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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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문명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 그의 비판의 메시지가 이번엔 인류의 육식문화에까지 이르렀다. 건강을 위해서는 육식보다 채식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 이면에 깔린 사회문화적인 요소를 조목조목 나열한 이는 아마도 제레미 리프킨 하나 밖에 없을 듯 하다.미국 개척 과정에서 발생한 인디언에 대한 백인의 핍박 역사는 소에 의한 버팔로의 멸종과 너무도 흡사해 보였다. 게다가 수많은 인구가 여전히 가난과 기아로 허덕이고 있는 이 시점에도 소를 위해 무수히 많은 곡식들이 재배되고 수출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딘가 모르게 모순인 듯 하다.

과거 백정 등에 의해 자행되었던 소 도축 과정 속에서 인류는 살생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기에 많은 의식을 행해야만 했던 것과 달리 현대 사회에서 소의 도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일지라도 소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목격하지 않는다. 소의 무게를 증가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업무가 아닐까 싶었다. 기기에 의해 부위별로 잘려지고 포장되어 나오는, 절대 소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하나의 ‘상품’을 인간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스웠던 것은 작업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인권이나 작업환경의 개선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노동의 종말’을 통해 이야기했던 일자리의 감축으로 인한 실업 현상 속에서 낮은 임금은 일자리를 보전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문제시될 수 없을 듯 했다. 즐거움에 노동을 즐기는 것이 아닌, 그저 살기 위해 일하는 그들의 모습은 즉각적인 부정부패와도 직결되지 않을까 싶다. USDA에 의한 엉터리 검사 과정은 쇠고기를 즐기는 수많은 미국인들과 전세계인들의 건강에 대한 ‘나 몰라라’식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메탄과 오염물질을 만들어내고 목초지를 망가뜨리는, 환경 전체에 걸쳐 악영향을 주는 소를 그토록 신봉(?)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참 의야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때론 부패하고 각종 오염물질에 의해 오염되고 더 나아가 쥐나 그 외의 설치류들과 엉키고 섥힌 그 고기가 권력과 힘, 부를 상징하는 아이러니함이 녹아 있었다. 겉은 바싹 타고 속에는 여전히 피가 흥건히 고인 쇠고기를 씹음으로 인하여 인류는 자신의 남성다움을 과시할 수 있었고, 그것은 직접적인 권력과도 이어지는 듯 했다. 식탁에 쇠고기가 올라오지 않는다고 아내를 구타한 몇몇 남성들의 이야기는 가정 내에서 평등한 관계로서 아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아내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남성의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인류의 계속되는 진보를 위해, 인류가 살아갈 ‘지구’라는 환경 터전을 위해 육식의 종말은 분명히 필요한 일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부담스럽게 마저 들린다. 이미 너무도 오래전부터 고기에 길들여져 있는 동시에 부의 상징으로서 쇠고기를 찾는 인류이기에, 그 연결고리에 대한 근본적인 끊음 없이 육식의 종말을 주장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어거지가 될 수도 있을 듯 하다. 난 오히려 중심성의 원리를 부정하고 여성적인 것, 기존에 중요하다 여겨지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페미니즘적 시각이 이러한 그의 주장을 북돋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경험 등에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 속에서 인류는 그 적용 범위를 동물에게까지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와 동물의 공존에 대한 물음은 그 과정 속에서 해결될 수 있을 듯 하다. 그것은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육식문화가 지닌 권력구조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 될 것이며, 더 나아가 북반구 몇몇 부자들을 위해 자신들의 땅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제3세계인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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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전출처 : 드팀전 > 프로이트와 맑스를 넘어서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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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메이데이'-노동절이다.매일 일하는 노동자는 푹 쉬어야 되는데 회사에 나왔다.그닥 억울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공휴일에 일해 본 회사원은 알 것이다.조용한 회사는 일하기 꽤 괜찮다.위에서 지랄 거리는 아저씨들도 없고 ,지랄 거리지 않아도 있는 것 자체로 부담되는 또 다른 아저씨들도 없고...즐거운 메이데이!!

빌헬름 라이히의<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읽는데 보름이 걸렸다.'공사'가 '다망'하다 보니.(그렇다면 건축주는 쪽박차는 건가? 에이 썰렁) 서울 출장가는 KTX에서도 보고 피케팅 한다고 죽치고 앉아 있던 스티로폼 위에서도 보고(그 피케팅은 대개 버티기였으므로)....그나마 반쯤 넘기고 나니까 끝이 보여서 탄력 받았다.먼저 이 책은 나같은 일반인에게 약간 두려움을 준다.이거 또 개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해대지 않을까 하는..내지는 이 책 다 보고 나서도 기억남는 것은 단 한줄의 문장 정도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같은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본 이유는 '파시즘'에 대한 개인적 호기심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역사적 파시즘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고 또 일상적 파시즘에서 말하는 '대중동의'라는 부분도 늘 연구해보고 싶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또한 공부는 석박사만 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에 나같은 회사원도 책을 볼 수 있다는 쥐뿔 자존심에 읽었다...언젠가 이야기 했던 적도 있는 경험인데 .어떤 박사님이랑 이야기하다가 내가 문득 뭣도 모르고 '푸코'...'부르디외' 뭐 이런 이야길 꺼냈더니 이거 완전 사람보는 눈이 달라졌다.그런 용어들은 자기들의 전문영역인데 하찮은 일반인이 그런 단어를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쓰니까 놀랐겠지.그런데 그깟 단어 몇 개에 사람보는 눈이 달라지다니...광고에서 그렌져 타고 다니는 오래전 애인을 보고 '당신 잘사셨네요' 라고 카피 날리는 것과 똑같은 수준에서 유치했다.많이 배우신 박사님들도 유치하다.(휴..알라딘의 박사님들 계실테니 저의 편견을 용서해주삼.) 어쨋거나 평민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가끔은 졸면서 가끔은 넘어가면서 라이히의 책을 다 읽었다.라이히의  개념과 용어가 낯선 부분은 있었다.성경제학이니 오르곤이니 하는 것들은 대충 무슨 개념인 듯 하다라고 그려지긴 하지만 내 판단이 옳은지는 모르겠다.그러나 평민의 자긍심(무식에 힙입은)으로 이런것들은 대충 또 무시할 수도 있다.그렇게 '그냥 이런 거겠지'라고 생각하고 읽다보면 그다지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거참 내가 쓰고도 너무 말어렵게 한다...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평민의 도망갈 구멍 만드는 어법이라니)

