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matitis
읽은 책에 대해서 쓰고 나서 다시 보니 오늘은 아쉬운 말만 잔뜩 한 것 같다. 입맛과 함께 독서 의욕이 떨어지고 있는 중.
의욕이 떨어진다고 해서 딱히 읽는 양이 줄지는 않는다. 시큰둥하게 읽고, 20분 이상은 못 읽고, 자꾸 다른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사실 그 ‘다른 책’이 뭔가 딱 정해진 것도 아니어서, 결국은 ‘다른 책’을 손에 든 즉시 ‘이 책’이 되면서 다시 ‘또 다른 책’을 향한 욕심만 무한히 이어진다. 딱히 뭘 읽고 싶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읽기 싫다는 말을 다른 책을 읽고 싶다는 말로 바꿔서 하고 있는 중인 건가?
특별한 이유 없이 컴퓨터를 포맷하고 이것저것 새로 설치하면서 시간을 썼다. 에버노트에 따 놓은 인용문들의 70%를 날렸다. 언젠가 리뷰를 써야지 하고 대충 휘갈겨 놓은 단상들을 몽땅 지웠다. 읽던 것들, 읽지도 않은 것들을 포함해서 빌려온 책 전부를 싹 다 반납하고 다른 것들을 빌려왔다. 사실 갈아엎고 싶은 건 나 자신인데, 아무래도 그럴 용기가 없어서 애꿎은 것들만 리셋하고 있는 것 같다.
--- 읽은 ---
214. 밤을 걷는 밤
유희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
모든 걸음은 개인의 것이다. 누군가 걸은 길을 그 사람이 걸었던 방식으로 따라 걷는다고 해서 그가 느꼈던 것들까지 따라 느낄 수는 없다. 길은 길을 걷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길이다. 걷는 사람은 그 사람이 과거에 걸었던 모든 길까지 포함해서 걷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길은 이 길을 포함한 세상 모든 길이고, 같은 이유로 그 길은 세상에 딱 하나 있는 길이다. 누가 길 걷고 쓴 책은 누가 책 읽고 쓴 책처럼 내게 그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까지 하면 다 한 것. 이제는 그 길을 걸어야 하고,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도 그 길을 걷는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 거기서부터는 책의 일이 아니라 신발의 일이다.
나쁘지 않았으나 함량은 아쉽다. 나는 아직도 책이라는 물건에 요구하는 게 많은 편.
걸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삶의 풍경이 너무 많다. 아득한 풀벌레 소리, 수묵으로 그려 넣은 듯한 밤의 능선……. 어두워져야만 듣고 볼 수 있는 자연의 풍경. 밤의 거리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하루의 끝자락이 문득 쓸쓸하다면 무작정 외투만 걸치고 거리로 나서보기를. 익숙하고 가까운 동네를 나풀나풀 한 바퀴 걸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밤은 언제나 뜻밖의 풍경을 준비해둘 테니.
_ 유희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밤을 걷는 밤』
215.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는 당신이 알아야 하는 모든 것
해달별 지음 / 달무리 / 2020
요약하자면,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해 물질적 안정감을 다소 포기하면서도 튼튼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책이다. 디지털 노마드가 된다고 직장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도 된다. 그저 일하는 순간에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잘 하는 일로 돈을 버는 것, (일의 총량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하고 싶은 시간에 일하고 쉬는 시간에 쉴 수 있도록 일의 통제권을 쥐는 것. 이 책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짧다. 그래서 부족하다. ‘모든 것’이라는 제목은 호기에 그쳤다.
나는 무작정 노트를 펼쳐 내가 가진 고민들을 적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규명했던 대부분이 시간과 돈만 있으면 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고, 나머지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걱정거리’에 불과했다. 그 문제들을 실천할 수 있는 것들로 다시 한번 걸러내니 ‘내가 진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
삶의 변화를 앞둔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고, 내가 가장 원하는 것도 시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낼 수 있는 시간. 나 자신을 충분히 돌볼 수 있는 시간. 시간적 여유에서 오는 마음의 여유. 여유로운 마음에서 생기는 내면의 안정감. 저녁이 있는 삶. 얽매이지 않는 삶. 그래서 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로.
