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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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대부분의 평전은 대상인물을 일종의 위대한 인물로만 인식하는데 급급해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인물과 동시대에 살지 않은 사람으로서 평전은 그 인물을 이해하는 도구이자, 아울러 그 인물을 찬양하게끔 하는 도구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어쩌면 마르크스에 대한 기존의 책들 역시 그러하지 않았나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마르크스는 악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로서 기억되고 있다. 반면, 사회주의 국가나 운동을 한다는 진영에 있어서의 마르크스는 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을 논하는것은 너무도 어렵고, 왜곡이 많으며, 인물 마르크스에 대한 논의는 더더욱 힘들었던게 현실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수식적 문구들을 찾기 힘든 몇 안 되는 책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은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인간적인 묘사들로 가득차 있다. 유물론과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마르크스 이전의 인간 마르크스에 대한 묘사들로 말이다. 어떠한 조직에 있어서 지배하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이 이끄는 조직에 있어서는 민주적 독재자로 군림했던 모습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야기하면서도 삶의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를 끊임없이 갈구했고, 찢어지는 가난함에 허덕이면서도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잃는걸 원치 않아 비서를 고용하고, 딸들을 귀족적 삶을 익힐 수 있는 학교에 보내는 그의 모습은 한편으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우리 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러한 부모의 상이 아닐까 싶었다.

그것은 얼마전 텔레비전에서 본 새벽 4시까지 콩나물 재배를 통해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5살난 아들을 엄청난 강습비가 드는 영어유치원에 등록시킨 부모의 모습과도 상통했던 것이다. 그의 가족은 거의 모든 일생에 거쳐 가난 속에서 허덕이며 살았다. 식량부족으로 인해 아내의 집안 가보와도 같은 물건은 늘 전당포에 내맡겨져야 했으며, 마르크스 자신 역시 유럽 당국의 감시와 탄압에 시달리며 감옥을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의 사상에 자신있어 했고 논쟁을 즐겼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의 약점(?)을 발견하여 파고드는 것을 즐기는, 그는 어쩌면 전형적인 토론가로서의 자질을 타고 난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의 이러한 이중적인 삶의 모습에 대해 접하며 일종의 실망도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러한 그의 사상이 오늘날 까지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지난 날의 소비에트 붕괴라는 혁명 실패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대안중 하나로 여전히 인식되고 있는 것은, 그의 철학이 도서관에 앉아 문서들을 뒤적거리면서 만들어낸 공허한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게 아닌가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실천'의 학문이었던 것이다. 실제적으로 마르크스는 대중을 선동하고, 노동자를 조직화하는 면에 있어서 늘 전선의 최전방에 섰다.

비록 부르주아의 삶을 동경했지만 자신의 삶은 프롤레타리아 이하의 삶의 모습이었고, 영국민의 삶의 현실적 모습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했지만 결국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이상향을 제시하는 등, 그러한 과정들이 모두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의 일생에는 엥겔스라 불리우는 절친한 친구가 늘 함께 했다. 둘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주면서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길목 하나하나를 건설해나갔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중적 모습에 대한 묘사들을 보면서 나는 그 속에서 완벽치 못한, 하지만 너무도 인간적인 마르크스라 불리우는 하나의 '인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러한 발견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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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딸기 > 책이 너무 맘에 들어서 리뷰는 생략.
악마의 사도 -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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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으면서 하도 키득거리니까 옆자리 선배가 대체 무슨 일이냐며 궁금해하다가, 비웃다가... 이토록 나를 웃긴 책. 최근 몇년간 읽은 책들 중에서 날 가장 많이 웃게 만든 책이라면 단연 이 책이다. 이름하여 ‘악마의 사도’. 저자는 리처드 도킨스이고, 책 제목은 다윈의 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런 거창한 이름들을 들먹이면서 ‘웃기고 재미난 책’이라고 하면 외려 날 이상하게 볼 주변인(말 그대로 주변 사람들)들도 있겠지만, 허나 어쩌랴. 사실인 것을. 정말 웃기고 재미있다. 너무 웃겨서, 통 그런 일 없는 내가 사무실에 앉아 키들키들거리다 못해 푸칼칼거렸다.

