죠. 괴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관한 반 픽션 평전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에 보면 결국 가장 순수한 연주는 '연주하지 않음, 악보 그 자체만으로 존재함'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악보 속의 음들이야말로 도그마가 되고 절대적인 심상을 갖습니다. 존재하지 않음으로서 완벽해지기.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그 완벽함에 어쩔 수 없이 덧칠을, 자기 스타일의 때를 묻히는 것에 다름없습니다. 지상의 인간들이 그 악보를 어떻게 소화하느냐는 '누가, 언제, 어디서'에 따라 매번 달라지겠지만, 단 한가지 사실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완벽한 연주를 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영원히, 셀 수 없는 도전이 이루어지고, 역사 위에 남은 크고작은 묘비들 위에서 또다시 연주는 계속되리라는 것. 

그게 클래식 음악을 듣는 '행위'를 생각할 때의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제게는요. 

 

그리고 세 권의 책이 있습니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진중권 특유의 그림 선정이 우선 눈에 들어옵니다. 미학 오딧세이 등의 다른 저서를 읽으신 분들은 익숙하실 단골 손님(?) 마그리트나 에셔도 빠짐없이 출석했네요. 서문에서 밝혔다시피 이 책은 진중권 자신이 좋아한 그림들의 이야기죠. 그가 좋아하는 그림은 이 세계를 평화롭게 옮긴 '한 폭의 그림같은' 작품들이 아닙니다. 

어느 지점에서 더이상 해석이 불가능하거나(조르조네의 <폭풍우>), 다층적인 해석 속에서 부조리함만이 슬그머니,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들거나(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 진보에 대한 인류의 믿음에 씁쓸한 미소를 짓거나(보슈의 <우석의 제거>)... 그림 속에서 주체가 뒤틀리거나, 사라지거나, 아니면 현실같지 않은 것들이 현실 속에 무덤덤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요하네스 굼프, <자화상>. 거울은 실제의 모사이고 그림은 거울의 모사인데, 가장 살아있는 듯한 것은 그림이다.

미학자를 사로잡는 그림들. 세계의 빈 틈을 보여주는 그림들. 언어보다 훨씬 먼저, 어떤 직관으로 포착한 세계와 인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 진중권이 고른 그림들은 현실 세계라는 매트릭스를 굳건히 신용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불편한 예언들입니다. 네, 선명한 메시지 -선언이라거나- 가 아니라 예언입니다. 예언자 자신도 자신이 뱉은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죠. 이 책 속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분명함과는 거리가 있는 어떤 징후들입니다. 불분명하고 분열하고 흐려지는 세계의 징후죠.   

"죽음을 아는 자들에게는, 영원히 사라지고 있는 것들만큼 매혹적인 것이 없다.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고 있음으로써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 징후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것입니다. 언어로는 대상을 지시해야 하는데, 증거라고는 흔적이나 예감 뿐이니까요. 징후를 징후로 표현하기. 말하는(증언하는) 대신에 그리기-자기 스타일의 때를 묻히기. 완전함을 볼 수도, 설사 본다 하더라도 완전하게 표현할 수도 없는 '인간'이 파악한 징후(세계)와 그 징후의 모사(작품)를 함께 파악하기. 알레고리와 아이러니와 수많은 아이콘들... 

해석의 가능성은 열려 있고, 진중권은 그 중 하나를 들어 보였습니다. 나머지는 그의 바램대로 독자들의 몫입니다. 수수께끼같고 보편적인 해석이 불가능한 그림들은 거꾸로 감상자들에게 수많은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정답이 의미를 잃은 곳에서는 오로지 적극적인 태도만이 환영받습니다.

교양 수준의 미학을 일정 이상 섭렵하신 분이시면 낯설기보다는 익숙한 얘기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미학 오딧세이만 하더라도 그런 얘기죠. 그렇다면 지금 이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특히, 진중권의 책들 중에서는) 다루는 내용에 비해 쉽게 읽힌다는 겁니다. 큰 장점입니다. 매트릭스 밖의 세계를 구경할 수 있는 유사 빨간 약을 무차별 살포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소위 교양 미술서 중에서 인식론적인 문제를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책은,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벌써 달리기 시작한 이 책의 리뷰들에 '좀 더 써 주세요, 속편을 내 주세요'가 있다는 건 책을 파는 입장에서도 기쁜 일입니다. 추천할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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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미술관> 역시 감상자들에게 '다소 자의적이어도 좋으니 능동적인' 해석을 요구합니다. 지식은 감상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조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죠. 능동적으로 그림과 소통하지 못한다면 쌓아놓은 지식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죠. 그렇다면 그 균형을 어떻게 맞출까. 필요 불가결한 지식만을 담아 전달하면 어떨까? 정말 그게 가능할까? 

<지식의 미술관>은 욕심이 많은 책입니다.

앞선 <교수대 위의 까치>가 '해석의 다양성'을 직접 느끼도록 했다면, <지식의 미술관>은 미술 작품의 내외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미술품을 읽는 몇 가지의 코드/독법, 서양 미술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소재들과 그 기원, 미술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의 문제, 예술가의 자의식과 작품의 관계... 이러한 작품 내외적 요소는 모두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필요한 요소들이죠. <교수대 위의 까치>가 드넓은 강가에서 대어 한 마리를 낚은 다음 말없이 낚싯대를 독자들에게 넘겼다고 한다면, <지식의 미술관>은 낚시 포인트 분석에서 미끼와 낚을 고기들에 대한 고찰까지를 다룬 '친절한' 종합 낚시 가이드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죠.  


조르주 루스의 벽화-사진. 빨간 줄은 사진에 그은 게 아닌 실제 페인팅입니다. 왜상에 대한 좋은 예로 실려 있습니다.

