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중세적 엄숙주의를 전복하는 유목적 유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정독한지 두 시간 만에 <열하일기>를 해치웠다. 책을 읽는 행위를 해치웠다는 무식한 표현을 쓰는 이유가 있다. 고전읽기를 즐기는 나의 취향으로 아쉽건대 고미숙이 지은 <열하일기>는 항상 ‘다음번에는!’이라는 다짐을 하다가 다른 책들로부터 번번이 밀려난 책이다. 그만큼 기다려온 염원의 시간이 길다. 이 책이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이 지난 해 6월이었으니 무려 8개월이나 서가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주인의 손길이 닿기를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 고전평론가라고 불러 달라는 고미숙의 <열하일기>는 예상한 것만큼 튄다. 저자의 문체가 기존에 읽었던 근엄한 해설풍의 열하일기와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하면 사방팔방에 열하일기의 웃음을 전할까 싶어 밤을 지세며 고심했을 흔적이 보인다. 놀기 좋아하고, 기발한 장난꾸러기인 연암에게 정신을 놓아버린 저자의 입을 빌리면 <열하일기>는 “천재의 유머! 유머의 천재!”로 펄펄 끓어오르는 웃음의 도가니란다. 웃음 덕분인지 책은 쉬웠다. 현대적으로 쉽게 해설을 해 준 저자의 노고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미 연암의 열하일기를 읽었던 경험이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에 힘을 실어주었다.


<열하일기> 본문의 내용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1780년 5월에서 1780년 10월까지 6개월간의 중국여행기다. 압록강을 건너는 출발부터 마테오 리치의 무덤에서 여행기는 끝난다. 육로 3천리의 거리다. 말이 육로 3천리지 교통수단과 도로 사정이 열악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여행기에서 나온 것처럼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는 여행길이다. 하지만 여행에서 스릴과 호기심이 부재하는 여행이란 자신의 안방에서 심드렁하게 낮잠이나 자는 일과 무엇이 다르랴. 저자도 모험을 좋아하는지 “스릴도, 서스펜스도 없다면, 대체 뭐 때문에 여행을 한단 말인가?”하고 강변한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 마담 보바리의 작가 귀스타프 플로베르조차 “루앙을 떠나 이집트로 가서 낙타를 모는 사람이 되어, 하렘에서 코밑에 솜털 자국이 있는 올리브빛 피부의 여자에게 동정을 잃는 것”이라 말한다. 한마디로 근원지의 지긋지긋한 편안함의 익숙함에 권태를 느끼는 여행자들의 말이다. 연암은 구경꾼과 호기심 많은, 스릴과 궁금증을 잔뜩 품은 여행자의 자세에 충실하게 여행기를 썼다. 그런데 그가 쓴 여행기는 중후한 격식을 갖춘 이전의 외교사절단 선배들이 쓴 여행기와 다르다. 신분적 상하관계를 뛰어넘고, 국경을 뛰어 넘고, 시간을 뛰어 넘고 사상을 뛰어넘는 ‘뛰어넘기’의 정신, 즉 월경(越境)의 이야기로 열하일기는 출렁이다 못해 세로, 때로는 가로지르며 달린다. 근엄한 18세기 성리학의 조선에서 이것은 잡문적인 요소를 가득 품고 있다. 왜냐하면 성리학의 ‘중심’ 포인트가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왜 중심에서 벗어난 주변의 이야기에 열광했던가?


18세기. 조선의 내면은 뿌리로부터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다. 그것이 천주교라는 종교와 서학(西學)이라는 새로운 학문(과학)의 기운이었다. 젊은이들은 젊고 패기 넘치는 군왕에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단박에 수용하기에는 18세기 조선의 내부는 여전히 어둠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다. 기득권층의 위기위식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 서투르다. 새로운 기운이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안락한 의자를 발길로 걷어차서 넘어뜨릴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혁명은 항상 새로운 이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던가. 연암이 여행기에서조차 중심원보다 주변에 시선을 던진 이유는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계산이 포석한 것으로 본다. 그가 단순히 해학적이고 서민적이고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라서 아니다. 중국을 먼저 다녀온 외교 사절단과 다른 뷰 파인더로 여행기를 썼던 이유를 18세기 조선의 내면과 동반해서 주지해야 함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고미숙의 통통 튀는 <열하일기>는 대박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는 ‘박람강기(博覽强記)’다. 즉, 많은 책을 읽고 여러 가지의 사물에 대하여 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앞에서 천재의 유머라고 말했다. 열하일기는 재기발랄한 연암의 독특한 문체에 의하여 단순히 웃다가 마는 책이던가?


