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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를 테면 모순되는 단어들이 있다. 자유, 평등, 박애. 정확히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의 기본조항이라는 이 명제는 정확한 오역이다. `박애’라 함은 세상 모든 사람을, 귀족도 수용해야 할텐데 그들의 박애의 대상은 시또양, 혁명에 가담하는 시민계급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프랑스 동경주의에 젖은 저 번역은 자유, 평등, 형제애, 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 한다 해도 문제가 또 있다. 자유, 평등, 형제애, 이 중 자유와 형제애는 함께 할 수 있어도, 평등과 형제애도 함께 할 수 있지만 자유와 평등이 과연 함께 할 수 있는 개념이던가.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누를 수 밖에 없는 명제들 사이에서 잠시 멈칫해지는 사이 성폭행 사건들은 어김없이 일어나고 법의 울타리는 번복을 계속한다.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어찌보면 저자의 글이 약간 불안한 것은 응집력이 부족해서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책으로 엮어지기에는 문제의식은 가득하되 하나로 모아지는, 결집되는 목소리가 부족하다. 은근은 있되 끈기가 없다거나 끈기는 있되 은근이 없다거나, 둘 중 하나에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개인적으로는 나의 눈높이에 알맞았기 때문에,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비교적 틀린 점이 적었기 때문에. 여성학과 페미니즘에도 얼마나 많은 분류가 있는데 어떤 목소리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보통 전투적 페미니즘의 과격함을 지양하거나 지향한다. 그리고 저자는 조용조용히(그녀의 음성은 참으로 조용조용할 것 같다) 그 사이의 격차를 지적한다. 이미 알고있으되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들, 예를 들면 국방의 의무를 지는 국민, 여우 같은 아내와 늑대 같은 남편과 토끼 같은 아이가 모여사는 것도 신기한데 이들이 모여살면 비둘기 가족이란다! 내지는, 여자가 남자와 같아질 수 있는 것이 평등이 아니라는 점 들을 짚어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던 말은,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덧, 아는만큼 행동한다, 를 그와 혼동했었나 보다. 비단 미혼인 지금에도 남자친구의 집에 가거나 결혼 생각을 하면 `가사노동’이 자연스레 따라 생각나지만 타인들은 결혼하고 나면 한국내의 여성의 위치를 절감하게 된다는 말도 무섭다. 결혼한 남자는 최소한 여자의 부모를 방문하며 저 집 설거지를 오늘 얼만큼 할까, 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군대의 가산점이라든지 식민지 제도 하의 성폭행, 성폭력 사건이라든지, 한국사회 내에서는 내가 나열해도 이미 충분히 이야기되어 쉰소리 하나 보태는 것밖에 안될만큼의 슬프고 뻔한 사건들이 많다. 이들을 지적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공격하지 말고 낙후시켜라, 라는 명령어와 흡사하다.

 

 

 

나는 앞서 이 책이 나의 눈높이와 맞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할 줄 아는 작가들이 좋아졌다. 어려운 이야기도 쉽게 한다는 것은 이미 그 문제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순전히 개인적인 딴소리를 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고 무라카미 류는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한다. 이것은 한 쪽은 통찰력이 있고 한 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닌, 다른 종류의 통찰력을 지녔다는 것인데 이 작가가 딱 그러한 입장이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쉬운 목소리를 만나는 것은, 비록 구성에 있어서 약간 치우치거나 한꺼번에 여러가지를 이야기하려 애쓴 탓에 산만함을 피할 수는 없을지라도, 조목조목 쉽고 조용한 목소리를, 더군다나 여성학이나 페미니즘에서 만나기는 아스팔트 바닥 밟기만큼 그저 일상적이지만은 않은 일이니까.

