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글리츠가 그의 마지막 불장난에 열중하고 있을 때 오키프는 다시 병원으로 갔다. 새해 전날 밤을 축하하는 대신에 그녀는 가슴에 또 다른 멍울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번에도 그 멍울은 양성으로 판명되었지만, 그녀의 회복은 고통스럽고 더뎠다.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중에서
연민. 존중보다도 내게는 연민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불쌍하다. 그러나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핑크 룸, 푸른 얼굴> 중에서

 

두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최근 재조명받으며 주가를 올리고 있는 조지아 오키프의 전기가 있고요. 국내 여성주의 미술가 중 가장 높은 타점을 기록중인 윤석남 씨에 대해 여러 지인들이 써 모은 작가론도 있습니다. 두 작가의 공통점이라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예술 외적인 투쟁을 겸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구요. 그 방식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조지아 오키프는 여성성을 자의식에 결부시키는 편입니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예술가와 함께 살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심지어 그녀의 사후에조차 스티글리츠의 명성에 빌붙어 자신을 띄우려 한 악녀라는 이미지가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생전에는 전쟁에 가까운 내적 외적 싸움이었겠지요. 이 전기는 그녀의 작품과 예술관에 더불어 한 인간으로써, 여성 예술가로써 20세기를 살아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이었는지를 웅변하는 하나의 수난기입니다.

그녀의 그림을 보면 추상미술의 특성을 풍경이나 정물에 접목시켜 모호한 물질 공간으로 재생산하는 센스가 발군입니다. 모더니즘의 탈현실적 속성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꿈처럼 그려왔던 건 아니었을지, 여성의 성기를 닮은 그녀의 꽃들은 그 특유의 단순화를 통해 실재하지 않는=가닿을 수 없는 세계를 여는 열쇠로 변합니다. 그 단순화의 과정에서 떨궈낸 것들은 어쩌면 그녀를 그토록 질시하던 이 세계의 비루한 속성은 아니었을까요. 형태와 색채를 단순화시켜 어떤 본질적인 면모만 남기려는 그녀의 시도는 그 자신의 인생사에 비추어볼 때 투쟁의 일종으로 느껴집니다. 여성으로써 온전한 자아와 주체를 욕망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겠지요. 모더니즘 예술이 개인적이고 부르주아적이라는 지적은 잠시 미뤄두셔도 좋습니다. 조지아 오키프의 삶은 그녀의 그림 속에서 고함을 치고 있으니까요.

단순한 포맷으로 써내린 이 전기는 그래서 오히려 묵직하게 읽는 사람의 마음을 짓누릅니다. 결국 캔버스 밖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그래서 캔버스 속에서 어떤 이상향을 꿈꾸었던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난이도: 중, 책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만, 미국 모더니즘 예술계에 대한 기초 지식이 필요합니다. '특히' 예술을 사랑하는 여성분 모두에게 권해 드립니다. 버지니아 울프나 실비아 플라스의 팬들이 보셔도 괜찮을지도...> -MD 금주의 선택

 

<핑크 룸, 푸른 얼굴>: 이 책 속의 여성성은 좀 다릅니다. 더 넓은 바다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식만 챙기는 건 모성애가 아니고 이기심이라고, 이 세계에 대해서도 더 관심을 가지고 보듬을 줄 아는 게 모성애라고 얘기하는 이 작가의 작업들은 앞서 소개드린 조지아 오키프류의 자의식적 세계관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입니다. 민중미술 계열의 에너지가 약동하며, 추상성보다는 직접적인 메시지의 효과가 도드라집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예술이고, 무슨 뜻인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예술이지요.

1천 마리가 넘는 개들을 돌보는 할머니를 만나고 난 뒤 제작된 [1,025]를 사진으로 만났을 때는 놀랐습니다. 그 형식의 단순함과 시각적 효과(모든 개들이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만으로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었으니까요. 친절한 미술이되, 전혀 뻔하지 않았습니다. 강렬함이 있지만 그 힘은 공격적이라기보다는 쓰라림에 가깝지요. [1,025]에는 버려진 것들의 처연함과, 그 1천 마리가 넘는 처연함들을 조각하고 그려낸 작가의 힘 뿐입니다. 스틸 사진만 봤는데도 가슴이 쓰려서, 이건 뭐 무슨 주의니 어쩌니 하기 전에 목구멍이 좀 막혔더랬습니다.

에고, 이 하기 힘든, 그저 마음이 어떻다거나 가슴이 어떻다거나만 말할 수 있는 세계를 말로 풀라고 하면 참 어렵습니다. 설치 미술에서 소규모의 스펙터클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1,025]를 더 잘 감상하는 길일까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이 땅의 여자-어머니들을 불러내서 온 사방을 쓰다듬다가 종내는 그 자신을 끌어안는 작업들을 보고 있으면, 머리 이전에 가슴이 먼저 반응합니다. 모르겠어요. 세상 모든 아들들의 부채감 같은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상과 그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로운 아이디어들도 많습니다. [999]같은 경우가 그러한데요. 한 방에 999개의 작은 나무토막에 그려진 여자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고, 옆 방에는 다른 조각들과 별다를 게 없는 조각이 딱 하나 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완성을 뜻하는 1천에 딱 하나가 부족한 999, 그리고 그 완성을 담당할 '평범한' 나머지 한 조각. 이 땅의 민중사와 여성사를 엮었다가 다시 풀어내는데 이렇게 간명하면서도 재밌습니다. 미술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좋은 전범이 되겠죠.

