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너희에게 장미를 주겠으나, 빵은 알아서들 구하거라
컨템포러리는 고전적인 취향을 비웃거나 한 수 아래로 취급하지만, 고전적인 취향은 컨템포러리를 존경하거나 적어도 두려워한다는 얘기를 수긍하시나요. 다짜고짜 예술에 계급이 존재한다고 고발하면서 시작하는 이 당돌한 책은 자꾸 마음을 쓰리게 합니다. 예술의 감성적 측면 같은 건 애시당초 없습니다. 이 책은 예술의 '경제론'입니다.
네덜란드 정부가 칸딘스키의 그림 한 점을 샀을 돈이면 자국의 모든 화가 지망생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할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술가에게 자유를! 자본에서의 탈출을!? 그러나 예술가 지망생 여러분, 이 책은 여러분을 찬양고무하기 위해 태어난 책이 아닙니다. 거의, 그 반대입니다.
미국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예술가보다 소득수준이 낮은 직업군은 성직자 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우리는 예술이 종교와 손을 맞잡고 걸어감을 알 수 있다. -p.137 (이 서재의 머릿말로 쓸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중입니다)
예술의 경제학은 '일반 사회의 경제학' 못지 않게 치열하며, 어쩌면 훨씬 잔인합니다. 프로 스포츠보다 냉혹한 승자 독식 시장이고, 정부의 지원 시스템을 파악하기 위해 자기 스타일을 체크할 줄도 알아야 하며, 각국의 기성 예술가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어지간한 회사 면접은 찜쪄먹을 정도로 자기PR을 해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스타일보다는 전략적인 유연함을 보여야 하고, 심지어 '미안하지만 밟고 올라설'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이 세계의 예술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것은 예술이라는 장미의 이름,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이름 뿐...
승자 독식 체계의 로또급 확률에 현혹된 신입 예술가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이뤄진 공급 과잉의 세계. 이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빈곤 증가.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소수 권력집단의 카르텔화와 친 자본-권력화. 다소 과격한 주장이긴 하지만 일리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겪어보신 분들은 더 잘 알겠지요. 당신이 평범한 예술가 지망생이라면 이 책을 읽고 미래를 재구상하시기 바랍니다(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이 열성적인 예술가 지망생이라면 읽지 않기를 권합니다. 당신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독한 예술가 지망생이라면 이 책은 좋은 가이드가 될 겁니다.
이 글을 쓰는 저는 전자에 속했으며, 이 책을 소개하는 기분은 마치 참회록을 낭독하는 기분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장미만을 손에 쥐어준 신을 원망하지 말고 그 장미를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바랍니다.
We sing, We dance, We steal sunlight
지난 번에도 소개드린 바 있는 책이지요. 다시 한 번 왔습니다. 모든 뛰어난 (예술) 에세이가 그렇듯 이 책 역시 서두르지 않으며, 어떤 발견의 순간들을 공들여 모으고
생각이 펼쳐질 때, 말의 형상이 싹트고 꽃필 때, 우리 모두가 둘러앉아 이야기하고 이야기하며 시간이 우리를 이기도록 두었던 어두운 테이블 위로 말의 표현이 지친 꽃잎들처럼 쌓일 때와 같은 텅 빈 묵상의 시간들. 흔히 말하듯, 그냥 시간을 보내기. 다시 말해, 시간이 우리를 포획하도록 두기.
"말씀해 주시겠어요." 언젠가 나는 수녀원 독방에서 열아홉 살부터 (활기차게, 그래 보였다) 살아온 예순 살의 은둔 수녀님께 여쭈었다. "묵상적 삶의 정수는 무엇일까요?"
"한가한 시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도자기 같은 푸른 눈으로 명랑하게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세계-마티스가 그 일부를 드러내며
마티스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늙은 직조공이 말한 장식 예술의 정의에 찬동했다. "부귀보다 더 귀중하며, 모두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것." 가난하지만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지상에서는 아닐지언정, 최소한 "주머니 속 밀림"이 정교하게 프린트된 선명한 공장제 옷감이라는 천상의 영역에서는 유산 상속을 바랄 수 있었다. 마티스는 트위드 양복과 조끼로 부르주아처럼 차려입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부자들의 헤픈 허기가 이국적 아름다움을 물리도록 탐닉하는 것을 보았던 노동계급 소년이었고, 불필요한 쾌락의 힘을 인식했다. 가혹한 북부 지역의 사제가 압도하는 가톨릭교, 사다리를 조심스럽게 움켜잡고 올라가 아버지의 몫이었던 결핍에서 벗어나는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적 자기만족을 낳지 않았다. 이는 그를 포브Fauve로, 야수로 만들었다.
