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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과 서론만 가지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세상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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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한 자본주의에서 여성들이 남성에게 종속된 것은 “여성노동”의 “비생산적인” 본성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이 임금을 받지 못하는 조건 속에 있기 때문이며, 남성의 지배는 임금인 남성들에게 부여한 권력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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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관계가 노동의 위계를 구조화하고, 권력을 노동계급의 특정 부문으로 위임하며, 재생산 노동을 비롯한 어마어마한 착취의 영역을 감추고 자연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_ 9쪽
우선, 돈 몇 푼 받겠다고 저렇게 아등바등 할 거면 차라리 나가서 일을 하라는 식으로 덤벼드는 인간들에게, 세상만사를 또박또박 금액으로 환원할 줄 아는 성실한 자본주의의 농노가 되신 것을 축하한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인간에게 노동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건대,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거의 등가로 놓을 만큼 분노하는 것일까요.
이 책은 자본주의의 진보성 신화를 해체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는 노동력의 꾸준한 확장과 노동비용 절감에 몰두하기 때문에 여성의 노동을 비롯해서 그 노동이 생산해낸 주체들과 그들의 노동을 천대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_ 10쪽
노동을 천대하는 것이 자본의 본성이라는 통찰도 중요하지만, 이 대목에서 밑줄을 긋고 싶은 부분은 아무래도 “노동이 생산해낸 주체” 같습니다.
주체가 노동을 생산하는 것일까요, 노동이 주체를 생산하는 것일까요? 모든 주체는 노동을 생산할까요? 모든 노동은 주체를 생산할까요? 주체를 생산하지 못하는 노동과, 노동을 생산하지 못하는 주체가 각각 어떤 문제를 야기한다면, 어느 쪽이 더 심각한 문제를 낳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어떻고, 사회전체적으로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어쨌든, 노동이 주체를 생산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노동의 가치가 주체의 가치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든 아니든, 내가 만드는 것이 언제나 나를 만듭니다.
그러니까 싸워야지요. 무려 나를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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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 선생님은 상품의 가치를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투여한 (사회적)노동으로 측정합니다. 노동자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생산자고, 같은 원리에 의해 노동력의 가치, 즉 임금은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 투여한 노동의 총량으로 측정할 수 있는데요. 노동자는 먹어서 노동력을 만듭니다. 노동자가 먹는 음식의 가치가 임금에 포함되죠. 노동자는 입어야 합니다. 노동자가 입는 옷의 가치가 임금에 포함되겠네요. 노동자는 쉬어야 합니다. 노동자의 휴식과 여가에 드는 비용이 임금에 포함되어야죠.
그런데 노동자가 먹는 음식에는 누군가의 가사노동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온 누군가가 요리라는 노동을 통해 만든 음식이 노동자에게 제공되니까요. 노동자가 입는 옷에는 누군가의 가사노동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시장에서 옷감을 사 온 누군가가 옷을 짓거나, 만들어진 옷을 사온 누군가가 세탁을 하여 노동자에게 깨끗한 옷이 제공되거든요. 노동자의 휴식과 여가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누군가의 가사노동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고된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치킨에 맥주를 사들고 돌아와 희희낙락 방 문을 열었더니 쓰레기더미가 쌓여 있으면 그 위에 누워서는 노동력 충전이 될 리가 만무하거든요. 분명히 누군가의 노동이 특별한 가치를 만들었고 또 분명히 그 가치가 노동자의 노동력 속에 함유되었는데, 그 가치는 누구로부터 보상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노동력의 가치가 어떻게 측정되어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규정했던 노동자의 영원한 친구 맑쌤은 왜, 노동력이라는 상품 속에 녹아 있는 특정한(특정한 주체가 생산한) 가치를 0으로 측정하여 노동자의 임금 수준을 확 깎는데 일조하고 말았을까요?
사실 맑스와 부인 예니 인생살이를 지켜보고 있자면 납득이 가지 않을 일도 아니네요. 예니가 자신에게 해준 모든 일에 정서적 가치는 무한하나 경제적 가치는 0라고 우기지 않았다면, 우리 선생님, 남편으로서 스스로의 무능함을(경제적으로는 물론 심지어 정서적으로도 한없이 0으로 수렴하는데.....) 견뎌내기가 참 어려웠을 것 같아요.