책 본문은 그녀의 지인들이 그녀에 대해 쓴 여러 방식의 작가론 형식으로 이뤄집니다(윤석남 자신의 코멘트는 틈틈이 삽입되어 있어요). 에세이 같은 글도 있고, 미술사적으로 접근한 글도 있어서 다방면으로 작가의 세계를 살피기에 좋습니다. 예술이 어떻게 세계를 보듬으려 하는지, 왜 '고급 유희'가 아니라 진정성을 필요로 하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읽어 보세요. <난이도: 중하, 약간의 미술 지식이 필요합니다. '현재' 여성성의 사회적 의미에 주목하시는 분들께 특히 추천.>

 

-and, 편안하고 친절한 미술 이야기 3종세트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는 깔끔한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비슷한 성향의 음악과 미술을 짝을 이루어 설명하는데, 글도 부드럽고 설명도 친절하네요.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모차르트와 뒤피가 짝지워지는 식입니다. 각 작곡가의 특성과 화가의 특성이 잘 조응하고 있어요. 패러다임을 깨 버린 충격작들이라는 콤비도 있고, 같은 원작을 사용한 콤비도 있고, 개인적인 절망을 이겨낸 비장한 콤비도 있고, 패러디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콤비(P.D.Q 바흐는 진짜 웃겼습니다), 미니멀리즘 콤비 등등, 그 존재론적 특성이 매우 다른 두 분야의 예술을 잘 엮었네요. 클래식 오딧세이를 담당하신 진회숙 씨의 경력이 묻어나는 편안한 문화 산책입니다. 물론 유명하지 않은 화가들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들을 만나는 재미도 있어서 '중급 유저'들도 함께 즐기실 수 있어요. 아, 여기 소개된 곡들 중 대부분은 부록 CD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어요. 제가 사랑하는 레이블 NAXOS의 굳건한 연주로 함께 하시죠. ^^ <난이도:하, 잘 만들어진 대중 예술 입문서를 찾는 분께 제격!>

화가의 작품들에서 어떤 색깔의 패턴을 찾아내고, 그 색의 특성을 통해 만나보는 미술 이야기. <노란 누드>는 일전에 소개해드린 바 있는 <색깔이 속삭이는 그림>의 저자인 최영주 씨의 새 책입니다. 이번에도 색깔을 통해 그림들을 읽는 이야기예요.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부담없는 대중 예술서를 지향하면서도 나름 내용을 알차게 담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보너스 장점을 하나 꼽자면 소개된 작품들이 거진 근-현대 미술이라는 건데요. 레파토리(?)를 늘린다는 측면에서도 반갑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난이도:하, 색채학을 통해 만나는 쉽고 친절한 근현대 미술 입문>

<안녕하세요 세잔씨>네요. 세잔의 발자취를 따라간 답사기예요. 세잔의 그림과 그 그림의 배경이 된 실제 풍경(물론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을 찍은 사진들의 대비가 이 책의 최고 포인트입니다. 놀랍게도 그림을 기념하기 위해 '구식으로' 복원한 다리도 있구요, 관광객들을 위해 세잔이 그림을 그린 포인트에 이젤을 가져다놓은 센스쟁이 공무원(이겠죠?)들도 있습니다. 본문 내용은 세잔의 에피소드형 일대기와 그 장소들을 찾아간 미술 여행자의 소회가 얽혀 있는데요. 때로는 세잔이 느꼈던 것들을 함께 느끼면서, 때로는 흘러간 세월을 바라보면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주제가 분명하지 않다는 느낌이 있지만, 앞서 말씀드린 장점들과 함께 편안히 읽을 수 있는 미술 이야기인 것만큼은 분명해요. 잠시 산책을 떠난 기분이었습니다. <난이도:하, 세잔 팬 여러분, 혹은 마음이 팍팍해서 느즈막한 이야기와 함께 문화 산책을 떠나고 싶은 분들께>

 

-and

책 소개당 분량을 줄여야 되나.. 아니면 더 많은 책을 소개하려는 욕심을 줄여야 되나 고민입니다. 여러 방식을 생각해 보는데 확실히 결정을 못하겠어요. 혹시 아이디어가 있는 분들은 알려주시면 제가 뭐... 드릴 건 없네요. -_-;;; 더 좋은 소개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이 시간까지 꼭 행복하세요. 약속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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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 2008-12-24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더 많이 소개해주셔도 괜찮습니다 :-)
블로그 링크 위치가 바뀌어서 찾아오느라 살짝 헤맸네요..^^
현재의 분량과 권수 정도라면 적당하지만 더 늘리시면 기다리는 기쁨이 배가 되겠군요..ㅎㅎ
그보다도 이 책들을 다 읽으시는건가요...멋지십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8-12-26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소가 바뀌었었나요? 그랬던가(기억이..)
어쩄든 분량을 좀 더 늘여볼까요. 해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책을 전부 정독-완독하냐는 질문이시라면, 그건 아니예요.
챕터별로 이루어져 있거나 발췌독을 가능하게 하는 책들의 경우에는 일부러 랜덤하게 펼쳐서 읽기도 하고요.
(그 쪽이 오히려 책의 완성도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특히 MD들에게는 책의 포인트를 잡기 위해서 얼마만큼 읽어야 하는가를 빨리 알아채는 감각이 필요한 것 같아요.

(뭐 이렇게 전권 완독이 아님에도.. 이번처럼 조지아 오키프 전기라도 완독할라치면 아주 시간과의 싸움으로 변하죠. ㅎㅎ)

또치 2008-12-29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핑크룸 푸른 얼굴> 읽어봐야겠네요. 좋은 책 알려주셔서 감사!!