라이히의 이 책에서 파시즘을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구조'의 표현이라고 밝힌다.아마 일상적 파시즘 논의에서 라이히가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부분이 이 문장에 담겨있을 것이다.라이히는 본인이 직접 서문에서 프로이트와 맑스의 변증법적 변화를 도모한다라고 밝힌다.특히 맑스의 경우 대중심리학의 지식이 없었으므로-이것은 일반 사회학 전체에 통용된다-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만을 제시할 분 그들이 성격차원에서 계급구분이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라이히는 우선 파시즘의 이해를 위해 이러한 통속적인 맑스주의 개념을 종식시킬 것을 권한다.즉 경제 결정론과 계급론적으로 파시즘에 접근하면 파시즘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쉽게 말하면 노동자들이 억압받다보면 이거 한번 뒤집어 없자 하고 불끈 일어나야 돼는데...파시즘의 도래를 보니까 그게 영 아니었다는 것이다.이거 불끈하고 일어서기는 커녕 '하이 히틀러' 하면서 손을 번쩍 드는데 이 상황을 맑스의 계급투쟁론가지고는 설명이 안된다는 것이다.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80년대 우리상황과 대치시켜도 비슷해진다.변혁세력 중 일부는 '민중'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믿음을 가졌다.즉 '민중'은 위대하고 '민중'은 무오류적이라는 식의 발상이다.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렇지 못한 경험들이 발생한다.이때 그 일부 막연한 민중주의자들은 쉽게 도망갔다."그게 다..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 조작으로 인해 민중이 각성하지 못했기 때문이야..끝." ...라이히는 당시 사회민주주의 세력들 역시 이와 비슷하게 너무 쉽게 대중의 권위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속성을 간과했다고 말한다.그 틈새를 가장 잘 파악하고 정치적 선전을 통해 대중의 속성을 활용한 것이 바로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결국 라이히는 대중에 대한 -물론 이것이 변혁세력이 말하는 민중과는 다른 개념일지라도-객관적인 응시를 주장한다.대중은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비합리적이며 책임감이없다.또한 신비주의에 자신을 의탁시켜며 권위주의에 호응한다.물론 라이히가 대중을 이렇게만 파악하면 더이상 인류역사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을게다.그는 대중이 원래 자유를 본원적으로 생각하며 또한 억압을 걷어내고 긍정적 변혁 주체가 될 수 있음도 밝히고 있다.라이히의 대중에 대한 시각은 그러므로 부정적이라는 것보다는 입체적인 객관화에 중심을 두었다고 할 것이다.

파시즘의 발호에 가장 중심에는 당시 독일 소시민계층이있었다.파시스트세력 역시 노동자계층보다 소시민계층에 우선적인 정치작업을 펼친다.계몽된 이성의 승리 표상이던 이 시민계층이 도대체 왜 얼토당토않은 파시스트의 중심축이 되었는가? 또한 소시민층에 이어 역사발전의 중심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왜 한줌 파시스트 정치꾼들의 손을 들어주었는가? 라이히는 파시즘에 손을 들어준 동시대인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악마가 숨어있었는지 탐구한다.이 부분이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며 라이히의 파시즘에 대한 접근법의 핵심이다.책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돼어 있다.상세하게 설명할 능력도 없고 이해도도 떨어지기에 그저 평민수준의 이해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파시즘의 대중심리의 가장 핵심에는 가족이데올로기,그리고 유아기때부터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의 억압,기독교 원리에서 나오는 신비주의적 가치 등이 있다.

권위주의적 사회는 권위주의적 가족의 도움을 받게된다.이것은 개개인의 성격구조 형성에 지대하다.이를 통해 가족-국가-문명이 형성된다.라이히는 이렇게 말한다.

권위주의적 국가는 자신의 대리인인 아버지를 모든 가족에 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가족이 국가의 가장 가치있는 권력도구가 된다.소시민적 영향력 아래에서 여성은 성적 반항 위에 체념하는 태로를 발전시키고 아들은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와 동시에 이후 모든 권위와 감정적으로 동일시하도록 아버지와 강한 동일시를 발전시킨다.

