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북100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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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밝히는데, 8월의 목표는 책 100권 읽고 복숭아 100개 먹기였다. 그야말로 원대하다. 반환점을 돈 김에 집계해 보니, 힘든 것은 뜻밖에도 복숭아 쪽이다. 하루 3~4개의 복숭아를 먹는 일은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굉장하다. 큰 놈으로 골랐거든. 반면 책 100권은 무난하다. 얇은 놈으로 골랐거든.
맛있는 복숭아는 1년 중 딱 한 달, 오직 8월에만 먹을 수 있기에 100개는 교양 있는 애도인愛桃人의 기초필수적 할당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도 그렇다. 몇 년째 이상하게도 8월이면 100권을 읽을 수가 있었다. 1년 책 농사 이참에 다 짓는다. 더운 김에 미치고, 미친 김에 읽는 셈이다. 절제라는 건 익은 벼가 고갤 숙인다는 가을에나 하는 걸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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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에서 리뷰를 검색하다 보면 딱 한 권 읽고 그 책에 대한 리뷰를 남긴 후 표표히 어디론가 떠나버린 유저들의 고적한 서재를 발견하곤 한다. 누구일까 그들은. 단 한 편의 글을 위하여 번거로운 가입 과정을 거치고서는, 결국 단 한 편의 글을 수류탄처럼 던져 놓고 숨어버린 독서판의 게릴라. 그 수류탄은 불발인 경우가 많지만, 가끔, 가끔씩 기적 같은 적시타로 메마른 syo의 이해력에 단비를 뿌려놓고 떠난 이들도 있다. 그러면 하염없이 기다린다. 돌아와요 게릴라, 얼른 와요 신데렐라. 다시 한 번 수류탄을 들고 나타나줘요,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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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소세키를 감싸고, 소세키는 시대를 꿰뚫는다. (244)
_ 다니구치 지로 외, 《『도련님』의 시대 1》
저 문장이 또 습자지마냥 얇은 내 가슴에 불을 댕긴다. 이러구러 또다시 소세키 타임이다. 우리 집에 전집 있다. 그런데 전집이 우리 집에 있기 전에 난 벌써 저걸 다 읽었다. 그러나 막상 전집이 우리 집에 있는데도 어쩐지 당최 읽질 않는다. 있으니까 안 읽는다. 그게 왜 그런지, 최근 알게 되었다.
책은 빌리지 않으면 읽지 않게 된다. 장서가 이야기를 들은 바 없는가? 칠략이나 사고는 황제의 책인데 황제 중에 책을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되던가? 부잣집 서재에 책이 가득해도 서재에서 열심히 책을 읽는 자식이 몇 명이나 되던가? 그 밖에 할아버지 아버지 때 열심히 책을 모으고 소장해도 아들 손자에 이르러서는 팔거나 버리는 예가 흔하다. 비단 책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 물건이 다 그렇다. 남의 물건을 힘들게 빌려 와야 언제 달라고 할지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에 애착이 가는 것이다. 오늘은 나한테 있지만 내일은 돌려줘서 다시 볼 수 없어야 소중히 여기게 된다. 내 것이면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으니 오히려 모셔 놓고 정작 읽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게 되지 않던가.
_ 이인호, 『책벌레의 공부』
공감하시는지요? 지금 내 책꽂이에서는 최은영, 김금희, 김봉곤, 김연수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신나서 사놓고 왜 읽지를 않니. 살 때는 사기만 하면 세상 일 다 제쳐놓고 읽을 것처럼 곰살맞게 굴더니만, 책꽂이에 꽂히고 나면 어쩜 그렇게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볼 수가 있는 거니. 우리가 버젓이 꽂혀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도서관에서 외간 책 20권을 떡하니 빌려다 놓을 수가 있는 거니. 너란 놈은 도리라는 것을 도통 모르는 거니? 그런 거니? syo야, syo야, 답답구나, 말을 해 봐라 syo야.




내 표지를 똑바로 바라 봐. 야, 야, 눈 돌리지 말라고, 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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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군산 바로 옆에 새만금이라는 바다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있거나 말거나 한 곳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내 삶을 배웠다. 2003년 새만금 방조제 위에 몇 명의 활동가들이 올라가고 경찰들이 물대포를 발사한 날이 있었다. 삭발하고 농성하던 활동가들이 물대포를 맞고 바다에 빠졌다. 맨 처음으로 그 시퍼런 바다로 추락한 이는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남윤인순의 남편이자 환경운동연합을 이끌고 있는 서주원 총장이었다. 두 번째로 물에 빠진 건 여성 시민사회활동가였다. 그다음 해에 나는 그녀와 결혼했다. 삭발한 머리가 진짜로 아름다웠던 여인이었다.
어느 날 밤, 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열어.” 조그만 여행용 캐리어를 들고 막 집에서 나온 그녀가 지금 나의 아내다. 양가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서 우리는 동거부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녀에게 꼼짝도 못 한다. 지금의 삶까지, 나 스스로 결정한 게 그리 많지 않다. 삭발하고 새만금 개발에 반대농성을 벌이던 그녀는 아름다운 것을 넘어, 강하고 잘나보였다. 그리고 우리의 많은 것을 결정하였다.
_ 우석훈,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이 아저씨가 이렇게 능청능청 글을 잘 쓴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경제학 잘하는 88만원 아저씨인줄만 알았는데. 그는 웃기기 위해 절대 다른 데로 둘러 가지 않는다. 대신 필요한 순간에 자기 아내보다 먼저 서주원 총장을 바다로 밀어버릴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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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사진에 이끌려 구매한 시사IN을 통해, KTX 여승무원들의 파업투쟁이 결국 승리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네이버 뉴스를 전혀 안 본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 채널로는 알지 못했을까. 축하보다 감사에 가까운 마음을 승리자들에게 전하며, 나보다 더 절실히 그녀들의 승리를 기원했던 소설가의 글 한 덩어리를 옮긴다.
수영아.
난 그날 이전의 나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 그 일을 겪은 많은 동료들이 우리를 떠났고, 떠나고 있어. 네가 나보고 그냥 떠나버리라고 말했을 때 내가 너에게 했던 말 기억해?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말.
아니야. 사람은 그렇게 살아도 돼. 떠나도 돼. 피해도 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폭언을 듣고 조롱을 당하고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입지 않아도 돼. 너에게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우리 투쟁이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어. 몸은 고되고 피곤할지는 몰라도 정신만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어. 나는 겨우겨우 견뎌내고 있는 것 같아.
전단지를 나눠줄 때 화를 내는 사람도 있어. 회사와 관계된 사람도 아니고, 본인 이해관계가 걸린 일도 아닌데 얼굴을 보면서 쌍욕을 하는 거야. 너희가 공부를 잘했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느냐,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느냐. 그런 사람들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우릴 빤히 바라보는 시선, 그것만은 절대 익숙해지지가 않아.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고 내 손을 치고 가는 사람들을 견딜 수 있어. 그런데 내 앞에 서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모습을 뜯어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힘이 드네.
_ 최은영,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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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일이 버겁달까, 버성긴달까, 하여튼 그런 요즘이다. 많이 읽는 것은 자존심엔 독이다. 자주 그렇다. 자꾸 그렇다. 꾸역꾸역 활자를 낳긴 하는데, 중심이 텅 빈 달걀 같다. 똑똑 두드리면 질소가 문을 열고 마중 나오는 과자봉지 같다.
나는 대체 커서 뭐가 될까?
정답. 100복숭아 처먹은 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