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오스, 영광의 날들이여." 

-책 표지의 하단을 장식하고 있는 클래식 황금기의 명 지휘자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황금기는 이들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죠. 이 책은 고전음악의 황금기를 뒷받침한 조연들까지 불러들여 풍성한 이야기들을 제공합니다. 전쟁 중에 사용된 음파 기술로 레코딩의 한계를 끌어올린 '민주적 게이 공학자 천국' DECCA. 소니에 합병되고 카라얀과의 계약도 실패(갑자기 사망)하면서 무너져버린 CBS의 슬픈 최후. 그리고 조용히 세상을 떠나려고 한밤중에 묻힌 카라얀의 무덤에 찾아가 눈물을 흘린 단 한 명의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아, 낙소스 탄생에 얽힌 한국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어두운 먹구름이 동쪽에서 몰려왔다. 홍콩에서 음반 배급을 하고 있던 독일 출신의 한 무역업자가 한국에서 가정방문으로 판매할 대중적인 클래식 패키지를 주문받았다. CD 제작 단가가 떨어진 것을 확인한 클라우스 하이만은 파리에 살고 있던 한 슬로바키아인한테서 오케스트라 테이프를 서른 개 구입해 패키지를 주문한 사람에게 팔려고 음반으로 찍었는데, 이미 그는 망한 뒤였다. "그래서 나는 서른 명의 오케스트라 거장들이 지휘한 음반을 갖고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동유럽 오케스트라였기에 정가를 받고 팔 수도 없었죠. 연주는 그럭저럭 들을 만했지만요. 결국 염가 레이블로 발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낙소스(Naxos) 레이블이 시작된 겁니다." 

-p.178 

음반사들이 저자를 고소했던 점에 비추어, 이 이야기들이 전부 사실일거라는 보장은 아마 아무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사건과 실화급의 비화/야사만으로 생각하기에는 아깝습니다. 일단은 재미있기 때문이고, 틱틱거리는 말투로 시비를 거는 듯 보이다가도 클래식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못하는 저자의 귀여움(..)때문이기도 하겠죠. 그리고 그 무엇보다 클래식 음반 시장 몰락의 맥락을 잘 해설해주고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임에 분명하니까요. 그 몰락은 작곡자, 연주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에 편입된 음반사와 무능한 경영진, 그리고 '불운'들이 겹쳐 만들어낸 환상 교향곡이었던 거죠. 

클래식 음악 산업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 죽음의 결론이 부활일지, 변용일지, 영원한 침묵일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번성기에 이어 황혼에 접어든 이 세계를 사랑하는 애호가들께는 그 저무는 빛마저 어떤 감회를 선사해 드릴 겁니다. 배경음악은 이졸데의 죽음 어떻습니까? 저는 토스카니니로 할래요. (이 책에서 꼽은 명반은 푸르트벵글러입니다) 

아참, 불멸의 명반 100선과 최악의 음반 20선도 쏠쏠합니다. 비록 최악의 20선이 논쟁에 휘말릴 정도의 문제적 선정은 별로 없긴 하지만요. ㅎ 

 

        

단상, 다큐멘터리 사진가를 사랑한 '우리'는 누구인가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이 더욱 커지고 있는 이 시점에도 왜 '우리의'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여전히 변방을 맴돌고 있을까요. 소통의 방법이 문제인지, 일반 대중의 사진론과 그 틈이 너무 벌어진 것인지 (사실 인디영화도 비슷한 원인이겠죠. 워낭소리는 하나의 '현상'이구요) 성찰이 더 필요한 상황이긴 합니다만... 다양한/흥미로운 방법론으로 현대사의 각종 요소마다 흔적을 기록한 이 역사-미학적 결과물들이 왜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지 참 궁금해요. 역사적 유용성과 함께 다양한 미학적 논의가 가능한 풍부한 텍스트-이미지들인데 말이죠.

<우리가 사랑한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은 유명 다큐 사진가 14인의 소개, 인터뷰, 사진들 몇 점을 모아 놨습니다. 좀 짠한 장면은 '우리가 사랑한'이라는 제목 앞부분입니다. 우리는 누구일까요. 이 땅과 역사에 애착을 갖고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그 현장을 남긴 사진가 당사자들은 아니겠으며, 소리높여 외치고 분개하고 '읽지만' 그조차 내 취향에서 벗어나는 모험을 시도하기를 꺼리는 분들도 아니겠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적은 사람들입니다. 지금은요. 