가족 내의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는 확대하면 결국 지도자에 대한 동일시로 발전하게 된다.사회문제에 있어써 지도자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대중은 정치적 결정에 있어서 내적인 모순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하고 책임감의 부채로 부터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또한 성적 억압 역시 가족내에서 이루어진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알 수 있듯이 가부장제와 이에 바탕이 되는 가부장 권위주의는 가모장제가 사적 축적을 통해 붕괴되면서 발생한것이다.정착을 통한 사적 축적은 일부다처의 형식을 띠게 되고 그전에 있던모계 사회의 성적 자유는 억압된다.성적 자유는 권위에 의해 박탈되고 상품화되어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토대가 된다.요즘도 쉽게 볼수 있는 캠페인을 생각해보면 아주 쉽다. 가족보호=성적 순수성=안전한 사회로 이어진다.이러한 도식은 이런 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보호=성적 억압=도덕주의의 강화. 파시즘 역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기대고 있기때문에 도덕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이것은 파시스트들의 볼세비즘의 성적 해방에 대한 왜곡된 선전을 통해서 현실 속에 강화된다.

성의 억압을 위해 파시스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연령층은 역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다.성의 억압을 위해 또 함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기독교의 도덕주의이다.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성에 대한 죄의식에 바탕을 두고 존립하는 종교이다.(기독교인들은 싫어하시겠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죄책감 없는 긴장완화를 추구한다.가부장적 종교는 이의 완화를 위해 종교적 제의를 이용하여-파시스트들 역시 유사하게-무력감에 빠진 인간을 조종하게된다.성의 억압은 종교적으로는 마조히즘적인 무력감으로 탈출하고 또 반대로 인종주의,순혈주의,민족의 우수성등의 조작에 의해 사디즘적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이 책에서 라이히가 다루고 있는 파시시트 정체는 히틀러로 대표되는 독일파시즘과 스탈린의 소비에트 파시즘이다.책의 후반부는 소비에트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라이히는 소비이트 문제를 다루면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를 제시한다.소비에트가 파시즘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레닌이 주장한 국가없는 사회 자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국가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 문제를 삼는다.라이히는 일종의 코뮨을 주장한다.하지만 그는 이것이 정치 체계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노동민주주의라는 것이 그것이.일종의 일하는 사람들간의 공동체 같은 형태,직능간 합리적 교류와 상호발전이 가능한 코뮨이다.라이히는 노동자의 개념을 맑스 시대보다 확장한다.요즘 말로 하면 화이트칼라들도 포함하는 노동자층의 자치가 노동민주주의의 형태가 된다.

라이히는 대중들의 성적인 경직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가능하지만 실제적 민주주의는 힘들다고 말한다.이 성적 억압의 문제는 당 시대에 부여된 문제가 아니라 수 천년을 걸쳐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내재화되온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라이히는 현 시대 사람들은 이미 성적 억압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은 있으나 근본적 변화는 어렵다고 본다.성에 대한 긍정과 성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바탕이 된 상태에서 자란 새로운 세대만이 진정한 파시즘의 위협과 결별하고 사회 자치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라이히가 말한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구조는 파시즘의 이해에 중요한 요소이다.또한 독일의 전형적 파시즘이 없어지고 난 이후에도 유사한 권위주의 정권과 이에 대한 대중 동의를 이해하는데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여러가지 시각을 제시해준다. 유럽은 파시즘을 아픈 역사를 통해 파시즘을 역사의 반동으로 파악하는 광범위 대중들의 역사적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본 제국 주의의 피해자로서의 위치에만 익숙할뿐 우리사회에서 유사 파시즘의 발호와 이데올로그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지금도 군사정권이 가진 유사파시즘적 성격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대중들이 존재한다.그리고 그들이 남겨 놓은 유사파시즘적 속성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이것들을 이해하는데 라이히의 이 책은 여러모로 유의미하다.

하지만 몇 몇 궁금한 점들도 남아있다.아는게 별로 없어서 학문적 질문이 되긴 어렵지만..라이히의 논지는 기본적으로 프로이트의 성억압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즉 유아기적 성의 억압이 무의식속에서 인간의 이후 모든 삶에 지속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다.라이히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프로이트의 성학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비판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과연 성의 억압이라는 것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인가?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밣혀내고 유아기의 성을 찾아낸 것은 중요한 발견이지만 유아기 성의 억압 문제를 너무 과대해석한 것은 아닌가? 프로이트의 오른팔인 칼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을 선언한 것도 프로이트의 성결정론에 대한 반대때문이었다.비록 칼융이 신비주의에 빠져 나치에 이용된 감은 없지 않지만.또한 들뢰즈와 가타리 역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론에 대해 괴테 시대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둥 의식 과잉의 백치의 상상리라는 둥 프로이트를 꼬집고 있다.프로이트 이론에 가장 1차적 비판인 과잉성결정론을 라이히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성 싶다.또한 학문적으로 프로이트 이론이 가진 가장 난맥상인 검증가능성에 대해성도 라이히에 적용된다.무의식의 성억압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며 또한 이것이 파시즘으로 연결되는 고리는 또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이란 책에서 조금 유치하고 일차원적이기는 하지만 라이히의 주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 파시즘의 지도자 및 그 추종자들이 성년으로 활동하던 시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영국 등 다른나라에 비해 독일,이탈리아에서 특별히 성적 억압이 심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즉 성적 억압이라는 것은 한 국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통시적이며 공시적인 성격을 갖는 것인데 왜 다른 나라에서는 파시즘의 발호가 없거나 미약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만 국가 전체적으로 발호했는가? 독일과 이탈리아 사람들이 더 억압받아서?  성적으로 억압된 대중들의 전향적인 파시즘 지지에 대해서도 좀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기본적으로 라이히가 말한 파시즘 내에서 대중들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 생활태도에 대해서는 동의를 했다.하지만 라이히가 성의 억압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간 것에 비해 문화산업이라는 쪽에 혐의를 두었다.문화산업을 통해 관리되는 세계 속에서 대중들이 수동적으로 인간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물론 대중문화의 혁명성과 대중들의 자발성에 대해 부정적인 아도르노의 입장을 고려하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성의 억압'보다는 현실성이 있어보인다.