 

 

 

하드웨어적인 물질에의 고찰-어떻게 만들었을까, 의심이 갈 정도로 이 책은 참 가볍다. 얇지는 않은 기본적인 프레임과 두께를 유지하면서, 표지는 때를 탈 수도 있는 흰색이 들어가있지만 알맞은 정도로 빳빳하며, 생각보다 책이 참 가벼워서 들고다니며 읽기에 편했다. 이러나 저러나 나는 가벼운 책이 보관하기에 편리해서 좋은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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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일단은 재미있고, 이단은 느낌표 하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월요일 아침 지하철에서 읽기 시작한 이 책은 날 적잖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비장한 각오로 출근 전선으로 투입된 전사들 사이에서 나 홀로 히죽히죽 웃기란, 괄약근의 힘으로 조이고 조여 설사를 틀어막고 오리걸음을 간신히 떼는 것만큼의 심한 내외합일을 요구했다. 이외수씨의 이미테이션 같은 범상하지 않은 외모는 ‘이 괴수’의 글에 담긴 비범함을 분명히 초반부터 경고하고 있다.

글에도 돌연변이가 있으니, 이 터무니 없이 진지하고도 자학적인 개그는 분명히 다이옥신과 페놀이 다량 함유된 어느 공장의 폐수를 먹고 자라났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달짝지근하지만 살짝 유통기한이 지난 콜라 같은 쌉쌀한 맛이 우리의 기억과 감각을 점유해 버리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책의 흡입력의 정체가 혹시 돼지 발정제를 책에 발라놓아서? 꿀떡 삼키자니 찝찔하고, 어쨌든 먹다 보니 재미, 비애, 감동, 오르가즘, 잡스러움, 자유분방함, 질퍽하고도 쿨하게 내지르는 문장들의 반란에 온 몸의 털이란 털은 기개를 드높인다.

인천, 만년 하위권 야구단, 바글대는 신도림역. 소설 속의 풍경은 수 많은 이들의 삶을 투영한다. 인천에 살고 있고, 후속 모델 태평양 돌핀스를 좋아했고, 신도림역을 8년째 왔다 갔다 하는 본인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그래서 남다르다. 소설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이유는 아마 내 삶을 관통하고 있는 시대적 공감의 절규라서 그럴 것이다. 으아악.

프로. 어쩌다 보니 난 프로의 삶을 갈구하고 있었다. 평범하다고 믿었던 그 삶은 썰렁하게 선인장만 덩그러니 있는 황무지였다. 현실적인 삶 속에서 끊임없이 찍어대는 채찍질에 청춘은 시들어가고, 그렇게 지나온 세월에 삶의 진의는 벽장 깊숙한 곳에서 박제가 되어 간다. 이것을 흔히들 평범한 삶이라고 부른다지만, 사실 평범해지기 위한 노력은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쟁취한 ‘위대한’ 투쟁의 노획물이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놓고 본다면, 위대함은 ‘위가 크다’는 것으로 치환할 수 있을 것 같다. 남보다 더 먹어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위대함은 사회 곳곳에서 누런 이를 드러낸다. 학벌의 위대함, 자본의 위대함, 소속의 위대함,
위가 커서 슬픈 짐승이여, 그들은 너무나 굶주려서 외롭다.

더 먹어야 한다. 보다 많이, 보다 빠르게… 올림픽 구호가 아니다. 삶은 전쟁이다. 자본을 신앙으로 삼아, 국가 경쟁력의 첨병이 되어 금메달을 향해 총력전을 펼치는 영웅적인 삶이 인생의 목표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러한 세상을 가르는(홍해를 가르듯) 구세주의 느낌이 들게 든다. 공부하느라, 암기하느라 삶을 소비한 주인공에게 주체적 삶을 가르쳐 준다. 실패하면 뭐 어때? 도발적인 질문은 충만한 은혜로운 빛이며, 행복으로 가는 비단길을 펼쳐놓는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뉴스를 보라.
‘자본을 섬기지 않는 게으른 일가족이 생활고를 못 이겨 집단 자살했습니다. 당신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경제난으로 실업자가 늘고, 개인파산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안전합니까?.’, ‘학벌과 소속, 능력으로 당신의 몸값을 높이세요. 당신의 삶은 그것에 좌우됩니다’.

