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별점 다섯개로는 부족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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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평점 :
인터넷상의 홈페이지 방문자들로 인한 영화정보는 거의 홍수가 날 지경이다. 홈페이지 주인장이 어떤 영화 평을 한 편 올리고 나면 거기에 덧글로 달리는 각종 영화에 관한 여담이나, 정보는 또 하나의 평론으로 묶을만한 분량이다. 그만큼 영화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는 셈이다. 매체의 발전이 영화제작에만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유의 정보를 제공해 줌으로써 이제 영회정보는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마우스 한 번 클릭 하는 일로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필름으로 양산되는 영화는 언젠가 생명의 소멸을 가져온다. 보관의 용이함이 영화 열정을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쓰게 되었다는 철학과 교수님의 영화와 철학적 혼합의 관계, 그 연애관계를 담아낸 책이다.
“영화와 사귀기 위해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글쓰기다. 여기서 글쓰기란 비유컨대 사라지는 영화들이 남기는 안타까운 흔적들로 무늬를 짜는 것이다. 무늬로 뭔가를 만들어내어 추억의 증거로 삼아보라. 추억이 있는 동안은 어떤 것도 죽지 않는다. 이 책은 내가 영화 텍스트들과 함께 놀면서 만들어낸 무늬들이다. 나를 홀리고 꼬시며 에로틱하게 자극하는 저 멋진 여인 같은 영화들과 만나 사귄 흔적, 추억, 앙금들을 조금은 주저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여기에 남긴다.”-(7쪽);지은이의 말
로마에 올인 하는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의하면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싶을 때, 옛날이 그리워질 때,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자 할 때, 나는 영화를 본다.”고 한다. 종합적 의견으로 치면 삶이 그렁그렁해지면 영화를 보신다는 말 아니냐. 저자 이왕주의 말은 삶의 무늬를 만드는 과정에 추억이 있고 추억은 영화가 포함된다는. 그래서 영화와 연애를 한 판 하는가 보다 했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단어가 ‘특별’접두사로 붙어 있는 것을 보니 그 머리 아픈 철학과 연결을 한 영화평론집이라는 선입견이 든다. 맞다. 이 특별한 영화 평론집은 영화소개->철학적 분석, 해석이 후편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와호장룡/장자의 무위)해석은 철학과 영화의 만남 극점을 보여준다. 유위(억지스러움, 인위적인 것, 틀에 박힌 것)은 무위(자연스러움, 순리적인 것, 자유로운 것)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장자의 무위사상을 두 명의 인물(용과 리무바이)로 이분법적인 구도를 이룬다.
그것을 소 잡는 ‘소백장의 칼’로 앞부분에서 의미심장한 어필을 해 준다. 29편의 영화소개에서 하도 니체의 철학이 여러 번 응용되고 니체를 칭송하는 듯한 발언도 여러 군데 보였던지라 동양의 철학은 배제한 서양철학과의 접목만 시도했다고 오해한다면 독자의 무지다. 책에는 공자님의 말씀이 근엄하게 등장하기도 하고 가장 많은 출연을 한 철학자는 단연코 서양철학의 거두 니체씨이지만 장자(그의 스승인 노자)도 조연급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다. 소백장의 칼=청명검=리무바이의 무예=노자의 도덕경. 이 흐름의 공통점은 ‘이름과 명분에 매달리지 말자’다. 섭리까지 거스르며 이기려 들지 말자. 그러면 나중에 꼭 벌을 받는다?는 구도. <도덕경>은 이래서 도덕 교과서이시다. 재미없는 도덕 선생님의 기억을 간직한 독자는 하품이 나올 수도 있다. 예의 없이 반론을 불쑥하나 들이밀면, 도덕적인 삶이 뭐가 나쁘냐!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도덕적인 여인 ‘수련’보다는 철없는 여인 ‘용’이 더 매력적인 삶을 산다. 삶은 어차피 한 편의 드라마다. 발단과 전개, 절정, 결말로 이어지면서 숨가쁘게 변신하는 삶이 매혹적인 풍경으로 보이는 것은 철없는 나만의 시각일까. 열정이 매번 옳은 것도 아니고, 매번 섹시한 것도 아니지만 한번뿐인 삶. 깨우치는데 뭔가 자극은 있어야지 수고스러움의 쾌감이 배가되는 것 아니겠어? 책에서도 인생에서 과정을 향유하라고 하지 않더냐!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쾌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김에 이 책의 최다 출연자인 니체씨에 관하여 한 마디를 하기로 한다. 춤을 배우며 인생을 알아가는 스기야마씨의 춤 이야기(Shall we dance)에도 니체씨의 열광적인 예술론이 대두된다.
“니체는 예술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아폴론은 밝음, 질서, 조화, 균형을 뜻하고 디오니소스는 어둠, 혼돈, 도취, 광란을 뜻한다. 물론 장르에 따라서 아폴론적인 것이 더 우세한 예술이 있고 반대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더 우세한 예술이 있다. 가령, 조각이나 그림은 전자에 속하고 음악과 춤은 후자에 속한다. 특히 춤은 디오니소스적인 정열과 광기 그리고 힘의 요소가 다른 아폴론적인 요소들을 완연히 압도하는 강렬한 예술이다.”-(229쪽)
“춤이 없다면 이 삶을 어떻게 견디랴?” 수도승이나 금욕주의자들을 향해 “춤출 줄 모르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니체. 다른 곳에서는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그들을 일컬어 “가축 떼거리의 인간들”이라고까지 호도하셨단다. 요즘 수녀원의 육중하게 무거운 문을 박차고 나와 종교학자로 거듭 난 영국여성의 이야기책을 한 권 읽고 있는데, 그 분도 세상과 즐겁게 연애하는 춤을 추고 싶어 수녀복을 벗으신 것일까 싶다. 영화와 철학의 만남인 이 책은 일단 영화를 텍스트로 만나는 것을 부담 없이 전해준다. 삶이 한 판 벌어지는 춤마당이라면 영화는 그 속에서 장단을 맞추는 가락이다. 거기에 철학자들의 육감적인 분석이 가미된다면 이거 너무 에로틱한 춤 아니겠어? 철학을 영화로 해석할지, 영화를 철학적으로 해석할지는 자유에 맡긴다. 순서가 바뀌면 어떠한들. 그래, 너 영화와 철학 둘 다 좋아하는 거 맞지?
부기)
탄탄하면서도 쉬운 철학적 연결 해석이 명문장을 여러 군데서 만날 수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보다 품격 면에서도(나나미 여사의 품격 치중은 거의 병적인 수준이다)훨씬 높다고 본다. 그 증거로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면서 동, 서양의 유명하신 철학자들을 두루 모신 점이다. 한 장르의 영화에 기울지 않았던 점도 이 책의 눈부신 보편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 가장 큰 점수는 20년만의 제주도 여행지에서 인연을 맺은 책이라는 점이다. 새벽 다섯 시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책을 읽었다. 여행지의 아늑한 호텔방에서 새벽 미사 종소리를 들으며 책장을 덮는 기분이란, 동녘하늘의 아침태양을 만나는 천지창조다.(과장법에 속아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