라이히가 말하는 '노동민주주의'라는 것도 난망하다.'노동민주주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라이히가 실험실에서 흰 가운입고 있는 의사라는게 명백히 드러난다.도대체 '노동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치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막연하고 또 이상적이다.라이히의 말에 따르면 기존 정치체계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이 신개념이 낯설게 보이는 것일 것이다.라이히가 말하는 노동민주주의의 자치 개념은 1차적으로 성적 억압이 없는 -아니 최소한 어느정도는 사라진-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다.또한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자치개념이다.내게는 이것이 일종의 기독교의 천국 개념처럼 보인다.라이히의 실험실에서는 이러한 코뮨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하지만 소규모의 대안적 코뮨이 아니라면 과연 이것이 현실 속에서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고 믿는 다면 인류 역사가 구현해 놓은-설령 빌어먹을 것이라도- 현실의 정치,경제,사회의 촘촘한 구조를 너무 쉽게 해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가 위대하게 거론된 것은 그의 논지가 무오류이기때문은 아니다.그가 밝혀낸 것인 이후 수많은 학문적 연구와 사회 분석에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1940년대 파시즘이 한창 발호중일 때 이런 위대한 책을 써낸 것은 참으로 놀랍다.또한 그가 가진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후 그의 사회,심리학적 접근이 후속 연구를 이끌어낸 것을 생각하면 역시 이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하다.

모를 때는 넘어가고 지겨울만 하면 쉬어가는 평민의 '까잇거' 근성만 있으면 <파시즘의 대중심리>을 책장 한 켠에 꽂아두고 두고 두고 펼쳐볼 수 있다.이런 책들을 학자들의 전유물에서 끄집어 내는 것이 또 평민의 역할이고 '까잇거'정신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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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2 0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간디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6
제프리 애쉬 지음, 안규남 옮김 / 실천문학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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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빈부의 격차, 소수에게만 독점되는 권력. 이 모든 것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시작부터 평등치 않았던 인류의 지난날과 만나게 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믿음이 존재치 않던 시절, 누군가는 타인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던 시절, 어느 시대나 사람이 살아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너무 멀리 떠나와서일까? 나에게 그 시절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적인 부유함도 불과 몇십 년 사이에 형성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거침없이 흘러왔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객관적으로는 불과 한 세기도 채 되지 않은 기간이지만 말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시아는 잠들어 있었다. 폭력적인 제국주의가 '선진 계몽'이라는 탈을 쓰고 곳곳에 밀려들던 그 순간, 아시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 시기는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기였다. 독립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강인함을 갖춘 인물, 모든 이들을 포용하되 때론 독불장군과도 같은 성미로 타협을 거부할 줄 알아야만 하는 인물, 지금의 우리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 즉 시대가 낳은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인도 역시 잠들어 있었다. 세포이 항쟁으로 인해 무굴제국이 붕괴한 이후 인도 전역은 철저히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1869년 태어난 간디에게 이러한 식민 질서는 너무도 견고한 것이다 못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대대로 수상직을 맡아온 집안에서 태어난 그에게 '저항'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어울리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영국인에 대한,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복합적 감정에 시달렸다. 영국은 그에게 인도를 안정시키고 발전시켜 줄 구원자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인도를 억압하고 있는 지배자이기도 했다. 아니, 법률 공부를 위해 영국에 머물면서 최대한 런던 사람처럼 보이고자 노력했던 것 등을 본다면 그는 처음에는 오히려 후자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은 지도 모른다.
남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조금씩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 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고,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하지만 이는 단지 개인적인 깨달음에 그치지 않았다. 직접 인도인들을 조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는 과정을 통해 그는 희망을 읽었다. 폭력에 맞서는 비폭력의 잔잔하면서도 그치지 않는 힘을...