아니면 이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음, 지성의 화신인 이 몸이 오랜 연구 끝에 내린 결론에 따르면, 결국 자연스럽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임금이 생활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지고, 부는 부르주아지에게 집중된다. 양극화. 생산력은 넘쳐흐르는데 생산양식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지. 그럼 뻥! 하고 터진다. 그렇게 사회주의 생산양식이 등장한다. 혁명. 크~ 혁명. 그 혁명을 앞당기려면 노동자의 임금이 한시라도 빨리 최저생활수준 근처까지 떨어져야 할 테고...... 그렇다면 노동자 임금의 시작점을 좀 낮게 잡아볼까. 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보자, 음식, 안 되고. 옷, 안 되지. 책? 안 되지, 큰일 나지. 여가? 담배 없이 어떻게 살아. 가사 노동? 안 되지, 예니가 나한테 어떻게 하는데,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안......되나?
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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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 한 놈과 도서관 건물을 빙빙 돌며 이런 주제의 사고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맑스의 방식으로 노동력의 가치를 측정해보면 노동자의 임금이 과소평가되고 있고, 그 이유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가사노동이 무급으로 처리되기 때문이라고 syo가 주장했습니다. 친구는 처음에, 가사노동의 가치는 측량하기가 어렵다고 했지요. syo는 점근적 측정법을 제시했습니다. 현재 시장에서 상품화되어 있는 가사노동의 가격을 중심으로 어느 지점의 가격을 정한 다음, 나머지는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시장에 맡기면 되지 않겠냐고요. 그러자 친구는 갑작스런 임금 인상으로 인해 고생할 자본가들을 걱정하기 시작하더군요. 백수가 별 걱정을 다 하고 있긴 한데, 이건 그저 사고실험일 뿐이고, 어느 정도의 임금 상승은 불가피하겠으나 그것보다 지금 우리의 논점은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제공하는 노동력 안에 들어 있는 가사노동의 가치를 측정하여 그 비율만큼을 가사노동 제공자에게 환원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점이라고 짚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드디어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어요. 가족 간에 제공하는 노동이나 편의 같은 것들은 사랑과 유대의 산물인데, 거기에 가격을 매기면 마치 돈을 주고 감정을 사는 꼴이 되지 않느냐고요. 그렇지.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지. 조금만 더 캐면, 내가 밖에서 뼈 빠지게 노동해서 노동한 만큼 벌어온 돈인데, 그 노동을 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왜 의무적으로 나누어 주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나오게 생겼군.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런 태도는 점진적이라서 지켜보기에 재미가 있지요.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과 남성의 권력 차이는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적 축적과 무관하기 때문도 아니고, 문화적 기획이 영원히 존속하기 때문도 아니다. 특히 여성의 삶을 지배했던 엄격한 규칙들을 고려하면,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적 축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남녀간의 권력차는 특정 사회적 생산체제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남녀간의 권력차를 만들어 내는 사회적 생산체제란 노동자의 생산 및 재생산에 들어가는 무임노동의 이익을 보면서도 그것을 사회경제적 활동이나 자본축적의 원천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연자원 또는 개인적 봉사로 신비화하는 체제를 말한다. _ 21쪽
맑 선생님 사후에 가장 실컷 두드려 맞은 부위가 바로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이 아닐까요. 경제결정론자라는 비난을 넘어 지옥에서 온 경제지상주의자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맑 선생님의 절친 엥 작은 선생님께서 그게 아니라고 열심히 해명을 하였으나, 원래부터 한편이었던 열성팬들 말고는 아무도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하여튼, 그 개념은 여러 방식으로 변형되고 극복되어 ‘이데올로기’라는 꽃으로 피었습니다.
syo가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론. syo는 맑스보다 이데올로기님을 더 믿습니다.
이것은 syo의 지론입니다만,
모든 이즘은 이데올로기입니다. 자본-이즘은 물론, 다문화-이즘, 성평등-이즘, 심지어는 모두가 사랑하는 민주-이즘까지 모든 이즘은 결코 객관적이고 불편부당한 지식의 집합체 따위가 아닙니다. 모든 이즘은 권력을 지향하고, 쟁취한 권력을 지키기 위한 사상적 무기들을 내포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무기들을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휘두르길 좋아합니다. 당하는 이들이 무엇에 내 목이 달아나는지도 모르고 당할 수 있도록. 아기들의 허벅지에 주사를 놓고, 토실토실한 엉덩이 사이에 좌약을 넣고, 무르고 여린 귓속에 사상을 놓/넣는 거죠. 잘 자라렴, 이 사회(라고 명찰을 단 자본과 국가)를 빛낼 훌륭한 일꾼(일벌레)이 되어주렴.