보앵의 옷감을 수요한 부자들의 사치스러운 미의식과 그 물건들을 공급한 진흙투성이 마을 노동자들의 자랑스러운 제작품 사이에서, 마티스는 혼자 피뢰침처럼 서서 두 세계를 연결했다. 아름다움은 사업이었다. 이는 먹을 것이었고 잘 곳이었다. 이렇게나 계급적인 세상에서, 아름다움이 일용 노동을 지배하고 식탁에 빵을 제공하는 세상에서, 가난은 자기에게 창조하도록 맡겨진 영광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다. 마티스는 절대 잊지 않았던 것 같다. 가난한 자의 허기는, 오래된 노동가요가 말하듯, 빵을 향한 것이라는 것을-그리고 장미도.
그리고, '마티스'가,
"구름 모양이 극도로 상쾌하다." 그가, 비행기 탑승을 마법 같이 느꼈던 19세기인이 말한다. "구름 기둥이 솟아오른 광대한 벌판이 길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더 가까이 가 이를 뚫고 침묵의 안개와 흩어진 빛 속으로 나아간다... 갑자기 우리는 찬란하고 애무하는 듯한 빛(찬란할 뿐 아니라 즐겁기도 한 빛) 속에 다시 한 번 있다."
경험 전체가 계시적이었다. "비행기 여행은," 그가 존재의 다른 상태에 대해 말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마음의 평화를 우리가 잊을 수도, 찾을 수도 있게 해준다. 놀라운 것은 부동감, 그리고 커다란 안도감이다. 우리가 추락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는 빛 속으로, 그의 영속적 주제로 올라갔던 것이다.
그리고 수피교의 춤, 피츠제럴드 시대의 예술과 권태, '발견'에 대한 여러가지 열망, 세심한 여행기적 성찰, 어떻게 예술이 열락의 문을 두드리는가, 들라크루아와 마티스, 앵그르와 마티스, 19-20세기의 위대한 여성 소설가들, 끝없는 오달리스크, 그리고 아라베스크가 등장합니다. 각 단락은 연결고리 없이 등장한 듯하지만 멋진 솜씨로 엮이게 됩니다. 마티스에 대한 스탕달 신드롬처럼 신열에 들떠 시작한 책. 그러나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면 <블루 아라베스크>는 오히려 인생과 세계에 대한 관찰기에 가깝습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이 책은 객관성을 담보하는 전기도 아니고 학술적인 분석서도 아닙니다. 심지어 마티스에 관한 일부는 그녀의 상상으로 채워져 있습니다(두 번째 인용을 보시면 느낌이 오시겠죠). 얼핏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그렇습니다. 마티스는 하나의 끈이고 거기 끼워진 보석들은 '세계'입니다. 리듬과 패턴과 햇빛 때문에 자신의 비밀을 노출시킨 세계요. 우리는 한 권의 책을 읽었으며, 이어 노래하고 춤추고 잠시나마 햇빛을 훔칠 것입니다. 너무 반짝반짝 눈이 부셔...
세계와 소통하기
<현대 타이포그래피-비판적 역사 에세이>. 이 멋진 표지는 누구의 것인고 하니, '슬기와 민'이군요. 출판사 스펙터프레스는 이 분들껍니다. 안그래도 비주류 역사책은 잘 안 나가는데 세상에 타이포그래피의 역사...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내용은 흥미롭습니다. 각종 폰트의 발명, 인쇄와 편집의 소소한 혁명들, 그리고 그 배후에서 벌어지는 미학 담론들과 정치론들의 국지전. 어떤 원형의 텍스트에 가장 알맞는 옷을 입히는 이 타이포그래피라는 작업, 예술적 감수성과 철저한 실용적 요소를 두루 갖춰야 하는 줄타기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 재밌습니다. 텍스트를 비주얼화한다는 건 소쉬르식으로 우기면 '사고의 시각화의 역사'나 다름없으니까요. 예술-인문쪽 좋아하시는 분들께 의외로 중요한 출발점을 시사할지도 모릅니다. (여담. 저는 산세리프체를 좋아하는데요. 이 폰트를 둘러싼 공방들을 읽자니 세상에 참 평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시사들도 무슨 죄다 투쟁의 역사...)
<약한 건축>은 건축을 주제로 한 비평서인데요. 앞의 책과 마찬가지로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합니다. (솔직히 건축에 관심없는 분들은 재미없을 확률이...높습니다. -_-) 주류 건축사들을 훑으면서 이것도 까이고 저것도 까입니다. 대부분의 새로운 시도가 자기 논리 안에서 매몰되는 비극적인 역사를 추적한 다음, 조심스레 제시되는 것은 '자의식이 희박하고 덜 구획지어진' 반쯤 열린 공간으로써의 건축물입니다. 동양 사상을 첨가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해도 될런지, 그렇다면 기존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 밟아온 '탈정치->몰정치'의 역사를 어떻게 피해갈지에 대해서는 아직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해봐야 안다는 거겠죠. 모든 정치적인 것들은 시지프스의 냄새를 풍깁니다.
