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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아무도 몰래 숨어 들어가 며칠 동안 그간 좀 밀린 사랑을 하고 돌아왔다. 몇 번 안아보고 몇 번 입맞추고 났더니 어느덧 끝나버린 짤막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그저 꼭 붙어 앉거나 누운 채 조용히 체온에 대해 생각했다. 왜 우리는 서로의 체온이 없는 곳에서 서로의 체온을 더 여실히 느끼는 것인지. 검고 검은 밤, 미등조차 다 잠가 놓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눈빛만을 응시하며 눈빛에 대해 이야기했다. 왜 우리는 눈을 감아야 더 선명하게 서로의 눈빛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인지. 답 없는 문제들과 함께, 그렇게 세 개의 밤이었다. 다시 돌아와 좁은 방 작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한 줌 더 크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 체온, 그 눈빛. 한 줌 더 사랑하는 만큼 한 줌 더 그리워질 것이다. 밤이 많이 남았다.
때로 일상은 살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살아 내야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대로 그 일상이 다시 살고 싶은 대상이 되기도 하기에, 살아내야 하는 오늘을 무시하지 않으려 한다. 소중한 날로 이어지는 다리는 필시 평범한 날이라는 돌로 이뤄져 있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돌 하나를 쌓은 밤이다.
필요한 날이었다.
_ 최민석,『베를린 일기』
자그맣게 빈둥빈둥 지내고 싶다.
밝은 게 좋다. 따스한 게 좋다.
_ 나쓰메 소세키,『유리문 안에서』
"전 여전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드너 씨. 당신과 부인의 출발점은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가드너 씨, 당신이 그동안 불러 온 이 노래들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겁니다. 심지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 노래들이 모두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연인들이 사랑을 잃고 헤어져야만 한다면, 그건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영원히 함께해야 마땅합니다. 그 노래들이 이야기하는 바가 이런 거 아닌지요."
_ 가즈오 이시구로,「크루너」in『녹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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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를 아시는지?
집 안으로 들어서는 syo를 보며 여친이 대뜸 말했다. 너 참 토비같이 생겼다. 토비? 그래, 토비, 딱 토비같이 생겼어. 8년을 만나는 동안 쪘다가 빠졌다가, 늙었다가 거기서 더 늙었다가 하는 현란한 변천사를 목도했을텐데도 그런 변화를 지적한 일이 없던 여친이었는데, 보름 사이에 갑자기 토비라니? 아니, 내가 토비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토비라니! 내가 토비라니!!
내가 고......토비라니!
근데 토비가 뭐지?
우리도 눈 두 개씩 달린 양심 가진 생명체이므로 그 토비가 '토비 맥과이어'가 아니라는 사실에는 눈꼽만큼의 의견대립도 없었는데, 그러자 도대체 토비가 누구인지, syo는 당최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혹시 포비를 잘못 말한 거 아냐? 아냐, 나도 걔 정확히 알고 있어, 걘 고기 먹는 원시인 조연 캐릭터잖아. 그럼 토비가 누군데. 너, 너가 토비잖아. 아니 이 여자가 지금.....
우리는 주저없이 네이버에 토비를 때려넣었으나,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용의주도한 여친은 tobi와 toby를 추가로 검색하는 기지를 보였으나 역시 결과는 허망했다. syo가 말했다. 결국 토비라는 건 실체가 없는 존재로군. 여친이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알지, 네가 바로 토비라는 걸, 토비가 바로 너라는 걸. syo가 따진다. 그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내가 어떻게 생겼다는 거야? 실체도 없는 얼굴이라니..... 여친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쏘아붙인다. 이명박은 실체적으로 다스 주식을 한 주도 가지고 있지 않지,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모두 다스가 이명박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 자, 대답해 봐. 다스는 누구 거지?
자, 대답해 봐. 토비는 누구지?
그래서 여러분 안녕하세요, 토비예요.
혹 그대가 아니었나 몰라 어젯밤 어두운 벌판에서 베었던 수많은 꽃모가지들 아무리 칼을 놀려 베어도 잘린 자리에 끝없이 돋아 피던 그 밤의 꽃들이 실은 그대가 아니었나 몰라 간밤엔 마른 바람의 불거진 등뼈가 휘두른 칼끛에 만져졌다 칼날의 한쪽으로만 달이 뜨고 지고 등뼈를 다친 바람이 떨어진 꽃모가지들 위에서 한 번 휘청거렸으나 그것은 시간의 일 한 백 년쯤이나 바람은 다친 등뼈로 내 앞에서 휘청거렸을지도 모를 일 그 한 백 년쯤 나는 또 꽃을 베듯 그대를 베었을지도 모를 일 달도 지고 뜨지 않는 칼날의 한쪽이 챙, 짧고 낮게 울었다 낭자한 세월인 그대 지난밤 벌판에서는 벌거숭이로 낯선 짐승 한 마리가 실은 꽃을 쥐어뜯으며 먹고 먹다 토하고 토하고 다시 먹고 하였던 것인데 정녕, 아니었나 몰라, 그 붉음이, 실은, 그대가, 자꾸 부스러지는 공기의 지층 위 그대라는 달콤하고 슬픈 종족이 새겨놓은 희미한 암각화에 홀려 나도 짐승도 꽃모가지고 바람도 벌판도 가득 붉어지지는 않았는지, 몰라,
_ 김근,「허허」,『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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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을 진탕 먹었는데, 파스타 - 삼겹살 - 고기된장국에 새싹비빔밥 - 파스타 - 치킨 - 유부초밥으로 기억한다. 꽤 마른 얼굴로 내려갔는데 올라오는 날 새벽 거울 속에서 돼지를 발견했다. 이 얼굴 이거 꿈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에서 깨었는데 syo가 돼지인지 돼지가 syo인지 모르겠더라, 하는 전개를 원했지만 실제로는 꿈에서 돼지였는데 깨어났더니 반전 없이 돼지인 형국이었다. 자기야, 나 돼지 같지 않아? 아닌데, 넌 토빈데?
그래서 안녕하세요, 저예요. 돼지 같은 토비에요. '살찔 비'자를 쓴답니다.
그렇다고 운동을 할 거냐구요? 천만에요.
데이비드 흄도 타이즈는 신었지만 달리기는 하지 않았다.
_ 데이먼 영,『인생학교 : 지적으로 운동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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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누어,『마르케스의 서재에서』를 읽기 시작하다.
백승욱,『생각하는 마르크스』를 읽으며 다시 스멀스멀 마르크스를 만지기 시작하다.
김애령,『여성, 타자의 은유』의 재독을 시작하며 왜 이 책을 아무도 읽지 않나 의아하다.
김소연,『시옷의 세계』를 읽으며 일기 잘 쓰는 법을 고민하다.
조남주 외,『현남 오빠에게』를 마치며 빻았던 기억을 떠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