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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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그리고 겨울,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장소로 여행을 떠난다. 세상이 좁아서일까? 손꼽아 기다리던 자유건만, 도착한 곳에서 만나는 것은 무한한 인파뿐이기에 여행으로 인해 오히려 마음의 여유를 잃는다. 그리고 때로는 몸과 마음이 지치는 것으론 부족해 각박한 세상을 맘껏 느끼게 된다.
여행은 일종의 방랑이다. 한 곳에 정착해 사는, 하지만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심오한 물음을 자기 안에 담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방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에게 여행은 참으로 잘 어울리는 것일 수 있다. 아마도 오늘날 많은 여행이 짜증나고 지겨운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여행이 여행의 속성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행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진 일정, 정해진 장소들을 정해진 시간 안에 떠도는,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여행은 방랑이라기 보다는 또 하나의 '뿌리내림'이 아닐지...

그런 점에서 글을 쓰건, 사진을 찍건 작가라는 직업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물론 창작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느껴보지 않은 내가 가진 부러움은 피상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박완서 님의 글은 그런 나의 부러움을 한층 증진시켜주었다. 내게도 이런 여행이 허락될 수 있을까? ...
그렇다고 하여 그 여행이 화려함으로만 가득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여행은 소박하다 못해 다소 누추하고 때론 끔찍하기까지 했다. 어느 누가 여행지로 소말리아를 택할 것이며, 어느 누가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구걸하는 수많은 인파를 뿌리치는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아니,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웃음을 짓고 있는 그 순간마저도 서서히 죽음을 향해 걷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제 땅을, 제 나라를 잃다 못해 빌어먹는 생활에 대하여 어떠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삶들, 그것은 결코 즐길 수 없는 대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삶이다. 나와 같은 존재,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 태어나 나와 같은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삶에 귀 기울이고 때로는 온몸 가득 울어버리는 것도 우리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지... 그녀에게 허락된 답답한 가슴이, 그리고 마음으로 숱하게 흘렸을 눈물이야말로 그녀의 여행이 지닌 가치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녀의 여행이 고통만으로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바라본, 실로 가깝지만 언제 도달할 수 있을지 대답조차 불가능한 북녘 땅을 보고는 목놓아 울고, 고산병에 시달리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산소통을 부여잡고 있는 그 순간 함께하는 사람들과 형성했을 무언의 공감대, 그것은 세상 그 어떤 말과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동시에 여행을 여행답게 만드는 것이다. 직접 느껴보는 수밖엔 달리 방법이 없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글은 진솔했기에 책장 하나가득 간접적으로나마 나는 따스함을 맛보았다.

잃어버린 여행가방이 있다고 했다. 속옷이 잔뜩 든, 게다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가격이 비싸 부담스러웠던 커피가 속옷 여기저기 꽂혀 있는... 주인 잃은 가방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고, 가방을 여는 순간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그녀는 그 가방을 통해 지난 여행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볼 것이다. 처음에는 단 한 장면이, 하지만 그 한 장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으로 그녀의 머리 속에서 새로이 태어날 것이다. 어쩌면 그 가방은 잃어버려야만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가방은 그녀 안에 영원히 보관되기 위해 그 겉모습을 상실한 것일지도...

유난히도 뿌연 세상 아래서 보낸 하루였다. 눈이, 머리가 그리고 온 몸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 수 있는 그 어딘가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괌과 사이판의 에메랄드 빛 바다가, 숨 막히는 더위에도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티어 주었던 태국의 하늘이 그리고 큰 맘 먹고 구입했던 삼각대를 놓고 나왔던 영국의 어느 허름한 숙소가... 내 안의 방랑벽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나보다. 그녀의 글을 통해 나는 다시금 여행을 꿈꾼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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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중세적 엄숙주의를 전복하는 유목적 유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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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한지 두 시간 만에 <열하일기>를 해치웠다. 책을 읽는 행위를 해치웠다는 무식한 표현을 쓰는 이유가 있다. 고전읽기를 즐기는 나의 취향으로 아쉽건대 고미숙이 지은 <열하일기>는 항상 ‘다음번에는!’이라는 다짐을 하다가 다른 책들로부터 번번이 밀려난 책이다. 그만큼 기다려온 염원의 시간이 길다. 이 책이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이 지난 해 6월이었으니 무려 8개월이나 서가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주인의 손길이 닿기를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 고전평론가라고 불러 달라는 고미숙의 <열하일기>는 예상한 것만큼 튄다. 저자의 문체가 기존에 읽었던 근엄한 해설풍의 열하일기와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하면 사방팔방에 열하일기의 웃음을 전할까 싶어 밤을 지세며 고심했을 흔적이 보인다. 놀기 좋아하고, 기발한 장난꾸러기인 연암에게 정신을 놓아버린 저자의 입을 빌리면 <열하일기>는 “천재의 유머! 유머의 천재!”로 펄펄 끓어오르는 웃음의 도가니란다. 웃음 덕분인지 책은 쉬웠다. 현대적으로 쉽게 해설을 해 준 저자의 노고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미 연암의 열하일기를 읽었던 경험이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에 힘을 실어주었다.