외국소설/예술MD 2008-12-30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괜찮은 책입니다. 대중적으로 어필을 못하는 컨셉이라 좀 안타까울 뿐이죠..
 

왜 사랑하지 않습니까?

왜 사랑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으면 여러 대답이 나옵니다. 그 대답들을 하나로 묶으면 좋아하고 싶지 않으니까가 됩니다. 왜 좋아하고 싶지 않냐고 물으면 또 여러 대답이 나옵니다. 그 대답들을 다시 하나로 묶으면 내가 원하지 않거나, 혹은 미워하기를 원하니까가 됩니다. 물론 이 질문을 뒤집어 왜 사랑합니까? 라고 물어도 같은 길을 걷게 되지요.

나는 어떤 존재이기에 세상의 다른 존재들에게 호불호를 가릴까요. 내 욕망은 그 호불호를 보증할만큼 정확하거나 옳거나 혹은 '좋은' 것일까요. 사회적인 생물이라는 인간이 만든 '민주주의'는 그 보완책이 될 수 있을까요? 미셸 우엘벡의 놀라운 소설 <소립자>가 떠오릅니다. 세계는 발전했지만, 사랑에 고뇌하고 고독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은 단 한 걸음도 발전하지 않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가 거기까지이며, 영원히, 영원히 그 고뇌를 재생산하면서 살 거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니까요.

이에 수많은 이론과 학문이 수천 년간 여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거대한 사변의 강줄기를 따라가면 발원지 즈음에서 꼭 이 분을 만나게 되죠. 부처님입니다. 불교라는 것이 나로부터 출발해 우주까지 다다른 뒤, 다시 그 우주를 지워내기까지의 과정이니까요.

아는 분들께는 사족에 불과할 뻔한 불교 소개를 부득이 한 이유가 있습니다(양해를...). 바로 오늘 소개해드릴 책이 불교를 막 탐구하려는 분들께 참 좋은 책이라서요.

 

                                <-- 요 독송집은 자매품

부처의 신화를 보지 말고 그의 말씀을 들으라 -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이번에 소개드릴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은 매우 뛰어난 입문서입니다. 우선 빠알리 경전 자체가 담백합니다. 붓다의 직계 제자들로부터 구전되어 왔기 때문에 상상력이 첨가될 여지가 없지요. 그래서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내용이 거의 배제되어 있습니다(매우 유명한 전설, 붓다가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다거나 하는 일화는 쓰여져 있지 않습니다. 요건 다른 본격 경전들도 그렇긴 하지만요). 대신에 수많은 대화와 사색의 흔적들이 기록되어 있지요. 불교 신화가 아닌 불교의 철학과 세계관을 배우기 위한 발원지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게다가 일아 스님의 요약은 '한 권으로 보는' 류의 다이제스트를 싫어하시는 분들조차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문장도 일반 산문처럼 평평하게 다져져 있고요. 쉬운 문장으로 경전을 풀어내기란 어렵기도 하거니와 꽤 위험한 시도입니다만, 일아 스님은 무심결에 흐르듯 쓴 것처럼 편안한 글을 선사합니다(그런데 사실은 2년 여를 두문불출하면서 매우 어렵게 써 내셨다고 하지요). 진입 장벽이 높은 원전은 커녕, 해설집조차 그 내용의 알참과 읽기 수월한 문장을 함께 갖춘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책의 소중함이 더합니다.

물론 있을 건 다 있습니다. 부처님의 인생, 팔정도나 사성제와 같은 세계 인식, 수행과 그에 따른 계율 등이 촘촘히 들어차 있어요. 입문서의 자격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성과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이 책은 여타 해설집들과는 달리 (각주를 제외하면) 일체의 첨언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경전 요약본이죠. 갑자기 인생 에세이처럼 흘러가는 수많은 초심자용 경전 해설집들에 비해 참 깔끔합니다. 이 깔끔함 또한 원래 텍스트가 담백한 빠알리 경전을 바탕으로 삼았기에 가능했으며, 그 경전을 일아 스님이 풀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참 행복한 만남입니다. 텍스트와 편역자의 콤비 플레이가 이렇게 죽이 잘 맞다니! 읽는 중에 기분이 다 좋아졌어요.

책 이야기를 더 해 봐야 상찬을 반복하는 일만 되지 싶어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겉핥기 불교 지식만 가진 저같은 범인은 무릎을 탁탁 치며 행복하게 읽었다는 말씀까지만 드릴께요. 발췌한 부분은 진리에 다다르기 위한 기본 태도를 말하는데, 흥미롭게도 똘레랑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것만 가지고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붓다의 말씀이구요. 왠지 앞에서 언급한 소설 <소립자>가 생각나서 저는 또 배시시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부분 함께 보시면서, 이 다음을 또 기약하겠습니다. 행복하세요. ^^

p.s:  <-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입니다. 관심가는 분은 함께 읽어주셔도 좋습니다.

...까빠티까라는 브라흐민 청년이 있었다. 그는 (중략)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고따마 존자님, 구전으로 내려온 고대 베다의 찬가와 경전에 대하여 브라흐민들은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를, '오직 이것만이 진리이다. 다른 것들은 다 가짜다.' 라고 합니다. 고따마 존자님은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중략) 브라흐민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라도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본다.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가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그러면 브라흐민의 스승 가운데서 7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스승의 스승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이것을 본다.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가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중략)

"이와 같이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 브라흐민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근거가 없음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고따마 존자님, 브라흐민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존경할 뿐만 아니라 구전으로써 존경합니다."