'가이드북'이라고 하면 그저 쉬운 책이 아니라, 다루고 있는 분야의 모든 부분부분에 대해 다루어 보겠다는 야망 쯤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는 성공적이기만 하다면 미술사와 특정 미술 사조에 편향된 상식 쌓기보다 훨씬 유연하고 주체적인 감상에 도움이 되는 지식 전달입니다. 교양 미술의 통섭이라고 할까요. 책의 구성이 토픽을 이어 붙인 형식의 가벼운 구조임을 감안하면 의외로 좋은 성과입니다.

더욱이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깔끔하게 각각의 파트로 정리되어 보기에도 좋고, 각종 에피소드들을 많이 담고 있어 초심자가 읽기에도 재미나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지식의 미술관>은 확실히 욕심이 많은 책이고, 저자 특유의 친절함과 부드러움을 무기로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목표에 다다른 듯합니다(완전히 목표에 다다랐다면 전설이 되었겠죠). 위대한 걸작들의 이면에서 작은 빛을 발하는, 똑똑하고 부드러운 책입니다. 차기작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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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진>이라... 좋은 사랑 같은 거겠죠. 답을 내기 힘들거나, 아니면 너무 뻔한 답이 나올 위험이 있습니다. 성급하게 결론만 보자면 후자에 가깝습니다. 좋은 사진은 어떤 순간 자신을 끌어들인 장면을 그대로 찍는 것일 뿐이니까요. 쉬운 얘긴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더하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어렵다는 데 공감하신다면 말이죠. 

사진은 그 구조상 어쩌면 가장 순수한 시각 예술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프레임 안에 담으니까요. 작가가 보이는 것들을 가장 쉽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유혹이 많습니다. 카메라-메카닉에 대한 탐닉부터(카메라의 메커니즘 자체를 사랑하는 분들은 여기서는 사진 애호가와는 분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더욱 보기 좋은 것'에 대한 욕심까지, 사진을 만드는 작업 전반에 걸쳐 숱한 욕심에 휩싸이게 되죠. 더욱 보기 좋은 걸 추구한다면 좋은 게 아닌가? 물론 때로 그렇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진의 형식을 빌은 저급한 일러스트레이션이 탄생하는 경우가 많죠. 아마추어이든 프로이든간에 말입니다. 사진은 그 태생적인 순수함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공허해지거나 '하급 미술'로 전락하기 일쑤입니다. 

<좋은 사진>은 우리나라에서 기존에 많이 출간된 사진 잘 찍는 법과는 다른 이야기를 펼칩니다. 구도나 색감 등에 대한 기초적인 강의를 펼치면서도 '여기에 너무 집착하지 말 것'이라는 단서가 꼭 따라붙습니다. 앞서 <지식의 미술관>에서 했던 얘기와 비슷하지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알아야 하지만, 사진을 찍는 순간에까지 그 지식들이 머리를 채우고 있다면, 우리가 카메라에 담게 되는 것은 이 세계가 아니라 어설픈 지식의 잔해 뿐이니까요. 

아마추어들/일반 독자들이 가장 접하기 쉬운 시각 예술이 사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타인의 작품을 감상하기를 넘어 직접 자신이 이미지를 만드는 경우 '지식들을 버리기'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은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입견을 하나씩 버리는 것은 의외로 매우 힘겹고 지난한 과정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좋은 사진'을 위한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태도이니까요. 사랑다운 사랑이 좋은 사랑이라면, 사진다운 사진이 좋은 사진이겠죠. 사진의 기계적이고도 순수한 메커니즘에 어울리는 사고방식은 '그저 세계를 바라보기'입니다. 아마 완벽한 사진은 완벽한 음악처럼 '프레임에 담기지 않은 그 순간 자체'이겠지요. 그게 불가능하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최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서 나다운 때를 묻힌 사진'을 찍는 것이겠습니다.  

지식도 알려주고 동시에 그 모든 걸 나중에는 잊으라고 말하는 책. 쓰라린 첫사랑같은 이야기. <좋은 사진>은 사진 애호가 여러분께 많은 생각을 안겨드릴 겁니다. 

 


2009.8 / 서울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제 역사책 얘기 써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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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본 선생님의 작업 가운데 5장에서 10장의 사진들이 여전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 사진들이 날 미소 짓게 하고 뭔가를 상기시켰습니다. (중략) 이전에는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한 뭔가를 보게 된 것 같아요. 

-빙고! 바로 그거에요. 자, 그럼 다음 주에 이 책(사진집 The sadness of men을 말함)을 본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당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을 소통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 의미의 소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언어를 초월한 소통이지요. 

-완전히 언어를 초월합니다. 

언어적인 수단을 사용하면서요. 

-바로 그것입니다.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p.37-38

  

       

소리소문없는 스테디셀러 <필립 퍼키스의 사진 강의 노트>를 기억하시는지. 나이든 사진가 겸 교수가 추려놓은 사진의 정수는 삶에 대한 사색입니다. 이 생을,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담을 것. 판단하기 전에 움직일 것. 순전히 감탄하고, 그 감탄을 수집하는 데 몰두할 것. 원하는 대로 할 것. 망설이지 말 것. 그러나 서두르지도 말 것. 

신간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는 단독 저서로는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진집 The sadness of men을 구입해서 거기 있는 영어를 술술 읽을 수 있다면 이 책을 구입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릅니다. 그 책에 실려 있는 인터뷰와 평론가 서문이 책의 2/3니까요. 나머지는 국내 역자가 필립 퍼키스와 펼친 두 번째 인터뷰입니다. 게다가 분량은 90페이지가 안돼요. 얇습니다. 즉, 책의 객관적인 스펙으로 보자면 결코 '본전 생각 안나는' 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진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은 있는 분들이 읽으셔야 이해가 수월할 책입니다. 말하자면 진입 장벽이랄게 좀 있다고 봐야겠죠.