어디를 가던 우리는 사회적 협박과 공포에 주눅이 든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안정적인 삶은 우리의 미래를 밝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 한 칸을 자리잡았다. 안정적인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당연히 실패 없는 삶이다. 무결, 무패, 무적의 신화를 만들어야 한다. 9회 말까지 퍼팩트 게임을 만들어야 우리는 안도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이란 언제 뒤집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 소설처럼 그냥 방바닥에 널부러진 채로 가끔 앞 뒤로 뒤집어가면서 사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전문 용어인 ‘폐인’이란 수식어가 붙겠지만, 인간이란 뭐든지 금방 익숙해질 수 있는 사회적 짐승 아니던가. 열심히 살려는 의지만 없다면 누구나 ‘실패’를 맞보기 힘든 성공적인 삶의 한 모델을 구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이 재미있고, 쉽게 읽힌다고 가벼운 소설일까. 재미를 살짝 걷어내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스물거리는 우리 사회의 억압 기제가 내 몸을 서서히 타고 올라와 소름을 돋게 한다. 자조적인 성찰이 숙연하고도 진지한 자극이 되어 12만 볼트에 이른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배가 고프다.

왜냐하면 소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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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시비돌이 > 가족은 신성하지만,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이득재 지음 / 소나무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한국인에게 있어서 민족이라는 단어만큼이나 가슴 뭉클한 단어는 가족일 것이다. 수십년 동안 헤어져 있는 남북 이산 가족이 모여 눈물바다를 이루는 장면을 보며 우린 가슴 뭉클해지고, 벅찬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또 어릴 때 외국으로 입양되어 부모, 형제들의 얼굴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외국인(?)이 혈육을 찾는 방송을 보면서 우린 또 벅찬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 가족이란 단어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라는 책을 쓴 이득재 교수는 그 책을 통해 가족이라는 말처럼 너무나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상적인 세계를 한번쯤 뒤집어 보는 것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득재 교수는 '가족의 사랑'이라는 말에 숨어 있는 다른 뜻은 없는가 의심해보아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게 눈물을 뿌리게 만드는 것이 혹여 가족이라는 단어의 마력 때문은 아닐까? 가족은 당연히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 '주의'가 탄생하고, 가족주의의 마법에 걸려 가족을 위해 애국애족하려고 온 몸을 바치다가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유기당한 것이 결국은 가족 구성원 개개인인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이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국가 또는 사회에서 해야할 너무나도 많은 역할들을 가족들에게 떠맡겨 버린다. 그리고 가족 사랑, 가족의 정, 눈물과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모두 막아버린다.

 수십년동안 못만나던 가족들이 만나서 눈물바다를 이루는 걸 봐라, 니가 그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 이런 메마른 인간들 같으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득재 교수의 말대로 가족의 정은 그런 문제제기 조차 못하게 만들 정도로 우리의 의식에 마법의 성을 구축하고 있고, 이 마법을 풀지 않으면 헤어진 가족은 서로 만날 수 있더라도 한국 '사회'는 영영 '사회' '민주주의'와 만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득재 교수는 호주제폐지운동은 단순히 가부장권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단단히 준비하지 않으면 성사 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왜 호주제폐지를 국가 권력과 연결을 시킬까?

국가권력 자체가 남성적이며, 가부장권이란 국가 권력을 대리하여 가족을 통치하는데 사용되는 국가권력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즉 국가가 가족의 대표인 아버지에게 가부장권을 부여해주고, 그 대신 국가가 할 일 즉 가족의 통치를 아버지에게 위임시켰다는 뜻이며, 가부장권 뒤에는 국가 권력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을 신성시하고 가족을 떠받들면서 정작에는 국가가 수행해야 할 책임을 가족에게, 가족의 대표인 아버지에게 온전히 전가시키는 체제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득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가족은 국가 권력의 희생양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 내의 사랑과 애정이 워낙 원초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즉 가정이 가장을 잃어도 가족끼리 보듬어 넘어가야 하는 문제로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경우 국가 권력이 가부장제 뒤에서 하는 일이다. 이것은 국가가 수행해야할 공적인 책임을 가족에게 완전히 전가시키는 국가 체제다. 이것을 우리는 家國 체제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문제제기를 비약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IMF 이후 꽤 많이 신문지상을 장식했던 '가족동반자살' 사건들은 우리 사회가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을 덮어두었는지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부모 없이 아이 혼자 살아가기엔 대한민국의 복지상황이 너무 후진적이고, 부모없이 자랄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부모들은 대체로 '오죽하면'이라는 동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의 자식이라도 맘대로 생명을 뺏을 권한은 없다. 물론 사회구조적인 문제도 있는 탓에 그 부모들을 일방적으로 탓하기는 어렵지만, '아이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필요는 있다.