비폭력, 그가 평생을 통해 보여주었던 신념이었다. 어찌 보면 이는 무모해 보일지도 모른다. 상대는 폭력적이다 못해 무기로 무장을 했건만, 그런 그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말없이 걸어나가다 쓰러지는 것이 전부이다. 희생은 또 다른 희생을 낳았다. 첫 번째 대열이 쓰러지면 두 번째 대열이 밀고 나갔고, 두 번째 대열 역시 쓰러지면 그 다음 대열이... 하지만 그들의 피는, 그들의 죽음은 미움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이를 두고 무력보다도 더욱 우월한 무기라 이야기하곤 했다.
스스로를 향한 강렬한 채찍질과도 같은 이러한 방식의 투쟁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지속했던 단식에서도 역시 엿볼 수 있다. 타인을 해하지 않는 그의 투쟁방식은 상대를 약하게 하진 못했지만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편을 강하게 만듦으로써 승리하는 전술과도 같았다. 그의 싸움은 궁극적으로 모든 이들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적을 쳐부수는 것이 아니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기에 그에겐 타인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았고, 상대는 절대적으로 미워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었기에 상대와의 타협 역시 적정한 선에서는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필요로 했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 그가 종종 보인 독선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는 카스트 제도 최하단에 위치하는 불가촉 천민들에 대해,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차별 받는 여성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자신은 자신의 종교에 의해 엄격하게 자신을 기속했지만, 자신과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을 포용할 줄 알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향한 폭력을 없애고자 그는 노력했다.

어찌 보면 그의 삶은 실패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힌두교 신자로서 그는 무슬림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지만, 결국 무슬림 극우주의자의 손에 죽었고,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한 지방에서는 종교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갈린 인도와 파키스탄의 깊은 갈등을 여전히 엿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간디의 정신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다 못해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이라 재해석하는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폭력을 선호하는 우리에게 간디가 보여준 선례는 희망이요, 이상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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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열린사회의적 > 한 시대의 증인으로, 전환시대의 논리자로...!!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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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를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나는 언제나 이처럼 우리 군부나 정보주나 극우.반공 .반통일적 전쟁주의자들이 몽매한 국민을 속여가며 그들의 정권 연장을 도모하고 민족의 화해를 거부하는 그들의 주장의 가면을 벗기기를 사명으로 여겼지. 대중에게 진실을 밝히고 깨우쳐주려고 했어요(646쪽)"

리영희를 처음 접한 것은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그의 저서에서 였습니다. 그 책에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말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무엇이 진실인지 들려주었습니다. 그 충격을 통해 그의 책을 몇 권 보았습니다. 『새들은 좌.우의 날개로 난다』까지 들려준 그의 이야기는 가히 '전환시대의 논리'를 제공해 주었으며, 내가, 우리가 가진 미국관(--觀)에 대해 전혀 낯선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의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그 깊이와 정세 분석, 친구들과 이야기하면 낙동강 오리알 처럼,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든데라는 거짓말같다는 이야기뿐. 하지만 내가 그의 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그가 말하는 논리가 사실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시대에 두 사람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은 리영희를 아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리영희를 모르는 사람.

나는 ①리영희의 글쓰기가 무엇인가를 살핀 다음, 그 글쓰기에 비친 ②세계관을 담아보고, ③리영희라는 인간적인 존재④역사적인 물음, 더 나아가 ⑤우리가 지향해야 할 시대를 적어보겠습니다.

1. 리영희의 글쓰기
"취재기자는 세 가지 스타일이 있어. 발로 뛰는 기자, 남의 기사들을 모아서 쓰는 기자, 안건의연구를 통해서 접근하는 기자. 이 세가지에요. 나는 그 세번째의 연구.조사하는 방식이 주특기였기 때문에, 간사이면서 혼자 정보원을 만나는 그런 취재는 필요가 없었어요(315쪽)"

언제나 연구 조사하는 방식이 주특기이기에, 그는 무작정 찾아가서 '~꺼리'가 없느냐고 묻고 다니지 않습니다. 연구 조사를 통해 90% 이상의 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진 다음, 나머지는 이에 대한 답변을 얻는 형식을 취합니다. 이런 지은이의 글쓰기는 삶을 관통하는 세계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일생 동안 '군부'나 '정보부'가 주는 정보만을 가지고 기사화했다면, 시대의 증인으로 우리곁에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정부에 의해 압박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세상에 다가가야 하는가를 지은이의 직업정신에서 읽어내려갑니다. 그의 글쓰기는 『모략』에서, 손자의 전략을 인용한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勝兵先勝而後求戰 敗兵先戰而後求勝
이기는 兵은 먼저 승리를 구하고 싸움을 한다. 패하는 兵은 먼저 싸우고 나서 승리를 구하려 한다.

2. 리영희가 바라보는 세상(세계관)
"공자의 『논어』에 「정언」(正言)편이 있어. 제자가 공자에게 "정의의 요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데 대해, 공자는 "사물의 이름(명칭 또는 명분)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다"라고 답했어요. 다시 말하면, 검은 것은 희다고 할 것이 아니라 검다고 해야 하고, 악은 선이 아니라 악이라고 칭해야 하고, 사슴은 말이 아니라 사슴이라고 불러여 하고, 말은 사슴이 아니라 말이라고 칭해야 하고... 이처럼 모든 형태나 관계나 성격이나 형상의 본질을 정학하게 인식하고, 그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인간 상호간의 생존에서 혼란을 예방할 수 있고. 또한 그 사고의 주체인 개인의 의식과 행위에 괴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에요.(374쪽)"