책이 너무 맘에 들어서 괜히 흥분해 리뷰를 도저히 할 수 없다, 라고 하면 될까. 이 재미난 책에 쓸데없는 나의 감상 따위를 덧붙여서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이유가 있을까? 이 책이 정말이지 황당할 정도로 맘에 들었다는 것, 도킨스에 대한 애정을 넘어서서 도킨스가 애정을 표현한 다른 저술가들의 글까지 몽땅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기나긴 제목의 SF 소설까지 읽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는 것, 동시에 스티븐 제이 굴드에 대한 애정마저도 더욱 깊어졌다는 것. 내 생의 책 중 하나로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핀치의 부리’ 만큼 이 책이 좋다고 하면 어쩌면 내 친한 친구들은 내가 ‘악마의 사도’에 얼마나 폭 빠졌는지를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당분간 ‘악마의 사도’ 광분모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은 도킨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읽어선 안된다. 도킨스와 굴드의 다른 책들로 일단 바닥을 깔아놓고, 그 뒤에 이 책을 읽을 일이다. 굴드와 도킨스의 책을 각각 한권씩이라도 읽어본 이들이라면, 특히 굴드의 ‘풀하우스’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이들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 매력 넘치는 인간들 같으니! 나 완존히 도킨스 아저씨 때문에 미치겟또...


도킨스 아저씨의 종교비판.


종교를 정신 바이러스로 묘사하면, 종교를 비난하거나 심하면 적대시한다는 식으로 해석되곤 한다. 둘 다이다. 나는 ‘체계를 갖춘 종교’에 왜 그렇게 적대적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럴 때면 나는 체계를 갖추지 못한 종교에도 똑같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말로 서두를 떼곤 한다...

체계를 갖춘 종교가 노골적인 적대감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이유는 (버트란드 러셀이 태양 주위를 도는 중국 찻주전자라는 가상의 사례로 압축시킨 상상을 예로 들자면) 러셀의 찻주전자와 달리 종교가 강력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세금을 공제받으며, 아직 어려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체계적으로 주입된다는 점 때문이다. 아이들은 찻주전자를 다룬 엉터리 책들을 암기하면서 인격 형성기를 보내라고 강요받지 않는다. 부모가 기이한 모양의 찻주전자를 선호한다고 해서 정부 보조금을 받는 학교가 그 부모의 아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은 없다. 찻주전자 신자들은 찻주전자 불신자, 찻주전자 배교자, 찻주전자 이단자, 찻주전자 모독자를 돌로 쳐죽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하나가 아니라 세 개의 찻주전자를 믿는 비정통파 부모의 딸과 혼인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는다. 찻주전자에 우유를 먼저 따르는 사람들이 찻물을 먼저 따르는 사람들의 무릎에 일부러 우유를 엎지르는 짓도 하지 않는다.

...이제 솔직해지자.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말이다. 이제 ‘민족주의자’ ‘왕당원’ ‘공동체’ ‘인종집단’ ‘문화’ ‘문명’ 같은 완곡어법은 그만 써라. 당신에게 필요한 단어는 종교이다. 당신이 위선적인 행동까지 해가면서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단어는 종교이다.


이 책은 도킨스가 그동안 여기저기에 썼던 글들을 묶은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과학적으로 사고하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비과학적인 모든 것을 혐오한다 어쩔래”가 되겠다.

더불어 책에는 도킨스가 지인들에게 보내는 헌사와 추모사들도 들어있다. 과학소설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에게 보내는 추모사의 한 토막.


과학계는 친구를 하나 잃었고, 문학계는 등불을 하나 잃었으며, 마운틴고릴라와 검은코뿔소는 용감한 수호자를 하나 잃었고 애플 컴퓨터는 가장 달변인 대변자를 잃었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지적 동료이자 내가 아는 한 가장 친절하고 재미있는 사람을 하나 잃었다.