<열하일기> 본문의 내용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1780년 5월에서 1780년 10월까지 6개월간의 중국여행기다. 압록강을 건너는 출발부터 마테오 리치의 무덤에서 여행기는 끝난다. 육로 3천리의 거리다. 말이 육로 3천리지 교통수단과 도로 사정이 열악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여행기에서 나온 것처럼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는 여행길이다. 하지만 여행에서 스릴과 호기심이 부재하는 여행이란 자신의 안방에서 심드렁하게 낮잠이나 자는 일과 무엇이 다르랴. 저자도 모험을 좋아하는지 “스릴도, 서스펜스도 없다면, 대체 뭐 때문에 여행을 한단 말인가?”하고 강변한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 마담 보바리의 작가 귀스타프 플로베르조차 “루앙을 떠나 이집트로 가서 낙타를 모는 사람이 되어, 하렘에서 코밑에 솜털 자국이 있는 올리브빛 피부의 여자에게 동정을 잃는 것”이라 말한다. 한마디로 근원지의 지긋지긋한 편안함의 익숙함에 권태를 느끼는 여행자들의 말이다. 연암은 구경꾼과 호기심 많은, 스릴과 궁금증을 잔뜩 품은 여행자의 자세에 충실하게 여행기를 썼다. 그런데 그가 쓴 여행기는 중후한 격식을 갖춘 이전의 외교사절단 선배들이 쓴 여행기와 다르다. 신분적 상하관계를 뛰어넘고, 국경을 뛰어 넘고, 시간을 뛰어 넘고 사상을 뛰어넘는 ‘뛰어넘기’의 정신, 즉 월경(越境)의 이야기로 열하일기는 출렁이다 못해 세로, 때로는 가로지르며 달린다. 근엄한 18세기 성리학의 조선에서 이것은 잡문적인 요소를 가득 품고 있다. 왜냐하면 성리학의 ‘중심’ 포인트가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왜 중심에서 벗어난 주변의 이야기에 열광했던가?


18세기. 조선의 내면은 뿌리로부터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다. 그것이 천주교라는 종교와 서학(西學)이라는 새로운 학문(과학)의 기운이었다. 젊은이들은 젊고 패기 넘치는 군왕에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단박에 수용하기에는 18세기 조선의 내부는 여전히 어둠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다. 기득권층의 위기위식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 서투르다. 새로운 기운이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안락한 의자를 발길로 걷어차서 넘어뜨릴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혁명은 항상 새로운 이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던가. 연암이 여행기에서조차 중심원보다 주변에 시선을 던진 이유는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계산이 포석한 것으로 본다. 그가 단순히 해학적이고 서민적이고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라서 아니다. 중국을 먼저 다녀온 외교 사절단과 다른 뷰 파인더로 여행기를 썼던 이유를 18세기 조선의 내면과 동반해서 주지해야 함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고미숙의 통통 튀는 <열하일기>는 대박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는 ‘박람강기(博覽强記)’다. 즉, 많은 책을 읽고 여러 가지의 사물에 대하여 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앞에서 천재의 유머라고 말했다. 열하일기는 재기발랄한 연암의 독특한 문체에 의하여 단순히 웃다가 마는 책이던가?