"어떤 것은 믿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비고, 공허하고, 거짓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잘 믿어지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고, 바른 것이기도 하지. 또한 어떤 것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비고 공허하고, 거짓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고, 바른 것이기도 하지. 그러므로 진리를 지키는[보호하는]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오직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가짜다.' 라고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진리를 보호하는 길-

"그러면 고따마 존자님, 어떻게 진리를 보호합니까? 우리는 고따마 존자님께 진리의 보호에 대하여 여쭙니다."

"바라드와자(까빠띠카의 가문 이름), 예를 들면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나의 믿음은 이와 같다.' 라고 말할 뿐 '나의 믿음만이 진리이고 다른 믿음은 전부 가짜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는 못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승을 받아들일 때 '나는 구전을 받아들인다.' 라고 말할 뿐 '구전만이 진짜이고 다른 것은 엉터리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는 못하였다.

 만일 어떤 견해를 찬성할 때 '나는 그 견해를 찬성한다.' 라고 말할 뿐 '그 견해만이 진리이고 다른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진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직 진리를 깨닫지는 못하였다."

p.260~262

이어 -진리를 깨닫는 길- ... 까지 하려니 너무 길어져서 생략합니다. 한 권 구입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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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4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사랑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으시면 저는 사랑을 모릅니다. 라고 대답해야 하는人 소립자를 읽고있습니다만. 진리를 깨닫게 되면 사랑이 있을까요.

외국소설/예술MD 2008-12-15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른다는 것은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아직 모르겠다고 대답해야겠지요. 사실 사랑을 논리게임화 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겠습니다. 그저 분명한 정신으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흉내내고 관능을 찬양하라

그리하여 우리가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알라.

   

-현존하는 최고의 고딕 비평가라 할 수 있는 캐서린 스푸너의 <다크 컬처>가 출간되었습니다! 보통 미술이나 문학, 드물게는 건축, 혹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를 언급할 때에 종종 그 부분만을 드러내는 고딕 문화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고딕의 발생(후기 낭만주의가 대세였던 독일이 아니라 영국이라니!)이 다분히 계급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었다면, 현재에 이르러서는 애시당초 본질이란 게 없었고 사라짐과 죽음에 대한 모사로 가득찬 그 자신의 특성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하위 문화로써 변화무쌍하게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네요. 흔히 고딕 문화를 얘기할 때 이용하는 인간의 원죄의식이라든지 심리학적 고찰 대신에 문화사적인 추적을 함께하는 것은 매우 신선하고 즐겁습니다.

죽음과 어두움을 직접적으로 지향한다는 이유로 주류 문화의 영원한 공격을 받는, 그러나 오히려 그 피학성으로 인해 생명력을 유지하고 때로 이용되기까지 하는 (자본주의는 모든 추상들마저 자신 속에 내재화시켜 환전 가능하도록 만든다) 고딕 문화의 허허실실스러움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본격 하이 퀄리티 문화 비평서입니다. 번역도 깔끔합니다. 강렬히 추천하는 바입니다. (난이도: 중상, 여러 예술 작품들이 등장하므로 배경지식을 다소 필요로 함) -MD 금주의 선택

 

-다빈치 출판사에서 나왔던 <팜므 파탈>이 개정판으로 버전업되어 다시 나왔습니다. 고딕 문화의 거대한 축이며, 동시에 근현대 예술 작품들의 어둠의 어머니인 팜므 파탈들에 대한 안내서입니다. 팜므 파탈의 여왕 살로메로부터 마릴린 먼로에 이르기까지, 허구의 인물들과 실존한 인물들이 그야말로 드림팀의 진형을 갖췄습니다.

주제 자체에 대한 거대한 규모의 탐색보다는, 팜므 파탈을 계열별로 구분한 뒤 각각의 특성에 대한 예술 작품을 탐색하고 그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례로 '롤리타' 꼭지에서는 소설 롤리타와 발튀스의 그림, 에곤 쉴레와 최규태의 그림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페도필리아(소아성애)적 특성에 대해 언급합니다. 소개를 하는 정도랄까요. 가이드북 정도라고 봐야겠기에 그 깊이에 아쉬움을 느끼는 분도 계시겠지만, 여성성과 파멸이라는 매혹적인 주제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었는가를 살펴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구성입니다. 교양 입문서 수준에서 친절하게 쓰여져서 읽기에도 편해요. (난이도: 중하, 독특한 주제의 문화 이야기를 접하고픈 분들, 혹은 여성성의 문화적 위력이 궁금한 분들께)

 