과학계 동료인 윌리엄 해밀튼의 추모사에는 도킨스 특유의 유머와 애정이 넘쳐나서, 나는 추모사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멍한 정신 상태는 전설적이라 할 정도였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굴드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 굴드의 ‘풀하우스’에 붙인 서평, 굴드에게 보내는 편지 등 굴드와 관련된 부분도 한 챕터가 들어가 있다. 어찌나 솔직한지. 두 학자의 학문적 갈등과 인간적인 우정은 어떤 소설보다도 재미있는 읽을거리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나는 태양이 지쳐서 하늘 저편으로 넘어갈 때까지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 우리는 만났을 때에는 성의를 다했지만, 우리가 가까웠다고 주장한다면 솔직하지 못한 말이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뻔뻔함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그가 나를 같은 부류에 포함시킨 경우가 한 차례 있었음을 독자에게 말한다 해도 용서하기를 바란다. “리처드와 나는 진화에 관한 글을 가장 잘 쓰는 두 사람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러나’라는 말이 붙어 있었음을 강조해두자.


1978년 한 유명한 과학 잡지의, 이름을 밝히기가 꺼려지는 서평 담당 편집자가 굴드의 ‘다윈 이후’에 서평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유전자 결정론’의 반대자들에게 ‘보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내가 어느 쪽에 더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내가 유전자 ‘결정론’을 선호한다고 시사한 쪽인지, 아니면 복수심에 불타 서평을 쓸 것이라고 시사한 쪽인지 말이다.


나는 스티븐 굴드의 말이 왜곡되었다는 쪽에 돈을 걸고, 왜곡할 필요가 전혀 없는 프레드 호일 쪽에는 쥐꼬리만큼 걸었다.


빅뱅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호일은 2001년 숨졌다. 그가 이 책을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굴드가 ‘산유리새의 불륜’이나 ‘개미의 노예 제도’ 같은 무해한 어구를 반대하는 설교를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는 것도 유감이다. 그런 무해한 의인화에 반대하면서 그가 멋들어지게 던진 질문인 ‘이것이 단지 현학적인 투덜거림일까?’에는 ‘그렇다’고 큰 소리로 대답해야 한다.


굴드의 ‘경이로운 생명’에 대한 도킨스의 서평은 이렇게 시작한다.


‘경이로운 생명’은 잘 쓰여진 책이자 대단히 중구난방인 책이다.


굴드의 ‘풀하우스’에 대한 서평을 읽으면서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흑흑 바로 이거야, 굴드는 그 훌륭한 책에서 야구에 대해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고... 도킨스 아저씨는 바로 그 점을 짚었다. 대단한 리뷰어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짧게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그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55쪽 분량을 야구 전문 용어로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나머지 세계라 불리는 어렴풋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에 사는 독자들을 대신해서 가볍게 항의를 해야겠다... 굴드가 야구에 심취한 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니며,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수준에서 야구 이야기를 조금만 가미했더라면 약간 흥미를 돋우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장 6장에 걸쳐 시종일관 지속되는 야구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읽으라는 이런 오만한 무례는 미국의 우월주의에 해당한다(그리고 나는 그것이 미국의 남성 우월주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줄기차게 굴드를 비꼬고 있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우정의 전류는 분명히 감지된다. 어쨌거나 진화론의 전사로서 동지를 잃은 아픔을 누구보다 크게 느꼈을 사람은 도킨스였을테니까. 굴드가 사망한 뒤 도킨스의 글들에는 상실감이 역력히 묻어난다.


도킨스 아저씨, 멋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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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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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기 전에 아이들은 꿈이 있었다. 가장 흔한 것이 대통령이고, 그 다음으로 변호사나 과학자, 선생님 등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의 꿈은 남다르다. 수천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 커다란 호밀밭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달리는 아이들이 절벽에서 다치지 않도록 도와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바로 그것이다.