가족동반자살에 대해 진중권씨는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은 여기서 다시 한번 그 잔인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가장이 자기의 식솔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발상이다. 그 어떤 이유에서도 인간은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의 생명에 손을 댈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몇년 전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이라는 라디오 프로에 몸이 아파 움직이지도 못하는 부모를 간병하던 한 소녀가 "정말 짜증날 때 아버지 얼굴에 물을 끼얹은 적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사연을 보냈다.

  여기에 대한 반응은 가족동반자살의 경우와 달리 '저런 죽일' 또는 '오죽하면' 이라는 극단적인 두가지의 감상적인 반응이 동시에 나올 것이다. 나이든 분들에겐 전자의 경우가 많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에겐 후자의 비율이 높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서 신해철씨가 비교적 명쾌한 대답을 했다.

  "긴병에 효자 없다. 오죽하면 벽에 똥칠할때까지 살라는 욕이 있겠느냐? 자신이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이타적인 성격이 못된다면 차라리 돈을 벌어 전문간병인에게 맡기는 방법이 좋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아버지를 버릴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면에서 상당히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있는 듯 하다. 그런 일을 겪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장애아를 복지시설에 맡기거나, 병든 노인들을 양로원에 맡기는 일'을 부당하게 비난한다.

   집에다 두고 신경질을 내거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시설과 전문인들의 간병을 받게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데, 주위의 시선 탓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우리는 '민족'이나 '가족'이라는 단어를 국가를 위해 과도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애국심은 악당들의 최후의 도피처다'

  '알몸 대한민국'의 저자 최상천 교수는 "대한민국의 애국주의는 뒤틀리고 일그러져 있다. 이런 형편인데도 애국주의에 대한 진지한 비판이 별로 없다. 그것이 '미친 애국심'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라면서 핏줄주의와 애국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한국의 밝은 미래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최 교수는 사랑의 리퀘스트, 수재민 돕기 운동, TV의 이웃돕기 프로그램을 '감성시대 고급사기'로 규정한다.

  모금운동을 보면 대한민국은 분명 이웃사랑의 천국이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모금한 돈이 어떻게 쓰이는 지도 묻지 않고, 선행을 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제기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너는 얼마나 착한 일을 하길래 그러냐? 못사는 사람 하나라도 구제해주는게 나쁜 거냐?"고 공격적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수 수혜자와 이재민의 일시적인 응급처치 외에 살아가기 힘겨운 수백만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최상천 교수의 말대로 이런 것은 모금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는 아주 딱한 사람들 몇사람을 골라 시청자의 눈물에 호소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수의 아픈 사람들은 여전히 가족이 모든 고통을 떠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방송은 아픈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거다. 대한민국의 구조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년, 소녀 가장, 가난한 난치병 어린이는 그냥 '불쌍한 아이들'이요. '어둠의 자식들'일 뿐이므로, 방송은 이 아이들을 무작정 불러내 멋대로 동정하고, 눈물바다를 연출하면서 정작 사회적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한국인의 '정'이 나쁘다는 거냐고 반문 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최상천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이라는 감성은 확실히 사람 특히 아픈 사람을 발견하는 힘이다. 나는 따뜻한 가슴이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은 문제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이라는 감성은 아픈 사람을 발견하지만, 왜 아픈지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무작정 얼싸안고, 눈물 흘리고, 몸 사리지 않고 보살피는 것이 정이다. 이런 정은 아픈 사람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그러나 정은 병의 진단과 치료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은 아름다운 덕성이지만, 이성을 움직여야 비로소 아픈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

  감성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운가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도 3분만 지나면 아픈 사람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코미디 프로그램을 찾아헤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으로 상승하지 않는 감성은 변덕스럽고, 감성의 자극을 받지 않은 이성은 차갑다고 최교수는 주장한다.

