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diotherapy

 

 

 

이제 남은 것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 말이 비로소 우리를 남을 사람으로 만들었다. 남은 시간에 대해 물었다. 그저 평범한 대답이었다.

 

나는 무엇을 했느냐 하면, 빨래를 했다. 우유를 개수대에 붓고,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내놓고, 빌려 놓은 책을 모조리 반납했다. 현금을 조금 찾아두었다. 기차표를 예매했다 취소했다. 휠체어와 호스피스에 대해 알아보았고 몇 개의 수기를 읽었다. 최대한 웅크린 채로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을 몇 번 내뱉어 보아도 잠은 잘 오지 않았다. 그리고 공부를 하고, 책을 읽었다.

 

엄마는 아직 모른다. 곧 알게 될 것이다. 통증이 알려줄 것이다.

 

 

 

--- 읽은 ---



242. 사색하기 좋은 도시에서

안정희 지음 / 중앙books / 2015

 

한 바닥의 감상, 한 장의 사진, 간혹 한 구절의 소설 인용. 그렇게 두세 가지 구성요소를 세트로 하여 80군데의 여행지에 대해 서술한 책. '사색'하기 '좋은' '도시'에서 깨달은 것들이 대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 정작 '사색''도시'도 부족하여 '좋은'에 도달하기에도 조금 부족한 책 같다. 참 여기저기 다녀 좋겠구나 싶으면서도 이 정도가 엑기스라면 그렇게 다닐 것까지? 하는 생각도 든다.

 

여행이란 모든 익숙한 것들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요. 도시에 사는 사람에겐 번지가 중요하지만, 세상엔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어쩌면 제 글에는 번지 없이 길 위를 떠도는 사람들의 향기가 배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도 이 향기를 따라 길을 떠날 수 있길 바랍니다. 길 위에 서면 새로운 풍경이 보이고 새로운 길이 열리니까요.

_ 안정희, 사색하기 쉬운 도시에서

 

, 어느 여행책에나 다 있는, 그래서 이 책에도 있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인, 이제는 전국민의 일반상식인 여행의 효용이 또.

 

 

 


243. 여성, 타자의 은유

김애령 지음 / 그린비 / 2012

 

얼마 안 되는 부피지만, 얼마 안 되는 책은 아니다. 발췌를 위해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거의 책 한 권을 통째로 옮겨적게 생겼다. 선생님의 다음 책은 은유의 도서관이다. 다음 책을 읽고 다시 돌아온다면,

 

주체가 자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주체는 우선 언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의 언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를 말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이야기하는 주체의 가능성은 열린다. 주체의 파편화된 시간 경험을 그러모으고, 자기를 이야기로 구성하는 능력을 통해, 주체는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있다. 그렇게 주체는 변화와 다름의 계기들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된다.

  그러나 오뒷세우스의 이야기 안에서, 오뒷세우스가 모험 중에 만난 수많은 타자들은 언어도 이야기도 갖지 못했다. 단지 주체가 된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를 통해, 오뒷세우스가 전하는 대로 표상된 타자로서만 우리에게 기억될 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타자의 모습은 오직 주체가 전하는 대로만 남겨져야 하는가? 타자의 참된 이야기, 대신 이야기된 것이 아닌 타자로부터의 이야기는 어디에 떠돌고 있는가?

_ 김애령, 여성, 타자의 은유

 

 

 


244. Do it! 파이썬 생활 프로그래밍

김창현 지음 / 이지스퍼블리싱 / 2020

 

쉽긴 한데, 결국 다른 책들을 볼 수밖에 없다.

 

 

 


245. 평등을 넘어 공정으로

박지향 지음 / 김영사 / 2021

 

정치적 관점이야 개인의 것이므로 나와 차이가 있다고 해서 딱히 말을 엮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서술 방식에 대해서는 좀 다르다. 이 책은 자체적으로 그다지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평등을 까고 싶으셨던 거라. '기회의 평등'을 당신이 주장하는 '공정'이라는 가치에 부여한 다음 남은 평등은 '결과의 평등'이라며 매도한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은 완전히 하나하나 모든 걸 다 똑같이 만들자고 말한다고. 그렇게 평등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왜소하게 만든 다음 사망 선고를 내리면서 평등은 자유와 양립할 수 없지만 공정은 그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건 뭐랄까, 한 명의 온전한 인간에게 갑자기 넌 니가 아니라 너의 왼발이라고 주장한 다음, 이 술집은 인간들에게 술을 파는 곳이지 왼발에게 술을 파는 곳이 아니므로 지금 당장 그 술잔을 내려놓고 가게 바깥으로 꺼지라고 하는 느낌이다.

 

그러고는 '공정'이라는 것을 페어플레이에 비유하시는데 거기서부터는 아, 이 책을 좋게 읽기는 틀렸구나 싶었다. 공정한 사회라는 것은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선수 개개인의 페어플레이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심판의 공정한 경기 운영에 달린 것이다. 페어플레이라는 건 선수들이 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결국 선생님의 공정은 니들이 이런저런 부정과 반칙 저지르지 말고 하라는 것.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공정과 정정당당 사이의 미묘하지만 의미 있는 차이를 스리슬쩍 뭉개면서 책임을 개인에게 전적으로 떠넘기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권력 자체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권력은 무조건 억제해야 한다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는다. 반면 민주주의는 권력이 많고 적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다수에게 있는지 소수에게 있는지에 집중한다. 즉 자유주의는 어떤 권력이든 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권력을 제한하려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권력을 다수가 지니고 있다면 그 권력의 속성이 무엇인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또 다른 차이점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시각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라 주장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한다. 이를테면 자유주의는 어떤 인위적인 장애도 없는 상황에서 열심히 노력해 최고의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이념이다. 한편 민주주의는 과도한 경쟁을 좋아하지 않고 많은 사람과 좋은 이웃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선호할 만한 이념이다.

