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가슴을 후벼파는 서문이 있습니다. 이 책의 서문 역시 그러합니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들이 이 목적을 추구하는 몇가지 방법이 있다. 남자들이 특히 애용하는 방법은 성공해서 자신의 지위의 사회적 한계가 허용하는 한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모으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여성이 애용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몸을 가꾸고 치장을 하는 등 매력을 갖추는 것이다. -13p


H양은 뽀송뽀송하게 마무리한 피부, 섬세하게 끝을 올린 속눈썹, 날렵한 눈꼬리에 적어도 매일 30분씩 시간을 보냅니다. 그녀의 전 남자친구는 양주를 즐겨 마시고, 언젠가 섹시하게 미끄러지는 선을 가진 자동차를 갖는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 만족'과 '허영심'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둘은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혹은 타인의 눈에 그것이 있어보이기에 원하는 것인지의 모호한 욕망의 경계를 왔다갔다 합니다. 둘의 연애 역시 그 모호함으로 둘러 쌓여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에, 또한 상호간 유리한 거래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중략) '매력'은 보통 인기 있고 퍼스낼리티 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는 품질 좋고 멋진 포장을 의미한다. -15p


H양과 ㄷ군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서로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서로를 향해 두근거리는 마음이 곧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서로의 두근거림은 같은 속도로 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상대방에게서 느꼈던 그 두근거림은 나의 '매력'과 상대방의 '매력'이 어느 정도 호환가능한지에 대한 고도의 그리고 무의식적인 관찰 끝에 이루어진, 어떻게 말하면 너무나도 외부적인 기준에 의한 두근거림이었습니다. 나에게 어울리는 상품을 구매하듯 상대방을 선택한 것이지요.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에서 정신적인 교류라든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줄 만한 능력이 되는지에 대한 고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콩깍지의 위력은 대단해서, 둘은 서로의 외모라든가 분위기, 말투 등에 대한 호감으로 1년이 넘도록 알콩달콩한 연애를 해나가게 됩니다. 남들 다 하는 데이트도 하고, 남들이 하지 않은 데이트도 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하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남들과 다르다는 착각 속에서 사랑을 유지해갑니다. 자그마한 충치가 점점 커지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방치해가면서요. 그 충치란 '우리가 사실은 맞지 않는다'는 불안감이었습니다. 애초에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었고 서로에게서 기대하는 것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퍼스낼리티 시장에서는 마이너스로 간주될 것이 분명하기에 애써 감춰왔던 각자의 약점들은, 일단 거래가 성사된 후 상대방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딸려 오는 구박덩어리같은 존재로 서로가 기대했던 연애를 자꾸만 어그러뜨렸습니다. 


원래 애정결핍 증세가 조금 있고, 자존감이 매우 낮았던 H양은 자신이 꿈꿔왔던 연애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점점 커져만 가자 좌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 좌절은 참 위험한 단어입니다. 점차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정서적인 허탈함을 자신의 분신으로 채워 나가 결국 상대방과는 더욱 멀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거든요. 상대방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을 하다보니, 사실은 상대방이 자신의 거울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고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분노와 자책은 전형적인 H양의 행동 패턴이었습니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임상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피학대 음란증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사람, 말하자면 자신의 생명이고 산소인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도피한다. 인간이 복정하고 있는 자의 힘은,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팽창한다. 그는 모든 것이고 내가 그의 일부가 아닌 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 그러나 그는 독립하지는 못한다. 그는 통합성을 갖지 못한다. 그는 아직도 찬생하지 못한 자다. -36p



H양은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의존함으로써 대인간적 합일에 달성하려 했던 것이지요. 이런 어긋나고 잘못된 사랑은 H양과 ㄷ군 모두에게 상처만 줄 뿐이었습니다. 결국 둘은 헤어지기로 합니다. 물론 헤어지고 난 후에도 H양은 여전히 후회와 고통으로 눈물을 짜내야 했습니다. 그녀가 사랑이라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그 합일에 도달하는 위한 길이 아예 암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시간이 약이다'고 말합니다. 그녀도 무수히 그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시간은 영원히 흐르지 않을 것만 같았고, 그 시간을 흐르게 하는 것은 그녀의 전 남자친구뿐이라는 생각은 현실의 고통을 더욱더 확대시켰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고민하던 그녀의 손에 정말 운명처럼 닿은 책이 바로 이 「사랑의 기술」이었습니다. H양은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하지 않았었음을 깨달았고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적어도 기술을 계속해서 연마하다보면 그녀가 또다시 사랑의 잘못된 패턴으로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 후로, 「사랑의 기술」은 그녀의 연애 바이블이 되어 힘들 때마다 읽혀지게 되었습니다. 


조금 시간을 빠르게 돌려 볼까요. 그녀는 새로운 사랑을 만납니다. 여기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참 좋을텐데. 그녀는 또다시 핸드폰을 붙들고 울고 있습니다. 사랑의 기술을 체득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비슷한 실수와 비슷한 상처 뒤에 따라오는 것은 더 큰 좌절감입니다. H양은 결국, 또다시 잘못된 길로 빠지고 말 것이라면, 그 끝이 자신만의 감옥으로 향하는 길임이 반복된다면, 애초에 발걸음을 떼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사랑을 '주는 법'은 너무나도 어렵다고 그녀는 생각합니다. 받는 법만 알려고 했던 그녀이기에 어떻게 줘야할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녀가 되고 싶어했던「두도시 이야기」의 시드니 카턴이나, 「레미제라블」의 장발장과 같은 사람이 되기에는 자신의 그릇이 너무나 작고 영혼의 따스함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아버리고 혼자만 그 안에 머물기로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연애의 낭만, 서로의 시선의 끝이 만나 가슴 속이 솜사탕처럼 빵빵해지는 그 순간에 대한 기대도 버렸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몇 십년을 함께 해야하는 결혼은 더더욱 버겁기만 합니다. 


그래도 그녀를 위해 억지로라도 문을 살짝 열어두기로 합니다. 작은 빛이라도 그녀가 알아챌 수 있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합일' 그 충만함을 평생 느끼지 못한 채 죽어간다는 것은 정말 많이 아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그것은 동물이 아닌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인데, 하다못해 곰도 쑥과 마늘을 먹으면 인간이 될 수 있거늘 인간으로 태어난 H양이 인간도 되지 못하고 혼자만의 동굴 속에 웅크려 있는 것은 좀 모냥이 그렇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진정이 되면, 처음 헤어지고 그랬듯 다시금 「사랑의 기술」을 읽고 마음을 추스린 후 빛을 향해 걸어 나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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