  웃기고 울리는 것도 좋지만 인권과 정의를 짓밟는 현실을 이성의 눈으로 정확하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상천 교수는 "모금 운동은 대한 민국 지도층과 언론이 주도하는 감성시대의 고급 기획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획이 무엇을 노리는가? 이성적으로 접근해야할 과제를 감성적 차원에 묶어 두고,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착한 사람들의 선행에만 떠맡기는 신파극이다"라고 말하면서 이것은 공익을 빙자한 고급사기 라고 단정한다.

  금모으기 운동만 해도 그렇다. 할머니들이 꼭꼭 숨겨뒀던 개인적으로 소중했던 패물들이며, 운동선수들이 평생을 뼈를 깍는 고통 속에 보내며 얻어낸 기념품들이 금모으기 운동이란 이름으로 국가에 헌납되어야 했다. 그것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 아닌가?

그 사람들의 추억과 인생과 피와 땀이 서린 물건들이 단지 금 몇돈, 얼마로 환산되는 야만적인 상황을 언론들은 부추겨 갔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이렇게 된데는 내 책임도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면서 숨겨둔 금괴를 내놓는 부자들과 기득권층은 없었다. 그거야말로 단지 돈으로만 환산될 수 있는 건데도 말이다.

이 고급사기가 연출되는 동안 국가와 부자들은 나라사람(국민)들의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살벌한 무한 경쟁 전장으로 몰고 가고, 자신들은 투기와 탈세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 최상천 교수는 대한민국은 부자들에게는 환락의 천국,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눈물의 땅이라고 규정한다.

9살 먹은 우리 딸이 수재민 모금을 보면서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 '지들이 대책을 수립할 생각을 해야지. 맨날 시청자들을 보고 돈을 내래'

저 말이 정답이 아닐까 생각을 해봤다. 물론 자발적으로 성금을 내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우린 언론가 국가가 주도해왔고,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의문을 제기해 본 적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의 댐도 그랬고, 금모으기 운동도 그랬고...

최보은씨도 쾌도난담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사회가 호도하는 방법은 효의 문제를 개인차원으로 극대화해서 문제를 가려버리는 거야. 개개인의 실천으로 해결이 어려운 문제까지 모든 걸 개인의 미덕 차원으로 환원해 <조선일보> 사회면 톱기사로 올린다구. 그러면 우리 모두 너무 흐뭇해서 역시 사회가 잘 굴러가고 있군. 아직 인정이 살아 숨쉬는 사회야. 못 배운 서양놈들이나 부모를 양로원에 갖다버리지, 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아니거든. 다만 고통스럽게 견디고 있을 뿐이라고. 그런데 미담은 그 문제를 모두 덮어버려"