너무 무거운 책들만 나왔나요... <세상을 껴안는 영화 읽기>는 쉽게,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는 '영화로 보는 인권 이야기'입니다. 아니나다를까 본문의 말투는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삼은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재밌게 배우는 인권 이야기'죠. 매 영화 소개가 끝날 때마다 질문꺼리가 있어서 논술 공부용으로도 괜찮을 듯합니다. 본문은 영화 스토리의 축약이 대부분이라 특별한 분석을 바라는 중급 이상 내공 소유자들은 실망하실 수 있습니다. 조숙한 초등학생부터 너무 공부에 몰두했던 대학 초년생들까지 권해 드립니다.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 도둑> 제목 예쁘죠. 터키에서 온 사진가 아리프 아쉬츠의 서울 탐색기입니다. 실제로 온 서울의 장미를 꺾어 '훔쳐서' 서울 내 각 지역별 장미들의 차이까지 꿰고 있는 이 남자. 좀 더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꽤 낯설은 모습이긴 합니다. 다만 좀 더 깊이 써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네요. 정치나 역사에 관한 이야기에서 어느 시점 이상으로 치고 들어가지 않는데요. 일부러 멈춘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책이 무거워지지 않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네요. 사진은 꽤 좋습니다. 간만에 만나는 스트리트 스냅이네요.
그리고 사진 + 공간
<낮은 데로 임한 사진>은 노장 최민식 선생님의 에세이-사진 모음입니다. 이 대책없는/망설임 없는 휴머니즘-다큐멘터리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들이 많습니다만, 어쨌거나 때로 그런 온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순간들이 있지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는 측면에서는 일가를 이룬 장인이며, 그 신념의 단단함과 함께 서민들의 삶을 바라본다는 것은 꽤 든든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슈타이켄의 가족사진전 같은 스타일을 싫어하시더라도 이 분의 사진은 일단 한 번 만나고 봅시다.
<랭포드의 사진 강의>는 바바라 런던의 <사진학 강의>의 대항마로 영국에서 내세우는 사진학 총론입니다. 사진의 간략한 미학적 특성에서 시작해 빛에 대한 고찰로 이어지고, 그 고찰이 기초적인 광학으로 이어지며, 기초 광학이 카메라 메커니즘으로, 그것이 다시 감재(필름)로 이어지고 또 암실 작업으로 이어집니다. 이어 디지털 작업이 등장하고 포트폴리오 제작에 대한 조언이 이어집니다. 네, 부드럽죠. 이런 유기적인 구성이 인상적입니다. 사진이 빛으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시스템이란 걸 배우는 것보다 개론에서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더불어 암실 작업의 중요성(콘트라스트는 직접 조율해보지 않으면 절대 감을 잡을 수 없다)을 비롯해서 저자의 직접적인 조언들도 눈에 띕니다. '강의'는 역시 이런 식이어야겠죠. 수록된 사진 퀄리티도 괜찮고, 초보에서 중급(?)까지 두루두루 참고로 삼을만한 책입니다.
<a monologue>는 솔직히 의외...였습니다. 배우 박상원 씨의 사진집인데요. 사진 퀄리티가 괜찮습니다. 아마추어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구요. 소위 '연예인 사진집'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주로 90년대 중후반 일본 감성파 사진 혹은 싸이월드 스타일의 사진이 대량 생산되는 유명 아마추어들과는 다른 담담한 분위기가 빛을 발합니다. 재밌는건 사진의 스타일이 고정되지 않고 이것저것 시도하고 있는 게 엿보인다는 건데요. 이렇게 조금씩 변화를 주는 시도도 좋아 보입니다. 비록 해외에서 이국적인 풍경을 담은 컷들이 많긴 하지만, 나도 할 수 있다! 라고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가슴에 불을 당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대가들의 책보다 유용하죠.
<공간에게 말을 걸다> 재밌었어요! 모든 시각 예술에 적용 가능한 '배경의 미학'이 가득합니다. 기둥과 천장, 복도와 회랑, 층간 구조의 노출 등등 각종 구조물들의 배치가 보는 사람에게 어떤 심리적 효과를 불러 일으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풍부한 예시가 장점인데요, 특히 매 꼭지마다 그 주제를 모형 세트로 촬영한 사진이 들어 있어서 이해하기 편해요. 주로 실제 건축물과 영화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예시를 보는 것도 재미납니다. 특히 몇몇 건물의 내부 스케치는 시적이기까지 해서 더욱 좋았어요. 읽는 것도 재미있고, 그야말로 모든 분야의 시각 예술에 적용해볼 수도 있는 즐거운 경험을 제공하는 책입니다. 미리보기를 통해서 살펴보시면 돼요.
-끝. 봄이네요. 꽃샘추위도 있고 그렇습니다. 부디 봄에 파묻히지 말고 그 위에 올라타세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참. 이 책을 놓칠 뻔했네요. 방대한 데이터북으로도, 정치와 대중예술의 관계학으로도, 그저 독립된 하나의 역사책으로도 손색이 없는 역작입니다. 이런 게 나오면 참 감사하다는 마음 들어요. 게다가 저는 심수봉을 정말 너무 좋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