그런데도 왜 이 책을 추천할까.. 글쎄요. 얼마 전에 제가 구입한 사진집 The sadness of men이 단연코 올해 읽은 책 중에 최고일 게 분명하기 때문, 만은 아닌거 같아요. 이 얇은 책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진 예술 중에 '다큐멘터리 사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습니다. 기본기라고 할까요. 기본 마음가짐이라고 할까요. 여기에는 지성적-좌뇌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세계의 경이를 발견하고 그대로 채집하는 고독한 작업만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행복한 일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쓸쓸하거나 슬픈 일은 아닐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 그렇습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행복하고도 쓸쓸한 일입니다. 그 어떤 영광의 순간은 그토록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그 출처를 알 수 없지요. 영원히 말입니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은 수많은 목적론으로 가득한 사진 예술의 세계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중심이라고 할만한 개념이나 주제의식이 없어요. 그냥 '누가 이런 사진을 찍었구나'라고밖엔 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실존주의적이라고 해도 되겠죠. 영원히 해답은 찾을 수 없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래도 괜찮은 듯한 느낌. 네. 

저도 일년 넘게 카메라를 놨었어요. 이 책을 읽기 얼마 전부터 다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더 열심히 찍고 있어요. 그저 많은 준비와 더 좋은 장비, 수많은 선결조건따위 필요없이 작은 카메라 한 대로 세상을 담고 있는 이 사진가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점이 바로 이겁니다. 위대함은 타고난 행운이나 천재성이 없더라도 자기자신에게 솔직해질 때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을요. 그 모든 위대함들이 태양처럼 밝게 빛나진 않겠지만, 비록 그림자와 비슷한 색깔의 회색 빛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만의 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니, 자신의 빛과 비슷한 파동을 찾아 사진 속에 담기. 그저 담기.

그것이 50여 년 동안 단 두 권의 사진집을 낸 이 조심스러운 대가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일지 모릅니다.

무언가가 나를 통해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신이 음악을 작곡하고 베토벤은 단지 그것을 악보에 옮겨 적었을 뿐이라는, 신동설 같은 주장이 아닙니다. 내가 베토벤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그건 너무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나의 단계는 사진을 아주 잘 찍었을 때, 내가 그것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일을 수행하는 매체라고 느끼는 정도에요. 내 작업이 어떤 의미인지 나도 모르고 스스로 예술가라는 의식도 없어요. (중략) 내가 할 일은 실수로 그 일을 그르치지 않고 제대로 이뤄내도록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중략) 단지 "와! 저것 봐!" 하면서 셔터를 누를 뿐이거든요. 그럴 때, 난 그저 몸으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 내 임무는 그 일을 제대로 완수하는 것입니다. 

-p.76 

모쪼록 '알 수 없는 느낌'에 좀 더 익숙해지시기를. 그리고 슬픔이 우울함과 다르다는 그의 이야기를 언젠가 확인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행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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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10-04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기회가 되면 MD님이 찍은 사진 올려주세요. 보고싶네요. :)

외국소설/예술MD 2009-10-05 09:23   좋아요 0 | URL
아아 부끄럽네요..;; 네 언제 기회가 되면..^^;;
 

잔디밭에 누운 그녀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깊고 푸르러서, 일년 중에 구름이 가장 눈부신 날들이었다. 그녀는 곧 고개를 돌려 내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렸다. 내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오래된 청바지를 쓰다듬으면 조용한 소리가 나" 라고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백 퍼센트의 사랑 같은 것도 해 봤으면 좋겠어." 내 눈앞을 나비가 날아가고 나서 다시 말했다. "가져다줄래? 그런 거. 백 퍼센트." 나는 그녀의 감지 않은 머리카락들을, 어제의 샴푸 냄새와 달큰한 여자 냄새가 섞인, 아마 95퍼센트 이상일 그것들을 만지며 말했다. "아 그건, 마치 백 퍼센트의 서양 미술사 같은 거네."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잠들었다. 나비가 어깨 위에 앉았다. 가을답지 않게 따뜻한 오후 두 시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키 트리뷰트: 트랜지스터 데이트 클럽>의 단편 '어느 가을, 100퍼센트의 서양 미술사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중에서 

 

슬픈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세상에 백 퍼센트의 미술사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제임스 엘킨스의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는 '완벽한 미술사란 건 가능하긴 한걸까?' 라고 묻습니다. 제목부터가 저 유명한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에 대한 패러디죠. 

<서양 미술사>의 원제는 Story of Art입니다. 서양 미술의 역사가 아니라 모든 미술/예술의 역사라고 봐도 되겠죠. 그런데 제3세계와 소비에트 미술에 대한 언급이 극히 축소되어 있는 이 책을 자신있게 예술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서양 미술사>라고 번역한 국내 출판사의 센스와 겸양에 건배를.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의 원제는 Stories of Art. 정통파 미술사에서부터 '고전주의와 반고전주의의 영원한 반복' 이라는 과격한 해석까지, 인도산 미술사와 대하소설급 소비에트주의 미술사같은 듣보잡(!)들까지, 게다가 대학 교양 수업에서 과제로 출제된 '나만의 미술사 지도 그리기'까지 총출동하는 진기명기 미술사론. 그 끝없는 다양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아,) 내게는 나만의 미술사가 있고, 그리하여 이 세계의 모든 미술사는 타인의 취향의 숫자에 비례한다... 아니라구요? 어떤 법칙, 패턴, 혹은 불변의 사실 (알타미라의 벽화가 미술의 시초 아닌가?)이 존재하지 않냐구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의 후반부는 그 패턴을 탐색하는 일에 할애하고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읽어 보시길. 