문학박사 군왕인 정조의 ‘문체반정’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자료를 찾아보려고 마음먹는다면 문체반정은 따로 공부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여하튼 정조의 문체반정의 배후로 지목되는 <열하일기>. 물이 없어 그 좋아하는 술을 쏟아 붓고 먹을 갈아 글씨를 쓰고, “더위에 기침이 심해지니 일찍 자야겠군.”하며 능청을 떨다가 월장을 하는 여행기의 기록을 조선의 사대부들은 왜 당혹스러워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무수한 흐름이 중첩되는 유연성에 있을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언제 어디서나 물음을 구성할 수 있는 도저한 열정. ‘산천, 성곽, 배와 수레, 각종 생활도구, 저자와 점포, 서민들이 사는 동네, 농사, 도자기 굽는 가마, 언어, 의복 등등’에서 역사, 지리, 철학 등 고담준론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는 박람강기(博覽强記)”-(88쪽)


기득권층이 누리는 사회 안전망의 표본을 척도로 본다면 이 책은 잡문(雜文)이다. 잡스런 글. 그런데 잡문이라고 평가절하해서 놔두기에는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필요충분조건을 지니고 있다. 백성의 삶. 백성이 원하는 사회. 신분계급을 뛰어넘어 경계를 허물고 있는 내용들. 백성의 삶은 저 위에 열거한 것에서 어느 것 하나 빠질 수 없다. 이것은 백성의 이야기다. 백성이 원하는 사회는 경계가 없는 세상이다. 열하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경계 이야기를 단 한 줄도 써 붙이지 않았다. 연암은 훗날 수도 없이 윤색과 각색을 반복하면서 열하일기를 다듬어갔지만 그 어디에도 ‘경계를 허물자!’라는 식의 혁명적 구호는 안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은 불온하다. 불순하기 그지없다. 왜 그런 냄새가 날까. 바로 백성의 삶을 노래 한 사람이 사대부출신이기 때문이다.

 

"무릇 천하에 이치는 하나뿐이다! 범의 본성이 나쁘다면 사람의 성품도 역시 나쁠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착하다면 범의 성품도 역시 착할 것이다.........너희 인간들이 이치를 말하고 성(性)을 논할 때 걸핏하면 하늘을 들먹거리지만 하늘의 소명으로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나 다 같이 만물 중 하나이다.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인(仁)의 관점에서 본다면 범이나 메뚜기나 벌이나 개미나 사람이 모두 함께 같이 살기 마련이지 서로 해치고 지낼 터수가 아니다."-(362쪽);<호질 中>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연암은 평등세상을 노래하는 혁명가의 사상을 지닌 사람은 분명 아니다. 그는 오히려 중원을 향하는 흠모가 대단하다. 청을 지극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열망하는 마음이 강렬하다. 그러나 그의 지극한 시선이 머무는 청, 중원 땅은 그가 지닌 ‘접속’의 대상 중 한 무리다. 만약에 고비 사막을 건너 이슬람 문화권과 대면했다면 연암은 그것을 자기 식으로 ‘접속’하는데 또 신이 날 것이다. 그는 어떤 이질적인 것으로라도 접속할 수 있는 열려있는 사람이었음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예수회 소속의 이탈리아 신부 마태오리치는 종교적 목적으로 <천주실의>를 썼지만 조선의 가난한 선비 연암은 경계를 뛰어넘는 시각으로 <열하일기>를 썼다. 연암이 이슬람을 넘어 유럽문화를 직접 만났다면? 아프리카는? 인디오는? <열하일기>는 미완성의 궤적이다. 


이런 사대부가 국경 넘어 다른 나라의 여행기를 쓰면서 월경(越境)의 사상을 말했으니 기득권층은 경계가 무너짐을 당연히 전전긍긍대고 삿대질을 하지 않겠나. 맹목적이고 공허한 명분. 조선의 18세기는 분명 새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그것을 막아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총명한 군왕 정조의 문체반정은 <열하일기>속에서 탈주자학을 만난 것이다. 주자주의로부터의 이탈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러니와 액션, 긴장과 돌출로 연속되는 <열하일기>. 한 권의 책은 ‘오랑캐’의 냄새가 난다고 하여 빨간 딱지가 붙여진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이 공전과 자전을 하면서 돌고 돈다. 삼국유사에서도 자유로운 사상가 원효를 일컬어 “원효,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아니하다.”라고 써 있다. 경계를 뛰어넘는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글은 일차원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하고는 다르다. 그들의 사유는 겹과 겹 사이, 층과 층 사이를 꼼꼼하게 관통한다. 연암의 열혈 팬인 저자 고미숙도 이 점을 묵과하지 않는다.