또래에 비하면 콜필드의 꿈은 몽상적이다. 현실감각이 부족하다. 콜필드의 꿈을 들은 귀여운 여동생 피비마저 “아빠가 오빠를 죽일 거야.”라며 말할 정도다. 그런데 무슨 까닭일까? 어른들이 좋다고 말하는 직업을 자신의 꿈인 양 갖고 있는, 대통령 같은 걸 꿈꾸는 그들과 달리 지극히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일까? 말도 안 되는 콜필드의 꿈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한다.

콜필드는 어른들이 말하는 소위‘문제아’다. 학교 성적도 시원찮을뿐더러 쫓겨난 숫자만 해도 부지기수다. 영어를 제외하고는 유달리 흥미를 보이는 과목도 없다. 그렇다고 취미 생활에 적극적인 것도 아니다. 콜필드는 학교에서 하는 모든 것들에 열의가 없다. 공부하는 것도, 친구와 사귀는 것도 콜필드에게는 있으나마나한 일이다.

어른들은 콜필드를 걱정했다. 하지만 콜필드가 계속 그러자 이내 포기해버리고 만다. 문제아는 결국 문제아라고 포기해버린 것이다. 콜필드도 그것을 안다. 그래서 먼 세계로 떠나려고 한다. 먼 세계란 아무도 자신을 모르고, 자신도 아무도 모르는 광활한 ‘서부’다. 그곳에서 귀머거리에 벙어리 행세를 하며 남의 차에 기름을 넣는 일자리 같은 것을 구하려고 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행복해질 거라는 예감 때문이다!

콜필드만큼 불쌍한 녀석이 있을까? 어른들은 사고뭉치라고 생각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콜필드의 여린 심성을 본다면 콜필드만큼 안쓰러운 아이도 없다. 남들처럼 돈 많이 벌고, 명예롭다고 불리는 꿈을 지니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른들에게 차별받는 아이가 바로 콜필드이다. 콜필드는 학교가 아니라 세상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었건만 그래도 어른들은 포기하지 않고 콜필드를 학교로 보냈다. 꿈을 포기하라고 말이다!

결국 콜필드가 이겼다. 퇴학이라는 방법으로,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 것이지만 이제 어른들은 콜필드를 다시 한번 포기할 것이다. 콜필드는 그것이 가슴 아프다. 진면목을 몰라준다는 건 슬픈 일이다. 한편으로는 가슴 벅찬 일이기도 하다. 이제 꿈을 펼칠 기회가 왔으니, 서부로 떠날 수 있으니, 호밀밭의 파수꾼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콜필드는 피비를 만난다.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줬던 사랑하는 동생에게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피비는 요정처럼 콜필드의 손을 잡는다. 절대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더니 기어코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생떼를 부린다. 콜필드는 난감하다. 어떻게든 피비를 설득하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콜필드는 피비의 손을 놓지 않기로 한다. 아이들을 지켜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은 피비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떠날 수 없기에 그렇다. 그래서 콜필드는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된다. 피비에게 그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비로소 꿈을 이룬 것이다. 콜필드가 기대했던 것처럼 멋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주 가슴 뿌듯하게!

또래에 비하면 콜필드는 꿈은 몽상적이었다. 현실감각이 부족했다. 하지만 또래 누구도 콜필드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니지 못했다. 그래서 콜필드처럼 매력적인 남자가 될 수 없었다. 다들 돈이니 명예니 하는 것을 쫓을 때, 콜필드만이 제 감정에 충실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콜필드는 겉멋이 잔뜩 들었지만 누구보다 멋지다. 친구들처럼 환상적인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따뜻하다. 또한 우등생처럼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될 마음을 갖췄다. 그러니 콜필드의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하기로 한다. 콜필드의 이름은 어른들이 바라던 것들 따라하느라 잃어버린 귀한 마음과도 같은 것이니까.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아이를 돕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다는 콜필드의 순수한 마음이 한껏 묻어난 <호밀밭의 파수꾼>, 갑자기 나타나 절벽 밑으로 떨어지려던 나를 잡아주는 것만 같다. 그리하여 나는 떨어지지 않고 회복했다. 약간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솔직한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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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그래, 알은 깼어?
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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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이 글을 쓰면서 불현듯 스친 생각이지만, 이 소설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적어 보낸 이 구절을 거의 예외 없이 기억하고 있다. 데미안의 전문을 읽지 않은 사람도 귀동냥을 통하여 알을 까고 나오는 새의 이야기가 데미안의 이야기임을 익히 알고 있다. 데미안의 이 한마디는 고뇌에 찬 햄릿의 독백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정도까지 심각하게 이르지 않더라도, 맥베스가 제 아내의 죽음을 전해 듣고 내뱉는 유명한 대사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하루하루는 기록된 시간 마지막 음절까지 조금씩 기어든다” 보다는 더 뚜렷하게 독자들의 머리에 새겨있다. 맥베스의 허망한 이 한마디를 들으며 마침내 죽음으로 향하는 삶의 공허함에 치를 떨며 가슴을 쓸어내렸건만 데미안의 알 깨는 이야기가 더 또렷함은 왜 일까.


