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름 그리고 겨울,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장소로 여행을 떠난다. 세상이 좁아서일까? 손꼽아 기다리던 자유건만, 도착한 곳에서 만나는 것은 무한한 인파뿐이기에 여행으로 인해 오히려 마음의 여유를 잃는다. 그리고 때로는 몸과 마음이 지치는 것으론 부족해 각박한 세상을 맘껏 느끼게 된다.
여행은 일종의 방랑이다. 한 곳에 정착해 사는, 하지만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심오한 물음을 자기 안에 담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방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에게 여행은 참으로 잘 어울리는 것일 수 있다. 아마도 오늘날 많은 여행이 짜증나고 지겨운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여행이 여행의 속성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행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진 일정, 정해진 장소들을 정해진 시간 안에 떠도는,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여행은 방랑이라기 보다는 또 하나의 '뿌리내림'이 아닐지...

그런 점에서 글을 쓰건, 사진을 찍건 작가라는 직업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물론 창작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느껴보지 않은 내가 가진 부러움은 피상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박완서 님의 글은 그런 나의 부러움을 한층 증진시켜주었다. 내게도 이런 여행이 허락될 수 있을까? ...
그렇다고 하여 그 여행이 화려함으로만 가득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여행은 소박하다 못해 다소 누추하고 때론 끔찍하기까지 했다. 어느 누가 여행지로 소말리아를 택할 것이며, 어느 누가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구걸하는 수많은 인파를 뿌리치는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아니,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웃음을 짓고 있는 그 순간마저도 서서히 죽음을 향해 걷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제 땅을, 제 나라를 잃다 못해 빌어먹는 생활에 대하여 어떠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삶들, 그것은 결코 즐길 수 없는 대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삶이다. 나와 같은 존재,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 태어나 나와 같은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삶에 귀 기울이고 때로는 온몸 가득 울어버리는 것도 우리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지... 그녀에게 허락된 답답한 가슴이, 그리고 마음으로 숱하게 흘렸을 눈물이야말로 그녀의 여행이 지닌 가치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녀의 여행이 고통만으로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바라본, 실로 가깝지만 언제 도달할 수 있을지 대답조차 불가능한 북녘 땅을 보고는 목놓아 울고, 고산병에 시달리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산소통을 부여잡고 있는 그 순간 함께하는 사람들과 형성했을 무언의 공감대, 그것은 세상 그 어떤 말과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동시에 여행을 여행답게 만드는 것이다. 직접 느껴보는 수밖엔 달리 방법이 없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글은 진솔했기에 책장 하나가득 간접적으로나마 나는 따스함을 맛보았다.

잃어버린 여행가방이 있다고 했다. 속옷이 잔뜩 든, 게다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가격이 비싸 부담스러웠던 커피가 속옷 여기저기 꽂혀 있는... 주인 잃은 가방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고, 가방을 여는 순간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그녀는 그 가방을 통해 지난 여행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볼 것이다. 처음에는 단 한 장면이, 하지만 그 한 장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으로 그녀의 머리 속에서 새로이 태어날 것이다. 어쩌면 그 가방은 잃어버려야만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가방은 그녀 안에 영원히 보관되기 위해 그 겉모습을 상실한 것일지도...

유난히도 뿌연 세상 아래서 보낸 하루였다. 눈이, 머리가 그리고 온 몸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 수 있는 그 어딘가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괌과 사이판의 에메랄드 빛 바다가, 숨 막히는 더위에도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티어 주었던 태국의 하늘이 그리고 큰 맘 먹고 구입했던 삼각대를 놓고 나왔던 영국의 어느 허름한 숙소가... 내 안의 방랑벽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나보다. 그녀의 글을 통해 나는 다시금 여행을 꿈꾼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