"나는 한일관계에서 일본의 조선침략과 합방, 그리고 식민지 문제들에 대한 법적.정치적 죄과에 대해서는 응분의 준엄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민족적 입장을 취하지요. 이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일 겁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는 한일 두 나라의 문제를 과거의 역사적 사실만을 강조하면서 일본인 또는 일본 민족에 대해 일방적 비난이나 규탄을 일삼는 배타적 민족주의의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아요. 19세기 말의 한민족이나 당시 우리 선조들이, 어느모로 보나 나라를 지키는 데 허물이 없었다면 모르지만, 실제로는 당시 우리 선조들의 책임도 컸어요. 이것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하는 엄연한 진실이지요. 자기 민족의 허물은 비단 보자기로 덮어두고 상대방의 행위만을 극악하게 그려내는 것을 나는 반대해요.(585쪽)"


지은이는 공자의 말을 빌려서, "사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 정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글쓰기나 세계관은 이 '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물은 현실과 같습니다. 그는 현실 또한 객관적인 눈으로 옳은 것은 옳고, 그런 것은 그러다고 말할 때 긴실을 볼 수 있고,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노신을 스승으로 모실 정도로 그럴 감싸는 것도 '정의'에 먼저 다가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3. 내가 믿는 사랑이...
가장 추한 모습으로 다가 올 때에 너는 그 사랑을 두 손 열고 맞이할 수 있느냐?

혁명을하든가, 민중 운동을 하든가, 역사적 진보를 믿는다면서, 가진자보다 못 가진자, 조금 더 힘들여 사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건냅니다. 하지만 그는 때때로 사랑으로 화답하지 않고 시기, 질투, 배반 등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진정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광주 교도소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알고, 그 기쁨을 같은 재소자에게 알린 댓가가, "22일 벌방형". 작은 광한만 곳에 가만히 누운 채 있어야 하는 곳, 빛 마저 들어오지 않고, 온통 새까많게 칠해진 먹방 같은 공간에 화장실이 나란이 누워 있는 곳. 그곳에서 낯 모를 사람에게 '빵'과 '우유'를 얻어먹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런가?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육체적 경험을 가장 낮은 장소에서 온몸을 겪습니다. 과연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어갈 수가 있을까? 지은이는 "난 머리가 혼란해졌어요"라고 인간적인 고뇌를 이야기 합니다. 그는 신(神)이 아니며, 또한 성인(聖人)도 아닌, 우리곁에 숨쉬는 이웃이였습니다. 이웃이기에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세상이란 엉뚱한 사람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는 반면, 같은 국민에게 밀고를 당하고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받기도 하는 그런 것인지. 난 머리가 혼란해졌어요.(499쪽)”

세상이 어지러운 날, 미륵이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내려옵니다. 그리고 온 사람들에게 바르게, 착하게 살아라, 내 말을 듣고 극락을 누려라, 너희가 그토록 바라던 이, 내가 미륵이다.라고 했는데, 혼탁한 세상에서 돌아온 답은 '니가 미륵이면, 나도 미륵이고, 저 강아지도 미륵이다'라는 암상뿐이다. 미륵은 수 없이 이야기를 하고, 수 없이 같은 말을 되로 받는다. 하지만 끝끝내 사람을 저버리지 못하고, 그가 한 행동은...(소설 토정비결』 참조)

감옥에서 인간적인 고뇌를 할 때에, 나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떠올립니다. 수 많은 색과 국제 정세 분석의 능력과 대학교수라는 상당한 인텔리겐차이면서, 사람 앞에서 '머리가 혼란'스러워하는 인간 리영희. 그도 나와 같이 숨쉬는 사람이란걸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하지만 동질감보다 내가 평생을 따라도 모자랄 듯한 선생(先生)인 동시에 스승입니다.

4. 계속 되풀이 되는 역사?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남한의 청녀들이 돈덜이를 위해서 미국의 용병으로 파견되었을 때에, 한국정부와 극우 반공주의 언론들은 마치 전 세계 국가와 민족들이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는 줄로 착각했어.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군대를 파견해, 그 따위의 범죄적인 전쟁에 협력한 나라는 남한 이외에 필리핀, 타일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세 나라밖에 없어요. 한국에서 상시 5만 명의 전투부대를 보낸 것과 달리, 이들 나라에서 보낸 병력은 포병, 공병, 병참 등, 천 명 내지는 최고 3천 명 정도였어오. 그밖의 다른 국가들은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거절했어. 영국은 혈연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미국의 전쟁협력자가 아닐 수 없는 처지인데도, 마지못해 '유니온 잭'(영국 국기)을 앞세운 의장대 6명만을 파견했어. 600명도 6천 명도 아닌 단 6명이오! 사이공 공항에서 외국 귀빈을 맞이하는 의장대요. 수없임낳ㅇ느 국제법 위반과 정치적 관례와 상식을 뒤엎는 행위들이 많았어. 나는 베트남전쟁 기간 중에 오로지 미국 지배집단의 이 같은 범죄적 행위를 연구하고, 우리 한국의 극우 반공적 언론 통제의 쇠살을 뜷?진실의 편린이나마 전달하고자 무진장 애를 썼어요.(357쪽)"