“어떤 대상이든 입체적으로, 다층적으로 사유하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이면에 숨겨진 성격을 보려 하고, 그것을 인접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331쪽)


‘가운데 눈금’이 아닌 ‘제3의 길’을 찾는 <열하일기>. 불교적 성찰이 문득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연암이 매번 이런 식의 경건함이라면 열하일기는 아궁이 불쏘시개로 생명력을 상실한지 오래 되었을지 모른다. 목소리가 아름다운 여인네에게 반했다가 얼굴을 보고 실망하며, 달이 밝다는 핑계로 술을 마시러 나가는 한량 연암. 투전판에서 백 냥을 따서 또 술을 실컷 사 먹는 연암. 넘치는 강물 속에서 말꼬리를 잡아 살아나고 스스로 대견해 하는. 남의 집 담 너머로 구경을 하다가 일행을 놓치고도 허허 웃는 연암. 장난꾸러기, 얄개, 악동. 개구쟁이의 별칭을 지닌 연암.


혼란스럽고 무거운 18세기 조선사회에 유머로 경계를 무시하고 뛰어 다녔던 한 남자. 경계를 허물고 나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훨씬 더 수월해진다. 인간과 자연이 균등하듯이, 인간과 뭇짐승들이 같듯이. 그러나 경계를 허무는 일은 연암처럼 깬 천재들이나 할 수 있는 진리의 길인가. 3백년 후 후대에게 전혀 그 역설의 웃음이 가르쳐주는 의미가 빛을 바래지 않는 이유를 ‘<열하일기>그 후의 이야기’ 라는 다음번 글로 알려 줄 또 한 명의 연암 극성팬 작가를 어서 만나고 싶다. 그에게 <열하일기>로 인한 경계의 전복(顚覆)을 기꺼이 당하고자 한다.


유쾌한 연암만큼 그의 열성 팬인 저자도 서양철학자인 들뢰즈의 철학과 노마디즘(유목)을 가끔 끌고나와 대비시키는 지적재미를 보여준다. 엉뚱한 것 같으면서도 깊은 바닥을 지니고 있는 두 사람의 글은 책 한 권을 다 읽는 동안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있음을 발견한다. 좋아하면 닮게 되지 않겠나. 연암이 중원(사실은 넓고 다양한 세계)를 흠모했듯이 후대의 고전평론가 역시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던 열하일기에 들인 공이 놀랍다. 시종일관 연암을 상찬하는 것은 차라리 '숭상'이라고 불러야 할 지경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쓰인 책이지만 독자는 내심 눈을 찔끔 감는다. 왜? 여하튼 연암만큼 활달하고 재기 있는 저자의 문체가 자칫하면 지루함으로 하품을 하다가 덮었을 고전을 끝까지 다 읽는 수고를 제공해 주지 않던가. 책 말미에 다산과 연암을 비교하는 ‘보론’편은 짧은게 못내 아쉽다. 주 메뉴를 폼 나게 먹고 난 뒤 입가심으로 달짝지근하게 먹는 후식이 때로는 한입 더 먹고 싶어지는 경우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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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별점 다섯개로는 부족한 책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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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상의 홈페이지 방문자들로 인한 영화정보는 거의 홍수가 날 지경이다. 홈페이지 주인장이 어떤 영화 평을 한 편 올리고 나면 거기에 덧글로 달리는 각종 영화에 관한 여담이나, 정보는 또 하나의 평론으로 묶을만한 분량이다. 그만큼 영화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는 셈이다. 매체의 발전이 영화제작에만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유의 정보를 제공해 줌으로써 이제 영회정보는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마우스 한 번 클릭 하는 일로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필름으로 양산되는 영화는 언젠가 생명의 소멸을 가져온다. 보관의 용이함이 영화 열정을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쓰게 되었다는 철학과 교수님의 영화와 철학적 혼합의 관계, 그 연애관계를 담아낸 책이다.

“영화와 사귀기 위해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글쓰기다. 여기서 글쓰기란 비유컨대 사라지는 영화들이 남기는 안타까운 흔적들로 무늬를 짜는 것이다. 무늬로 뭔가를 만들어내어 추억의 증거로 삼아보라. 추억이 있는 동안은 어떤 것도 죽지 않는다. 이 책은 내가 영화 텍스트들과 함께 놀면서 만들어낸 무늬들이다. 나를 홀리고 꼬시며 에로틱하게 자극하는 저 멋진 여인 같은 영화들과 만나 사귄 흔적, 추억, 앙금들을 조금은 주저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여기에 남긴다.”-(7쪽);지은이의 말