우린 사회보장이 절실한 1천만명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 가운데 몇천명을 후원해주고, 동정을 보내면서 인정많은 나라라고 자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독재권력에 시달린 탓에 우리 국민들은 국민들이 정당하게 누려야 될 권리가 어디까지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최상천 교수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말고 현실을 이성의 눈으로 보자. 우리는 당당한 주권자가 아닌가? 진정한 주권을 요구할 때가 되었다. 아픈 사람일수록 더 철저하게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며, 건강과 교육과 직업 문제는 반드시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면서 모금운동 같은 고급 사기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것은 모금운동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막혀 있는 돈의 길부터 터야하는 것이고, 건강, 교육, 직업 문제를 해결하는데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기금의 저수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나라(국가)가 나서서 해야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득재 교수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가족은 신성하지만 가족주의는 불온하다. 가족은 사람들의 원초적인 공동체인 신성할 수 있지만, 가족주의는 국가가 가족에 대해 저지르는 무책임한 폭력의 결과다. 가족의 해체와 붕괴를 한탄하는 것은 가족을 성적으로 독점하려는 도덕주의자 거나 국가의 무책임성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가족이라는 원초적인 관념을 이용하여 가족을 가족 '주의'로 둔갑시켜 버리는 가국 체제다. 우리의 국가체제는 가족=국가라는 등식의 가면을 뒤집어쓴, 국가 '주의' 체제다. 따라서 가족주의는 곧 국가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이 점을 깊이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가족에 모든 책임을 지우는 국가(또는 기득권)의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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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ooni > 감수성의 쿠데타.
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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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쯤에 한 시사주간지을 두루룩 넘겨보다가 누가 김승옥을 모르랴 하는 문장에서 난 모르는데, 하면서 멈췄다.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켰고, 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이고, 몇 개의 단편으로 한국문학사에 우뚝 섰고…. 그렇다는데,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저런 류의 말투가 싫다. ‘여자라면 누구나’, ‘남자라면 당연히’, ‘인간이라면 마땅히’, ‘한국 사람은 항상―’. 일반화하고 다수화해서, 반대자와 소수자를 묵살해 버리면서, 입만 닥치고 있으면 너도 끼워줄게 하는 말투. 언제나 난 좀 빼 줘. 하고 싶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김승옥이란 이름이 여기저기서 자주 출몰했다. <르네상스인 김승옥>이라는 최신 비평집 출간소식이라든지, 누군가 김승옥의~ 하면서 인용해 놓은 것을 본다든지, 하면서, 김승옥은 대중적이며, 널리 알려졌으며,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60년대를 대표하는데~ 와 반복되는 감수성의 혁명. 나는 타고나길 소심자라 빼 줘 하면서도, 은근히 끼고도 싶어한다. 무식이 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랑도 아니지 싶어지기도 하고. 해서 일단 여섯명쯤, 주위 사람들한테 물어봤는데, 딱 한 명이 알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직접 아는 사람은 아니고, 내가 물어본 친구가 자기 친구, 국어과목 임용고시 준비하는 친구에게 문자로 물어본 거였다. 같은 답이 또 돌아왔다. 60년대 감수성의 혁명.


결국, 무진기행을 샀다.


김승옥 소설 전집의 제 1권인 이 책은 열다섯개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연습(生命演習), 건(乾), 역사(力士),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확인해본 열다섯개의 고정관념, 무진기행, 싸게 사들이기, 차나 한잔, 서울 1964년 겨울, 들놀이,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夜行), 그와 나, 서울의 달빛 0章,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이 책에 있는 단편들은, 60년대에서 70년대에 씌여졌다. 4.19(사태, 의거, 항쟁, 혁명)가 5.16(혁명, 쿠데타)으로 이어지던 시기. 그 무렵의 시대색이 강하게 배여 있었다.


5.16은 4.19의 불필요한, 기형적 반복으로, 보수반동의 퇴보였다. 하지만 60년대와 70년대의 경제적 성장(무시무시한 속도의 산업화와 도시화)은 그러한 퇴보를 통해서 나아간 것이다. 퇴보하는 전진, 전진하면서 뒤로 물러나는 것. 이런 제자리걸음이 반복되고, 고착되서 습관화되고, 마침내 사회의 구조로서 굳어진 듯한 분위기 말이다.  


4.19와 5.16. 날짜로 소환되는 이 두개의 사건은 해마다 반복되는 동지와 하지처럼, 연도를 상실하고, 영원처럼 순환하는 그 무엇으로 현실에 끼어들어있다. 끊임없이, 5.16은 4.19를 무력화시킨다. 4.19는 5.16을 위협한다. 4.19는 5.16을, 5.16은 4.19를 참된 혁명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항쟁과 쿠데타의 무정부 시대에 혁명은 총체적으로 실종됐다.


많은 사람들이 짧고 격렬한 4.19적인 감성들을 허탈한 쓴웃음 한번으로 상실하고, 5.16의 질서 속으로 편입해 들어간 이야기들을 해준다. 인생은 원래 그렇고, 세상과 더불어 흘러가는 것이며, 인간은 다 똑같다 라는 거다. 