우리 민족성을 평화를 상징하는, 남의 나라를 한번도 침범하지 않은 나라라고 더 이상 말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에 5만명이라는 젊은 사람을 보냈고, 그곳에서 '라이따이한'이라는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켰고, 나몰라라 합니다. 아무런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에 세계 3위의 강력한 군사력을 드높였습니다. 과연 우리나라가 주권국가로서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미국과 관계에서 형님 동생으로 지내거나, 한 배를 탄 민족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이 없으면 안되는 나라. 미국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나라. 과연 한 국가로서의 존엄성과 자부심을 가질 수가 있는가? 미군이 빠져나가면 그 국방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우리 누나가 동생이 미군에게 처참히 짓밟혀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이 분노를 타국에 가서 그대로 행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마저 듭니다? 미군없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해방, 한국 전쟁을 그치는 동안 꾸준히 준비하였다면, 적어도 국방비에 얽매혀 한 국가의 존엄성을 남의 나라에 그냥 던져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미국이 부르면 언제나, 어디든지 달려가는 총알바지 군인을 키우는 나라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악순환의 고리 끊기와 국제 관계 속에서의 자리매김을 언제할 것인가? 미군없는 한국을 준비하여 주체성과 내 나리에대한 자부심과 타나라에 대한 이해와 겸손을 지닌 국가로 거듭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나는 베트남전쟁 끝에 하나의 확고한 의견을 갖게 됩니다. 미국자본주의는 그 본성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잔인무도할 수밖에 없다. 약소민족에 대한 전쟁 없이는 그 제국주의적 경제.정치.군사.과학기술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확신이에요. 베트남전쟁이 그노골적인 본보기이지만, 이미 그때에는 라틴아메리카의 10여 개 약소국을 잇달아 군사적으로 침범.점령했고, 약소후진국들이 조금이라도 민주적 복지와 자립적 경제정의를 추구하려고 하면 그런 정권들은 미국이 뒷받침하는 반동적이며 미국에 예속된 군부로 하여금 쿠테타를 읽으켜서 전복시켰 왔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쿠바와 카스트로 정권타도 공격이고, 니카라과에서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부패.타락한 미국 예속정권을 혁명으로 쓰려뜨리고 참신한 민중적 정치혁신을 하려던 산디니스타 정권을 그런 방식으로 타도했어요(1979).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깨끗하고, 공정하고,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사회주의정권을 세운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의 정권에 대해 미국은 역시 같은 음모적 수법으로 대통령을 사살하고 미국 예속 군부쿠테타를 조장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킵니다(1973). 아르헨티나 군부쿠테타(1976), 볼리비아(1980), 콰테말라(1983), 아이티(1988), 파나마(1989), 콜롬비아(1989) 등 열거하면 끝이 없어. 이것이 민주주의.정의.자유를 내세우는 '미국이라는 나라'요, 나는 한국인의 미신인 미국(美國)이라는 국가의 지배적 본성의 추악함으로 깨우치는 노력을 나의 임무의 중요한 항목으로 삼았지. 오늘의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이라크전쟁을 보시오. 이것이 나의 연구와 집필의 주요 동기였어. 이 모든 추악한 행위의 근본 동기는 미국 자본주의의 투자와 시장확보와 미국 기업의 무한정적인 경제력 장악을 위한 것이지. 미국 자본주의의 목적에 조금이라도 제동을 걸거나 자주적이고자 하는 인민과 정권을 미국 자본주의는 결단코 용납하지 않는다구.(361~362쪽)"


지은이는 수 없이 미국이라는 실체를 해부함으로써, 우리가 존경하거나 동지애를 가질 수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져줍니다. 과연 '극우.반공. 반통일적 전쟁주의자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우상화할 때에 굳굳히 맞서 싸운 이가 리영희입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해 미국이라는 실체를 이야기하면서, 민족의 주체성을 제기합니다. 만약 리영희가 없었다면 우리가 가진 미국관은, CNN이 내보내는 영상만을 진실이라고 믿지 않았을까 합니다.

5. 시대를 읽는 힘.
우리는 내부적으로 보는 시선에서, 외부적으로 보는 시선으로 돌려야 합니다.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의 영구 집권만 생각하는어리석음, 박정희의 유혈 독재의 지속이나 높은 경제 성장이라는 단편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지구촌이라는 울타리에서 벌어이지는 힘찬 움직임과 그 속에 우리가 나아갈 지향점과 희망을 세워야 합니다. 이러한 광범위하고 선구적인 시점을 심어준 사람은 리영희입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보여준 "베트남 전쟁에 관한 미국정부의 극비문서(펜타곤 페이퍼)'를 통해 "세계적 변화가 머지 않아 한반도와 남한애 광명의 햇살을 비춰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기대했어. 이것이국내의 질식할 것만 같은 반죽음의 상태를 참을 수 있게 하는 활력소(424쪽)"였다고 회고합니다. 즉 국내에서 암울한 통치가 이어지고 있을 때, 그는 세계적 정세를 통해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짐작합니다. 우리는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땅 위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미국과 우리나라만 존재하는 마냥, 좁은 세계관만 존재합니다.

이제 인터넷을 통한 시.공간의 동시성이 열렸습니다. 마우스 클릭(click) 한번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을 볼 수가 있으며, 미국의 일방적인 언론에서 벗어나 이슬람을 대변하는 알자지라 방송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상호 연관성에서 놓여 있으며, 같이 일을 쉽게 꾸밀 수가 있습니다. 몇 몇 지상파나 언론이 전해주는 정보에서 벗어나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변화가 기계적인 변화에 인간이 대응하면서 깨닫는 것이라면, 온몸으로 부딪혀 세계적인 흐름을 읽어냔 사람은 리영희입니다. 스스로 열린 생각으로, 역사의 진보를 믿고, 인류애적 사랑을 추구한다면 커다란 파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한 세대 먼저 탐구하고, 노력한 사람 - 그는 역사적 중심에 서서 살아있는 기록이자, 그의말을 빌려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제공한 선구자입니다.