로마에 올인 하는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의하면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싶을 때, 옛날이 그리워질 때,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자 할 때, 나는 영화를 본다.”고 한다. 종합적 의견으로 치면 삶이 그렁그렁해지면 영화를 보신다는 말 아니냐. 저자 이왕주의 말은 삶의 무늬를 만드는 과정에 추억이 있고 추억은 영화가 포함된다는. 그래서 영화와 연애를 한 판 하는가 보다 했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단어가 ‘특별’접두사로 붙어 있는 것을 보니 그 머리 아픈 철학과 연결을 한 영화평론집이라는 선입견이 든다. 맞다. 이 특별한 영화 평론집은 영화소개->철학적 분석, 해석이 후편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와호장룡/장자의 무위)해석은 철학과 영화의 만남 극점을 보여준다. 유위(억지스러움, 인위적인 것, 틀에 박힌 것)은 무위(자연스러움, 순리적인 것, 자유로운 것)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장자의 무위사상을 두 명의 인물(용과 리무바이)로 이분법적인 구도를 이룬다.


그것을 소 잡는 ‘소백장의 칼’로 앞부분에서 의미심장한 어필을 해 준다. 29편의 영화소개에서 하도 니체의 철학이 여러 번 응용되고 니체를 칭송하는 듯한 발언도 여러 군데 보였던지라 동양의 철학은 배제한 서양철학과의 접목만 시도했다고 오해한다면 독자의 무지다. 책에는 공자님의 말씀이 근엄하게 등장하기도 하고 가장 많은 출연을 한 철학자는 단연코 서양철학의 거두 니체씨이지만 장자(그의 스승인 노자)도 조연급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다. 소백장의 칼=청명검=리무바이의 무예=노자의 도덕경. 이 흐름의 공통점은 ‘이름과 명분에 매달리지 말자’다. 섭리까지 거스르며 이기려 들지 말자. 그러면 나중에 꼭 벌을 받는다?는 구도. <도덕경>은 이래서 도덕 교과서이시다. 재미없는 도덕 선생님의 기억을 간직한 독자는 하품이 나올 수도 있다. 예의 없이 반론을 불쑥하나 들이밀면, 도덕적인 삶이 뭐가 나쁘냐!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도덕적인 여인 ‘수련’보다는 철없는 여인 ‘용’이 더 매력적인 삶을 산다. 삶은 어차피 한 편의 드라마다. 발단과 전개, 절정, 결말로 이어지면서 숨가쁘게 변신하는 삶이 매혹적인 풍경으로 보이는 것은 철없는 나만의 시각일까. 열정이 매번 옳은 것도 아니고, 매번 섹시한 것도 아니지만 한번뿐인 삶. 깨우치는데 뭔가 자극은 있어야지 수고스러움의 쾌감이 배가되는 것 아니겠어? 책에서도 인생에서 과정을 향유하라고 하지 않더냐!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쾌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김에 이 책의 최다 출연자인 니체씨에 관하여 한 마디를 하기로 한다. 춤을 배우며 인생을 알아가는 스기야마씨의 춤 이야기(Shall we dance)에도 니체씨의 열광적인 예술론이 대두된다.


“니체는 예술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아폴론은 밝음, 질서, 조화, 균형을 뜻하고 디오니소스는 어둠, 혼돈, 도취, 광란을 뜻한다. 물론 장르에 따라서 아폴론적인 것이 더 우세한 예술이 있고 반대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더 우세한 예술이 있다. 가령, 조각이나 그림은 전자에 속하고 음악과 춤은 후자에 속한다. 특히 춤은 디오니소스적인 정열과 광기 그리고 힘의 요소가 다른 아폴론적인 요소들을 완연히 압도하는 강렬한 예술이다.”-(229쪽)


“춤이 없다면 이 삶을 어떻게 견디랴?” 수도승이나 금욕주의자들을 향해 “춤출 줄 모르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니체. 다른 곳에서는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그들을 일컬어 “가축 떼거리의 인간들”이라고까지 호도하셨단다. 요즘 수녀원의 육중하게 무거운 문을 박차고 나와 종교학자로 거듭 난 영국여성의 이야기책을 한 권 읽고 있는데, 그 분도 세상과 즐겁게 연애하는 춤을 추고 싶어 수녀복을 벗으신 것일까 싶다. 영화와 철학의 만남인 이 책은 일단 영화를 텍스트로 만나는 것을 부담 없이 전해준다. 삶이 한 판 벌어지는 춤마당이라면 영화는 그 속에서 장단을 맞추는 가락이다. 거기에 철학자들의 육감적인 분석이 가미된다면 이거 너무 에로틱한 춤 아니겠어? 철학을 영화로 해석할지, 영화를 철학적으로 해석할지는 자유에 맡긴다. 순서가 바뀌면 어떠한들. 그래, 너 영화와 철학 둘 다 좋아하는 거 맞지?