이 소설들도, 다분히 그런 느낌이었다. 4.19에 대한 완전 승리를 주장하는 5.16.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乾>. 빨갱이의 시체를 갖고 싶어 하는(이건 정말 핵심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표현이었다. 남한의 현대사를 관통한 이 욕망은 아직도 유효하다.) 꼬마가 좋아하는 동네 누나를 윤간하려는 형과 형의 친구들의 음모에 동조한다.


소설이 골몰하는, 문장과 단어들이 달려가는 지점은 소녀를 욕망하는 형들의 음모에 가담하는 소년의 심사다. 강간당하는 소녀의 입장에 대해선 단 한단어도 할애되지 않는다. 소년은 가해자, 음모자, 학대자의 입장에 나약한 망설임을 안은 채, 적극적으로 편승한다. 이 소설의 선명한 일관성을 주도하는 것은 그렇게 스스로의 욕망에 대한 비판이나 성찰의 삭제에 있다. 욕망의 피해자에 대한 상대적 기술은 전무하고, 욕망을 좌절시킬 어떠한 소설적 장치도 없다. 인물의 내면에서든, 외부적 압력으로든.


그뿐만 아니라, 경험된 폭력을 내면으로부터 정당화하기도 한다. 또다른 강간당하는 피해자가 등장하는 <염소는 힘이 세다>란 소설. 여기에도 한 무기력한 남자아이가 등장한다. 불법 염소 고기 집의 그 아이는 손님으로 온 버스회사 직원에게 강간당하는 누나를 보고도 아무 것도,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그는 그 광경에 완전히 압도된다. 소년이 목청높여 더럽다고 비난하는 건 누나가 폭행당한 댓가로 버스안내양 자리를 구한 다음, 누나에게이고, 직업을 가지게 되었을 뿐이라고 상황을 재해석하는 것은 피해자인 누나 쪽이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마치 한쌍처럼 느껴졌다. 박정희가 인권을 탄압하고, 군사력으로 국민을 억누른 독재자다 하는 말이 그는 경제를 발전시킨 근대화의 영웅이고, 국민들은 그 덕에 먹고 살았으며, 하는 반박의 말과 한쌍인 것처럼.


누나의 그런 태도는 <차나 한잔>에서 등장하는 해고당한 만화가가 차라리 정부에서 자신의 만화를 탄압해서, 필화사건으로 번져주기를 바란다고 기술한 심리나 <야행>에서 무턱대고 자신의 손을 이끌고 강간해 줄 남자를 기다리는 유부녀의 심리와 비슷하다. <야행>에서의 그녀는 공식적으로 누구의 아내조차 아닌 독립된 직장인이지만, 실은 남편이 있고, 그 밑에는 낯선 남자에게 굴복하고 싶어하는 심리마저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차나 한잔>에서의 해고당하는 만화가는 자신의 만화가 개재되지 못한 게 정부의 탄압이냐고 묻는 동네 사람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속으로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으나 좀처럼 그런일은 없다 라고까지 한다. 만화가가 찾아낸 해고의 사유는 만화가 웃기지 않아서였다. 잘못된 것, 부족한 것은 자신의 능력이다.


능력을 노력과 연관시켜 문제를 개인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와 나>에서는 역전되어 있다. 입석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번잡하고 불편한 기차에서 좌석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부러 먼 역으로 돌아가서까지 좌석을 차지한 나와 그런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며 양심에 대해서 훈계하는 그가 나온다. 결국 같은 학교에서 마주치게 되어, 나는 가르친 대로 행하라는 그의 구호에 잠시 휩쓸릴 뻔도 하지만, 결국은 그가 미래를 발명한다는 말에 격렬한 저항감을 느끼며, 그를 적이라고 규정짓는다.


<그와 나>에서의 나는 연대를 알지 못한다. 개인적인 개인. 입장과 상황이 다른 개인이다. 그러한 개인은 필연적으로 서로에 대해서 맞서게 된다. 연대감이 균열되는 풍경에 대해서는 <들놀이>에서도 반복된다. 독재적인 사장이 초대한 들놀이에 초대받지 못한 맹상진군과 초대장을 받았지만, 그를 동정한 이군의 들놀이를 함께 빠지기로 한다. 하지만 초대장이 없어서 못가는 맹상진군과 초대장을 받고도 의리 때문에 가지 못하는 이군 사이의 간격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생생한 찜찜함과 거북함으로 벌어진다.