_ 박지향, 평등을 넘어 공정으로

 

이런 대목에 도달하면 후려치기와 이분법적 사고가 동시에 버무려진 책을 읽는 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당연히 공정/정정당당하지 않은 서술이다. 대놓고 그렇다고는 하지 않지만, 문장의 구도로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대립 개념처럼 배치, 주장한다. 그리고 저 극단성. 선생님 당신께서 몸 담고 있는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권력을 제한한다는, 그러니까 조정의 여지가 있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민주주의는 다수가 권력을 지니고 있으면 권력의 속성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는다라는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syo 역시 결과적으로 봤을 때 틀렸다고 해도 될 만한 다수의 결정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다수를 이루는 개개인들이 무언가를 지지할 때는 그 속성이 무엇인지 따져본 다음 이해득실과 도덕정의관념을 저울질 혹은 버무려가며 선택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삭제하고, 그냥 커다란 덩어리로서의 다수의 결정에 대해 나이브하게 서술하신 것.

 

사실 이런 후려치기는 자유주의의 속성에 대한 서술에도 있다. 자유주의는 어떤권력이든 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권력을 제한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자유주의자들이 과연 자신의 권력도 제한하려 할까? 그들이 그렇게 알아서 착착 자기 권력을 제한할 줄 알았다면, 국가가 독점금지법 같은 걸 들고 나와서 그들의 권력을 제한할 일도 없었겠지. 그쪽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면서요. 누군가 나와 자기 권력을 제한하려 시도하는 순간 그 시도야말로 권력이라고 말하며 제한하려 들기는 하겠지만, 자기 권력이란 뭐 아무리 모으고 모아도 무한히 부족해서 우주의 끝날까지도 영원히 부족한 상태겠지요.

 

 



246. 처음부터 물리가 이렇게 쉬웠다면

사마키 다케오 지음 / 신희원 옮김 / 강남화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21

 

중학교 수준. 여기도 고양이가 등장한다. 쉬운 수학/과학책에는 고양이. 이거슨 일본국의 풍조인가?

 

 

 

--- 읽는 ---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 김이듬

젠더 트러블 / 주디스 버틀러

나의 첫 머신러닝/딥러닝 / 허민석

이 짧은 시간 동안 / 정호승

응답하는 사회학 / 정수복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 양자오

사조영웅전 1 / 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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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7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7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7-07 13: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누군지 주어는 생략하고) 역사 다루신 저 교수님, 저희 어머니가 돌보던 아기 사는 집 가사도우미님이 저분 집에도 다니셨는데 엄청 넓은 집 핸디형 충전 청소기만 건네고(그러니까 물걸레질 무릎꿇고 치라고) 여하간에 노동자에게 가혹한 분으로 들었답니다….더 할말은 줄임 ㅋㅋㅋㅋ

syo 2021-07-07 13:42   좋아요 4 | URL
굉장히 정합적입니다...... 끄덕하게 되어버리는군요.

독서괭 2021-07-07 13:4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우와 속시원하게 까주시네요. 이런 리뷰 넘 좋습니다.
syo님, 감히 위로를 건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위로를 건넵니다...

syo 2021-07-07 13:5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되어가는 정황이 어쩌면.... 싶었던게 오래인지라 세상 무너지는 충격은 아니었지만.....

난티나무 2021-07-07 14:15   좋아요 3 | URL
저도요…syo님

페넬로페 2021-07-07 14: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내내 어머니의 소식이 궁금했어요
누군가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힘내라는 말도 너무 힘든 사람에겐 힘든 말이라고요.
다시 곰곰 생각했어요
그럼 어떤 말을 해야할까?
그래도 전 그냥 힘내라고 하고 싶어요
힘 낼 수 있는 사람이 힘을 내야만 하니까요~~
또 힘들어도 힘을 내면 어느 순간에 신기하게도 힘이 나더라고요^^

syo 2021-07-07 17:39   좋아요 1 | URL
저는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허허허허.
조금씩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겠지요.
힘 내라는 말씀 감사합니다. 힘 내야죠 ㅎㅎ

붕붕툐툐 2021-07-07 14: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한 번은 누구나 다 경험해야할텐데.. 그럼에도 언제나 이런 상황은 놀랍고 두렵네요. 더 많이 함께하시길 매 순간이 찬란하시길..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을 위로랍시고 전합니다.

syo 2021-07-07 17:40   좋아요 1 | URL
후회거리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모든 일을 해나가야겠다 싶어요.
툐툐님 감사합니다^-^

수이 2021-07-07 15: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힘내 라고 하면 뻔한 소리인데 뻔한 소리밖에 할 게 없네. 힘내 친구야

syo 2021-07-07 17:4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아직까지는 괜찮으니, 꾸준히 괜찮을 수 있게 엄마가 천천히 안 아프게 지냈으면 좋겠네요.

scott 2021-07-07 16: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쇼님 힘내세요
저도 오늘 부모님 모시고 병원 다녀왔지만
희망과 긍정의 힘으로!
이말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syo 2021-07-07 17:4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사실 뭐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는 상태긴 한데.... 정신 바짝 차려야겠지요.

2021-07-18 0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