부기)

탄탄하면서도 쉬운 철학적 연결 해석이 명문장을 여러 군데서 만날 수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보다 품격 면에서도(나나미 여사의 품격 치중은 거의 병적인 수준이다)훨씬 높다고 본다. 그 증거로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면서 동, 서양의 유명하신 철학자들을 두루 모신 점이다. 한 장르의 영화에 기울지 않았던 점도 이 책의 눈부신 보편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 가장 큰 점수는 20년만의 제주도 여행지에서 인연을 맺은 책이라는 점이다. 새벽 다섯 시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책을 읽었다. 여행지의 아늑한 호텔방에서 새벽 미사 종소리를 들으며 책장을 덮는 기분이란, 동녘하늘의 아침태양을 만나는 천지창조다.(과장법에 속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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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한시미학산책
정민 지음 / 솔출판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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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겨울 방학 전이다. 수능 마치고 좀 한가롭던 시간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책을 한 번 읽어보리라 굳게 마음먹고 도서관에서 정민 선생님의 한시미학산책을 골랐다.

책은 500페이지에 이르는 두껍고 하드커버로 싸인 학술적인 책으로 보이지만, 구성은 말랑말랑하고 내가 기대했던대로 정민 선생님의 말투는 '~~~ 한시 이야기'와 유사하게 편안했다. 물론 내용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일단은 이 두꺼운 책이 스물 네개의 챕터로 잘 나눠져 있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하루 한 편을 읽을 셈이었지만, 스터디 준비도 아니고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대여섯 편을 읽어대기도 했고, 어떤 글은 한 편으로 며칠을 끌기도 했다. 이것은 순전히 내 탓이지, 책의 탓은 아니다.

나는 책을 읽고 잘 깐다. 좋은 말로 하면 비판적 독서를 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비판이 올바른 비판이 되지 못하고 감정에 얽매여 디립다 욕을 퍼붓기 일쑤다. 올바른 비판이 되지 못한다는 말은 텍스트를 충실히 읽지 않고 헐뜯기 때문이다. 요즘 나오는 인문학 서적 중에서 읽다보면 짜증 나는 부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펴내는 책들이다. 정보의 바다에 떠다니는 몇 조각의 부유물들을 책으로 엮고,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그럴듯한 제목을 붙여 책이랍시고 팔아댄다. 정말 짜증난다. 내가 잘 까는 또 한 부류는 해체주의 소설이나 시집이다. 기존의 이야기 틀을 해체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말장난이 심하거나, 글재주만 믿고 까부는 축이 많다. 감동을 주지도 않고, 깨달음이나 깨우침을 주지도 않는데, 잘 팔린다니 읽게 되고, 그러다 보면 욕이 나온다. 나는 까고 욕하면서도 내심 찝찝했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네.'하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민 선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암의 <답창애2>에 나오는 '눈 뜬 장님' 이야기를 빌려서, 새로운 세상이 되어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나침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 나침반의 하나다. 이미 읽었던 정민 선생의 책 중에서 중복된 것도 많다. <~~~ 한시 이야기>, <비슷한 것은 가짜다>, <미쳐야 미친다>,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지만, 이 책은 그야 말로 한시 입문이라 할 만하다. 나는 한시에 관심이 많아서 전에도 몇 권의 책을 보았지만, 학문적으로 고집있는 사람들의 책들이라 내 수준에 과한 것들이었다. 정민 선생님 덕분에 한 겨울 고전의 정수, 한시를 포식할 수 있었다. 읽고난 지금도 <다시 읽고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서 수업 시간에 활용하고 싶은> 욕심은 굴뚝같지만, 한 번 지나온 길을 다시 가지 않는 '한붓 그리기'와도 같은 내 독서 습관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문학은 흉내가 아니다.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처럼, 자기만의 진리를 찾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 현대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주역에 나오는 말로 <窮卽變, 變卽通, 通卽可久>라고 했다. 궁하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한다. 통하면 오래갈 것이라고... 새 시대가 왔지만 예전의 학문은 변함이 없어 궁해진다. 그러면 변해야 한다. 변해서 통할 길을 찾고, 통하면 오래간다. 그러나 그저 막무가내로 변해서는 아니 된다. 오래갈 방향으로 변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정표>가 이 책이 될 수도 있다.

