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반란
1
프랑스의 어느 미식가는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호기를 부렸다고 한다. 과연 프랑스스럽달까. syo는 프랑스 사람도 미식가도 아니지만 저게 어떤 말인지 대충은 알 것 같다. 하루의 대부분을 활자를 먹는데 소비하는 사람은 그가 읽는 책과 비슷한, 그러니까 그 책 속에 들어있는 문장의 생김과 비슷한 기분으로 생활하고 말을 하고 글을 쓰게 된다. 최근 제일 안력을 가장 많이 소진하고 있는 장르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잔뜩 들어있는 책들이다.
그러나 그 수 개의 부동산 중 일부는 채무자의 소유이고 다른 일부는 물상보증인의 소유인 경우에는 물상보증인이 민법 제481조, 제482조의 규정에 따른 변제자대위에 의하여 채무자 소유의 부동산에 대하여 저당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그 물상보증인이 채무자에 대하여 구상권을 행사할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채무자 소유의 부동산에 대한 피담보채권액은 공동저당권의 피담보채권액 전액으로 봄이 상당하다.
아, 상당하네.
알라딘이 법원이 아닌 이상, 저런 상당한 문장들과 하루 10~12시간씩 씨름하는 사람이 쓰는 글이 제대로 꼴을 갖출 수 있을 턱이 없다. 가끔 뭐라도 끄적거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문체적 여유가 없어져서 큰일이다.
2
하루의 절반 정도를 저러는 데 쓰고도 책을 읽겠다고 잠을 줄여 보았다. 며칠은 괜찮았는데, 슬슬 피곤하다.
--- 읽은 ---
233. 축소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이보람 지음 / 카멜북스 / 2020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행의 시대』에서 소비시장을 운영하는 책임자들을 “공급에 맞추어 욕구를 키우는 전문가들”이라고 표현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내 욕구와 욕망의 자주성을 지키고/인정받고 싶어서 안달한다. 우리의 욕망이 대타자의 욕망임을 선언한 라캉의 철학적 금언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식으로 먹기도 좋고 보기도 좋게 조리되어 떠돈다. 저 말은 한 번만 들어도 아, 진짜지! 우리가 진짜 그렇지! 하면서 쉬이 공감하게 되고, 그 즉시 우리는 어떤 지혜를 깨치거나 탁월한 삶의 감각을 획득한 것같은 착각에 빠진다. 멋있는 말과 내 자아의 쉬운 일체화는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어쩐지 나를 더 멋진 인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그 멋짐을 지키기 위해 경구 자체에만 집착하다 보니 실제 삶은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애초에 저 말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타인의 입김에 오염되지 않은 자신만의 욕망을 찾으라는 말이 아니라, 언어 구조에 포획된 신경증적 인간으로서의 현대인에게, 그런 탈출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에 더 가까운데. 보기에 따라서는 그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벌써 어떤 담론에 포획되어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되지도 않을 일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되는 일부터 해나가는 게 좋다. 불순물이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내 욕망을 찾겠다는 꿈을 애초에 버리고 시작하면, 오히려 피할 수 있고 노골적인 타인의 욕망들을 직시하기 쉽다. 다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로 돌아가면, “공급에 맞추어 욕구를 키우는” 이들로부터 내 욕망을 지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 욕망을 조작해서 더 많이 팔아치우려는 그들의 욕망을 꺾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공급을 줄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공급은 어떻게 줄이면 될까? 수요를 줄이면 된다. 물질의 소비를 줄이는 일에는, 인간을 포함한 지구 전체를 위해 좋은 선택이라는 거대한 이점 말고도, 내 욕망의 주도권을 조금 더 찾아오는 소소하고 개인적인 이득도 있다.
스스로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자존감을 높여 나가면 나의 정체성을 물질로 대체하지 않고, 타인과 비교하며 흔들리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쓸데없이 물질로 남과 경쟁하는 일이 줄어들면 물건을 많이 만들 필요도 없어진다. 과도한 생산이 멈추면 그에 따른 탄소 배출이 줄어들고 쓰레기도 감소할 것이다. 나는 내 건강만 챙겼을 뿐인데 그 영향은 나비처럼 날아가 온 지구에 퍼지게 된다. 마음이 병든 사람들이 지구를 파괴하면 그 악영향은 돌고 돌아 결국 또 인간이 아프다.
_ 이보람, 『나는 축소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234. 마흔에는 잘 될 거예요
권수호 지음 / 카멜북스 / 2020
마흔이 눈앞에 있다. 코앞은 아니지만. 눈앞에 있는 마흔은 금방 코앞으로 올 것이다. 서른이 눈에서 코까지 가는데 걸린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면 눈에서 출발한 마흔이 충분히 코에 도착할 것이다. 서른이 되기 전에는 세상에 ‘서른이 되면’, ‘서른에 알았더라면’, ‘서른에 꼭’ 이라는 제목을 단 책이 정말 많다고 생각했는데, 마흔의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는 오늘 보니까 세상에 있는 책의 80%가 ‘마흔아’, ‘마흔에는’, ‘마흔이라면’ 따위의 제목을 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서른 전에 보았던 서른의 책들이 서른을 돌파하는 데 아무런 실체적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마흔 앞에 만날 마흔의 책들을 그리 기대하지 않고 읽는다. 이 책은 그저 소소한 에세이고, 권수호 작가님의 필력은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에세이들 사이에서 이 책을 낭중지추로 만들 정도는 아니다.