그러니깐, 미술사야말로 각종 조합과 재조합의 수많은 화학반응을 관찰해야 하는 끝없는 현재 진행형 작업이라는 얘깁니다. 절대로 결정판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어요. 때문에 신선하거나 인상깊은 도전은 E.H.곰브리치의 거대한 책이 있더라도 언제나 언급해 주어야죠. 서론이 이렇게나 길다니, 네, 또 한 권의 기억할만한 미술사가 나와서요.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세 가지 지침을 정하고자 한다. 첫째, 도판을 보여줄 방법이 전혀 없을 때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다. 언급조차 되지 않는 작품 때문에 당황하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고..(중략).. 그림으로 보여줄 수 없는 중요한 형태나 현상을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과감히 다른 작품을 차용했다. 

둘째, 연대기적 순서를 따른다. 독자가 읽기에 편하도록 순서를 정하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늘 이 나라 저 나라를 넘나들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한 한 독자의 입장에서 편하게 읽힐 수 있도록 노력했다. (후략)

셋째 원칙은 이 책의 제목 '세상을 비추는 거울'에서 엿볼 수 있다. 필자는 미술사가 어떤 독립적인 미적 영역을 향해 열린 창이라기보다는 세계의 역사를 우리에게 되비춰주는 하나의 프레임이라고 생각한다..(중략).. 어떻게든지 사회적, 기술적, 정치적, 종교적 변화의 기록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 미술>의 저자 서문 중에서 

그 그림이 뭔지도 모르겠는데 보여주지도 않고 설명만 빼곡이 들어차 있는 '전문' 미술사에 혀를 내두른 적이 있는 당신을 위한 책, 입니다. 독자에 대한 배려까지 자신감의 한 축으로 삼는 이 야심찬 통합 미술사는 확실히 감칠맛이 나요. 고급 독자층이 아니라 중급 정도의 책/예술 애호가들을 위한 책이란 게 뚜렷합니다. 문체는 교재 느낌보다는 강의하는 느낌을, 즉 '읽으면서 바로 흡수할 수 있을 정도의 적절한 난이도와 흥취'를 추구하고 있어요. 비슷한 책들에 비하면 전문용어의 사용 빈도가 극히 낮은데, 신기하게도 언급하는 내용은 충실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잘 쓰여졌다는 얘기고, 미술 수필 같은 느낌이 나서 읽기도 좀 더 재밌어요. 일례로...

'인상파(Impressionism, 인상주의)'는..(중략)..캔버스에 그리기 전에 더 나은 색조를 얻기 위해 이전 화가들이 활용했던 유채 스케치가 이젠 그 자체로 작품이 되었다. 화가들은 더 이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 하지 않았다. 대신 망막에 비친 일시적인 자극의 패턴에 반응하고자 했다. 오브제가 없으니 선이 있을 리 없었다. 사실 드로잉 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모든 것은 색채로만 존재했고, 유동적인 물감으로만 형체를 갖추었다. 이 같은 새로운 접근법은 눈이 카메라와 유사한 점은 물론 다른 점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눈에 보이는 것, 즉 그림은 자연의 시적인 제안에 반응하는 감수성, 즉 마음의 문제였다. 더 나아가 생기 넘치고 환희에 떨리는 손을 가진 몸의 문제이기도 했다. 

모네는 그림을 '대기(大氣)'라고 말했다. 그의 손에서 자연은 안개와 연무, 파동을 통해 굴절된 햇빛이었다. 

-p.341에서 


끌로드 모네, <일출>

 

인상주의에 대한 두 문단 정도의 정의. 당대 사회와의 관계. 대표 화가들의 삶. 타이트하면서도 짜임새가 좋은 편이네요. 더욱이 서양 이외의 미술사에 대해서도 언급 빈도가 (상대적으로)높고, 각기 다른 문명의 미술들이 만나는 순간에 대한 묘사들도 인상적입니다. 특히 서양 미술과 접점이 있는 예술들이 대우를 받고 있네요. 비잔틴, 이집트, 에도-일본, 이슬람...

네 맞아요. 이 책도 한계가 있습니다. 김홍도도 신윤복도 안나와요. 제3세계까지 아우르겠다고 공언한 자신감에 비하면 여전히 '지역 분배'에 대한 공평함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시대별로 진행하는 미술사의 불가피한 단점(전 세계적으로 순간이동을 해대는)은 저자 자신도 서문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인정하는 바, 안정된 통일감 역시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도 가치있는 책이 아닐지. 저 정도의 단점은 세상 모든 미술사 책에서 다 뽑아낼 수 있거든요. 일종의 문명사이면서 역사와의 적극적인 교류를 추진하는 야심찬 미술사 책, 그럼에도 읽기에 어려움이 덜하고 종종 시적인 흥취와도 만날 수 있는 책. 이 정도면 기분 좋게 추천할 수 있겠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자들의 여정은, 수많은 세계-서양-미술사는, 그리고 엠디의 추천은 그 종착지-완결점에 도착할 수 없음으로 인해 영원히 계속될 것이에요. 모든 아름다움은 비극이래요. 콜. 

 

MD 마음대로 또다른 미술사 책들 4  

 

 

 

 

 

 

 

<서양미술사>...따로 소개하지 않아도 될 책인데요. 여기 올린 이유는.. 세일 중이거든요. 마일리지 쿠폰까지 주고 해서 되게 싸요. 일전에 25% 할인이라고 자랑했는데 더 할인하게 돼서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근데 지금보다 더 싸지진 않을거예요. 재고도 그렇게 많이 안남았어요. 

<이미지로 보는 서양미술사>는 입문용으로 추천요. 텍스트보다는 도판 위주의 구성인데다 분량도 부담이 없어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설명이 좀 더 상세한 세계 미술 화보라고 할까요. 그림 구경하는 맛이 쏠쏠하고, 설명도 눈높이를 낮추어서 청소년들이 읽어도 괜찮습니다. 각종 예술 사조와 기초 용어를 익히기에도 좋은 시도가 될 수 있겠네요. 