-드디어, 여왕님의 차례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뒤늦게! 완역 출간되었습니다. 그것도 오브리 비어즐리의 오리지널 일러스트와 함께요. 세례자 요한의 목숨을 앗아간 미녀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풍기던 정치 음모극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냄새를 풍깁니다. 등장인물들의 온갖 욕망이 얽혀 있고, 성욕은 비틀어진 채로 점점 고파가기만 합니다. 단순히 오스카 와일드가 20세기초 반문화의 기수였기 때문에 위악적인 설정을 사용한걸까요? 그건 아닌 듯합니다. 각종 설정을 통해 은연중에 사회/철학적인 메시지를 품고 있는 사드의 작품들에 비하면 <살로메>는 완전히 맹목적이고 파괴적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요한을 제외하면) 자신이 무엇무엇을 원한다는 얘기 이외에는 거의 꺼내지 않습니다. 극 전체가 하나의 에너지에 홀린 듯이 맹렬하게 파국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 중심에 완전한 욕망의 여왕인 살로메가 서 있습니다. 그녀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움직입니다. 요한을 죽인 이유도 성경에서처럼 어머니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애정을 거절한 요한을 죽여서라도 자기 곁에 두고 싶어서였죠. 저 유명한 씬, 죽은 요한의 시체 냄새를 맡으며 그의 잘린 목을 들고 키스하는 장면은 죽음과 관능이 스스럼없이 결합하는 위대한 순간입니다. 뒤늦은 여왕님의 행차를 그저 반길 뿐입니다. (난이도: 중, 어둠의 포쓰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들은 모두 일어나서 영접합시다. 단, 희곡 알레르기 환자는 제외함)

 

 

 ...그러고보니

   

-심지어(?) 데이빗 린치의 책도 나왔습니다.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은 원제에 비해서는 다소 모호한 제목이네요. '월척 낚기'라고 쓰여진 원제처럼 어떤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데이빗 린치만의 방식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딱 펼쳤을 때 우파니샤드가 나온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트윈 픽스를 만든 이 남자가 평정심과 고요함에 대해 끝없는 예찬을 펼치고 있어요. (작품의 기묘함과는 별개로) 그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고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예술가에게 보다 괜찮은 삶을 보장한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영화감독답게 실제 영화 제작과정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어서 해 봐요'라고 유혹합니다. 물론 그 외에도 영화 세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양념처럼 뿌려져 있어서 즐겁게 읽을 수 있네요. (난이도: 중하, 데이빗 린치의 영화들을 모르는 분들은 내내 심심할 수도 있습니다)

-고딕류 팝아트랄까.. 아니.. 일본 풍의 고스(goth) 쪽이 더 가깝겠네요. 마리 킴의 작품집 <EYEDOLL>입니다. 최근 국내 유명 팝아티스트들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기는 솔직히 좀 어려운데요. 앤디 워홀 류의 자기(자아)소비가 시나브로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변한 채 심드렁한 '작품'들만 양산되는 게 재미가 없거든요. 그래도 이 책을 브리핑하는 이유는, 낸시 랭 류와는 달리 마리 킴의 작업에는 싸이월드나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이 진하게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의 소비 문화로부터 출발한다는 팝아트의 원칙을 되새겨보면, 마리 킴의 스타일은 요시토모 나라 류의 일러스트와 싸이의 인기가 식지 않은 이 땅에 대한 적합한 소재 구성입니다. 아직 그 소재간의 결합은 어색한 편이지만, 이 노골적인 혼성문화(짬뽕) 작업은 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에, 모처럼 나온 작품집이기도 하구요. (난이도: ?, 팝아트 지망생, 한국 현대미술에 관심있는 분들, 혹은 싸이월드가 어떻게 아티스트의 자의식 구축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연구하는 미학도 및 사회학도)

-마지막으로... 퐁피두 센터 특별전 도록입니다. 좀 이상한 마무린가요? -_-;; 서양미술 거장전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른 전시회죠. 근-현대의 거장들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화가의 자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때로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강력해진 시대의 미술을 만난다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이죠. 다크 포쓰 특집인 이번 페이퍼에 맞는 테마 관람도 가능합니다. 19세기의 세기말적 감수성에 연이은 방종과 전쟁과 다시 방종과 전쟁을 통해 미술이 그 자신 속에 어떻게 그림자를 품게 되었는가를 추적해보는 것이죠. MD의 일일가이드를 원하는 분께서는 리플을 달아주세요. ㅋㅋ

 

 

// 에고, 원래 다뤄보려던 책들은 쓰질 못했네요. ㅎㅎ 다음주도 있고, 또 언제 기회가 있겠죠 뭐. 모처럼 주제를 관통하는 책들이 함께 나와서 재미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즐기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그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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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넘기셔도 좋을 고백

책을 잘 소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특히 인터넷 서점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가르치는 입장도 아니고, 사적인 공간도 아니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니까요. 눈 감고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균형을 어디서 잡을 수 있을까 늘 고민합니다. 저로서는 처음 해 보는 도전입니다.

그런데 늘 유혹에 휩싸입니다. 무게추를 조금만 더 진지한 쪽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죠. 고백하자면, 애시당초 고물상 옆 보물창고라는 컨셉트가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좋은 책들을 소개하는 자리였으니까, 거기에 쉽고 편한 책이 들어갈 확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MD로서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거죠. 그러나 그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줄 상대가 누구에서부터 누구까지인지 저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겨우 몇십 분 전, 막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무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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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책, <끝에서 시작되다>

12월 25일에 1쇄가 나왔다는, 실수 치고는 아름다운 책 말미의 서지정보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멍해졌습니다.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데 자랑할만한 특징이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책이 괜찮았는데 왜 괜찮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묘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마존에서 입소문을 타고 종교분야 1위(11/26 현재 리뷰 209개)를 석권했다거나 하는 얘기는 홍보 문구로는 몰라도 제가 추천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문구는 아닙니다. 드라마틱한 실화라는 점도 진부한 자랑입니다. 스토리는 특별한 반전 없이 평탄하게 펼쳐지며, 두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얘기하는 구조 역시 특출난 것은 아닙니다.