가끔 내가 적어 둔 리뷰를 돌아볼 때가 있다. 좋은 구절을 적어뒀다가 찾아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내 글이 <감각적 직설>에 치우침이 많은 것을 본다. '詩思의 온유 돈후를 중시하라. 감각적 직설 보다는 에돌려 말하는 데서 오는 온건한 말이 더 깊고, 모난 말보다는 각지지 않은 표현에서 중후한 체취가 풍겨난다.'는 말은 뼛속을 에인다. '情을 잘 말하는 자는 삼키고 토해 냄이 깊은 듯 얕아 드러날 듯 다시금 감추어져 문득 그 마음의 무한함을 깨닫게 하고, 景을 잘 말하는 자는 형용함을 끊어버리고 약간의 보탬만을 더하였는데도 참모습이 또렷하고 생기가 또한 흘러 넘친다'고 한 것은 남의 글을 읽을 때,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할 것이다. "사물을 꿰뚫어 보는 통찰과 혜안 없이 그저 남의 눈을 놀래키는 수사적 기교에 탐닉하는 글은 글이 아니라고" 한 것은 나를 꾸짖는 말이 아닌가 해서 심장이 덜컹거릴 따름이다.

이 책은 시의 미학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부분과, 시의 표현, 시 창작을 둘러싼 이야기들, 시가 해체되는 과정의 참요, 잡시, 문자유희 등도 다루고, 선, 산수, 사랑, 역사 등 주제에 따른 시들도 다루고 있다. 스물 네 장으로 나눈 만큼, 분류의 기준은 뚜렷하지 않으나 다양하고 풍부한 작품을 골고루 영양섭취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한자를 어느 정도 알면 한시 읽는 맛을 더할 수 있겠고, 특히 국문학과 학생이나 문학 전공자라면 한자 공부삼아 정도할만한 책이다. 일반 교양인들도 한시를 대충 읽는다면 읽어볼 만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텔레비전이 안방을 차지한 지도 30년이 넘었다. 1969년에 국민 1인당 5편의 영화를 보았을 정도로 번창하던 영화 산업이 1970년에는 텔레비전에 그 자리를 넘겨 주었으니...  내가 어릴 때는 M, T, K의 세 채널이 있었고 프로그램도 거의 외우고 있었지만, 요즘은 채널 개수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그 영향력은 양적 팽창이 늘었다. 그렇지만, 질적으로 발전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요즘은 케이블 티비를 통해 재방송을 끝도 없이 하다 보니 같은 방송을 하루에도 몇 번 만날 수 있다. 요즘 아이들 앞에서 선생하려면 <웃찾사>, <개콘>, <폭소클럽>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고서는 말이 안 된다. 아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재미가 있으나 없으나 개그 프로는 가능한 한 보는 편인데, '그런거야', '희한하네', '생뚱맞죠', '그때그때 달라요', '오, 베이베', '남녀본색', '사장님 나빠요', '안어벙에게 빠져 봅시다, 마데 전자', '봉숭아 학당의 다중이, 까잇거 경비원' 등의 말들이 요즘 유행이다. 어떤 프로그램에도 이런 말들은 서로 패러디 되고 있다. 한두개라야 쉽게 외울 수 있는데, 요즘은 너무 많아서 어렵기도 하다.