_ 해달별,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는 당신이 알아야 하는 모든 것』
216. 전쟁은 끝났어요
곽재식 외 / 요다 / 2019
작가님들을 모아 놓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두 개 중 하나를 배당하여 그 풍경을 그리는 글을 받았나 보다.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대로, 디스토피아는 디스토피아대로 각기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는데, 이 책은 유토피아 편이다. 그런데 SF 소설의 유토피아는 그 어느 곳도 진짜 유토피아 같은 유토피아가 없다. 몇 세기 만에 인간은 희망을 완전히 잃었고, 이제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유토피아 함량이 70%를 넘는 세상을 그릴 만큼 뻔뻔스럽지가 못하다.
구한나리 선생님의 「무한의 시작」은 좋게 말하면 단순하고 조용하다. 나쁘게 말하면 단조롭고 식상하다.
곽재식 선생님의 「로보타 코메디아」는 재기가 돋보이지만 재기를 보여주겠다는 욕망이 더 돋보인다.
김초엽 선생님의 「순례자는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선생님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맨 앞쪽에 배치된 바로 그 단편이다. 그 책에서는 그 단편이 제일 별로였다.
김주영 선생님의 「프레스톨라티오의 악몽」은 조금 더 긴 구성의, 최소 중편 분량의 작품으로 다뤘으면 좋을 뻔했다. 전반부에서 긴장감을 축적하는 힘은 좋았는데, 그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연소시키기에 단편은 짧았다.
이산화 선생님의 「전쟁은 끝났어요」는 과연 표제작답다. 이게 표제작이 아니었으면 의아했을 것.
악은 분자다. 7만 년 동안 분자들이 사탄을 구성하였고 사탄은 분자들을 지배했다.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가 새로운 터전을 찾아 메뚜기 무리처럼 아프리카를 떠나기 시작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폭력을 행사했다. 같은 인간을 무자비하게 죽이며 전쟁의 역사를 쉬지 않고 써 내려갔다. 117번 발굴장소로부터 세미나실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스위치가 꺼져 있었기 때문에, 안심시켜줄 동족이 모두 죽어 사라졌기 때문에. 하지만 고작해야 7만 년, 생명의 역사에서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시간. 늦지 않았다. 스위치는 다시 켜면 된다. 작용제가 뇌세포 속으로 퍼져간다. 거울 속 사탄이 빛 속으로 조금씩 녹아 사라진다. 7만 년 동안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어,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_ 이산화, 「전쟁은 끝났어요」
217.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
언제 한 번 가슴 속에 들어온 적이 있어야 잊어도 잊는다. 완전히 암송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구절 정도는 심장 근처에 박아놓고 되뇔 때마다 혈관을 따라 비슷한 감정이 피돌이하는, 다시 읽고 아껴 읽은 시가 하나쯤 있는 사람이어야 잊어도 잊는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고,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말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말고, 그러니까 시험에 나오는 방식으로 칼질을 맞아 해체되고 조리된 시체들 말고, 이게 뭐라고 내가 울었던, 이게 뭐라고 내 피부가 전율했던, 이게 뭐라고 네게 그렇게도 읽어주고 싶던, 짧은 순간만이라도 다시 그때로 모든 것을 되돌리는.