문학박사 군왕인 정조의 ‘문체반정’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자료를 찾아보려고 마음먹는다면 문체반정은 따로 공부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여하튼 정조의 문체반정의 배후로 지목되는 <열하일기>. 물이 없어 그 좋아하는 술을 쏟아 붓고 먹을 갈아 글씨를 쓰고, “더위에 기침이 심해지니 일찍 자야겠군.”하며 능청을 떨다가 월장을 하는 여행기의 기록을 조선의 사대부들은 왜 당혹스러워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무수한 흐름이 중첩되는 유연성에 있을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언제 어디서나 물음을 구성할 수 있는 도저한 열정. ‘산천, 성곽, 배와 수레, 각종 생활도구, 저자와 점포, 서민들이 사는 동네, 농사, 도자기 굽는 가마, 언어, 의복 등등’에서 역사, 지리, 철학 등 고담준론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는 박람강기(博覽强記)”-(88쪽)


기득권층이 누리는 사회 안전망의 표본을 척도로 본다면 이 책은 잡문(雜文)이다. 잡스런 글. 그런데 잡문이라고 평가절하해서 놔두기에는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필요충분조건을 지니고 있다. 백성의 삶. 백성이 원하는 사회. 신분계급을 뛰어넘어 경계를 허물고 있는 내용들. 백성의 삶은 저 위에 열거한 것에서 어느 것 하나 빠질 수 없다. 이것은 백성의 이야기다. 백성이 원하는 사회는 경계가 없는 세상이다. 열하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경계 이야기를 단 한 줄도 써 붙이지 않았다. 연암은 훗날 수도 없이 윤색과 각색을 반복하면서 열하일기를 다듬어갔지만 그 어디에도 ‘경계를 허물자!’라는 식의 혁명적 구호는 안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은 불온하다. 불순하기 그지없다. 왜 그런 냄새가 날까. 바로 백성의 삶을 노래 한 사람이 사대부출신이기 때문이다.

 

"무릇 천하에 이치는 하나뿐이다! 범의 본성이 나쁘다면 사람의 성품도 역시 나쁠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착하다면 범의 성품도 역시 착할 것이다.........너희 인간들이 이치를 말하고 성(性)을 논할 때 걸핏하면 하늘을 들먹거리지만 하늘의 소명으로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나 다 같이 만물 중 하나이다.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인(仁)의 관점에서 본다면 범이나 메뚜기나 벌이나 개미나 사람이 모두 함께 같이 살기 마련이지 서로 해치고 지낼 터수가 아니다."-(362쪽);<호질 中>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연암은 평등세상을 노래하는 혁명가의 사상을 지닌 사람은 분명 아니다. 그는 오히려 중원을 향하는 흠모가 대단하다. 청을 지극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열망하는 마음이 강렬하다. 그러나 그의 지극한 시선이 머무는 청, 중원 땅은 그가 지닌 ‘접속’의 대상 중 한 무리다. 만약에 고비 사막을 건너 이슬람 문화권과 대면했다면 연암은 그것을 자기 식으로 ‘접속’하는데 또 신이 날 것이다. 그는 어떤 이질적인 것으로라도 접속할 수 있는 열려있는 사람이었음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예수회 소속의 이탈리아 신부 마태오리치는 종교적 목적으로 <천주실의>를 썼지만 조선의 가난한 선비 연암은 경계를 뛰어넘는 시각으로 <열하일기>를 썼다. 연암이 이슬람을 넘어 유럽문화를 직접 만났다면? 아프리카는? 인디오는? <열하일기>는 미완성의 궤적이다. 