<art since 1900>은 진짜, 완전 빵빵하고 멋있는 책이죠. 연대기적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20세기만 다루는 그 특성상 훨씬 밀도가 높다보니 어떤 성과가 다음 시기의 언젠가에 다시 반영되고 변주되어서 (위에서 말씀드린 연대기적 구성의 태생적인 결함을 감안할 때) 훨씬 유기적이고 탄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데올로기적 다양성, 각종 ism에 대한 정신분석학과 사회분석학적 동시 접근 등 제1급의 꺼리들이 가득가득 들어차 있어요. 서양 인문학이 개발한 거의 모든 분석 도구를 만나보실 수 있는 박람회라고나 할까요. <세상을 비추는 거울, 미술>의 20세기 전용 업그레이드 버전이며, 말 그대로 20세기라는 잡종 욕망의 만화경을 파고들어가는 다각도의 집중력이 눈부십니다. 강추! 근데 비싸요. 대신에 크고 아름다워요.

<이콘과 아방가르드>는 미술사 책이라고만 하긴 좀 그렇지만요. 미술을 통해 살펴보는 세계관 탐험이라는 측면에서는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주류 서양 미술사에서 냉대받는 비(非) 로마-카톨릭 계열 미술들을 통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주류 서양 문화와는 또다른 세계와 만날 수 있어요. 이콘의 세계는 이데아의 허접한 모사에 불과한 천박한 지구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시스템(인과적 사고체계와 언어)을 포기하고 신비 그 자체를 지상에 받아들이는 성소이며, 그로 인해 '신 이하의 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신성이 발붙이게 되는 아름다운 모순을 체현하는 세계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art since 1990>이 인문학적 해부학이라면 이 책은(역시 상당한 인문학적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어떤 감동을 동반하는 장엄한 논픽션같은 느낌이 들어요. 왜 미술이 세상을 반영하는 거울인지 알려주는 또다른 뛰어난 성과. 역시 강추. 이 책도 좀 비싸지만... 대신 역시 크고 아름다워요. 

 

"E.H.곰브리치의 풀 네임을 말해봐." 그녀는 머리칼을 꼬아올리며 '이요우제프 하이든, 곰브리치'라고 말했다. "있잖아, 사실 그런 건 없는 거잖아. 백 퍼센트의 서양미술사 같은 건." 나는 대답 대신에 그녀의 귓볼에 키스했다. 괜찮아, 라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녀는 잔디를 뜯었다. 나는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의 첫 문장을 마음 속으로 읽었다.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더운 가을의 오후에,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100퍼센트의 서양 미술사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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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9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09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ine 2009-09-11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책들이 너무 많네요. 너무 많아서 괴롭습니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는데 읽고 싶은 책은 넘쳐나고... 한 500년 쯤 살았으면 좋겠어요.

외국소설/예술MD 2009-09-11 13:59   좋아요 0 | URL
정말 너무 많죠. 정말 천국이 거대한 도서관이 아니라면...
아니라면.. 거대한 나이트클럽이라거나 말입니다..

일년열두달 2009-09-27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콘과 아방가르드, 저도 그 "크고 아름다움"을 소장하고 싶지만 언제나 가격 앞에서 무너지고 마네요..

외국소설/예술MD 2009-09-28 18:34   좋아요 0 | URL
아아, 작은 것 두 개와 큰 것 하나는 결국 같은 것이더라..
 

만화MD님의 글 중에 호러물 특집이 있었죠. 즐겁게 읽다가 의아한 점이 있었습니다. 영화 <매드니스>였는데요.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별로 없다, 주위에는 없었다.. 라고 말씀을 하시더란 말입니다. 설마, 저건 엠비씨 주말의 명화에서도 해 준 유명한 영화인데 정말 사람들이 많이 안봤나? 게다가 주위 사람들도 거의 다 봤던데..(물론 대부분 제가 보자고 해서 같이 봤지만) 

해서, 나도 호러물 특집을 해볼만 하지 않을까?

예술 담당이니 영화도 내 담당일거야(유권해석).  

그래서 이번 신간브리핑은 신간이 별로 없는, 뜬금없는 


 내맘대로 공포영화 3선

입니다. 

바야흐로..라고 쓸 수 없게 되었군요. 이제 흘러가고 있는 여름은 공포물의 계절. 그러나 여름의 기세가 꺾였다고 공포영화에 관심을 끄시면 아니됩니다. 스산한 환절기 새벽에 보는 공포영화가 진짜 제맛이거든요. 끝내줍니다. 겨우 더위를 피해보자고, 아니면 소개팅한 여성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같은 불순한 목적의 감상과는 격이 달라요. 아주 강력하게 추천해 드리는 MD선정 공포물과 함께 쌀쌀한 가을을 준비하시길.

 

우선 가이드북.

           

 

<영화 속 오컬트 X-파일>은 온라인에서 각종 심령/오컬트 현상에 대해 기고하고 활동해 온 '멀더(요원 아님)' 이한우 씨의 공포영화 이야기입니다.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크리처나 귀신들의 유래와 전설 등을 쉽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구미호의 유래나 강시 영화의 계보도같은 재미있는 자료도 있고요. 무엇보다 수록된 영화들이 흥미로운데, 유명한 것들도 꽤 있지만 매니악한 영화들도 많아서 호러물의 팬이시라면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설마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가 나올 줄은 몰랐고, 미쉘 소아비 감독의 영화가 <아쿠아리스> 대신 <델라모테 델라모레>가 들어가 있을 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빨간 색 문장을 읽고 '아 그래? ㅋㅋ' 하신 분은 냉큼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나름대로 리스트업도 되고 좋네요.