눈에 띄는 특징이 보이지 않는 매력. 그렇다면 그 매력은 평범함이겠죠. 그제서야 미스테리가 풀립니다. 이 책의 매력은 난 체하지 않는 무덤덤함에 있습니다. 온갖 풍파를 겪은 두 주인공은 전형적인 헐리우드 휴먼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그들 특유의 무덤덤함을 통해 색깔을 불어넣습니다.

"아니, 그냥 론이라고 부르세요."

"아니에요, 론 씨."

댄버는 단호하게 '씨'를 붙이더니, "부인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라고 물었다.

"데보라예요."

"데보라 부인." 댄버는 다정하게 덧붙였다. "난 부인을 천사라고 생각합니다."         -p.172

마치 하드보일드 소설의 한 장면같은 이 무뚝뚝한 대화는 노숙자로 살아온 흑인과 자수성가한 중년 백인 남성이 만난지 몇 달만에 처음으로 나눈 대화입니다. 시종일관 이 둘의 대화는 간단명료하게 핵심을 건드리는 식으로만 진행됩니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도 없고, 신에 대한 절절한 찬양도 없습니다. 그 찬양의 역할은 백인 남자 론의 아내인 데보라의 몫이지만, 그녀는 이 이야기의 화자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책이 끝날 때까지 두 남자는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죽음이 가져온 비극조차 신의 뜻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담겨 있지만, 왜 항상 비극이 은총의 씨앗이 되어야 하는지는 결국 알지 못합니다. 현명하게도 이 책은 여기에서 멈춥니다. 그들은 자신이 겪은 것 이외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니까요. 이 책을 쓴 시점은 (당연히) 책에 쓰여진 모든 사건이 끝난 뒤지만, 직접 글을 쓴 두 주인공은 거기다 가타부타 해설을 덧붙이지 않고 매 순간의 자기자신을 충실히 복기하는 데서 그칩니다. 그들은 겸손합니다. 신이 무엇이고 깨달음이란 무엇인지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우정으로 시련을 극복했고 감사를 통해 기뻐했을 뿐입니다.

론 홀과 댄버 무어가 직접 쓴 <끝에서 시작되다>는 이러한 단순함으로 인해 빛을 발합니다. 놀라운 우정과 신앙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자신들이 절대 다수의 평신도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우리 곁의 사람들임을 고백합니다. 무리하게 신을 직접 끌어들여 운명의 깨달음을 지도 편달하려는 보통의 신앙 간증서들에 비해 이 책이 더욱 와닿는 이유입니다.  함부로 말을 던지지 않는 두 남자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전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라고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평신도들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을 표현한 게 아닐까요.

C.S.루이스나 존.R.스토트 같은 인물들의 저작은 찬연히 빛나는 별과 같지만, 그 책들은 그야말로 하늘 위의 별처럼 어떤 방향을 지시해주는 길잡이같은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평신도들의 곁에서 따뜻함을 발하는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의 이름을 쉽게 빌어오지 않고, 무지한 자기자신으로부터 저 위를 향하려는 무뚝뚝한 의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이 책에 달린 아마존의 리뷰들을 떠올립니다. 209개, 평범한 사람들이 달아놓은 그 리뷰들이야말로 이 책이 누구의 가슴과 믿음을 위한 책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듯합니다. <끝에서 시작되다>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겸손해지는 것, 그리고 완성 없이 영원히 걸어갈 뿐이라는 신앙인으로서의 자각을 안겨주는,

한 편의 소중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p.s: 이 책에 인용된 책 중에 C.S.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이 있습니다. 아내를 잃은 그가 종교와 아픔에 대해 써내려간 사색록이죠. 논리정연한 루이스의 다른 책들에 비해 절절한 고통과의 사투에 가까운 <헤아려 본 슬픔>이 <끝에서 시작되다>에 인용된 것은 단지 그 내용의 유사함 때문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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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의 왕 vs 기타의 신

 

제게 슈베르트는 피아노 소나타 D.960과 미완성 교향곡으로 기억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슈만이 천상의 길이라고 했던, 마치 영원할 듯한 반복의 선율 말이죠. 특히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있노라면 새하얀 벽의 미로를 한참이나 걸어가는 듯합니다. 돌다 보면 아까 거기인 듯하고, 다시 먼 길을 떠났는데 문득 여기가 아까 거기가 아닌가 싶은,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하고, 이렇게 이 미로 속에서 영원히 헤메다 죽을지라도 불행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 천장 없이 트인 미로의 벽 위로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날씨는 화창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무간지옥이 또 있을까요. 영원히 홀로- 그러나 결코 슬프다고만은 할 수 없는 애잔함이 가득합니다. 제게 슈베르트는 그런 이미지였습니다. 긴 시간과 미묘한 반복이 안겨주는 담담한 절망. 낭만주의가 피워올린 소박한 모양의, 그래서 더욱 희귀하고 아름다운 꽃.

그런데 "국내 최강의 아마추어 말러 전문가" 김문경 씨의 슈베르트 이야기 <천상의 방랑자>는 또 다른 그의 매력을 들추고 있습니다. 아참, 그는 가곡의 왕이었지! 가사와 악상이 착착 맞아 들어가고, 짧은 러닝타임 속에서 변화무쌍한 분위기 전환을 꾀하죠. 고딕 호러 분위기의 섬짓한 노래는 물론, 로시니를 패러디한 유쾌한 노래도 있습니다. 저 유명한 가곡 '보리수'가 [겨울 나그네] 중에서 가장 역설적인 절망의 노래(자살 유혹에 대한 묘사라는)라는 흥미로운 이야기,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스토리와 함께 읽어가는 미뇽과 하프 켜는 할아범 연가곡도 슈베르트의 가곡에 대해 한층 친근함을 가져다 줍니다. 아마도 저자가 직접 번역했을 가사 번역도 상쾌하고 젊습니다. "그런거야? 그런거야?" 하고 친구에게 장난스럽게 따져묻는 자는.. 슈베르트가 아니라 포로리...네. 여튼.

