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1
무심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고 지나쳐온 것들이 모여 있었다. 키가 큰 나무들만 잔뜩 심어놓은 숲을 바람은 잠깐 흔들고는 이내 떠나버리고 그저 아쉬운 몸짓만이 남았다. 전하지 못한 말들이 묻어 그늘의 귀퉁이는 늘 축축하고 그 안에서 버섯처럼 몰래 자라는 마음. 제때 들어야 할 말들을 듣지 못한 이들이 추억의 얼굴을 하고 마음의 뒷문을 열어 들어왔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겨우 알았다. 아무것도 훔쳐내지 않을 도둑들이라 차마 매섭게 쫓아내지도 못하고 나는 멍하니 웅성거림을 듣고 섰다. 방 밖에는 아무도 없는 나밖에 없어서 나는 문턱에 발을 올리고 주춤댄다. 차라리 장작을 가져다 줄까, 쟤네들 춥겠는데. 그렇지만 이제 와 따뜻하다고 해도 하지 못한 말들이 시간을 거슬러 갈 것은 아니어서,
책을 빌리러 갈 시간에 좋아하자. 다툴 시간에 책을 읽자. 하지만 그리워할 시간에는 그리워하고, 글을 쓸 시간에는 글을 쓰자. 그리움에 대해서 써야 할 시간을 미루지 말자. 오늘의 그리움은 어제의 그리움이 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제가 아무리 그리워도 오늘이 되지 않듯이.
설거지할 때 접시의 옆면도 닦아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어. 깜빡 잠깐 문을 열어두면 따릉따릉 소리로 알려주는 냉장고를 가지게 되었어. 외국인이 호텔로 가는 길을 물어오면 당황하지 않고 가르쳐주고 싶어. 옥상에는 여전히 자주 올라가지만, 멀리 보이는 산 너머를 상상하는 시간의 절반을 아껴서 여기 화분을 가져다 놓으면 어떨까, 고추 같은 걸 심어봐도 좋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는데 써.
여전히 뭔가를 쓰면서 살아.
2
일하는 동안 바빠서도 그랬지만, 의식적으로 드라마를 딱 끊어내고 살았는데 <비밀의 숲2>의 공습경보가 울리자마자 방공호 속에 숨어 <비밀의 숲1>을 정주행하고 말았다.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드라마 자체보다 OST 한 곡에 꽂혀 오래 머무는 중. 끝없이 흥얼거리다보니 가사까지 다 외워버렸다. 양치질하다가 갑자기 칫솔을 뱉으며 “슬프게 소리 내며 붉게 변해간 노을은 그대의 인사였나요”. 아 다 튐. 똥을 싸다가도 “어딜 가나요 날 두고 가지 말아요으윽” 잠깐 쉬었다 다시 힘주며 “잠시라도 있어줘요오옥끄흥차으아아아름다운 그대흐으윽”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언젠가 어느 곳에서 나는 이 노래를 부를 건가 봐…….
--- 읽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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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혼밥생활자의 책장
김다은 지음 / 나무의철학 / 2019
아씨, 이래저래 기죽는다…….
106. 미셸 푸코
양운덕 지음 / 살림 / 2003
예전에 한참 푸코를 파고들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때가 있었다는 거랑 푸코가 대머리라는 것만 기억나고 특별히 남아 있는 게 없는 실정이다. 담론이니 지식-권력이니 하는 뻔한 말이야 읊조릴 수 있겠지만, 철학은 잘난 척하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니까. 예전에는 철학으로 잘난 척하기 참 좋았는데, 요즘 그랬다간 이상한 놈만 된다.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잘난 척하지 말고 잘난 놈 되자. 그래!
라고 원대한 포부를 드러내기엔 얘 너무 쪼꼬미 요약서잖아…….
107. 따뜻한 위로가 필요할 때 : 니체와 고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공공인문학포럼 엮음, 빈센트 반 고흐 그림 / 스타북스 / 2020
니체의 말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반 고흐의 그림을 다 아는 것도 아니어서, 니체가 했음직한 말(했다)에 반 고흐가 그렸음직한(그렸단다) 그림이 매칭되어 있는 페이지를 착착착 넘기는 재미는 있었다. 허허. 반 고흐 화집으로는 당연히 부족하고, 니체의 말로 만든 잠언집은 천지에 깔렸으니, 과연 이 책은 무엇인가.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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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역사강의 / 한형식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 김민정
길 잃기 안내서 / 리베카 솔닛
너 자신을 알라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유행의 시대 / 지그문트 바우만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 갖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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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는 패러디다 / 조현준
전복적 스피노자 / 안토니오 네그리
패턴 랭귀지 / 크리스토퍼 알렉산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