10대 초반에서 20대에 이르는 동안 에밀 싱클레어가 겪는 체험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독자들 저마다가 섣불리 남들에게 알리지 못한 채 속으로만 끙끙 앓아왔을 법한 제2성장기의 아픔과 흡사해 보인다. 그래서 대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데미안을 만나는 필수 코스를 선택하는 것인가. 데미안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만난 나로서는 이 말에 십분공감한다. 성장의 진통은 생각보다 아픔이 컸다. 당시 나는 상당히 심각한 가출을 결심하고 있었고 또 실제로 삶의 지루함과 모멸감에 싫증을 느껴 학교 수업에 충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는 가방을 하나 꾸려 가지고 집으로부터 가능한 한 먼 곳으로 떠나 작은 수공업 공장 같은 곳에 취직을 해서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근처의 으슥한 곳을 어슬렁거리는 것이었다. 한 마리 짐승의 몸으로 으슥한 밤공기를 가르며 이 재미없는 시들한 세상, 실컷 떠돌며 살아야겠다는. 그것이 알에서 깨어나는 길이라 다졌다. 그 후 어찌되었냐 물으신다면 그 발칙한 프로젝트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지고 지금, 자판기 앞에서 깨지 못한 알 속의 평안을 찬양하고 있잖은가.


이 소설이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단순히 그 소재가 특정한 나이 또래의 관심에 맞아 떨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싱클레어가 모험담을 호기롭게 늘어놓는 제 또래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을 속셈으로 실제 있지도 않은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낸 다음 그것이 약점이 되어 프란츠 클로머의 협박에 끌려 다니게 되고, 또 그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된 채 자신만의 비밀스런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의 보호와 사랑으로도 막아낼 수 없고, 오직 개개인이 어떤 식으로건 감당해야만 하는 영역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뭣 좀 알기 시작하는’ 과정이 막막한 아픔 속에서 그려진다. 그래서인지 싱클레어가 성장과 변모의 과정에서 겪는 우여곡절은 많은 경우 상당히 설득력 있는 심리묘사와 강한 흡입력을 지닌 문체로 그려진다. 해서, <데미안>은 대다수 독자들이 사춘기를 전후한 시기에 품었을 만한 죄의식이나 은밀한 욕망을 공공연하게 형상화함으로써 그 죄의식과 욕망이 ‘보편적’인 것임을 확인시켜주는 위안을 던져준다. 이러한 위안의 ‘보편성’은 삶의 광대무변함을 아직 알지 못하는 ‘어른도 아니고 애도 아닌’, 그러나 사는 게 뭐 다른 게 있겠나 하는 시니컬한 ‘그들’의 혼란스러움과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값진 것임은 틀림없다. <데미안>의 미덕이 여기에 있다. 이성에 눈떠가는 싱클레어가 육체적 욕구와 정신의 명령 사이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는 모습은 바로 ‘나’이므로. 그러므로 이것은 ‘내 얘기’가 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내가 의문을 품은 부분은 어린 싱클레어가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곤경에 빠지게 되고, 이것은 종교적 경건함으로 무장한 가정과 경건함이 통하지 않는 외부 세계사이의 갈등이라는 사회적 성격을 건드리게 된다. 그런데 데미안이 등장해서 프란츠의 협박을 차단한 후 싱클레어의 경험이 품고 있는 사회적 차원의 갈등 문제는 점차 슬그머니 사라지고 추상화된 내면세계의 관념 대립이라는 형태로 변모한다는 점. 이것은 이성에 대한 갈망이나 종교적 고뇌를 겪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성격을 띤 외부와의 문제와 잠시 만나는 듯하다가 추상적 관념으로 돌아버린 구도. 이러한 문제는 데미안이나 그의 어머니인 에바부인이라는 추상적 인물설정으로 어느 새 연결된다. 데미안은 처음에는 마음을 읽는 독심술을 부리는 소년으로, 나중에는 텔레파시나 초감각적인 인물로 확대되고 그의 어머니인 에바부인도 ‘초능력자’로 묘사되기에 이른다. 성별과 시간의 흐름, 선과 악을 초월하는. 신비하다 못해 추상적이고 입체파 화가의 그림 한 점을 대하는 듯하다. 무수히 연결된 꼭짓점으로 통하는 선들을 통과하며 비로소 하나의 형체를 형성하는 면이 탄생되는. 누가 그랬던가. 입체파는 허세라고. 얼마 전 작고한 비디오 아트의 거장 백남준은 “모든 예술은 다 사기성을 띤다.”라고 인정한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결말로 나아간 <데미안>은 소설적 허세다.