<김시광의 공포 영화관>은 전에 소개해 드린 바가 있습니다. 앞서 소개드린 책에 비하면 좀 더 보편적인 영화들이 수록되어 있고, 베스트 감독이나 베스트 걸작선 같은 유용한 가이드도 들어 있어요. 각 영화 이야기에는 <오멘>의 자녀살해 욕망이라든가 하는 재미있는 인문학적 분석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아 이런 뜻도 있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을 수 있죠.  호러에 입문해볼까 하는 분들께 더 추천해 드립니다. 요즘 졸작이 많아서(하긴 늘 졸작이 많았죠) 아무거나 밟았다간 지뢰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은 현재 2008년 개정판이구요. 표지 때문에 소개해 드리는 건 아니고, 이 책에 은근히 장르물이 꽤 소개되어 있거든요. 겸사겸사 영화 리스트북 하나 갖춰볼까 생각하시면 요것도 괜찮습니다. 은근히 매니악한 영화가 많아서 정말 죽기 전에 이런 것도 봐야 하나 싶은 것도 있습니다만...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무작위 삼선, 순서는 무순입니다. 제목에는 베스트라고 썼지만 사실 좋아하는 것들은 너무 많으니까요. 베스트는 아닐지도. 

선정 기준은 그저 제가 좋아하는데 왠지 유명하지 않거나 저평가된 듯한 영화들

시놉시스는 링크된 dvd를 찍으시면 보실 수 있어요.

 

1. 미스트 (2007,프랭크 다라본트) 

            

(왼쪽부터 영화 DVD, 원작이 수록된 단편집,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그리고 시학을 쉽게 해설한 스토리작법 스테디셀러) 

'응?' 이라고 생각하실 분들은 두 부류일 겁니다. 이 영화는 유명하다. 혹은, 왜 이따구 영화가 추천일까(;;)... 논란의 영화죠.

 <미스트>의 특장점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B급 몬스터 크리처물에 대한 열광적인 애정. 프랭크 다라본트가 단순히 스티븐 킹의 영화 멘토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양반도 골수 SF-호러물 매니아입니다. 감독 데뷔 전에 각본에 참여한 유명한 영화는 바로 B급 크리처물의 걸작 <우주생명체 블롭>이죠. 헐리우드의 불문율 중 하나인 '어린이를 희생시키지 않는다'를 거침없이 깨부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 각본을 쓴 양반이니...

<-우주생명체 블롭 DVD

그런 의미에서 감독판 DVD에 수록된 흑백 버전은 정말 멋있습니다. B급 영화의 센스를 두 배 이상 돋보이게 해 줘요. 특히 괴물들의 경우 예산 문제로 특수효과가 약간 지지부진한 감이 있었는데, 흑백 버전에서는 훨씬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인상적인 점은 카메라워크의 재발견이었어요. 외부의 괴물들만큼이나 폐쇄 공간에 갇힌 인간 집단의 무서움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의 건조함을 유지하면서 갈등을 관찰하고만 있습니다. 좀 과장하면 마치 저예산 다큐멘터리같은 느낌이 듭니다. 본격 몬스터 영화에서 만나기 힘든 연출임에는 분명해요.

나머지 한 가지 장점은 바로 논란이 되고 있는 후반부입니다. 원작 단편(중편)의 열린 결말과는 다르게 스토리를 끝까지 밀어부치는데요. 원작자인 스티븐 킹은 만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히 우리나라의 관객들이 난리가 났었죠(미국에서의 평은 좋은 편입니다). 강력한 스포일러라서 힌트를 드릴 수는 없지만, '영웅과 비극'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적 요소가 대단히 잘 맞아 떨어집니다. <미스트>는 주로 반 주류를 지향하던 B급 몬스터물이 고전 극작의 정수를 흡수한 보기 드문 사례이며, 이러한 고전 비극적 요소가 단순히 설정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영화스러운 의문'을 던진다는 측면에서 매우 흥미롭죠. 비록 몇몇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약간 개연성을 잃긴 했지만, 오히려 그런 특징 때문에 마치 그리스 비극을 관람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까지 합니다. 묘한 경험이죠.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 캐릭터간의 갈등, 영웅과 반영웅적 요소의 비교 등 흥미로운 꺼리가 많이 준비되어 있는 영화입니다. 공포물의 팬이 아니더라도 기존의 영화 팬이시면 볼만한 여지가 충분해요. 좀 징그러운 장면이 있긴 하지만, 대신 근래 영화 사상 가장 손꼽히는 여성 악역도 만나보실 겸 찔러 보세요.

p.s: 재미있는 글을 읽었었는데, 씨네21에 연재된 진중권의 글 중에 바로 <미스트>에 대한 얘기가 있더군요. 제가 위에 말씀드린 점과 거의 정반대의 결론입니다. B급 디지털-몬스터 장르물과 그리스풍 비극 스토리 전개의 어색한 조합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시간나시면 같이 읽어보세요. 아참, 스포일러가 약간 있습니다.

<미스트>, 안개가 몰고 온 공포와 광기 -진중권 (씨네 21)  

 

2. 큐어 (1997, 구로사와 기요시) 

                               

                                   <큐어>                                    <스펠바운드>            현재 절판된 조이스 캐럴 오츠의 <좀비> 

 -개인적으로 싸이코 스릴러 중에 최고로 꼽는 작품입니다. 최면 연쇄살인에 관한 내용으로 출발했는데 어느새 싸이키델릭한 컴플렉스 심리물이 되었다가 아예 초현실적으로 점프했다가 결국 기괴하게 마무리되는 걸작(뭔가 써놓고 보니 전혀 걸작스럽지 않아)입니다. 한 장르 안에 묶이지 않고 같은 영화 내에서 수없이 변신하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특성을 생각하면 뭐 그리 놀라운 점은 아닙니다만.

