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의 어떤 형태
1
어려서는 이 세상의 뒷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구멍을 찾겠다고 그림자를 막대기로 쑤시고 다녔다. 유성 매직을 들고 동네를 싸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차마다 보닛에 소용돌이 모양을 그려 넣고는 그 소용돌이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상상을 했다. 동쪽 하늘에 뜬 구름이 바람에 밀려 서쪽 산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해질 때까지 바라보다 발갛게 물든 마음을 안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흐르는 것들은 늘 좋았다. 강이 좋았고 바람이 좋았으며 강가에서 바람맞는 것이 가장 좋았다. 여기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여기보다 늘 저기가 좋았다.
어디까지 왔는지를 늘 생각한다.
어제와 내일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고 우리가 있는 곳은 결국 늘 오늘이듯이, 우리는 늘 여기에 머물 뿐이고 모든 저기는 도달하는 순간 고개를 돌려 여기가 된다. 어제와 내일도, 거기와 저기도, 결국 오늘 여기를 가꾸는 능력에 발맞춰 채색된다. 어디까지 왔는지 늘 생각하지만, 답은 늘 여기다.
2
지난주 초반에 앓기 시작한 눈병이 금주에 정점을 찍고 슬슬 끝물이다.
아프다기보다는 불편했다. 붓고 붉은 눈을 하고 동료들과 민원인을 대해야 했고 그 와중에 만만치 않은 양의 육체노동까지 겸했다. 짬짬이 안약을 들이부었으며 부은 것의 두 배를 눈물로 뽑아냈다. 자려고 눈을 감으면 눈이 까끌거려서 짜증이 치밀었고 어찌저찌 참고 잠이 들어봐야 얼마 못 가 굳은 눈곱을 휴지로 닦아내느라 깨어났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혓바늘이 세게 돋아서 물만 마셔도 아팠다. 인간이 말을 할 때 혀가 이 안쪽을 마찰하는 일이 굉장히 잦다는 사실을 아픔 속에서 깨달아야 했다. 대구로부터 동생이 알바를 구하지 못하고 있으며 엄마가 빈혈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병원에 몇 번 다니면서 쓴 진료비며 약값이며가 10만 원에 육박했는데, 내 급여라는 게 이런 식으로 열 번 조금 넘게 돌고 나면 깡그리 사라지는 수준이라서 인생이 참 엿 같았다. 그렇게 지난주는 여러모로 최악의 한 주였고 이번 생에는 희망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날씨가 너무 좋았고, 꽃이 잔뜩 피었고, 나는 바닥없이 지쳐가고 있었다.
3
어떤 소진은 건조하다. 슬픔도 분노도 없다. 그냥 비어 있는 시간 속을 지나가는 느낌. 날카롭게 까끌대는 칼모래 주머니에 심장을 넣고 흔들 때 나는 소리처럼, 뾰족하고 외로운 비명을 지르는 마음이 제 비명을 저 혼자 듣는다. 아픈데도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동사는 ‘늦었다‘, 부사는 ‘어차피’다.
4
그냥 하루 쉬면서, 멍하니 책이나 읽다 보니 괜찮아졌다. 눈은 참을만하고 혀는 다 나았다. 동생은 성에 안 차지만 일단 뭐라도 하기로 한 모양이고 엄마는 철분제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아침이면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어떻게든 8시 전에 회사에 도착하기 위해 출근 전 시간을 조율한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안부 문자 보내는 걸 자꾸 잊을 만큼 정신없이 일하고, 10시 전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게 퇴근 시간에 신경을 쓴다. 늘 자던 시간에 잔다. 늘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나기 위해서.
나는 늘 여기고, 늘 오늘이다. 좋건 나쁘건, 모든 의미에서 그렇다. 점점 더 그걸 명확히 알게 된다.
--- 읽은 ---
45. 식물의 책 / 이소영 : 154 ~ 287
가볍다.
46. 인생이 왜 짧은가 / 루키우스 아이니우스 세네카 : 130 ~ 278
스토아학파의 철학 사상은 철학보다는 자기계발서처럼 다이렉트로 인생에 뭔가를 떠먹여 주는 데가 있다. 오히려 동양 사상에 가깝다. 그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인간상이란 이른바 ‘아파테이아’를 실현한 인간인데, 그게 무슨 유교의 군자나 도교의 진인처럼 도무지 저게 되나 싶을 정도의 탈인간적 허무맹랑함을 자랑한다. 실제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니 믿긴 믿겠는데. 오늘 저녁에 죽을 건데 점심쯤 내기바둑 두고, 내 목 따러 온 망나니한테 이 바둑판 내가 이긴 거 니가 증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에게 위대하다는 말 말고 무슨 말을 더 해드릴 수 있을까요.
47. 대량살상 수학 무기 / 캐시 오닐 : 236 ~ 390
만사에는 명과 암이 있는 법인데, 그것과 관련하여 사람들은 종종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지.’ ‘모든 게 다 일장일단이 있는 법.’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거야.’ 따위의 명제를 한 번 주워섬기는 데서 만족하고 만다. 그런 ‘진리’를 아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거짓말이 아니다. 의미 없는 말일 뿐. 극단적인 중도주의와 맹목적인 중용의 사고가 형편없는 뻘소리로 끝나고 마는 때가 잦은 이유는 그것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좋은 핑곗거리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진리를 입밖에 내뱉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변화의 방향은 어디로 잡아야 하며 그 과정은 어떤 식으로 펼쳐나가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빅데이터라는 물건이 우리에게 가져올 거대한 효용과 치명적인 해악이 나란히 드러났다면, 득이 실보다 많으니(혹은 그 반대이니) 계속 가야한다(그만 가야한다)든가, 심지어 어차피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라는 무색투명한 헛소리나 하고 말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득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실을 줄일 수 있는지, 득실을 교차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불합리한 정황이 발생하지는 않을는지, 그런 것들을 꼼꼼히 따져보는 일이 중요하다. 훌륭하다.
--- 읽는 ---










시장, 세상을 균형 있게 보는 눈 / 김재수 : ~ 91
맨 얼라이브 / 토머스 페이지 맥긴 : ~ 57
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 이현우 : 115 ~ 219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즌 : ~ 92
스피노자 / 스티븐 내들러 : ~ 82
미치게 친절한 철학 / 안상헌 : ~ 141
흑인 페미니즘 사상 / 패트리샤 힐 콜린스 : 177 ~ 339
콜로노스의 숲 / E. M. 포스터 : 124 ~ 249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 최현우 : ~ 60
어중간한 나와 이별하는 48가지 방법 / 쓰루다 도요카즈 : ~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