허나 한 세월 살다 보면, 제법 잘 살아왔다고 여겼던 오만도, 남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겸손도 문득 힘없이 무너져내리고 마는 그런 날이 오게 마련입디다. 채울 틈조차 없이 살았던 내 삶의 헛헛한 빈틈들이 마냥 단단한 줄만 알았던 내 삶의 성벽들을 간단히 무너트리는 그런 날, 그때가 되면 누구나 허우룩하게 묻곤 합니다. 사는 게 뭐 이러냐고. 그래요,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차피 잊히지가 않는 법, 잊은 줄 알았다가도 잊혔다 믿다가도, 그렁그렁 고여 온 그리움들이 여민 가슴 틈새로 툭 터져 나오고, 그러면 그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
_ 정재찬, 『시를 잊은 그대에게』
218. 황금 당나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지음 / 장 드 보쉐르 그림 /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8
지나친 호기심 때문에 사서 개고생하는 인생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야하다고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앞부분에 바짝 그랬을 뿐, 뒤로 가면 마법 덕분에 당나귀가 된 어리석은 루키우스가 이런저런 이유로 얻어터지는 장면이 대부분이다. 1세기 당시에 인간의 흉이라고 취급받았을 다양한 악덕이 등장하고, 그 모든 악덕의 화신들이 일단 루키우스를 패고 난 다음 포르투나 여신에게 얻어터지는 그런 구성이다. 뒤로 갈수록 애초의 기획 의도와는 다르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뭐 앞부분도 딱히 촘촘하고 말 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설렁설렁 읽어진다. 재미? ‘전쟁같은 사랑’이 난무하는 앞쪽까지는 썩 괜찮았다. 다음과 같은 식이었다. 지들은 진심 절박한데다 비장하기까지 한데, 읽는 입장에서는 도무지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나를 어여삐 여겨 줘. 가능한 한 빨리 내 욕망을 채워줘. 너도 보다시피 전쟁 문서 절차를 이행하지도 않고 선포한 전쟁에서, 나는 무자비하게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 오늘 아침, 잔인한 쿠피도의 첫 번째 화살을 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맞은 이후, 지금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어. 자, 내가 완전히 만족할 수 있게 머리를 풀고, 풀어헤친 머리칼로 나를 사랑스럽게 애무해 줘.”
그녀가 옷을 모두 벗고, 그 옷을 음식 접시 옆에 차곡차곡 개어 놓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헤친 다음, 고개를 흔들며 머릿결을 마구 흩날렸다. 그러자 그곳에 서 있던 그녀는 바다로 들어가고 있는 완벽한 베누스의 형상으로 변했으며, 어느 순간 그녀는 달아오른 손으로 베누스의 숲을 가리고 있었다. 그것은 베누스 여신상과 마찬기자로 창피해서라기보다는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이제 온 힘을 다해 싸우세요. 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등을 보이지도 않을 거예요. 당신이 남자라면 얼굴을 맞대고 정면으로 싸우세요. 하지만 신중하게 공격하세요. 자, 이제 나를 공격하세요. 나를 죽이세요. 이 전쟁에서 절대로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말아요.”
이렇게 말하고서 그녀는 침대로 올라와 한쪽 다리를 누워있던 내 등에 올려놓앗다. 그리고 레슬링 선수처럼 웅크리고 앉아 허벅지로 재빠르게 공격을 하면서 나긋나긋한 엉덩이를 뜨겁게 흔들었다. 그러자 나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것은 마치 사랑의 사과가 내 위를 오르내리는 것과 같았다.
_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황금 당나귀』
219. 빅데이터 전문가 마스터플랜
theD마스터플랜연구소 지음 / 더디퍼런스 / 2020
마스터플랜이라구요? 헐…….
정리가 좀 덜 된 구성. 특별한 것 없는 조언. 다 아는 통찰.
--- 읽는 ---
마션 / 앤디 위어
글 쓰는 삶을 위한 일 년 / 수전 티베르기앵
무자비한 알고리즘 / 카타리나 츠바이크
나 혼자 회의한다 / 야마자키 타쿠미
미국, 어디까지 알고 있니? / 홍세훈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제이컵 솔
목련정전 / 최은미
이 짧은 시간 동안 / 정호승
이토록 쉬운 딥러닝을 위한 기초수학 with 파이썬 / 마스이 도시카츠
애덤 스미스 구하기 / 조나단 B. 와이트
맑스와 자본 / 조현수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윌리엄 데이비스 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