감정의 동화를 오버랩하면서 스무 살 이전의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독자에게 ‘이건 우울하고 은유적인 방황에서 헤매는 내 얘기다!’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데미안>. 인간적 성장의 지향점에서 사회적 성격으로 연결되다가 신비화 전략으로 추상적으로 매듭을 지은 미완의 이야기. 여전히 알은 깨지 못한다. 원래부터 알은 깨지 못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단단하거나, 알을 깰 만큼 강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제3의 돌발발언을 찾자면 인간은 원래 알 속에 있지 않다. 공중에 먼지처럼 떠다니다가 씨앗을 맺고 바람처럼 흘러 다니다가 분해 되어 사라지는 존재. 그러니 깨어야 할 알이 어디 있냐고. 그러나 이런 식의 관점으로 이 소설을 읽는 일은 독일 문학의 거장인 헤르만 헤세를 욕보이는 일이며 억지다. ‘알 속에 갇혀있다’로 이 소설은 출발한다. 복지부동의 명제.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알은 그래 깼어? ‘안간힘’만 쓰고 있을 뿐.


교양 있는 사람들은 스무 살 이전에 <데미안>을 읽었다고들 한다. 왜냐하면 ‘명작고전’이라고들 하니까. 나도 당신도 우리는. 그런데 이십년도 더 지난 지금 와서 읽어보니 이것이 명작인 이유는 첫째는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의 명성 둘째,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인 1차 세계대전의 탄생(20세기의 인류사의 지각대변동)을 위한 구습의 파괴였다는 해설 셋째가 선과 악을 비롯한 통념적인 도덕관을 초월하고 있다는 신비적 매력. 이십여 년이지나 다시 만난 <데미안>의 결론은 ‘난 변했어요! 그러니 알 속에서 어울렁 저울렁 산답니다’. 시대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인생이란 변하는 것. 책이라고 별 수 있겠나. 그런데 그 '알' 누가 깬 사람 있다면 연락 좀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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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을 향한 두 개의 방법론
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힘들지 않게 떠오르는 ‘문명’이라는 단어는 고전 평론가 고미숙에게서 엿볼 수 있는 그녀의 코드이자 강인한 인상이다. 전작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도 열하를 건넌 연암이 만난 청과 서양문명의 접선을 현대판으로 재조명했다. 동, 서양의 문명, 시대를 나눈 문명, 인종과 가치관을 나눈 문명. 이번 책에서는 국가적 상황을 나누는 공간과 문학적 공간을 이분법으로 잘라내어 문명을 말한다. 나비와 전사 두 갈래의 길은 동양과 서양, 시간과 시대, 근대와 중세, 정신과 육체, 문명과 자연으로 세분화되고 나중에는 소월과 만해의 여성성 투영으로 합의가 모색되어 푸코와 연암으로 결론이 난다. 둘은 상대성이다가 적대적이다가 비슷하다가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모두 7개의 장으로 구분되었지만 독립적인 공간형성을 하기도 하고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집합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책은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어수선한 분위기도 띤다. 방금 컵에 따라놓은 부글거리는 콜라처럼 저자의 감각적인 글쓰기 능력은 여전히 도약적이다. 하나의 소재에 줄줄이 달려 나오는 문제와 주장이 다층적 스펙트럼을 연상하도록 독자를 잡아 이끈다. 저자가 보여준 프리즘에 도취되어 읽다보면 정작 의문제기를 위하여 메모를 해 놓은 조각들을 놓쳐 버린다. 그만큼 전작에 비하여 이번 책은 도발적이고 더욱 마취성분이 강하다. 책을 덮고 나서야 책을 읽으며 기록해 놓은 공책을 펼쳤다. 거기에는 ‘그녀의 광기’라는 말이 써 있다.