리영희의 글쓰기는 "사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쓰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의 탐구는 "연구.조사"가 주특기입니다. 연구.조사를 통한 폭넓은 시야는 내가 보지 못하고나 못 본 것에 대한 쿠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불러 일으켜 주었습니다. 즉 '사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쓰는 것'에 대한 정의를 내세우지 않았다면, 리영희는 시대의 선구자로 남아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원칙론적 자세가 시대의 증언자이자 선구자로 우리곁에 두었습니다. 분명 우리시대는 두 분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리영희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이렇게 높을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 자리는 높습니다.

덧붙임--
리영희의 대화는 그 이전 저서, 『역정』이라는 자서전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새들은 좌.우로 난다』등 몇 권의 저서를 읽지 않고 접근할 때에, 얼마나 대단한 인물일까라는 의문은 기대만큼의 선물을 주지 않을 듯 합니다. 즉 『대화』에는 인간적인 리영희가 있고, 그의 저서에는 사회적 리영희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부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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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글샘 > 대학생이 되면 꼭 읽어야 할 ... 리영희 선생님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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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화의 원흉, 진실의 목탁...

리영희 선생님. 우리 시대 의식화의 원흉이라고 판단한 그놈들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내가 대학 들어가서 읽은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은 좀 관념적인 글이었고, 동녘편집부의 <철학 에세이>는 '이게 뭐 철학이지? 좀 허술한데?' 하는 생각을 들게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 읽은 선생님의 <전환 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분단을 넘어서>같은 책들은 나의 <절대 데모를 해서는 안 된다>던 무식한 주관을 일거에 무너뜨린 책들이었다.

그분의 역작이라면 뭐니뭐니해도 <베트남 전쟁>일 것이다. 베트남의 전쟁에서 우리가 얻어온 것은 과연 무엇인지... 아직도 <국익>을 위해서 이라크에 부대를 파견하는 무지 몽매한 친미 정권이 지배한 어리버리 한국이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우린 베트남을 짓밟았고, 베트콩을 쏴죽였다는 '김상사들'의 새카만 얼굴만 보았지 그들의 몸 속에 묻어온 고엽제와 그들이 뿌리고 온 '2세들'의 슬픈 역사는 뒤켠에 감추어 두었던 역사를 배웠다.

푸에블루호 사건이라든지, 유신 시대의 삶을 접하다 보면 내가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한국 현대사라는 것들이 얼마나 허술했던 그것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선생님의 글로 읽지 못하고 몸이 불편해 져서 임헌영과 대화 형식으로 엮인 글이다 보니 좀 뻣뻣하긴 하지만, 740페이지에 달하는 인생 역정은 나의 피를 들끓게도 하고 좌절하게도 한다.

일제가 물러가고 난 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은, 4.19의 호기를 군사 정권의 쿠데타로 놓치게 되고, 1980년의 서울의 봄마저 광주의 피를 부르고 무위로 돌려버렸으며, 6.29의 뜨거웠던 열기도 보수 반동들의 단일화 후보 실패로 식어져 버리고 말았다.

리영희 선생님은 자꾸, 우리 민족의 저열함이 아닌가, 너무 구석에서 우물안 개구리로 자위하며 살지 않는가 걱정하시지만, 역사를 읽으시는 분이시니 다른 나라들의 좋은 기회에 비해서 우리 나라는 더 좋은 조건들을 더 악조건으로 만들어 버린 오욕의 역사가 더 안타까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2차 대전 이후 최고의 냉전 지대, 21세기 유일한 분단 지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늘 저자세로 고개 수그리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존경할만한 지도자가 없었다기 보다도, 그런 지도자가 될 법한 사람들은 반드시 제거를 당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숨어서 읽었고, 경찰서 대공과에서는 <해전사> <전환시대의 논리> <민중과 지식인> 같은 책들을 의식화 서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던 시절에 체계적으로 학습하지 못했던 분야를 이제라도 차근차근 읽고 싶은 욕망을 부른 책이다. 그런데, 촛불 시위에는 긍정적이지만 또한 축구판에서도 열정적인 요즘 젊은이들이 이런 책을 읽기나 하려는지... (요즘 젊은이 걱정하는 걸 보면 나도 늙은이 축으로 가고 있는 모양^^)

장차 외교 무대에 서고 싶다는 작년 우리 반 반장 녀석이 지금 재수하고 있는데, 올해 학교를 잘 가면 이 책 한 권 선물해 줘야겠다. 외교 무대에서 알아야 할 것, 지켜야 할 것, 배워야 할 것들이 이 책엔 무진장 묻혀 있는 것 같으니깐.

숱한 필화를 겪으시고, 5년 전 쓰러지셔서 이제 더 이상의 저술은 기대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부지런히 강연도 하시고 다니실 때, 한 마디라도 더 배우고 싶은 분.

몇 안 되는 이 시대의 양심이자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분의 이야기를 읽은 주말은 가슴 뿌듯하다.

선생님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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