이런 사대부가 국경 넘어 다른 나라의 여행기를 쓰면서 월경(越境)의 사상을 말했으니 기득권층은 경계가 무너짐을 당연히 전전긍긍대고 삿대질을 하지 않겠나. 맹목적이고 공허한 명분. 조선의 18세기는 분명 새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그것을 막아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총명한 군왕 정조의 문체반정은 <열하일기>속에서 탈주자학을 만난 것이다. 주자주의로부터의 이탈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러니와 액션, 긴장과 돌출로 연속되는 <열하일기>. 한 권의 책은 ‘오랑캐’의 냄새가 난다고 하여 빨간 딱지가 붙여진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이 공전과 자전을 하면서 돌고 돈다. 삼국유사에서도 자유로운 사상가 원효를 일컬어 “원효,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아니하다.”라고 써 있다. 경계를 뛰어넘는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글은 일차원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하고는 다르다. 그들의 사유는 겹과 겹 사이, 층과 층 사이를 꼼꼼하게 관통한다. 연암의 열혈 팬인 저자 고미숙도 이 점을 묵과하지 않는다.


“어떤 대상이든 입체적으로, 다층적으로 사유하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이면에 숨겨진 성격을 보려 하고, 그것을 인접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331쪽)


‘가운데 눈금’이 아닌 ‘제3의 길’을 찾는 <열하일기>. 불교적 성찰이 문득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연암이 매번 이런 식의 경건함이라면 열하일기는 아궁이 불쏘시개로 생명력을 상실한지 오래 되었을지 모른다. 목소리가 아름다운 여인네에게 반했다가 얼굴을 보고 실망하며, 달이 밝다는 핑계로 술을 마시러 나가는 한량 연암. 투전판에서 백 냥을 따서 또 술을 실컷 사 먹는 연암. 넘치는 강물 속에서 말꼬리를 잡아 살아나고 스스로 대견해 하는. 남의 집 담 너머로 구경을 하다가 일행을 놓치고도 허허 웃는 연암. 장난꾸러기, 얄개, 악동. 개구쟁이의 별칭을 지닌 연암.


혼란스럽고 무거운 18세기 조선사회에 유머로 경계를 무시하고 뛰어 다녔던 한 남자. 경계를 허물고 나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훨씬 더 수월해진다. 인간과 자연이 균등하듯이, 인간과 뭇짐승들이 같듯이. 그러나 경계를 허무는 일은 연암처럼 깬 천재들이나 할 수 있는 진리의 길인가. 3백년 후 후대에게 전혀 그 역설의 웃음이 가르쳐주는 의미가 빛을 바래지 않는 이유를 ‘<열하일기>그 후의 이야기’ 라는 다음번 글로 알려 줄 또 한 명의 연암 극성팬 작가를 어서 만나고 싶다. 그에게 <열하일기>로 인한 경계의 전복(顚覆)을 기꺼이 당하고자 한다.


유쾌한 연암만큼 그의 열성 팬인 저자도 서양철학자인 들뢰즈의 철학과 노마디즘(유목)을 가끔 끌고나와 대비시키는 지적재미를 보여준다. 엉뚱한 것 같으면서도 깊은 바닥을 지니고 있는 두 사람의 글은 책 한 권을 다 읽는 동안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있음을 발견한다. 좋아하면 닮게 되지 않겠나. 연암이 중원(사실은 넓고 다양한 세계)를 흠모했듯이 후대의 고전평론가 역시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던 열하일기에 들인 공이 놀랍다. 시종일관 연암을 상찬하는 것은 차라리 '숭상'이라고 불러야 할 지경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쓰인 책이지만 독자는 내심 눈을 찔끔 감는다. 왜? 여하튼 연암만큼 활달하고 재기 있는 저자의 문체가 자칫하면 지루함으로 하품을 하다가 덮었을 고전을 끝까지 다 읽는 수고를 제공해 주지 않던가. 책 말미에 다산과 연암을 비교하는 ‘보론’편은 짧은게 못내 아쉽다. 주 메뉴를 폼 나게 먹고 난 뒤 입가심으로 달짝지근하게 먹는 후식이 때로는 한입 더 먹고 싶어지는 경우도 있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