그녀가 갖는 근대와 문명에 대한 광기는 푸코와 연암으로 귀결된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대한매일신보>는 계몽주의의 선두에서 지휘하고 무덤 속 영혼까지 놀라게 하는 철도가 달린다. 철도로 비유되는 근대 문명의 속도와 그 속도에 함몰되는 근대인의 자화상이 휙휙 지나간다. 계몽주의는 시,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세계를 한 장의 도면으로 일원화하는데 성공했다. 중간과정이 생략된 시대. 여기서 다시 연암 예찬론자인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특별한 열하일기’의 가치는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이 공간”-(53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암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사이 공간이었음을 상찬한다. 저자의 사이 공간의 중요성에 관한 역설은 제국주의로 곧장 나아간다.


“‘사이성’이 사라진다는 건 대상과 대상 간에 확연한 위계가 설정됨과 동시에 주인과 노예의 권력관계가 구성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관계 안에선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노예는 물론 주인조차도. 인간과 우주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우주를 소유할 수는 있되, 결코 그것과 함께. 혹은 그 속에서 공명의 춤을 출 수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근대인의 시공간이다.”-(58쪽)


출발과 목적을 중요시하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사이 공간 궤멸하기’가 여기에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요즈음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지은 <미국 패권의 몰락>을 읽고 있는데 이런 구절이 보인다. “속도가 더 빨라질수록 길이 점점 더 갈짓자를 그리듯이 변동들은 점점 더 기복이 심해지거나 ‘혼돈스러워질’것이고, 그 궤적이 나아가는 방향은 훨씬 더 불확실해질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국가구조가 정당성을 점점 더 상실해감에 따라 집단과 개인의 안전이 어쩌면 아찔할 정도로 위협받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은 틀림없이 세계체제내에서 일상적 폭력의 양을 증대시킬 것이다.” 철도가 보여주는 직선의 매혹은 폭력적인 직선의 힘으로 전이되고 이것은 근대적 시공간 탄생의 주체가 되었다. 근대이후 문화는 일정 양식의 틀을 갖추게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강한 힘의 문화’가 단연코 주체역할을 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미국의 세계 제패와 패권의 야욕은 ‘속도’와 ‘도전’으로 대변된다. 이것은 케네디의 ‘프론티어’ 정신이다. 책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했다는 우주개척정신은 우주정복야심으로 치환된다. 미국이 정말 달나라에 성조기를 꽂은 것이냐 아니면 세트장 제51구역에 꽂은 것이냐는 말이 많지만 미국의 우주로 치닫는 정복욕은 철도의 속도와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철도는 과정이야 어떻든 목적지에 안착하는 것이 목표다. 그 과정에서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식민과 노예의 수단으로 철저히 활용되고 거세된다.