한 때, <~~ 시리즈>로 나가던 개그들이 그야말로 다원화 되어 종합 선물 세트가 된 셈인데, 간혹은 비판의 힘이 강한 코너도 있지만, 그야말로 말장난이거나 국어 사용을 해치는 우스개에 지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물론 개그가 진지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난 적어도 매번 기본 컨셉은 같고 말장난만 바꿔대는 3,6,9나 봉숭아학당 같은 코너는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코너라면 블랑카 같은 창의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이런 <언어 유희>로서의 한시를 깊이있게 다루고 있는데, 그런 것들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소득이었다. 개그가 현상적인 언어유희를 뛰어넘어, 생각의 깊이나 감각의 폭, 경험의 넓이나 역사의 부피를 소화할 수 있도록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공시적, 통시적 차원을 아우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에서도 결국 <시는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정채로운 보석인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해독인가> 하는 문학의 선악설까지 다루게 되지만, 시를 짓고 감상하는  과정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즉물적인 대상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가 감응해서 설계하고 실현되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왜 다시 한시인가. 정민 선생이 가진 콘텐츠가 한시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시라는 특수한 표현 매체를 통한 전달의 특이성 때문에 <특이한 전달의 과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용가치를 상실해 가는 한문학의 한 부분의 연구를 통해 그가 만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표현의 매체가 너무 비현실적인 것이라서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지는 한시이지만, 한시가 추구한 정신의 깊이나 미학의 너비마저 가시 덤불 속에 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먼지 쌓인 역사의 뒤켠에 방치된 채 날로 그 빛을 바래가고 있는 한시에다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어 막힌 길을 새로 뚫고 그 현재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절치부심한 정민 선생의 글을 만나게 된 것은, 한 겨우내 방구석에 틀어박혔지만, 선경을 바라보고, 호쾌한 장부의 기상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시대와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책을 읽고 저자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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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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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씁쓸함은 어쩌면 이미 실패로 끝나버린 혁명에 대한 일종의 향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폭삭 늙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 더 이상의 무엇은 불가능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회의감이었다. 비현실적인 꿈을 꾸던 이가 현실을 자각했을 때 느끼는 상실감. 하지만 진정한 이상주의자라면 한계에 도달했을 그 순간 좌절 아닌 희망을 꿈꾸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난 역사를 겸허히 수용해야만 한다. 식민지의 암울한 터널 속에서 민족을 찾았고 독재의 그늘로부터 민중을 일으켰던, 그 과정 속에는 우리 자신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번에는 정말 무언가 변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 이후... 386세대의 대거 정계 진출, 혹자는 이를 두고 우리 사회가 좌경화되었노라 말하기도 했지만 정작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IMF 의 한파가 몰아친 후 좀처럼 가시지 않는 겨울 냄새에 많은 이들은 여전히 떨고 있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내게는 희망 보다 절망이 컸다. 무지로부터 비롯된 혼란. 실제로 몇몇 보수단체에서는 그의 글을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들기도 했었으니, 그를 오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좌파로 규정한 이였다. 그에게는 진정한 자유를 향한 갈망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던 것일 뿐. 아니, 진정한 좌파라면 으레 그래야만 했던 걸지도 모른다. 좌파에게 있어서 완성이란 없다. 하나의 세력이 권력을 얻고 고착화되는 그 순간, 좌파로 살고자 결심한 이라면 공고화된 질서에 반기를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물며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은 어떠했던가. 혁명적 영웅들은 존재했지만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도 존재했다. 어느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에 의한 다스림은 어느 순간부터 묵살되었다. 당의 목소리가 점차 커져만 갔고, 권력의 중심에 위치한 특정인은 신격화될 뿐이었다. 그 와중에서 희생양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끊임없는 위기의식의 조장, 그래도 과거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그것은 강요였다. 잘못되었음이 분명했지만 혁명은 이미 완성되었기에 또 다른 혁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 싶었던 규칙들에는 하나 둘 예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조지 오웰로서는 다른 이들처럼 환호할 필요도, 굳이 1990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가끔씩 나는 국가도, 민족도, 성(Gender)도 존재치 않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정당화된 권력으로 자신과 다른 이들을 억누르지 않는 사회, 맹목적으로 하루를 살기 보다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사회... 그런 사회에도 한 번 쥐면 놓치기 싫은 권력이 있겠지? 섬겨야만 하는 누군가가 있겠고. 꿈꾸는 것이 두려워지는 까닭이랄까? 왠지 모르게 지금으로서는 대안이 없는 것 같아 답답하다.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비록 사회주의의 이름은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타인과 나를 구분 짓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기제들이, 오히려 예전보다 더 교묘하게 존재하고 있다. 경쟁은 당연한 것이며 그 경쟁에서 살아남는 이들만이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냉정하다 못해 비인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현실이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질서이다. 그 현실 속에서 나는 고민한다. 오늘도 남들보다 몇 걸음 뒤쳐졌을지 모른다고, 책을 읽는 것보다 타인의 마음을 구슬려 보는 것이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는 자는 존재한다. 침묵하는 그 순간이 가장 치열하고, 잠잠한 그 순간이 혼돈이 극에 달한 순간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는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아프지 않은 세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모두가 함께하는 그런 세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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