더욱 좋은 점은, 음반으로 듣기 쉽지 않은 곡들까지 죄다 추려서 이 책의 보너스 CD로 제공된다는 사실입니다. 직접 곡을 들으며 읽어가는 책만큼 친절한 구성이 또 있겠어요? 왕비를 죽이고 그 자신도 영영 물가로 돌아오지 않는 '난장이'를 들으면 정말 저 멀리 사라져가는 난장이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이 슈베르트는 제가 알던 슈베르트가 아니었어요. 이건 마치 폴 매카트니와 리치 블랙모어의 퓨전... 진짜로요! ;;

'조사 보고서'에 가까운 김문경 씨의 대표작(?) 말러 3부작에 비하면 저자의 목소리가 많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농담은 별로 재미가 없어요(죄송). 그렇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생각할 수 있겠네요. 약간 더듬더듬하는 저자의 유머가 꼭 슈베르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재밌긴 합니다(설마 이걸 노린건?!). 표지가 더 예뻤다면 평이 훨씬 좋지 않았을까요... 그게 좀 안타까워요. <난이도: 중하, 슈베르트가 왜 천재인지를 알고 싶은 분들, 클래식은 점잖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또는 가곡이나 클래식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확인하고 싶은 분들께>

 

<에릭 클랩튼>은 에릭 클랩튼의 자서전입니다. 네, 에릭 클랩튼이 직접 썼습니다. 영미권에서는 발간 당시 대단한 화제가 되었었죠. 우리나라로 치면 아마 서태지 자서전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어쨌든. 기타리스트가 직접 쓴 글이다보니 굉장한 말빨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가정사의 반전!)은 책 초반부에 나와 버리고, 이후는 평탄한(?) 연대기입니다. 이러저러하다보니 '에릭 클랩튼은 신이다'라는 문구가 런던에 나붙고, 비틀즈랑 재밌게 놀았고, 누가 자기를 보고 싶다고 해서 만났더니 지미 헨드릭스였고... 그런 대단한 이야기들을 하나도 대단하지 않은 듯이 써 놨어요. 그야말로 천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냥 기타를 치고 싶었을 뿐이고... 뭐 이렇습니다. 기타를 치고 블루스를 하고 싶었던 한 소년이 어느새 기타리스트 버전의 지구방위대가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죠.

물론 영미권의 천재들을 놓아주지 않는 마약 이야기는 역시 꼭 끼어 있으며(이것도 어쩌다보니 헤어나올 수 없었다는), 수많은 비틀즈 팬들과 등을 돌리게끔 만든 조지 해리슨과의 마눌님 쟁탈전도(이것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만사가 새옹지마인데, 그래도 내 곁에는 기타가 남았다... 재능과 영혼을 동시에 쏟아버린 천재가 남길 말 치고는 상당히 평범해 보이지만, 그 무덤덤함과 소박함이 오히려 와닿습니다. 그는 화려한 기타 플레이어는 아니었으니까요. 기타의 신, 슬로우 핸드의 명성에 걸맞는 차분한 분위기가 참 어울립니다. 마음에 들었어요. 게다가 굉장한(제가 너무 좋아하는) 기타리스트 윤병주 씨의 감수를 통해서 음악적 고증이 탄탄합니다. 매니아 분들도 마음 편히 즐기셔도 된답니다. <난이도: 중, 60년대부터의 황금기 Rock을 사랑하시는 분들께, 경고: 난이도가 중급인 이유. 록 음악의 역사에 전혀 무지하다면 대체 뭔 소린가 하다가 책이 끝날 수 있습니다>

 

화려한 그림 이야기들

      

<그림이 그녀에게>는 미술 '에세이'입니다. 서른을 넘겨가는 여자-직장인의 이런저런 소회를 걸작 그림들에 엮어 풀어갑니다. 미술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동갑내기 이말삼초 여성분들의 마음을 두드리죠. 예쁘고 인상적인 그림들을 고른 솜씨가 좋고, 컬러도 잘 뽑힌 편입니다. 공부한다기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그림 견문도 넓힐 겸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우아해 보이는 문화담당 기자 생활이란 사실 물 아래에서 쉼없이 첨벙거리는 백조같은 삶이라는 것(뭐 도서MD도 그렇습니다), 결국 청춘을 슬슬 떠나보내는 나이에 이른 우리네 친구 중 한 명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네요. <난이도:하, 고급 타임킬링 책을 찾는 분들, 또는 이유없는 우울함에 시달리는 이말삼초의 여성 직장인들께>

<내 영혼의 그림 여행>은 좀 더 본격적인 에세이입니다. 사적인 이야기와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겹쳐 있어요. 특히 우리나라의 미술(아기공룡 둘리도 나옵니다!) 이야기에 접어들면 질곡의 근현대사와 얽히고 설켜 때로 좌절하고 때로 절망하는 인간 군상들과 마주치게 되죠. 이 수많은 동서양의 그림들 속에서 저자가 찾아낸 것은 어떻게든 전진하려는 인간의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무너지지 않게 꼭 붙잡는 여러가지의 사랑입니다. 정지원 시인의 글은 차분해서 좀처럼 솟아오르지 않고, 아마도 역사 이전부터 존재했을 쓰라린 그림자들을 조용히 쓰다듬고만 있습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 절망적인 현실에 맞딱드린 젊은 혁명가와 [빨래하는 사람]에서 엄마 손을 꼭 잡은 예닐곱 살짜리 꼬마는 이 책 안에서 서로를 보듬고 조응합니다.