<큐어>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한 정점입니다. 연출 측면에서는 특히 사운드가 압권이죠. 어디서 본 얘깁니다만, 큐어는 세상에서 세탁기 소리가 가장 무섭게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기괴한 음악이나 잡음 따위 쓰지 않고, 일상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증폭시키는 것만으로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센스가 일품이죠. 여기에 편집 리듬도 독특해서(마치 기타노 다케시를 방불케 합니다) 예기치 못한 순간의 점프 컷들이 특히 관객들의 호흡을 불규칙하게 끊어 놓습니다.

싸이코 스릴러라고 해서 범인과의 숨막히는 추격전 같은 걸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거의 모든 걸작 싸이코 스릴러가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써스펜스는 중요하지 않아요.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이뤄지는 건조한 살인 씬들에 이어 후반부의 초현실적인 음울함까지 매끄럽게 이어지는 불안함만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안함. 최면술사인 마미야의 최면 문구가 이 기묘한 울림의 영화를 그대로 말해줍니다. 관객들의 마음을 섬짓하게 하죠. 

너는 누구야. / (웃음) 제 이름은 XX. 학교 선생님이예요. / 아니, 너는 누구야. / (??)저는 선생님이고... 얼마 전에 결혼했어요. / 아니..바보야. 나는 묻고 있는거야. 너는 누구야. / ...나는... 

사다코는 비명을 지르게 하지만, 마미야는 침을 삼키게 합니다. 목구멍 깊숙히 넘어가는 침 덩어리의 촉감.

꼭! 사운드 올려놓고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참, 엔딩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imdb.com에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진 바 있으니 가서 체크해보시면 좋겠네요.  

+

비교해보실만한 작품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펠바운드>입니다. 기존의 히치콕 영화와는 다르게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자주 등장하고 정신분석학적인 내용으로 영화가 진행돼요. <현기증>을 떠올리는 분도 계시겠는데, 그보다 더 본격적(?)입니다. 재밌는 건 꿈 속의 장면들을 연출하기 위해서 히치콕이 화가 달리를 초청했다는 거죠. <안달루시아의 개>에서도 보여줬던 달리의 몽환적인 미감을 기대했을텐데, 예산 문제 때문에 완전히 구현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꿈 장면은 충분히 환상적이네요. 강박증과 정신질환에 관해서 아직도 볼만한 싸이코 스릴러물임에는 분명합니다. 패턴에 집착하는 미장센은 스탠리 큐브릭의 선조 같은 느낌도 있고요. 고전이지만 묘한 분위기를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어요. 다만...무섭지는 않습니다. -_-;;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이나 <피핑 톰>같은 싸이코물도 좋지만, 알라딘에 아이템 등록이 안돼있네요. 디비디 안나왔나. 

+

숨겨진 책도 한 권. 같이 소개드릴 책은 미국 문학계의 팔방미녀 슈퍼 히로인, 조이스 캐롤 오츠의 <좀비>인데요. 절판된지는 꽤 되었지만 헌책방에서 구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실제 연쇄 살인범이었던 제프리 다머의 사건을 바탕으로 쓴 1인칭 소설이죠. 연쇄살인범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특이한 시점이 인상적인데, 비슷한 소재의 소설들보다 훨씬 건조하고 스트레이트합니다. 변명도 없고 드라마도 없습니다. 진정한 싸이코 소설을 꼽으라면 단연 손가락에 꼽힐 괴작이죠. 브람 스토커 상을 수상한 조이스 캐롤 오츠의 책이니 퀄리티도 보장할만 합니다.

 

3. 소름 (2001, 윤종찬)  

             

가장 어둡고 끈질기고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한국 공포영화. 호러물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께 가장 추천해 드리고픈 영화이지만, 불운한 경우 심지어 졸아버릴 수도 있는 영화죠. 그러나 이 영화는 엔딩을 곱씹다보면 반전 아닌 반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름아닌 이런 질문. 

"아니, 귀신 영화라는데 귀신은 어디서 나와?"

말씀드리자면, 귀신은 당연히 영화 안에 있습니다. 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극장을 나오고 3분쯤 뒤에 입을 쩍..(사실 그만큼 엄청난 트릭같은 건 아닙니다. 제가 머리가 안좋을 뿐..).

예술영화 출신이었던 윤종찬 감독의 연출은 느리고 어둡습니다. 특별히 자극적인 장면 같은 것도 없어요. 그런데 중반 이후가 되면 등장인물들이 소용돌이에 휩쓸리듯이 스토리에 얽혀들어가고,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처럼 모든 일들이 계속 꼬여 갑니다. 뭔가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보이지 않아요. 느껴지지만 아무도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불길한 어떤 것.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 이상해 보이고, 귀신이 있다는 소문은 점점 커져갑니다. 기묘한 압박감. 이게 <소름>의 특징이고, 한국 공포영화 사상 전무후무한 컨셉트이기도 해요. 게다가 잘 만들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장화, 홍련>보다 강렬한 엔딩에 이르기까지 아주 군더더기 없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

<악마의 씨>는 피 한방울 보여주지 않고 심리적인 압박을 줄기차게 가하는 괴로운 영화입니다. 사실 이 계열에서 제일 유명한, 소위 심리 압박 호러물의 마스터피스죠(더불어 오컬트 호러물에서도 지존급 대우를 받고 있군요. 2관왕). 너무 유명한가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인지 유명세에 비해서는 보신 분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맨 처음 볼 때는 좀 의아했는데, 보고 또 볼수록 범상치않은 영화인 것 같습니다. 대낮 장면이 이렇게 많은 공포물도 드물지 않을까... 연출도 연출이지만 미아 패로우의 다크써클만으로도 포쓰가 넘치는 진짜 걸작.  