“늙었다.”
툭 하고 내뱉은 말이었지만 유난히 속이 시렸다. 바쁘게 사는 건 좋은데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그 과정이 보이지 않았다. 거울 속 나는 내가 소망했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난 지금 행복할까? 앞으로 행복할 수는 있을까? 어쩌면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사는 건 아닐까?
_ 권수호, 『마흔에는 잘 될 거예요』
235. 밤에 일하고 낮에 쉽니다
정인성 지음 / 북스톤 / 2019
책을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사랑에 한없이 가깝다고 해도 좋다. 술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현미경의 배율을 무한대로 보내서 마음을 들여다보면 결국 싦음에 수렴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원체가 그런 사람이다 보니, ‘북바’라는 개념이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아서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읽었다. 오히려 ‘북바’보다 그 ‘북바’를 만들기 위해 분투한 ‘인간 정인성’이 내겐 더 재미있는 개념 같았다. 정인성 작가님의 다른 책 『소설 마시는 시간』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표지도 그렇지만 안에 실린 술병이랑 술 마시는 사람들 그림이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술도 안 좋아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다. 이후로도, 이 작가님은 술을 주제로 한 두 권의 책을 감수하신 것 같다. 아무래도 술+책 하면 정인성이 1빠지- 이런 개념이 저 판에 떠도는 건가. 뭐 그것도 재미있는 개념 같다.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이곳에 있는 걸 더는 못 견디는 사람과, 저곳에 가고 싶어 더는 못 참는 사람. 물론 전자는 안쓰럽고 후자는 존경스럽다. 그건 내가 3자일 때, 그러니까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일 때 이야기다. 그런데 내가 전자가 되어서 후자를 볼 때, 혹은 내가 후자가 되어서 전자를 볼 때 드는 감정은 3자일 때와 같을 수가 없는 듯하다. 멋있는데 못내 아니꼽고, 부러운데 괜스레 흠잡고 싶고, 이 사람 잘 됐으면 싶으면서 또 너무 크게 잘 되면 어쩐지 좋지만은 않을 것도 같고.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좋다고 했다. 몇 시간 뒤, 계산대 앞에 선 그녀에게 압생트는 어땠는지 감상을 물었다. 역시나 맛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앉았던 자리를 슬쩍 쳐다보니 두 모금 정도만 비워진 압생트가 남아 있다. 90%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내가 그녀였어도 압생트를 주문했을 것이다. 취향과 관계없이, 궁금한 술을 맛보는 경험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술을 다 마시든 남기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마셔보면서 내 취향을 찾아가고, 그러면서 또다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렇게 매번 새로운 도전을 통해 나라는 사람과 가까워진다.
_ 정인성, 『밤에 일하고 낮에 쉽니다』
236. 공부는 내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
이종훈 지음 / 북카라반 / 2019
세상 모든 것이 그것에 열중하는 사람의 삶을 급격하게 바꾸어 놓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실제로 공부를 포함한 몇몇 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아무리 열중해도 ‘삶을 바꿨다’고 표현할 만큼의 전환점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 심지어 이 책을 쓴 이종훈 판사님이 오늘날 갑자기 고2의 몸으로 돌아가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시작해도, 비슷한 결과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건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그렇다면 개인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면, 이런 성취를 이룬 사람에 대해서는 존경과 찬사 말고도 더 바칠 게 있는지 찾아보고 싶은 심정이다. 노력과 열정도 재능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야 그게 없는 내 입장이 덜 비참해지잖아…….
하여튼 이런 책에 손이 간다는 건, 마음 한켠에 불안 같은 게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결국 글을 써야겠노라 마음 먹은 것은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전국의 수많은 꼴찌들 때문이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성실성과 노력만 있다면 누구나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책을 읽는 사람 중에 아마 학창 시절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해낼 수 있다면, 이 책을 읽을 누군가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_ 이종훈, 『공부는 내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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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보는 유럽사 / 백승종
동네의사와 기본소득 / 정상훈
파퓰러사이언스 2020. 11 / (주)에이치엠지퍼블리싱
법은 얼마나 정의로운가 / 폴커 키츠
사랑이 스테이크라니 / 고요한
휴식의 철학 / 애니 페이슨 콜
엄마의 뜰 / 김살로메
유행의 시대 / 지그문트 바우만
성의 역사 1 / 미셸 푸코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 김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