게다가 골라낸 그림도 인상적인데요, 민중 화가들의 그림들이 종종 섞여 있어서 독특한 반향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저도 신순남 화백의 [달은 우리의 푸른 조국 2]를 펼쳐놓고 한참을 바라봤네요. 글과 그림과 주제가 잘 엮여 들어간 아름다운 책입니다. 거창한 역사 이전의, 마음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이야기 그림책은 만나기가 참 어렵지요. <난이도:중하, 미술과 에세이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에 대한 애호가들. 또는 아픈 역사와 고뇌하는 개인이란 무엇이었던가를 아직 기억하고 계시거나 느끼고 싶으신 분들께>    -예술MD 금주의 선택-

미술 에세이가 '머리에 쌓는 게 좀 모자라'다고 느끼시는 분들은 요걸로 하시죠. <색깔이 속삭이는 그림>입니다. 세계 명화들을 이용해서 풀어가는 색채론 전반이예요. 기본적인 색 이론에서 시작해서 색채심리학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교양 지식을 함께하실 수 있어요. 로트렉의 그림에서 노랑과 파랑의 색온도 비교를,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푸른 색 그림자의 신비를, 마케의 그림에서 녹색과 적색의 대비가 주는 긴장감을 함께 읽어갑니다. 각 챕터마다 색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 다량의 지식 섭취가 가능한데요. 특히 좋은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쉽다는 겁니다. 근래 만난 미술 교양서 중에 대중들의 눈높이를 잘 맞춤과 동시에 성공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몇 안되는 사례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난이도:중하, 미술을 조~금 더 깊게 알고 싶은 분들, 에세이 말고 조~금 더 본격적인 미술 이야기를 접하고픈 분들께>

그리고, <서양미술거장전>입니다. 렘브란트 전으로 알려져 있죠. 사실 렘브란트의 그림은 딱 한 점에 에칭 십여 점 정도입니다만, 어쨌든 다른 그림들도 상당히 볼만한 게 많습니다. 이 책은 서양미술거장전의 도록인데요.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예습하면 나쁠 게 없다는 건 고대로부터의 진리죠. 가족, 연인, 친구들에게 1일 큐레이터가 되어 주세요. ^^ 아참, 이벤트 기간에는 이 책을 구입하시면 전시회 티켓이 1매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값 빼면 책값이...싸죠...;; <난이도:하, 미술관 갈 때 예습하면 더 좋다는 걸 깨달은 앞서가는 분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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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벌써 이렇게 써 버렸네요. 아직 책들은 남았는디.. 아쉽게도 차회 예고만 남겨두고 다음을 기약합니다. 다음에는 우리네 전통 춤판의 뒷 이야기 <춤과 그들>, 초보를 위해 만화로까지 만들어진 DSLR 입문서 <디카툰>, 조선 후기 인물화와 카메라 옵스쿠라의 관계라는 흥미로운 주제의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 한국과 이탈리아 비평가들이 반반씩 담긴 한국영화 감독론 <한국의 영화감독 7인을 말하다>가 이미 대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또 좋은 책들이 쏟아질 터이니... 네. 행복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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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서비스! 에필로그. <내 영혼의 그림 여행> 중에서.

둘리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버려지거나 쓸쓸한 처지이다. 둘리는 영희와 철수가 자신을 기쁘게 반겨주었듯이 도우너와 또치, 옆집 사는 가수 지망생 마이콜까지 자신의 식구로 받아들인다. 혈족 중심의 가족이 아닌 열린 가족 관계의 형성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둘리의 생각은 길동 씨와 마찰을 빚는다. 그러나 길동 씨 역시 이 불청객들을 통해 어른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착한 본성으로 회귀한다. 이 집에서는 아기 희동이부터 어른 길동 씨까지 모두 평등하다. 심지어 도우너는 길동 씨를 애완동물이라고 부를 만큼 가부장적 권위가 통하지 않는 집이다....(중략)...고모집에 맡겨진 아기 희동이나 마이콜처럼 보호받을 수 없는 존재들은 계속 행복한 어느 가정의 주변을 겉돌 뿐이다. 그 집들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러나 둘리의 초능력은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도록 마법을 건다. 호이호이”는 고대부터 금기된 주문이다. “호이호이”를 외치면 위계질서는 사라지고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리는 이런 권위지향적인 사회를 부정하며 서로에게 따뜻한 고향이 되어주는 능력을 가르쳐 준다.          
- 본문 215~217쪽 중에서 (붉은 색 강조는 제가 그냥 넣은 겁니다)

호이호이!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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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방글 2008-11-17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천상의 방랑자는 표지가 좀(...)


외국소설/예술MD 2008-11-19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그게 좀(...)

안티크 2008-12-17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록은 언제나 방문기록의 증거물일뿐;
<이유없는 우울함에 시달리는 이말삼초의 여성 직장인들께> 추천의 글을 보고 그림이 그녀에게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와버리는군요; ^^

외국소설/예술MD 2008-12-18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직장인분들께 동지애와 더불어 힘내시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저도 힘을 좀 받긴 해야겠구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