+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 역시 불길한 기운만 감지될 뿐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유령의 집 이야기입니다. 영화 <디 아워스>에 영감을 주기도 했죠. 이 책 역시 앞서 소개드린 두 영화처럼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건데' 라고 반문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사실 영국인을 비롯한 영미권 사람들이 아니면 이 책의 진가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저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그렇지만 히스테리컬하게 변해가는 가정교사와 종잡을 수 없는 불안에 떠는 아이(들)와의 상호작용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헨리 제임스 특유의 편집증적인 심리묘사가 볼만합니다. 이 책도 <악마의 씨>처럼 두번째 읽을 때 더 와닿더군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작품은 다시 접할 때 어떤 장치들을 발견하면서 더 깊이 빠져드나봅니다. 연극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현대 오페라로 만들어졌고 음반도 구할 수 있습니다.  

+

음악도 빠질 수 없죠. 몇 곡 잘못 들으면 호러 전문 작곡가로 오인될 법한 현대 작곡가 리게티의 현악 사중주 음반입니다. 보통 현악 사중주에서 주도권을 잡는 바이올린이 이 곡에서는 실체가 모호한 안개처럼 앞에 나섰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고, 첼로는 주위에 아랑곳없이 강박적으로 노래하는 남자 같아요(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의 주인공이 떠오르네요). 뭔가 중구난방인 것 같다가도 저 아래 어디에서 어두운 통일성이 느껴지는, 사람의 언어로 쓰여지지 않은 음모론 같은, 안개 짙은 낯설은 거리에서 이상한 노래만 계속 들려오는 듯한 기분. 멜로디도 기괴하고 음산하지만, 대체 어떤 점이 그렇게 무서운가를 말하라면 딱히 정확한 단어를 찾을 수 없는... 현대음악이 어렵게만 느껴지시는 분은 호러 느낌으로 한 번 시도해 보세요. ㅎ 

  

급종결. 이상입니다.

p.s: 사실은 10선 하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말도 안되는 길이라는 걸 예감하고는 포기...  

p.s2: 그래서 5선 하려고 했는데 이하 동문...  

p.s3: 이제 예술/역사 책 외에 다른 책 얘기도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p.s4: 위에 수많은 품절 DVD들. 인터넷 어딘가에는 물건이 꼭 있답니다. 웃돈 주는 거 말구요.

어쩄든 끝내기 전에 오늘도 서비스 서비스! 

분량상 리스트에서 빠진 영화 <REC>의 속편 트레일러입니다. 너무 재밌겠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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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공포영화 TOP10
    from mujige.com 2009-09-02 03:41 
    요즘 현대인들은 영화를 너무 많이 봐 도데체 몇편의 영화를 평생에 걸쳐 보는지 모를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몇년전까지는 국내 개봉되는 영화 대부분을 봤고 예전에는 수천장의 비디오 테이프들을 소장해 대형화면으로 개인극장을 꾸미기도 했다.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대부분의 영화들이 보고 나서는 바로 잊어 버리게 된다.나중에 분명 본 영화인데 내용도 생각안나고 제목도 생각안나는 영화들이 태반인데 반면, 그중 몇몇 영화들은 아주 어릴때 봤음에도 또렷히 기억나는..
 
 
gkgk 2009-08-2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메일로 가져갑니다. (--)(__)(--)(__)//

외국소설/예술MD 2009-08-31 09:57   좋아요 0 | URL
그저 영광입니다.

경브라더스 2009-08-28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화 속 오컬트> 읽었어요. 공포영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영화를 좋아해서 읽게 되었어요. 첫장부터 잘 나가더라고요. 공포에 대한 정보도 많지만 창작의 영감을 주는 내용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저자는 알면 두렵지 않은 것이 공포라고 하더만 이 책을 읽고 공포영화를 보니 더 세밀하게 느낄 수 있어서 좋네요, 잘 읽고 갑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8-31 09:59   좋아요 0 | URL
네, 방금 생각이 났는데요. 왜 많은 대중영화들 중에 유독 공포영화만 가이드북이 이렇게 나올까 말입니다. 언젠가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 싶습니다.

ddddd 2009-08-29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단하시군요 좋은정보 받아갑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8-31 09:59   좋아요 0 | URL
리플에는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

지나가다 2009-08-29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공포영화 관련인지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잠시 보고 갑니다.
안 그래도 얼마전 여름 끝물 맞이 명작(?)감상으로 '큐어'를 오랜만에 다시 보고 감탄했는데
그 영화를 알아봐주는 분을 이렇게 만나니 괜히 반갑네요.ㅋㅋ
소름 하고 악마의씨 도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나구요. (기억이 새록새록)
미스트는 아직 못봤는데 꼭 챙겨서 봐야될 것 같은...ㅋ.
영화 외에 소설이나 음악쪽은 잘 몰랐는데, 와 대단하신것 같아요.ㅎ 잘 보고 갑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8-31 10:00   좋아요 0 | URL
네 좀 더 연관성있는 콤보를 꾸려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쉽질 않더군요. 좀 더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다 싶기도 합니다.

미스트는 이쪽 팬이시면 필견입니다. ㅎㅎ

멀더 2009-09-01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화 속 오컬트 x파일 저자입니다.
변변치 않은 책을 이렇게 소개해 주심에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감사드리겠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여러번 나왔지만 그보다 더 가슴 깊이 감사함이 전해지는 듯 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하겠나이다 _(_ _)_

외국소설/예술MD 2009-09-01 16:41   좋아요 0 | URL
와.. 저자분께서 들러주시니 영광입니다. ^^
보통 신간브리핑이면 책 얘기를 좀 더 길게 썼을텐데, 이번에는 영화 중심이 되다보니 길게 소개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다음 책도 내 주시기 바래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melory 2009-09-30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매우 좋아하는 공포 영화인 <미스트> <소름> <로즈마리 악마의 씨>가 들어 있어 반가웠습니다. ^^

외국소설/예술MD 2009-09-30 16:51   좋아요 0 | URL
네, 잘 만든 영화이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하면 좀 심심한 결론인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