시공간을 철도라는 산업혁명의 탄생물로 잡아 출발한 책은 계몽주의자들의 ‘도덕적 선’과 기독교의 인연을 연결한다. 야훼를 ‘지독한 사랑/처절한 복수’로 몰고 가는 저자의 주장은 <계몽주의=기독교=도덕적 우화주의=인간 중심주의=근대주의>라는 등식으로 성장한다. 이 말은 윤치호의 입을 빌려 재차 강조된다. “문명국의 지배를 받는 것은 비문명의 상태인 채로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것보다 행복하다”-(118쪽)맙소사! 문명의 힘은 놀라워서 한 나라의 독립위에 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비문명은 하위이고, 죄악이다. 이런 논리가 가능한 것은 문명예찬론을 주창하는 계몽주의자들의 끊임없는 ‘작업’의 결과다. 이 작업은 철도의 속도를 능가하여 나중에는 인간은 기계에 의해 지배된다. 돌아온 터미네이터는 연암의 넘나드는 사유의 경계를 무시하고 인간을 기계의 한 부속품으로만 취급한다. 그러다가 인간은 기계를 작동하는데 방해물이 된다. 영혼은 순결하나 육체는 불순하다는 논리다. 그나마 영혼이 순결한 것은 신과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계몽주의자, 근대의 학설이다. 육체는 죄악의 덩어리다. 그러므로 불순하기 짝이 없는 육체에 종(種)을 초월한 다양한 공존이나 담론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일방통행, 이것이 근대의 욕망이고 소통의 방법이다.


새롭게 알게 된 <동의보감>의 허준을 향한 흠모는 흥미롭다. 저자의 허준 흠모는 기(氣)를 인체탐구의 주 대상으로 삼았다는 주장과 더불어 인체는 우주와 ‘통’한다는 주장도 좋다. 이것은 기억을 되살려보면 연암의 나비처럼 넘나드는 사유의 경계와 문명의 담장 허물기와 통한다. “동의보감은 섹스를 오직 양생적 차원에서 다룰 뿐 결코 도덕이나 선악의 관점에서 다루지 않는다”-(421쪽)는 이론은 <허준=연암=푸코>를 설정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살포시 끼어드는 ‘장금이’의 이론은 간이 덜 된 젓갈처럼 밍밍한 감이 없지 않지만 독자의 눈요기로는 그만이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근대를 신랄하게 몰아세우고 그 전면에 연암과 푸코를 내 세운 저자의 논리는 분명 찬반을 부르는 성격이 짙다. 나 역시 다양한 소재활용으로 근대와 문명을 설파한 저자의 논리에 반대의 의견을 분명 지니고 있는 부분도 있다. 독자는 얼마나 얄미운 존재인가. 오자가 한 개라도 발견되거나 나와 다른 판단을 하고 있다면 더욱 신난다. 게다가 두 개로 쪼개어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경계 지은 이런 류의 색깔 짙은 책은 심심한 혓바닥을 얌전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적을 많이 만든다는 것은 환영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 중에서는 분명 나에게 이로운 적이 있을 것이다.


입구(저자의 질문 설정)=>본론=>출구(저자의 변(辯))로 독특한 구성을 이룬 책이다. 근대와 중세의 출발로 문학과 성, 정치와 문화. 근대의학과 임상의학, 한의학의 관점까지 안테나가 뻗어 있다. 그러나 뛰어난 언변의 방정식은 단순하다. 문명<자연, 근대<중세, 근대의학<한의학, 계몽주의는 인간중심주의를 낳았음에도 결국 인간을 버렸고, 그러므로 ‘(근대)계몽주의는 잘못 되었다!’가 이 책의 주제다. 다양한 소재를 한번에 보여주려 노력한 흔적은 뚜렷하지만 산만하다. 산만한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천천히! 비판도 분명 시시각각 달라질 것이다. 근대적 이성은 '언어의 제국'위에 구축되었다니 이 책에 주는 현재의 비판과 분석을 일단은 발뺌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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