왜소한, 작아진 개인에 관한 이야기로 보다 분명한 것은 <역사>. 이 소설에는 보통 사람 이상의 힘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지만, 고작해야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이고, 그나마 열심히 해봐야 돈을 더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남과 똑같이 일할 뿐이다.


<확인해 본 열다섯개의 고정관념>은 낙선한 소설가의 실패담이다. 미리 등단 소감까지 준비한 그의 실패에 대한 소감은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는 거지의 정열을 운운할 때는 가슴이 찡할 정도다. 하지만 소설 중에는 그 소설가가 쓴 소설이 무엇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가 주장했던 무엇과 시대가 틀어졌는지도 나오지 않아서, 소설가는 자신이나 사회에 대해서 성찰하거나 사색하는 존재가 아니라 욕망하는 존재로 규정되어 있고, 그의 좌절의 깊이가 그대로 욕망의 강도이다. 등단과 성공, 부와 명성, 여자를 향한.


이 욕망이 성공했을 때의 광경은,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에서 보여진다. 일상적인 낮은 것들, 비참과 가난과 구질구질함을 둘러싼 낮은 울타리를 훌쩍 벗어나, 소설 쓰는 벌레가 된 작가는 호화로운 호텔로 아내를 불러들일 수 있는데, <무진기행>에서 주인공이 무진에서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서울로 향할 때 느끼는 1964년식 수치심, 부끄러움은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가 기록된 1979년에는 이미 흔적도 없다.



<싸게 사들이기>는 텔레비전 월부값을 아내가 매춘으로 번 돈으로 충당하는 서점 주인과 그 서점주인을 속여먹는 학생인 내가 애인에게 가기 전에 창녀에게 들리는 남자(학생인 나의 친구)에 관한 에둘러가는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서로 속이는, 정직하지 못한 위선적인 관계들로 점철된 이 복마전에서는, 속는 자도 불쌍하지 않고, 속이는 자도 악당이 아니다.


<서울 1964년 겨울>은 사물의 지배에서 벗어나 사물을 지배하는 듯한 기분으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안과 가난뱅이라 그저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서 나오는 내가 아내의 시체를 판 책장사의 자살을 함께 경험하는 이야기다. 함께 라고는 해도, 나와 안의 태도는 극한의 궁지에 몰린 책장사를 귀찮아하는 듯 데면데면하고, 그의 죽음으로부터 아무런 책임 추궁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달아나 버린다. 어쨌든 그것은 남의 일이니까. 이 부분은 소설 속 앞 부분에 나와 안이 나누는, 서로가 경쟁하듯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대목과 분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어느 술집에 같은 이름의 창녀가 몇 명이더라 하는 사소한 것까지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집착하는 그들(부자와 가난뱅이, 합해서 세상을 구성하는 두 종류의 인간)은, 남의 일에는 냉정하기 짝이 없다.


냉혹한 자신만의 세계에 대해서는 첫 번째에 나온 소설 <생명연습>에서도 언급이 된다. 사랑하는 여자와 대여섯번의 섹스를 하고, 싫증을 느껴 가차없이 차버린 뒤 유학길에 올랐다는 비정한 연애담의 형태로 말이다.



5.16은 확실히 성공했던 모양이다. 이 소설 속의 인간들이 현실적으로,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체제는 스스로 원하는 인간들을 양산해 낸다.) 이것은 5.16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상이다. 강대한 존재에게 복종하고, 굴복하길 원하는 왜소한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는 실패를 거듭하며, 각자인 채로는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고 불신하는 진흙탕같은 복마전에서 투쟁하는 개인들. 이 무정부적인 인간군상들에겐 확실히 독재자가 필요한 듯 보인다. 또 훌륭하게 그러한 욕구를 기록이라는 형태로 긍정하고, 정당화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결론은.


내게 이 소설들은 감수성의 혁명이라기보다는 감수성의 쿠데타로 보인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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