안녕하세요, 음모론자 syo입니다. 으흐흐흐.
자본이 그랬다는 말이라면 syo는 100퍼센트 믿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직 모르는 뭔가가 실컷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본의 심성을 누구보다 먼저 꿰뚫어본 맑 선생님조차, 걔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제대로 짐작해내지 못했거든요. 난 자본 걔가 그냥 크게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만 만들 줄 알았지, 저렇게까지 집요하고 꼼꼼한 새끼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지 뭐야. 이러면서 수염을 벅벅 긁으셔도 소용 없으세요, 맑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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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우리가 『캘리번과 마녀』에서 배울 수 있는 정치적인 교훈은 사회·경제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 항상 열을 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그 사회적 관계 속에 짜여진 모순(자유에 대한 약속과 억압의 만연이라는 현실, 번영에 대한 약속과 빈곤의 만연이라는 현실)을 착취대상(여성, 식민지 신민,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들, 지구화로 인해 갈 곳 잃은 이민자들)의 “본성”을 폄하함으로써 정당화하거나 애매하게 흐려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_ 41쪽
앞으로 이 책에서 자본의 이런 “본성”을 깊이 있게 파헤칠 모양이지요. syo는 맑 선생님의 거친 수염을 움켜 쥐고 옆에 앉아 실비아 페데리치의 말을 들으려 합니다.
그 전에, 저 대목만으로 느낄 수 있는 바가 있어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 두어야겠습니다.
아마도 이 책은 여성과 여성의 노동을 구하는 책인 동시에, 여성과 여성의 노동을 구하는 방법을 익히는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전자는 이 책을 여성을 위한 책으로 만들지만, 후자는 이 책을 만인을 위한 책으로 만듭니다.
폄하하고, 배제하고, 억압하고, 빈곤을 선사하는 일이 자본의 본성이라면, 오늘 우리가 그 본성으로부터 여성을 구하고, 다음 날 식민지 신민과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을 구하고, 마침내 이민자까지 구하고 나도 싸움은 끝나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자본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것이고, 그들의 노동에 베일을 씌워 훔쳐 갈 것이니까요. 그때도 우리는 눈을 뜨고 있어야 합니다. 전투는 끝나도 전쟁은 끝나지 않고, 우리는 우리가 배제로부터 벗어나고 나서도 배제 속에 남아 있는 이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해요. 억압 속에 있는 지금이야말로 억압에 민감한 눈과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적기입니다. syo는 여성이 아니라서 여성에게 다른 모든 약자를 위해 나서 달라고 말할 자격도 의사도 없으며, 자본과의 싸움이 더 크고 선결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라는 생각 역시 눈곱만치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자본의 손아귀 아래에서 노동의 가치를 빼앗겨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프게 공감할 만한 어떤 마음가짐이 있을 거라고 믿으며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보태볼까 합니다.
내가 만드는 것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체제는 폭력적이고, 심지어 그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가 스스로를 더 크고 굳게 만들기 위해서일 때 체제는 비열하기까지 합니다. 체제가 내 노동을 배제하는 것도 입 다물고 참아줄 가치가 없는데, 배제됨으로써 체제에 복무하는 것은 분노할 가치가 있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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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초축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너무 진을 빼버렸다.....
본문 읽으면서 해야겠네요.
마지막으로 서론과 서문에서 뽑은 두 개의 ‘바로 이 문장’들을 남깁니다.
만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위 “여성성”이 생물학적 운명이라는 미명하에 노동력의 생산을 은폐하는 노동기능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여성의 역사”는 “계급의 역사”이다. _ 35쪽
여성의 신체가 재생산 활동의 장을 의미하는 기표로서 남성과 국가에 의해 전유되어 노동력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라면(이를 위해서는 성적인 규칙과 규제, 심미적 계율, 처벌 같은 것들이 따라온다), 신체는 그것을 부정하는 노동규율(work-discipline)의 종식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는 근원적 소위의 장이다. _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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