예술을 한다는 건 힘든 일입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그 중에서도 더하죠.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의무와 미학적 성취를 위한 예술가의 고뇌를 동시에 짊어진 분들을 한 번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열 네 명의 선정 작가들은 거의 현재 한국 다큐사진의 드림팀이며(물론 국수용 씨나 에어리어 박 등등 에이스가 더 남아 있습니다), 단언하건대 이 책을 읽고 나면 역사,예술,인생,회한(!) 그 무엇이든 하나 이상은 건질 수 있을 겁니다. 내용이 치열해도 잘 정리해서 남 얘기 듣듯 하기에는 인터뷰만한 게 없거든요.  

p.s: 다큐멘터리와 포토저널리즘은 구분되어야겠죠. 포토저널리즘의 최전선은 <World Press Photo'08>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왼쪽 표지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네 종류의 썰

                

<벤야민 & 아도르노,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은 제목의 포스에 비하면(?) 어려운 책은 아닙니다. 대중문화를 분석하는 데 있어 두 가지의 상반된 입장을 놓고 서로 반대쪽에서 파들어가는 재미있는 교양 문화서예요. 기계복제시대에 접어들어 모더니즘적인 아우라 대신에 자기복제성-대중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미학을 만들 거리는 벤야민류(포스트모던한 선언?)의 희망적 분석, 그리고 '개성 몰살의 초강력 인민 마약'이 될 거라는 아도르노류 비관론이 정면 충돌합니다. 써놓고 보니 어려워 보이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디어 쪽에 관심있는 분은 부담없이 접하셔도 돼요. 인용 작품들에 대한 소개는 물론, 책의 내용을 잘 이해했는지 친절하게 질문까지 챕터별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미디어-사회분석. 이론 해설 및 비교. 난이도 중하. 

<스캔들 미술사>는 일종의 미시사 책입니다. 그림에 얽힌 사연을 따라가 보는거죠. 그림의 미학적 성취는 이 책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역사의 증거로 제시되지요. 렘브란트의 야경꾼은 그 자체로 끈질긴 보존과 복구의 살아있는 증거이고, 마네의 올랭피아는 천재를 알아보지 못한 시대의 폭력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기존의 미술사 책에서 다루지 않은 면모를 구경할 수 있어서 재밌습니다. 그림을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읽기, 그림을 분석하기, 그림으로 잡담하기에 이어 이런 미시사 책들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고급 킬링타임. 미시사. 에피소드 북. 난이도 하. 

<블루 아라베스크>는 섬세한 단상입니다. 만약 원서를 읽는다면 단어의 어감에도 무척 신경을 썼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잘 짜여진 수필이죠. 미술하고는 담 쌓고 살던 저자가 어느 순간 마주친 마티스의 작품 때문에 충격에 빠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보통 마티스에 대한 절절한 찬양같은 걸로 이어지게 마련인데, 이 책 역시 그런 길을 따라가는 듯 싶다가도 (인상깊을 정도로) 차분하게 한 겹 한 겹씩을 더 깔아 놓습니다. 그러다 어느새 우주와 질서에 대한 성찰에까지 다다르게 되죠(안심하세요. <시크릿>보다는 장 그르니에에 가깝습니다). 책 제목처럼, 아라베스크 무늬처럼 잘 짜여진 이 조용한 이야기는 좀 더 주목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따스하고 풍부한 몽상들은 늘 좀 더 주목받을 필요가 있긴 하지만요. 과감한(?) 파랑/검정의 2도 본문 인쇄 역시 싸이키델릭합니다. 예술 소재의 수필. 사색록. 난이도 중. 

<재즈 문화사>는 의외의 책입니다. 역사와 사회의 변화가 재즈를 어떻게 태동시키고 변화시켜 왔는지를 추적하고 있거든요. 아티스트와 명반 소개를 위주로 구성된 국내 재즈 책들을 생각해보면 독보적인 접근입니다. 종종 예술은 신화적인 후광에 파묻히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렇게 천재와 뮤즈들의 각축장처럼 소개하는 다른 책들과 함께 <재즈 문화사>를 읽으면 균형있는 접근이 되겠습니다. 불황과 전쟁과 대선과 정치적 성향이 재즈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얼핏 당연한 것 같지만, 그 '사실'들을 직접 읽고 저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지요. 책 자체의 퀄리티로만 보자면 특별한 성찰까지는 나아가지 않는 '보통의 역사서'로 볼 수 있겠죠. 그러나 지금의 우리에게는 존재 자체가 소중한 책입니다. 음악 사회학. 역사서. 난이도 중하. 

  

-봄은 오나보네요. 이것저것 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다음 이 시간까지 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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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3-03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적인 죽음>은 클래식 호사가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인듯합니다. 그런데 200페이지 책의 가격이 만만치 않군요. ..<블루 아라베스크> 도 관심이 가네요. ㄳ

외국소설/예술MD 2009-03-0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페이지는 오류네요. 목차를 합하면 500페이지가 넘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나저나 블루 아라베스크를 알아보시다니 역시 센스쟁이세요.

드팀전 2009-03-03 09:27   좋아요 0 | URL
아..얼결에 제가 하나 기여를 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